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유료

[청명윤종] 장마

현대 au / 약 10,000자 / 소장용소액결제

탈선 by 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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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au /연령조작(청명 고1, 윤종 고2)

모브윤종 언급 있습니다. (구남친 모브캐)

캐붕 주의!

*2022.10.22에 발행했던 글을 퇴고하여 재발행했습니다.

슬슬 공기가 후텁지근해지는 늦봄의 어느 날.

윤종은 텅 빈 동아리실에 홀로 앉아 눈이 붓도록 울었다. 원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찾아온 첫사랑은, 처음이 그랬듯 나중에도 예고 없이 제게 상처를 입혔다. 매체에서 다루는 사랑이 이랬던가? 윤종이 아는 사랑, 일반적인 연애는 조금 더 부드럽고 다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던 선배는 어느새인가 계속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며 고압적으로 굴었다. 그 행동과 태도에 당황하여 거리를 두면 얼마 안 가 ‘잠깐 욱한 건 미안하지만 다 널 사랑해서 하는 말이었다’는 식의 사과 아닌 사과를 하고는 했다.

그러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했던가. 애당초 사람의 감정을 두고 승패를 가리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정말 그게 맞다면 저는 처음부터 예정된 결과의 연애를 시작한 것이리라.

“…흐윽, …흡 ….”

적막한 공간에 기어이 작은 울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제 귀로 바로 들어오는 울음소리가 너무나도 비루해서 소리를 다시 참아보려고 했으나, 혼자 있는데도 이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있는가 하는, 다소 신경질적인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게 저답지가 않아 문득 더 서러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폐부를 면할 정도의 최소 인원만 겨우 채운 동아리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부원들도 담당 선생님이 계실 때만 얼굴을 비추고 몰래 빠져나가기 일쑤였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시로 이곳에 찾아오는 윤종이 특이한 경우일 테다.

흥건하게 젖은 셔츠의 소맷자락에 다시 눈가를 비비며 숨을 고르던 때,

“… 음?”

“……?”

인사만 하고 지내는 후배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놀란 나머지 울음마저 멎었으나, 딸꾹, 어색한 상황 속에서 볼품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

친하지 않은 후배의 이름은 청명이었다.

윤종이 그 후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검도를 배우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검도를 따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까지 검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나. 입부 때부터 자긴 시간 때우는 용도로 들어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폐부를 피하기 위해 받을 수밖에 없었기도 하고, 그 당당함이 오히려 좋게 보이기도 해서 입부시켰다.

영화감상동아리에 진지한 마음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윤종과 청명을 제외한 인원은 뒷자리에서 과자를 까먹으며 수다를 떨었으나, 그마저도 청명이 불쾌한 티를 낸 뒤로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는 둘만이 동아리실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시시하면 저도 다른 부원들처럼 빠져나가면 될 텐데. 청명은 굳이 앉은 자리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버텼다.

때로는 고개를 꺾어가며 졸기도 했다. 베개가 없어 대신 담요를 두텁게 개어 건네줬더니 빤히 올려봐 오던 기억이 있다. 결국 침이 묻어 세탁해서 돌려줬었지.

언제는 영화를 보던 중에 갑자기 다가오길래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뜬금없이 사탕을 우르르 늘어놓기도 했었다. 전부 매실맛 사탕이었다. … 생각해 보니 별달리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마주쳤을 때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으며 그마저도 청명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걸로 대신할 때가 많아 목소리를 들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윤종은 청명이 이렇게 말이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어떤 새끼가 울렸냐고 표정을 험상궂게 구기는 꼴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아무 사람의 멱살을 붙잡고 너냐고 물을 것 같아서 덜컥 겁을 집어먹은 윤종은 얼결에 자초지종을 늘어놨고… 옆자리에 앉은 청명은 그걸 또 가만히 들어주며 맞장구를 신나게 쳐준 것이었다.

친하지 않은 후배랑 제대로 나누는 첫 대화인데 이런 주제라니,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옆에서 청명이 왁왁거리며 대신 화를 내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런 새끼랑 용케도 만나줬네! 부장은 화도 안 나요?

반말과 어색한 존댓말을 섞어가며 어지럽게 말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다소 괴팍한 말투에 가려진 상냥함이 따뜻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말을 좀 더 걸어볼 것을 그랬다고 생각하며, 윤종은 어느새 제가 청명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

다만 그 뒤로도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최대한 피했더니 다행스럽게도 따로 찾아오는 일은 없었지만, 수시로 불편한 메시지를 보냈다.

[ 이대로 끝낼 거야? ]

[ 넌 좋겠다. 맺고 끝는 게 참 쉽내ㅋㅋ ]

[ 진짜 후회 않할 자신 있어? ]

[ 내가 딱 오늘 밤까지만 기다린다. ]

사귈 때는 그렇게 막 대하더니, 막상 헤어지니 또 아쉬운 모양이었다. 사실 이쯤 되니 겁이 나거나 속상하다기보단 불편할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수시로 틀리는 그 맞춤법이 제일 불편했다. 사귈 땐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일이 많았고, 메시지를 주고받을 일이 별로 없어 잘 몰랐는데… 얼마 남지 않은 이미지마저도 전부 깨지게 만드는 놀라운 사람이었다.

이제 마음 없으니 착각하지 좀 말라고 대놓고 보내야 하나. 아니다, 일이 크게 번지면 안 되니 최대한 부드럽게 보낼까. 한두 글자를 겨우 입력하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며 끙끙 앓다 보니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청명이 말을 걸었다.

“왜 또 낑낑거려?”

“내가 그래도 네 선배인데….”

이제는 거의 반말을 하는 청명이었다. 사실 익숙해지긴 했지만 조금 서글픈 것도 사실이라, 윤종은 그때마다 굳이 그 말을 얹었다.

“폰 봐도 돼? 그 새끼가 연락해서 그러지?”

그냥 낚아채 가서 볼 법도 한데, 의외로 청명은 먼저 물어보고 대답을 기다렸다. 윤종은 조금 부끄럽기는 했지만 어차피 사정을 다 아는 청명에게 굳이 숨길 것도 없겠다 싶어 폰을 건넸다.

“와씨 맞춤법 봐라? 골때리는 새끼네 이거.”

딴에 무게 잡으려고 애쓰는데 맞춤법이 애잔하다, 진짜. 쯧쯧 혀를 차며 진심으로 안쓰럽다는 듯 그리 말하는 게 너무 웃겨서 윤종은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허이구, 뭘 웃어. 이 새끼 빡치지도 않아? 나였으면 아주 그냥, …… 재잘재잘 이어지는 말이 재밌기도 했고, 나직한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어느새 윤종은 청명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용보다는 청명의 표정이나 손짓이 더 눈에 들어왔는데, 그래서 청명이 [ ㅗ ] 충격적인 모음 하나를 전송해 놓고 폰을 돌려줬을 때는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벙쪄버렸다.

“뭐야, 보내도 된다며? 막상 보낸 거 보니까 좀 무서워?”

보내기 전에 물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러라고 대답한 모양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두 눈을 부릅뜨고 본 화면 속에는 여전히 모음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 망했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싸늘하게 식으려는 몸에 팡, 소리와 함께 아프지 않은 충격이 전해졌다.

“이 정도는 보내야 정신을 차리지. 보니까 하루 이틀 이 지랄을 한 게 아니더만.”

그러고는 슬쩍 안색을 살피더니 안심하라는 듯이 어깨를 도닥거리다가 팔을 둘렀다.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해온 청명은 아이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걱정마, 형. 그 새끼 오면 내가 족쳐줄게.”

“넌 운동하는 사람이라 그러면 안 되잖아.”

“먼저 맞아주면 되지!”

그래도 안 돼… 네 몸 좀 아껴라. 진심으로 걱정돼서 꺼낸 말에 청명은 마냥 웃었다. 어깨에 닿아오는 체온이 옷 너머로도 선명하게 느껴져서, 윤종은 어쩐지 목까지도 홧홧한 열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이 품에 빈틈없이 안기면 얼마나 따뜻할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청명이 왜 그러냐는 듯 의문을 담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어디 아파? 열나는 것 같은데. 보건실 안 가도 돼?”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럭저럭 무난한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청명은 집에 가면 약 먹고 푹 쉬라고 인사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시야에 들어온 그 손이 꽤 크고 다부져서… 윤종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예상외로, 그 문자를 보낸 뒤로 선배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혹시 오늘이야말로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하고 마음 졸이는 것도 일주일을 넘어가니 시들시들해졌다. 하려는 게 있으면 곧바로 저지르던 사람이니, 이 정도면 아예 안 오려는 것 같았다. 다행이지. 분명 다행인데… 왠지 썩 유쾌하지가 않았다.

윤종은 온종일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청명과의 접점이 흐려져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었다. 차라리 그 선배가 찾아오기라도 했다면, 제게 폭력적으로 굴기라도 했다면. 윤종은 청명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으며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며 위로도 받았을 터였다. 윤종은 내심 그런 그림을 그려왔기에 차라리 선배가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선배의 이야기가 아니면 청명과 이야기를 나눌 만한 게 없었다. 청명은 제가 아직도 실연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줄 알고 그 나름대로 챙겨주느라 계속 말을 걸어주는 건데, 그 문제가 해결된다면, 저를 힘들게 하던 원인이 사라진다면…….

“형.”

가까이에서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윤종은 흠칫 놀라며 옆을 돌아보았다. 복도쪽 창문을 열고 비죽 고개를 내민 청명이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 어, 어?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청명과는 학년이 다르다 보니 동아리실이 아닌 교실에서 보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윤종은 더 당황한 상태였다. 얼빠진 목소리로 이유를 묻자 청명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굳이 일이 있어야 오나. 그냥 지나가는 김에 인사나 하러 왔지.”

굳이 선배의 일이 아니어도 이제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주는구나. 새삼 그게 기뻤다. 윤종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뒤편의 문으로 향했다. 쉬는 시간이 더 길면 좋았을 텐데. 청명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 때문에 쉬는 시간의 대화는 더 아쉽게 느껴지고는 했다. 문을 바로 열고 나가려던 윤종은 그 전에 문 옆의 전신거울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머리가 뻗치지는 않았는지, 어디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려던 윤종은 멍하니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시원하게 에어컨이 틀어진 교실 가운데 저 홀로 빨갛게 얼굴을 물들이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그 모습이 너무나도 바보 같이 보여서, 윤종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방금의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청명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인다. 윤종은 그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좀 아파서 쉬어야 될 것 같아. 다음에 얘기하자. … 수업 잘 들어.”

청명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윤종은 책상 위에 엎드려 제 양팔에 얼굴을 푹 묻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분명히 걸린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

방법은 무슨 방법.

윤종은 그저 청명을 피해 다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청명이 워낙 눈에 띄는 사람이라 피하기도 쉬웠다는 것? 쉬는 시간에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수시로 자리를 옮기는 게 번거로웠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는 것보단 낫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고 상대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청명이 그런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만일을 대비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감정을 가볍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더욱 숨기고 싶었다.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 몇 마디 걸어주며 위로해 준 후배에게 금방 반했다는 걸 알면 가벼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또, 청명은 윤종의 구애인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윤종이 저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윤종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청명의 모습을 그렸다. 상상 속의 청명은 저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아, 윤종은 왜인지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졌다.

종이 울리자마자 교실을 나선 윤종은 복도를 서성이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딱히 갈 곳도 없어 현관으로 나온 뒤에는 처마 밑에서 운동장을 구경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도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교복을 다 적셔가며 뛰어노는 학생들이 보였다.

장마가 오려나 보다. 흐린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윤종은 습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마치 어항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시원한 바람을 쐬고 머리를 비우고 싶어 나온 거였는데, 물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는 무거워서 폐에 묵직하게 들어찼다.

청명이는 뭘 하고 있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을 묻고, 또 묻으며 운동장을 구경했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더 세차게 내릴 따름이었다.

***

후배를 계속 피해 다니다 보니 어느덧 장마가 시작되었다.

요철이 많은 길바닥 곳곳에 고인 웅덩이는 점점 불어나서 이내 어딜 밟든 찰박이는 소리와 함께 지저분한 빗물이 튀었다. 윤종은 종아리까지 튄 흙을 털어내다가 바지가 점점 다리에 달라붙어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바지뿐 아니라 셔츠도 흠뻑 젖어 몸을 옥죄고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라도 한 듯 교복이 흠뻑 젖은 상태로 등교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학교에 잘 갔을까. 등굣길에 보았던 작은 아이를 떠올리며 잠시 멍하니 있던 윤종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뒤늦게 알아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청명이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해 왔다.

“형, 오랜만이네.”

지레 찔려서 그런지, 왠지 탓하는 말처럼 들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자연스러울까. 그러게, 오랜만이네? 아니면 날씨에 대한 얘기를 하며 짧게 대화라도 나눠야 할까. 그런데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진다는 것말고는 딱히 할 말도 없는데. 대체 뭐를 집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그냥 착한 후배라고만 생각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허둥대지는 않았는데… 그가 좋아진 뒤로는 모든 게 의식돼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초 동안 대답을 안 하고 있었던 걸까. 이미 타이밍을 놓친 것 같은데. 윤종은 어지러운 머리를 계속 굴리다가 이어지는 청명의 말에 겨우 빠져나왔다.

“우산은 어디 버리고 왔어?”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청명이 덧붙인 말에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하… 지금 이렇게 내리니까 이따 갈 때쯤엔 덜 내리겠지. 간신히 꺼낸 그럴싸한 대꾸에 청명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야, 왜 그래?”

“장마인데 잘도 그런 생각을 하네 싶어서.”

지금 놀리는 거냐고 묻자 청명은 여느 때처럼 짓궂게 웃었다. 윤종은 그런 청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 시야에 들어오는 이 장면을 영원히 기억에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언제라도 다시 꺼내어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마음은 청명이 윤종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빠르게 가려졌다. 윤종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시선을 돌린 채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먼저 올라가 볼게.”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몰려드는 학생의 무리 사이로 들어가 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당연한 일이지만, 청명은 따라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피해 다닌 이유를 물으며 팔을 붙잡아 올까 봐 긴장했으나 윤종은 교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저를 찾는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게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쩐지 서운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청명은 층수가 다른데도 꽤 자주 올라와 인사를 건네고는 했다.  언제는 등굣길에 청명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바람에 인사를 못했더니 기어이 따라 올라와서 인사를 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날의 일은 그저 우연과 변덕으로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 청명은 알고지내는 사람이 많고 자신은 그중 하나일 뿐이니… 다른 용무로 올라왔다가 겸사겸사 제게 찾아와 인사를 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청명은 윤종이 저를 피해 다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보 같아….”

조금 울고 싶었다.

***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학생들은 무리 지어 교문 밖으로 나갔다. 소란스러운 소리는 생각보다 금방 잦아들었다.

솨아아아ㅡ 세찬 빗소리에 잠긴 복도를 지나 동아리실로 들어간 윤종은 문을 닫았다. 귀를 때리듯 하던 커다란 소리가 문 너머로 먹먹하게 울렸다.

비가 조금이라도 약해질 때까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책상에 가방을 내려둔 윤종은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어찌나 거세게 내리는지, 운동장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반사적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아침에 아이에게 우산을 건네준 건 후회하지 않았다. 비가 지금보다 세게 내렸다고 해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생이니 진작에 수업이 끝났겠지. 제가 준 우산을 쓰고 걷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비가 정 안 그치면 그냥 다 맞고 가버리지, 뭐. 어차피 아침부터 비를 맞아 집에 가자마자 교복을 세탁해야 하는 건 변함없었다.

윤종은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량을 올렸다. 기타의 선율에 빗소리가 점점 묻혀간다. 왠지 잠이 올 것 같아서, 책상에 엎드리고 싶은 것을 참고 턱을 괸 채 창밖을 구경했다. 청명이는 집에 잘 갔을까. 문득 든 생각을 애써 털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체적으로 들리던 소리가 일순 한 쪽에 몰렸다. 이어폰 한 쪽이 빠졌다는 것을 알아챈 윤종의 귓가에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돌아본 윤종은 멍청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옆자리에 앉은 청명은 빼낸 한쪽 이어폰을 제 귀에 꽂고 윤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가고 뭐 해?”

“… 너야말로.”

“그냥. 아침에 형 우산 없던 거 생각나서. 진짜 있을 줄은 몰랐어.”

어이가 없어 얼빠진 대꾸를 해버린 윤종은 이어진 청명의 말에 도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열이 올랐을 게 분명했다.

“… 내가 다른 애랑 이미 갔으면 어쩌려고.”

“여기 있잖아.”

인기가 많은 사람들의 화법은 전부 이런 걸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들에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에어컨을 틀지 못해 덥던 동아리실이 더 답답하게 느껴져서 윤종은 괜히 손부채질을 하고 셔츠 밑자락을 펄럭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을 깬 건 청명이었다.

“근데 형, 나 왜 피해?”

딸꾹.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윤종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여전히 세찬 빗소리 덕에 작은 딸꾹질은 그렇게 튀지 않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또다시 볼품없는 모습을 보인다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모습 따위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왜 매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비루해지는 걸까. 부끄럽고 속상한 마음에 시야가 흐려졌다. 아, 청명이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흘러내리려는 것을 애써 참아보는 와중에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만, 히끅! 그만, 쳐다봐….”

하지만 끈질긴 그 시선이 끊기는 일은 없었다. 결국 윤종은 두 손에 제 얼굴을 묻어 가려버렸으나 그마저도 청명의 손에 잡혀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새 기어이 흘러내린 눈물 자욱 위로 숨결이 느껴졌다.

그런데, 너무 가깝지 않나…? 멍청히 생각하는 사이 시야가 어두워지고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아왔다. 지금 제 입술에 닿은 게 청명의 입술이라는 사실을 몽롱한 머리로 뒤늦게 알아챘을 때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티 진짜 많이 나는 거 알고 있어?”

“…… 뭐가?”

“형 나 좋아하는 거 엄청 티 나.”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돌아왔다. 윤종은 청명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려고 뒷걸음질을 쳤으나 청명은 윤종의 그림자라도 되는 듯 재빨리 따라잡았다.

“거기 가만히 있어!”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외친 말에 어이없는 대꾸가 돌아왔다.

“그럼 이어폰 빠지는데?”

“그냥 빼면 되잖아!”

“더 듣고 싶어.”

도대체가….

등에 닿은 레자 게시판이 벽에 부딪혀 덜걱이며 작은 소음을 냈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붙어선 청명이 물었다.

“아직 대답 안 했잖아, 형. 나 왜 피했어?”

흐릿한 배경 속에서 저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그 눈이 너무 예뻐서, 윤종은 어쩐지 힘이 풀렸다. 어차피 걸렸는데 더 숨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기도 했다. 이번만큼은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아 그 눈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웃기잖아. …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방 다른 사람 좋아하는 게.”

평소 같으면 뭐라도 대꾸를 했을 청명은 더 말해달라는 듯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 앞이니까 더 제대로, 번듯하게 있고 싶은데… 자꾸 바보 같아지고 그러니까, 그게 싫어서….”

그래서 피했어. 미안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사과하자 청명은 뭐가 그리 기쁜지 눈까지 접어가며 환하게 웃었다. 왜 웃냐고 저도 모르게 불퉁한 목소리로 묻자 이젠 어린아이처럼 꺄르륵 웃기까지 했다.

“나는 형이 나 좋아하는 거 엄청 티 나서 좋았거든. 귀엽잖아.”

키 차이도 많이 나서 저를 올려다보고 있으면서 뭐가 그리 귀엽다는 건지.

그만 좀 울어보라며 눈물을 죄다 닦아내 주던 청명은 까치발을 들고서 새가 쪼듯이 뺨과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 그게 너무 간지러워서 웃어버렸더니 청명이 나직이 말했다.

“가자, 데려다줄게.”

무심코 내다본 창밖은 그새 비가 그쳐 있었지만 윤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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