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2차창작 / 구화산 연령반전if] 그저, 한낱, 인간. - 01

구화산 청문 청명 연령반전 if

***

“오늘부터 네 이름은 청문이다.”

 

대화산파 십이 대 대제자 백오의 엄숙한 목소리에, 이제 열다섯은 되었을까 싶은 소년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가의 이름을 버리고 도호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까 싶은 어린 나이였으나, 소년의 얼굴엔 굳은 각오가 서려있었다.

 

“대화산파 십삼 대 제자로서, 그리고 청자배의 대사형으로써 사문의 어른들을 공경하고 끊임없이 정진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문과 무를 구분하지 않고 스스로를 갈고닦아, 화산의 뜻을 중원에 널리 알리고 매화검수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이가 되겠습니다.”

“그래, 좋구나. 이리 기특한 제자를 받게 되었으니, 이 또한 나의 홍복이로다.”

 

또랑또랑하게 대답하는 청문을 보며 흐뭇하게 빙긋 웃던 백오는, 슬쩍 옆으로 시선을 옮기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예?”

“실은, 너보다 일찍 화산에 든 아이가 있단다.”

 

난생 처음 듣는 그 말에 청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오는 차마 그런 청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살짝 열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오래전 화산의 산문 앞에 버려진 아이를 우리가 거두어 길렀는데……. 그 아이가 네 첫 사제가 될 것이다.”

“사제 말입니까?”

 

청문에겐 나름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화산이 대대적으로 십삼 대 제자를 받아들인다는 공표를 해놓았으니 중원 곳곳에서 뛰어난 인재가 물밀 듯이 몰려올 테고, 그들은 모두 청문의 사제가 되긴 할 것이다.

청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입문한 첫날부터 사제를 맞이하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 사정이 있어 아직 정식으로 입문을 시키지 않고 있었다. 지금쯤 장문인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고 있을 터이니, 이제부터 네가 그 녀석의 사형이 되는 것이지.”

“그, 그렇습니까.”

 

청문의 앳된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긴장과 기대가 반반 뒤섞인 어린 제자의 얼굴에, 백오는 끄응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곧 만나게 될 테지만……. 으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예?”

“그 아이는 성정이 무척……. 포악하단다.”

 

백오의 진지한 표정에 청문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물론 사람의 성격이야 언제나 제각각이고, 도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온화하거나 고매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청문의 사제라 함은 그 역시 고작 삼대제자라는 뜻이 아닌가? 어린아이란 본래 자신의 성질과 욕구를 참아내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두고 백오의 표정이 지나치게 굳어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리고 굳이 사람의 성정을 설명하며 ‘포악’이라는 단어를 고른 것은 더더욱 이상하다.

포악이라니. 마치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설명하는 듯한 단어가 아닌가.

 

“무척……. 그래, 무척.”

“사, 사제의 성정이 어떻기에 그러십니까?”

“그건…….”

 

잠시 말을 고르듯 입을 다물었던 백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짧은 순간 오 년은 폭삭 늙어버린 듯한 그 모습에 청문이 당황하는 사이, 백오는 백자배의 대사형답게 순식간에 자신을 추스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백 마디 말로 듣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보는…, 아니, 직접 겪는 것이 더 빠르겠지. 나와 함께 네 사제를 만나러 가보겠느냐?”

“예, 스승님!”

 

조금 혼란스럽기는 했으나, 청문은 힘차게 대답하며 백오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백오의 말대로라면 그의 사제는 부모로부터 버려져 화산에서 자란 아이라는 뜻이다.

화산은 도문이니만큼 정성을 다해 아이를 키웠을 테지만, 그래도 가족의 정이 고프긴 할 터.

청문은 자신의 첫 번째 사제에게, 사형은 물론이고 진짜 가족 같은 형제가 되어 주리라 다짐했다.

 

“오, 대사형. 이쪽이 이번에 새로 받은 제자입니까?”

“그래.”

“부럽습니다, 대사형. 저도 빨리 귀여운 제자를 들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백오의 뒤를 쪼르르 따라가던 청문이 황급히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무인으로서는 당연한 인사법이었지만, 막 사가를 떠나온 소년은 아직 그 동작이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숙을 뵙습니다.”

“그래, 그래. 참으로 의젓하구나.”

 

어린 사질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사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청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보다 어딜 가시는 중입니까, 대사형?”

“…청명이한테.”

“…예?”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던 백오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인사는 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인사는.”

“어, 그……. 그렇긴 한데. 굳이 벌써…?”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품이 넘치던 두 도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문에게까지 까닭 모를 불안감이 전해질 만큼.

 

“아무튼 그런 이유로 장문인의 처소로 가는 길이다.”

“그렇습니까.”

“어때, 너도 같이 가겠느냐?”

“아, 전 사숙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 이만.”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혹시나 자신을 붙잡기라도 할까, 경공까지 전개하며 도망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다급해보였다.

 

“끄응……. 이만 가자꾸나.”

“예, 스승님.”

 

저걸 사제라고, 하며 투덜거리는 백오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청문은 눈치껏 귀를 닫아버렸다.

 

화산은 구파일방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명문거파였으나, 그런 화산파의 장문인이 머무는 처소는 무척이나 수수했다.

무늬 하나 새겨 넣지 않은 기둥은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부드럽게 닳았고, 기와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꽃잎과 나뭇잎 몇 장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화려하진 않으나 도가의 은은한 향취가 느껴지는 전각을 보며 청문이 속으로 감탄하려는 찰나였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장문인 처소의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런 큰소리에 움찔 놀란 청문은, 이내 황당함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청명이 이놈! 문은 발이 아니라 손으로 여는 것이라고 내 몇 번을 말하더냐!”

“아, 진짜 잔소리는! 장문인도 뭐라고 안 하시는데 사숙이 뭐요! 뭐!”

“그건 뭐라고 안 하시는 게 아니라 그냥 포기하신 거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조용한 도관을 뒤흔들었다.

얼굴 가득 짜증과 심술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한 청년이, 마치 건달 같은 걸음걸이로 장문인전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저놈은 언제 사람이 될꼬…….”

 

청문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청년.

가슴팍에 매화가 수놓인 도복을 입고 있긴 했으나, 도관은 어디 팔아먹었는지 긴 머리를 대충 하나로 올려 묶은 모양새가 무척 불량해보였다.

훤칠하게 큰 키와 치켜 올라간 검미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주눅 들게 할 정도로 사납고 위압적이었다.

 

“청문아.”

“예, 예!”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청문이 황급히 대답했다. 백오는 그런 청문을 돌아보며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백오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를 향해 웃어주었지만……. 지금 짓는 웃음에서 읽히는 것은 명백한 ‘체념’이다.

 

“네 첫 번째 사제, 청명이란다.”

“…예?”

“네 사제.”

“…예?”

 

청문은 황망한 눈으로 청명을 올려다보았다.

사제라고 하기에 막연히 제 또래나, 저보다 어린아이일 거라 짐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고 멋대로 지레짐작해버린 청문의 잘못이긴 했으나…….

 

“…이 분이요?”

 

청문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가 얼이 빠져있는 사이 두 사람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청명은, 청문을 빤히 쳐다보다가 왈칵 얼굴을 구겼다.

 

“아, 그러니까 이놈 때문에 내가 이십 년 넘게 입문도 못하고 밥만 축내는 군식구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청명아.”

“내가 먹은 화산밥이 얼만데, 오늘 막 화산에 처음 오른 이 꼬맹이를 앞으로 사형으로 모셔야 한다?”

“청명아!”

 

백오가 왈칵 언성을 높이자 청명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청문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서늘하기 그지없었지만.

 

“너도 이제 문적에 이름을 올린 대화산파의 십삼 대 제자다! 지금까지는 네가 아무리 방종하게 군들 적당히 넘겨줄 수 있었지만, 이제부턴 아니다. 지금 네 품행이 진정 사형을 대하는 사제로서의 태도라 생각하느냐!”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백오의 뒤에 서있던 청문마저도 움찔할 만큼 무서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청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시큰둥한 얼굴로, 짝다리를 짚고 선 채 백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요?”

“뭐……?”

“적당히 보아 넘기지 않으시면, 뭐 어쩌시게요? 회초리라도 때리시게?”

“청명아!”

 

청명의 그 말에 청문은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안하무인이든, 적반하장이든. 그 어떤 실례에도 정도는 있는 법이다.

명문정파의 제자는 고사하고, 저 어둑한 뒷골목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왈패들조차 어른이 큰 소리를 내면 일단은 어깨를 움츠리기 마련인데.

지금 청명이 보이는 태도는 스승에게 대드는 제자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서도 참고 넘어가기 힘든 무례였다.

 

“저…….”

 

청문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려던 순간.

 

“이게 무슨 소란이더냐?”

 

고아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한 곳을 향해 휙휙 돌아갔다.

 

“태상장문인을 뵙습니다.”

“태상장문인!”

 

신선 같은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청문은 포권하며 깊게 허리를 숙이는 백오를 따라 황급히 예를 갖추었으나, 청명은 마치 할아버지를 만난 손자처럼 그쪽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백오야.”

“…예, 태상장문인.”

“이곳은 장문인전이다.”

 

백오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말대로, 이곳은 한낱 이대제자 따위가 마음대로 언성을 높여선 안 되는 장소였다. 평소의 백오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죄송합니다, 태상장문인. 제자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백오가 한 번 더 깊게 허리를 숙이자, 노인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청명아.”

“네, 태상장문인.”

 

어느새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간 청명은 제가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방긋 웃었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백오는 얼굴을 찡그리고 싶었으나, 감히 태상장문 앞에서 제 성질을 있는 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제자로서의 예나 도인으로서의 수양은 둘째치더라도, 지금의 태상장문이나 태상장로들 앞에서 청명을 혼낼 수 있는 사람은 이 화산에 없었다.

그들이 얼마나 청명을 끔찍이 아끼고 싸고도는지 모두가 잘 알고 있으니까.

 

“무슨 상황인지는 짐작이 간다만, 그래서야 되겠느냐.”

“…아니,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네 사형이고,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동문이다. 네가 진정 화산의 제자로 살고자 한다면, 예를 갖추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게다.”

 

부드러운 타이름에 청명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오리처럼 입술을 쭉 내밀고 삐죽대긴 했으나, 조금 전 백오를 향해 대거리 할 때와는 그 기세부터가 달랐다.

 

“저, 저…….”

 

청문은 나직하게 툴툴대는 백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일의 전후사정과 청명의 변화한 태도를 모두 지켜본 청문은, 백오의 황당함과 억울함, 울화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세상의 불만이란 불만은 모두 그러모은 얼굴을 한 채 가시를 잔뜩 세우던 사내와,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있는 저 사내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청명아. 어서. 네 사형이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쳇.”

“인사를 마치거든 내 방으로 함께 가자. 맛 좋은 당과를 사놓았단다.”

 

태상장문의 타이름에 청명은 미적미적 청문의 앞으로 다가왔다.

청문은 그런 청명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퉁명스럽고 삐딱한 표정이나, 조금 전 백오를 정면에서 들이받아 버리던 언행만 보더라도, 청명의 성정이 ‘포악’하다는 백오의 평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전부일까?’

 

청문은 문득, 등줄기를 타고 내달리는 옅은 긴장을 느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

어지럽고 복잡하고 혼탁하여, 얼핏 보는 것으로는 결코 그 속내를 들여다볼 수 없는 것.

그의 한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어떠한 미지(未知)를 마주했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

 

잠시 청문을 빤히 대려다보던 청명은, 두 손을 모으며 포권했다.

 

“대화산파 십삼 대 제자 청명. 대사형을 뵙습니다.”

 

그린 듯한 몸가짐. 흠잡을 곳 없는 예절.

미사여구 없이 간결한 그 인사에서도 느껴지는 은은한 무게.

조금 전까지 불뚝대고 튀어 오르며, 왈패인지 흑도인지 모를 만큼 날뛰던 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청문은 그런 청명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마주 포권했다.

 

“십삼 대 대제자 청문입니다.”

“…….”

“청명 사제. 앞으로 잘 부탁드립…….”

“…쯧.”

 

불만스레 혀를 차는 소리에 청문은 움찔 놀라며 청명을 쳐다보았다.

청명은 부리부리하게 눈을 치뜬 채 청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 어느 사형 놈이 사제한테 존댓말을 하고 자빠졌냐’는 뜻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자, 잘 부탁하……네.”

“예, 사형.”

 

청문의 어중간한 하대에 냉큼 대답한 청명은, 이제 볼일은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마치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태상장문인에게 찰싹 달라붙은 청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청문은 짧은 한숨을 삼켰다.

저 특이한 사제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 영 쉽지만은 않겠다는, 막연하지만 분명한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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