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식

유홍귀 上

화산귀환 드림

드림 버무리 by 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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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캐릭터와 자작 캐릭터가 엮이는 드림 소설

※ 주인공 이름/설정 有

※ 원작 전개 및 설정 일부 개변

본 소설은 자기만족을 기반으로 둔 2차 창작 소설입니다!

필자가 즐겁게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Unsplash의 Grant McCurdy

幼紅鬼 (上)

w. 순잉

 평소와 달리 소란하여 잠이 깼다. 이 늦은 시각에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이는 투덜대며 이불 속에 파고 드는 대신 퉁퉁 부은 눈을 부비며 느적느적 일어났다.
 쿵쿵, 바닥이 울리고 사부들이 대련할 때나 들었던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울림이 심상치 않다. 소음의 정체를 파악할수록 몽롱했던 정신이 기민하게 곤두선다.

 아이는 몸을 딱딱하게 굳힐지언정 떨지는 않았다. 사부들이 자주 했던 말들을 되뇌이며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작은 신형이 다시 움직였다. 당장 움직이기 편한 무복으로 갈아입고 목검 옆에 가지런히 장식된 진검을 허리에 찬다. 그리고 달빛이 들지 않는 어둑한 그림자 밑에서 숨을 죽인다. 절대로 바깥 상황을 내다보지 않고 뛰쳐나가지 않는다.

 눈 깜빡이는 소리조차 새어갈까 깜빡임까지 줄인 채 기척과 소음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는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인식하곤 꽉 쥐고 있던 검에 손을 올렸다.

 여즉 소란한 배경을 뒤로하고 다급히 쿵쿵거리던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아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숨도 멈춘 채 열리는 문 틈을 주시했다.

 빠르게 열린 문 뒤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볼이 패이도록 마른 남성의 안면이었다. 아이의 경계가 눈녹듯 사라지고 반가운 호선이 입에 걸렸다.

 "평 사부!"

 "쉿. 단아야, 누가 오진 않았느냐?"

 "네. 제자, 방금 막 일어났어요. 무슨 일이에요?"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다가와 품에 안은 남자는 아이의 얼굴을 이목저목 살펴댔다. 땀이 밴 투박한 손길이 따뜻한 볼을 살짝 쓸고는 떨어졌다.

 "단아야, 당장 본산으로 가야겠다."

 결의 서린 문장에 둥근 낯에 핏기가 가셨다. 아이다움을 잃은 얼굴을 마주한 남자는 침음을 삼켰다.

 "…현천문이에요?"

 "단아야. 약조를 잊지 말아라."

 "평 사부."

 "한시가 급하다. 문주님이 너에게만 알려줬던 장소 기억 하느냐?"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비틀린다. 아이의 작은 고개가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그곳에 중한 물건이 있다는구나. 그것을 챙겨 먼저 본가로 가거라."

 "사부님들은요?"

 "문주님과 함께 놈들을 막아야지."

 "제자 혼자 가나요?"

 "약조는 바뀌지 않는다. 어서 가거라."

 "사부님!"

 "어서!"

 우렁한 호통에 작은 어깨가 흠칫 튀었다. 남자는 떨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이를 꽉 안았다. 자신의 떨림이 전염되기 전에 풀어준 뒤 미련없이 등을 돌린다.

 아이는 붙잡을 새 없이 왔던 길을 돌아가는 사부의 그림자를 멀거니 바라보면서 앉아 있었다. 다시 혼자다.

 잊을만 하면 했던 사부들과의 약조가 머릿속을 헤집는다. 본인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명은 불안한 결과만 예고한다.

 그러나 앉아서 머리만 굴릴 여유는 없다. 아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끊어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용하고 빠르게 움직여 문주님과 산책할 때마다 보았던 익숙한 자리로 향한다. 일단 약조를 지켜야 했다.

 그를 기다린 마냥 그 자리에 놓인 보따리. 작은 등을 두텁게 감싸는 보따리 위에는 서신이 있었다. 아이는 잽싸게 그곳을 벗어나 소란이 멀어지고서야 서신을 펼쳤다.

 단아야. 못된 약조를 강요하여 미안하구나.

 여럿 설명하였듯 이것이 최선임을 이해해주거라.

 최대한 빨리 본가에 가거라.

 육포와 물은 낭비하지 않도록 하고, 장문인께 드릴 서신과 비급을 목숨처럼 소중히 하여라.

 몸 조심하거라.

 익숙한 필체지만 급히 휘갈겨 쓴 만큼 먹이 군데군데 튀었다. 전문을 담은 회백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한 번 정독하여 내용을 온전히 이해했음에도 버릇처럼 첫 머리에 닿는 시선을 질끈 감아 막는다. 아이는 서신을 곱게 접어 품에 갈무리한 뒤 익히 아는 방향으로 경공을 펼쳤다.

 심야의 서늘한 바람이 여린 볼을 거세게 할퀸다. 산짐승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나무를 타고 땅바닥을 박차는 움직임은 가볍기만 하다.

 기척을 죽이고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을 내느라 막아놨던 사고가 꽤 멀리 이동했음을 알리는 민가의 불빛을 마주하자 밑 빠진 독처럼 새어나왔다.

 어째서 제가 가나요? 저보다 사부들의 경공이 더 빠릅니다.

 어째서 저는 사부들을 돕지 않나요? 사부들은 제 재능을 인정해주셨습니다.

 어째서 저만 보내시나요?

 날카로운 바람이 부릅 뜬 눈을 찌른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손발이 차가워지며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아이는 애써 모든 불안을 억누른 채 발을 굴렸다.

 그저 믿는다. 본산에 도달하면 해결되리라. 어리고 무능한 자신보다 본가의 어른들이 더욱 도움이 되리라.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평생을 함께한 집과 가족을 등지고 홀로 달아나는 아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얄팍한 희망을 믿고 달리는 것뿐이었다.

 아이는 가끔 물을 마시거나 육포 뜯을 때 앉는 것 외엔 자거나 쉬지 않고 내달렸다. 그만큼 간절했다.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화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본 가파른 산이 얼마나 반갑던지. 휘청이는 다리에 힘을 주어 서둘러 산을 오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폐가 한계를 부르짖어도 멈추지 않는다. 커져가는 희망 한구석에서 소곤거리는 불안을 한시라도 빨리 없애고 싶었다.

 드디어 정문. 익숙한 정경.

 그러나 기억보다 낡은 정문은 있어야 할 현판이 없다.

 분명히 이곳이 대화산파가 맞는데. 아이는 한동안 자리에 서서 굳게 닫힌 문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몇 년 전에 방문했던 화산은 이러지 않았다. 속가인 홍엽문도 현판이 있는데 본가인 화산파가 현판이 없는 게 말이 되는가. 몸을 혹사시켜 맹렬히 뛰던 심장이 바스라지는 희망 대신 자리한 불안으로 쿵쾅거린다.

 땅을 울릴 듯 벌벌 떠는 몸을 버티지 못한 다리가 결국 무너진다. 흙바닥에 널브러진 작은 몸은 입을 벌린 채 거친 호흡을 내쉬다가 홀린듯이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물과 육포를 꺼낼 때마다 모습을 드러낸 낡은 비급들. 그 비급 사이에 끼워진 서신. 평소 같았으면 문주가 장문인께 드릴 서신을 감히 펼칠 생각도 않았겠지만 아이는 확인해야 했다. 나이에 비해 조숙한 머리가 떠올린 가정을 부정할 근거가 필요했다.

 고이 접힌 서신의 필체는 아이의 품에서 구겨진 서신과 같았으며 그보다 정갈하고 침착했다. 아이는 덜덜 떨리는 손에 혹시라도 서신이 상할까 조심하며 달빛이 잘 비추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서론은 으레 그렇듯 속가의 문주가 본가의 장문인께 보내는 안부로 채워져 있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도 들었던 목소리가 서신을 읽어내리는 착각과 함께 백색 시선이 빠르게 내용을 훑는다.

 단아는 어립니다. 가진 재능을 채 피우지도 못하고 스러지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 문장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는 서신을 든 팔에도 힘이 빠졌다. 그걸로 모자라 숨은 제대로 쉬는지, 읽은 문장을 또 읽는지 스스로 파악하지를 못했다. 흐릿한 시야에 드문드문 읽히는 문장 몇 가지가 뇌리에 박혀 화상처럼 남았다.

 제자들은 끝까지 홍엽문을 지킬 것입니다.

 단아는 홍엽문의 희망입니다.

 단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으… 으, 욱……."

 바닥에 고꾸라진 아이는 제 팔을 깨물었다. 휘영청 달이 뜬 시각이다. 감정이 휘몰아치는 울분을 토해내기 전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죽인다.

 아이는 원망스런 서신을 쥔 손에 힘을 주면서도 차마 찢거나 구기지 못하고 제 팔을 깨문 턱에 힘이나 주었다. 아무리 의복을 입었다지만 아픔이 덜한 것은 아니다. 제 이빨에 팔이 뜯겨나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아이는 힘을 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겼다간 목 안에서 파도치는 설움이 가감없이 쏟아져버릴 테다.

 어째서 저만 보내셨나요? 제자, 혼자는 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에 사부님들은 혼자가 될 일은 절대 없다고 말씀하셨죠.

 제자, 혼자가 싫다는 것은 사부님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부님들이 없는 본가는 제자에겐 의미가 없습니다.

 아이는 이제야 사부들의 본심을 깨닫는다. 그들은 애초에 본가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었다.

 홍엽문은 고립되어 있었다. 이미 주변에 사파 간 세력 다툼에 휘말려 스러진 문파가 몇 개던가. 지리적 이점과 화산의 위명 덕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쇠락했어도 구파일방이었던 화산파가 아닌가.

 그러나 세를 불린 사파는 약해진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다.

 홍엽문은 이 사실을 오래 전부터 인지했다. 하여 어린 제자에게 무공을 가르치면서도 갖가지 약조를 강요해 경계와 준비를 해왔다.

 그 최후의 보루인 본가는 당장 그들을 도와줄 상황이 못 되었다. 현판도 떼버린 낡은 정문은 아이에게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사부들은 본가의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겠지. 그러니 무자비한 사파를 상대로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어 홍엽문의 뿌리를 가진 어린 제자만 본가로 보내는 걸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의지를 이은 제자가 있으면 언제든 문파는 다시 일으킬 수 있기에.

 허나 아무리 조숙하여도 의, 협, 혼보다 당장 저의 가족이 소중한 아이로서는 이해할 수 있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하룻밤 새 모든 것을 잃었다. 욕심 많은 사파의 세력 다툼, 낄 자리를 따져가며 모르쇠 하는 정파들… 하물며 부러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운 초대 문주는 또 어떻고. 탓할 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원인을 거대한 무력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지학이 되지 않은 아이도 안다.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하루 수련에 매진했건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억눌렀다. 거대한 땅에 매달리듯 엎드려 북받치는 감정을 참는다. 손끝이 차가운 흙바닥을 파고들어 손톱 새로 돌이 박히고 피부가 찢어져도 힘을 풀지 않는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는 잔인한 현실이 미치도록 원망스러워 숨이 막혔다.

 피로가 누적된 어린 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탈진해 쓰러졌지만, 아이 스스로 정신을 차릴 때까지 처절한 광경을 발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 이른 새벽부터 쇠락해 굳게 닫은 화산파를 방문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덕분에 자신을 추스를 시간을 벌었다. 아이는 동이 트는 시각에 정신을 차렸다. 희끗한 시선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응시하다가 흙먼지가 묻은 얼굴과 무복을 탈탈 털고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는다. 풀어 헤친 보따리를 다시 꽁꽁 싸맨 뒤 정문 앞에 가지런히 놓고 등을 돌렸다. 문주의 서신 두 장은 품에 두었다.

 본가의 상황이 어떤지 자세히는 몰라도 그동안 흘겨들었던 사부들이 주고받던 이야기나 바깥에서 들리는 소문, 현판조차 없는 상황을 보면 나쁘다는 건 확실하다. 사파의 견제 속에서 근근히 살아갔던 홍엽문의 사정과 다르지 않겠지.

 하여 본가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곳에 몸을 의탁하면 아이의 몸으로선 편하기야 하겠으나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지. 그러나 그 때를 망연히 기다릴 수 없다. 최선을 다해 수련하고 도를 쌓으면 사부들이 살아나고 홍엽문이 절로 세워지는가?

 그런 기적은 신선도 일으키지 못한다. 후에 일어날지 확신할 수 없는 기연을 기다리며 자신의 무능을 외면한 채 수련에만 전념한 결과가 당장 이렇다. 그런데도 똑같은 길을 걸으려는 건 천치도 하지 않을 일.

 그리하여 조숙한 아이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영특한 머리는 금방 수단을 도출해냈고 하산하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다.

 떠오르기 시작하는 일출이 빛바랜 머리를 조명한다. 새벽 바람이 불어오면 꽉 묶인 담홍색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꼈다. 사부들의 정성과 애정으로 곱게 기른 머리. 아이는 허리에 묶었던 검을 빼들어 목덜미로 가져갔다. 희귀한 빛깔의 고운 머리카락은 묶인 그대로 잘 벼린 날에 베여 자비없이 잘려 나갔다.

 

 


 

 

 팔년 후의 화음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활기를 띤다. 기분 좋게 떠들썩한 거리에서 방탕하게 술 몇 잔 기울인 청명은 보았다. 검은 죽립을 쓴 낭인. 미 없이 거무죽죽한 의복에 대놓고 칼까지 차고 있지 않은가. 누가 봐도 수상쩍다.

 화산파 삼대 제자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지는 건 당연한 수순. 족보도 없는 사파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 욱해서 일어났던 청명은 당장 저 낭인이 사파라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성질을 억눌렀다. 다짜고짜 패기엔 도사라는 일말의 양심이 그를 붙잡았다.

 과거에 비할 바는 못 되더라도 화산을 품고 화산이 지키는 화음이다. 그곳에 수상한 자가 발을 들이면 화산파의 제자인 이상 살피는 게 인지상정. 청명은 부러 사람이 다니지 않은 골목으로 다니는 낭인을 조용히 따랐다.

 낭인의 걸음걸이는 일정했지만 어딘가 불편한 듯 다리를 조금씩 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흙냄새 뒤로 미미한 혈향. 청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청명은 다리를 절면서도 저벅저벅 나아가는 낭인이 산문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걸 보고서야 기척을 내며 거리를 좁혔다. 대놓고 울리는 발소리에 낭인이 뒤를 돌았다.

 눈높이가 비슷한 탓에 눌러 쓴 죽립 아래로 시선이 맞닿는다. 청명은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시체 같은 낯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누구요? 화산에는 왜 오셨대?"

 척 봐도 어린 아이가 뻗대며 삐딱하게 묻는다. 상식이 박힌 성인이라면 이러한 태도에 불쾌함을 느껴 그만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눈 앞의 불청객은 미동도 않고 그저 바라볼 뿐.

 수상쩍은 행색에 기이할 정도로 희미한 기척. 매화검법을 노리고 저를 쫓던 유이설과는 다른 미지가 청명의 성질을 자극했다. 또한 겉보기엔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 매화검존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느리게 전신을 훑던 시선이 장포 사이로 드러난 매화 자수에 닿는다. 말없이 눈이나 흘기는 작태에 청명이 와락 화를 내기 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포권한 낭인이 머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실례지만 소도장께서는 화산의 도인이십니까?"

 "예, 뭐……."

 도기가 느껴지는 번듯한 자세. 이빨을 세웠던 청명은 예상과 다른 행동에 사파일 가능성을 낮추었다.

 단정한 예가 느껴지는 나긋한 어투. 처음 서늘했던 낯은 잘못 본 듯, 다소 맹해 보이는 얼굴이 애매한 답에도 미미한 호선을 그린다.

 낭인은 줄곧 메고 있던 두툼한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어내더니 그 안에 있던 주머니를 청명에게 내밀었다. 청명은 제 앞으로 들이밀어진 너덜한 주머니를 얼결에 받아버렸다. 낭인이 다시 포개어 메는 보따리는 그 크기가 한참 줄어 있었다.

 꽤 묵직하다. 잘그락 딸그락 거리는 소리가 평범하지 않다. 열어볼지 말지 고민하는 찰나, 중성적인 음성이 공손히 말해왔다.

 "소인은 본가에 후원금을 드리러 방문하였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신 전해주시겠습니까?"

 "후원금…? 그쪽은 누구신데요?"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낭인은 다시금 포권하며 정중히 말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소인은 대화산파의 속가, 홍엽문의 제자입니다."

 "홍엽…? 지금 홍엽문이라 하셨어요?"

 과거의 잔재. 이 시대의 시간으로는 백 년이 넘게 지났으나 저에게는 채 일년도 되지 않는 과거. 친숙하고도 반가운 이름을 현실에서 듣고 정신이 번쩍 든 청명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다.

 백여년 전, 그의 사형제가 세운 문파가 홍엽문이다. 그의 머리색과 화산에 어울리는 문자를 모아 지었다는 소리에 문파 이름이 그게 뭐냐 비웃었던 기억이 겹친다.

 문파를 듣고 벙진 아해의 반응을 어찌 받아들였는지, 낭인은 죽립 아래로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시는군요."

 "당연하죠! 아니, 이럴 게 아니지. 그냥 가시지 마시고 같이 올라가요."

 바로 얼마 전까지 몰락의 길을 걷던 화산이다. 금방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화산을 살리는 데 급급해 속가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보다 아직까지 속가가 남아있었을 줄이야. 하긴 그렇게 궁핍했던 사정에 조금씩이라도 올라오는 후원금이 아니었다면 화산은 청명이 돌아오기도 전에 망했을 테다.

 과거를 되뇌이면서도 그 짧은 시간 수상쩍은 낭인의 주장이 사실임은 파악했다. 이제 막 다시 활기를 찾았다지만 이름난 매화검법도 유실되었다 알려진 화산 아닌가. 그런 문파의 속가를 자칭하며 이곳까지 방문할 값어치는 전무하다. 이미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청명에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낭인은 고개를 저었다.

 "소도장께 후원금을 전달하였으니 돌아가겠습니다."

 "화음까지 오셔놓고요? 장문인께 인사드려야죠. 속가의 소식을 들으면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청명은 낭인을 설득하는 데 장문인까지 팔았다. 현종이라면 당연히 속가의 소식을 기다릴 테니 틀린 말도 아니라 그는 떳떳하다.

 매화검존 시절 친근했던 이가 세운 문파다. 지금껏 화산을 믿고 후원금을 보내준 문파의 제자다. 어찌 궁금하지 않겠나. 장문인도 장문인이겠지만 청명도 궁금한 것이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러나 장문인까지 들먹였음에도 낭인은 완고했다. 전립 아래 슬쩍 보이는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리는 걸 보고서야 청명은 낭인의 세세한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안면에 자리한 큰 흉터들. 미소가 부자연스럽다 느껴진 이유는 입가를 거칠게 헤집은 상흔 탓임을 깨닫는다. 하나가 눈에 들자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흉터 다음으로 의복 아래 드러난 목과 턱에 난 불그스름한 자국을 발견한다. 이것들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 아까부터 미약하지만 끊이지 않는 피냄새는 또 어떻고.

 수많은 전장을 겪은 매화검존이다. 저 흉이 어찌하여 생기는지 안다. 무인이 어떤 길을 걸으면 저런 분위기를 갖는지도.

 아직 어린 저와 눈높이가 비슷한 정파의 제자다. 아무리 많게 쳐줘도 이립에 못 미치는 아해가 어떠한 길을 헤쳐왔는지 수많은 상흔이 그에게 이르고 있는 듯하여 청명은 더더욱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몇 개월 새 화음이 많이 달라졌잖아요. 드릴 말씀이 많아요."

 "네, 화종지회에서 큰 명성을 얻으셨다고도 들었습니다. 그 종남의 콧대를 눌러주셨다고."

 "예! 그 때 얼마나 대단했는데요.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장문인과 차라도 마시면서……."

 "권유는 감사하지만."

 낭인은 옆으로 한 발자국 비켜섰다.

 "장문인께는 말씀 전해주세요."

 "잠깐!"

 그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그대로 팔을 뻗는 청명을 피해 신형을 감췄다.

 "…허, 빠르네."

 비록 매화검존 시절에 비해 실력이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못 미친다지만 시선으로도 쫓지 못한 경공은 오랜만이라 얼이 나갔다. 청명은 찰나에 공간을 가르느라 비산한 흙먼지를 바라보며 멀거니 서 있었다.

 "아니지, 장문인께 여쭈어야지."

 이러고 있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미 떠날 사람은 떠났는데. 현종이라면 지금의 홍엽문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홍엽문의 제자를 대동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 지나간 일, 훗날 다시 화음에 방문하였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붙잡아 얘기를 듣겠다 다짐하며 산을 올랐다.

 "…홍엽문의 제자가 주었다고……. 어찌 생겼는지 기억 하느냐?"

 후다닥 산문을 오르자마자 장문인의 처소에 들이닥쳐 후원금을 내민 청명이었다. 홍엽문의 이름을 들은 현종은 반가우면서도 아린 표정으로 뜸을 들이다가 질문을 던졌다.

 "흉터가 많은… 여이셨어요. 나이는 윤종 사형이나 이설 사고와 비슷했고요."

 "흠……."

 현종은 막내의 급작스런 방문에도 환영해주었다. 매화차를 내려 사랑스런 제자 앞에 내려둔 그는 패물과 짧은 서신이 들어 있던 주머니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청명은 현종의 허락 하에 읽은 서신의 필체가 괜히 청유 사저를 닮았다 생각하며 답을 기다렸다.

 "혹시 눈동자가 백색이더냐?"

 "주변이 어두웠고 죽립을 쓰고 있어서 잘 안 보이긴 했는데… 뭔가 흐릿흐릿 하긴 했어요."

 "머리카락 색은?"

 "그것도… 아, 머리가 짧은 것 같던데요. 그 죽립에 안 보일 정도면."

 "흠."

 "색깔은 왜요?"

 "윤종이나 이설이와 비슷한 나이는 단아 뿐인데, 단아의 색채가 특이하단다."

 "무슨 색인데요?"

 "빛이 바랜… 그러니까."

 현종은 비슷한 색을 찾는지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창 너머를 가리켰다.

 "저 하늘 보이느냐? 저 나무 위에 아슬히 걸친 엷은 색 말이다."

 "…담홍색?"

 "그래. 저기서 조금 옅은 색이 단아의 머리색이다."

 답을 마친 현종은 창에서 눈을 돌려 차를 한 모금 마셨지만, 청명을 차를 쥔 자세 그대로 창밖을 응시한 채 미동도 않았다. 봄에 망울지는 꽃과 잘 어울리던 사저가 딱 그러한 색을 가졌던 탓이다.

 "흉터가 많다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꼬. 서신에 그러한 이야기는 적혀있지 않았는데."

 한숨처럼 조용히 읊조리는 현종의 목소리에 침음이 섞였다. 청명은 입 안쪽 살을 짓씹으며 탄식을 참았다.

 행여나 백여년을 지나 다시 태어난 자신처럼 사저도 이 세상에 다시 눈 뜬 건 아닐까. 어쩐지 청문 사형 옆에서 꼭 한 소리 얹어야 할 사저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니. 나를 알아보고 서둘러 자리를 피한 걸까. 나보다 먼저 눈을 떴을 텐데 어째서 화산으로 오지 않았나. 홍엽문이 무사하지 못해 저처럼 문파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이, 지금의 화산이 충분히 도울 수 있다.

 "직접 만났으면 좋았으련만. 화산의 사정이 나아졌다는 걸 알려주어야 하는데."

 그래, 화산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부터 말해줄걸.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청명은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움직여 찻물에 울렁이는 얼굴을 응시했다.

 따스한 날씨처럼 온순했던, 향기로운 풀꽃처럼 활짝 웃던 사저를 기억한다. 지금은 눈꺼풀 뒤로만 볼 수 있는 그리움. 인상은 달랐지만 사저의 색채를 품은 홍엽문의 아해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후덥지근 하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기후. 향기와 풀내움 섞인 산들바람을 맞으며 행하는 수련이란, 딱히 다르지 않다.

 날씨가 좋다하여 봐주지 않는 청명은 오늘도 이른 새벽부터 사형제들의 전신을 자근자근 다져준 참이다. 물론 근육이 다시 붙어 튼튼해지고 반사신경이 좋아지라고 성심성의껏 훈련시켜준 결과다. 연무장 바닥에 앓는 소리를 내며 널브러졌던 사형제들을 뒤로 한 청명은 으레 하는 불만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항상 투덜거려도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의 실력이 나아지고 있음은 부정하지 않는다. 암, 그럼. 누가 봐주고 있는데. 당연히 좋아져야지. 청명은 습관처럼 여전히 번쩍거리는 화산의 전각들을 눈에 담으며 걷다가 봄바람을 타고 들려온 낯선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정문에서. 이 시간에?

 아, 봄. 매화가 피고 질 즈음 산문 밖에서 발견된다는 보따리. 후원금.

 홍엽문.

 빠르게 흘러가는 사고를 뇌가 채 주워담기도 전에 뒷짐진 채로 발을 굴러 경공을 펼친 청명은 잠금쇠 없이 그저 닫혀있던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바닥에 고이 모셔진 꼬질꼬질한 주머니. 어째 전보다 상태가 별로인 것 같은데. 혹시나 다른 이의 물건일까 싶어 슬쩍 열어보자 깨끗한 패물과 일전에 보았던 작은 서신이 함께다. 서둘러 펼치면 아는 필체로 간략히 적힌 문장이 몇 개. 청명은 더 재볼 것 없이 벌떡 일어나 아래로 내달렸다.

 조용히 접근했다고 생각했건만 그 새 기척을 눈치채고 내뺐나? 아니, 여기까지 직접 왔으면서 장문인 얼굴 한 번 뵙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애초에 예의가 아니지 않냐고. 이만큼 시간이 지났으니 화산의 사정이 나아졌음을 알지 않나? 그런데 왜 또 말도 없이 후원금만 놓고 가.

 역시 사저가 환생하여 저처럼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아닐까? 술기운에 애써 억눌렀던 부정한 가정이 다시금 그의 심장을 짓누른다.

 아니, 이런 생각은 직접 묻고서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단이라는 이름의 홍엽문 제자를 붙드는 게 중요!

 가파른 화산을 격풍처럼 내달리던 그는 작은 신형이 시야에 들어오자 더욱 속도를 올렸다. 거리나 여유로운 걸음을 보아하니 부러 달아난 모양새는 아니다. 청명은 작년처럼 제 기척을 눈치 채고 뒤를 도는 죽립 쓴 낭인을 다시 마주했다.

 "소협."

 "다시 뵙습니다, 소도장."

 일 년 동안 쑥쑥 자란 자신과 달리 변함없는 신장과 후줄근한 행색. 막 떠오르기 시작한 일출이 고개를 치켜 든 죽립 아래에 드리워 아해의 색을 비춘다. 옥처럼 하얀 눈동자와 시선이 맞았다.

 "어찌 또 그냥 가려고 하십니까. 장문인께서 소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신 말고 직접 듣고 싶어하세요."

 바랜 빛깔이 눈부시다. 기억 속 청유 사저의 머리카락을 빼다 박은 색채가 청명의 마음을 뒤흔든다. 도기를 품은 젊은 후기지수들과 다르지 않은 아해의 안면에 거친 필체 마냥 북북 그어진 흉터가 청명의 심장에 인두질 한다. 아, 턱 밑에 상처는 없던 건데. 작년보다 흉이 늘었다.

 "아실 테지만 화산의 사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속가의 후원금으로 근근히 버티는 게 아니라, 그동안 지지해준 속가가 도움을 청하면 당장 도울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어요."

 "후원금은 앞으로 필요 없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장문인과 이야기 나누세요, 묻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태연을 가장하는 청명의 속은 타들어갔다.

 작년 단을 만난 이후, 은하상단의 힘을 빌려 조금이나마 홍엽문의 정보를 모으려 했으나 얻은 건 없었다. 십여 년 전에 발발한 사파 간의 항쟁에 휘말려 곤란을 겪었다는 단 한 문장이 그가 쥔 유일한 소식이었다.

 아직 현종에겐 전하지 않았다. 사실 관계를 떠나서 전후 사정도 알 수 없는 불안만 야기하는 소식을 전해 무엇을 어찌 하겠는가. 화산의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당장 제자들을 끌고 사파의 영역으로 돌격할 만큼의 무력은 갖추지 못했다.

 하여 청명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매년 매화가 피고 질 즈음 후원금을 두고 간다는 홍엽문의 제자를.

 작년처럼 놓칠 수 없다. 그보다는 도저히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 분명 정순한 기운을 지닌 정파의 아해가 언뜻 보면 사파나 수전노 낭인처럼 보이고 웬만한 살수 못지 않은 기척을 지닌 이유는 무엇인가. 얼굴이나 목, 손 등에 커다란 흉터가 한시도 사라지지 못할 일이 지금처럼 평화로운 세대의 후기지수에게 있느냔 말이다.

 홍엽문의 소식보다는 홍엽문의 제자라고 칭하면서 일년에 한 번 꼴로 본산을 찾아놓곤 후원금만 놓고 사라지는 아해의 사정을 알고 싶었다.

 청명의 간절함이 전해졌을까. 단은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다렸다는 듯 조심스레 손을 뻗는다. 단이 그것을 잡았다. 아해의 손은 청명보다 거칠고 모났으며 안면처럼 흉터가 많았다.

 청명이 이끄는 대로, 단은 옥천원을 먼저 방문했다. 멀끔해졌으나 여전히 텅 비어있는 내부. 청명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빈자리들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예를 갖추는 단을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암향백매화를 상인에게 넘기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예."

 누군가 들으면 안 되는 비밀을 야기하듯 옥천원에서 한참을 벗어나고서야 조심히 속삭인다. 청명은 씁쓸함과 설움을 동시에 삼키며 간신히 답했다.

 "신물은 있을 자리를 압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니 너무 염려치 마세요."

 "예, 그랬으면 좋겠네요……."

 담백히 전해오는 위로의 말. 은하상단도 찾지 못한 행방이다. 청명은 차분히 내뱉는 언동에 짜증이 섞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동하면서 이따금씩 마주친 사형제들이 단을 보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청명이 눈짓으로 상관하지 말라는 뜻을 보냈기에 제재없이 흘려보냈다. 따가운 시선 속에서 단은 불평 불만 없이 조용히 청명의 뒤를 쫓았다. 시정잡배 보듯 하는 시선에 발끈할 수도 있을 텐데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마치 익숙한 것처럼.

 "장문인. 일어나셨습니까?"

 "청명이냐."

 "예, 장문인. 홍엽문의 제자 단 소협을 모셔왔습니다."

 청명이 공손히 덧붙이자 안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허겁지겁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급하게 열린 문 뒤 익숙한 낯이 다소 창백하다. 크게 뜬 눈으로 죽립을 쓴 채 고개를 푹 숙인 이를 발견한 현종은 입을 달싹이며 말을 못 하다가 청명이 고갯짓으로 안을 가리키자 정신을 차렸다.

 "큼, 어서… 어서 들어오거라, 단아야. 쌓인 이야기가 많다. 안에서 얘기하자꾸나."

 "…예, 장문인."

 자신이 데려왔다지만 냉큼 합석할 수는 없다. 화산파의 장문인과 홍엽문의 제자로서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먼저다. 평소 같았으면 눈치고 예의고 뭐고 냉큼 끼어들어서 본전을 찾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배분 낮은 삼대 제자가 끼어있는 것보다는 장문인과 독대하는 게 아해가 말을 꺼내기도 쉬울 테지.

 "서찰을 보내도 전혀 답장을 받지 못해 불안하였다. 이쪽에서 사람을 보내기도 어려워 홍엽문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지. 어찌하여 매년 화산에 오르면서도 지금껏 한 번도 산문에 들지 않았느냐."

 "…송구합니다, 장문인."

 "단아야, 탓하려고 물은 게 아니다. 걱정되어 물은 것이지. 그동안 어찌 지냈느냐?"

 그래도 내부의 이야기가 들리는 근처에서 떠나지 않는다. 장문인이 궁금한 것들이 곧 청명도 궁금한 것들이었으므로. 나중에 현종이 묻지 않은 것들은 본인이 물을 생각이었다.

 살가운 인사와 어색한 답변이 오고가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흘리는 동안 저 멀리서 윤종이 다가왔다. 좀 떨어진 곳에는 단을 안내하면서 마주쳤던 사형들이 있다.

 아하. 청명은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대사형을 보곤 부러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삐딱하게 섰다.

 "손님이 왔다던데."

 "아, 속가의 제자셔."

 "속가…? 정말이냐?"

 "외양이 좀 수상쩍어 보이기는 한데, 수상한 사람은 아니야. 홍엽문이라고 알지?"

 "홍엽문… 아, 매년 후원금을 두고 가시는."

 "맞아."

 어릴 적부터 화산에 있었던 윤종이라면 알만 하다. 사제들에게 어떤 말을 들은 건지 두어 번이나 확실하냐고 되물은 윤종은 청명이 성질을 부리기 직전에 물러났다. 속가를 아는 윤종이 차근히 설명한다면 아이들도 괜한 경계는 하지 않으리라.

 소리 없이 깊은 숨을 뱉어낸 청명은 다시 처소 안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허나 무엇도 들리지 않는다. 얼마나 작게 얘기하고 있는 거야? 청명이 문에 귀를 바짝 갖다대기 전에 현종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괜찮다. 너에게도 사정이 있겠지. 허나 훗날 솔직히 말해주었으면 하는구나."

 "…송구합니다, 장문인. 제자,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사실대로 전부 말할 것을 약조합니다."

 "무겁게 받아들이지 말거라. 나는 너와 홍엽문이 괜찮은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지 알고 싶었을 뿐이니."

 "먼 곳입니다. 그곳에도 제자를 돕는 이들이 있으니 걱정마세요."

 "다행이구나. 그래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하거라. 화산은 어떠한 일이어도 속가를 도울 것이다. 부담없이 의지해줬으면 하는구나."

 "…예. 감사합니다, 장문인."

 이후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음 끝으로 의자가 끌리는 소리 이후,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여전히 죽립을 눌러 쓴 단이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청명에 동시에 시선을 주었다.

 "회포는 다 푸셨어요?"

 대화를 전부 주워 들어놓고도 뻔뻔하게 묻는다. 배분을 따지지 않더라도 상당히 무례한 행위임이 분명한데 장문인도 단도 개의치 않는 듯 그의 질문에 선선히 긍정할 뿐이다.

 "기다리고 있었느냐?"

 "예. 아래에 볼 일이 있어서요, 말씀 드리려고요. 가는 김에 단 소협도 배웅해드리고."

 "허허, 그러려무나."

 "전 괜찮습니다."

 "어차피 서로 가는 길인데요, 뭐. 갑시다."

 돌아가려던 이를 붙들 때와는 사뭇 다른 가벼운 태도. 단은 앞서 걸어가는 청명을 두고 머뭇거렸다.

 "조심히 가거라. 앞으로도 서찰보다는 직접 마주보며 얘기했으면 싶구나."

 "…예, 장문인.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현종의 살가운 인사가 그를 움직였다. 단은 어색한 움직임으로 현종에게 예를 차린 후 저 앞에서 기다리는 청명에게 다가갔다.

 이상하게도 청명은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하산했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홍엽문? 당연히 궁금하지. 그러나 물을 수 있는 게 없다. 생각해보아라. 아무리 어려워도 홍엽문이 건재했다면 저 아해가 저러한 흉이나 분위기를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현종이 홍엽문의 다른 제자, 아해의 사부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답하지 않았다.

 홍엽문과 관련된 모든 질문에 제대로 답한 게 없다. 그저 본인의 일이 마무리 되면 모두 설명하리라 뭉뚱그리며 회피했지. 장문인 앞에서 그리 말한 자가 일개 삼대제자에게는 제대로 답해줄 리가 없잖은가.

 하여 청명은 질문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거 하나는 말할 수 있다.

 "그거 아세요? 홍엽문의 이름이 홍엽문인 이유."

 "예?"

 대뜸 저처럼 환생했냐느니, 기억했냐느니. 아니면 청유 사저의 후손이냐느니 물을 수는 없지만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일 주제로 가벼운 대화를 하는 건 가능하다.

 단에게서 무언가 답을 듣기를 관둔 청명은 하산하는 길이 심심하지 않게 아무 말이나 하기로 했다.

 "…홍엽문을 세우신 조사님께서 화산에 어울리는 색을 담으려 하신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있는데 그 분 머리색에서도 따왔대요. 머리색이 특이했다나."

 단과 똑닮은 색이지만, 어린 삼대제자가 알 수 없는 사실이니 콕 집어 말하지는 않는다.

 몰랐던 이야기라 흥미가 생겼는지 단은 조금 밝아진 어투로 말을 받았다.

 "본가에서도 속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나 봅니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저도 장로님들이나 장문인께서 가끔 하시는 이야길 주워 듣기만 했죠. 홍엽문에서도 화산에 대해 얘기 좀 했나 봐요?"

 저의 기억에 기인한 거짓을 능청스레 뱉는다. 그 와중에 모른 척 되물으면 답이 없다. 힐끔 분위기를 살핀 청명은 맹한 얼굴이 우울이나 분노를 띄우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잠자코 기다렸다. 눈이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답을 생각하는 듯했다.

 한동안 묵묵히 걷기만 하던 단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많은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과거 화산이 어떠한 위명을 세웠고 어찌 마교를 몰아냈는지는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부들께서는…… 구파일방이라면 질색하셨죠."

 "그건 저도 그래요."

 많은 말이 함축된 문장을 청명은 알아들었다. 단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히 말한 것과는 별개로, 청명은 날 선 미소를 지으며 명랑하게 내뱉었다.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건들거리며 걷는 삼대제자를 힐끔거린 단이 청명이 했던 것처럼 되물었다.

 "…혹 소도장은 홍엽문에서 가르치는 무공도 아십니까?"

 "어… 아뇨? 그건…… 못 들었어요."

 청유 사저가 홍엽문을 세운 뒤로는 그를 몇 번 만나지 못했다. 거리도 있고, 청유는 문파를 돌보느라 바빴으며 청명은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 청진 사제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았던 사저의 무학 집착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에. 오죽했으면 사저와 즐거이 담소를 나누다가도 무공의 무 자만 나오면 질색하며 자리를 피했겠는가.

 매화검존에게 검법의 동작을 재현하거나 한 명의 검수로서 의견을 말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때는 왜 그리 피해다녔는지. 한 번쯤은 후대를 위해 무공을 진지하게 야기하는 청진 사제와 청유 사저에게 어울려줘도 좋았을 것을.

 그렇다면 후손들이 곤란을 겪지 않아도 됐을지…….

 뒤늦은 후회에 젖은 청명을 알 리 없는 단은 조곤조곤 말을 늘어놓았다.

 "홍엽문의 대표 무공은 뇌화유검입니다. 화랑신검께서 매화검법을 토대로 창안하셨지요."

 "뇌화유검……."

 화랑신검. 청유 사저의 별호를 후손의 입으로 직접 듣기란, 지금의 사형제들에게서 매화검존의 호를 듣는 것과는 기분이 달랐다.

 거기다 뇌화유검은 청명이 화산에 다시 입문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화산의 무공을 정리하면서 봤던 비급 중 하나였다. 비급에는 무공과 관련된 글이나 간략한 그림 외 작성자나 조언 따위는 전혀 적혀 있지 않았고, 그가 아는 청유 사저의 필체가 아니라서 홍엽문의 무공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청명은 다른 때였으면 지루하다고 말허리를 잘랐을 문파의 역사를 귀담아 들었다. 그가 익히 잘 아는 이의 모르는 이야기를 백여 년 뒤의 후손에게 듣는 경험은 마음 속 깊은 감정이 울렁기는 기분이었다.

 "육합검을 완벽히 익히면 뇌화유검을 배웁니다."

 "단 소협도 배우셨어요?"

 "…배웠지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를 갖고 계시는구나."

 단은 죽립 아래 흉진 입꼬리를 샐쭉거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단의 허리에서 흔들리는 칼은 아무리 봐도 검과는 거리가 멀다.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끝이 휘어진 도. 청명은 무의식적으로 도의 손잡이를 쓸어내는 거친 손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소도장께서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제가 좀 눈치가 빨라요. 그럼 검은 아예 안 쓰시는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한 박자 늦게 답하는 음성은 심연처럼 침잠되었다. 그 말 못할 사유가 현 홍엽문과 관련됐으리라 청명은 짐작한다. 하여 그는 아해가 부러 화제를 돌리면 모른 척 넘어가려 했다. 청명은 단의 사정이 궁금할지언정 아픈 부분을 파고 들 마음은 없었으므로.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말은 청명의 결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실은… 홍엽문의 신물인 예화검을 유실…하여, 그것을 찾기 전까지는……."

 "뭐… 뭐라고? 요? 예, 예화, 검? 예화검을 유실?! 얻다 팔아먹… 아니, 어쩌다가!"

 청유 사저의 애병이다. 그래, 사저의 애병이면 신물이 될 수도 있지. 그런데 그게 없다고? 선례가 있어서인지 신물이 유실되었단 소식에 펄쩍 뛰었던 청명은 다소 흡뜨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단의 희끗한 눈동자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 혹시… 화랑신… 아니, 예화검도 정마대전 이후로 유실됐나요?"

 "…아니오. 몇 년 전까지 홍엽문의 문주께서 대대로 물려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사저는 청명이 십만대산에서 눈을 감는 순간에도 다른 곳에서 천하를 위해 싸웠다. 마교의 잔당이 화산을 습격했을 때 종남의 힘을 빌려 몰아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그 순간까지도 살아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최후나 애병에 관한 이야기는 무엇도 알지 못했다.

 하여 혹시나 마교와의 전투 중 유실되었나 생각했는데 다행히 청유의 의지는 최근까지 이어진 듯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청명이 다시금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어느 새 그들은 화음 현 바깥에 서 있다는 걸 인지한다.

 잠시 멈춰 선 청명의 옆을 단은 그대로 지나친다. 그가 다음으로 어떤 질문을 던질지 알 텐데, 노골적으로 답을 회피하듯. 청명이 목소리를 내기 전에,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뇌화유검은 신물을 되찾고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홍엽문의 정수는 뇌화유검과 예화검 두 가지 입니다. 그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없다면 홍엽문의 의지는 이어질 수 없죠."

 차츰 느려지던 걸음이 멈춘다. 죽립을 고쳐 쓴 단이 몸을 돌려 망연히 선 청명을 마주한다. 가라앉은 회백색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적안을 바라보면, 씁쓸한 호선을 그린다.

 청명은 그 망가진 미소가 머금은 우울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젊고도 거친 아해의 낯에 순간적으로 익히 아는 이의 얼굴이 겹친다.

 "신물은 제 자리를 압니다. 곧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니 염려치 마십시오."

 "단 소협!"

 "친절에 감사합니다, 소도장.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만난다면. 희끗한 표정을 마지막으로 작년처럼, 단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일년이 흘렀다. 최소한 시선으로는 쫓을 수 있을 줄 알았던 단의 경공은 청명이 성장한 만큼 그도 성장했다고 대꾸하듯 붉은 시선은 그의 그림자도 따라가지 못했다.

 단은 혼자서 끌어안은 게 많은 사람이다. 그 모습은 전과 현 화산을 짊어진 청명과 닮았다. 자세한 걸 듣지는 못했으나 청명은 안다. 아해는 홍엽문을 짊어지고 있다. 후회와 설움을 끌어안은 자. 같은 바닥에서 발버둥치는 자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

 청유 사저. 뇌화유검과 예화검. 사파 틈에 휩쓸린 홍엽문. 청명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감정에게서 맹렬히 뜀박질하는 심장을 걷어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에 쓸려간 과거를 쫓듯 당장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해를 잡으러 달려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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