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신] / 익명

1.

"부장! 대박 사건이야. 우리 동아리 만들 수 있다? 얘가 우리 동아리 들어오고 싶대."

"얘가 아니라 박잠뜰."

"어 알았다고. 얼마 전에 전학 온 잠뜰 있잖아, 알지? 우리 동아리에 꼭 들어오고 싶대. 유튜브에 올라간 축제 영상을 감명 깊게 봤다나 뭐라나. 얘 들어오면 딱 여섯이야! 작년 선배들이 우리 때 망할 것 같았다고 잔뜩 놀려댔는데 결국 안 망하네. 뭐, 내가 있으니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만."

동아리 신청 마감 한 시간 전에 부원이 들어왔다. 삼 주 동안 쌩쇼해도 안 모이던 부원 하나가.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드디어 신이 내 노력을 알아주는구나! 공룡을 끌어안고 팔짝 뛸 뻔하다가 정신줄을 잡았다. 부장의 권위, 부장의 권위.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잠뜰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박잠뜰이라고? 나는 황수현이라고 해. 이 동아리의 부장이야."

"어. 잘 부탁해, 수현아."

"응, 나도 잘 부탁해. 이건 형식상으로 묻는 거고 합격 여부랑은 관계없으니까 편하게 대답해줘. 이 동아리에 지원한 이유가 뭐야?"

*

우리 학교에는 연극부가 있다. 이름은 모과. 부실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모과나무에서 이름을 따왔단다. 십 년은 된 꽤 유서 깊은 동아리다. 아마 현재 학교에 남아있는 동아리 중에 제일 오래됐을 테다. 우리 대에 그 역사가 끊길 뻔했지만.

딱히 우리 잘못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내 잘못은 아니었고 쟤네 잘못은 맞았다. 동아리 홍보 포스터 만든다고 호언장담해놓고 롤토체스나 열 시간 돌리고 다음 날 종일 뻗어있었던 미친놈들이 있어서 말이다.

그래도 그 다음다음 날에 만들어서 붙여놨고, 이틀 차이로 결과가 그리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뭐, 워낙 예체능 동아리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없는 학교 특성상 항상 새로 지원하는 부원들은 적었으니까. 그게 우리 때에 극단적으로 나타난 거지.

동아리를 개설하는 데엔 부장과 부장을 제외한 다섯 명이 필요했다. 새로 지원한 부원은 한 명이었다. 각별이 아는 후배라며 데리고 온 박덕개. 걔밖에 없었다. 야, 너네는 아는 1학년 없냐? 빨리 좀 말하지. 걔네 이미 다 동아리 지원했을걸. 이럴 거면 왜 동아리 신청 기한을 길게 둔 거야? 다 초반에 신청해버리면서! 그냥 하루 두고 끝내지. 수현아. 그랬으면 우리 포스터도 못 붙이고 망했을 거야. 라더야 우리 이미 망했어.

어떻게든 어그로를 끌어보려고 별짓을 다 했다. 쉬는 시간에 연극부 모과 이름 달고 복도에서 사랑과 전쟁 찍고 그랬다. 이렇게 열심히 홍보하는데 왜 입부 신청이 안 들어오는 거지? 우리 동아리에서는 사랑과 전쟁도 찍을 수 있는데. 그러니까 안 들어오는 거겠죠……. 덕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쌩쇼해도 안 들어오던 부원 하나가 제 발로 들어왔다. 얼마 전에 전학 와서 고2 3월 모의고사 전교 일 등 한 박잠뜰이랬다. 공룡이 꼬셔보자고 했을 때 걔는 당연히 공부 관련 동아리 들어갈 거라고 맞받아쳤는데 예상이 대차게 빗나갔다. 걔가 입부 신청하자마자 면접도 없이 부장 황수현 부원 김일영 서한솔 박잠뜰 정공룡 박덕개 적고 동아리 계획서 15분 만에 휘갈겨서 제출했다. 그러니까 잠뜰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동아리의 구원자였다. 모과를 유지해준 사람.

2.

연극부 부실에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시끄럽던 주위가 단번에 조용해졌다. 들어오세요! 갈색 머리에 분홍 후드집업을 걸친 여자애가 부실 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수현아, 시나리오 필요하다지 않았어?"

"또니! 엉. 당연하지!"

"그럼 이거 받아. 시나리오 연습용으로 쓴 건데 꽤 괜찮게 나와서. 아, 혹시 맘에 안 들면 버려도 돼. 어차피 연습용이니까."

"정말? 완전 고마워! 설마 또니 글인데 마음에 안 들 리가 있겠어? 작년에도 그렇고 또니도 연극부 부원으로 쳐줘야 할까 봐."

"잘 연습해서 축제 때 멋지게 보여주기나 하셔. 아, 이번엔 꼭 대상도 타고."

말이 끝나자마자 또니는 문을 닫고 나갔다. 부원들이 또니가 주고 간 시나리오 주위로 몰렸다. 제목은 <물결의 인연>. 현대 판타지 장르였다.

모과는 매년 창작 시나리오로도 청소년 연극제에 나가는 전통이 있다. 대상은 아니라도 매번 소소한 상을 타오고, 그렇게 연습했던 극을 다시 축제 때 공연하는 식. 하지만 이번에는 기존 부원들의 반대가 컸다. 그냥 축제 무대만 올려. 작년에도 열 명이 한다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이젠 고작 여섯 명으로 뭘 해. 잠뜰은 반박했다. 그래도 한번 해보면 안 돼? 여섯이라고 연극제에 아예 못 나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 못한다고 단정 짓지 말자. 연습해보고 그래도 안 될 것 같으면 신청 취소하면 되지. 왜, 취소 기한 넉넉하다며? 내 의견도 잠뜰과 가까웠기에 작게 힘을 실었다. 맞아, 작년 부장 형이 목표 의식을 가져야 한댔잖아. 뭐라도 목표를 잡아두자. 연극제라는 거, 좋은 목표잖아.

그리고 또니가 시나리오를 건네줌으로써 연극제에 나가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또니의 시나리오는 사람을 연기하고 싶게 만드니까. 매력적인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캐릭터가 일품이었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각자의 성격과 연기 스타일에 어울릴 법한 캐릭터를 쥐여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심지어 잠뜰과 덕개는 얼마 보지도 않았으면서. 이것도 천부적인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덕분에 배역은 간단한 상의만으로도 금방 정해졌다.

시나리오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이번 또니의 작품, <물결의 인연>은 인어와 한 사내가 인어의 소중한 목걸이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사내는 인어와 똑 닮은 여동생의 죽음에 얽힌 진실에 한 발짝씩 다가가게 되며, 마침내 여동생이 죽지 않았음을 깨닫고 만다. 동시에 인어는 잃어버렸던 목걸이와 함께 사라졌던 기억을 되찾는다. 이후 둘은 힘을 합쳐 괴짜 연금술사를 물리치며, 인어는 해독약을 마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에서 연극은 막을 내린다. 인어와 사내의 케미는 물론이고 그 외에 조력자들의 캐릭터성 또한 톡톡 튀어서 지루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었다. 시나리오를 읽는 내내 공룡이 인어 역을 하고 싶다며 중얼댔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뜰은 만장일치로 인어 역을 얻고 공룡에게 티배깅을 했다.

가벼운 대사 리딩을 진행하다 보니 금세 석식 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다. 얘들아 이제 해산하자. 밥 맛있게 먹고. 집 갈 사람은 조심히 가고. 시끄러웠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부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부실 한 가운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노트를 폈다. 초반에는 새 부원 둘이 경직되어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둘 다 적극적이고 발성도 좋았다. 뭐, 원래 부원이었던 애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걔네는 역시 꾸준히 잘했다. 부장으로서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라더는 자기감정을 끌어내서 극대화하는 데에 강하다. 그래서 자기가 실제로 느낄 법한 감정선을 가진 배역을 얻으면 애드리브를 던져도 능숙하게 받아친다. 덕개는, 그 반대다. 자기 성격이랑 정반대라서 소화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배역도 너끈히 해낸다. 올라운더라고 해야 할까. 뭐, 아직 몇 번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각별은 대사 하나, 행동 하나를 전부 계산 하에 두는 식이다. 그만큼 암기력이 대단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관객에게 정확히 전달한다. 공룡은 같은 배역이라도 더 맛깔나게 자신인 것처럼 행동한다. 가끔 엑스트라를 시키면 놀라울 정도로 매력 있게 연기한달까. 감초 같은 역에 딱이다.

그리고 잠뜰은, 그냥 그 배역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대본을 손에 쥐자마자, 정말 말 그대로 손에 쥐자마자 그 인물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걸 누가 할 수 있겠나? 말도 안 되는 재능이다.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순간적으로 인물에 몰입해버리고 자연스레 공간을 장악하는 능력. 다른 애들도 딱히 학생 연기 특유의 쿠세가 보이진 않지만, 걔는 정말 프로 배우 같다. 보자마자 꼭 무대로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입시 학원 선생님이 그랬다. 내가 보기엔 넌 배우보다 연출 쪽으로 가는 게 더 잘 될 것 같아. 네 눈은 남이 잘하는 배역을 찾고, 연기에서 고쳐야 할 점을 꼽는 데에 특화되어있는데 왜 직접 배우를 하려고 하니? 연기에 고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난 이해가 안 돼. 나도 그랬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갔다. 그렇지만, 연극이 너무 좋은데 어떡해. 나는 살아 숨 쉬는 이야기의 순간순간을 너무 사랑해서 그 순간에 내가 포함되고 싶거든.

언젠가 내 삶의 목적에 관하여 헤매었을 때가 있었다. 사람이라면 한 번쯤 지나가는 시기. 그때, 나는 연극을 봤다. 처음은 우연이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이 나와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었다. 그들은, 강렬히 살아있었다. 나도 그와 같이 되고 싶었다. 나도 저렇게 살 수만 있다면……. 처음은 우연이었지만 다음부터는 우연일 수가 없었다. 모두의 노력이 한 군데에 모여서 관객에게 전해지는 게 좋았다. 부정할 수 없는 현재를 사는 그들이 빛났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작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가끔씩 천재들을 보면 내 진로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포기해도 어차피 언젠간 돌아오게 될 것임을 알기에. 음, 잠뜰이한테도 연극영화과 갈 생각 없냐고 물어볼까. 모과 애들은 연극을 진로로 생각하는 애가 없단 말이야. 하긴, 공부 잘하는 애는 공부 쪽으로 가겠지. 게다가 걘 이과고.

노트를 덮었다. 가방을 메고 부실을 나섰다. 창문 너머로 모과나무가 보였다.

3.

연습은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딱 걱정했던 것보다 한 발 나은 정도에 그쳤다.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기대한 만큼의 발전이 나오지 않았다. 전문적인 연기를 배우지 않은 데서 오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직관에 의존한 연기는 기술적인 측면에선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으니. 입시를 한다고 해도 아마추어인 내가 가르쳐주는 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부족한 부분을 알아채는 것과 고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에는 꽤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잠뜰에게 도움을 받았다. 걔가 당연하다는 듯이 던진 답변들이 전부 백 점짜리 정답이었다. 연기를 배웠나? 아역 배우라도 했었을까? 우리 연기에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은데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봐선 아마 아직도 덜 친하다고 느끼나 보다,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부족한 시간은 여름방학 동안 채웠다. 에어컨 없고 창문은 하나뿐인 부실에 더운 입자들이 가득해서 차라리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고 운동장 그늘진 데에서 연습하고 그랬다. 연극제를 위해선 연출과 음악, 소품도 직접 짜야 했기에 각자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하다가도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연락했다. 각자의 친구들이 조금씩 손을 빌려준다고 하더라도 역시 시간이 부족했다. 가을이, 연극제가 곧이었다.

부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뜨거운 공기가 날 반겼다. 찜질방 안인가 의심해봐야 할 정도였다. 세 명 겨우 앉을 만한 작은 소파에 끼어있는 다섯이 보였다. 아무래도 연습하긴 글러 먹은 것 같았다. 얘들아, 오늘 날씨 너무 덥다. 연습 말고 시원한 교실에서 소품 주문이나 넣을까? 어! 사람의 형태를 벗어난 액체들이 고개를 강력히 끄덕였다.

"아, 이제 좀 살만하다."

"우리 부실은 큰 거 빼고 장점이 없다니까."

외부 체험학습 나간 동아리 부실 하나에 몰래 들어가 에어컨 온도를 18도로 내렸다. 다 같이 책상을 모아 가운데에 붙이고 둘러앉았다. 저번에 의상은 다 주문 넣었고, 이제 작은 소품들 남았어. 인어 목걸이 아직 안 샀으면 학교 동아리 예산으로 다이아 목걸이 주문 넣자! 오, 그럴까? 동아리명 따서 옐로 다이아몬드로 하는 건? 그것도 좋다. 별 쓸데없는 소리로 동아리 시간을 날려 먹었다.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지금까지 정한 거 주문 넣을게. 내일 보자. 문을 열고 나가려던 잠뜰을 조심스레 불렀다. 잠뜰아. 시간 돼? 어. 시간 괜찮아. 그럼 잠깐만 동아리실로 따라와 줄래? 그냥 여기서 말해 동아리실 가면 더워서 쪄 죽어. 엉 그래 알았어…….

"잠뜰아. 너 입시 했었지."

"응? 뭔 소리야. 설마 연영과 입시? 아니, 해본 적 없어."

"진짜? 학원도 안 다녀봤어?"

"어. 연극은 그냥 취미로만."

"말도 안 돼. 너 연기하는 거 보면 완전 프로 같은데. 잠뜰아, 나랑 같이 연극 해볼 생각 없어?"

"뭔 소리야. 또 입에 발린 말 한다. 너 다른 애들한테도 이런 말 하고 다니지?"

"그럴 리가. 뭐, 아예 이런 말 안 해본 건 아니지. 그렇다고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이 아니란 것도 아냐. 너도 느끼지 않아? 네가 연기를 시작하면 네 존재감이 자연스레 주위를 장악해. 큰 목소리나 과장된 동작 없이도. 처음에 네가 하는 연기를 봤을 때는 그냥, 배역을 이해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구나. 한 번에 배역을 잡아먹는 듯이 연기를 할 수도 있구나. 이 정도였어. 근데 계속 보면 볼수록 그건 빙산의 일각처럼 느껴져."

잠뜰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내가 배우고 연습해서 터득해온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이미 알고 있는 애.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애. 무대에 꼭 섰으면 좋겠는 애.

"나, 네 연기가 무척 마음에 들어. 네가 연극을 하는 걸 보고 싶어. 고등학교 때 이후로도."

침을 삼켰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잠뜰이 눈을 굴렸다.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근데 뭐, 이과 온 것도 딱히 목표가 있어서 온 건 아니니까. 고민해볼게."

"진짜?"

"응. 네가 그렇게 원하면."

그럼 가도 되지? 어! 조심히 가! 잠뜰이 나가면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맞다. 수현아, 미안하다. 고개를 돌아보니 잠뜰은 이미 시야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걔가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애였나? 뭐 각별이나 공룡이었으면 모를까 잠뜰은 아닐 것 같은데. 설마 걔네한테 옮았나? ……그럴지도. 다음 날에 의미를 물으니 기억이 안 난다는 답이 돌아왔다. 표정을 보니 거짓 같진 않았다. 그 후로도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기에 피곤해서 잘못 들었나보다, 했다.

4.

잠뜰이 자퇴했다. 건너 옆 반 이신이한테 들었다. 잘못된 소문일 거였다. 어제그저께만 해도 아파서 학교 못 나간다고 미안하다고 연락했었으니까. 그냥, 학교 빠진 적 한 번도 없던 애가 삼 일 동안 아파서 학교에 안 오니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진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상식적으로 학교 잘만 다니던 애가 왜 갑자기 자퇴를 해? 아니, 한다고 해도 여름방학 지나고 자퇴하는 애가 어디 있어. 수능 보려고 자퇴하는 애들은 다 1학기 기말고사 전에 하지. 말도 안 되잖아.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다 보니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야 교무실로 가게 됐다.

"선생님. 혹시 바쁘세요?"

"아니? 뭐 말할 거 있어?"

"선생님, 잠뜰이…… 자퇴했어요?"

"응? 잠뜰이 자퇴했지. 그러고 보니까 잠뜰이 안 나오는 게 오늘부터였네. 걔 자퇴하는 거 몰랐어? 나는 너네 다 친해서 알고 있는 줄 알았네. 잠뜰이 해외로 유학 간다고 하더라. 캐나다였나?"

"아, 네. 그랬구나. ……감사합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모과 애들도 알고 있으려나? 하긴, 소문은 잔뜩 퍼졌으니까. 휴대폰을 켰다. 어. 라더야. 근처에 모과 애들 있으면 동아리 부실로 모여달라고 전해줘. 어. 고맙다. 머리가 복잡했다. 규정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중간에 인원이 줄은 동아리도 폐부시키려 들진 않을 거야. 이미 만들어진 동아리를 지우기는 귀찮으니까. 다섯이라도 어떻게,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가을 연극제는 무리더라도 겨울에 하는 축제는 어떻게든 해보면 돼. 부실로 향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동아리 담당 선생님이었다.

 

"수현아."

"네. 무슨 일이세요?"

"네 동아리 인원 한 명 더 뽑아와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지금 학생들 다 동아리 하나씩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그게 교장 선생님 방침이란다. 학교 자금도, 동아리 부실로 활용할 장소도 부족해서 인원수 모자라는 동아리들 다 해산시키고 있어. 하. 내가 너희만 봐줄 순 없으니까, 어떻게든 모아왔으면 좋겠다."

이해가 안 됐다. 어떻게 여섯 명 모아서 겨우 동아리를 만들었는데 해산시키겠다고? 예산 부족이란 명분으로? 다리는 부실을 향해 계속 움직였다. 십 년은 된, 가끔 상도 타오는 실적 좋은 동아리를 대체 왜. 문을 열었다.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잠뜰이만 빼고.

"소문 다들 들었지? 잠뜰이, 자퇴했대."

"그러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어쩌냐."

"걔 없으면 안 되는 극이잖아, 우리가 하는 거. 인어가 주인공이니까."

"뭐, 어쩔 수 없지. 자퇴한 애 다시 불러올 수도 없고. 연극제는 포기하고 축제나 준비하던가."

"축제도 못 할지도. 선생님이 그러셨어. 모과 이제 부장 빼고 넷이니까 없어질 수도 있다고. 아니, 부원 새로 데려오지 않으면 해산시키겠대. 동아리 예산이 부족해서 교장 의견이 그렇다네."

"그냥 없애겠다는 이야기잖아."

"이번 해 버틴 것도 기적이긴 했어."

"뭐, 다른 동아리도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회로 다루는 동아리나 들어가 볼까."

"헐, 저도 토론 동아리 들어가 보고 싶었어요!"

"거기 토론은 커녕 게임만 한다는데."

"야, 나랑 천체 관측 동아리나 들어가자."

"받아주기나 한대요? 거기 부장 선배 까다로워서 면접 때 별 이상한 걸 다 물어본다는데."

순식간에 부실 안이 화기애애해졌다. 동아리가 없어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 분위기를 좋아했었다. 어떻게든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애들 사이에서 있으면 걱정이 지워지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 이곳의 존속이 중요한걸?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에 관해 토의해주면 안 될까. 나는 이 동아리를 너무나 좋아하고, 너네와 함께 연습하는 순간이 좋고, 무대에 서서 보는 너희를 못 잊겠는걸. 그리고, 나는 꿈이 이거잖니? 너희와 다르게……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해결책 없는 하소연은 의미가 없었다.

그래. 오늘부터 연습 안 남아도 돼. 혹시 연극부 오고 싶어 보이는 사람 있으면 얘기 좀 하고 다니고. 이만 해산.

공룡의 등을 툭 쳤다. 야, 물어볼 게 있어. 너 저번에 잠뜰이네 놀러 가봤댔지?

*

공룡이에게 잠뜰의 주소를 얻었다. 우리 집이랑 그다지 멀지도 않았다. 주택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마당이 큰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대문이 알아서 열렸다. 마치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 실례합니다. 나는 천천히 대문을 통과해 들어섰다. 잔디 위에 깔린 돌 징검다리를 밟으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왔어?"

잠뜰은 기다렸다는 듯이 앉아있었다. 아니, 저게 잠뜰인가? 지금까지 본 잠뜰은, 전부 거짓이었던가? 눈을 비볐다. 여러 번 감았다가 떴다. 내 눈으로 담고 있는 잠뜰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연극이었다.

5.

 

생각해보면 잠뜰은 항상 그랬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맞아. 걔는 언제나 살아있는 연극이었어. 걔가 그걸 의식적으로 숨기고 있어서 눈치를 못 챘던 거지. 감히 알 수가 없었어, 작정하고 연기하는 걔를. 잠뜰은 입을 열었다.

"수현아. 너한테는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어."

"잠뜰아."

"너라면 이미 한참 전에 다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은근히 모르더라? 나는 신이야. 연기의 신."

연기의 신.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거짓말하지 마, 라고 부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쩐지 설득력 있게 느껴져서.

"너네 연기는 정말 재밌었어. 특히 너. 노력 많이 했더라? 덕분에 내 실력도 는 것 같아. 왜, 난 인간들이 연기에 대해 연구하는 만큼 성장하거든. 뭐, 네가 하는 건 연기라고 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좋았어. 너의 연극."

연극의 신이 있다면 잠뜰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연극'이 아니라 '연기'인 점이 아쉽지만. 연극의 신에게 받는 칭찬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의외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사람에게 칭찬받으면서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는데. 내 연기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내 연극에 대한 신념이 담긴, '연기' 보다도 '연극'에 가까운……, 관객의 눈을 잘 끌 수 있게,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든 기술의 집합체였다. 한 번도 그걸 알아챈 사람이 없었는데. 하긴, 신이니까 당연한가, 생각하면서도.

"나는 칭찬만으로 만족하지 못해. 나는 우리 동아리가 좋아. 물론 네가 연기하는 모습도. 다시 우리 동아리에서 연극을 해주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알았다. 그럼에도 말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좀 더 욕심을 부려보고 싶었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좀 더 내 말을 들어줘. 네가 그랬잖아. 내 작년 축제 영상을 봤다고. 내가 배역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 좋아서 들어오고 싶었다고. 실제로 즐거웠지 않아? 근데 우리 동아리, 이제 없어진대. 네가 사라지고 이젠 다섯이 되어버려서. 말이 돼? 나는 이 동아리가 없어지면 안 되는데. 운명인 줄 알았어, 이 동아리 이름이 '모과'인 걸 알고 나서. 왜, 내가 처음 봤던 연극 이름이 '모과'였거든. 지금은 안 하는 극이지만."

"하나 말해주자면 그건 운명이 맞아."

"그래? ……그랬구나. 아무튼, 네가 있던 그 동아리가 좋았어. 네 연기를 포함해서. 그래서, 나는 네가 다시 돌아와 줬으면 해."

눈물을 닦았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잠뜰은 눈을 피했다. 명백한 거절의 표시.

"그래. 고마워. 힘을 잔뜩 뺐어도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면 이상한 거겠지. 하지만 슬슬 가야 해. 가브리엘이 혼낸다고."

"……안 되면, 소원 두 개만 들어줘."

"네가 뭘 부탁할 줄 알고. 음, 정이 있으니까 들어본 다음에 결정할게."

정 많은 신이었다. 이 정에 도움받았던 게 얼마나 많았는지. 내가 부탁할 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심호흡을 했다. 내가 아는 잠뜰이라면, 이 부탁을 거절할 리는 없었다.

"우선 하나는, 동아리 규정을 바꿔서 다섯이어도 동아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줘."

"그 정도야 네가 학교에 부탁해서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서류 조작 까다롭다고. 둘째는?"

"둘째는, 네가 진심으로 하는 연극을 보고 싶어."

6.

잠뜰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옷을 탁탁 털고 정원 한가운데에 섰다. 눈빛이 달라졌다. 아, 이 눈빛이다.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이 즉흥적인 몰입.

"뭐라고 불러야 해? 음, 아저씨?"

"아저씨 빼면 아무거나 다 괜찮아."

"그럼 할아버지! 꺄하하!"

"하. 내가 이런 애랑 뭘 하겠다고. 목걸이를 찾을 의지는 있는 거야?"

"응. 당연하지. 그건 내 소중한 사람이 준 물건이거든. 꼭 찾아야 해. 지금 바로 가자!"

"기다려! 인간 다리도 없으면서 어딜 가자는 거야."

<물결의 인연>이었다. 잠뜰은 일인극을 하고 있었다. 마치 지킬 앤 하이드 마냥, 톤과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아니, 인간의 눈으로는 감히 저 두 배역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인어가 인간 다리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공짜로는 좀 그런데."

"뭐든지 할게요! ……저 말고 이 남자가요."

"그래? 그러면, 청년. 힘 좀 쓰나?"

분명 소품이 없는데도 보였다. 음향 효과가 없는데도 들렸다. 환각인가 싶었지만 금세 분석하길 그만뒀다. 즐기고 싶었다. 연극을 하기로 마음먹은 후에는 한 번도 연극을 볼 때 분석하지 않으면서 본 적이 없었다. 좋은 연기가 좋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아내야 하니까. 그 이유를 내가 하는 연기에 적용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감히 배울 수 없으니. 상념을 잊고 감각에 집중했다. 그저 즐기자.

"야, 괜찮아? 기억이 좀 나?"

"으, 으윽. 응. 어지럽긴 하지만. 네 추리는 정확했어. 아니, 이제 너 말고 오빠라고 불러야 할까?"

"호칭은 맘대로 해. 저 숲속에서 연금술사를 찾아서 네 저주를 풀면 되는 거지?"

"어. 따라와. 이젠 어딘지 똑똑히 기억하니까."

잠뜰의 대사와 행동을 따라 만족할 만한 극을 만난 것에 대한 즐거움을 한껏 느꼈다. 즐기기 시작하자 시간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정신 차려보니 커튼콜. 사려 깊은 신은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섰다. 오랜 팬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잠뜰은 천천히, 관객에게 제대로 눈을 맞추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멍하니 쳐다보다 뒤늦게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이제 끝이야. 수현아, 어때. 좀 맘에 드니?"

"……어. 이걸 보고 맘에 안 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걸."

7.

연극제는 포기했다. 눈이 하도 높아져서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무대를 완성해내는 게 불가능했다. 그것도 그렇고, 인어 역을 잠뜰 대신해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누가 신이 했던 연기를 감히 대체할 수 있어? 물론 나 말고는 아무도 걔의 진짜 정체에 대해 모르지만.

연극제는 물 건너간 일이어도 축제는 준비하기로 했다. 또니는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이번 글이 저번보다 훨씬 잘 나올 것 같다는데, 우리의 연기는 잠뜰이 있던 때를 따라갈 수 있을지 고민이다.

지금은 새로 들어올 공기청정기와 에어컨을 맞으러 대청소를 하는 중이다. 아무래도 정 많은 신이 서류를 조작하는 김에 선물을 두고 간 듯싶다. 신은 떠나도 연극은 계속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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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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