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식

B와 H의 재회

소설 '트와일라잇' 2차 창작

* 림주 이름/설정 O
* 원작 등장인물 관계 날조

 나는 단연코 헤이즐을 잊어본 적이 없다. 내가 이따금씩 포크스에 머무를 때면 잊지 않고 나를 찾아주었던 여자애는 피닉스에서도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이었다.

 이따금씩 헤이즐에게 빚졌다는 생각을 했다. 매년 한두 번 길어도 2주 넘지 않게 있다 훌쩍 떠나는 나를 십년지기처럼 대해 준 것도 모자라 매번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해준—찰리를 제외하면—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포크스에 와야 했던 나와 달리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헤이즐에겐 이보다 안성맞춤인 동네는 없다. 포크스는 365일 짙은 구름과 안개가 껴 있어서 햇빛이 내리쬐는 건 1년에 일주일도 채 안 되니까. 그래, 내가 좋아하는 피닉스와 정반대로.

 내가 포크스에 가겠다고 마음 먹고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그 우울한 도시에는 헤이즐이 있어서였다.

 찰리가 사준 중고 트럭을 주차하고, 학교 건물로 들어와 시간표와 안내를 받고. 아니, 사실 포크스에 들어서면서부터 생각했던 헤이즐은 점심시간이 돼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찰리에게 들어서 나와 같은 고등학교—포크스에 고등학교는 하나 뿐이긴 하다.—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시간표가 안 맞았는지 은근 학교가 넓어선지 오전이 다 지나고서야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겨우 만났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희끗한 연갈색 눈동자가 나를 발견하더니 도넛처럼 동그래지는 것도 잠시. 헤이즐은 피부가 얇고 옅어서 열이 오르면 금방 티가 나는 낯에 붉은색을 칠하며 활짝 웃었다. 그러더니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입을 달싹였다가 저와 함께 오던 남자애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헤이즐은 내가 주목 받는 걸 싫어하는 성정이란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큰 목소리로 부르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직전에 멈춘 걸 보면. 3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머리가 길고 키가 커지긴 했지만 헤이즐은 헤이즐이다. 그리고 의외로 마음에 들었던 중고 트럭을 봤을 때보다 더 큰 기쁨이 내 마음을 간지럽혔다. 포크스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진심어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내 앞에 선 헤이즐은 전학생인 내게 시선이 쏠린 것도 개의치 않고 곧장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그를 마주 안아주었다.

 "벨라, 오랜만이야. 온다고는 들었는데 그게 오늘인 줄은 몰랐어."

 "안녕, 헤이즐. 잘 지냈어? 등교하면 너부터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났네."

 헤이즐에게서는 여전한 흙냄새와 미미한 꽃 향기가 났다. 향수나 로션 이야기가 아니라 부모님이 꽃집을 하셔서 나는 자연스러운 향. 그리고 그것은 이 암울한 포크스에 색채를 더해주는 요소이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포크스에 돌아온 걸 실감했다. 더불어 긴장이 풀렸다. 헤이즐 효과였다.

 "헤이즐, 벨라랑 아는 사이야?"

 "응, 어렸을 때부터 친구야."

 "와, 그건 몰랐네."

 "벨라 시간표가 나랑 많이 다른가 봐. 지금까지 지나가면서도 한 번도 마주치질 않았다니, 이럴 순 없어."

 난 가벼운 마음처럼 풀린 입으로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지금이라도 바꿔달라 하면 바꿔주나?"

 "음, 벨라는 학교에 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며칠 지내다가 한 번 말씀드려 보자."

 "그래. 아,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밥 먹자.“

 나는 자연스럽게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름 까먹은 여자애 일행과 함께 앉으려고 했다. 하지만 헤이즐은 곤란한 낯으로 애매한 미소를 그렸다.

 "미안, 오늘은 같이 먹기로 한 애가 있어서."

 "그래? 어쩔 수 없지. 난 괜찮아."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헤이즐이 굉장히 미안한 듯 안절부절 못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동안 엄마에게 했던 거짓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래, 헤이즐은 친구가 많다. 막 전학 온 나보다 오래 됐으니 많다는 게 아니라 원래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상냥하고 귀여운 여자애를 누가 가만 놔둘까. 어디 소설에 나올 주인공 설정 같아서 비꼬는 것 같겠지만 이건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순수한 사실이다.

 그런데 아까 헤이즐이 같이 왔던 애가 누구였지? 나는 평범하게 물을 수 있는 질문—"근데 누구랑?"—을 던지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처음으로 보았다.

 난 그들을 조각상 집단이라고 단정지었다. 헤이즐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 쳐도 그나마 붉은 기가 보이는 헤이즐보다 창백한, 아예 색이 없어 보이는 창백한 집단을 무어라 해야 하나? 눈 아래 그늘이 짙게 내려앉은 어둑한 인상 따위가 매력 포인트로 보여지는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진 다섯 명. 그리고 그 중 백금발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왜 째려보는 거 같지?

 "아, 저기 있는 애. 에드워드야."

 헤이즐이 방금 나와 눈이 마주쳤던 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애는 눈이 마주쳤던 게 착각인 양 고개를 돌려 제 무리와 무어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랑 같이 온 애 맞지?"

 "응. 벨라, 이따가 학교 끝나고 정문에서 볼래?"

 "좋지. 이따 봐, 헤이즐."

 "응, 점심 맛있게 먹어."

 포크스의 몇 안 되는 빛을 그러모은 듯 빛을 발하는 외모가 어쩐지 재수 없다. 원래 그리 넓지 않았던 마음이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왠지 내 친구—아직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를 뺏어간다는 느낌을 쉬이 떨칠 수 없었다.

 마음의 안식처라 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를 떠나보내고 다시 어색하고 불편한 이들 사이에서 장단을 맞추며 사회성 좋은 척 해야 하는 게 매우 끔찍했지만, 내 욕심으로 헤이즐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되지. 선약이 있다는 애를 붙잡고 늘어지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스치듯 마주친 진한 눈동자가 괜히 마음에 박혔다. 나를 아니꼽게 본 것 같았는데.

 다시 힐끔 바라보면 내 망상에 불과하다는 듯 창백한 낯에 그린 듯한 미소를 띄우며 헤이즐을 맞이한다. 작게 열린 입이 뭐라 하는지 모르겠지만 설마 저런 애와 친구냐는 비아냥은 아니겠지. 알맞게 비어 있던 옆자리에 앉는 헤이즐의 표정이 선한 호선을 그리는 거로 봐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새로운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을 못 하고 자꾸만 헤이즐 쪽을 힐끔거리자, 무리 중 한 명이 헛다리를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내가 저들에게 관심을 가진 게 그들의 외모 탓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명 컬렌들. 컬렌 박사님의 집에서 다 같이 산다고 한다.

 "컬렌 박사?"

 "몇 년 전에 오셨어. 포크스의 젊은 의사라고 하면 모두가 알지."

 "성이 같은 애들이 누구라고? 친척이야?"

 "아니, 컬렌 박사님도 엄청 젊으셔. 다 입양됐다던데?"

 누가 쌍둥이고 입양됐고 지들끼리 사귀고는 내 알 바 아니지만 학생들이 사소한 것까지 알 정도로 동네에서 유명한 이야기라면 알아둘 필요가 있어서 얌전히 들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해 캐묻듯 툭툭 던져지는 질문들보다 다른 이의 소식을 듣는 게 더 반가웠다.

 그 중에서는 칼라일 컬렌이라는 의사가 헤이즐의 주치의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래서 헤이즐이 저 애들과 친한가. 주치의의 아들이 또래라서 친해졌나.

 헤이즐은 존재감이 남다른 컬렌들 사이에서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상하게도 사람 같지 않던 이들은 헤이즐이 무리에 들어가자 그제야 좀 사람다웠다. 조각상이 아님을 증명하듯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서 그런가. 피부가 창백한 건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장난기 넘치고 부드러운 미소가 신이 정성들여 빚은 듯한 안면을 덮었다. 그 사이에서 헤이즐은 볼에 코스모스 같은 열을 피운 채 대화를 나눴다. 그 장면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즐거워 보였다.

 헤이즐의 친구가 나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여러 번 되뇌이긴 했지만 어쩐지 속이 먹먹한 광경이었다. 나 진짜 속 좁다…….

 

 


 "쟤가 전에 말했던 걔야?"

 "응. 벨라."

 "이번에는 아예 전학 온 것 같은데?"

 "사정이 있었나 봐. 원래 피닉스에 살던 애야."

 "피닉스… 거기서 살던 애면 많이 답답하겠는데."

 "응, 그래서 좀 걱정이야."

 "오늘은 뭐 가져왔어?"

 "애 거 뺏어먹지 마, 에밋."

 앞에 쟁반을 늘어놓고도 건드릴 생각 없는 컬렌들과 달리 헤이즐은 줄곧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통을 열고 포크를 쥐었다. 정갈하게 쌓인 야채와 그 반 이상을 장식한 과일. 싱그러운 드레싱 향이 허공으로 퍼져갔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던 에밋이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오늘은 과일 샐러드?"

 "먹어도 돼."

 "우린 괜찮아, 헤이즐."

 "그래, 저 녀석 줬다간 저번처럼 다 뺏길 걸. 아주머니가 너 먹으라고 챙겨주신 거니까 너 먹어."

 "너희랑 같이 먹으라고 이만큼 주신 거야. 같이 먹자."

 "그럼 내가 먼저 하나."

 누군가 말리기도 전에 에밋의 포크가 과일 조각 하나를 가져갔다. 가족들의 질책 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과일을 입에 넣은 에밋은 우물거리면서 씩 웃었다.

 "아주머니가 손질한 과일은 이상하게 맛있단 말이야."

 "맛있으면 맛있는 거지 이상한 건 뭐니?"

 "너도 알잖아, 로잘리. 드레싱 때문인가?"

 "식물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들이니까 그런 거 아니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닌 것 같아, 앨리스."

 "그렇지? 다음에 만나면 손질법을 배워볼까 해."

 컬렌들이 저마다의 성격대로 한 마디씩 하는 동안 헤이즐도 드디어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한 입에 넣기 좋게 썰린 야채와 과일들. 어둑한 환경에서도 선명한 색을 머금은 샐러드가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애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헤이즐이 입에 넣은 야채와 과일을 우물거리는 동안 턱을 괴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교하고 만나기로 했어?"

 "응?"

 "벨라라는 저 애와 저녁에 만난다고?"

 "응.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하고. 벨라는 포크스를… 좋아하지 않는데 여기서 학교를 다니게 됐다니까 무슨 사정인지도 궁금하고……. 말하기 싫어하면 어쩔 수 없지만."

 우물쭈물 머뭇거리듯 하면서도 조곤조곤 늘어놓는다. 그러고는 민망한 듯 짓는 미소를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아쉽네. 오늘 저녁에 시간 되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왜?"

 "시내에 갈 일이 있는데 같이 가고 싶었거든."

 "아, 어디 가려고 했어?"

 "그냥. 눈에 닿는 대로 걷다가 서점 좀 들리고. 저녁 먹고."

 “그랬구나.”

 두런두런 주고 받는 대화를 가만히 듣던 앨리스가 큰 눈을 깜빡이더니 툭 내뱉었다.

 "데이트 신청?"

 헤이즐의 눈이 동그래졌다. 앨리스에게 돌아갔던 시선이 다시 에드워드를 향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달싹이는 걸 본 에드워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 데이트 신청하는 것 같네."

 "너희 원래 그랬잖니. 이제와서 뭔가 있는 것처럼 굴지 말지?"

 "왜, 로잘리. 재밌잖아."

 "가끔 너희는 나 놀리려고 모여있는 것 같아……."

 일련의 흐름을 어떻게 읽었는지, 연갈색 눈을 도르륵 굴리던 헤이즐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얇은 피부 위로 감출 새 없이 드러난 붉은 빛에 에밋이 보란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이들도 소리만 안 낼 뿐 저마다의 미소를 짓고 있는 건 같았다.

 그 와중에도 에드워드는 의미 모를 표정으로 웃었다. 뒤늦게 곱슬진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숨기려는 헤이즐을 그저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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