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어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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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시겠습니까?”
지구의 황량한 대지에 서서, 탄 내음이 바람을 맞으며 무명이 물었다. 참으로 그다운 건조한 물음이었다. 어느 때건 동요하지 않는다. 파이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유토피아로 가야지요.”
“이제 와서 그들이 받아주리라고 생각합니까?”
또다시 한번. 아무렇지도 않게 건조하고 잔인한 말을 얹는다. 파이는 이를 악물었으나 밖으로 내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당연하지요. 나는 고작 이런 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거든요, 당신과 다르게, 관리자이지요.”
무명은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그저 파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그 어느 모독보다 파이를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가망 없는 짓에 희망을 거는 자를 보는 눈이었으므로. 무명이 파이를 동정했으므로, 파이는 그 시선이 같잖기 그지없었다.
미로 프로젝트는 무사히 끝마쳤다. 약속대로라면, 관리자들과 플레이어들은 유토피아로 보내주어야 했다(그 과정에서 희생된 세 명은 제외하더라도). 하지만 그들이 너무 오래 가상 시간에 있었던 것일까? 그 사이에 세계의 정세가 바뀌어 버렸다.
무명은 식량을 확인했다. 아껴 먹으면 두 사람이 석 달 정도 견딜 수 있는 분량이었다. 간단한 사칙연산이 늘 머리 한쪽에서 공식을 외쳤다. 두 사람이면 석 달, 한 사람이면 육 개월, 혹은 반년. 값은 같다. 무명은 파이를 은밀하게 살폈다.
무명은 남을 살해하여 살아남을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사람이 극단적인 환경에 몰리면 바뀐다고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무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명이 파이를 살핀 것은 그저, 파이가 자신을 살해할 가능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무명은 제게 총을 겨누었던 파이의 기억한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닌 파이이다. 파이는 무기가 있다면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상대를 살해할 수 있었다. 무명은 그 폭력성을 경계해야 했다.
“이해가 안 되네요.”
때마침 파이가 헛웃음과 함께 사나운 의문문을 터뜨렸다. 무명은 아직도 식량을 헤아리는 체하다가 파이의 말을 받았다.
“무엇이 말입니까.”
“왜 그들은 죽는 길을 택했지요? 어리석게!”
근래의 파이는 연기를 때려치운 지 오래되었다. 온종일 분노하며 에너지를 소비했다. 파이가 열이 오를수록 무명은 대조적으로 건조해졌다. 저 흥분이 하찮아 보였다.
“그럼 당신은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파이는 뺨을 굳히며 입술을 당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없지요. 왜 그딴 생각을 하지요?”
무명은 그쯤에서 말을 그만두었다. 힘을 빼기도 싫었고, 괜히 파이를 자극해서 상호 불편한 상황을 만들기도 싫었다. 좋든 싫든 두 사람은 이 벙커에서 함께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다면, 무명이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그래서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시는 겁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세상의 일이 늘 그렇듯이,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다. 직무를 유기하고 달아난 대통령과 총리, 의원들에 대한 의문. 그들의 행방을 쫓다가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된 유토피아 프로젝트. 벙커 시설의 한정적인 공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심리적인 영향, 모든 세대에게 깔린 지구 종말에 대한 두려움과 체념.
그리고 어느 노래의 구절이 불길처럼 번졌다. ‘지옥이 있기에 천국이 있지. 그래서 네가 지옥을 만들었구나.’ 본래 연인과의 헤어짐과 재회를 말하던 가사는 그 부분만 뽑혀 군중들의 시위 구호로 쓰였다. 지옥이 있기에 천국이 있다. 그래서 너희가 지옥을 만들었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 멸망의 이유가 천재지변이라면 인류는 수긍할 수밖에 없다. 자연에 보복할 수 있는 자는 없으므로. 그러나 그 이유가 인간이라면, 그것은 전쟁의 원인이 된다. 사람은 쏘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에는 아직 많은 것이 남아있었다. 과거 전쟁에 쓰이던 미사일, 핵무기금지조약을 거치고도 포기하지 못한 핵 개발 시설. 이는 당연히 유토피아 입장에서 지구에 남겨두기에는 불안한 요소였다. 하지만 과거 국가의 상위 인사들은 타 국가가 포기하기 전까지 무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멸망 이전부터 줄 곳 그래왔다. 그리고 지구에서 쏘아 올려진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이 유토피아를 타격했다.
“뭐 하는 거죠?”
무명이 신발을 꿰어신고 있자, 파이가 득달같이 다가와 물었다. 무명은 파이에서 시선을 잠깐 두었다가 다시 신을 내려보면서 말했다.
“식량을 구하려고 나갑니다.”
“왜죠? 식량은 아직 충분하잖아요.”
“그러나 언젠가 한계가 오겠지요. 게다가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밖의 상황을 살피기도 해야 합니다.”
“나도 같이 가요.”
파이가 나섰고, 무명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명은 파이를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이 시대에 가장 위험하고 잔인한 것은 사람이다. 재해도, 포격도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므로. 무명의 파이에 대한 불호를 배더라도 이유는 차고 넘친다. 저 불안정하고 분노에 찬 자를 데려가는 일은 과연 옳을까? 안 그래도 위험한 외출을 더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까?
“당신 말대로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제가 유토피아랑 연결할 수 있는 코드를 알고 있어요. 적합한 통신 시설만 남아있다면 연락 할 수 있을 테죠. 연락이 닿으면 유토피아로 옮겨갈 수도 있을 테고. 그곳으로 떠나요.”
파이는 과거에 늘 그랬던 듯,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무명을 보고 아량을 베풀 듯 덧붙였다.
“나와 함께 가죠. 당신도 자격이 있으니 갈 수 있어요.”
무명은 그 희망이 허망하다고 지적하지 않았다. 파이가 저 가능성을 말하는 순간은 파이는 안정된 듯 보였다. 즉 오만하고, 여유롭게 굴었다. 무명은 그 상태의 파이를 안정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것이. 사람 모아두고 게임을 펼칠 때 관리자로서의 모습이었더라도 말이다.
“이곳은 가상세계가 아닙니다. 당신은 관리자가 아니고요. 한번 죽으면 끝입니다. 위험할 겁니다, 파이.”
“하! 명,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것 같아요?”
“그냥 겁주는 말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당신에게는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겁니다.”
무명이 차분하게 말했다. 파이는 차분하게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파이는 무명의 멱살을 거세게 움켜쥐고 매달리고 있었다.
“똑바로 말해요, 명. 내가 약해 빠졌고 병들었으니까, 이런 나를 버리고 당신 혼자 가겠다는 생각 중인가요? 어디로 튈 작정인가요? 어차피 지구는 전부 글러 먹었는데?”
무명은 입을 다물었다. 바로 이렇게, 태도가 돌변하는 자를 어떻게 데려간단 말인가? 무명은 강하게 그를 밀칠까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택한 것은 파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어내는 쪽이었다.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원하신다면 같이 가시지요.”
파이는 픽 웃더니 손을 떨어트렸다.
“암, 그래야죠. 그래야 하고 말고요.”
그래야 한다고 파이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무명은 문득, 서로에게 시비를 걸던 시절이 떠올랐다. 뒷일은 신경 쓰지 않고 상대를 도발하고, 도발에 넘어갔다. 그 시절에 묘한 향수가 느껴진다는 감상은 꽤 어처구니없었으나, 이해는 되었다. 이제 무명은 파이를 대하는 일이 버거웠다.
“그럼 가죠.”
파이가 호기롭게 벙커의 삼중으로 되어있는 문 중에서 첫 번째 것을 열며 말했다. 무명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방독면에 의해 거친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유토피아와 지구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갑작스럽다고 했고 누군가는 예상했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너무 늦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막지 못한 이들에게 분노했고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었다고 했다. 유토피아의 이들은 지구를 쥐락펴락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구에 남은 무기는 아직 많았고, 사람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게 거셌다. 그들에게는 어차피 몇 년 안에 죽는다는 선택지 밖에 남아있지를 않았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극단적인 일도 자행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적의는 짙어졌다. 유토피아의 사람과 지구의 사람들은 서로를 증오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는 인간 아닌 생명체로 취급당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지구인이 유토피아로 옮겨갈 수 있을까?
“연락은 어디에서 할 수 있습니까?”
“통신 시설에서 할 수 있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요?”
“했습니다만, 지금 남아서 작동하는 시설이 있겠습니까?”
“찾아봐야지요. 당신 따라다니며 겸사겸사 찾아볼래요.”
그들은 지하 공간을 돌아다녔다. 어느 곳은 무너져 내려서 도저히 진입할 수가 없었다. 가려던 길이 그런 식으로 막혀서, 무명과 파이는 철로를 따라 걸었다. 기차는 다니지 않아도 기차를 위해 비워놓은 공간은 오래도록 남았다.
“무명, 저 건물 기차의 관제소인가요?”
파이는 철로 근처에 선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건물은 작았고 허름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폐쇄된 간이역에 불과할 겁니다. 그건 왜 묻습니까?”
“말했잖아요. 통신 장비를 찾는다고. 관제소 정도 되는 건물이면 있을 텐데, 간이역에도 있으려나?”
그렇게 말하고 파이는 간이역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당신……!”
무명은 확 돌아섰으나 파이는 이미 들어갔다. 요즘 세상에서 기척을 살피지 않고 아무 건물에나 들어가는 짓은 위험하다. 그 안에 누가 있을지 어떻게 장담하는가?
무명은 뭐라고 외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파이를 걱정하는가? 아니다. 그러면 조심하라는 소리 따위를 외치는 일이 얼마나 우습겠는가? 무명은 닫히지 않은 문 앞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다른 인기척이 숨어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 숨어서 일을 꾸밀 만큼 대단하거나 복잡한 시설은 아니기도 했다.
무명은 문 옆의 벽에 기대어서 파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무명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한 사람이 철로의 건너편에서 무명을 보고 있었다.
파이는 그 간이역에서 간단한 통신 설비를 발견했다. 철거하지 않은 발전기는 전원을 올리니 아직도 구동했다. 통신 설비에는 먼지가 잔뜩 앉아있었고 발전기에서는 수상한 소리가 났지만 그래도 운이 따라준 결과였다. 파이는 통신 기기를 조작해서 연결대상을 바꿨고 특별한 코드를 입력했다. 한동안 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파이는 침착하게 연결을 끊었다가 다시 시도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전선에서 스파크가 튀었고 발전기는 맹렬한 소음을 냈다.
서로를 발견한 순간, 상대는 그곳에 멈춰 섰다. 그들은 최대한 먼 거리를 유지하며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전쟁의 시대에 표할 수 있는 상호 간의 예의범절이었다. 상대가 물었다.
“그 복장 어울리네. 너는 이곳의 역장이야?”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닙니다.”
무명은 냉랭하게 말했다. 상대는 제법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너무 경계하지 마. 싸울 생각은 없어. 난 그 건물을 이미 둘러봤는데 내게 필요한 건 없더라. 음, 혹시 네가 역장이고 이곳이 너의 기차역이면 네가 이미 가져갔으려나? 그렇다면 내게 주지 않을래?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니고, 당연히 물물교환이야.”
“뭘 필요로 하십니까?”
상대가 씩 웃었다.
“나는 무기가 필요해.”
파이가 코드를 입력하는 손길이 점점 다급해졌다. 그러나 계속 노이즈만 되돌아왔다. 파이의 머릿속에서 여러 의심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이 통신 기기는 껍데기만 잘 유지하고 있다, 연락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상부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코드를 준 적이 없었다……. 파이는 신경질을 내비쳤고 그 순간 지직거리던 소음 사이에 처음으로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로 프로젝트 관련…… 모든 프로젝트 ……본 코드는 …….”
파이는 바짝 붙어서 귀를 기울였다. 지직거리는 소음은 거셌고 그사이의 단어는 희미했다. 파이는 다급하게 외쳤다.
“미로 프로젝트 관리 유토피아 본부 맞나요? 희망의 미로 프로젝트 관리자, 고유 문자 파이, 이름 사피르입니다. 내 말이 들리나요? ”
“송수신이 불안정…… 들립니다. 다만…….”
“저는 미로 프로젝트를 완수했습니다. 약속대로 유토피아로 보내줄 차례입니다.”
이어서 다시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자 한층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 희망의 미로 프로젝트는 전부 중단되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없습니다.”
“난 그 전에 프로젝트 주도를 완료했다고요. 당신들에게 최고의 미래를 약속받았지요. 난 그 모든 걸 요구할 살아남을 권리가 있어요. 당신들은 내게 마땅한 보수를 줘야 한다고요. 나를, 당장 이 지구에서 빼내요.”
파이는 차분하게 말했으나 끝으로 갈수록 짓씹는 어투가 되었다. 사납게 모든 걸 갈아버릴 목소리로 말했으나 너머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는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 온전한 정적이었다. 파이의 목소리에 고함이 담길뻔한 순간, 건너편의 목소리가 말했다.
“확실히, 미로의 관리자와 통과한 자들에게 유토피아 거주권을 준다는 사항이 있었지요. 관리자 파이, 당신이 속한 희망의 미로 프로젝트의 성과는 이미 보고되었습니다.”
파이는 긴장한 채 확 숨을 죽였다.
“그럼…….”
“……무기는 없습니다.”
무명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리고 제 목소리가 다소 뻣뻣하게 굳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대방이 손을 휘저으며 선로를 가로질러 다가왔다.
“겁먹지 말라니까. 널 해칠 생각은 없다니까 그러네.”
무명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고 했으나 등 뒤에 있는 것은 벽이었다. 달아나려면 간이역을 돌아서 달아나야 한다. 당장 시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상대가 이어 말했다.
“나는 우리 지구 동포들은 안 해쳐, 우리끼리 단결해야지. 목표를 정확히 봐야지. 우리의 적은 유토피아의 그 자식들이야. 안 그래?”
상대가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고조되었고, 다음에 나온 말은 훨씬 감정적이었다.
“모든 원인은 유토피아에 있어! 그러니 빌어 처먹을 그 유토피아 자식들을 갈아버려야지! 우리를 이렇게 만든 녀석들을!”
그는 소매에서 날붙이를 꺼내 들어 허공에 대고 내질렀다. 그리고 뭐라고 욕설을 내뱉고 소리를 질러댔다. 시근덕거리다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무명은 이를 악물었다. 위험한 상대이다. 무명은 관심을 돌려보려고 했다.
“그러시면 지구 군에 들어가실 겁니까?”
“맞아. 그럴 거야.”
그는 아까 전의 권유하던 어조로 돌아와서 선량하게 말했다.
“그런데 장비가 부족해서 아무나 받아주지는 않는 모양이더라고. 그러면 최소한 무기를 내가 가져가면 어떨까? 그럼 받아주지 않겠어? 아니면 실적이 있다거나.”
선량한 청년은 무명에게 은밀히 일러주었다.
“너 그거 알아? 지구에 유토피아의 수족들이 아직 남아있대. 유토피아행 티켓을 얻으려고 지구에서 별짓을 벌였다더라. 그 변절자들의 머리를 베어가면 어떨까?”
도망쳐야 했다. 저 돌발적인 분노는 무명에게 쏟아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몇 걸음을 남기고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이봐, 그런데 아까부터 어디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통신 장비에서 어느 목소리가 파이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지구의 떨거지 주제에. 너희는 애초에 자격 미달이었어. 그거 좀 비볐다고 우리에게 내세울 거리가 있을 줄 알아?”
파이는 잠시,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동안 발전기가 시끄럽게 돌아갔다. 그 소리가 너무나도 시끄러워서 파이의 이해를 방해하는 것이리라.
“파이! 달아나십시오!”
파이가 이해한 순간, 무명의 말이 떨어졌다. 파이가 뒤를 돌아보자 낯선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날붙이로 파이의 머리를 내리찍으려고 했다. 무명은 청년을 밀쳤고, 날붙이는 빗나갔다. 청년은 넘어지며 파이에게 부딪혔다. 청년이 무릎이 파이의 얼굴을 가격했다. 파이의 왼쪽 눈이었다. 큰 통증과 함께 시야가 확 뒤집혔다. 혼자 병을 앓을 때 맞이했던 어느 순간들처럼, 머리가 지독하게 어지러웠다.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오며 목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파이는 핏덩이를 토해냈다. 눈앞이 새까매졌고 파이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파이는 속으로 내질렀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럴 때! 하필이면!
지구는 멸망해가고 이런 세상에서 원래 기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아한 이들은 바람 앞의 불꽃이나 다름없고, 흉악하고 난폭하여 원래라면 뒷골목에 숨어지내거나 감옥에 처박힐 깡패들이 힘을 얻는다. 이제 이 지구는 힘과 신체조건으로 모든 것이 정해진다. 완벽이란 그렇게 변해간다. 그러니 파이는 영원히 미달자였다. 자신이 우월했다고 느낀 것은 어린 날, 아주 잠깐의 착각이었다. 사람 하나 보는 눈도 없었던 시절의 자기만족. 유토피아 또한 파이를 버렸다. 그러니까……
파이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무덤에 뉘어 있었다. 파이는 흐리게 웃었다. 죽음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환각이네. 파이는 중얼거렸다. 죽는다면 적어도 멸망으로 죽었으면 좋았겠는데. 그러면 이 불치병이 조금은 덜 억울할 텐데. 파이는 차가운 땅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검은 인물이 파이를 저 멀리 파이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는 단단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이 가냘프고 여린 느낌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무명이었다.
그제야 파이는 이 모든 것이 환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깨어나셨습니까?”
“……여기는 어디지요?”
“보시면 모르십니까? 묘지입니다.”
파이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주위에는 잔디가 깔려있었고, 그 사이 회색 비석이 가득 튀어나와 있었다. 공기는 습했고, 서늘했다. 무명은 파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고, 다시 등을 보였다, 그는 묘비 하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파이는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내딛자마자 지독한 현기증이 올라왔다.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무명 옆에 다가가서 그 묘비를 같이 내려다보았다. 초라한 비석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주위에 오래된 꽃이 몇개, 새로운 꽃이 하나 놓여있었다. 묘비에는 어느 이름이 쓰여있었다. ‘메모.’ 그 앞에서 무명은 이미 무너졌다. 그저 육신만이 폐허처럼 남아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파이는 제가 말한다고 상대가 들으리란 생각을 못 했다. 무명은 거기 없었기 때문이다.
“메모군요. 조금 일찍 죽었지요. 어차피 머지않아 다 죽을 텐데…….”
그러나 무명은 그 말을 듣고 샛노란 눈으로 파이를 직시했다. 무명은 이래서 파이를 이곳에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그는 파이에 오래 시선을 꽂았다가 마른 입술을 달싹여서 말했다.
“당신은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그것은 물음이 아니었다. 무명은 그저 운을 떼었을 뿐이다.
“저는 있습니다. 메모 대신에 제가 죽었어야 했지요.”
그것을 파이가 모를 리가 없다. 그 점을 언급했기 때문에 파이는 두들겨 맞았다. 잊지 못할 첫 만남이다. 하지만 그것을 무명이 언급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간 무명은 해당 소재를 꺼내는 것을 아주 많이 꺼렸다. 특히 파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명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말을 꺼냈다.
“만약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저는 그리할 겁니다. 제가 죽고, 메모를 살릴 겁니다.”
무명의 손이 비석을 어루만졌다. 음각으로 새겨진 이름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죽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죽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저지르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지구와 함께 죽더라도 유토피아에 보복하고 싶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겁니다.”
파이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가 불현듯 외쳤다. 소리내어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거야 너는 건강하니까!”
외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저 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었다.
“피를 토할 때마다 남은 수명을 가늠해본 적 없으니까! 건강하지 않다는 이유로 자격이 박탈될 일도 없으니까 그렇겠지! 나는 아니야, 아니라고요!”
바람이 불었다. 무명의 묘비에 바쳐진 꽃이 하나 둘 날아갔다.
“나는 유토피아에 갈 수 있었어요, 그럴 수 있었다고요! 그런데 너 같은 녀석들이 다 망쳤어. 네 말대로 죽음조차 불사한다는 녀석들이 무턱대고 유토피아에 미사일을 날려버렸으니까! 왜 그들은 죽는 길을 택한 거지요? 이 지구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죽어버릴 텐데! 왜 유토피아에 대고 받아달라고 애걸하지 않았던 거지요?”
파이는 아까 무뢰한은 어떻게 되었냐고 묻지 않았다. 무명은 어떻게 파이가 간이역에서 묘지까지 오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어린 외침에 답할 뿐이었다.
“파이, 그래서 당신이 이해를 못 하는 겁니다. 영영.”
무명이 말했다. 메모를 감싸 안은 대지에 서서. 영원하지 못한 시간에 서서, 바람이 불어 잔디가 흔들리는, 그 잠깐동안만 들리고 사라질 말을 뱉었다.
소중한 이들을 잔뜩 품고 공전하는 그들의 행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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