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들의 행복한 결말 (下)
행복만 남기를
약속 시각을 보니 아직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서, 루리는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듬성듬성한 인터뷰로 비어버린 분량을 무슨 얘기로 채울지가 걱정이니, 그것을 고민하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필요 없는 걱정이었지만.
“어머, 손님이 있었네요.”
“루리 씨?”
“아, 이분이 오늘 온다던 그 가수분…?”
타냐가 방금 자리를 비운 것을 봤으니 역시 텅 비어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상담실에는 타냐와 그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있었다. 새하얗고 창백한 얼굴에, 온통 푸른색.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루리는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말을 골랐다.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타냐.
“아, 인터뷰 시간이 다 되어가서 미리 오셨나 봐요. 오수 씨, 이분은 오늘 OOO방송사에서 리포터로 나오신 루리 씨예요. 루리 씨, 이분은 롤링핀의 후원자이신 오수 씨랍니다. 인사할까요?”
“앗, 그렇군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자연스럽게 소개받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타냐의 매너에 익숙한 안정감이 루리의 몸을 감싸와서, 그만 눈물을 흘릴 뻔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 동안은 전혀 볼 수 없는 배려였다. 타냐는 자연스럽게 간이의자를 끌어다 루리의 자리를 만들고, 차까지 새로 끓여주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입이 쉬지 않아 오디오가 꽉 차는 것은 물론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수 씨도 인터뷰를 조금 해보는 게 어떨까요? 롤링핀의 후원자, 라는 입장에서요.”
“아, 앗, 제가요? 전 조금….”
“그렇게 부담스러운 질문은 하지 않아요! 조금만 부탁드릴게요, 네? 질문 딱 한 개만 할게요!”
“맞아요, 오수 씨. 5분도 안 걸릴 거예요.”
“…그럼 조금만….”
심지어 직접 인터뷰이를 섭외해주기까지! 루리는 타냐를 따라 오수를 설득하고는, 싱글벙글 웃었다. 촬영을 시작한 지 두 시간여 만에 정상적으로 방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잠시 울컥할 뻔한 루리는 서둘러 자리에 앉아 질문을 생각해냈다. 다행히 후보군 중에서 할 만한 질문이 있었다.
“자, 그럼 하나만 여쭤볼게요. 롤링핀을 후원하고 계시는 이유가 뭘까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음….”
“어떻게 대답하셔도 괜찮으니 대답해보세요, 오수 씨.”
그렇게 고민하는 오수를 앞에 두고, 루리와 타냐는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 모습을 카메라가 담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후원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두 히어로….’ 따위의 편집이 들어갈 것 같은 그 장면에, 조금 부담스러웠던 오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늘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니까,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제가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돕는 거죠.”
“좀 더 자세히….”
“어,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니 늘 과잉 진압을 하는 히어로 대신 배상ㅇ….”
“맞다, 루리 씨 약 드셨나요? 오수 씨는 마약 인간이라 오래 같이 있으면 약을 꼭 먹어야 해요.”
“아아뇨! 좀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좀 더 자세한 대답을 들으려던 루리는 롤링핀의 치부가 나오려던 순간에 말을 끊은 타냐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타냐는 미안하다는 듯 오수에게 웃어주며 약을 받고 있었다. 카메라맨까지 약을 먹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타냐는 조심스럽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 오수 씨, 조금 전에 말했듯이 저희는 인터뷰 일정이 있어서요.”
“알죠. 그럼 또 다음에 뵐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결국 롤링핀의 후원자로부터도 애매한 답밖에 얻지 못했다. 이걸 다 자르고 나면 방송으로 내보낼 수 있는 내용이 나오기는 할까…? 루리는 허무한 대답을 남기고 저 멀리 떠나가는 오수에게 애써 발랄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옮겼다. 타냐와 마주 볼 수 있는, 오수가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자연스럽게 오수를 보내준 장본인, 타냐는 새로이 차를 우리며 루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인터뷰 시작하는 건가요? 아침부터 기대하고 있었어요.”
“-물론이죠! 시청자분들이 얼마나 기대하셨는지 몰라요. 질문을 추첨하는 게 일이었다니까요?”
“감사한 일이네요. 바로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런 타냐의 말에 자연스럽게 큐시트를 정리하던 루리는, 자연스럽게 진행을 타냐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잠시 굳었다. 실제 방송인보다 더 노련한 진행 실력…! 이게 히어로의 힘?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고, 오랫동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을 여유는 없었다. 루리는 지체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은 여러 가지를 함께 물어볼 거랍니다! 바로 신상에 대한 질문인데요~ 나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가족 관계… 어휴, 많네요. 생각나는 대로 대답해주시겠어요?”
“와, 신상이라…. 음, 일단 나이는 서른 살이에요. 좋아하는 건 허브티, 싫어하는 건 단 거랑 토마토…? 정도네요. 가족관계는 부모님과 6살 위 오빠가 있답니다. 취미는 프랑스 자수고, 신발 사이즈는 235? 학교는 OO여대… 더 생각나는 게 없어요. 어쩌죠?”
“충분해요! 그나저나 OO여대라니, 공부 엄청 잘하셨나 봐요! 근데 왠지 학교에서의 타냐 씨는 전형적인 모범생일 것 같긴 해요. 왠지 인기 많았을 것 같고~”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와, 자신감! 멋져요!”
아, 드디어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된다! 고작 오 분 전까지만 해도 쨍하니 굳어버린 방송 분량에 골골대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루리는 즐겁게 큐시트를 넘겼다. 타냐는 눈치 좋게 루리의 말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럼 다음 질문! 방송에 나오면서 히어로 일까지 하시려면 아주 바쁠 텐데, 어떤가요? 이건 저도 궁금해요. 보통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음… 일단 제 일과는 크게 출근해서 롤링핀 히어로의 컨디션 관리, 점심을 먹고 제 히어로로서의 업무, 저녁 식사 후 방송 및 기타 업무 처리-로 이루어져 있네요. 좀 빡빡하긴 해요. 그래도 할 수 있을 때 해둬야 하지 않겠어요?”
“하루 9시간 근무는 훌쩍 넘겠는데요? 건강 먼저 챙기셔야겠어요!”
“당연히 노력하고 있죠. 그래도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기분은 좋아요. 어렸을 때부터 워낙에 이야기 들어주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게 제 기쁨이라 어쩔 수 없어요. 제가 할 일이 있다면 자꾸 찾게 돼요. 어쩌면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죠?”
“이 일에 딱 맞게 타고나셨다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래도 몸은 꼭 챙기셔야 해요?”
“물론이죠.”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최근까지의 활동과 팬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서장에게 해야 했을 롤링핀에 대한 질문(일개 상담사라기엔 많은 부분을 알고 있었다)이 네다섯 개 정도 이어졌다. 타냐는 수많은 방송과 인터뷰 이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센스 있게 대답을 해주었고, 루리는 환호했다. 방송 분량의 절반이 타냐로 채워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지만, 그건 편집팀에서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루리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다시 다음 질문입니다! 끝이 머지않았어요~ 각종 커뮤니티에서부터 많은 시청자분들이 궁금해했다는 질문인데요. 바로 타냐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가, 입니다!”
“조금 부끄러운 질문이네요. 전 성인이 아니라서 모든 사람을 좋아하진 않는걸요.”
“하지만 사람을 별로 싫어하지 않는 건 사실 아닌가요? 농담이라도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음-”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에서 두 번째 질문. 루리는 타냐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 루리로서는 아아주 예전에 비슷한 질문을 했기 때문에 더욱 궁금했다. 어떤 사람을 싫어하냐는 말에, 의외로 대답이 나와서 신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타냐는 어떤 대답을 할까?
“일단, 전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이 있어요. 그게 정말 좁을 뿐이에요. 그 외에는…. 다 이해해보려는 버릇이 있거든요?”
“이해한다구요?”
“제게 히스테리컬한 행동을 보여도 ‘아, 저분이 오늘 기분이 나빠서 그런가 보다. 그럼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가는 거죠. 너무 단순한 비결인가요?”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자신을 되돌아보고, 그 입장이 되어보는 건데.
타냐는 온화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루리는 굳이 모니터링을 하지 않아도 이에 이어질 시청자 반응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단순하기는요, 역지사지라고는 해도 누가 그걸 실천하겠어요. 하나도 안 쉬운걸요? 타냐 씨라서 할 수 있는 거 아니예요?”
“하지만요, 저도 기분이 나쁠 때면 다른 사람에게 나쁘게 대할 때가 있는걸요. 자꾸 그 상황에 공감하게 되는 거예요. 아, 나도 그런 상황에서 자라왔다면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그 사람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요. 그냥 ‘고작 그 정도로는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에는 충분하죠.”
루리는 마치 선생이 학생에게 설명하듯 늘어놓아지는 말들의 향연을 홀리듯 귀담아들었다. 여느 방송이나 잡지 속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말이, 루리 앞이기 때문인지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와, 그게 타냐 선생님이 ‘OO 갱생 학교’에서 상담 교사로 활약할 수 있는 비결이었을까요? 저라면 대뜸 화부터 났을 텐데, 정말 대단해요. 그럼 혹시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음, 롤링핀과 그를 돕는 버터컵의 히어로들을 괴롭히는 사람이요. 제 주변인을 괴롭히는 사람도 물론이구요. 물론 일반적인 범죄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제 위치에서 접할 일은 많지 않아서.”
타냐는 한 손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며 말을 이었다.
“예전엔 갈등이 있어도 양쪽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둥, 중간에서 균형을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사람을 싫어하는 게 무섭고 낯설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히어로들은 제게 너무 소중한 사람들이거든요. 일단 그분들이 힘들어하면 불쑥 화가 나지 않을까요? -어쩌면 편애일 수도 있겠네요. 제 첫 내담자분들이니까요.”
“하하, 혹시라도 히어로분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시청자분들? 타냐 선생님이 싫어하신대요~”
“에이,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무서운 사람 같잖아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아니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루리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것 역시 타냐답다고 생각하며 큐시트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타냐는 또 습관처럼 부드러운 눈길로 루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담자라면 저렇게 좋아죽는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본다니까. 루리는 저 혼자 부끄러워하려던 것을 겨우 참고 말을 이었다.
“자아, 그럼 마지막 질문이에요! 타냐 선생님, 능력이 이렇게 출중하신데 굳이 롤링핀에 있는 이유가 뭔가요? …타냐 선생님이 워낙 이곳저곳에서 활약하시니까요. 시민 단체나 제약 기업, 또 인터넷 괴담으로는 주주까지도 가능하다고….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히어로 그만두고 살아도 먹고 놀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음-”
그리고 타냐는 다정하게 웃으며 메타 발언을 했다.
“루리 씨, 솔직하게 말해봐요. 분량 잘 나왔나요?”
“…아, 아뇨, 다들 바쁘시기도 하고, 인터뷰할 상황이 잘 나지 않더라구요. 저 잘리면 어떡하죠?”
상담할 때의 상황처럼 솔직하게 대답해버린 루리는 잠시 흠칫했지만, 일부러 그런 듯 능청스럽게 굴며 엄살을 떨었다. 진심이 가득했다. 자신 있게 리포터 자리를 받았는데 기껏 준비한 인터뷰이는 탈주하고, 좀비들이 가득한 의료실과 폭력의 현장이 된 서장실을 공개하고, 그 이후로도 영 시원치 않은 인터뷰까지….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나서야 하는 게 히어로라서 그래요. 저처럼 책상물림이 아닌 이상 앉은 자리에서 계속 인터뷰하기도 힘들죠. 피곤하면 짬 내서 누워있어야 할 때도 있고요.”
“아까 의료실에 갔을 때 완전 깜짝 놀랐다구요….”
“그분들은 체력이 없어서 더해요.”
타냐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팔을 들어 말랑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듯했다.
“인력은 부족하고, 상황은 열악해요. 하지만 히어로들은 특기와 체질을 이용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힘든 직업이죠.”
“하긴, 이렇게 바쁘게 일하는 것도 어지간한 봉사 정신이 아니면 힘들 것 같아요.”
“음….”
이게 아닌가? 루리는 타냐가 턱을 괴며 고개를 기울이는 것에 함께 갸웃거렸다. 뭔가 잘못 이해한 것이 있는지, 잘 얘기가 전개되는 것의 방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히어로는 다른 직업과 다를 바가 없어요. 봉사 정신만으로는 할 수 없죠. 알맞은 재능, 목표, 혹은 돈 사정…. 뭐, 봉사하고자 하는 양심과 마음가짐이 있다면 더욱 좋겠죠. 하지만 다 봉사 정신만을 갖고 일하는 것은 아니에요.”
“으응? 그런가요?”
결국 선생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루리는 물어봤던 질문을 뒤로하고 꼭 말하고 싶던 말을 늘어놓고 있는 타냐를 낯선 눈길로 바라보았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언행이었다.
“음, 그러니까, 그들은 초인이 아니라는 소리예요. 완벽할 수 없고, 연약한 부분들이 있죠. 물론 시민들의 삶을 위해 궂은일을 거뜬히 해내는 멋진 히어로지만요.”
“아….”
“그래도 저는 그분들이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은신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밖에선 든든한 히어로여도, 제 앞에서는 연약한 내담자거든요. 요컨대, 히어로의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할까.”
그래서 저는 롤링핀에 있는 게 아주 만족스러워요.
타냐는 빙그레 웃었다. 루리는 함께 웃으며 큐시트를 정리했다.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는 게 너무 멋지고, 부러워지는데요?”
“그런가요? 하지만 루리 씨도 충분히 멋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걸요.”
“흐응, 빈말인 거 다 알아요.”
“심술은. 제 맘 다 알잖아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끝났다.
방송의 마지막 장면은 타냐 특유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루리는 확신했다.
‘어서 와요, 나가 군.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어떤 고통이나 특이한 사람들도, 날 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이 나와 자신이 닮았다고 말했는데, 분명 세상에 나와 닮은 사람은 많지만 그들과 닮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나는 지금 그 무엇보다 일을 중시하고 있지만 그건 이게 내 넉넉한 직장이기 때문이다. 더 많이 벌고 싶어서 그만두진 않겠지만 만약 궁해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할 때도 있다.
‘나가 군?’
하지만 이런 나를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으로 인해 조금은 변했을지도.
‘…타냐 님.’
‘으, 무슨 일이에요? 나가 군이 갑자기 그렇게 부르니까 조금 부담이….’
만약 궁해지면, 직장을 옮겨봤자 타냐 선배일 것이다. 지금도 타냐 선배는 내 복지를 걱정하고 지켜주느라 저 자신의 복지는 제쳐 두는 사람이니까. 좀 나아지겠지.
게다가 나를 재앙 취급하며 차지하고 싶어 하던 부류의 간부들은 사라졌다. 말은 없지만, 타냐 선배가 치워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간부에게 통보하던 자리에 나를 데려간 것은 타냐 선배가 아닌가. 그때 이후로 간부들은 내가 타냐 선배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편하기도 하고, 틀린 말도 아니라서 그냥 있는 중이다.
‘-타냐 선배도 이런 고민, 해본 적 있어요?’
어쨌든 나는 여전히 문제를 완전히 외면하기엔 양심적이지만, 적극적으로 관찰하기엔 이기적이다. 결단을 내리기 힘들어서 계속 고민하는 걸 택했다. -사실 택했다기보단 그냥 흘러가는 거다. 어차피 몸이 고달파지면 양심의 통증은 무뎌진다.
‘으응, 당연하죠. 그때마다 포기했어요. 애초에 지금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으니까. -아, 나가 군은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더 고민되겠네요.’
‘예….’
‘그런데 저도,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도, 오래 고민했어요.’
‘네?’
‘그러다 못 참겠으니까 들이받은 거죠. 웃기죠?’
-그때그때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요, 나가 군.
그런 양심의 통증에 매번 약을 발라주는 사람이 있으니, 외면하기는 더욱더 쉽다. …하지만,
지금은 무척 흐려진, 성심성의껏 돕고 싶은 그 마음을 억지로 끌어올릴 때가 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타냐 선배라면 이 몇 배는 해낼 테니까. 계속 왜 그러고 싶냐고 물으면… 고마우니까. 그런 이유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솔직히, 나는 변하기 귀찮다. 누가 잘 잡고 때리고, 협박해도…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원래 다들 그렇다. 어떤 치열함도 겪지 않고, 큰 시련을 극복하지 않아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은 남을 돕는다. 다만, 누군가로부터 그런 도움을 받고 일어선 기억이 있다면….
“좋은 기억이 됐다는 거, 진짜로 빈말 아니야. 네가 무사했잖아.”
누구에게라도, 그런 호의를 갚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고맙다고 해줘서 고마워. 내일은 더 잘할게.”
누군가 내게 좋은 기억을 남겨줬던 것을 생각하며.
이렇게.
-너에게 행복만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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