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존 드림] 매화연(梅花燕)
유료

[화산귀환/검존드림] 매화연(梅花燕)

13. 협상

* 적폐 / 날조 / 캐해석 차이 있을 수 있습니다.

* 구화산 시점입니다. 유사인물 및 약간의 청문 드림 주의.

* 두 사람의 티키타카를 이어서 볼 수 있습니다. (유료입장)

“지금, 뭐라고 하셨소?”

날카로운 눈으로 발언한 이를 바라보는 노 검수의 목소리가 싸늘하다. 적개심까진 과해도 노골적인 불편함을 감추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곳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모인 회의실이다. 그만큼 발언과 논의는 되도록 진중히 이루어져야 되는 일 이것만. 그런 중요한 자리에 유독 어울리지 않게, 아니 과히 화려한 여인이 회의실의 한 자리에 앉아있다. 여인은 높게 틀어 올린 비녀와 화려한 궁장을 입고 자신을 보고 있는 노검수를 향해 여유롭게 미소 짓는다.

“화산의 장문인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부상자가 속출해 인력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지원이 어렵다면 패를 늘려야지요.”

나긋한 목소리가 달콤한 꽃향기가 날 것 처처럼 부드럽지만 눈빛만큼은 자신을 보는 노검수만큼이나 날카롭다. 담담하게 제안을 한 청문의 눈이 제 앞의 여인을 바라본다. 또 다른 이가 다소 언짢은 얼굴로 여인에게 말한다.

“…연홍 가주. 전쟁은 현실입니다. 마교의 여력이 아직 확실치도 않은 상황에, 어디에서 전력을 늘리겠단 것이오?”

“장문인들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각 문파의 소중한 제자들을 어찌 전장에 보내고 싶겠습니까? 생명은 저마다 귀중하니 무리도 아닙니다.”

“말을 조심하시오! 아무리 연홍이라도 어찌 그런 모욕을!”

발끈하는 남자의 발언에 또 다른 이가 손을 들어서 막아내자 남자의 입이 다물어진다. 숱한 시선이 연홍 화에게 화살처럼 쏠린다. 남자의 입을 막은 이, 소림의 방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연홍 가주. 패를 늘려야 된다 했소만. 방법이 있다는 말이오?”

“사람은 저마다의 역활이 있잖습니까? 화산이 선봉을 서고, 개방이 마교의 전력을 알아내고, 연홍은 부상자의 치료에 전념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사파를 맹에 데려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의실이 일순 조용해진다. 사파를 끌어들인다. 미쳤다고 들을 법한 제안이지만 발언한 이는 연홍의 가주다. 여러 문파와 세인을 구한 호인 가문에서 사파를 끌어들이자니. 부조화가 오던 그들 중 도관을 쓴 도사가 입을 연다.

“……연홍 가주의 총기와 현명함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건 과한 것 같군요.”

“전시상황에는 논의하는 시간도 아까운 법인거늘. 무당의 장문인이라면 제 부족한 식견을 채워주실 수 있겠지요?”

무당의 장문인이 입을 다문다. 여유롭게 웃고 있는 연홍 화의 시선이 온정이라곤 하나 없이 싸늘하다. 확실한 질책. 탁상 아래로 주먹을 꾹 쥐어낸다. 젊은 가주가 보이는 기세라기엔 목덜미가 서늘한 만큼 오싹한 한기에 자신이 말려든다니. 장문인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연홍 화는 청문을 한번 본다. 그녀가 하는 제안을 진지하게 들어보려는 태도에 연홍 화는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연홍 화의 시선은 곧 소림의 방장에게 향한다.

“…맹의 전력을 보호하고, 화산의 인력 지원을 할 수 있으며, 설령 잃어도 손해가 없는 전력. 이만한 조건을 갖춘 건 전 사파말고는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화산의 도사님들에 비하면 질 나쁜 폭력배들이지만 없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청문은 생각에 잠긴다. 청문의 제안은 선봉에 있는 화산의 손실이 크니 각 문에서 제자들을 차출해달라는 거였다. 제대로 논의가 될 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연홍 화가 끼어들면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승낙한다면 사파를 화살받이로 쓰겠다는 것에 일조하는 것이고, 거절한다면 그들은 대책을 내세워야 될 거다. 이미 그들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으니까.

‘볼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노련한 여인이다.’

맹주는 방장 대사이지만 지금 회의의 방향은 누가 봐도 제 앞에 앉아있는 연홍 화가 이끌고 있었다. 청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홍 화를 본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아님에도 이 회의에 자리하고 있는 유일한 의료원. 그녀의 존재는 입고 있는 궁장만큼이나 명확하고 화려했다. 푸른 옷을 입은 노검수가 불신스러운 눈으로 연홍 화에게 묻는다.

“하지만 연홍 가주, 사파가 맹에 협조하겠소? 그들끼리도 서로 믿지 못해 연합조차 못하는 이들이건만.”

“협조의 필요성에 대해선 찬성하시는 것이지요? 이견이 없다면 이 안건은 저희 연홍에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연홍 화에게 쏟아진 시선들이 흔들린다. 견제와 불편함을 숨기지 않던 눈들 중 몇몇은 이채를 띤다. 말없이 자리하던 장문인이 입을 연다.

“..연홍 가주의 대의를 의심한 게 부끄럽군요. 많은 이들의 동조를 얻기 위해 본보기를 나선다, 훌륭하십니다.”

순식간에 보이는 온전한 시선에 연홍 화는 화답하듯이 웃는다. 몇몇 사내들은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할 만큼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매끈한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연홍 화가 말한다.

“부끄러운 말씀이십니다. 역사 있는 방패막이가 연홍 세가라는 걸 여기 계신 고매한 분들이 모르시진 않을 텐데 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정적이 흐른다. 딱딱히 굳어진 연로한 수장들과 젊은 장문인들은 그들의 눈치를 살핀다. 청문은 당황함에 눈이 커다래진 채 연홍 화를 보고 있다. 안다면 수치를 모르고 좋아한 것이고, 모른다면 너희가 우매하다는 은밀한 조롱. 청문은 긴장감에 연홍 화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다.

살얼음같은 분위기를 만든 연홍 화만이 여유로운 태도로 주변을 둘러본다. 잘 그려낸 미소를 지으며 수장들을 한명씩 보던 그녀는 하하! 가볍게 웃는다. 맑은 웃음소리에 좌불안석인 장문인들의 시선이 모인다. 입가를 가려낸 연홍 화는 눈꼬리를 휘며 그들을 마주한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농담 한번 던졌는데 다들 얼굴이 너무 굳으셨군요. 말씀드렸다시피 사파에 대한 협상은 당연히 연홍의 대의입니다. 그러니 장문인들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연홍 화의 미소에 얼굴을 붉혔던 장문인은 목을 가다듬어 묻는다. 겸연쩍은 낯빛이었다.

“큼... 그게 무엇이오, 연홍 가주.”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연홍은 의술과 연단이 주인 세가입니다. 그러니 사파의 협상에 함께해 줄 문파가 필요하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만, 화산의 장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홍 화의 시선이 청문을 향한다. 청문은 자신을 향한 눈에 잠시 흠칫 이지만 곧 침착하게 대답한다.

“..가주님의 말씀대로, 맹으로서 협상을 해야 하는 자리이니 연홍만 보낼 순 없는 문제입니다. 문파가 동행한다면 안전은 물론이고 안건에 가진 의미도 충분히 전달될 테니 그게 맞겠지요. 개방의 도움도 필요하겠군요.”

청문의 대답에 연홍 화는 방장을 향해 공손히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인다. 조금 전까지 모두를 도발한 여인답지 않은 정중한 태도였다.

“맹주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협상행을 함께 할 문파를 연홍에서 정식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조롱을 당했어도 연홍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림만큼이나 오래된 세가가 눈앞의 연홍이니까. 이들은 유일하게 의술과 연단으로 대의를 증명해 온 세가다. 같은 칼을 잡은 무인이어도 그 방향성에 대해선 모두가 인정하는 호인. 건방지지만 제게는 예의를 갖추는 여인이다. 방장은 보다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한다.

“아미타불. 강호를 위하고 희생을 줄이기 위한 당연한 요청이거늘.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연홍 화의 미소가 진해진다. 방장에게 고개를 숙인 연홍 화는 허리를 바로 세워 고개를 돌린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연홍은 화산에 협조를 구하고 싶습니다만, 받아주시겠습니까?”

고아한 미소와 함께 청문을 향한 손에 그는 미미하게 얼굴이 굳는다. 사파에 관한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연홍 화가 이 판을 깔아냈다는 느낌을 지금 확신했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선봉에 선 화산은 잠시나마 빠질 수 있다. 협상도 쉬운 길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자들이 부상을 당하고도 마교와의 싸움에 출정하는 것보다 나은 선택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청문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어 내민 손을 마주 잡는다.

“..물론입니다. 화산은, 연홍과 함께 하겠습니다.”

**

연홍 련은 의자에 앉아 탁상 너머의 사파를 마주한다. 삐딱하게 앉아 팔걸이에 턱을 괴어 흥미를 보이는 눈에 귀기가 보인다. 의자 너머로 보이는 호피 가죽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사내지만 기감만큼은 이제껏 봐 온 사파들 보다 짙었다. 사파를 마주하는 게 이제는 익숙해진 연홍 련은 부드럽게 웃는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림맹의 대표로 여러분들을 모시기 위해 저희가 먼저 찾아뵙는 게 도리에 맞다 생각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정파치고는 예의를 안다만, 맹에서 사파를?”

“마교의 발호로 인해 여러분들의 피해도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피할 수 있는 처마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파의 협조를 받기로 한 이상 어지간한 사파로선 안됐었다. 녹립칠십이채. 녹림의 수장인 녹림왕의 협조는 받아야 이 전쟁에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게 맹의 결론이었다. 개방의 정보로는 마교의 무리가 십만대산에 칩거하면서 그들도 발을 들이지 못한다고 들었다. 산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들인 만큼 영역을 침범당한다는 건 그들에게도 썩 불쾌한 일이니까. 녹림왕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연홍 련을 본다.

“그게 너희 맹이다?”

“어디까지나 제안입니다. 적의 적은 동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매화검존을 대동해놓고 제안이라 하니 무서워서 거절할 수 있어야지.”

녹림왕은 연홍 련의 옆에 서 있는 청명을 흘긴다. 매화검존의 성격이 더럽다는 건 사파 내에서도 유명한 얘기였다. 저 사신과도 같은 사내와 동행한 여인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으나 정파 특유의 기운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서늘한 표정으로 녹림왕을 노려보는 청명과 달리 연홍 련은 부드러이 웃으며 묻는다.

“그럼 받아들이는 걸로 알면 될까요?”

연홍 련의 말에 녹림왕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본다. 한 떨기 꽃처럼 청초한 미인이지만 강호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이만한 미인이라면 얼굴을 모르기도 쉽지 않은데. 무림맹의 대표라면 적어도 매화검존 만큼의 이름있는 인물이 올 줄 알았건만. 이 여자는 뭐지? 생각에 잠기던 녹림왕의 눈이 순간 번득인다.

“…아, 기억났다. 예전에 악단에 있던 계집 아닌가? 월하가인 서월.”

악단이 해체된지도, 그 이름을 들은 지도 오래되었을텐데. 그 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자신은 서월로, 사파에서 기억되고 있다는 게 기분이 묘하다. 연홍 련은 조금 느리게 대답한다.

“...과거에 쓰던 예명이었지요.”

녹림왕은 의문이 해소된 것도 잠시 흥미로움을 감추지않고 히죽 웃는다.

“검을 보니까 기억이 나네. 무희가 어째서 무림맹의 대표로 온건지 무척 궁금하다만, 알려줄 생각이 없어보이는군.”

“질문에 답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동료가 되면 그땐 알려주는건가? 등은 맡길 수 있어야지.”

“전 전투원으로 함께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매화검존이 계실 테니까요.”

연홍 련은 웃으며 자연스레 손을 뻗어 청명을 소개해준다. 녹림왕은 허, 하며 짧게 헛웃음을 내뱉는다. 이립도 안 돼 보이는 여인이 능숙히 말을 돌린다. 세월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게 젊은 여인이지만 보기보다 호락호락 하지않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녹림왕의 입이 삐뚜름하게 미소 짓는다.

“좋아, 협력하지. 대신 조건이 있다.”

“사파새끼가 어딜 조건이야.”

청명이 검을 잡고 나서자 연홍 련은 청명의 손목을 잡는다. 지금은 그가 나설 때가 아니었다. 협상을 위해 온 자리이니 청명 말고도 다른 문파의 몇몇 사람들도 같이 왔지만 그가 옆에 있으니 다들 기피하는 분위기였지. 그 때문에 이 협상자리도 청명과 나, 그리고 녹림왕 셋이 전부였다. 청명을 제지한 연홍 련은 담담히 녹림왕을 본다.

“…말씀하시지요.”

“난 그대같이 아리따운 대표는 제법 마음에 든다만. 사파는 사파의 규칙이 있다. 내가 협력한다 해도 부하가 말을 듣는 건 다른 문제라, 약해빠진 놈의 말은 듣지 않지. 그러니... 그대가 내가 고른 부하를 이긴다면 순순히 들어주지. 다른 놈들의 방해 없이 일대일로. 이게 싫으면 그대가 내 여인이 되는 방법도 있지. 어때?”

청명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으나 연홍 련은 손목을 잡은 손을 보다 꾹 잡는다. 청명의 시선이 연홍 련을 보자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녹림왕을 보고 있다.

“한가지 여쭐게 있습니다만, 승리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목숨이지. 항복을 받아내려는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접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애들은 여인이라고 적당히 봐주는 놈들은 없으니까.”

어느 쪽을 받아들이든 녹림왕은 아쉬울 게 없다. 제 옆에 두기에 보기 좋은 미인이니 시간 들여 알아가도 좋을 것이다. 저 가녀린 팔로 부하를 이긴다면 그것대로 믿을만한 인재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녹림왕의 시선이 연홍 련을 관찰한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나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골라주시지요. 어느 분을 상대하면 되겠습니까?”

녹림왕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편한 길을 제시해줬건만 검을 가진 게 무인은 무인이라.

“머리는 나쁘지 않아 보였건만,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군. 그럼 자리를 옮기지.”

**

슥. 스윽. 칼을 손질하는 단정한 손가락이 면포로 날을 닦아낸다. 칼에 비치는 얼굴을 내려보던 제비꽃 눈동자가 무심하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칼집에 담아 넣는 그녀는 옷고름에 걸어 넣는다. 정갈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정말, 괜찮은 것이오?”

“무얼 말입니까? 협상행은 이미 끝난 얘기입니다, 청문진인.”

청문 앞에 놓인 튀긴 땅콩과 술잔이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인다. 협상행은 결정되었다. 그걸 위해 청명과 연홍의 소가주를 보내기로 결정한 건 그들이었다. 연홍에서 안건을 맡기로 한 만큼 소가주가 나서는 게 중요성을 상징할 수 있다는 건 알겠다. 그녀의 호위로 청명을 보내는 건 과하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연홍 화의 말에 그들은 닫힌 조개처럼 입이 다물어졌다.

-검존만큼 확실한 보증이 어디 있습니까? 반항한다면 힘으로 눌러야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사람이 정인 사이라는 걸 청문과 연홍 화는 알고 있다. 사적인 이유로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 않은 그녀의 선택이 의외였다. 다른 사람과 함께 보냈다지만 청명이 소가주와 가는 이상, 이 협상행은 두 사람의 일이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실례지만 나머지는 체면을 위해 같이 보내진 들러리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눈앞의 여인도 모르지 않을 텐데. 

유심히 연홍 화를 보아도 표정만으론 무슨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기가 어렵다. 회의실에선 고아하게 웃던 모습과 다르게 처소에서의 그녀는 건조할 정도로 표정이 없다. 청문은 진중한 얼굴로 연홍 화에게 묻는다.

“알고 있습니다만... 일부러 둘을 보낸 거 아니오?”

“모두의 의견을 모아 보냈지요. 그들이 돌아오면 바빠질 테니 지금은 쉬어두시지요. 술은 안 즐기십니까?”

연홍 화의 언급에 청문은 옅게 숨을 내쉰다. 전시상황에서 술이 웬 말이냐 싶지만 줄곧 긴장해오다 보니 침이 삼켜졌다. 이것 또한 연홍 화의 배려겠지.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반영해 차선책을 내놓은 사람이지 않은가. 심지어 맹이 생기기 전, 방장대사에게 맹에 대한 의견을 대신 내달라고 한 것도 그녀였다. 이유를 묻자 연홍 화가 대답했다.

-제 말을 들어줄 수 있는 가장 적임자가 장문인이기 때문입니다.

회의를 할 때마다 알 수 있다. 그들은 누구도 연홍 화를 살갑게 보지 않는다. 수장들의 자리에 여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그들의 눈엔 아니꼬운 것이니까. 그녀의 의견 아래 모두가 모이고, 세가의 정당한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가주에 대한 존칭도 생략하면서 권위적으로 그녀를 밀어붙이는 게 청문의 눈엔 노골적으로 보였다.

-청문진인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도록 연홍에서 최선을 다하지요.

그녀의 말대로 연홍 화는 자신을 최대한 예우하고 있다. 청문은 제 앞에 놓아진 술을 쭉 비운다. 연홍 화는 비기 무섭게 청문에게 술을 따라준다. 청문은 곤란한 표정으로 연홍 화를 본다.

“…가주님. 준비해 주신 성의는 감사하지만, 전시 상황에서 술은 조금..”

“고생하고 있는 영웅에겐 술이 곧 포상이지 않습니까? 위기일수록 여유는 필요한 법입니다, 청문진인.”

연홍 화의 말에 청문은 눈을 끔뻑인다. 부드러이 미소 짓는 연홍 화의 표정이 순간 그녀의 동생과 닮았다. 자매인 만큼 이목구비는 닮은 사람이라도 분위기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 이런 분위기도 보일 수 있던가. 간질이는 느낌에 청문은 목을 가다듬는다.

“큼... 아직은 저 역시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편히 말씀해주시지요. 모두의 의견을 모았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결정한 건 가주님이잖습니까.”

“연홍에서 맡기로 했으니 당연하지요. 제가 직접 가도 됐지만 매화검존께서 불편하실 테니까요.”

청문의 잔 앞으로 연홍 화 역시 술을 따르려니 청문이 먼저 술병을 내민다. 연홍 화는 웃으며 청문이 따라준 술을 받아든다.

“저 대신 소가주를 보냈지만 잘하겠죠. 그 검존을 다룰 수 있는 아이잖습니까. 청문진인과 더불어서 말이죠.”

재밌다는 듯이 미소 짓는 연홍 화가 청문을 보자 그는 입을 꿈찔인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청명에 관해 집어 얘기하자니 부정하기가 어렵다. 청문은 수염을 매만지며 머쓱하게 말한다.

“…정인 사이를 다룬다고 얘기하기엔 어폐가 그렇지만 맞는 말씀입니다. 전 소가주께선 사파에 대한 기억이 안 좋으니 같이 보내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청명에게 듣기론 아이를 구하려다 연홍 련이 납치되었다고 들었다. 밖에서 생활할 때도 위험한 일을 자처한 여인이 이쯤이면 사파에 대한 악연이지 않을까 싶었다. 청문의 염려에 술을 마시던 연홍 화가 고개를 갸웃댄다. 청문은 연홍 화의 표정에서 대단히 이상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주 본 사이는 아녔다. 그걸 감안해도 보기 드문 표정이었다. 청문은 조심스럽게 묻는다.

“………제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까?”

“뭔가 오해하신 거 같습니다만, 청문진인. 그 애는 의원이자 소가주입니다.”

청문은 말을 멈춘다. 회의실에서 그녀가 말했다. 연홍은 역사 있는 방패막이라고. 그렇지만 소가주의 무위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의 얼굴에 비소가 지어진다. 연홍 화가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사파와 몇 번 악연이 있다고 제 동생이 충격받았을 거라 생각하셨다면 대단히 재밌군요. 그럴 리가요. 그 애는 연홍에서 ‘만들어진’ 귀재입니다. 다시 말해,”

연홍 화의 몸이 청문에게 좀 더 기울어진다. 청문은 가까워진 거리에 뒤로 주춤거리지만 연홍 화는 개의치않고 청문에게 다가가 손등에 손을 올린다. 찰랑이는 귀걸이와 함께 궁장 아래로 살짝 드러나진 가느다란 쇄골에 청문은 어쩔 줄 몰라 고개를 돌린다. 호선을 그린 붉은 입술이 내뱉는 목소리가 스산하다.

“-가장 괴물 같은 방패막이라는 거지요. 저를 포함한 연홍의 누구보다도.”

**

쿨럭!

입에서 선혈한 피가 쏟아진다. 사파는 혼란스러웠다. 합을 보기도 전에 검수가 눈앞에 가까워지더니 벽에 부딪치면서 머리가 어질거린다. 지금 내가 여인의 팔꿈치에 맞아 날아간 게 맞는 건가? 온몸이 뒤틀리는 감각과 지금의 상황에 대한 판단이 제대로 서기도 전에 번쩍이는 칼날이 보인다. 사파의 눈은 곧 커진다. 일평생 본 적이 없는 각도에서 검수를 마주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목이 잘린 자신의 몸과 제 피를 듬뿍 맞은 자색 눈동자가 유독 형언하게 강렬하다.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걸 마지막으로 사파의 머리가 통, 통 굴러떨어져 간다.

연홍 련은 자신보다 세 배는 커 보이는 사파의 몸뚱이 아래 검을 쥐고 있다. 검 끝에 묻은 피가 바닥에 똑똑 떨어진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한 쌍의 검 중 하나만 뽑아낸 그녀는 숨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목이 잘린 사파의 몸을 응시하고 있다. 주변을 빙 둘러 숨을 죽인 이들이 하나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어..?”

“방금... 계집이…죽인거야... 이렇게 빨리..?”

경악에 겨운 소리가 웅성거린다. 팔짱을 끼며 지켜보던 청명 역시 놀란 눈으로 연홍 련에게 시선이 고정돼있다. 연홍 련은 무심히 시선을 옮기다 주변을 훑어 녹림왕을 마주한다.

“…아무래도 믿지 못하는 거 같은데, 어찌할까요.”

고개를 기울인 연홍 련은 바닥에 떨어진 사파의 머리채를 잡아든다. 크지 않지만 선명한 목소리로 주변을 본다.

“목을 베어 증명했다 생각하는데. 더 상대하실 건가요?”

연홍 련의 말에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잠잠해진다. 녹림왕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 실실 웃음짓는다. 녹림에서 내보낸 녀석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녹립십걸 중의 하나로 무식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몸이 날렵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과 무기를 견주기도 전에 가뿐하게 일격필살을 보이다니. 잘못하면 저 가녀린 허리나 목이 베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을 텐데. 과감히 다가가 녀석을 내공으로 날려 거침없이 목을 베었다. 사람의 급소를 파악하고 있는 간결한 움직임.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압승이었다.

“순순히 받아들일 때부터 무슨 생각이지 싶었는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군. 이런 실력자를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건 놀라운데.”

녹림왕이 한 걸음 다가가자 연홍 련의 앞에 커다란 등이 막아선다. 청명이 앞장서 연홍 련을 뒤로 숨긴다.

“더 다가오면 그 혀부터 도려주지.”

“매화검존은 입이 거칠군. 그대가 별호가 없는 거면 지어줘도 문제없겠어. 아름다운 접혈귀(蝶血鬼-피를 부르는 나비)여.”

연홍 련은 쥐어 잡은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사파가 쓰레기라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시체를 욕보일 생각은 없었다. 지켜보고 있는 많은 눈들 사이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되는 자리였기 때문에 그를 죽인 것이고, 죽이고도 동요하는 시선에 한 번 더 각인시켜줬을 뿐이다. 마교를 처음 베어냈을 때보단 덜하지만 피를 뒤집어쓰는 건 언제 겪어도 찝찝하다.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은 연홍 련이 청명의 옆에 다가와 그의 팔을 잡는다.

“…그럼 협상은 성립되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추례를 보였군요.”

“추례라니, 오히려..”

캉!

콰아아앙!

청명이 검집째 옆으로 겨누니 거대한 파공음이 터졌다. 소리가 난 방향을 보니 멀찍이 사람 하나가 날아가 있다. 연홍 련은 눈을 끔뻑여 발에 부딪치는 물건을 내려보니 바닥에 떨어진 칼을 본다. 암습? 청명이 막지 않았다면 제 허리에 박혔을지 모를 장도였다. 설명을 위해 녹림왕을 보자 날아간 사람을 힐긋 이는 그는 어깨를 으쓱인다.

“과히 흥분시켜서 말이지. 접혈귀여. 그대랑 겨뤄보고 싶은 이들은 알아서 제압해줘야겠네. 나머지는 내가 얘기해둘 테니까.”

연홍 련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녹림왕을 본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협상은 성립되었다. 자신은 청명을 데리고 이 곳을 나와 맹에 보고하면 깔끔하게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도 호승심을 못 이겨 제게 달려드는 이들이 나왔는데. 막아야 될 인간이 지금 자신보고 알아서 해결하라는 건가. 이 인간이? 

유유히 떠나가는 녹림왕을 보던 연홍 련은 비녀를 던질까 잠시 고민하다 한숨을 내쉰다. 사파랑 엮이면 이리 피곤한 일투성인지. 자신과 청명을 중심으로 무기를 드는 이들이 몇몇 보인다. 한쪽이 발을 떼면 곧바로 달려들 기세였다. 손수건을 담아 넣는 연홍 련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다.

“..검존,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가주세요. 해결하고 갈게요.”

“혼자서 한다고?”

청명은 눈썹을 꿈틀여 연홍 련을 삐딱하게 본다. 연홍 련은 주변을 살펴본다. 청명이 도와주면 보다 빨리 끝나겠지만 그는 전방에서 마교를 상대하며 입은 부상이 남은 상태다. 이들이 노리는 건 자신이기도 하고. 맹에 들어올 전력이니 이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해서 일행과 합류해야 했다. 귀찮은 일은 빨리 해치우고 벗어나는 게 낫다.

“제게 오는 승부니 제가 해결해야죠. 검존이 여기서 힘 뺄 필요는..”

“지금은 네 검이야, 말만 해.”

연홍 련은 눈을 깜박이며 청명을 올려본다. 협상행이 결정됐을 때부터 청명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걸 네가 왜 가야 되냐는 불만을 보였지만 순순히 따라왔고. 녹채에 도착할 때까지도 심기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지만 이동하려 하면 자연스럽게 옆에서 발걸음을 맞췄다. 중간에 욱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얌전히 지켜봐 주기도 했고. 어쩐 일인가 싶더니 그게 자신을 존중해서 한 행동이었나. 천하의 매화검존이 제 지시를 기다리는 게 이상하지 않나 싶지만 지금 협상행의 대표는 자신이었다. 마음을 잡은 연홍 련은 고개를 들어 청명을 향해 은은히 웃는다.

“..알았어요. 그럼 호위 부탁할게요, 검존. 뚫고 일행과 합류합니다.”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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