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안이 짝사랑하는 이야기

※ 남주인 / 주인이 결혼했습니다.

햇빛이란 참으로 신비하다. 투명하면서 어떻게 이리도 다채로운 색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닿는 순간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햇살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베리안은 창가에 앉아있는 주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 베리안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반듯하게 다린 셔츠와 바지, 목덜미를 살짝 덮은 차분한 머리카락. 옅은 달빛과 촛불만이 비치는 어두운 방 안에서 만난 주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만약 내민 손을 잡아온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주인의 반지가 아니었단 것을 그때의 자신이 알았다면 이 마음도 다른 길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순간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후회하기엔 너무 긴 나날들을 보내와버렸다.

이슬 맺힌 나뭇잎을 비추는 햇살이 화사하게 세상을 밝히는 아침 눈을 뜨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나면 어느덧 정오가 지나고 한 풀 꺾인 햇빛이 은은하고 따스한 색을 머금는다. 햇살에 색은 없다고 하지만 그 시간마다 색을 띠는 것 같다. 아침은 투명, 낮은 캐모마일티, 오후는 레몬 한 조각을 띄운 홍차. 베리안은 그런 햇살이 비추는 저택을 좋아했다.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정돈되고 빛이 가득한 복도에 잠시 멈춰 서서 눈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먼지를 쫓는다. 잠시 동안의 여유는 작은 먼지를 놓치는 것과 함께 끝이 났고 다시 몇 걸음 걸어가 꾹 닫힌 문 앞에 섰다. 낡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고상함을 잃지 않던 문도 길게 늘어진 그림자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듯 빛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가벼운 노크 두 번 후 문을 열면 좀 전과 달리 햇살 냄새가 나는 방이 펼쳐진다. 아몬이 정성스럽게 키워 흠집 하나 없는 꽃만 골라 장식한 꽃향기가 코에 닿으면 베리안은 빙그레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햇살이 쏟아지는 방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주인에게 다가갔다. 나뭇잎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려 다른 사람이 본다면 평화로운 곳이네 라고 부러워할 풍경이건만 그에겐 이 평화로움이 닿지 못한 것 같다.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반응하지 않은지 오래다. 처음 만난 그 날처럼 하얀 셔츠를 입은 그는 그때와 다름 없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지만 그림자와 함께 흔들거리는 검은 넥타이를 보는 순간 뾰족한 얼음으로 꿰뚫린 것처럼 차갑게 아파온다. 베리안은 저 햇살과 같이 바스러질 것 같은 그를 붙잡으려는 듯 한 발자국 더 곁으로 다가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티포트의 온기와는 또 다른 햇살의 따스함이 손을 통해 전해져 와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데 이런 빛 아래에서도 주인은 여전히 세상 모든 그림자를 혼자 다 가진 것 같다. 길어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까만 눈동자는 한 점의 빛조차 담기지 않는다. 조용히 아래위로 움직이는 어깨가 아니었으면 앉은 채로 죽어있는 건 아닐까 착각할 정도다. 아침에 우려냈던 차를 치우며 베리안은 일부러 더 방긋 웃음 지었다.

"오늘은 이 차의 기분이 아니셨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오후 차로는 허브티를 준비해봤습니다."

그를 생각하며 고심해서 고른 아침의 홍차는 차갑게 식어 향도 모두 날아 가버렸다. 이 색 밖에 남지 않은 홍차는 지금의 주인과 닮았다.

한 달하고도 보름 전, 주인은 언제나처럼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며 집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보름이란 시간 동안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연락이 끊겨버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평소엔 입지 않던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다는 건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밝게 웃으며 다녀오겠다며 인사하던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져있었고 그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매일 저녁 시간이 되면 아내가 돌아올 시간이라며 미안하다는 듯 웃던 그가 한 달이란 시간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천사 사냥, 최소한의 식사 그 외엔 꼭 석상이라도 되려는 것처럼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전에도 일해야 한다며 며칠 동안 돌아가지 않고 방에 박혀있긴 했지만 언제나 그의 집중력을 버티지 못한 집사들의 권유에 못이긴 척 펜을 내려놓고 술이나 차를 즐기곤 했다. 하지만 이번은 그것과 다르단 걸 알려주듯 돌아온 그는 고갤 숙인 채 아무도 바라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인님. 머리가 많이 기셨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머릴 손질해드려도 될까요?"

주인의 허락 없이 그 몸에 손을 대는 건 집사로서 있어선 안되는 일이지만 평소의 그였다면 그저 웃어 넘겼을 것이고 지금의 그라면 차라리 화라도 내주길 바랐다. 하지만 역시 답은 없었다. 하얀 김이 향을 담고 흔들리는 평화로운 방안에서 새까맣게 존재하는 그림자. 그저 애정 없이 만들어둔 인형도 이보다 더 생기 있을 것이다.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면 숨어있던 단아한 옆 선이 나타난다.

"실례하겠습니다."

페네스 덕에 여전히 살랑거리는 머리칼 한 가닥 한 가닥이 손가락에 감겨온다. 긴 목덜미를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의식적으로 내쉰다. 이런 상황에서도 연모하는 이에게 닿는 것은 설레고 긴장되는 구나.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제 손가락들을 따라 가위가 움직이고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사각, 사각, 사각.

느릿한 숨소리를 따라 들리는 소리가 평화롭다. 이 사람은 이렇게 괴로운데 자신은 이리도 설레도 되는 걸까. 목이 막혀온다.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을 거울에 비췄다. 얼마만에 보는 얼굴인지. 야윈 그의 모습에 심장이 조이듯 아프다.

"어떠신가요? 나름대로 잘됐다고 생각하는데…."

그 또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얼마만에 본 건지 사라지기 전과 다름 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자신과 눈을 마주친 순간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주인님?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이 닿기도 전에 그는 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등을 쓸어내리며 다시 한 번 그를 부르면 아주 작게, 얼핏 놓칠 수 있을 만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아닌 기침 소리. 한동안 쓰지 않은 성대가 기침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겨우 목소리를 뱉어낸다.

"…베리안, 베리안."

"네, 주인님."

"아내가, 아내가… 아내가 죽었어."

돌아간 그를 기다리던 건 아내의 사고 소식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부탁으로 장을 봐오던 중 사고를 당했다고.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었고 베리안은 계속 그 등을 쓸어내리고 다독여줄 수 밖에 없었다.

"내가…내, 내가…."

그는 차마 그 다음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지만 베리안은 이미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을 알고 있었다.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그 말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막아버리듯 베리안은 그를 꽉 안고 속삭였다.

"주인님껜 제가 있습니다. 전 언제나 주인님 편이에요."

그러니 부디 절 만난 걸 후회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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