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생환 (完)

생환 - 0

쌍존 논컾: 환생 청명 & 생환 당보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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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 [ 환생 검협 & 생환 당보 ] 원작 날조

- 글 쓴 사람은 화산귀환을 1549화까지 읽었습니다. 글에 직접적으로 스포일러가 될 내용은 없습니다.


“야.”

툭, 튀어나온 말이 여간 성의 없는 게 아니었다. 당보는 미간을 찌푸려 반응하면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저런 보잘것없는 호칭에 대답하기엔 제가 너무 대단한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말이다, 본디 호칭이라는 게 차고도 넘치기 마련 아니겠는가. 강호 사람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정답게 별호를 만들어주고도 시간이 남아돈다고 하하호호 하릴없이 같이 칼춤이나 추는 판인데! 이놈의 형님은 안 지가 몇 년, 덜렁거리는 사지를 고쳐준 지가 몇십 번, 등 뒤로 날아오는 비수를 튕겨내 준 지가 몇백 번인데도 아직도 저를 ‘야’라고 부른단 말인가. 서럽고도 치사해서 답하려야 답하기가 싫다.

“야.”

상대는 당보가 뛰어난 무인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였다. 그러니 저를 업은 게 당보가 맞는 이상 그가 일부러 답하지 않을 걸 알 텐데도, 상대는 고민 없이 꿋꿋하게도 다시 ‘야’라고 불렀다. 고약한 심보였다.

이번 부름에는 당보도 조금 고민해야 했다. 이 형님의 성격상 세 번째는 없다. 그러나 이제 와 답하기엔 앞서 세운 자존심이 아깝다.

“거, 좀 정답게 불러줄 수 없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대가리가 깨지기엔 당장에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결국 당보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자, 그 속내를 가늠한 듯 피식 웃는 소리가 흘렀다.

“감 좋네. 이번에도 대답 안 하며 사람이 아닌 셈 치려 했는데.”

“이미 나귀 아님 말입니다!”

당보가 외치며 크게 뛰자, 등이 흔들렸는지 힘없이 달랑 늘어진 상대의 사지가 어깨에 부딪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 탑승감이라도 좋던가.”

상대가 그나마 멀쩡한 팔로 제 머리를 탁 때렸다. 당보는 차마 뱉지 못한 욕을 짓씹으면서도 다시 안정적으로 상대를 받쳐 업었다.

“아주 팔 힘 팔팔하네! 그냥 내려서 뛰지 그러쇼?”

“나야 좋지.”

“내리기만 해!”

이미 처치를 다 끝낸 몸을 다시 혹사하겠다는 말에 당보가 소리를 크게 내질렀다. 그냥 차라리 대침 놓아 기절시킨 채로 이동할 걸 그랬나보다, 하고 당보가 후회하던 찰나-

깡, 까강! 당보의 눈앞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두어 번 울렸다. 화살들이 투둑,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당보 목 앞에 자리한 검날이 파르르 떨렸다. 이미 수없이 많은 목숨을 베어내 더러워진 날 위에 맺혀있던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피가 사라진 부분에 달빛이 닿아 섬뜩히 빛났다. 그 빛에 상대, 청명이 빠르게 검을 거두었다. 보름달이 뜬 밤에는 이러한 작은 빛으로도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오른쪽엔,”

청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보는 몸을 틀어 오른쪽으로 뛰어들었다.

“없다. 진작 집중 못 하지?”

“이 인간은 진짜 입만 살았나.”

당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 인간을 기절시키고 짐짝 옮기듯 어깨에 메고 싶다마는… 애석하게도 고이 모셔야 할 중환자인지라 상처에 압박이 갈 만한 자세로 업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보니 적진을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두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려서, 살의가 득실거리는 이곳을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청명이 일어나 있어야만 했다.

“출혈은?”

“멀쩡하니까 앞이나 봐라.”

‘이랬는데 나중에 피 묻어있기만 해봐!’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데 그게 이 형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놈들 것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따름이었다. 물론 제가 직접 지혈했으니 방금 같은 잔챙이 화살을 몇 발 막은 걸로는 출혈이 있진 않았을 테다. 마음 편히 속으로 구시렁댄 당보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지형이 원만해졌다. 곧 있으면 이 음산한 지형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이 목숨줄 하나는 쇠심줄보다도 질긴 형님이 다시 살아남을 거란 생각에 당보 눈에 옅은 안도가 맺혔다.

“당보야.”

그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렀다. 당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인간이 그래도 저 때문에 제가 이만치나 고생하는 건 아는 모양이지. 당보가 흐뭇함을 녹여 답하였다.

“왜요.”

“나는 네가 다치면 놓고 갈 거다.”

“뭐?”

이 인간이 미쳤나! 아무래도 다친 게 사지가 아니라 머리였던 모양이다. 그래, 머리를 맞아 정신이 회까닥 돈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이리 산통을 깨는 게 설명이 안 된다. 그러니까 차라리 다친 환자로 여기자며, 당보가 열심히 저 자신을 세뇌하듯 되새김질했다.

청명의 말이 흘렀다.

“뒤처지기 싫으면, 다치질 마.”

“거… 이 매정한 인간이… 하, 챙기지 마쇼! 도사 형님 뒤도 내가 챙기고, 내 뒤도 내가 챙기고!”

“…….”

“한 번 놓고 가보쇼! 내가 정신이 붙어있는 한 찰거머리처럼 딱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질 않을 테니까, 어디 한 번 해보시지!”

맞을 것을 각오하고 거세게 어깃장을 놓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답이 없었다.

등 뒤에 실리던 체중이 조금 무거워진 게 느껴져서 당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보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무엇도.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번쩍, 눈을 뜬 당보는 황급히 상체부터 일으켰다. 옆에 자리하던 의원들이 황급히 당보를 만류했다. 그러나 당보는 선뜩한 가슴에 주변부터 빠르게 둘러보고선, 바로 물었다. 까끌까끌한 목 탓에 거칠어진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도사. 도사 형님은?”

당보의 물음에 의원들의 표정이 모두 변모했다. 원하지 않던 질문을 바로 직면하게 되어 일그러진 얼굴들이었다. 어수선하고 침중한 분위기이니 이미 답은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변인들의 얼굴을 낱낱이, 매섭게 살피던 당보의 눈이 한순간에 멍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당보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 두 빈손을.

“아…….”

느릿하게 탄식을 흘린 당보의 상체가 우두커니 굳자 주변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그래, 결국 놓고 갔어. 놓고….

깨달음이란 무엇이고, 직감이란 무엇인가? 당보는 도사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세상 이치들을 주의 깊이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도 때때로 깨달음이란 해답은 강제로 눈앞에 들이밀어진다. 그를 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세속적인 인간에게 공으로 던져지는 깨달음은 절망뿐인 모양이다.

“…끝났군.”

“……그렇습니다.”

매화검존이 어떻게 되었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하던 이들이, 끝났냐는 질문에는 답한다. 이는 암존이 묻는 말이 전쟁의 끝을 가리키는 거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겠지. 실지로 암존이 알고자 하는 건 그런 게 아님을 알면서도.

“…하. 하하.”

결국 당보가 헛웃음을 짓자, 그를 신호로 여기기라도 한 듯 조용했던 방안이 온갖 말들로 가득 찼다.

“우선 안정부터 취하셔야…”

“가주님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정마…. ……끝… 화산……. ……휴식을……. ……장문……전하고…….

수많은 말들이 윙윙거리며 귀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당보는 손을 한 번 내젓지도 고개를 한 번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으니, 의원들은 끝내 암존의 뜻을 알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났다.

모두가 물러나니 고요만이 존재했다.

“…….”

당보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 깜빡임이 지나가고, 다섯 번째가 될 즈음에는 시야가 트였다가 다시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시 눈을 깜빡일 때엔.

‘아니야.’

문득 고집 닮은 부정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도 형님이 죽었다고 말하진 않았어….’

그러니 이는 무용한 울음이다. 당보는 필사에 거짓을 담아 몸을 맡겼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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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땐, 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당보는 차분한 모양새로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머리를 묶어 분분한 비녀를 꽂았다. 그리고 화산에서 온 제자들의 안내를 받아 가솔들과 함께 사천을 나섰다.

사천에서 화산으로 가는 익숙한 길을 지나, 정문에 다다르니 익숙한 이가 현판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장문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청문과 당보가 마주하여 서로 읍하였다.

매화검존이 천마를 죽인 후 정마대전의 끝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마교 잔당들이 여전히 남아 세상 곳곳을 어지럽혔으니, 진정한 끝을 맞이했다곤 할 수 없었다. 아직 잔재하는 마인들을 처리하여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해 화산과 사천당가가 함께 하였고, 그리하여 모든 게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이 찾아왔다. 마음 놓고 죽은 이들을 떠나보낼 날.

진혼제.

그를 앞두고 청문과 당보가 마주 앉아 차를 나누었다. 당보가 찻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느리게 마시자, 청문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보가 의아한 낯을 하자 청문이 입을 열었다.

“차도를 아는 모습을 보니, 새삼 즐거워서 말입니다.”

당보와 함께하던 화산의 도사는 정작 차 맛을 몰라 매번 단숨에 쭈욱 들이키며 자리를 피할 궁리만 했는데 말이다. 그 속뜻을 안 당보가 아, 하고 미소 지었다.

“매화검존께선 잔이 필요하지 않으실 정도로 호탕한 분이셨죠.”

당보가 너스레를 떨자 청문이 허허, 웃었다. 오늘이 진혼제만 아니었어도 너털웃음을 지었을 게 뻔히 보였다.

“검존이라니… 말 편하게 하십시오. 이미 피차 다 아는 사이에 무슨.”

둘만 남으니 청문의 어조가 친밀해졌다. 익숙한 말투에 당보도 조금 가벼운 투로 대꾸하였다.

“하하. 제가 청문진인 앞에서 예를 갖추지 않고 조금이라도 허투루 굴다가는, 도사 형님이 저 위에서 선계 떠나가라 제 욕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긴장할 수밖에요.”

“아무래도 신선들께서 놀라실 일은 줄여야겠지요.”

청문과 당보가 나지막한 웃음을 띤 채 서로 몇 마디 나누었다. 그리하여 차에 맺힌 매화향이 방 안 깊숙이 스며들 즈음, 당보가 잠시 망설이는 낯을 하였다. 청문이 질문하라며 말을 멈추고 가만히 기다렸다.

“형님의 유해는…”

청문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당보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전쟁이 끝나고, 마교 잔당을 처리하는 틈틈이 십만대산에 남겨진 유해를 수습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마교에 의해 훼손되어, 찾은 유해 중 멀쩡한 모습인 게 극히 드물었다. 그러한 사정을 염두에 둘 수 있었던 전쟁 초반에는 시신을 깊이 파묻기라도 했건만, 전쟁 후반에는 그를 신경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늦게 죽은 이들일수록 유해는커녕 애병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니 매화검존의 유해를 수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천마보다도 늦게 죽은 이 아니던가. 그 무엇도 신경 쓰기 힘들 때 홀로 죽어버린 이가 남긴 흔적을 어찌 찾을까.

‘다시 보지 못하겠구나.’

지켜야 했을 등을 이제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되었다. 지옥을 함께 했던 당보니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입 안에 머금은 차가 순식간에 쓴물이 되었다. 당보는 애써 차를 삼켜 목 뒤로 넘겼다.

청문이 입을 열었다.

“애초에 청명이 제 유해를 수습 못 했단 사실을 그리 신경 쓸 아이가 아닙니다. 그를 신경 쓰다가 마인을 하나라도 놓쳤다면, 사람을 하나라도 더 다치게 했다면, 그때야말로 경을 쳐도 크게 칠 아이 아닙니까.”

그리 말하며 청문이 웃음을 두어 번 흘리는 모습을 보자니, 그 무거운 속내를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어 당보는 입을 다물었다. 비록 청문과 청명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곤 하나, 서로를 아끼는 그 마음만은 여느 부모자식보다도 더했다. 청문이 이리 웃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을지….

‘…그래도.’

그래도 당신은 마지막 모습을 보았잖아. 나는….

“…….”

순간 든 치졸한 마음에 당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복잡한 속내를 눈치챈 청문이 잠시 침묵하며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내주었다.

“…장문인의 말이 옳습니다.”

결국 가까스로 내뱉지 말아야 할 말을 삼킨 당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청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 모든 게 밉게 느껴지느냐.”

“…아….”

“내 그 마음을 어찌 모를까.”

말투가 친밀해진 와중에도 유지되던 존대가 사라짐은 앞으로 건넬 말이 각 문파의 장문인과 장로로써 나누는 말이 아님을 뜻하였다. 당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 오래전이 아닌데도 순식간에 아득해진 과거가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넷이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그 한때가.

그러한 와중에도 청문의 말은 이어졌다.

“어느 날엔 그리움이, 어느 날엔 원망이 솟아나지. 그래서 어쩔 땐 매정하다고 욕하고, 어쩔 땐 왜 그리 힘들게 갔냐고 동정하고, 어쩔 땐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고 외치며 울고 싶은 것을…. 그럼에도 지키고 이끌어야 할 이들이 남아있어서, 아직 가야 할 길이 있어서. 그래서 감내하고 참아야만 하는 마음을 내 어찌 모를까.”

청문에게 청명은 가족이다. 청명에게 당보는 유일한 친우다. 그럼 청문에게 당보는 무엇이겠는가. 같이 나고 자라지 않았어도 서로를 이해하던 둘을 바라보았으니, 청문에게는 당보 또한 지키고 싶은 누군가이다. 그래서 청문은 흔들리는 당보에게 위로를 담아 서글픈 낯을 드러냈다.

늘 평정심을 유지하던 청문이 제 솔직한 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낯설고도 불편해서 당보의 시선이 흔들렸으나, 청문은 다 안다는 듯 잔잔한 눈으로 당보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나 또한 이제야 그 아이의 마지막을 입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을.”

그러한 말로 청문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보는 몰랐던 마지막을.

“장문사형.”

엉망이었다. 핏물로 뒤덮인 세상 속에 청문이 있었다.

아니, 청문뿐일까. 모두 저마다 굳은 신념 품어 세상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 몸을 반쯤 잃었거나, 땅에 반쯤 파묻혀 비명조차 잃었거나… 진작에 싸늘한 주검이 되었거나.

온 생명이 빠짐없이 셋 중 하나의 역할을 챙긴 와중에 역시 멀쩡할 리 없는 청명은 제 꼴도 모르는지 덤덤히 걸어와 툭, 제자 한 명을 청문 옆에 내려놓았다. 같은 방식으로 가까스로 피바다 외곽에 자리하게 된 청문 옆에는 아직 숨 붙은 제자들이 정신을 잃은 채 놓여있었다.

청문 또한 사경을 반쯤 헤매는 상태로 아스라한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 몸에 서린 자줏빛 기운이 위태로이 떨리는 걸 본 청명이 청문의 손을 꽉 잡았다.

“장문사형. 우리만큼 미련한 사람이 어디 있나 싶습니다. 도를 논할 자격 하나 얻기가 이렇게나 어려우니 원.”

피범벅 된 속에 선명한 개화의 눈빛을 지닌 이가 청문을 내려다보았다. 남들이라면 흉흉하다고 피했을 그 눈이, 함께 자라 그 생동을 아는 청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올곧아 보였다. 그래서 그 시선에 답하지 않을 수 없어 청문이 덜덜 떨리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청… 명, 아.”

거친 숨 속에 터져 나온 이름을 들은 청명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나, 최선 다했습니다. 제 몫을 할 수 있다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말한 우리 사제들이, 겁도 없이 끝까지 버틸 거라 말하는 우리 사질들이… 살아도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준 거예요.”

이미 온갖 날붙이로 몸이 꿰뚫려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으면서, 청명은 그 무엇 하나 없었던 일처럼 태연히 서서 입을 열고 있었다. 당당한 말이 이어지는데도 보는 사람이 더 위태로울 정도로 아찔한 모습이었다. 청문은 청명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니까 이젠 장문사형 차례입니다. 그 사람들이 오겠지만… 그래도 정신 차리면, 사형이 어떻게든 붙잡고 화산을 이끌어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청명이 제 부재를 상정하는 것만큼은 뚜렷해서 청문이 눈을 부릅떴으나, 청명은 청문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뒤돌아 천마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걱정은 말고. 내가 저 새끼는 꼭 죽이고…”

죽이고. 그 뒷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청명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청문을 잡은 손을 놓았다. 그러나 청문이 힘을 내어 손을 뻗어 청명을 꽉 잡았다. 심각히 다친 청문이 이만치 힘을 낼 거라 예상치 못했는지, 청명의 몸이 뒤로 설핏 흔들렸다.

청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청문에게서 나오던 자줏빛 기운이 지고, 그 위로 그림자만이 졌다. 그리하여 청문은 청명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청명…아.”

“…….”

“돌, 아와야… 한다.”

돌아와야만 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청문이 울컥거리는 피를 토해내며 다시 한번 가까스로 말하였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나와, 화산이. 어떻게든, 어떻게든….”

지켜줄 테니까.

“…하하….”

그 말을 들은 청명이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작에 뒤 좀 볼걸.”

이 전장에 온 후로, 아니 훌쩍 다 자라 천하제일검의 이름을 진 뒤로 청문 앞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보여주는 어릴 적 웃음이었다. 잃은 줄도 몰랐는데, 다시 마주하고 나니 이제야 상실이 와닿아 청문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러니까 사형이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청… 명…!”

“가장 화산 같은 사람을 남기고 가니, 걱정은 안 되네요 그래.”

청명이 청문이 잡은 손아귀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고, 망설임 없이 전장으로 걸어 나갔다.

“신세도 졌으니 당가 대우도 잘 좀 부탁해요. 뭐, 이번엔 그 녀석도 살아있으니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다마는.”

바닥에 엎어진 청문이 팔꿈치에 힘을 꽉 주며 앞으로 기어나갔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청명을 따라가려는 의지와 달리 팔과 다리는 형편 없는 상태였다. 덜덜 떨리는 팔이 나무뿌리에 걸리자 그대로 힘이 풀려 꺾였다. 턱이 바닥에 부딪혔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청문이 다시 고개를 들려 했으나, 눈이 감겼다.

그래서 그게 마지막이었다. 옆에 누구도 두지 않은 채 떠나가는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청문은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매화검존이 마지막으로 보낸 신호를 받고 왔다는 당가 사람들이 끝난 전장 속에서 그를 포함한 화산의 제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 * *

‘……향냄새…’

당보는 화산의 제자들이 안내하는 대로 나아가 당가주와 함께 청문 옆에 섰다. 당가 장인들이 전력을 기울여 만든 향로에서 향이 느릿이 피어올랐다.

화산에서 치러지는 도제지만, 사천당가 전사자들까지 함께 달래는 진혼제였다.

매화검존이 가까스로 목숨만 붙여놓은 이들을 대부분 살리는 데 사천당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화산이 도와 마교로부터 가문을 지켜낸 당가가 다시 화산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둘 사이에는 온전한 신뢰와 전우애가 자리 잡았다.

당보는 도경을 외는 화산 제자들 옆에 공손한 자세로 자리한 제 가솔들을 쳐다보았다.

‘…참나. 도사 형님이 뭐라고 당가 대우를 부탁합니까? 굳이 형님이 부탁 안 해도 우리 당가, 화산에 뒤지는 것 하나 없습니다.’

당보는 마치 항의하듯 향이 피어오르는 향로를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떼어냈다. 그리고 화산의 도경에 맞추어 전사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을 흘려보냈다.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야.’

청문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상세히 청명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빠짐없이 청명이 했던 말을 전해 들었으나,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뭐, 이번엔 그 녀석도 살아있으니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다마는.

이번엔? 청문에게 물었으나, 청문 또한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리 들었음은 확신하였다. 그 당시에도 그 말이 이상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를 떠나서라도, 청명이 마지막에 한 말을 청문이 어찌 잊을까. 그를 감히 의심할 수는 없었다.

‘대체…’

청명은 거짓말은 매일 해도, 허튼 말은 좀처럼 안 하는 인간이었다. 특히 마지막 순간에 굳이 그런 혼란을 장난처럼, 그것도 청문에게 전할 이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차라리 그가 마지막에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모를까….

‘도사 형님이 겨우 얻은 깨달음이라면, 나 같은 세인이 어찌 알겠소. 직접 꿈에 나타나서 설명하든가 하쇼!’

역시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오래 생각하는 건 당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건 청명 또한 잘 알 테니, 당보는 굳이 더 생각하기를 때려치우고 눈을 감았다.

청명이 죽은 후, 눈을 감을 때면 변함없이 적막이 찾아온다. 그 속을 가득 메운 서러움과 원망 탓에 정신이 어지럽다. 심지어 그 한편에는 이미 형님이 죽을 것을 알고 있지 않았냐는 목소리가 매섭게 울린다.

비겁자들과 겁쟁이들이 가득한 전쟁터에서 가장 먼저 죽을 이가 누구인지는 언제나 자명했다. 그 자명한 사실이 어떤 이들에겐 쉬이 보이지 않았던 건, 그저 그 실력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죽을 사람으로도, 가장 늦게 죽을 사람으로도 불렸던 매화검존.

그 이름과 꼭 함께 불렸던 암존, 당보는 매 전장에 나갈 때마다 이번엔 청명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은연중 여겨왔다. 그가 정말로 죽었을 때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건 그러한 연유다. 그러나 늘 예상해왔던 사실임에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그가 죽을 때 자신 또한 그 옆에서 함께 죽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해왔기에.

결국 단 하나의 예측만이 틀리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이제 어찌할까.’

당보는 다시 눈을 떴다. 짙은 녹의를 갖춰 입은 이들이 전쟁 없는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도제가 끝나면 당가타에는 녹음이 찾아오겠지. 그 속에 자리한 생명 하나하나가 웃게 만들려면,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산재했다.

‘하하… 아직 개판이지.’

당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앞길이 구만리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당보는 고개를 슬 기울였다.

‘기다리쇼. 내가 바라던 당가를 만들어내고 말 테니.’

그러는 동안 신선놀음이나 잘하고 계쇼.

잔뜩 격식을 차려입어 점잖아 뵈는 겉과는 다르게도, 아직 어린 청년처럼 삐딱한 농지거리나 흘려댄 당보가 한숨과 웃음을 동시에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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