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우리랑 다른 존재가 하나 있어

[인간] / ▶️ (@q60378)

1.

잠뜰은 그날 그 터미널의 마지막 버스를 타게 된 것이 조금 어색했다. 심야의 버스는 승객이 별로 없었는데, 이게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이날이 유난히 적었던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잠뜰은 옆자리가 빈 앞쪽 자리를 예매했다. 표와 자리의 번호를 확인한 잠뜰은 커다란 가방을 좌석 위의 짐칸에 올리고는 창 쪽 자리에 작은 손가방을 두고 통로 쪽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앉자마자 의자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탈 때는 피곤함이 몰려와서 금방이라도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자리에 앉아 눈을 감자 오히려 다른 승객들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서 잠이 깨는 것 같았다. 두어 명 정도의 승객이 잠뜰의 옆을 지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녹음된 목소리로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희 버스는 항상 승객 여러분의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나온 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움직이자 오히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잠뜰은 그렇게 한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한밤중을 지나 거의 새벽이 다 된 시간, 잠뜰이 잠에서 깬 건 자세가 불편해서였다. 처음에 잠뜰은 눈은 뜨지 않은 채로 자세만 고치고선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번 잠이 깨고 나니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눈을 뜬 잠뜰은 이상했던 것이 버스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버스는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가 없는 상태로 도로에 갇혀 있었다. 잠뜰은 이런 상황에 용케도 다들 조용하구나 하는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본 잠뜰은 헛숨을 삼키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가 이상했다.

2.

덕개는 오늘로 두 번째 운행해 보는 심야 시간의 고속버스에 오르며 하품을 했다. 조금 전까지 자다가 나온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몇 안 되는 오늘의 승객이 승차 구역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심야 시간대의 장점은 승객이 얼마 없다는 점과 차가 그리 막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덕개는 서둘러서 도착한 뒤에는 곧장 퇴근해서 제대로 된 잠을 잘 생각을 하며 입안이 알싸해지는 사탕을 하나 물었다.

승객을 태운 뒤 출발한 덕개는 고속도로에 접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첫 번째는 오늘따라 심야의 고속도로가 다른 차로 가득해 오도 가도 못 하게 길이 막힌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길이 막히는 정도야 앞선 차 중에 고장 차가 있거나, 사고가 난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려니 싶었지만, 더 이상한 것은 따로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승객이 이상했던 것이다. 원래도 승객 중에는 이상한 사람이 늘 있었는데, 오늘은 그 정도가 달랐다. 조상신이 보내는 쎄한 신호가 느껴질 정도라고 할까.

버스 기사가 된 뒤로 이상한 승객을 보지 않은 날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상한 승객은 늘 있었다. 심지어는 입사할 때 받은 매뉴얼에도 이상한 승객에 대한 대처 요령이 있을 정도였다.

덕개는 고속버스 운행으로 직무가 바뀌면서 새롭게 받았던 매뉴얼을 떠올리고 기어를 바꾸었다. 앞에는 빨간 브레이크 등이 들어와 있는 차량의 뒷모습이 가득했고, 매뉴얼을 다시 훑어보는 몇 분 정도는 그냥 서 있어도 괜찮을 듯 보였다.

매뉴얼을 꺼낸 덕개가 백미러를 통해 승객들을 살폈는데, 상황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일단, 이상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정확히 어디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 큰일이었다.

“망했네….”

중얼중얼 혼잣말을 되뇐 덕개는 서둘러서 매뉴얼을 펼쳤다.

<견견교통 고속버스 운행 기사 매뉴얼>

승객 탑승 시에는 반드시 티켓을 2회 이상 확인해야 합니다.

운행 중 승객과 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안내 방송은 미리 준비된 녹음 파일로만 진행하며, 운행 기사는 승객과 직접 대화할 수 없습니다.

부득이하게 운행 중 승객과 대화한 경우, 대화 내용을 반드시 녹음해야 합니다. 또, 녹음 파일은 당일 자정이 지나기 전에 법무팀에 제출해야 합니다.

1번부터 3번 조항의 내용은 당사의 귀중한 인재인 운행 기사 여러분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니 반드시 숙지하기 바랍니다.

승객에게 이상이 발생하여 정차한 경우, 승객이 스스로 하차하거나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려야 하며, 승객에게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승객 간의 분쟁이 생긴 경우 해당 상황이 녹화된 영상기록물을 인사과에 제출해야 합니다.

승객 하차 시 두 번 이상 인사해서는 안 되며, 승객이 완전히 내리기 전에 인사해서는 안 됩니다.

3번 조항을 어긴 경우 다음날 자정이 될 때까지 전화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5번 조항을 어긴 경우 운행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녹음된 운행 종료 멘트가 재생될 때까지 운행을 유지하여야 하며, 8번에 의한 운행 시 운행 경로는 기사의 재량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운행 경로를 이탈한 뒤 녹음본이 아닌 목소리를 들을 경우 절대로 대답하지 마십시오.

상기 조항을 모두 지켰음에도 발생하는 문제 상황에 대해서는 본사에 연락하여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본사와의 연락을 통해 전달받은 해결 방법을 실천하지 않아 생기는 모든 일은 운행 기사의 책임임을 숙지하십시오.

덕개는 매뉴얼을 대강 훑어본 뒤 다시 한번 승객들을 확인했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뿐, 정확히 어디가 이상한지는 짚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승객과 대화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니 덕개는 입을 꾹 다문 채 승객들을 힐끔거리기 바빴다. 아직 이상이 생겼다고 하기도 어려웠고, 정체로 인해서 차는 멈춰있으니 달리 뭔가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덕개는 녹음된 파일을 틀기 위해서 버튼을 눌렀다. 도착 시간이 지연된다는 안내 방송이었다. 승객들을 향해 설치된 스피커에서 상큼한 여성의 목소리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현재 도로 정체로 인하여 도착 시간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버스는 승객 여러분의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3.

각별은 버스에 오른 뒤로 계속 느껴지는 악취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익숙해질 수가 없는 이상한 냄새가 계속 났는데, 뭔가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 냄새였다. 코를 막아도 이상하게 그 냄새가 계속 나는 듯했다.

승객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버스에 오른 각별은 이미 버스 안에 가득해진 냄새의 근원지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아내자고 냄새를 계속 맡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러는 동안도 견딜 수가 없겠다 싶었던 것이다.

결국 각별은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창문을 열고 움직이는 차로 들이치는 바깥바람을 쐬니 조금 괜찮아지는 듯했던 냄새는 고속도로에 접어든 버스가 정체로 멈춰 서기가 무섭게 다시 코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각별은 매캐한 냄새가 풀풀 풍겨 들어오는 창문에서 고개를 돌려 승객들을 둘러봤다. 대체 어디에서 나는 냄새인지 알아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각별은 고개를 돌렸던 것을 약간 후회했다. 아까는 왜 몰랐던 건가 싶을 정도로 한눈에 보기에 이상한 존재가 승객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것은 명백히 다른 존재였다. 각별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탓에 속이 불쾌해져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런 것이 왜 이 사이에 들어와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콜록거리는 것으로 헛구역질을 대충 감춘 각별은 눈을 감고 모른 척 잠이나 자려 했다.

“저기요.”

다른 승객이 갑자기 말을 걸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눈을 뜬 각별은 표정을 굳힌 채로 앉아서 말을 걸어온 승객을 쳐다봤다.

4.

수현은 오늘 하루 종일 안 그래도 되는 일이 없었던 참이었다. 기분 나쁠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 탓에 한껏 예민해진 채로 버스를 탄 수현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뒷자리에서 갑작스럽게 헛구역질 소리가 나지만 않았어도 서서히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을 터였다.

“저기요.”

헛구역질로도 모자랐는지 큰소리로 기침까지 해대던 뒷자리 승객은 벌떡 일어나 말을 거는 수현을 보고는 뭐냐는 듯 표정을 굳힐 뿐이었다. 표정은 영 재수 없었지만, 파리한 얼굴색을 보니 불쾌했던 것이 조금 내려가고 안쓰러운 마음이 조금 들었다.

“아니, 어디가 아프신 거면 내리든 하지 왜 버스 안에서 헛구역질이나 하고 그러세요.”

“고속도로에서 내리면, 콜록, 뭐 어디 갈 데는 있나?”

“예?”

“뭐.”

“아니, 저 아세요?”

“모르는데.”

“근데 왜 반말이세요?”

수현은 기가 차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뒷자리 승객은 여전히 뭐가 문제냐는 듯 재수 없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고는 고개를 까딱했다. 수현이 설마, 하는 사이 그가 기침을 한 번 더 하더니 입을 열었다.

“반말하면 안 됨?”

“이거 미쳤네…. 야, 너 내려.”

결국 열이 뻗칠 대로 뻗친 수현이 뒷자리 승객에게 말하는 순간, 버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현재 도로 정체로 인해 도착 시간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희 견견교통은 승객 여러분의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안내 방송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상큼했다. 수현은 그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열 받던 것도 다 가라앉는 것 같았다. 결국 수현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앉아있는 뒷자리 승객을 흘겨보다가 자리를 옮겼다.

“기사님, 저 좀 옮겨 앉습니다!”

기사는 들었는지, 아닌지 대답이 없었지만, 수현은 몇 칸 정도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니 마음이 그래도 조금 편해지는 듯했다.

5.

라더는 근처에서 들린 부스럭 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이 들었었는데, 끝부분만 들린 안내 방송은 뭔가 양해를 구한 듯했다.

라더는 어쩐지 참기 힘들 정도로 갑갑한 느낌에 물을 찾았다. 그런데, 분명 타자마자 앞 좌석에 달린 음료 놓는 곳에 두었던 생수통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가져갔구나, 싶어서 벌떡 일어난 라더의 눈에 곧장 생수통이 보였다. 별로 멀지 않은 자리에 라더가 뒀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생수통이 놓여 있었다.

라더는 남의 물통을 마음대로 가져가면 어쩌냐고 따지고 물통을 되찾아 올 심산으로 그 자리로 갔다. 물론 어디에서나 파는 평범한 생수였으니 제 것이 아닐 수도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승객도 몇 없고 흔들림도 없이 멈춰있는 차에서 다른 곳에 제 생수통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 뭐야.”

그리고 생수통이 놓인 자리에 간 라더는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분명 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있었던 흔적이라곤 없었다.

생수통은 꺼내 들어 보니 제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시다 만 생수였는데 물이 더 줄어든 것 같지도 않았다.

라더는 그 자리에 서서 생수를 열어 조금 마시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갑갑한 느낌이 조금 가실까 싶어 자리에 앉자마자 창문을 열었던 라더는 불쾌한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창문을 닫았다.

“하…. 짜증 나네.”

가실 기미가 없는 갑갑함을 조금이라도 잊어버리려면 아까처럼 잠이라도 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라더는 두 눈을 감고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6.

공룡은 배가 닿은 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 때문에 눈을 떴다. 누가 움직였던 모양인지 진동은 금방 사라졌다. 기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공룡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승객이 더 적었다.

얼핏 보이는 바깥은 그냥 새카만 바닥뿐이었다. 각도 때문에 다른 부분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공룡은 짐을 올려놓는 칸에 엎드린 자세로 끼어 있는 채로 꿈지럭거렸다. 몇 센티쯤 움직이나 싶다가 금방 다시 서기를 반복하며 정체 속에 갇힌 버스는 멀미 지옥이었다.

엎드려 있는 자세며 돌아간 다리며 편한 데가 없었던 공룡은 내려가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차가 이렇게까지 막히는 걸 보면, 그리고 다른 승객들의 반응도 보면, 고속도로까지는 들어온 모양인데 내리라고 하지는 않겠거니 싶기도 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고민을 하던 공룡이 내려가 볼까, 하는 마음을 먹고 불편하게 돌아가 있는 다리를 꿈지럭대며 움직였을 때, 아래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7.

“나오라고!”

잠뜰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계속, 멈추지도 않고, 심지어 이상함의 종류는 공포에 가까웠다. 잠뜰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뭔가가 분명히 있었다. 그 뭔가는 나올 생각이 없는지 줄곧 내던 소리를 감추고 조용히 숨을 죽이는 모양이었다. 다른 승객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느낌이 났다.

잠뜰은 숨을 죽이고 잠시 기다렸다. 다른 승객들은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들까지도 전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기겁해서 벌떡 일어난 잠뜰은 어느 쪽에서 소리가 들려오는지 두리번거리다 위를 보았다.

확실한 건, 천장 쪽에 뭔가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잠뜰은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천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 쾅, 두드리기를 반복하자 소리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와! 나오라고 이 새끼야!”

겁에 질린 것을 감추려는 것처럼 고함을 지르던 잠뜰은 소리가 약 올리는 것처럼 변하기만 할 뿐, 누군가가 나타나거나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뜰은 기가 빠져서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팔은 욱신거리고,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그래도 눈을 감자 주변이 아까보다는 조용해진 것 같았다. 잠뜰은 그대로 잠을 청했다.

8.

덕개는 백미러를 힐끔 볼 때마다 오한이 들고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오늘따라 너무 많은 것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덕개는 결국 다시 매뉴얼을 펼쳤다.

승객 탑승 시에는 반드시 티켓을 2회 이상 확인해야 합니다.

1번 항목을 찬찬히 다시 읽은 덕개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매뉴얼을 붙들고 마지막 항목까지 읽은 다음, 뒷면을 비롯해 운전석에 붙어 있는 다른 공지까지 전부 살펴보는 동안, 딸꾹질은 점점 심해질 뿐이었다.

“설마.”

딸꾹질 때문에 혼자 중얼거리기도 어려웠다. 설마, 설마 내가 티켓 확인을 제대로 안 했다고?

하지만 대체로 모든 설마가 그렇듯이, 덕개의 설마도 부질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부정해 보려 한들, 확인하지 않은 티켓을 확인했던 셈 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전부 다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덕개는 매뉴얼을 다시 읽었다. 여전히 차는 한 번에 1미터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중이었다. 설마 이 상황도 전부 그것 때문인가 싶어진 덕개는 매뉴얼 안에 제발 해결 방법이 있기를 바라며 매뉴얼을 계속 읽었다.

덕개에게는 정말 불행하게도, 그 안에 해답은 없었다. 덕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운전석에 설치된 수화기를 집어 들고는 1번 버튼을 마구잡이로 눌러댔다. 생각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이라고는 본사에 연락하는 것뿐이었다. 신호음이 가기 시작한 다음에야 마음을 놓은 덕개는 백미러를 힐끔 확인했다.

승객들은 전부 일어나 있었다. 덕개는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져 얼른 시선을 내리깔고는 수화기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9.

각별은 점점 기분이 나빠지는 중이었다. 시비가 걸리지를 않나, 불쾌한 것과 같은 버스에 타야 하는 것도 그랬고, 스피커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의 내용도 짜증 났다. 쾌적한 여행은 무슨, 최선이 이 꼴인 게 확실하다면 이 운수회사는 조만간 망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각별은 코를 싸쥔 채로 열린 창문을 향해서 심호흡을 했다. 차라리 버스가 빨리 달리는 중이기라도 했다면 좀 나았을 텐데 도착 시간은 계속 지연된다는 방송만 나올 뿐 언제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짜증을 삭이며 심호흡을 하는 도중에, 곁눈으로 힐끔 보이는 앞쪽의 이상한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별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한숨을 푹 쉬었다.

이상한 승객이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말거나, 안내 방송은 아까부터 똑같은 소리만 계속하는 중이었다.

-저희는 승객 여러분의 편안하고 쾌적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기사는 졸고 있나? 승객이 벌떡벌떡 일어나고 그러면 벨트 매고 앉아있으라고 하는 안내 방송이 나올 법도 한데, 마음에 들지 않는 일뿐이었다.

각별은 눈을 감아버렸다. 보이는 건 안 보면 그만이고, 들리는 건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일단 이 악취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앞섰다.

문득, 열려 있는 창문이 생각났다. 각별을 창문이 열린 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내릴 수 있나?”

중얼거리는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을 테지만, 안내 방송의 멘트는 어쩐지 경고하는 것처럼 들렸다.

-저희는 여러분의 안전하고 쾌적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각별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 창밖의 멈춘 풍경을 가만히 쳐다보며 승질을 돋우는 안내 멘트를 들었다.

10.

수현은 옮긴 자리에서 한결 편한 마음으로 쉬고 있었다. 그래도 거슬리는 것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는 버스에 타면 으레 생기는 일이라는 생각에 별로 화도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앞쪽에서는 누가 물을 마시는 소리나, 잠이 들어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은 저도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다.

차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고속도로 한복판에 갇힌 채였는데, 이래서는 날이 밝기 전에 도착을 하기나 할지 걱정이었다. 수현은 아까부터 지연이 예상된다거나, 지연되고 있다거나 하는 말뿐, 무엇 때문에 정체 중인지, 언제쯤 도착할 것 같다든지 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안내 방송에 지쳐 안전벨트를 풀었다.

기사에게 직접 가서 도착할 수는 있겠냐고 물어보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안내 방송의 멘트가 달라졌다.

-승객 여러분께 양해 말씀드립니다. 본 편은 도착 예정지까지의 운행이 불가하여 운행 경로를 수정합니다. 새로운 목적지까지 예상되는 소요 시간은 두 시간, 두 시간 반, 세, 네 시간, 다, 여, 일곱, 한, 일곱, 다섯 시간…….

11.

라더는 자꾸만 들려오는 안내 방송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갑갑함은 가실 줄을 모르는 데다가, 아무 의미도 없는 안내 방송까지 이어지니 짜증이 나는 게 당연했다. 라더는 하는 수 없이 귀라도 막을 생각으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잘 넣어둔 이어폰을 찾는 것이었다.

“아니, 이건 또 왜 없어?”

라더는 황당함에 중얼거리고는 가방을 아주 뒤집어 놓을 기세로 다시 이어폰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적거려도 없어진 이어폰은 나오지를 않았다.

라더는 왠지 이어폰도 다른 곳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한 건 가방을 메고 버스에 탈 때는 이어폰이 분명히 있었을 거라는 점이었다. 꺼내둔 물통이야 그렇다 치고, 이어폰은 어떤 제정신 아닌 녀석이 가져갔나 하는 생각에 라더는 황당한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아까 전의 그 자리에 이어폰이 보였다. 아까 봤을 때도 비어 있던 자리에 이어폰이 저 혼자 떨어져 있는 걸 보니 이제는 조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라더는 조심히 자리로 다가가서 이어폰을 집어 들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누가 있었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이어폰에서 다른 사람의 손을 탄 느낌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라더는 괜히 고개를 털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미친 일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뭐 당장 항의하거나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라더는 되찾아 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라도 잘 자야지 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음악을 틀기 전 얼핏 들리는 방송에서는 도착 예정 시각이 뒤로 밀린다는 이야기인 듯했다. 라더는 잠들기에 좋을 것 같은 음악보다는 다른 소리를 묻히게 만들 만한 음악을 골라 틀고는 자세를 고쳐 앉아 잠을 청했다.

12.

천장이 쾅쾅 울리는 바람에 가장 불편했던 건 공룡이었다. 공룡은 이제 어떻게든 끼어버린 몸을 빼고 싶었다. 천장과 받침대 사이에 낀 몸은 천장이 울릴 때마다 여러 개의 손으로 두들겨 맞는 것처럼 아팠다.

“아니 왜 안 빠져?”

결국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한 공룡은 어디에 걸린 것처럼 도저히 빠지지 않는 오른쪽 다리를 고개만 어렵게 돌려서 돌아봤다. 하지만 껌껌한 좁은 틈새에서 다리가 뭐에 걸린 건지 알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납작 엎드려 있느라 불편하게 돌아간 다리는 앞뒤로 조금 움직일 뿐 옆으로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대체 뭐가 걸린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다리를 쿵쿵 차듯이 움직여 봤지만 버스 천장을 울리는 진동만 점점 강해질 뿐 몸이 빠질 것 같지는 않았다.

공룡이 반쯤 포기하고 움직임을 멈춘 채 한숨을 내쉬었을 때, 갑작스럽게 천장의 진동이 뚝 끊어졌다. 공룡은 의아해하면서도 한시름 놓고는 몸에 힘을 빼고 늘어졌다.

하지만 곧 불안감이 엄습한 공룡은 급히 몸을 빼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아예 내리고 싶었다.

13.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점점 기운이 없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몸에 힘이 빠지니 정신이 말짱하지도 않았는데, 불안감 때문에 푹 쉬거나 아예 잠이 들 수도 없는 상태였다.

잠뜰은 눈을 감은 채로 계속 주변의 소리나 상황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일단 눈을 떠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차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이런 식으로 가서 대체 언제쯤 내릴 수 있는 건가 싶었지만, 물어보거나 확인하기에는 몸에 기운이 없었다.

잠뜰은 혼잣말도 나오지 않아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들리는 안내 방송은 노이즈가 심해서 뭐라고 말하는 건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잡음이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거슬렸다. 잠뜰은 남아 있는 힘을 짜내서 겨우겨우 눈을 떴다.

어렵게 주위를 둘러보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잠뜰은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지만, 눈꺼풀은 여전히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히끅.”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창문 바깥은 새카만 암흑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가득했어야 할 자동차가 한 대도 없는 것처럼, 전조등이나 브레이크등의 빛 같은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새카만 공허를 마주한 잠뜰은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으로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14.

여전히 차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이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믿었던 본사는 연결이 되지 않았고, 도움도 안 되는 수화기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덕개는 이제 뒤를 볼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지금 덕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심각한 문제 상황에 빠졌다는 것뿐이었다. 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가 없겠다 싶은 상황에 앞이 깜깜했다.

“그래, 밤인데 깜깜해야지.”

덕개는 긴장을 풀어보려는 생각으로 혼자 농담을 중얼거렸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누가 코웃음을 치든, 욕을 하든 했으면 좀 나았을 텐데. 덕개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뭔지는 몰라도 다른 존재를 태워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 때문인지 문제가 너무 많았다. 일단 할 수 있는 건, 운행 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운행을 정지했다고 할 수도 없는 이 상태를 유지하며 사고를 내지 않는 것뿐이었다.

“아니지, 사고는 이미 났지.”

덕개는 몰려오는 허탈함에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이게 해결이 되기는 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운행을 종료하지 말라는 말이라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끝나기만 한다면 뭐든 좋았다.

“하, 퇴근하면 진짜 사직서 써야지.”

덕개는 중얼거린 뒤에 고개를 들었다. 뒤에 앉은 승객은 여전히 이상했다. 이쪽에 있어서는 안 되는 승객이니 상태가 이상한 건 당연한가 싶기도 했다. 덕개는 한숨을 쉬고 다시 앞을 보았다. 정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앞 차를 따라서 조금씩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15.

각별은 내리고 싶은 충동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차는 가는 건지 마는 건지 싶었고, 냄새는 익숙해지지 않았고, 이상한 무언가는 여기에 있었다.

“에휴.”

각별은 창문을 최대한 활짝 열었다. 손잡이에 걸려 더는 열리지 않는 정도로 열린 다음에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내가 내리자.”

각별은 창문 틈으로 몸을 빼냈다. 어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밖에서는 익숙한 공기가 느껴졌고, 그것의 기척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버스를 너무 잘 만들었네.”

각별은 마지막으로 버스 안쪽을 돌아보았다. 그 승객은 힘이 다 빠진 듯 축 늘어져 있었다. 기분 나쁜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지는 듯했다. 각별은 몸을 완전히 빼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게, 버스를 좀 잘 보고 탈 것이지.”

16.

수현은 정신 나간 안내 방송에 이어서 누군가가 창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나, 하는 생각이었다.

기계는 고장이 나기 마련이고, 버스는 언젠가 멈추는 게 당연했다. 수현은 몇 자리 앞에 복도 쪽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손을 밖으로 늘어뜨린 승객을 지켜봤다. 깊이 잠이 들었는지, 의식을 잃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내린다고 뭐 별수 있나.”

중얼거린 수현은 뒷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보다 뒤에 앉아있던 건 방금 탈출한 구역질하던 재수 없는 놈뿐이었다.

다시 앞을 보니, 못 보던 승객 하나가 나와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리려는 건지 창문을 열고는 몸을 밖으로 빼는 중이었다. 늘어진 손은 아까부터 움찔거리고 있었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여기에 타서 나쁜 꿈을 안 꾸는 것도 묘하지. 쯧.”

수현은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댔다. 이 버스를 타는 게 처음도 아니었고, 이 정도쯤이야 늘 있는 일이었다. 좀 기다리면 곧 어디가 됐든 간에 도착하게 될 것이었다.

“잠이나 자자, 잠이나 자.”

수현은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안내 방송은 아까부터 계속 바뀌는 시간을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은지 숫자를 세고 있었다. 그 소리에 맞춰 수현은 다른 숫자를 세었다. 잠이 오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시간 때우기엔 딱 좋을 것 같았다.

17.

라더는 아까 마신 물 때문인지 슬슬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남의 물을 가져가서 뭘 탄 건가 싶었는데, 그렇다기에는 비어 있는 자리에서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싶기도 했다.

“아, 진짜 되는 일 없네.”

결국 라더는 한껏 늘어뜨렸던 몸을 일으켰다. 주머니에 있을 휴대전화를 꺼내 근처에 대해 검색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뭐야.”

그리고 이번에도 물건은 없었다. 라더는 이제 놀라지도 않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전에 들어 본 적 있었다.

할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이니 삼천 년쯤 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라더는 빈자리에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는 곧장 제 자리로 돌아왔다.

“아니 보이지도 않는 거, 그짓말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가면 할매한테 미안하다 해야지.”

라더는 휴대전화 화면을 켜면서 중얼거리고는 곧장 검색창을 열었다. 지도를 보니 내리면 그래도 방법이 있을 듯했다.

“아니, 창문은 왜 또 이렇게 작아, 짜증 나게.”

라더는 혀를 차고는 천장에 달린 창문을 쳐서 박살을 내 버렸다. 라더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사와 그 승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이쪽에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라더는 구멍만 남은 천창을 통해서 탈출을 감행했다. 구겨 놓았던 날개를 펴니 살 것 같았다.

“아, 이것 때문에 갑갑했나?”

문득 깨달음을 얻은 라더는 괜히 탓을 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버스를 돌아보았다.

18.

공룡은 정말 영원 같았던 시간을 버텨내고 결국은 탈출을 해내고 말았다. 나오고 보니 다리가 있던 자리에 아까부터 못 버틴다는 듯이 난리를 치던 승객이 가방을 끼워 놓은 모양이었다.

“아니, 씨, 왜 이걸 탔대. 어우,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공룡은 투덜거리며 가방을 노려보고는 눈을 반쯤 뜬 채로 자는지 기절했는지 몸을 늘어뜨린 승객도 노려보았다.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연거푸 중얼거린 공룡은 운행 기사가 이쪽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에 안심한 듯이 휴, 하는 탄식을 내뱉고는 얼른 빈 자리에서 창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서 축축하고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좁은 데 들어가는 건 좋은데 건조한 건 딱 질색이다, 이제.”

얼른 창문을 통해 몸을 뺀 공룡은 꼬리로 버스의 창틀을 탁탁 두드리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19.

잠뜰은 여전히 눈은 반쯤 뜬 채로, 몸은 늘어진 채로 버스 안에 있었다. 버스는 이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언젠가부터 목적지를 향해서 달리기 시작한 듯했다.

딸꾹질은 언제 멈췄는지 모르겠고, 잠은 미친 듯이 오는데, 그래도 버스가 움직인다는 확신이 들자 눈을 감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뜰은 일단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버스 안은 아까보다 조용해진 것 같았다.

20.

수현은 자리에 남아서 잠을 청하다가, 차가 달리는 느낌이 나서 눈을 떴다. 마침내 정체가 풀린 모양이었다.

“기운이 눌려서 그랬구나? 나도 내릴 걸 그랬나.”

수현은 괜히 기사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퇴근을 늦추는 데에 한몫했다고 생각하니 영 찜찜했다.

얼핏 앞을 보니 기사는 영 겁쟁이인 건지, 아니면 신참인 건지,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수현은 쓰고 있던 가면을 살짝 올리고 기사를 다시 살펴보았다. 원래 이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이쪽엔 관심도 없어 보였으니 괜찮겠거니 하는 심산이었다.

“어우, 어리네, 어려.”

수현은 얼른 가면을 내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을 감았다. 저 하나 남아 있는다고 도착 못 할 것도 아니고, 이제 정체도 풀렸으니 이대로 도착할 때까지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21.

덕개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하고 외친 뒤에 저 혼자 딴죽을 걸었다. 신은 무슨 얼어 죽을 신, 그거 일은 안 하고 맨날 놀기만 하던데. 옆 동네 산다는 엄마 친구의 사촌 조카가 그렇다고 했다는 것을 떠올리곤 중얼거린 덕개는 귀신같이 풀린 차도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벨이 울리기 시작해 수화기를 들자, 아까는 죽어도 연결이 안 될 것 같던 본사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아니, 왜 이제 연락을 해요!”

[뭘 또 그렇게 화를 내세요. 저희도 다 바쁘니까 그런 건데.]

“아니 매뉴얼에 전화하라고 썼으면! 전화를 하면 받으셔야죠!”

[네, 알겠고요, 무슨 일인데요?]

“버스에 다른 게 탔어요. 뭔 얘긴지 아시죠?”

마른침을 삼킨 덕개는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며 긴장했다. 태웠을 때 어떻게 하라는 내용은 정말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들은 적이 없었고, 일단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도 해본 적도 없었다.

[매뉴얼 숙지 안 하셨어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무슨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일로 호들갑을 떠냐는 듯이 핀잔을 주는 소리에, 덕개는 긴장은 확 풀리고 머쓱함만 남아 꿍얼거렸다.

“했죠. 했는데, 오늘 깜빡한 거죠.”

[네, 매뉴얼 미숙지로 인한 사고는 본사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알아서 잘 내려주시고 복귀하세요.]

“아니, 다른 승객도 있는데요?”

[설마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덕개는 하는 수 없이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것 말고도 남은 승객이 있었다.

“아니 진짜 있다니까요?”

[예? 아… 그분은 원래 그러는 분이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잘못 태운 승객만 알아서 내려주시고 복귀하시면 됩니다.]

“아니, 진짜 미치겠네, 다들 미친 거 아니에요?”

[끊습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건너편에서 수화기 내려놓는 덜컥 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덕개는 한숨을 푹 쉬고는 백미러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바로 뒤에 앉은 승객은 이쪽 세계의 공기를 버티지 못한 건지, 이제 축 늘어져서 눈까지 감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아무래도 유명 인사인 모양이었는데, 덕개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튼 별생각 없이 잠에 든 것 같은 모습을 확인한 덕개는 안내 방송용 녹음본 37번을 틀었다.

-본 편은 예정된 도착지까지의 운행이 불가하여 출발지로 돌아갑니다. 승객 여러분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맞다, 맞다.”

그리고는 녹음본 x-37번을 같이 틀었다. 뭐라고 하는지 덕개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마도 축 늘어진 저 승객은 알아들을 수 있을 터였다.

덕개는 방향을 바꿔 고속도로를 벗어나기 위해 깜빡이를 켜고는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반대 방향으로는 차가 별로 없기는 했지만, 저 길을 쓰는 게 아니었다. 고속버스로 옮기기 전에 받아서 이제는 습관이 다 된 규칙 중에 되돌아갈 때에 대한 규칙이 있었다.

“아니, 씨, 퇴근 언제 해?”

불만스럽게 투덜거린 덕개는 온 것보다 세 배는 더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놈의 길은 왜 가는 쪽과 오는 쪽이 똑같은 거리가 아니고 하나만 훨씬 빙빙 돌게 되어 있는 건지,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뭘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규칙은 지켜야 하니까 그렇게 써 놓는 거지, 그래, 하고 중얼거린 덕개는 다 내 탓이다, 하는 말을 몇 번씩 중얼거리면서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22.

잠뜰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버스 안이 아니었다. 잠뜰은 아직 터미널에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생생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뭐였지, 진짜?”

감각이 생생해진 것과는 별개로, 입 밖으로 목소리를 한 번 내고 나자, 잠뜰은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도 잊고 말았다.

“어? 나 표 샀나?”

잠뜰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터미널 안으로 되돌아 들어가는 모습을 본 덕개는 한숨을 내쉬고 버스 시동을 다시 걸었다.

“기사 양반, 그러니까 표 확인을 잘했어야지.”

맨 뒤쯤에 앉아있던 승객이 앞으로 와서 아는 체를 했다. 당연히 대답할 수 없는 덕개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모른 척 운전에 집중했다.

“저 인간 아가씨는 무슨 죄야. 악몽이나 잔뜩 꿨겠네.”

승객은 혀를 쯧쯧 차더니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서는 다시 잠을 청했다.

“에이, 씨, 팔자 좋네.”

투덜거린 덕개는 길을 재촉했다. 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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