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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 랫 (@RR_shsh_)

황금의 날개가 해광의 바다에 가라앉아 사라진 날로부터 몇 개월이 지났고 퇴마사 잠뜰의 일상은 평소와 별 차이 없이 흘러갔다. 소란을 주도하던 이가 사라졌으니 해광은 예전처럼 허구한 날 사건이 터지는 도시는 아니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어둠이란 어디에나 있는 것. 괴현상 관련 의뢰를 받으면서 사는 것도 똑같았고 가끔씩 찾아오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똑같았다. 모든 것이 똑같은데, 하나가 부족했다. 잠뜰은 그 부재를 굳이 상기시키지 않으려 애썼다.

"뭐라고요?“

그러던 일상에 돌연 파도가 일었다.

"잠뜰 님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탁드립니다.“

만감의 교차를 겪는 잠뜰의 앞에서, 저승의 심부름꾼들과 함께 선 해광의 수호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요점은 그거였다. 본디 해광의 바다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단절을 위해 범혼을 소멸시키는 힘이 존재한다. 그러니, 해광의 밤바다에 빠진 형제는 원래대로라면 소멸한다.

…소멸했을 터였다.

"어째서, 소멸하지 않은 거죠….“

"원인에 대해서는 저희로서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현재 지배적인 의견이라 하면 잠뜰 님과 각별 님, 두 분께선 함께 있는 시간이 길었으니, 각별 님께 스며든 잠뜰 님의 기운이 두 분을 해광의 바다로부터 보호한 것이 아닌가….“

"흐음, 그렇군요. 예, 두 분 입장은 대충 이해했습니다. 처우가 애매하단 것도 이해하고요. 제가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어요. 그 둘을 왜 하필 저희 집에 머물게 한다는 거죠?“

공룡과 각별은 넋이 빠진-사실 넋 그 자체이지만-표정으로 구미호와 파랑새의 뒤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옆엔 어쩌다 딸려와서는 이 상황에 지대한 불만을 가진 듯한 수호령이 팔짱을 끼고 있었고…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이제 와 그런 상황에 새삼스럽게 당황하기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너무 굴곡져 있었다.

"원래는 소멸되었어야 할 혼이기에 해광에 거처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염치 불고하고 혼을 볼 수 있는 잠뜰 님의 댁에 잠깐 맡기는 것이죠. 아, 사실 더 중요한 사안은 따로 있는데, 두 분의 처분을 논의하는 것입니다.“

"처분이라면, 소멸시킬지 말지, 뭐 그런 건가요?" 잠뜰은 '소멸되었어야 할 혼'이라는 표현이 거슬렸다.

"말하자면 그래요." 구미호는 즉각 긍정했다. "그리고 예상 기간은 일주일. 그 안에 거주지가 완성되든, 왕모 님들의 논의가 끝나든 할 테니 그때는 저희 측에서 두 분을 데려가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일주일 동안만 두 분을 맡아주십시오." 그가 덧붙였다.

”…그래요, 뭐. 짜증 나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들을 겪고도 일 처리가 제대로 됐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아, 이거 그분들이 듣고 계신 건 아니죠? 아무튼 뭐, 네. 그렇게 할게요. 특별한 주의사항 같은 건 없나요?“

"그건… 기다리시죠." 은근한 욕을 들어서인지 파랑새는 약간 언짢은 것 같았다. 그녀는 두어 번 손뼉을 쳤고, 어디선가 진한 바다 냄새가 났다. 그 행위에 아주 거대한 영적 힘이 깃들어 있다는 걸 퇴마사인 잠뜰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소금기 도는 잔향이 코끝에서 사라질 즈음 멍하니 서 있던 형제가 정신을 차렸다.

"자, 이제 정신도 돌아왔으니… 여기 계신 잠뜰 님, 익숙한 얼굴이겠죠. 두 분을 일주일 동안 맡아준다고 하시니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행동하세요.“

저 둘을 우리 집에 내몬 건 자기들이면서. 잠뜰은 속으로 궁시렁댔다.

"주의사항은… 뭐, 두 분께 해광의 바닷물이 닿아선 안 됩니다만, 솔직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고. 아무튼, 일주일 동안 폐를 끼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에. 잠뜰은 대강 구미호와 파랑새를 배웅했다. 둘이 떠난 자리에는 공룡과 각별만이 남겨졌다.

잠뜰은 각별과 눈이 마주쳤다. 감히 예상조차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던 이와의 해후에 행동은 사고를 추월했다. 발이 땅에서 떨어졌고 다리는 속도를 더해 저의 은인이자 친구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지금 제 표정이 어떤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잠뜰이 각별에게로 달려나갔고, 각별은 그녀의 속도에서 가해지는 힘을 견디지 못해 바닥에 넘어졌다.

"너, 그렇게 나 살리겠다고 막 뛰어들고 그러면, 어? 고마워할 줄 알았어? 진짜… 왜 바보같이 그런 짓 해 놓고 이제야 돌아온 건데. 그동안 잘 지냈어?“

잠뜰은 주먹을 쥐고 그의 어깨를 원망하듯 가볍게 쳤다. 각별은 제게 안긴 그녀의 등을, 울음을 달래듯 토닥였다. 어째서인지 느껴지는 묘한 느낌. 잠뜰이 잠시 뒤에야 안 사실이지만, 각별은 현재 제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다.

휴업 안내판을 건물 입구에 달아 놓은 잠뜰은 우선 수현에게 연락했다. 일주일간 조금 위험한 일을 처리해야 하니 우리 집에 오지 말고, 될 수 있으면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으나 수현은 그것을 감정 표현에 서투른 이가 애써 표하는 걱정으로 여겼다. 이런 형태의 연락이 익숙하기도 했고. 그러나 역시 친구가 위험하다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않던가. 그녀가 강한 퇴마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위험한 일? 그게 뭔데?]

[당분간 우리 집에서 악귀… 봉인하고 있을 거야. 일주일간 잘 어르고 달래면 성불한대. 우리 집이 일종의 봉인구 역할을 하는 거지. 결계를 쳐 놓기는 했지만, 영능력이 없는 일반인인 네가 오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고.]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거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을 듣자 잠뜰은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전화를 끊었는데도 그 기분은 한참을 잔류해 있었다. 약간의 거짓말에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흐음, 저를 악귀라고 소개하신 건가요?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뒤에서 느껴진 어두운 기운만 아니었어도. 고개를 휙 돌리며 월광검을 잡아들자 공룡은 가볍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답지 않은 존대가 거슬렸다. 당장에라도 무언가 일을 칠 것 같았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세요. 어차피 일주일만 있으면 소멸될 텐데, 좀 느슨하게 가자고요.“

"소멸이라니, 아직 정해진 건 아니….“

"글쎄요. 잘난 제 동생이라면 모를까, 저는 소멸을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한 짓이 있잖아요? 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주 조금은 후회도 되고.“

"오, 웬일로 저렇게 자기객관화가 잘된 말을.“

잠뜰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가 제 몸에 들어왔을 때 엿보게 된 그의 과거는 그야말로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찌든 전형적인 원귀였기에. 그는 실제로, 그녀에게 있어 어찌 대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 껄끄러운 자였다. 저와 각별이 만나고, 재회하게 했으며, 위험에 처하게 했고, 또 이별하게 했으니.

아침밥은 늘 그랬듯 한 사람의 몫이다. 일주일간 퇴마 일을 쉬는 동안 잠뜰은 해광-저승-에서 보수를 얼마나 쳐줄까, 같은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뭘 하고 지내야 할지를 계획했다. 일주일이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기에 뭔가를 하려면 떠오른 즉시 해야 한다. 따라서 수저를 움직이며 스마트폰을 두드리곤 왼손 엄지로 다이얼을 꾹 눌렀다. 1번에 설정된 단축 키. 과연 누굴까. 공룡은 그것을 잠깐 지켜보더니 이내 각별이 자고 있는 방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깐, 당신! 각별이 해코지하면 가만 안 둬!“

"그러고 싶어도 못하는 몸이니 안심하세요~.“

"퍽이나 안심을… 어, 네, 할아버지. 저예요. 잠뜰."

해광의 한적한 카페에서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도광. 잠뜰의 할아버지. 그 또한 영적인 능력이 있어 힘들던 시기의 잠뜰을 많이 도와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인사치레는 전화로 대충 이루어졌으니 본론으로 넘어가는 것은 빨랐다. 잠뜰은 제 집에 갑자기 구미호와 파랑새가 찾아온 것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다.

”그래서 지금, 네 그 쓸데없이 큰 집구석엔 해광의 바다에 빠졌는데도 소멸하지 않고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범혼이 둘이나 있단 말이냐? 이거야 원, 더 이상 바다가 경계 역할을 한다고 말하기도 부끄럽겠구먼.“

”쓸데없… 아, 아무튼, 그 둘 말로는, 제 힘이 각별이한테 깃들어서 소멸을 면한 거래요. 근데….“

”그럴 리가 있나.“

”그럴 리가 없죠.“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한 답은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애초에 잠뜰이 도광을 찾은 이유도 그거였다. 공룡과 각별이 소멸을 면한 ‘진짜 이유’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 일주일의 시간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꼭 알아야 하는 문제였다.

”산 사람의 기운이 어찌 죽은 녀석에게 물들겠어. 정말이지 변명도 참 못하는 분들이시군. 그건 그렇고, 그래, 여기 네가 요청한 자료들이다. 시간이 부족해서 양은 적지만 더 찾으면 메일로 내용 부치마. 옜다.“

상황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해광의 바다와 망자의 상관관계, 혹은 소멸하지 않은 경우에 대한 자료를 찾아 달라고 요청한 것인데 생각보다 뭔가가 많다고 잠뜰은 생각했다. 도광의 가방에서는 먼지 냄새가 가시지 않은 고서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네 말을 들어 보니 이 책이랑 이것, 그리고 이건 쓸모가 없을 것 같고… 이건 내가 아직 읽어 보진 않았다만 아마 내용이, 흐음.“

”뭐라도 주문하고 올게요. 할아버지는 뭐 드실래요?“

”나는 차나 좀 주문해다오. 너는 또 그 무식하게 단것만 먹을 테고.“

”아냐, 할아버지. 저 이제 단 거 끊으려고요.“

뭔가 말하려던 도광은 손녀의 가라앉은 눈을 마주하곤 그러냐, 라 내뱉는 것 외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결국 잠뜰이 시킨 것은 아메리카노였다. 그녀는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고서 표정을 와락 구겼다. 언제 먹어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그런 불평불만 속에서도 잔의 내용물은 착실히 줄어 갔다.

잠뜰은 자료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하는 일이 있으니 짐이 무겁지는 않았지만 집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가 걱정되어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불안이 걸음을 재촉해 예상보다 조금 더 빨리 집으로 돌아온 잠뜰은 곧바로 계단을 올랐다. 해코지를 할 수도 없는 몸이라는 말을 들었고, 실제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 녀석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 점점 커지는 발소리만큼 생각도 복잡해져 갔다.

”여기 뷰 되게 좋네요. 늘 이런 집에서 사셨던 건가? 돈 많이 버시나 봐요.“

도착한 집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도착하자마자 급히 확인한 안쪽 방에서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각별이 죽은 것처럼-실제로 죽긴 했지만-잠을 청하는 중이었고 공룡은 크게 난 창문 사이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뜰은 그 광경을 가만 지켜보다가 아무리 휴업 간판을 내걸었다지만, 사무소가 원래 이렇게까지 한적했나 생각했다.

들고 온 자료를 책상에 아무렇게나 툭 내려놓고서 공룡에게 말을 걸러 다가갔으나 잠뜰은 그가 창밖을 보는 표정이 어쩐지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미 죽은 자가 느끼는 산 자의 세계와 벌어진 간극 정도일까. 결국 말을 걸지 못한 채 입에서는 한숨만이 나돌았다. 다른 봉지에서 나온 저녁거리는 각별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차려졌다. 평소처럼 홀로 먹는 저녁 식사는 왠지 모르게 더 외로웠다. 잠뜰은 이럴 줄 알았으면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고 들어올걸 하고 조금 후회했다.

”자, 정리를 좀 해 보면… 둘 다 이 집 밖으로는 못 나가는 거?“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것을 알면서 평소처럼 반말을 하려니 새삼스러운 거슬림이 떠올랐다. 공룡은 고개를 약하게 한 번 끄덕였고 각별은 눈치를 보다가 공룡을 따라서 끄덕였다. 마치 그가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어쩌다 이런 일을. 그래도 잠뜰에게는 각별과의 재회라는 지금의 상황 하나가 그저 버거울 정도로 기뻤다. 비록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직 유의미한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지만 뭐 어떤가. 이제 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고난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며칠 정도가 꽤 평화롭게 흘러갔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잠뜰과 각별은 관계의 페이지를 새로 써 내려가야 하는 사이가 되었다. 다만 각별은 여전히 눈앞의 낯선 범혼과 본인이 어떤 사이인지를 알지 못했고 공룡도 둘의 사이를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 잠뜰은 시간이 날 때마다 도광이 준 자료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공룡과의 관계에서 그리 큰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잠뜰이 공룡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저 자신을 죽일 뻔했지만 결국 실패한 사람, 뭐 그 정도의 인상이었다. 그때의 일은 워낙 실감이 안 나기도 했고 지금 안 죽고 멀쩡히 살아있으면 된 거지 정도의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그를 대했다. 어차피 나에게 뭔가 물리력을 행사하지도 못하는 거 아닌가. 본능에 따라 껄끄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좋게 생각해 보려고 했던 탓이다. 애초에 자신의 심정보다는 공룡과 각별이 복잡한 사정을 가진 형제였다는 사실이 훨씬 충격적이었던 탓에 중요한 감각이 약화되었던 걸지도 몰랐다. 잠뜰은 그저 오랜만에 만난 파트너와 그동안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조금 막막함을 느꼈다.

“저, 혹시 TV… 틀어도 되나요?”

그것은 각별이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건 사건이었다. 그동안 계속 존대하지 말고 편하게 반말로 대해도 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잠뜰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질문에 대해 간단히 허락하는 것으로 대답을 맺었다. 확실히, 며칠 동안 집안에만 있으면 적적할 법도 하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창밖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저건, 저 새는. 순간 그녀의 사고가 정지했다.

“차, 창밖에…….”

“창밖에…? 아, 네. 새가 있네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의 시선은 다시 TV를 향했다. 정말로, 눈앞의 각별은 각별 본인이 맞는 걸까. 그를 정말 자신이 알던 각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복잡해진 머리는 한동안 식지 않았다.

복잡해진 머리로도 정답을 위해 자료를 읽는 것은 이제 하루의 루틴이었다. 도광이 준 자료 더미는 절반 넘게 읽어, 이제 옛 문헌 몇 개 정도를 남겨 두고 있었다.

“뭔, 쓸모 있는 자료가 없냐… 어?”

오래되어 변색되었고,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약한 종이를 넘겼다. 힘이 너무 들어간 나머지 찢어졌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눈에 들어온 것은 조잡한 밤바다의 그림이었다. 그뿐이었다면 넘겼을 테지. 그림 속의 밤바다에는 함께 바다에 빠지고 있는 괴물 형태 하나와 사람 형태 하나, 그 둘이 잠겨 있었다. 한 명이 괴물 모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마치 그날의 일을 연상케 했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것만은 선명했다. 잠뜰은 바로 다음 페이지를 읽었다. 그리곤 얼굴을 찌푸렸다.

“이거….”

한자가 너무 많은데. 아무래도 다시 도광을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잠뜰이 급히 겉옷을 챙겨 입은 채 책을 들고 나갔고, 그 사이에 잠뜰의 자리로 다가온 것은 공룡이었다. 그는 책더미를 가만 바라보더니 처음부터 읽어나갔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표정은 복잡해졌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그래, 과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깊은 바다에 빠진 것마냥 잠겨 있었다.

“할아버지! 연락, 연락 보셨죠?”

“이놈아, 숨넘어가겠다. 그래, 연락은 진즉 봤으니까 천천히 말하기나 해라. 대체 무슨 내용을 보았길래 이 저녁에 찾아와선. 평소에는 잘 찾지도 않더니.”

“…지금 그런 말 하실 때가 아니거든요? 여기요, 이거 말인데… 그러니까, 한자가 좀 많아서.”

“한자…?” 도광의 시선이 문제의 페이지로 향했다. 다만 이어지는 말은 타박이었다. 그러니까, 왜 이런 단어를 못 읽어서 헛걸음을 했는가, 뭐 그런. 잠뜰이 어이없다는 듯 반박했고 도광은 헛기침을 했다.

“무슨 내용인지,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진짜 중요해 보여서 그래요…!”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다 생각이 있는 거겠지.”

방에는 한동안 정적이 맴돌았다. 낡은 페이지를 천천히 읽어나가는 도광을 보며 잠뜰은 할아버지, 시력 좋네…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한자 몇 개는 보이는데. 물 수, 신령 령, 범혼. 아, 저 한자는 해광. 그와는 반대로 도광의 표정은 잠뜰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점점 복잡해져 갔다. 몇 분이 지나자 비로소 페이지는 넘어갔다.

“할아버지, 무슨 내용 적혀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그 왜, 야괴들은 범혼과 달리 해광의 바다에도 소멸되지 않잖느냐. 실제로 그걸 이용해서 넘어오는 야괴 녀석들을… 네가 밥벌이에 써먹는 게지.”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마시고요.”

"여튼, 그런 녀석들 중에는 꼭 별종이 있지. 아직 범혼 상태인 제 동료마저도 데려오고 싶었던 어느 야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공했고.“

"…!“

”물론 그 시대의 퇴마사들에게 금방 잡히기야 했다지만, 남겨진 범혼은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고민하던 사이에 해광의 사자들이 와서 그 범혼을 데려갔고…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범혼 상태인 애까지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건데요? 기억을 잃은 거랑은 무슨 상관이 있고?“

"예끼, 이 녀석아. 진정하고 좀 들어 보거라. 이 책에 따르면…."

잠뜰은 달렸다. 이번에는 무거운 다리에도 불구하고 달렸으나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보도블록 위에 닿는 신발 밑창이 아팠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집 앞에 도착한 직후에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언제나의 집이다. 집에서 나올 때의 풍경이라 하면, 각별과 공룡이 각자 반대편에 멀찍이 앉아 TV를 보고 있던 것이다. 다만 각별은 사라져 있었고-위층에서 경치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질리지도 않던가-공룡은 책더미 사이에 앉은 채로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

"아무래도 눈치채신 모양입니다? 이제 아셨다는 사실에 핀잔을 드려야 할지, 이제라도 알아차리셨다는 사실을 칭찬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영혼의 창백한 손은 책 한 권을 들곤 톡톡 두드린다.

공룡이 걸어왔고 잠뜰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다만 잠뜰보다는 공룡의 걸음이 더 빨랐다. 당연하지만 위해는 없었고… 단지 아주 작은 속삭임만이 있었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오늘 자정에 건물 문 앞으로 와 주세요. 각별이는 잠자게 두고요."

해광의 밤은 차디찼다. 그것은 온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고,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문 앞에 선 잠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갖다 대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밖.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있는 혼은 그러지 못한다. 다만 말만을 내보낼 뿐이다.

"그래요… 잠뜰님이 알아차리신 사실, 그거 전부 맞는 말이에요.“

"그럼…." 그녀의 뇌리에 아까 전 도광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야괴의 기운을 도움 삼아 이곳으로 도달하는 것까진 성공했다만, 함께 인간의 세상으로 넘어온 범혼은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구나. 다만 그 범혼을 조사한 결과… 잡다한 혼들이 들러붙어 의지를 이루고 있는 상태였지. 다시 말해 본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빈껍데기였던 게다. 본인은 영영 죽어 없어져 버린 셈이지. 해광의 깊은 바다에서.“

잡다한 혼. 빈껍데기. 그러니까 즉, 기억을 잃지 않은 공룡은….

"당신, 그럼 아직….“

"네, 아직 완전히 범혼이 된 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공룡은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파랑새가 쳐 놓은 결계가 그의 탁한 눈에 아른거렸다.

"부탁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는 게 조금 염치는 없지만… 서로에게 좋을 거라고 봅니다.“

"본론만.“

"이 봉인, 깰 수 있으신가요?“

"어렵겠지만, 깰 수는 있는데…….“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다를 눈앞에서 보고 싶어서요. 밤공기도 좀 쐬고.“

나중에 책잡히는 건 아니겠지. 잠뜰은 방금 전 조잡한 부적을 덕지덕지 붙였던 문을 떠올렸다. 바다까지 가는 길 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대화를 할 만한 상황도,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흘렀고, 마침내 두 사람은 바닷가에 당도했다. 산 자의 세상과 죽은 자의 세상을 나누는 파도가 모래와 만나 스러지고 있었다.

"잠뜰 퇴마사님. 정말 마지막 부탁을 해도 될까요. 설마 여기까지 왔는데 거절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만….”

"또 뭔데." 여실히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저에게 아직 야괴의 기운이 남아 있다는 건 아시겠지요. 그걸 없애 주셨으면 합니다.“

파도 소리를 배경 삼은 그 말은 마치 오늘의 날씨를 이야기하는 것마냥 담담했다. 잠뜰은 그의 입에서 나온 답지 않은 존대가 지독하게도 거슬렸다. 본능적으로 그를 '퇴마사 공룡'일 적의 모습과 겹쳐 보고 있었으나 눈앞의 남자는 두말할 것도 없는 야괴. 다만 바다까지 와서 저를 범혼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뜻은 명백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진심으로….“

"진심이 아니라면 이런 곳까지 왔을 리가요. 아, 딱히 꿍꿍이는 없습니다. 정말 단지, 뭐랄까… 좀 지쳤거든요. 이제는 편해지고 싶어요.“

손에 든 월광검이 떨렸다. 아니, 정확히는 월광검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공중에 두어 번 휘두르고 눈앞의 악을 없애겠다는 일념으로 의식을 집중하자 숨이 가빠져 왔다. 감은 눈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존재가, 분명한 어둠이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기운은 사그라들었다. 눈을 뜨자 앞에는 여전히 공룡이 서 있었다.

"아, 이제 됐네요.“

"당신 정말로…….“

바다로 향하는 걸음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뜰에게는 그를 포기시킬 만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거니와, 별로 포기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가끔 바라보면 기분이 좋았던 바다가 지금은 맹수의 입 같았다.

"요 며칠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비록 껍데기지만… 제 동생도 잘 부탁드리고요.“

모래사장에 남은 발자국은 없었다. 먼바다로 사라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강한 네온사인도 바다까지는 닿지 않았다.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한 이를 위대한 해광海光의 빛이 마침내 놓쳐 버렸기 때문에, 잠뜰은 그것을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모든 것을 이해한 잠뜰은 고뇌하고 있었다. 외모만 각별이고 속에 든 것은 잡다한 하급 령들의 집합체라니, 믿을 수 없었으나 그게 진실이었다. 잠을 과하게 많이 자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기력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그들이 산 자의 세상에서 형태를 이루어 존속하는 데에는 많은 힘이 들기 마련이니. 눈앞에 그가 있었고 잠뜰은 서랍을 열곤 한구석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고요 속에서 은박지 뜯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분명 각별에게도 들렸을 터였다. 그렇기에 뒤를 돌았고, 얼굴을 마주했다.

"초콜릿은 몸에 안 좋아.“

"바, 방금 뭐라고….“

"어라, 저도 모르게 반말을… 내가 왜 그랬지. 그냥 초콜릿 하나 먹는 것뿐이었는데. 그러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도 이에도 안 좋으니까요. 물론 어른이시니 그 정도는 조절 가능하겠지만….“

"정말 넌, 너는….“

끝까지 그런 식이야.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모습이며 말과 목소리일 테다. 눈앞의 남자가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익숙한 말을 들으니 기대하지 않으려던 온갖 굳은 결심이 손 안에서 초콜릿이 녹듯 사라져버린다. 잠뜰은 정말로 눈앞의 이를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날 저녁의 일이었으니 다시 말해 작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밤, 구미호와 파랑새가 집을 찾았다. 둘은 어째서 공룡이 없는지를, 집의 봉인이 풀려 있는지 따위를 구태여 묻지 않았다. 단지 각별을 데려갔을 뿐이고 잠뜰은 울지 않으려 했다. 사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으나 복잡한 마음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제법 힘든 일이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본 각별은 그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덕분에 후련해질 수 있게 됐다고, 잠뜰은 생각했다. 마지막에 미소를 보았다. 그거면 됐다.

"안녕. 잘 가.“

거창한 작별의 인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혼란을 줄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말과 함께 눈앞의 이들이 사라졌다. 세 명이 떠난 뒤의 사무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나도 넓어 보였다. 해광의 평범한 밤은 그렇게 완결을 맺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일해야 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잠뜰은 휴업 안내판을 떼기 위해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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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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