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보는 날

[외계인] / 🍳 (@fried399)

안녕하세요, 저는 국가대표 선수인데요. 그냥 평범한 20대인데요. 얼마 전부터 집에 이상한 편지가 자꾸 와요. 특별한 내용은 없고 자꾸만 지구는 어떠냐고 물어보는데, 혹시 상습적인 장난 편지도 법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요? 내공 냠냠 신고합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지구는 어떠냐고 묻는 상습적인 장난 편지에 대해 질문하셨는데요. 정확히 어떤 피해를 입으셨는지 알아야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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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보는 날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잠뜰은 차가운 빙상 위에 서 있었다. 아동용 쫄쫄이를 입고 앙증맞은 스케이트 한 쌍을 신고서 미끄러운 얼음판을 누구보다 빠르게 미끄러져 달려가곤 했다. 간혹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벽에 부딪히거나 엉덩방아를 찧는 일도 있었지만, 무섭다기보다는 그 순간의 짜릿한 속도감이 잊을 수 없이 뼛속까지 각인되어 버렸다. 또래 친구들이 동네 놀이터에서 술래잡기하고 있을 때 그는 같은 출발선에 선 이들을 따돌리는 법을 배웠다. 굳이 따지자면 비슷하지 않을까? 잠뜰은 흙바람 휘날리며 달리는 것보다 차가운 얼음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 더 즐거웠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맘대로 가져온 무지개색 끈을 채웠는데, 언젠가부터는 고집스럽게 파란색 끝 하나만을 고집했다. 발을 꽉 조이고 있는 파란 끝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꼭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빙상은 구름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하얀색이고,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말이다. 그맘때쯤 잠뜰의 그림일기는 스케이트를 타고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가 스케이트를 타면서 느꼈던 점을 되짚자면 꼭 틀린 비유는 아니었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서는 부모님도 본인도 스케이트에 더 열중하게 되었다. 하늘을 나나? 그런 건 모르겠고, 그에게 재능이 있다는 확실한 사실만이 남았다. 함께 스케이트를 시작한 친구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다. 잘하니까 재밌었다. 여전히 그는 얼음판 위를 거니는 게 행복했다. 무더운 여름에도 빙상장 안으로 들어서면 살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가는 찬 공기가 그를 환영했다. 그 기묘한 간극이 잠뜰은 좋았다. 그가 속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공기는 더 날카롭게 그의 양 볼을 긁고 지나갔는데, 그것마저도 그를 멈출 수는 없었다. 자신을 멈출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단 한 순간이라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하얀 것들은 언제나 잠뜰에게 친절했다. 미끄러운 곳을 땅 위를 걷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뒤에도 종종 삐끗 넘어지곤 했지만, 그 예상치 못한 충격마저 그를 멈출 수는 없었다. 오히려 화한 냉기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다시 두 손으로 얼음을 짚고 일어나면 앞에는 달려갈 길만이 펼쳐진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를 반기고, 앞으로 떠밀며, 가장 앞선 곳으로 달려나가게 해준다.

그래서 잠뜰은 그 순간 발목에서부터 퍼져나가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경기를 말아먹었다는 사실에만 유감을 가졌다. 그에게 고꾸라졌을 때 일어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운동선수들에게 그런 삶은 필연적이다. 더군다나 그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 달려야 하는 사람의 숙명이라면 더더욱.

살면서 절망이나 불행 따위의 단어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간혹 슬프거나 좌절감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정도를 생각하면 평탄한 삶 쪽에 가까웠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이곳을 떠나는 수많은 동료를 지켜봐 놓고서도, 겪지 않으면 크게 와닿지 않는 법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 하나는 튼튼하다는 소리도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같은 정도의 충격을 받거나 사고가 나도 남들이 치료와 재활에 들어갈 때 그는 무난하게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런 경험들이 그를 무디게 만들었던 걸지도 몰랐다.

“일단 재활을 해봐야겠지만 이른 시일 안으로 복귀하실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재활 성과에 따라 이전처럼 하는 게 불가능하실 수도 있습니다.”

겨드랑이를 짓누르는 목발이 아니었다면 현실감을 영영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잠뜰은 네 개가 되어버린 발을 열심히 놀리며 병원 밖으로 나왔다.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쬐는 햇볕에 두 눈을 찌푸렸다. 시야를 방해하는 빛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는 발끝에서만 아른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웬 손아귀가 되어 발목을 콱 잡아채는 상상을 한다. 그것은 잠뜰을 땅 아래로 끌어당긴다. 아주 깊은 곳, 용암이 부글부글 끓는 지구의 중심까지……. 그는 언제나 서늘한 곳에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제 발짓 한 번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마음에 드는 소리를 내고, 그 아래로 깊은 자국을 만들고, 부드러운 얼음이 갈리고, 미끄러운 물방울이 생기는 그런 곳.

절망이라고 했나. 아니면 불행? 그런 걸로 지금의 박잠뜰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붙잡지 않은 발을 툭툭 털어냈다. 그의 다리를 단단히 감싼 깁스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명쾌하고도 딱딱한 얼음의 소리가 아니라, 어쩐지 둔탁한 그런 소리.

잠뜰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제가 날면 날수록 그의 발아래에 있던 얼음은 구름이 되어 물을 뚝뚝 떨어뜨리지 않았나. 꼭 눈물 같은 것들을.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은 그리 기사화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나마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동계 올림픽 시즌도 아니었을뿐더러, 곧 있을 하계 올림픽은 빙상 위의 박잠뜰을 잠시 잊기에는 충분한 화젯거리였다. 차라리 괜찮다고 생각했다. 온갖 주목을 받으며 가벼운 위로들을 받는 건 질색이었다.

합숙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계신 곳은 아니고, 서울에 있는 집이었다. 본가로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성화를 간신히 물리친 것은 병원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별거 아닌 이유 하나였다. 그렇게 치면 본가 주변에서도 진료받을 수 있는 대형 병원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고집의 이유를 알아채시기라도 한 듯 결국 두 손을 들고 그가 원하는 대로 놔두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당신들도 이해하신 모양이었다.

짧은 휴식 기간을 제외하면 항상 훈련에 매달렸던 잠뜰에게는 뜻하지 않게 붕 뜬 시간이 생겼다. 아직은 재활을 시작할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병원에서 진료받고 나면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 게 전부였다.

딱히 외롭지는 않았다. 다만 스스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애가 되었다는 생각은 들었다. 여태 그가 넘어졌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푹신한 매트 위로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은 거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람처럼.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에 처음으로 엎어져 울어버리는 어린아이처럼. 겨우 며칠 새로 상황이 나아질 리도 없건만 꾸역꾸역 병원에 나가 진료를 받고 있자니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기분이 들었다.

벌써부터 푹푹 찌는 여름의 태양은 머리가 띵할 정도로 강렬했다. 양손으로 목발을 쥐어야 했기에 손 그늘도 만들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공원을 가로지르곤 했다. 힘겹게 발끝만 보며 걸으면 도착하는 곳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이었다.

그 편지를 발견한 것도 여느 때와 같이 혼자 병원에서 돌아오던 참이었다. 원래 집보다는 제공되는 숙소나 훈련장 근처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집으로 오는 편지라고 해 봤자 관리비 고지서 같은 것이 전부였다. 습관적으로 우편함에 꽂힌 종이를 쓱 꺼내는데 뭔가 이상한 것이 손에 걸렸다. 손으로 슬쩍 잡기만 해도 감촉이 다른 게 선연히 느껴졌다. 잠뜰은 고지서들 사이에서 웬 꺼끌꺼끌하고 판판한 종이를 빼냈다. 은빛에 가까운 종이를 뒤집으니 삐뚤빼뚤한 글자가 드러났다. 꼭 글자를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지, 구는…… 어…때?”

그림처럼 적힌 글자들을 더듬더듬 읽었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는 편지에는 엉뚱한 질문 하나가 적혀 있었다. 잠뜰이 종이를 뒤집어보았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종이와 이상한 글씨체, 또 이상한 내용. 잠뜰은 미간을 좁히고 편지를 다시금 살피다가 이내 얼마 전 같은 아파트에 어린 애가 있는 가족이 이사를 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장난이겠거니, 아니면 실수로 넣었겠거니. 더 고민하지 않고 편지를 도로 우편함에 넣었다. 실수라면 누군가 다시 챙겨가겠지. 며칠 뒤에도 그대로 있으면 버려야지.

철제 우편함이 챙하고 닫히는 소리를 냈다. ‘지구는 어때?’ 생뚱맞은 물음은 작은 우편함 속에 툭 떨어졌다.

잠뜰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는 큼지막한 놀이터 하나가 있었다. 점심시간이 얼추 지나면 그때부터 조그만 애들이 하나 둘 모여들곤 했다. 발목을 다친 이후로 그는 놀이터 근처에 있는 정자에 앉아, 미끄럼틀이나 그네 따위를 타고 노는 애들을 구경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잠뜰은 그 나이대부터 얼음 위에 서 있는 것이 익숙했다. 목발을 발치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끈적한 여름 바람이 술렁 불어왔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늘에도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잠뜰은 슬슬 따가운 햇볕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시야에 왼쪽 다리를 칭칭 감고 있는 깁스가 들어왔다. 얼마 전 병문안이랍시고 집에 쳐들어온 친구가 검은 매직으로 적은 응원 문구가 적혀 있었다. 처음 스케이트를 시작할 때 함께였는데, 갑자기 공부해야겠다며 그만두었던 친구였다. 잠뜰은 문득 친구가 스케이트를 포기할 때 어떤 생각이었을지 궁금해졌다. 그는 다친 것도, 그렇다고 큰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스케이트 선수를 꿈꿨던 사람이지 않았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잠뜰도 보다 평화롭고 잔잔한 시간을 슬쩍 동경해 보기도 했다. 매 순간이 경쟁이고 다른 누군가를 이겨야 이어질 수 있는 삶이라는 건 항상 아름답고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라진 지금이 너무나 무료해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기대받지 않는 순간. 어쩌면 그것들을 영영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 잠뜰은 자신이 아직도 그 빙판 위에 넘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나는 것을 반복해 놓고서, 이번에는 어쩐지 땅을 짚을 의지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 잠뜰은 다시 조용해진 사위를 둘러본다. 놀이터에서 놀던 애들이 학원에 가야 한다며 사라지는 시간이다. 잠뜰도 집에 돌아갈 시간이라는 의미였다.

아파트로 들어서면 우편함이 줄지어 붙어 있다. 깜박하고 우편함을 확인하지 않는 것이 일상이던 잠뜰이 일주일째 꼬박꼬박 편지를 챙기는 것은 모두 이상한 편지 덕이었다. 딱 이 시간. 그가 아파트에 들어설 시간이 되면 우편함에는 새로운 편지가 들어있었다. 목발을 짚느라 힘이 잔뜩 들어간 팔 하나를 뻗어 우편함 속에 슥 집어넣으면 역시 까끌까끌한 종이 한 장이 만져진다. 잠뜰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서 종이를 꺼냈다.

지구는 어때?

매일 도착하는 편지는 항상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금 놀라운 점이 있다면 하루가 다르게 글씨체가 예뻐졌다는 것인데, 하루 이틀 연습해서 늘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니,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식으로 글자를 쓰지 않는다. 이건 거의… 프린트된 글자와 비슷하지 않은가. 떨떠름하게 종이를 매만지다가 평소와 같이 주머니에 넣으려던 잠뜰은, 이번에는 다른 날과 달리 아래에 한 줄이 더 적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에 글씨 써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령조로 쓰인 문장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가 꼬박꼬박 편지를 챙겨서 보고 있다는 걸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장난이 아닌가? 이미 같은 아파트에 사는 꼬마 아이는 용의 선상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 조그만 애가 쓴 글자를 우연히 봤는데, 지렁이처럼 구불구불한 것이 도저히 이 편지를 썼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자꾸만 이 괴상한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우표도, 받는 이도, 보내는 이도 없는…. 그러니까, 직접 와서 넣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편지를 말이다.

심장이 불쾌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운동선수들이란 본디 강제된 긴장 상황에 항상 노출되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준비도 없이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잠뜰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잽싸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혼자 살기에는 제법 넓은 집 안은 역시나 고요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고요함 따위가 머리를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다시 꺼냈다.

‘지구는 어때? 뒤에 글씨 써.’

다시 읽어봐도 그 내용에 변함은 없었다. 편지의 뒷장은 여느 때와 같이 텅 비어 있었는데, 사실 앞장과 비교해서 다른 부분은 없었다. 주소를 쓰는 공간도 없었고, 우표를 붙이는 곳도 없었다. 왠지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연필을 들었다. 워낙 쓸 일이 없어 바짝 깎아놓은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연필이었다. 연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돌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글씨를 쓰라니, 생각나는 건 단 하나의 물음밖에 없었다.

‘너 누구야?’

앞서 보내온 편지에 비하면 형편없는 글씨체였다. 나름 잘 쓴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왔는데 도대체 컴퓨터로 뽑은 것만 같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연필을 옆에 내려놓고 종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볕에 은색 종이의 가장자리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역시 평범한 종이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잠뜰은 제가 쓴 문장을 한참이나 더 지그시 바라보다가 역시 쓸데없는 장난에 넘어갔다고 여겼다. 괜히 긴장한 숨을 내쉬며 연필을 도로 집어넣고 요 장난 편지를 버리기 위해 손에 드는데, 그제야 바뀐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야.’

분명히 앞면에는 지구가 어떠냐는 물음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내용은 전부 지워졌고, 역시 반듯반듯한 글씨체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아니, 자기소개가 맞나?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웬 기호들을 살폈다. 살면서 처음 본 기호, 아니면 문자…. 여하간 잠뜰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마찬가지였다. 급하게 제가 썼던 문장을 지웠다. 원리는 몰라도 여기에 쓰이는 글이 공유된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했다.

집어넣었던 연필을 다시 꺼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하게 글을 써보려고 했지만, 상대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시점에서는 신중할 것도 없었다. 잠뜰은 잠깐의 고민을 마치고 다시 문장을 써 내려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곧장 종이를 뒤집었다. 실시간으로 글자들이 지워지는 게 보였다. 아무리 봐도 회로가 들어있을 만한 공간은 없었다. 전자기기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기술이 백 년은 일찍 발전했으면 모를까.

‘내 이름. 지구말로는 수현이야.’

이상한 문자나 지구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치고는 제법 평범한 이름이었다.

‘나는 잠뜰이야. 이 종이는 대체 뭐야? 왜 자꾸 나한테 편지를 보내?’

‘그건 *%@#이야.’

‘자꾸 이상한 문자 쓰지 마.’

‘지구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자꾸 지구말이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부르는 거야?’

‘지구에서 쓰는 말이니까.’

말이 자꾸만 빙빙 돌았다. 잠뜰은 답답한 건 참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할 상황을 그냥 참고 넘기는 건 성정에 맞지 않았다. 지구에서 쓰는 말은 한글 말고도 많잖아. 지구 밖에서 쓰는 말은 우주말이니? 그럼 네가 쓰는 문자는 뭔데? 작지 않은 크기의 종이에 글이 가득 찼다.

상대방, 그러니까 수현은 제가 썼던 글을 지우고도 잠시 고민하는 듯싶었다. 몇 번이고 종이 위에 점이 찍혔다 지워지기를 한참, 정갈한 글씨체가 문장으로 완성되었다.

‘지구에 언어가 많은 줄 몰랐어.’

그는 자신이 썼던 문장 아래에 다시 글을 이어나갔다.

‘우주에도 말이 많으니까 우주말은 아니겠지. 나는 %*@(@#를 써.’

‘네가 그렇게 말해도 못 읽어. 대체 넌 누구야?’

앞면의 글자가 스르륵 지워졌다. 갑자기 비현실감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왔다. 애초에 이런 걸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현실이 맞나? 혹시 꿈은 아닌가? 잠뜰이 침을 꿀꺽 삼켰다. 타자기라도 치는 것처럼 일정한 속도로 종이 위에 새로운 글자가 드러난다.

‘지구인들은 우리를 외계인이라고 하던가?’

“이번 한 주는 어떠셨어요?”

의사가 모니터에 얼굴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썩 성의 있는 태도는 아니라 여겼으나 별로 거슬리는 건 아니었다. 평소와 같다면 대답은 항상 “그럭저럭 이요.”였다. 실제로 특별한 일이 생기는 날은 별로 없었다. 아직 재활에 들어갈 몸 상태가 아니었기에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만이 잠뜰이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고, 그 지루한 시간들은 별달리 설명할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잠뜰은 벌써 일주일째 끊긴 편지를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걸 편지라고 불러도 괜찮을지 의문스러웠지만, 일단은 그렇게 칭하기로 했다. 잠뜰에게서 곧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키보드 위에서 쉴 틈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도 멈춘 채였다. 감정적으로 딱히 나아지려는 움직임이 없던 그의 환자에게서 미묘한 변화를 캐치한 것이었다.

“선생님, 정말 상관없는 말인데요….”

잠뜰이 느릿하게 운을 띄웠다. 제가 생각해도 이 물음은 생뚱맞기 그지없었다. 애초에 잠뜰은 증명되지 않은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훈련이나 한 번 더 하는 게 낫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느니 현실에 매진하는 것이 그의 모토였다. 그러나 실제로 겪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 혹시, 외계인이 정말 존재할까요?”

의사가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갈무리했지만 잠뜰은 그 찰나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보았다. 갑자기 조금 머쓱해졌다. 의사라고 해서 외계인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타인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는 제가 받은 괴상망측한 편지에 대해 반쯤은 장난이라 여겼지만, 또 반쯤은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기술력을 가지고 장난을 칠 사람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저는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해요, 너무 뜬금없었죠.”

“아니요. 새로운 취미나 관심사가 생긴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죠.”

이런 터무니 없는 관심사도 괜찮은 건가요? 라는 질문은 목구멍 뒤로 숨겼다. 사실 관심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몰두할 게 있으면 잠뜰 씨한테도 더 좋을 거예요. 관련 SF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건 어떠세요?”

“아, 그런가요….”

잠뜰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오로지 재미만을 생각한다면 나쁜 선택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도 다 인간의 상상력 속의 이야기 아닌가. 실제로 외계인이 있다면 그들은 인간들이 만든 그들의 초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공교롭게도 영화관 하나가 있었다. 그리 번화한 곳은 아니라 상가들도 죄다 셔터를 내렸는데, 빌딩 꼭대기 층에 있는 영화관만은 꿋꿋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휴식기에 집으로 돌아올 때면 잠뜰도 종종 들렀었다. 영화에 큰 관심은 없었으나 심심한 시간을 때우기에는 좋았다. 가끔은 영화를 보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연예인들처럼 길에서 흔히 알아보는 삶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사람들에게 노출된 직업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피로를 불러왔다. 불이 다 꺼지고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공간이라는 건 생각보다 안정감을 주었다.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현재 상영 중인 영화들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잠뜰은 천천히 목발을 짚어 움직이다가 포스터 하나 앞에서 멈추었다. 꼭 누가 그에게 이 영화를 보라며 점지해 준 것처럼 포스터에는 외계인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형태의 괴생명체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침공하는 듯했다. 잠뜰은 잠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이를 상상해 보았다. 외계인이 꼭 인간과 닮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아닐 확률이 높다. 지구에 사는 생명체들의 생김새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그러니 이 포스터 속의 외계인도 꽤나 설득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영화관 한 켠에 위치한 매표 기기에서 외계인 영화를 골라 예매했다. 다행히 금방 상영하는 시간표가 있었다. 팝콘을 하나 살까 했지만 뭘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상영관에 들어서니 이제 곧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하는데도 사람이 없었다. 아주 커다랗지만 텅 빈 상자 중앙에 앉으니 어쩐지 정말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잠뜰은 그럴 때면 제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을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밀어낼 수는 없었다. 밀어내려 애쓸수록 그 생각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깁스가 불편하게 앞 좌석에 부딪혔다. 아무렇게나 쓰러진 목발을 주울까 고민하다 그냥 몸을 세워 등받이에 기댔다. 곧 불빛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뻔했다. 삐쩍 마르고 얼굴은 역삼각형인 외계 생물체가 지구보다 훨씬 발전한 과학 기술을 가지고 찾아와 지구를 지배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스러진 인류가 다시 뭉쳐 일어나고 외계인을 물리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들 사이에 숨어들어 사는 외계인을 조명하며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잠뜰은 이 영화를 택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온 이를 이해하기에는 별로 소용이 없는 영화 같았다. 무엇보다 그는 별로 자신에게 공격적이지도 않았다. 지구가 어떤지는 물어봤으나……. 그게 꼭 지구를 침공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잠뜰은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편지를 다시 꺼냈다. 수현이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밝힌 이후로 어떤 말도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황했던 것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도 했다. 기실 외계인은 인간들에게 미지의 존재 아닌가. 그들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사고하고, 또 어떻게 말하느냐를 넘어서서 그들의 실존 여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여태 우주나 그 너머의 이야기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던 잠뜰로서는 더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너 진짜 외계인이야?’

잠뜰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직접 묻는 것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현이 정말 외계인이라는 가정하에, 그는 이미 지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구말이고 하긴 했으나 한글도 자유자재로 썼다. 게다가 편지를 정확히 잠뜰의 우편함에 보내기도 했고. 하지만 잠뜰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웬 이상한 문자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주장한다는 것밖에.

답은 1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잠뜰은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이대로 외계인과의 연락이 끊긴다고 해도 잠뜰에게 큰일이 나는 건 아니었다. 아마 훈련에서 아예 배제가 되었다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마침 TV에서는 우주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조건들이 겹쳐야 한다. 그렇기에 희박한 가능성인 것이다. 태양계 밖 어딘가 지구와 같이 골디락스 존이 존재하고, 그곳에 사는 생명체가 지구를 발견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우연이 필요할까? 잠뜰은 제가 평소와 달리 이 일에 대해 몹시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답이 온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은 지난 후였다.

‘엄밀히 따지면 네가 나한테 외계인이지’

음. 잠뜰이 골똘히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이방인이며 지구가 외계 행성일 테니까. 문득 낮에 본 영화가 떠올랐다. 그럼 그들도 인간을 그런 형태로 상상할까? 잠뜰은 그들 상상 속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풋 웃고 말았다. 역시 무지란 공포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외계인 말고, 빙판 위에서 밀려나 땅에 서게 된 일련의 시간 말이다.

더 이상의 생각을 멈추고 연필을 들었다. 하도 오랜만에 직접 글씨를 쓰는 탓에 어색했던 기분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한글은 어떻게 쓸 줄 알아?’

‘한글이 뭐야’

이번에는 기다렸는지 글자가 곧바로 떠올랐다. 한글을 쓰면서 한글이 뭔지도 모른다니. 그게 조금 웃겼다.

‘네가 지금 쓰는 글자’

‘아 이게 한글이구나 공부했어 너한테 물어보려고’

‘뭘 물어보고 싶은데?’

‘지구는 어때?’

결국 돌아오는 물음은 수현이 처음 보냈던 것과 같았다.

‘지구는 왜 궁금한 거야? 혹시 침공하려고?’

괜한 도발을 섞어서 쓰자마자 후회했다. 이랬다가 진짜 화나서 침공하면 어떡하지? 하필 바로바로 답을 하던 수현이 조용했다. 나 정말 큰일을 저질러 버린 건가? 잠뜰이 머리를 싸매고 당황할 무렵 다행히도 종이 위에 새로운 글자가 써졌다.

‘웃다가 늦었어.’

갑자기 맥이 빠졌다. 잠뜰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종이를 뒤집었다. 순간적으로는 대회에 나갈 때보다 더 높은 심박수를 자랑했을지도 모른다.

‘뭐가 웃긴데?’

‘내가 침공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왜? 우리보다 기술력도 좋아 보이는데.’

그간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되짚어보자면 수현이 지금 지구에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의 행성에 있을까? 아니면 영화에서나 보던 UFO? 어디가 되었든 아주 먼 거리라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 곳에서 정확히 잠뜰에게 이 종이를 보낸다는 것, 그리고 종이 위에 글자를 쓰며 우주 너머까지 통신할 수 있다는 것. 아마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멀뚱히 물음표를 띄우고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수현이 비교적 경쾌한 속도로 글을 썼다.

‘다시 소개할게. 나는 우리 행성의 공식적인 마지막 생존자야.’

매번 반듯반듯하게 전해오던 글자가 살짝 떨린 것도 같았다. 마법처럼 글자가 지워지고 다시 새로운 문장이 떠오른다.

‘우리 행성은 멸망했거든.’

세상은 생각보다 견고하고, 또 생각보다 자주 전복된다. 누군가 툭툭 친다고 해서 손쉽게 무너지지는 않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어찌할 도리 없이 뒤집히곤 한다. 잠뜰은 제가 없는 대회 영상을 하염없이 돌려보다가 문득 거대한 불행을 떠올린다. 갑자기 지구가 폐허가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알지도 못하는 모든 인류가 사라진 세상을 떠올린다. 그 위에 홀로 남은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수현은 그들의 브레이크 없는 발전 속도가 결국 그들의 행성을 파괴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 정착할 다른 마땅한 행성이 필요했고, 지구는 여러 후보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때 발생했다. 생존자들을 태운 거대한 우주 함선과 후보지들을 물색하러 간 선발 대원들의 우주선에 원인 불명의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마침 행성을 마지막으로 살피기 위해 개인 우주선을 타고 나와있던 수현만이 그런 문제들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는 연결이 끊긴 선발 대원들을 찾기 위해 온 우주를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그의 동료들이 지구에 왔을 가능성을 가지고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중이라고 했다.

“아, 앞으로 치고 나가는데요. 이 선수는 후반 레이스에 강점이 있는 선수죠.”

중계를 하는 해설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잠뜰도 잘 아는 선수가 뒤에서부터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유달리 체력이 좋고 센스 있게 앞지르는 법을 알아 기대를 많이 받는 선수였다.

“이번 대회에는 박잠뜰 선수가 지난 경기에서 입은 부상으로 나오지 못했어요. 많이 아쉽네요. 이 자리를 빌어 빠른 쾌유를 빕니다.”

그런데 세상이 뒤바뀐 건 잠뜰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죽거나 집을 잃거나 행성이 멸망하진 않았지만, 잠뜰은 제가 딛고 있던 땅의 지반이 마구 흔들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선배들은 종종 그런 충고를 하곤 했다. 너 자신과 선수로서의 너를 동일시하지 마라. 그건 너의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충동적으로 편지를 꺼냈다. 종이 뒷면에 적혀 있던 글을 지우고 잠뜰은 마구 글을 써 내려갔다.

‘넌 어떻게 견뎠어? 나는 내가 평생을 일궈온 걸 포기하게 생겼어. 지구가 멸망한 건 아니야. 그냥 나만의 문제야. 너한테는 별거 아닌 걸로 보일 수 있지만 나한텐 전부거든.’

주기적으로 상담하는 의사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불안이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일어날 용기를 가지기도 전에 겁부터 먹는다.

‘이건 내 세상이나 다름없어…….’

숨을 몰아쉬었다. 종이 위에 잔뜩 쏟아놓고 나니 왠지 스스로가 초라해졌다. 세상에 홀로 남아 우주선을 타고 돌아다니는 외계인에게 말하기에는 스스로가 너무나 나약해 보였다. 수현이 보기 전에 지우개를 들어 벅벅 지워내려는데, 앞면에 새로운 글자가 써지기 시작했다.

‘왜 포기하게 생겼는데?’

‘다쳐서 예전과 같이 수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어.’

‘그럼 예전처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거네.’

‘높지는 않지만.’

‘포기하고 싶어?’

‘아니. 내 세상이라니까.’

‘그럼 포기하지 마. 네 세상이잖아.’

잠뜰은 부상을 입은 이후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 메시지를 받았다. 누구는 전화를 하기도 했고, 또 누구는 장문의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얼굴도 모르는 외계인의 한 마디에 불안하게 떨리던 지반이 멈춘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잠뜰이 무엇을 포기하려고 하는지도 모르는데. 그가 세상의 전복을 겪고도 포기하지 않은 당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약 실패하면?’

‘실패는 없어. 그건 너의 새로운 세상인 거야.’

‘너는 왜 포기하지 않았는데?’

‘나의 동료들이 살아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으니까.’

종이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울렸다. 코치님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잠뜰이 천천히 화면을 켜고 알림을 눌렀다. 두 눈을 깜박였다. 슬슬 재활 훈련 일정을 잡자는 이야기였다. 화면을 톡톡 두드리다가 메시지 창을 눌렀다. 2주 뒤에 깁스 푸니까 그 후에 갈게요.

‘네가 꼭 지구에 왔으면 좋겠어.’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뜬금없는 말일 텐데 종이 너머의 외계인은 퍽 상냥한 답을 내어놓았다. 그럼 잠뜰은 또 생각한다. 외계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들이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다면, 그래서 정말 그의 동료들이 지구에 도착했다면, 인간들 사이에 감쪽같이 스며들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면. 그럼 수현도 이곳에 올 수 있지 않을까. 외계인 친구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동안 연락이 드물게 오갔다. 잠뜰은 마지막으로 병원에 다녀오느라 바빴고, 수현은 아마도 제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그에게 경과가 괜찮다고 했다. 아마 재활이 힘들겠지만, 성실히 임하기만 한다면 빙판에 충분히 설 수 있을 거라는 덕담도 덧붙인 채였다. 그동안 은근슬쩍 오던 코치 제안을 단번에 물리쳤다. 꼭 의사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 그가 재활 성공 확률이 낮다고 했어도 그는 재활에 임했을 것이었다. 잠뜰이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것은 수현이었다. 그에게만큼은 꼭 알리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기로 했어.’

하지만 그 연락에 답이 오지 않았다. 문득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우주라는 게 사실, 매우 위험한 공간이 아니던가. 실제로 그의 동료들도 우주선의 결함으로 인해 실종이 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수현에게도 같은 일이 생긴다고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닌 것이다. 다행히도 한 번 더 연락을 보낼까 하던 찰나 수현에게서 새로운 문장이 도착했다.

‘네가 네 세상을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우주선 문제로 바빴어. 연료가 급격히 줄었거든.’

‘큰일 난 건 아니지?’

‘일단은 아니야. 하지만 지구는 들르지 못하게 되었어. 방향을 틀 만큼의 연료가 없어.’

‘그럼… 계속 비행은 할 수 있는 거야?’

‘장담은 못 하지만 해봐야지.’

담담한 어조가 어떤 결심을 담고 있는지 잠뜰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선뜻 글을 쓰지 못하고 연필심을 책상에 두드렸다. 고운 흑연 입자가 부스러져 나왔다. 수현의 글이 다시 지워졌다.

‘중요한 건 이게 아냐. 나, 지구 시간으로 정확히 사흘 후 정오에 지구와 태양 사이를 지나칠 거야.’

잠뜰이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가 져 어두컴컴한 하늘에는 별 하나 떠있지 않았다. 길거리의 가로등 탓이었다. 만약 저 하늘을 수현이 지나간다면, 두 눈으로 볼 수 있을까?

‘곧 태양계 권역으로 들어가면 태양풍의 영향으로 더 이상 통신이 불가능해질 거야. 우주선이랑 다르게 얘는 내구도가 그리 좋지 않거든.’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전등에 반사된 빛이 반짝거리는 은빛 종이에 그를 안 이래 처음으로 잠뜰의 이름이 적혀 내려갔다.

‘그러니까, 잠뜰아, 이게 마지막이야.’

우주 너머에도 생명체가 산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아마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라왔을 그들도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자그마한 희망 하나를 좇아 달려간다는 걸 알까? 잠뜰이 차마 떨리는 손으로 답을 쓰기도 전에 그에게서 마지막 인사가 도착했다. 그리고 종이에서 빛이 사라졌다. 직감적으로 더 이상 아무런 문장이 전달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네 세상을 꼭 구하길 바라. 나도 내 세상을 구하러 갈게.’

재활을 하러 가는 첫날이었다. 잠뜰은 이제 목발을 짚지 않고도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여전히 그가 싫어하는 더위가 온 공기를 가득 채웠다. 머리 꼭대기에 있는 태양은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을 가장 작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가끔 희망을 바라보는 건 태양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힘겨운 일이다. 내 눈이 멀 각오를 하고, 내 몸이 닳을 각오를 하고. 강렬한 빛이 나에게서 시야를 빼앗아 가고, 강렬한 열기가 나에게서 수분을 빼앗아 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하지만 그러고도 그곳으로 한 발짝 내디딜 용기가 있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림자 바깥으로 발끝조차 내밀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런데 말이야. 정작 눈을 떠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야.

문구점에서 몇천 원 주고 산 셀로판지를 잘라 두껍게 겹쳤다. 그걸 태양을 향해 높게 치켜들었다. 여전히 눈은 부시지만 똑바로 바라볼 수는 있다. 셀로판지 너머로 둥그런 태양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잠뜰에게는 이렇다 할 망원경도 없어 그의 희망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다만 보이는 동그란 형체 앞을 또 다른 희망을 품은 우주 밖의 친구가 지나가리라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그보다 확실한 대답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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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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