[화산귀환/당보드림]암향화연(暗香花燕)
06. 위중
* 적폐 / 날조 / 캐해석 차이 있을 수 있습니다.
* 매화연 14화 이후의 시기입니다. 삼각관계 주의.
* 두 사람의 대화를 이어 볼 수 있습니다. (유료입장)
“의원님! 여기 긴급 환자!”
“옷을 벗기고 소독부터 합니다. 피가 많이 묻은 옷을 계속 입다간 굳으면서 피부에 들러붙어요. 면포는 충분한가요?”
피비린내가 난무하는 곳이 전장이라고 한다면 이곳 또한 전장이나 다름없다. 연홍 련의 발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팔에서부터 얼굴을 덮어가는 마화를 치료하는 연홍 련은 점혈을 짚은 손에 푸른 기운이 넘실댄다. 앉을 새도 없이 중상자의 치료를 거드는 그녀는 의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면포는 있지만 깨끗하진 않습니다, 홍 련님.”
“치료는 일각천금(一刻千金)입니다. 지혈을 우선하되, 탕약을 나눠 먹여 버틸 체력을 만들어주세요.”
일손을 거드는 여인들이 탕약과 면포를 가져오면 연홍과 문파의 의약당에 전달된다. 단마수와 내상에 대한 치료는 연홍에서, 각 문파의 의약당주는 금창약과 상처에 대한 봉합과 소독을 맡는다. 소독의 경우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여인들이 거들어 병소는 하나의 공장처럼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사…살려주세요, 의원님! 제발! 제 사질이..”
“긴급 환자 추가로 왔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어떤 곳인가. 의원은 한정적이고 환자는 끊임없이 나온다. 비명 같은 외침으로 동료를 데려오는 절박함. 피 냄새 사이에서 소독약과 뜸을 태우는 약초 냄새. 의료단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싸늘한 시체로 생명이 꺼져가기도 한다. 표정을 굳힌 호법들이 시체를 거둬 새로운 부상자로 채워진다.
열악한 환경 속에 모두가 제정신을 붙잡기 쉽지 않지만 부상자는 더더욱 불안하기 쉽다. 마교는 사람의 생존 욕구와 공포를 자극한다. 의식을 잃은 무사. 팔이 잘린 채 피를 흘리는 검수. 전쟁에 휘말려 등에 자상을 입은 노인. 탕약을 먹여 지혈을 하다가도 의식을 놓는 순간, 타들어 가는 촛불처럼 생명이 꺼져간다. 개인마다 가려줄 가림막도 부족한 곳에서, 죽음을 눈앞에서 마주하는 부상자에게 그 모습은 조금씩 공포로 다가왔다.
“씨…씨발,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 지금 사파라고 무시해?”
“무, 무사님 상처가 벌어지니 움직이시면....히익!”
“당장 뭐라도 해보라고! 우린 환자도 아니야? 의원이라는 새끼들이 사람을 가려서... 컥!”
불안감에 목소리를 높인 사파의 머리가 붙잡혀 바닥에 엎어진다. 방금 전까지 목이 졸리던 여인은 제 옆에 다가온 연홍 련의 뒷모습을 보고 동요한다. 가느다란 손에 핏줄을 세운 그녀는 손톱을 세워 사파의 머리를 짓누른다. 그녀는 일언반구도 없이 손에서 푸른 기운을 내보이며 치료하지만 내려다보는 시선은 절대 부드럽지 않았다.
“-원하는 데로 의원이 왔으니 주둥아리 닥치는 게 좋을 거야. 너 하나의 방해로 열 명이 목숨이, 백여 명이 왔다갔다 하고 있어. 잘만 입이 살아있는 주제에 엄살 부리지 마.”
엄동설한이라도 느껴질 만큼 싸늘한 목소리로 나직이 경고한 연홍 련은 시선으로 호법을 부른다. 치료를 끝낸 연홍 련이 손을 떼자 호법들이 사파의 입을 막아 연행한다. 병당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는 호법의 손에 이끌려 감옥에 수감된다. 치료는 끝냈으니 갇힌다 해도 식사도 주고 하니 일시적으로 격리하는 수단일 뿐이다. 소동을 잠재운 연홍 련은 옆에서 사색이 된 여인의 어깨를 잡는다.
“…괜찮은가요 소저? 잠깐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의원님. 놀란 거 뿐이에요.”
연홍 련은 다정히 웃으며 다독이고 있자 병사 밖으로 한 아이가 보인다. 경장에 보라색 술띠를 두른 흑갈색 머리의 아이는 연홍 련과 시선이 마주치자 포권하여 인사한다. 아이를 알아본 연홍 련은 밖으로 나와 아이에게 다가간다. 아이의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낮춰 묻는다.
“택아,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가주님은?”
연홍의 사동으로 보통은 언니와 함께하는 아이가 외부에 나와 있다니. 택이라 불린 아이는 연홍 련을 바라보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아이의 눈이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의아하던 연홍 련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불현듯 찾아온 불안에 제 팔을 보다 꽉 잡아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인다.
“소가주님께 전할 사항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
파앗!
연홍 련이 발이 지상에 닿는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경공으로 달렸다. 피비린내와 공기 중에 느껴지는 썩은 시체의 비린내를 빠르게 지나친다. 삼백 리가 넘게 떨어진 거리를 단숨에 찾아온 연홍 련의 등이 땀으로 흥건하다. 거칠게 숨을 고르느라 어깨가 들썩이는 그녀를 발견한 연홍의 가솔이 화들짝 놀란다.
“홍 련님...?! 여긴 어떻게…무슨 일 입니까?”
“하아…하아..하아..”
투명하게 하얀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식은 땀을 흘리고 있다. 제비꽃 눈동자가 일렁인 채 좌우를 살피는 연홍 련은 이내 한 곳을 발견한다. 걱정하던 가솔을 지나치는 그녀는 벽면에 기대있는 사내를 향해 다가간다. 사내 역시 팔짱을 끼며 벽면에 기대있다 연홍 련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킨다. 연홍 련은 사내를 올려보며 팔을 잡는다. 녹색 장포가 그녀의 손에서 구겨진다.
“……오라버니는.”
침착하게 묻는 목소리와 별개로 연홍 련의 눈은 당보에게 고정돼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향하고 있지만 초점이 맞지 않는다고 봐야 될 것이다. 공과 사는 구분 짓는 여인이 오라버니라 부르는 사람은 당보가 아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연홍 련을 내려보던 그는 대답 대신 시선을 굴려 안쪽을 향한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안쪽으로 들어선다.
벌컥.
열어낸 방 안으로 들어선 연홍 련은 그대로 멈춘다. 푸른 하늘이 비치는 창과 대비되게 어둡고 조용한 방이었다. 연홍 련은 문을 짚던 손을 내리고 차분히 들어간다. 창 옆에 햇살이 비쳐 침상까지 드리우고 있음에도 여전히 누워있는 청명에게 다가가 내려본다. 핏기 없는 얼굴과 가슴부터 허리까지 칭칭 감긴 붕대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다. 연홍 련은 숨소리도 죽이며 천천히 손을 얹어 맥을 짚는다.
“……숨은 붙여놨지만 의식은 기다려봐야 됩니다, 누님.”
연홍 련의 뒤로 다가온 당보는 어렵게 말을 꺼낸다.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내려보던 연홍 련은 옅게 떨리는 손 끝을 쥐어 잡아 느리게 묻는다.
“…설명해보거라.”
“무당의 분가에 마교가 나타났는데, 피난시키던 중 주교가 나타나 좀 애먹었습니다. 제게도 소식이 닿기 전에 형님이 나선 바람에... 혼자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무당? 화산도 아니고?”
머리를 긁적이며 미간을 찌푸리던 당보가 말을 멈춘다. 특정하게 높낮이가 있지 않다. 그런데도 분명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였지만 위화감이 들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혼자 나선 청명에게 분노했을거다. 생명을 구하는 것에 있어서 강경한 여인이니까. 자신만큼이나 의술에 관해선 숨만 붙어있으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는 명의. 세간에선 신의(神醫)라고까지 불리는 그녀가 지금, 무당을 도와 사람을 구해낸 것에 분노하고 있다.
‘한 걸음만. 다가가면 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섭나? 아니, 낯설다. 연홍 련의 뒤를 응시하던 당보가 유심히 지켜본다. 화가 난 그녀는 아무리 자신이라도 말리기 힘든데. 안색을 봤을 때 입마가 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얼마나 정적이 흘렀던가. 연홍 련은 뒤돌아 당보를 마주한다.
“-그 외 부상자가 있더냐.”
표정없는 얼굴로 무심히 묻는 목소리에 당보는 눈을 끔뻑인다. 조금 전 분노하던 것과 다르게 다시 온건한 태도였다. 그런데 뭐랄까. 아무리 혈육이라지만 지금은 너무 닮았다. 차갑다 못해 인간미라곤 느껴지지 않던 연홍 가주와. 속에서 올라오는 불길함에 당보는 최대한 침착히 대답한다.
“..일부 다친 자가 있지만 형님이 제압한 덕에 피해는 줄었습니다.”
당보의 말에 연홍 련의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간다. 천천히 내려오는 눈꺼풀이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 감긴 눈을 떴을 땐 닫혀있던 입도 함께 열렸다.
“…알았다, 가서 확인 해봐야겠구나.”
미련없이 방을 나가려 하자 당보가 연홍 련의 팔을 붙잡는다. 한 손에 잡히는 팔에 당보의 눈이 한껏 찌푸려진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랐었나. 팔다리가 가느다란 사람이란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쥔 건가 싶은 느낌은 아니었는데. 지금 그녀를 보냈다간 언제 터질지 모를 지진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당보는 보다 팔을 꾹 잡으며 제 안의 두려움을 누른다.
“누님이 나서지 않아도 이미 의원에게 갔을 겁니다, 여기 계시오.”
“책임자는 나야. 내가 확인하지 않으면..”
“누님만 의원입니까? 가지 말고 여기 있어. 그 안색으로 어딜 가!”
있는 힘을 다해 부른 외침에 연홍 련이 움찔인다. 처음 듣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정면을 보던 그녀가 제 옆에 당보를 올려본다. 애달픈 시선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 있는다고 청명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이 얼마나 바쁜데. 청명이 위중하다는 말에 바로 왔고 확인은 끝났다. 죽은 게 아니면 되었다. 정말이었다.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소가주이기 때문에, 귀주의 사람을 지키는 건 어디까지나 의무였다. 돌아온 자신이 보호해야 될 사람들.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자신의 힘이 되어주는 연홍에 대한 고마움은 있지만 권속에게 기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힘이 생기면 보다 내 사람들을 든든히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악단 언니들의 시체를 보기 전까진, 말이지.’
사지가 멀쩡히 있으면 그나마 괜찮았다. 어떨 땐 이 고깃덩어리가 자신이 알던 그녀가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기도 했다. 손도 쓰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마주할 때마다 그렇게 무력할 수가 없다. 다시 그 기분을 느끼게 한 그가 잔혹했다. 무력함에 눌리는 건 질렸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만 흐를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는데. 그런데, 왜 네가 더 괴롭다는 얼굴이야. 타들어 가던 눈이 순간 흔들린다.
“그러니... 날 위해서라도 여기 있어, 제발…”
답지않게 단단히 잡은 팔이 떨린다. 피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었지만 밀어낼 수 없었다. 당보의 품에 안겨진 연홍 련은 점차 찬물을 뒤집어 맞은 것처럼 피가 차가워졌다. 감싸 안긴 온기는 분명 저보다 커다란데 가여웠다. 청명에 대한 충격으로 당보에게 상처를 줬다. 남은 사람을 챙기는 것 또한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한 이면 당연한데. 이마를 기댄 연홍 련은 저보다 단단한 등을 감싸 안는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당보의 손이 연홍 련의 머리를 감싼다. 감싸낸 손 위로 길게 입을 맞춘 당보는 소중히 안아낸 그녀를 놓아준다. 아까보다 위태롭지 않았다. 땀을 흘리고 했으니 식으면서 체온이 내려갔을 거다. 우선은 이 창백한 안색부터 어떻게 해결하고 싶다. 장포를 벗어낸 당보는 연홍 련의 어깨에 덮어준다. 제게 맞춰진 장포를 연홍 련이 걸치니 이불이라도 덮은 것처럼 바닥에 길게 내려온다.
“여기서 쉬고 계시오, 련이 누님. 식사 가져올 테니까.”
연홍 련은 당보의 눈치를 살피다 작게 끄덕인다.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부드러이 웃는 당보는 연홍 련의 이마에 땀을 한번 쓸어주고 방을 나선다. 어깨에 걸쳐진 장포를 보던 연홍 련은 누워있는 청명에게 시선을 돌린다. 연홍 련은 차분히 걸어가 침상 옆에 기대있다. 벽에 닿는 공기가 차가워 장포 자락을 좀 더 끌어 쥐어 바닥에 쭈그려 앉는다. 오래 서 있다 앉아있으니 그제야 다리가 피로했다는 걸 알았다. 팔에 얼굴을 묻던 연홍 련은 고개를 기울여 청명을 빤히 본다.
‘일어날 거야. 아니 일어나겠지. 매화검존인데. 청명 오라버니니까. 아. 앉으니까 눈이 무겁다.’
그동안 계속 긴장을 세워서 그런가. 실수 한 번에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니 당연하면 당연했다. 피 냄새는 지긋지긋하게 싫지만 이젠 적응해야 했다. 제 손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치우고 싶지만 장포에서 나는 연초냄새를 맡으니 좀 나은 것도 같다. 연홍 련의 눈꺼풀이 감기면서 간신히 잡아둔 긴장이 스르륵 풀어진다. 한 시진이 지나자 씻고 돌아온 당보의 눈에 잠들어있는 둘을 발견한다. 그는 연홍 련 앞에 무릎을 꿇어 고개를 파묻은 그녀를 살핀다.
‘잠들었나. 침상은 형님이 쓰고 있으니 편한 곳에 옮겨줘야겠는데.’
당보는 팔을 뻗어 연홍 련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고개를 든 연홍 련이 당보의 손을 쳐낸다. 장포 자락이 어깨에 흘러내리며 형언한 제비꽃 눈동자가 경계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다 흠칫 몸을 움츠린다.
“아……너였구나.”
초점이 돌아온 눈이 곧 안심하면서 막아낸 팔을 거둬 제 팔을 감싸 잡는다. 얕게 잠들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경계한 적이 없었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연홍 련의 신경이 날카롭다. 그녀 역시 이 전쟁터에서 제정신을 붙잡기 쉽지 않은 모습이 유쾌하진 않다. 당보는 표정이 복잡해진다.
“..드세요, 뭐라도 먹어야죠.”
**
호록-
연홍 련은 입김을 불며 두 손으로 잡은 온기를 조금씩 마신다. 싱그럽고 약간은 쌉싸름한 국화차였다. 단맛이 느껴지는 게 꿀이 들어가 긴장이 녹아가는 느낌이다. 잔을 다탁에 내려놓은 연홍 련은 팔베개를 배어 옆에 앉아있는 당보를 본다.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네.”
침의 위로 예전에 같이 맞췄던 보라색 장포가 눈에 들어온다. 이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예전 생각에 작게 피식 웃으니 옆에서 같이 차를 마시는 당보가 심드렁히 대꾸한다.
“아끼는 건데 누님한테 빌려줘서 입은 겁니다. 냄새 나는 거 그만 덮고 씻고 오시죠.”
자기가 빌려줘 놓고는. 연홍 련은 뻔뻔한 태도에 작게 웃으니 당보가 소매에서 여벌 옷을 꺼내 건네준다. 밥도 충분히 먹었는데 제 옷도 챙겨와 줬네. 그의 세심함에 연홍 련은 당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세심하기도 해라. 빌린 옷은 그럼 세탁해서 돌려주마.”
그러려면 안에 있는 건 빼서 줘야겠지. 연홍 련은 어깨에 걸친 녹색 장포를 걷어 소매에 손을 비집는다. 자주 쓰는 추혼비부터 곰방대, 각종 약재와 침까지 나오는 와중에도 계속 손에 뭐가 잡힌다. 독은 아직 안 나왔는데 다 쓴 건가? 탈탈 털어내는 연홍 련의 손에서 비도가 잡혔다.
‘응?’
분명 추혼비는 다 꺼낸 거 같은데. 예비용인가? 연홍 련은 바닥에 떨어뜨린 물건을 세어본다. 자신이 들고있는 것까지 포함하면 열두 개의 비도가 있었다. 비도를 꺼내들기 무섭게 바닥에 떨어뜨린 물건들을 한 번에 회수한 당보는 제 소매에 넣어 팔짱을 낀다. 의아한 연홍 련은 눈을 깜박이다 손에 있는 비도를 가져간 당보를 힐긋 인다.
“뭐가 들어있을 줄 알고 그렇게 함부로 털어냅니까? 조심성 없게.”
“...방금 내가 들고 있던 거, 익숙한데.”
“피곤해서 잘못 보셨겠죠. 신경 쓸 거 없으니 얼른 갔다 오시오.”
연홍 련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건 알지만 물어보자니 더 알려주진 않을 거 같다. 말씨름할 체력도 없고. 한숨을 옅게 쉰 연홍 련은 녹색 장포와 여벌 옷을 챙겨 방을 나선다.
**
“머리는 제대로 말리는 게 좋을 텐데. 내공도 많은 애가.”
씻고 돌아온 연홍 련은 바닥에 펼쳐진 금침에 자리 잡아 당보의 머리카락을 만져본다. 항상 꽂던 비녀도 빼내고 길게 내려온 갈색 머리에 물기가 남아있다. 이부자리에 앉아있던 당보는 비도로 뭔가를 깎아내고 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자리 잡았다.
“누님같이 내공이 땅 파는 데로 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저도 좀 쉬어야죠.”
“그럼 내가 말려줄까?”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에서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내공을 불어 물기를 날리는 모습에 뒤돌아 제 뒤에 자리한 연홍 련을 본다. 아까보다 혈색이 돌아오고 했지만 환자 돌보느라 여념이 없던 여인이 이렇게 쉽게 내공을 쓰는걸 보니 어이가 없다. 아무리 퍼내도 남아있다 못해 다시 채워지는 우물처럼 바닥을 알 수가 없다. 운기조식도 없이 알아서 회복되는 내공이라니.
“진짜 봐도봐도 어이없네. 과하게 사기 체질 아닙니까? 그거?”
“쓸 수 있는데 쓰지 않는 건 아까운 짓이잖으냐. 난 내공보다 시간이 더 귀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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