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 청명드림

아기가 된 청명드림 / 캐붕

드림주와 함께 화산에서 자라 이립이 될 때까지 정인 사이가 되지 못한 채 썸만 타길 약 30년… 드림주도 애가 타고 청명도 애가 타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러 청명이 결국 기깔나는 고백을 해 정인사이가 된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은 다음날. 평소처럼 일찍이 수련을 시작한 드림주는 유독 모습이 보이지 않는 청명을 찾기 위해 청명의 침소로 향했음. 분명 어제 같이 수련을 하자고 약속했으면서 오시(오전11시에서 1시 사이)가 돼도록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는 건 무슨 일이람? 아무리 땡땡이를 치는 인간이라 해도 정인 사이에 약속은 지키는 줄 알았더만 그것도 아니었나? 드림주는 잠시 수련을 멈추고 청명을 찾아 나섰음. 청명이 자주 가는 곳을 모두 뒤졌지만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아 끝내 청명의 침소 앞에 도착한 드림주임. 드림주는 걸음을 멈추고 땀에 젖어 볼에 달라붙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긴 후 청명을 불렀음. 

사형.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어 드림주가 다시 한 번 청명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무언가 덥썩 드림주의 등 뒤를 덮졌음. 아니, 아무리 무인들이 득실거리는 화산이라지만 대체 누가 이리 기척을 죽이고 있다가 사람을 덮친다는 말인가?! 머리가 제대로 회전하기도 전에 드림주의 손은 빠르게 검을 뽑아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음. 거친 손이 검 손잡이에 닿았을 때, 등을 덮친 이가 제 등을 뽈뽈 타고 올라 머리로 기어가는 것을 느낀 드림주는 저를 덮친 게 어린아이임을 알아차리고 검에서 손을 놓고 제 머리를 타고 오르는 아이를 확 낚아챘음. 

화산에 어린애? 이번에 들어온 명자 배 아이들 중에서도 이렇게 작은 아이는 없었는데? 낚아챈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두 손으로 아이의 겨드랑이 사이를 받쳐 시야를 맞춘 드림주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저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을 발견했음. 도복은 삼대 제자 도복인데 본 적 없는 얼굴이었음. 예쁘게 묶어 올린 말총머리와 잔뜩 찌푸렸다 서서히 풀리는 저 붉은 눈동자를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드림주가 붉은 눈동자에 홀려 손에 힘이 풀린 사이 아이가 드림주의 손아귀에서 폴짝 뛰어 벗어나 땅으로 사뿐히 내려선 후 단정하게 포권했음. 

사고를 뵙습니다! 저는 삼대 제자 청명입니다!

어? 청명? 드림주가 얼이 빠진 채 제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봤음. 아니 저는 제 정인을 찾으러 온 게 다인데 저 어린아이는 누구며 대관절 사고는 무슨 어쩌다 나온 말임? 드림주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청명이 똥똥한 배로 도도도 달려와 드림주 아래에 서서 드림주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내었음. 

근데요, 사고는 누구예요? 화산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 오랫동안 강호행을 떠났다가 이제 돌아온 거예요? 

드림주는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가 목이 아플까 무릎을 굽혀 앉고는 시선을 맞추었음. 이 땡그란 눈동자… 한 웅큼이 삐죽 솟은 말총머리.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이 아해가 청명이란 말인가? 드림주는 아이의 볼을 주욱 늘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음. 이립이 넘은 놈이 하루아침에 아이가 되는 경우? 그런 경우는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으브- 사거- 나주세여. 

손길을 뿌리치지도 않는 이 이쁘장한 아기가 청명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드림주임. 그도 그럴게, 어릴 적의 청명은 지금보다 훨씬 지랄맞았으니까! 드림주의 앞에 있는 애가 진짜 청명이었다면 씩씩대며 제 볼을 늘려대는 손길에서 벗어나 혀를 베- 내민 뒤 부리나케 도망갔을 것임. 이 순둥이는 제가 아는 청명일리 없다는 게 드림주의 판단이었음. 드림주는 아이의 볼을 늘리던 손을 치우고 아이의 머리를 살살 쓸어주며 물었음. 

네가 시조로부터 몇 대 제자인지를 말해보거라. 

십삼 대요. 대화산파 십삼 대 제자 청명!

손을 꼼질거려 열 손가락을 다 펼친 아이의 말에 드림주의 머리가 지끈거렸음. 아무리 봐도 이 문제는 더이상 드림주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음. 드림주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아픈 걸 완화시키려는 시늉을 좀 하다가 여전히 실실대며 저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 말했음. 여기서 잠깐… 아니, 아니다. 같이 가자. 혹여나 정말, 정말 저 아이가 청명이라면! 혼자 두고 갔을 때 칠 사고를 걱정하기보다야 아이를 안고 등장한 저를 보고 웅성댈 사형제들을 걱정하는 게 훨씬 나았음. 아이는 같이 가자며 몸을 일으키는 드림주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렸음. 허, 그래도 아이는 아이구나. 

드림주는 오동통한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사이 굳은살이 박힌 자그마한 손을 마주 잡고 청문을 찾아 나섰음. 아이와 함께 등장한 저를 보고 웅성댈 사형제들을 걱정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드림주는 최대한 인기척을 숨기고 청문을 찾았음. 점심을 먹기 위해 한산해진 훈련장 끄트머리에서 혼자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던 청문을 찾은 건 정말 다행인 일이었음. 드림주는 청문 가까이로 다가가 슬그머니 인기척을 드러내며 청문을 불렀음. 

대사형, 논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응? 무슨… 

청문의 시선이 드림주에게로 꽂혔다가 그 품에 안긴 아이에게로 옮겨갔음. 키 차이 때문에 방금 막 드림주의 품에 안긴 참이었음. 청문은 드림주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음. 또 어디서 드림주가 사고를 치고 왔구나 하는 눈치였음. 

제가 청명이도 아니고… 이제 사고 안 치니 그렇게 보지 마십쇼. 다른 건 아니고, 청명이 처소에 있던 아해인데, 자기가 십삼 대 제자 청명이라지 뭡니까. 

뭐? 

십삼 대 제자 청명이요. 거짓말은 아닌데, 영 이상해서 일단 데려왔습니다. 청명이는 온데간데 없고…

청문은 아까보다 배는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참동안 아이를 하나하나 뜯어보았음. 청명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과 기타 정보들(청문과 청명 사이의 일이나 청명이 처음 매화를 피웠던 시기, 어쩌다 그 방-청명의 침소-에 있게 되었는지, 올해로 나이가 몇인지 등)도 여럿 던지며 확인을 마친 청문은 드림주의 품에 안긴 청명의 귀를 두 손으로 막고 입을 열었음. 

아무래도 청명이가 맞는 것 같구나. 

…그럼 진짜 사형은 어디 갔답니까? 

너도 듣지 않았느냐. 하루가 지나면 재밌는 일이 끝난다고 하니 우선은 기다려봐야지. 어쩌다 이녀석이 어린 아해가 되어서는. 

청문의 말대로 청명은 화음의 다과집 할매가 준 '하룻동안 재미난 일이 일어나는 요술약과'를 받아먹은 뒤에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음. 음식을 받아먹은 게 이립 먹은 청명인지 다섯 살 된 청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기다려봐야지. 청문이 저를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청명을 바라보고 세상 다정하게 웃으며 귀에 댔던 손을 떼려던 찰나, 드림주가 다급하게 청문을 불렀음. 

그럼 저희는 어떡합니까? 청명이는 저를 사고로 알고 있는데, 바로 잡아주는 게 나을까요?

…음, 거짓말을 할 순 없지. 말하자꾸나. 

드림주와 청명은 저들보다 한참은 어려진 청명에게 상황을 최대한 간결하게 풀어 설명했음. 그러니까 청명아, 나는 사실 네 사형이고… 어쩌구저쩌구. 아니 나이를 먹은 건 다 그만큼 시간이 지나서… 이러쿵저러쿵. 청문사형 내가 설명해볼게요. 청명사형, 사실 이건 다 꿈입니다. 사형은 지금 미래의 화산을 꿈으로 꾸고 있는 거예요. 아니, 사매! 설명이 아니지 않느냐! 에잇, 뭐 어때요? 어차피 믿지도 않는데…

기나긴 설명 끝에 결국 청명을 납득시킨 건 이게 전부 꿈이라는 드림주의 허무맹랑한 말이었음. 청명은 꿈이라는 말에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두 사람이 저와 같은 배분인데다 저도 익히 알고 있는 제 유일한 사형과 함께 나고 자란 사매라는 걸 단번에 인정했음.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음. 청문은 제 사제들이 청명이 없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평소처럼 행동했고 드림주는 수련을 빼고 하루종일 청명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청명을 돌봤음. 청문이 청명을 돌봐도 되는 일이었지만, 청명이 드림주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역할이 그렇게 분배된 것임. 

청명과 드림주는 화산 밖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주변을 구경했음. 폭포가 예쁘게 떨어지는 곳에 앉아 청문이 챙겨준 점심을 먹기도 하고, 바위산을 뛰어다니는 다람쥐를 잡기 위해 나무를 타기도 함. 드림주도 청명 못지않게 중원 제일 가는 무인 중 하나였지만 그런 드림주에게도 어린 아이를 졸졸 쫓으며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은 제법 힘들었음. 하물며 그 아이가 하도 날쌔고 재빠른데다 체력도 빵빵한 청명인데 무슨 말을 더 할까! 

드림주는 적당히 넓은 공터에 청명을 내려두고 쪼그려 앉아 청명의 눈 앞에 새끼 손가락을 들이밀었음. 

사형, 요 공터 주변 산들만 다니는 겁니다. 멋쟁이 사형은 약속해줄 수 있지요?

약속? 에, 엣헴! 사매랑 한 약속은 지킬 수 있어! …요! 

새끼 손가락을 엮어 위아래로 살살 흔든 뒤, 청명은 꺄르륵 웃으며 다시 산을 타기 시작했고 드림주는 청명의 위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운을 넓게 펼쳐 인근 산을 끊임없이 훑었음. 드림주가 제자리에서 쉬며 청명이 돌아오길 기다린 지 한 식경. 드림주는 제 기운에 걸리는 아기 사형을 감지하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음. 

잘 놀다 오셨소? 

네, 아니 응! 

응? 뒤에 뭘 숨겼어요? 

짧둥한 팔을 등 뒤로 숨긴 청명은 드림주의 물음에 헉 소리를 내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음. 그러다 돌연 입술을 앙 다문 채 드림주에게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 아니겠음? 드림주가 되려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서니 청명이 드림주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로 숨긴 손을 앞으로 주욱 내밈. 청명의 손은 흙투성이었고 앙증맞게 말아쥔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는 들꽃을 가지고 엉성하게 만든 꽃다발이 자리잡고 있었음. 

이건 뭐예요?

아잇, 받아! 내가, 사매 주려구 저기서 만들어 온 거예요. 

드림주는 청명이 건네는 조촐한 꽃다발을 받아들었음. 세상에! 대체 어떤 사형이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매를 위해 이리 사랑스럽게 꽃다발을 만들어 준단 말임? 드림주는 꽃다발을 받아들고는 청명을 번쩍 들어올려 품에 쏙 안았음. 

사형, 날 주려고 꽃다발을 만들어 온 거예요? 왜요?

…그야, 사매는 예쁘고, 또 커서는… 그러니까 지금 말구 꿈에서 깬 다음에 커서는 청명이랑 혼인할 거니까. 그래서 어, 미리 주는 거예요. 

거짓말이라곤 하나 없이 우물쭈물대며 말하는 어린 청명의 귀가 새빨갛게 붉어져 있었음. 하! 근래에 들어서 마음이 맞은 건 줄 알았더니만 이 양반은 머리에 피가 마르기 전부터 저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임. 드림주는 어려서부터 제 마음을 꽁꽁 숨긴 청명이 기가 차 허탈한 웃음을 한 번 뱉었음. 드림주가 기가 찬 웃음을 뱉은 직후 청명이 우물쭈물하며 드림주의 품에 안겨 고개를 슬그머니 들고 드림주와 눈을 맞췄음. 

저기요, 사매. 있잖아요. 사매는 그러면 이제부터 청명이 색시예요? 

혼인은 꿈에서 깬 다음에 한다면서요. 

그렇지만… 나는 꿈속 사매도 내 색시였으면 좋겠는데…

청명은 드림주가 색시가 아닌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비죽 내밀고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음. 그 덕에 내민 입술이 훨씬 잘 보였는데, 입술을 비죽 내민 모습이 꼭 오리 같아 드림주는 그 입술을 만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음. 

그럼 색시 하지요, 뭐. 이렇게 멋진 사형 색시 될 수 있으면 냉큼 그 기회를 낚아채야하지 않겠어요?

드림주의 말에 표정이 환하게 바뀐 청명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드림주를 올려다보았음. 옛날에는 저도 어렸던 터라 청명이 이렇게 귀여운 줄은 몰랐는데… 어른이 되어 어린 청명의 모습을 보니 정말 저 앙증맞은 볼을 깨물지 않고는 못 베길 지경임. 드림주는 청명의 볼을 깨무는 대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담는 걸 택했음. 고양이마냥 올린 손에 머리를 부비적거리는 게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음. 

청명의 청혼 이후에도 두 사람은 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한참을 뛰어놀았음. 간간히 청명이 부인~하고 부르면 드림주가 네~ 하며 대답하는, 소꿉장난 같은 역할놀이도 좀 하기도 했고.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신나게 논 청명은 결국 드림주의 품에 안겨 잠든 채 화산으로 돌아왔음. 대문 앞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청문은 드림주의 품에서 잠든 청명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음. 

반신반의하고 있긴 했는데, 청명이가 맞긴 한가보구나. 잠든 모습이 어릴 적이랑 똑같은 걸 보니. 

그래요? 그때는 나도 어렸어서 난 잘 모르겠는데. 

너나 청명이나 자는 모습은 선녀같았다. 지금처럼. 이 나이가 되어서 어린 모습을 볼 줄이야. 내 기억속보다 훨씬 사랑스럽구나. 

대사형도 참. 주책맞게 그러지 말고 얼른 들어나 갑시다. 날이 아직 차요. 

드림주는 그렇게 말하며 청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제 침소로 돌아왔음. 아직 어린 청명을 혼자 둘 순 없으니 일단 제 침소로 데려오긴 했는데, 날이 밝아 원래대로 돌아오면 무어라 설명해야할지. 드림주는 곤히 잠든 청명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고 입을 열었음. 

오해든 뭐든 좋으니 내일은 꼭 돌아와주시오. 팔자에도 없는 아기신랑이랑 평생 사는 것보다야 나이가 맞는 상공을 두는 게 서로 좋지 않겠소? 

드림주는 청명의 목 끝까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두고는 화병에 청명에게 받은 꽃다발을 꽂아두고 잠에 들었음.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어린 청명이 온데간데 사라져 제가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었지만 화병에 꽂힌 조촐한 꽃다발이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음. 아니면 아직 아해인 채로…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이불을 정리하고 밖을 나서려는데 장지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음. 사매, 아직 자? 드림주 저와 함께 나이를 먹어 굵고 두꺼워진 청명의 목소리를 듣고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음. 키도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볼살일랑 전혀 없이 선도 훨씬 두꺼워진 청명이 저보다 높은 시선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음. 

사형. 

드림주가 헤실헤실 웃으며 청명을 부르자 청명이 당황하며 대답했음. 

왜, 왜그렇게 실실 웃어? 

아니이, 사형이 대체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는지 궁금해서 그러지요. 나는 근래에 들어서야 마음이 맞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길래. 몇 해나 되었소? 응? 아, 사형! 도망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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