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 단편

[진혼_웨이란]Pretender

언젠가 어린 윈란을 만난 션웨이

유호 2차 by 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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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션웨이의 곁을 스치는 시절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모든 본성을 내리누르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그를 시험하기라도 하는 듯, 단 한 조각의 순간도 고요히 지나지를 않는 것이다.

  차라리 시간의 흐름에 떠밀리거나 자연의 섭리로부터 버려져 완전히 부유하는 존재였다면 조금은 그 소란을 견디기 쉬웠을까? 감히 영원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살며 고요히 생각에 잠길 때마다 드물게 그런 질문이 찾아들곤 했다. 그러나 션웨이는 그런 생각이 들 적마다 조소를 담아 자답하는 것이다. 아무리 물은들 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시간을 몇 번이나 거슬러 오르든 바뀌는 것은 없으리라고.

  그러니 션웨이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지나온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제가 거쳐온 선택들을 후회하기 위함이 아니다. 살아온 모든 궤적이 곧 세계의 역사인 자가 뒤를 돌아볼 때는 소란했던 모든 시절에 새겨진 인연을 가만가만 짚으며 세어보는 것이다.

  깊고 얕은. 밤하늘의 별처럼 촘촘하고도 산발적으로 새겨진 인연들을 되짚자면 션웨이의 얇은 입술에는 씁쓸한 곡선이 그려진다. 일방적으로 쌓아 올려 션웨이만이 기억하는 인연은 으레 무딘 칼이 되어 심장에 박히곤 했다.

  처음엔 그 감각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대불경의 땅에서 비롯하여 세상 가운데 가장 삿되며, 영혼마저 차게 벼린 칼날로 베어낸다는 당당한 참혼사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도 엉엉 울었더랬다.

  당연히 피하고 싶었다. 홀로 기억하고 추억하며, 떠내 보내기만 해야 하는 고통은 두 번 겪을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요를 모르는 세월은 몇 번이고 봄바람 같기도 하고, 풍랑 같기도 하며, 그치지 않는 비 같기도 한 이를 션웨이의 곁으로 보냈다. 이제 션웨이는 맥박처럼 익숙해진 동요와 상실에 울지 않는다.

  소년이 나무에서 떨어지던 그 초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시선을 둔 곳에 션웨이가 알아볼 수밖에 없는 소년이 추락할 때,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끝내 눈물을 흘리지는 못했다.

“윽!”

  털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듣기에도 꽤 아픈 신음이 소년의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나무 그늘 아래를 걷던 션웨이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어찌나 잔인하고 유난스러운 운명인지. 차마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없는 방식으로 제 앞에 나타난 곤륜군의 환생을 보며 션웨이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을 했다.

‘나설까?’

  짧은 순간 충동이 찾아들었다. 션웨이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친 것은 찰나였다.

‘그에게 내 모습을 드러내도 될까?’

‘내가 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면 어떡하지?’

‘진혼령주를 보필하는 검은 고양이. 그는 어디 있지?’

‘그의 육신은 인간에 불과하니 잠시 나타났다가 기억을 지우면 되지 않을까?’

‘섣불리 기억을 지웠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을 고민이었다. 그늘에 머무르며 손톱으로 애꿎은 제 손바닥만 괴롭히고 있는데, 멀리서 스읍, 하고 아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고 누군가 션웨이의 등을 떠밀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일단은……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자. 그는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제 몸을 도통 돌보지 않으니.’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 션웨이는 햇빛 아래 초목처럼 빛나는 소년을 향해 달려나갔다.

 

 

“이 망할 뚱보 고양이가…….”

“학생, 괜찮아?”

  션웨이는 제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책 없이 뛰어오기는 했으나, 그에게 말을 건다니. 그런 용기는 무턱대고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욕설이나 험담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며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던 소년은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올해 열일곱 살이 된 자오윈란은 그 나이가 되도록 중2병이 낫지를 않았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사춘기 소년에게 나무에서 떨어진 일과 그로 인한 부상은 참으로 볼품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걸 다른 사람이 보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꼴사나운 일인가?

  도무지 면이 서지 않는 상황에 그는 굉장한 수치심과 갈 데 없는 분노를 느꼈다. 들어 올린 자오윈란의 얼굴에 순하거나 부드러운 표정이 올라올 리가 없다는 소리다.

  그러나 시선의 끝에 션웨이가 맺혔을 때, 자오윈란은 기분이 나빴던 것은 물론이고 다친 곳이 아픈 것마저 모두 잊고 얼굴 위로 멍청한 표정만 띄웠다. 그야말로 삼혼칠백이며 넋이 다 달아난 얼굴이었다.

“대, 대, 대단한 미인…….”

  넋과 함께 이성도 잃은 자오윈란이 입술을 멍하게 벌리며 사실을 적시한 헛소리를 뱉어냈다.

“응?”

“아, 아니에요! 괜찮, 괜찮아요!”

  션웨이가 의문이 서린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까지도 길고 숱이 많은 것이 정말 절세미인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더 하얗게 번졌지만, 자오윈란은 가까스로 이성을 찾고 손을 내저었다. 그에 션웨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미인은 시름에 잠긴 얼굴조차 아름답다더니. 딱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구나.’

  문학 시간에 졸기 바빴던 자오윈란은 그 고사 속 미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눈앞의 남자를 묘사할 수 있는 최고의 구절은 단박에 기억해냈다.

  자오윈란이 허튼 생각을 하는 사이, 션웨이는 윈란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닐 것 같은데……. 잠깐 일어나보겠니?”

  소년을 부축하기 위해 션웨이는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손을 내밀었다. 추락할 때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로부터 배어 나온 혈향이 션웨이의 코끝을 스친 것은 동시였다.

  턱 안쪽과 귀밑이 아찔하도록 저린 자극이 일었다. 비리고 역해야 마땅한 피 냄새가 황홀한 향기로 다가와, 션웨이는 목울대를 울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맡고 있으면서도 지독히도 그립고, 생전 처음 맡아보는 것임에도 익숙한 향이 인간의 몸을 모방하여 구색만 맞췄을 뿐인 션웨이의 ‘껍데기’에 소름을 피워냈다.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찰나, 윈란이 션웨이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정신을 일깨우는 생경한 감각에 션웨이는 윈란의 손을 그대로 쳐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소년은 웬만한 성인 못지 않게 키가 크고 골격이 다부졌다. 하지만 아직 가느다란 선은 자오윈란의 어린 나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 같은 온기를 품은 길쭉하고 예쁜 손이 션웨이의 손안에 있었다.

  기이한 흥분이 션웨이의 단전에서부터 치밀었다. 자오윈란은 어리고 약했다. 진혼령주로 태어났으나, 귀왕의 힘에 비할 수준은 되지 않을 것이다. 원한다면 션웨이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소년을 끌어안고, 취하고, 목덜미를 물어뜯어 달콤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를 갈구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더 나아가 그의 목을 쥐어 그의 목숨까지도 취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는 감히 소년을 해칠 수 없었다. 션웨이는 제 안에서 징그럽게 자라나는 욕망과 충동을 몇 번이고 베어냈다. 늘 해온 일이었기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수월하게 본성을 내리누른 션웨이가 평온한 얼굴로 자오윈란을 일으켜 세웠다.

“윽!”

“발목을 다쳤어. 자리부터 옮겨야겠다. 부축해줄게.”

  션웨이는 억세지만 아프지는 않을 정도의 힘으로 자오윈란의 팔을 당겨 제 어깨에 둘렀다. 소년의 몸이 품에 바짝 다가오자, 진득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던 피 냄새는 멀어지고 상쾌한 비누 냄새만이 숨결에 따라붙었다.

  멀리 가지 않아, 적당히 엉덩이 붙이고 앉을 수 있는 곳에 당도했다. 션웨이는 윈란을 조심스럽게 앉히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 건너편에 약국이 보였다.

“잠깐 여기에서 기다려. 약국에 다녀올게.”

“에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냥 두면 알아서 나을 거예요.”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에 션웨이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날이 더워. 까딱 잘못하면 흉이 질 거야.”

“윽, 그건 좀 억울할 것 같긴 하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얌전히. 그러면 되죠, 형?”

“……응.”

  대비할 틈도 없이 귀를 파고든 호칭에 션웨이는 무언가에 목을 억세게 틀어막힌 것 같은 감각에 한 박자 늦게 작은 대답을 내놓았다. 당혹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션웨이는 서둘러 돌아섰다.

 

 

‘우리 태후 마마도 내가 다쳤을 때 저렇게까지 유난은 아니신데.’

  이쪽으로 돌아오는 남자의 손에 들린 약국 봉투에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자오윈란이 생각했다.

  도로를 건너며 차나 오토바이, 자전거가 지나가는지 살피던 남자의 눈이 윈란에게 닿았다. 윈란은 반사적으로 생긋 웃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 봐도 선명하게 남자의 얼굴이 고운 빛으로 달아올랐다.

‘더위를 많이 타나? 오늘 그렇게 안 더운 것 같은데. 근데 진짜 환장하게 예쁘다.’

  자오윈란이 무심하고도 경망스러운 생각을 하는 사이, 션웨이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사 온 것들을 봉투에서 하나둘 꺼냈다. 소독약, 거즈, 연고, 크고 작은 밴드가 연이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자오윈란은 웃음을 터트리는 대신 발끝을 신나게 까딱거렸다.

“소독해야 하니까 얌전히 있어.”

  연신 까딱거리며 정신을 흩트려 놓는 발목을 붙잡으며 션웨이가 말했다. 소년이 짓궂은 미소로 고개를 주억거렸고, 션웨이는 남몰래 긴 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잠깐 쥐었던 발목이 제 한 손에 여유롭게 잡히는 것이 또 마음을 어지럽힌 탓이었다.

  션웨이는 윈란의 상처에만 집중하며 소독약을 조심스럽게 도포했다.

“다음엔 나무 위 같은 높은 곳엔 함부로 올라가지 않는 게 좋겠다.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이어도 까딱 잘못하면 떨어져서 크게 다칠 수 있잖니.”

  조곤조곤 부드럽게 이어지는 션웨이의 말은 걱정 같기도 했고, 꾸지람 같기도 했다. 묘한 기분에 뒷머리만 긁적거리던 자오윈란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저도 나무 같은 건 안 탔을 거라고요. 특히 저렇게 오래 묵은 고목엔.”

  소년은 션웨이의 어깨너머로 제가 떨어졌던 나무를 바라봤다.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년의 검고 맑은 눈동자가 흐려졌다.

“아무래도 저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자오윈란이 자각 없이 중얼거린 말에 션웨이는 당장 뒤를 돌아 나무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다친 학생을 도와준 지나가던 사람’이어야 했다. 나무에 붙은 영가(靈駕)를 확인하는 것은 윈란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션웨이는 연고를 바르는 일에 집중하려 부단히도 애쓰며 화제를 일상적인 방향으로 끌어왔다.

“그럼 오늘은 왜 올라갔는데?”

“기르는 고양이가 있는데.”

  진혼령주를 수호해야 할 검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션웨이의 짙은 눈썹이 일순 사나운 기세로 치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언젠가 한 번 그 고양이 영물을 호되게 꾸짖으리라. 그대가 지켜야 할 진혼령주가 그대의 불찰로 다쳐서야 되겠느냐고.

“그 녀석이 자기 몸무게는 생각도 안 하고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가 가지가 부러지게 생겼잖아요. 미우나 고우나 일단은 내 고양이인데 구해야지 어쩌겠어요. 근데 이 망할 배신자가 어느새 쏙 내려가서 사라져버린 거 있죠?”

  윈란은 나무에서 추락하게 된 사연을 묻기만을 기다린 듯 잔뜩 억울한 얼굴로 조잘댔다.

  알 만했다. 대황산성의 고양이는 산성을 닮아, 잰 체하며 장난치는 것이 숨 쉬는 것과 같은 영물이었다.

“찾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마 집에 갔을 거예요. 멍청하게 생겼지만 나이를 허투루 먹은 놈은 아니니까.”

  엄마는 그 녀석 무지개 다리 건널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서 가기 전에 잘 해줘야 한다고 하는데, 그 말도 벌써 10년째거든요. 내가 보기에 그 망할 뚱보 고양이 녀석은 저보다 오래 살 거예요.

  투덜거리며 잘도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션웨이가 저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물론 절대로 션웨이가 그럴 리는 없지만 션웨이가 아닌 이에게는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한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소년이 종알거리는 이야기가 지극히도 애틋하여서. 션웨이는 작은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 웃음의 끝에 죄악감과 씁쓸함이 묻어났다는 사실은 션웨이 자신만이 알 일이었다.

  언제나 이 마음이 문제였다. ‘그’의 곤경을 차마 눈 감고 넘어가지 못하는 이 마음이.

  어느 세상에서는 전쟁에 나선 ‘그’가 적군의 칼에 죽는 것을 봐야 했고, 어느 세상에서는 역병이 돌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갓 내쉰 숨을 영영 잃는 모습을 봐야 했으며, 어느 순간에는 태어난 모습도, 살아가는 모습도 보지 못한 채 저물었다는 소식만을 들어야 했다.

  시절은 소란스러웠고, 그 소란은 언제나 션웨이의 귓가에 유혹의 문장을 속삭였다.

‘그를 지켜.’

‘그의 앞에 나서서,’

‘그를 끌어안아.’

‘그리고 그가 겨우 피한 죽음의 그림자로 다시 끌어들여, 영원히 함께 혼돈으로 돌아가.’

  그 속삭임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션웨이는 몇 번이고 제 입 안쪽 여린 살을 짓씹고, 팔뚝을 물어뜯어 피를 내가며 유혹에 굴복하려는 자신을 멈춰 세우곤 했다.

  그러나 막상 ‘그’를 구하고, ‘그’를 도울 기회가 오면 제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시대에 션웨이는 그에게 약재를 가져다주는 상인이기도 했고, 진혼령 다루는 법을 알려준 스승이기도 했으며, 명감을 선물한 시계장이 되기도 했다.

  허튼 생각이 가끔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미약한 연으로 겨우 스쳐 가더라도,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나도 조금은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신을 바라보기를 바라면서도, 당신의 존재에 심장이 찢기는 것 같은 이 고통 속에 사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아니. 내겐 이 고통마저 달콤해. 내 고통으로 당신이 살아간다면, 그 궤적을 내가 따라갈 수만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몇 천년이고, 이 삶을 반복할 수 있어.’

  허튼 생각은 그야말로 허튼 생각일 뿐이다. 애초에 션웨이에게는 고를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세계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 위에서 흘렀고, 션웨이는 그 운명 위를 걷는 순례자였다. 그의 앞에는 지름길도 샛길도 없었다. 그저 불완전한 혼에 각인된 빛 하나만을 목적지 삼아 끝없이 운명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 빛이 지금 션웨이의 앞에 있었다.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어린 싱그러움을 쏟아내며 그저 환하게.

  자오윈란의 무릎에 가장 커다란 밴드를 붙여준 뒤, 션웨이는 속에서 한차례 폭풍이 일었던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고요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다 됐어.”

  그는 다시금 손을 내밀어 윈란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고맙습니다. 형 덕분에 흉은 안 지겠어요.”

“그래야지.”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 처음 본 사이에 어떤 대화거리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쩐지 자오윈란은 지금 이 남자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괜히 조바심이 난 윈란은 그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을 비쳤다.

“있잖아요. 형은 이름이 뭐예요? 아, 먼저 제 이름은…….”

“해 진다. 가족들이 걱정하겠어. 고양이도 집에 돌아갔는지 확인해야지.”

“아……. 그렇긴 한데…….”

  션웨이가 자연스럽게 윈란의 말을 자르고 타일렀다. 윈란은 조금 풀이 죽어 시선을 떨어트렸다. 동글동글한 윈란의 머리꼭지를 보며 션웨이가 아스라이 부서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위험한 일에 함부로 뛰어들지 말고. 몸조심하고.”

“……네.”

  순순히 대답하는 자오윈란을 칭찬하듯, 션웨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투명하도록 맑았던 윈란의 눈빛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윈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렸다.

  참혼사가 친히 건 암시이니 진혼령주라고 해도 아직 어린 윈란은 잠시간이라도 저렇게 굳은 채 서 있을 것이다. 션웨이는 그가 암시를 이겨내기 전에 자리를 피하고자 발길을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다.

  수없이 많은 윤회를 거쳐 돌아온 곤륜의 환생, 자오윈란. 션웨이는 이제 자오윈란의 삶이라는 무대에서 퇴장할 차례였다. 그는 자오윈란에게 있어 잠깐 난입했다 사라진 관객이어야 했다.

  저와 마주친 순간의 기억을 자오윈란에게서 모두 지워낸 션웨이는 그렇게 다시 그늘 아래에 숨었다. 이번에도, 션웨이만이 쌓은 인연이었다.

“……뭐지? 나 왜 여기 있냐.”

  얼마 지나지 않아 암시에서 깨어난 자오윈란은 머리를 긁적이다 팔을 움직이는 것이 어색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 팔다리에 덕지덕지 붙은 밴드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자오윈란은 퍼뜩 일의 인과관계를 끼워 맞췄다.

  하굣길에 학교 담장에서 저를 기다리다 허리가 끼어버린 다칭을 만났고, 녀석을 비웃고 놀리며 오다 보니 괜한 승부욕이 도진 다칭이 나무도 못 올라오는 하찮은 인간은 진혼령주로 취급도 안 해줄 거라며 커다란 고목을 잘도 타고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땅과의 높이를 실감한 녀석은 윈란에게 좀 도와달라며 빽, 소리를 질렀고…….

“망할 똥고양이 같으니라고! 집에 가기만 해 봐. 가만 안 둘 테니까.”

  반쪽짜리 기억을 회복한 자오윈란은 성난 얼굴을 하고는 집을 향해 발을 굴렀다. 싱그러운 햇살 속을 달리는 그 뒷모습을 션웨이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끝났어야지. 그게 마지막이었어야지.

  션웨이는 눈앞에 선 남자를 보며 아연하게 생각했다. 어느 찬란했던 여름날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저승을 통해 지원해야 할 일이 아니라면 그는 곤륜군의 환생체 앞에 나선 적이 없었다.

  귀왕은 ‘그’가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도 몰랐고, 여전히 그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렇게 철저히 ‘그’와는 거리를 두었다. 이 생에 다시는 스치지 않도록. 또 그의 눈길 한 번, 웃음 한 번을 얻어내고자 그의 생을 해치지 않도록.

  그러나 시절이 불러온 바람은 다시금 션웨이의 앞에 자오윈란을 데려다 놓았다. 고요할 날 없는 션웨이의 마음에 거센 폭풍이 불어닥친 것은 그와 동시였다.

  사내는 장성했고, 엉망진창인 옷매무새로는 차마 감춰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가 션웨이를 향해 내민 손은 곱기만 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단단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공안부의 자오윈란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당신의 이름은 자오윈란이구나. 안정적인 곳에서 진혼령주의 일을 수행해나가고 있었구나.

  반가움과 안도감이 찾아들어 하마터면 션웨이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어리석은 표정을 지을 뻔했다.

  그런데 자오윈란. 이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당신은 나의 유일이어도, 나는 당신의 운명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션웨이의 심장을 처음 물들인 것은 깊은 절망감이었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그’가, 자오윈란이 흘리는 빛은 도무지 션웨이를 자유롭게 두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절망의 끝에 밀려든 파도는 강렬한 희열을 품었다.

  당신이 나를 찾아냈다. 그 어느 세상에서도 내밀어주지 않았던 손을, 당신이 먼저 나에게 내밀었다.

  아아, 내가 어찌 감히 그 손길을 거부할 수 있을까.

“션웨이라고 합니다.”

  절망스럽도록 행복했다. 이것이 제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망칠 선택인 줄을 알면서도, 션웨이는 기어코 자오윈란이라는 세상에 뛰어들고야 말았다.

  부디, 이번만큼은 해피엔딩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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