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물

[커미션][노리노카] 살아내다, 살아가다.

[오마카세 타입] 만송님이 신청하신 글커미션

written by. @saniwa_jeyeon CM

 

 

 

1.

 

 

 

의사가 마지막 생리가 언제였느냐고 한 질문에 노카가 폐경이 된 게 아니었느냐 반문했다. 의사는 고개를 젓더니 임신한 지 4주쯤 되었다고 말했다. 노카는 순간 의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얼빠진 목소리로 네? 하고 말하고 말았다. 그런 노카에게 의사가 차분히 설명했다. 워낙에 몸이 약하신 편이라 생리가 불규칙했을 텐데 그렇다고 폐경인 건 아니라고. 근래에 몸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은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 탓일 텐데, 아직은 초기라서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노카는 핏기가 가신 안색으로 의사의 말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순간 원인 모를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익숙한 반응인지 의사는 티슈를 몇 개 뽑아 노카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티슈를 받아든 노카는 그것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자 진정이 되어서 조금은 차분하게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어이없음과 함께, 아이의 아비일 수 밖에 없는 이의 얼굴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2.

 

 

 

노카는 가만히 제 배에 손을 올려보았다. 의사의 말마따나 초기라서, 느껴지는 게 없었다. 내 안에, 생각지도 않았던 존재가 생겼다고. 이 안에서 자라고 있다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살아갈 때는 바래도 생기지 않던 아이가, 바란 적 없음에도 생긴 일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지금으로서는 실감이 나지도 않았고, 아이에 대해서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단순한 감정조차도 말이다. 그저 노카는 좀 놀랐다.

 

카제하야와의 아이가 생기길 바랐을 때를 떠올려본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조금 더 생기 가 넘쳤던,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갔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의 노카는 아이가 생기면 막연히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릇 어미가 제가 품은 아이를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된다는 통념처럼, 저를 낳은 부모로부터, 저를 선택한 부모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막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노카가 카제하야를 사랑하듯, 받은 다정을 사랑하여 돌려주려고 애쓰듯,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 자체로 행복을 느끼게 되면 그것이 사랑이리라.

 

노카는 배에 손을 가져단 댄 채로 자문했다. 없애고 싶은가? 그러고 싶진 않다. 정말로 그리 생각하는가? 그럴 것이다. 그러면 사랑할 것인가? 그것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녀는 본디 조용하고 꿋꿋하게 노력하는 것 하나만은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결국 제 태 안에 있는 것을 사랑하게 될 것을 예감하였다.

 

 

 

 

 

 

 

 

 

 

 

 

 

 

 

 

 

 

 

3.

 

 

 

노카를 나타내는 단어를 하나 고르자면 일관성일 것이다. 그렇기에 노카는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변하지 않고 평온하기를 바랐다. 어제와 같은 오늘에 안심했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갈망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할 행동은 분명 그녀의 일상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노카도 고민을 했다. 아이의 아비되는 자에게 말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이상,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는 그에게 임신 사실을 숨길 수 있을리가 만무하였고, 그도 알 권리가 있다 판단하였다.

 

"병원에서는 뭐라 그러나, 그러니까 자네 운동도 하고 끼니도 좀 잘 챙겨먹으라니까. 하여간 이 늙은이의 말은 하나도 들어주질 않지."

 

그래서 노카는 저를 보자마자 쫑알쫑알 잔소리를 하는 남자에게 대뜸 말했다.

 

"나 임신했어요."

 

노리무네는 처음에는 당황한 듯 굳어보였다. 노카는 웃음을 잃어버린 노리무네보고, 당신이 닥달을 하여 의사에게 가보았더니 산부인과 내원을 권유하더라, 그래서 간 김에 진료를 보았더니 임신했다고 하더라, 말했다. 노리무네는 한참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당신이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내 아이일 뿐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노리무네가 푸른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자네 일을 할 때가 아니지 않나. 당장 그 펜 놓게."

 

주고받아야할 말이 분명히 있음에도, 노리무네는 일단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선택한 듯 싶었다. 노카는 그렇게 수선 떨 필요 없다고 말을 하려다가, 남자가 언제는 제 말을 듣기나 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제와 오늘이 같았고, 오늘도 내일과 같을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은 각자의 유예를 가지고 서로에게 해야할 말을 속에 품은 나날을 보낼 것이다. 노카와 노리무네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서로의 기색을 살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덮어둘 수 만은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덮어두기로 한 것이다.

 

 

 

 

 

 

4.

 

 

 

시간이 흐를 수록 노카의 컨디션은 나날이 나빠져갔다. 건강하던 사람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 없이 만드는 게 임신일진데, 본디 쇠한 몸을 가진 노카로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노리무네로 그런 노카를 살뜰히 보살폈다. 원래도 그는 노카의 일이라면 야단스러운 구석이 있었으나,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극에 달했다. 노카는 그에게 굳이 그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으나, 곁을 지키며 극진히 보살펴주는 이가 있는 것은 불안정한 상태의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기도 하였다.

노카와 노리무네는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노리무네는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는지 노카와 사소한 잡담을 나누려고 했고, 그 나긋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기도 하였다. 노카는 별말 없이, 눈을 감고 가만히 그가 읊는 문장을 듣고 있고는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평온도 잠시, 노리무네는 노카가 꺼낸 말에 기가 차서 허,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 아이니까요."

 

노리무네는 그 말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이 여자의 변치않음을 사랑하지만, 지금은 야속했다. 그는 분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내 아이이기도 하지 않나."

"말했듯이, 당신이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우리의 아이지. 책임이나 필요같은 단어가 끼어들 여지 없는, 우리에게 온 아이."

 

노리무네는 재차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마는 노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잠시 행복에 젖어 있고 있었다. 우리들의 시작은 풀 수 없는 실타래마냥 엉켜있었고, 그 안에 켠켠히 쌓여있는 문제들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만나길 잘못 만났다. 그럼에도 이치무네 노리무네는, 두 사람의 만남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솔직하게?"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자네가 그러라면 그래야지. 뭔가를 요구하는 일이 없는 노카의 요청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그가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기꺼웠네."

 

그는 환희했고, 불쾌했다. 모순적인 감정이지만 양립하였다. 노카와 노리무네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가는 대화 흩어지기 마련이고 품고 있는 감정은 각자의 안에서 침전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노리무네에게 아이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무언가였다. 노카와 자신 사이에 '무언가'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꺼웠다.

 

동시에 불쾌하였다. 노리무네에게 기대어 쉬고 있는 몸 안에 다른 존재가 하나 더 있는 것이다. 생각해본 적 없고, 바래본 적도 없는 것. 그건 노카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노리무네를 제외한 세상만물에게 다정한 그녀는 분명 아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제가 그렇게 발버둥쳐도 얻지 못하는 것을, 저것은 당연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자니 스스로가 존재하고 살아있음이 선명하게 느껴져 신기하였다. 동시에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가장 일그러져있는 것은 나로군. 노리무네는 제게 기대어있는 노카가 의아해할까 목을 치고 올라오는 헛웃음을 참아냈다.

 

"있잖아요, 노리무네.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하지만 좋아하지도 않지."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듣지."

"알았네, 계속 해보게."

 

또 미운 말을 할까 싶어 선수를 친 그가 오른손으로 노카의 어깨를 토닥였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만드는 일정한 박자에 편안감을 느끼며, 노카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노력해볼게요."

"무엇을?"

 

노카는 생각한다. 지금 그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품에 안고, 그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따스한 볕이 드는 집무실, 안정감을 주는 잉크냄새, 켠켠히 쌓여있던 서류 더미들 사이의, 따뜻한 허브티가 들어있는 머그컵. 서늘하게 기분 좋은 공기와, 실없이 주고 받는 잡담과, 조곤조곤하고 선명하게 책을 읽는 목소리......누군가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을 바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카가 바라는 것은 그 사소한 것들이었고, 바라기에는 과분한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당신이랑 함께 살아가는 거요."

 

노카의 어깨를 두드리던 손이 얼어붙은 듯 멈췄다. 깜빡, 노카가 눈을 떠 노리무네를 바라보면,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드물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 노카 자신도 꺼내게 될 줄은 몰랐던 말이다. 노리무네도 감히 들을 것을 기대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웃은 노카가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많고, 아이가 제대로 태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사람이 되어서, 한 번 한 말은 지키도록 하게! 자네가, 자네 입으로 나랑 함께 살아 가주겠다고 한 거야!"

 

노리무네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나, 하고 생각했다. 다만 흔들림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금색 눈동자가 선명하였다.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듯했다. 아니, 적어도 노리무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함께 살아가준다고 노카가 말해준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지금도 우리는 함께 살아오지 않았나요?"

"늙은이를 놀리려는 생각이라면 그만두게, 제발."

"내가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아이를 부탁할게요."

"그런 말도 하지 말고...."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노리무네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노카가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노카는 다른 손을 제 배 위에 올렸다. 그래도 어쩌겠어,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지. 너와 나는 함께 살아가야지......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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