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T

[솔부]Finder.2

“발견당한 기분이야.”


“만보기가 누구야?”

한솔은 굉장히 진지했다. 승관은 메밀소바를 입에 넣으려다 만 흉한 자세로 그를 약 5초쯤 쳐다보다가, 젓가락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어. 경원이 말하는건데. 맨날 만보기 앱 자랑해서…….

그 만보기 앱은 달성량을 채우면 귀여운 도트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게임형 앱이었는데, 동기인 경원은 매일 캠퍼스를 1000걸음씩 걸어서 그 도트 캐릭터를 예뻐해주는 짓을 낙으로 삼는 애다. 그는 무려 그 앱을 개강총회에서 승관에게 자랑했다. 엄청 귀엽지 않냐. 사막여우를 닮은 뭔지 모를 생물은 확실히 귀여운 편이라 승관과 동기들은 그에게 안어울리게 깜찍한 취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캐릭터의 밑에는 만보기라는 세글자가 써있었고, 다른 동기가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경원은 이게 이름이라고 했다. 얘 이름. 

만보기 앱에서 키우는 캐릭터의 이름을 만보기라고 짓다니. 또라이라고 생각되어 경원의 별명은 만보기 애비가 되었다. 만보기 애비! 오늘 만보기 밥 줬냐? 그럼 경원은 깜박했다는듯이 호들갑을 떨며 앱에 접속하고는 한다. 번호를 만보기 애비라고 저장하기에는 너무 기니까 승관은 그의 번호를 만보기라고 저장해뒀다. 한솔은 그게 누구냐고 물어본거니까, 그게, 아마 만보기 앱 속 사막여우에 대해 물어본 것 같지는 않았다. 떨떠름한 승관의 얼굴에 한솔은 셰익스피어 감탄사를 냈다. 아.

“궁금하다는게 그거야?”

원래는 그 만보기 아버지를 포함한 다른 동기들이랑 밥을 먹고 있었어야 했는데. 승관은 뜬금없이 학교에서 멀지않은 메밀소바 집에 있다. 전적으로 갑자기 등장한 한솔 버논 최가 궁금한게 있다는 말로 승관을 빼왔기 때문이다. 잠깐 시간 괜찮아? 동기들은 승관만큼이나 놀라서 커다란 토끼눈을 했고, 캠퍼스에서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법이 없는 디카프리오의 갑작스러운 불러냄을 거절하자니 승관은 되게 한가했다. 소바집으로 오면서도 머릿속에는 궁금하다는게 대체 뭘지 생각하느라 눈이 핑핑 돌았는데.

2학기 개강으로부터 단 이틀이 지나있다. 둘의 마지막 만남은 3개월 전의 MT 해산현장이었다. 승관은 MT 2일차 당시 있었던 옥상에서의 대화가 경원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쫑났음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정확히 ‘만보기’라고 써져있는 통화화면을 한솔에게서 보여줬던 기억도. 아니. 그치만 그건 말했듯이 세 달 전 얘기인데. 그걸 갑자기 지금 물어본다고?

“궁금했는데 연락할 수단이 없어서.”

한솔은 와사비를 푼 장국에 면을 담가서는 입이 가득차게 빨아들였다. 연락할 수단. 승관은 그 옥상에서 연락처라도 교환할걸 그랬다고 후회했던 자신을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개강해서 내가 보이자마자 끌고나올 정도로 궁금했단 말이야? 그보다 만보기 아버지라는 경원의 별명은 동기 사이에서는 모르는 애가 얼마 없다. 고릴창 수준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고릴창이라는 창식선배의 별명도 난생 처음 들은듯이 행동했던 한솔이 떠올랐다. 승관은 아까 내려놨던 면을 집어 장국에 도로 넣었다. 너 진짜 친구 없나보구나.

물어볼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만보기라는 별명이 누구것인지 알아내는데에 두 달이나 걸릴 이유가 없다. 하다못해 승관의 번호를 물어볼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승관은 마당발이라 아는 애들은 많으니 건너건너 받을 수도 있었을텐데. 한솔은 좀 모자랐는지 와사비를 장국에 더 덜어넣었다. 나 친구 없는건 맞아. 말투가 퍽 진지해서 어이가 없다. 입에 넣은 면을 착실히 씹어 넘긴 승관이 말을 고민하다가 툭 던졌다. 소개라도 시켜줘?

한솔에게 친구가 없는게 사실이더라도, 그게 딱히 주변의 탓은 아니다. 친해지고 싶은 애들은 한 트럭씩 대기하고 있는데 그들을 쿨하게 스루하는건 디카프리오의 쪽이니까. 그렇다고 소개까지 해줄건 뭔가 싶지만, 4년 내내 저렇게 고독을 유지하다가는 실제로 존재하는 아치 애너미들에게 언젠가 불링을 당할것만 같아서. 괜한 지레짐작이 아니라 이건 1학년들 전체에게 퍼져있는 실제의 불안감이었다. 친구라도 있어야 좀 덜할텐데, 하는.

물론 친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곧이곧대로 친해지라는 말은 아니다. 가까이 붙어서 조각상 같은 외모를 자기들 악세서리처럼 쓰려는 놈들 말고, 친해져도 될만한 인성 괜찮은 애들은 승관이 추려줄 수 있었다. 보이는 소수자성에 의해 승관은 쓰레기들을 거르는 작업에 도가 터있었고, 1학기가 지났으니 이미 분리수거는 끝난 다음이다. 경원이도 괜찮은 놈이고. 아니면 현영이네 무리를 소개 시켜줄까. 펄쩍 뛰며 쌍수를 들겠지만 애를 이용할만한 애들은 아니니까. 아니면-

“네가 해주면 안돼?”

고민하느라 의미없이 장국을 젓던 젓가락이 멈춘다. 한솔은 어느새 마지막 면 뭉치를 그릇에 담그고 있었다. 후루룩. 상상해 본 적은 없었으나 디카프리오는 상당한 먹짱인지 음식을 꽤나 복스럽게 먹었다. 메밀소바를 우물대며 절 쳐다보는 눈의 앞에서 일시정지 상태였던 승관은 뒤늦게 허, 하고 숨을 터뜨렸다. 내가 해주면 안되냐고?

비싸서 네개 세트 하나만 시킨 새우튀김에도 젓가락이 간다. 같은 이능력자잖아.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승관은 습관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파티션이 있어서 다른 자리까지 들리지는 않았겠지만. 찝찝한 얼굴로 제 소바를 들었던 승관이 몇 초 안되어 납득했다. 같은 이능력자끼리, 하고 먼저 말했던건 자신이었다는 기억이 나서였다. 그리고 그다지 나쁜 제안도 아니었고. 친구라는게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닌데다, 자신과 친해지면 자연스레 한솔에게도 캠퍼스 내에 입지가 생길터다. 건너건너 아는 사람이 많아질테니. 계산적이게 뱉은건 아니었겠지만 나름 훌륭한 판단이었다.

“그럼 휴대폰 줘.”

추가로 물어보는 것 없이 흔쾌히 나온 말에 한솔이 재빨리 제 휴대폰을 건넸다. 기다렸다는듯이 주네. 픽 웃어버린 승관이 제 번호를 입력해 전화를 걸었다가 끊는다. 궁금한거 있으면 카톡하고. 학과 일정 같은거 다 꿰고 있으니까. 웬만한 동기나 선배들하고는 말을 트고 있으니 친해지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하라는 목소리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좀 믿음직스러웠다. 인맥과 사회생활은 부승관이 자랑스러워하는 제 장점 중 하나라서 콧대가 높아진다. 

한솔은 별로 감탄은 하지 않고 튀김을 바삭대며 먹었다. 그럴게. 예의상 하는 말인걸 숨길 생각도 없는 말투였으나 승관은 관심을 껐다. 아직 그런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기에는 친분이 두텁지 않아서.

그랬는데. 아마 그 때 그 무신경하고 대충 뱉은 ‘그럴게’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썼어야했다. 그러지 않은 댓가로 부승관은 목 끝까지 올라온 답답함 때문에 환이라도 삼켜야할 판이었다. 난 됐어.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그렇게 한마디를 한 다비드상이 머슥하게 물러가는 마이크를 무시하고 꼬깔콘을 집어먹는다. 저 화상이 진짜.

메밀소바집에서의 번호교환 이후 한 달. 장소는 노래주점. 테이블 세개를 차지한 과모임은 한창 무르익고 있다. 다들 신나서 노래 한곡조씩 뽑고 맥주를 들이마시고 있는데, 평소보다 시끄럽고 사람 많은 이유의 주인공씨는 야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건실하게 앞을 보는 중이었다. 이런 장소, 이런 분위기에서 취기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공기에 휩쓸리지도 않고 목석마냥. 승관은 참지 못하고 쇼파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뺏어들듯 가져왔다. 와, 명창 나온다! 여름날의 샤인머스켓마냥 충실하게 살이 오른 분위기 속에서 경찰대 임창정이 분노를 담아 번호를 꾹꾹 눌렀다. 시작된 전주에 모두가 환호성을 질러도 최한솔은 멀뚱히 앉아있기만 했다. 답답해서 아주 가슴이라도 쳐대고싶다.

좀 섞이기라도 해라. 그렇게 타박하고 싶었으나 지나친 오지랖이라는건 천하의 부승관도 인정할만 했다. 그는 대신해서 답답한 속을 3단 고음으로 해소했다. I'm in my dreeeeaaaaam. 같은 세대에 한국에 있었다면 모를 수도 없는 노래의 클라이막스를 핏대를 세우며 소화하는데 따라하는 입모양도 없었다. 한솔 버논 최의 전단지에 새로운 이름이 붙는다. 벽창호.

답답해하고 싶어서 한솔을 이런 자리에 끌고온건 아니다. 이건 근 한 달간 승관이 혼자 하고있는 야심찬 프로젝트의 일부분이었다. 디카프리오한테 친구 만들어주기라는, 아주 중요하고 막대한 책임감이 따르는 프로젝트. 기획 부승관, 연출 부승관, 시나리오 부승관, 출연 부승관과 디카프리오. 출연에 대해 따로 양해를 구하거나 개런티 회의를 하지는 않았다. 최한솔 좋으라고 하는거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냥 오지랖일 뿐이니까.

친구 없는건 맞다는 말을 듣고, 저도 그게 사실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막상 뚜껑을 까보니 상황이 더 심각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좀 과장해서, 한솔이 경찰대 학생들 중 말을 네마디 이상 나눠본 사람은 딱 다섯명이었다. 그 중에 하나는 승관이고, 나머지 한 명은 고릴창이다. 그리고 남은 세 명은 전공수업 때 함께 조별과제를 한 애들이었다. 그 애들은 심지어 이름도 가물거려했다. 한 명은 김씨였던것 같아.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승관이 느낀건 분노보다 충격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그런걸수도 있고.

승관도 굳이 애들이랑 말섞고 다니지 않아도 대학생활이 가능하다는걸 모르지는 않았다. 강의 출석하고 수업 듣고 과제 내고 교수님 눈 밖에만 나지 않으면 그걸로 땡일 수도 있다는건 대학교와 의무교육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공부하러 들어온거지 놀려고 들어온건 아니니까 사고만 안치면 어떻게 지내던지 남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승관은 이를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그래도 친구 하나 없이 이 험난한 경찰대 생활을 어떻게 해쳐나가려고. 얼굴도 화려하고 딱히 단점이라고는 없는 애가.

이젠 네가 있지 않냐는 카톡에서 승관이 읽은 뜻은 이랬다. 이제 네가 애들 소개 시켜줄거니까 괜찮은거 아니야? 그리고 멋대로 해석한 그 의미에 승관은 깊은 각오를 다졌던 것이다. 그래. 이제는 내가 있으니까. 옥상에서 있었던 대화는 선배의 꼰대질 때문이었다지만, 2학기가 되자마자 직접 말을 걸었던건 한솔이다. 저도 1학기를 자발적 아싸 힙스터 디카프리오로 지내보니 여러 애로사항이 있었던거겠지. 그렇다면 기꺼이 도와주마. 왜냐하면- 한솔은 딱히 나쁜 사람도 아니니까? 더해서, 옥상에 혼자 남겨두고 왔던 날의 찝찝함도 가시지 않았고.

그러나 한솔이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 생각해 다졌던 각오가 무색하게 디카프리오는 영 협조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점심팟에 애를 끼워보려고 했다. 점심 같이 먹을거냐고 물으니까 그러겠다고 하길래, 다른 애들한테도 말하고 학생식당 앞에서 만났더니 한솔은 대놓고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점심팟 동기들은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하나 둘 싹싹하게 인사하는데, 한솔은 어, 안녕, 같은 답을 하고는 멀대 같은 얼굴과 멀대 같은 덩치로 무리를 따라왔다.

동기들은 승관하고는 어떻게 말을 텄냐느니 가까이서보니 더 미남이라느니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반응이 하나같이 시원치가 않았다. 이때만 해도 승관은 갑작스러운 다인원 커뮤니케이션에 한솔이 긴장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특별히 면박주지 않고 대답도 대화도 대부분 자신이 했다. 그정도 커버야 승관에게는 누워서 아.아 마시기 같은 일이었다. 애들을 먼저 보내고 둘만 일부러 남아서는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따로 조언까지 해줬다. 다 괜찮은 애들이니까. 한솔은 뭐랬더라? 그렇더라, 라고 했나.

그 대답은 인사치레였다. 승관은 진실을 다음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오늘도 점심 같이 먹겠냐는 카톡에 어제 먹었던 사람들도 먹는거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답하니 한 3분 정도 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점심을 이미 먹어서 오늘은 안되겠다는 문자열을 보내온 것이다. 승관은 그걸 읽자마자 눈썹 한쪽에 각을 세웠다.

아니, 이미 먹은거면 처음에 물어봤을때 그렇게 말하면 되지. 굳이 어제 먹었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할건 뭐람. 누가봐도 걔들하고 먹는거면 안먹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3분이나 고민해놓고 쳐서 보낸게 이미 먹었다는 말이라니 누구 엿을 먹이나 싶은 수준이다. 

웬만하면 그래 자리가 띠꺼웠구나 싶어 알겠다는 답만 했을텐데. 승관이 생각하기에 어제의 점심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내 친구들이 어디가 어때서 싶은 마음이 있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승관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대신 본관의 4층까지 올라가 창문을 열었다. 턱을 괴고 캠퍼스를 한 번 훑는것 만으로 원하는 얼굴은 찾을 수 있다. 부승관의 초능력 레이더망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잘생긴 디카프리오가 생활관 앞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뜯고 있었다.

승관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걸었다. 뜯다만 샌드위치를 두고 바람막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한솔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태평한 목소리에 창문에 턱을 괸 승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미 먹기는 개뿔. 다 보이거든?

한솔은 주변을 둘러보는 깜찍한 짓을 했다. 본관이라는 말에 본관이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기까지 한다. 그래봤자 일반인의 시력으로 생활관에서 본관을 보는건 불가능했다. 나는 너 안보이는데. 당연한 말을 하길래 나는 보인다고 답해준 승관은 참치샐러드 샌드위치는 맛있냐는 확인사살도 해줬다. 자기가 들고있는 샌드위치에 카메라가 달렸는지 심각하게 보는 얼굴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카톡 보고 바로 찾아낸거야? 그리고는 기껏 그런 말이나 내놓아서, 승관은 거칠것 없이 본론을 말했었다. 애들이랑 점심 먹는거 싫어?

최한솔은 밥먹을 때 시끌벅적한게 적응이 안돼서 그렇다는 답을 내놓았다. 다섯명이나 됐잖아. 솔직담백한 말투를 해서는, 숨겨진 먹짱답게 야무지게 샌드위치를 베어물길래 승관은 그쯤하고 창문에서 떨어졌다. 그러고보면 처음 카톡할때 애들이랑 먹을거라는 말을 안하기는 했으니까. 당황스럽고 불쾌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포기도 빨랐다. 알았어. 맛있게 먹구. 응. 그러고 통화를 끊어서는, 좀 천천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명씩 해야겠네. 그 때까지는 정말 안일했다는 얘기다.

“2차 가자고 2차!”

“아 당연히 항정살이지! 얘 진짜 개소리하네? 야 부! 네가 설교 좀 해라!”

승관은 부름을 무시하고 자기는 잠깐 나갔다 들어온다는 말을 했다. 엥? 만보기 애비는 오늘 만보기에게 밥은 줬는지 모를 풀린 낯짝으로 부승관 없이 2차 인원을 어떻게 모으냐고 황당해했다. 모임의 꽃 하면 제주도 비욘세인데! 별명만 대여섯개 되는 인싸중의 인싸가 빠지는게 아니라 잠깐 나갔다 오는거라고 취한 사람을 쏘아붙였다. 뭔 항정살이야 그리고. 가난한 대학생들의 빛은 누가 뭐래도 삼겹살이지.

쏠. 간단한 호칭에 휴대폰으로 오목을 두던 한솔이 고개를 들었다. 턱짓으로 가자는 제스처를 하자 경원이 소리를 지른다. 우리 한솔이가 네 펫이냐?! 동네사람들!!

별로 애완동물 취급을 한건 아니었다. 승관의 입장에서 그 건방진 턱짓은 ‘오늘 네 태도 마음에 안들었음’의 요약판이었을 뿐. 그렇게 겉돌아놓고 우리라는 대명사는 잘만 붙은 디카프리오가 얌전히 제주도 비욘세의 뒤를 따랐다. 아 글쎄 저희 1학년 아이유씨가 다비드상이랑 바람이 났지 뭐에요. 저희는 버려진거죠. 뒤에서 그런말을 하며 훌쩍이는 동기들을 무시하고 지상으로 가는 계단을 밟자 귀가 멍했다. 시끄러움의 6할 정도는 제가 담당했으니 새삼스레 귀를 두드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별 목적지도 없이 방향을 꺾었는데 디카프리오는 잘만 따라왔다. 이것저것 잔소리를 쏟아낼 요량으로 끌고나왔건만, 취해서 좀 알딸딸한 이유로 발 끝에 힘을 주느라 말은 뒷전이었다. 주점 옆의 골목까지 들어와서야 승관이 입을 떼었다. -오늘 불편했어?

3단 고음을 지르고나서 여기까지 오기까지 생각한 결과였다. 바로 잔소리부터 퍼부을 수도 있었으나, 어쨌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자리는 한솔이 자원해서 온게 아니다. 반억지로 끌려온 애가 모임에서 목석처럼 있었다고 제가 뭐라뭐라 잔소리를 해도 되는가? 물론 대답은 yes였으나 시작을 부드럽게 한다고 우박을 맞는건 아니었다. 근 한 달간의 경험으로 승관은 인내심이 닳아 없어져 플라스틱 자갈마냥 매끈해졌지만 아직 그 정도 사회성은 남아있다. 아마도.

분명 한 명씩 해야겠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 명씩 했어도 다비드상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고쳐지지 않았다. 얘는 미선이. 얘는 한별이. 이 분은 지후선배. 승관이 생각하기로 인성도 인상도 좋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골라다가 우연인것처럼 소개해줘도 한솔은 고개만 꾸벅 숙였을 뿐이다. 온갖 타입의 온갖 인간을 하나씩 갖다바쳐도 디카프리오는 한 번의 만남 이후 그 사람들에 대해 더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먼저 말하기 쑥스럽나 싶어서 점심을 둘이서만 먹으며 떠봐도 첫마디는 누구? 였다. 설명을 덧붙여줘야 아, 싶어하는 얼굴이 딱 거북이짝이었다. 아니, 친구 사귀고싶은거 아니었냐고. 목끝까지 그 말이 들어차서 홧병이 쌓였다. 그 결과가 이 과모임이었다. 갖다 바치는건 시간이 걸리니 그냥 여기서 네가 골라잡아라, 그런 심정으로.

그랬는데, 몇 번 봤다고 얘기를 거는 사람들하고는 대충 인사만 하고, 쇼파에 엉덩이를 한 번 붙이더니 일어나질 않는걸 대체 뭐라고 생각해야할지. 그나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애들하고는 어느정도 말문을 튼 것 같았지만 과모임은 교회캠프가 아니었다. 다비드상이 온다길래 얼굴 좀 구경하자고 출석한 사람들도 몇 마디 걸어보다가 그냥 친한사람들이랑 놀려고 떠났다. 옆에서 다 지켜 본 승관은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이겨내느라 진이 다 빠진 참이었다. 이 밤고구마 보다도 답답한 남자를 대체 어떻게 조명 밑으로 끌고 들어와야하는지.

돌고돌아 승관의 앞에 선 한솔은 멀뚱한 얼굴을 해서는 눈을 위로 굴렸다. 아니.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승관은 그게 아까 제가 물은 ‘오늘 불편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걸 알아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10초 정도는 멈춰 있었다. 아니라고?

“재밌었어. 나 이런데 오는거 처음이거든.”

너 노래 잘부르더라. 평탄하고 평온하고 태평한 목소리가 플라스틱 자갈같은 인내심 위를 미끄러진다. 다행히 깨지는 않았다는 얘기였다. 승관은 한솔이 말하는 ‘이런데’의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파악하느라 잠시 시간이 걸렸다. 과모임? 아니면 노래주점? 아니면 아주 극단적으로 이런 술판 자체?

“별로… 재미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물도 없이 고구마를 다섯개는 삼킨것 같은 속은 그렇다치고, 승관은 아직도 대화로 뭔가를 풀어볼 생각을 했다. 불편했냐고 물었더니 자리가 재밌었다는 말을 들을줄은 상상도 못했다. 거짓말 같은걸 낼름 뱉는 처세술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애라서 그랬다. 한솔은 그랬나, 하고 답했다. 그렇게 보였을줄 몰랐다는 듯이.

“취하지도 않고, 노래도 안부르고, 그렇다고 누구 하나 잡아서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진짜 재밌어한거였다고? 황당함이 극에 다를 지경인데 한솔은 좀 머슥하게 뺨을 긁었다. 나 원래 술 마셔도 안취해. 그냥 쓰고 비싸기만한 물이라서 입에 잘 안댄다는 말에 승관이 입을 열었다 닫는다. 아. 그렇구나. 능력 때문에.

태어나서 감기 한 번 걸려본적이 없는데 알코올 같은게 S급의 리커버리 능력자를 고주망태로 만들 수 있을리가 없지. 저번 MT 이후로는 얘가 이능력자라는걸 깨달을만한 일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다. 한솔은 야잠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그래서 이런곳은 잘 안온다고 했다. 다들 취했는데 나만 멀쩡한게 좀 그래서. 1학기 개강총회때도 선배 몇 명이 안먹은거 아니냐면서 계속 먹이는 바람에 술이 싫어지기도 했고.

그래서 이런 자리는 대부분 피하느라 구경할 수 있었던 것도 처음이라는데, 얘기를 듣고있던 승관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젠장. 잔소리하려고 끌고나온건데 사실은 내 잘못이었다는 전개잖아. 미리 알아채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느정도 수준의 능력인지도 다 봤으면서.

사과했더니 한솔이 미안해 할 일은 아닌데, 하면서 눈썹을 구기며 웃었다. 용서 받았다고 생각되어 제주도 비욘세의 고개가 원위치 됐다. 불러낼 때 좀 말하지. 곰탱이처럼 여길 그냥 따라왔어? 시간 아깝게.

“네가 간다고 해서?”

“나야 이런데 안빠지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온거지! 취하지도 않아서 이런데 재미 없다고 말했으면 안끌고왔을거라고.”

“재미 없지 않았는데. 이러고 노는거구나 싶어서.”

좋은 경험이었다는 말에 사회현장 견학왔냐고 쏘아붙인 승관이 한숨을 쉰다. 텄다. 장황해질 예정이었던 잔소리는 다시 한국인 정서 은행에 적립이었다. 구경이 재밌었다는데 구라치지 말라고 몰아붙일 수도 없는거고. 심지어 별로 구라 같지도 않다. 한 달 동안의 경험을 반추해볼때 디카프리오의 입에서 나온 말은 99% 진심이었다. 머리를 털었더니 술 냄새가 난다.

“그래 뭐, 그럼 오늘은 여기서 끝이네.”

택시 타고 갈거냐는 말에 한솔이 눈썹을 휜다. 택시?

“2차 가는거 아니야?”

멀거니 나온 말에 뒤늦게 두통이 들었다. 아니, 이건 취기 탓이 아니지. 표정을 기묘하게 튼 승관이 설마 싶어 2차를 갈거냐고 물으니 한솔이 민폐가 아니면 따라갈 예정이었다는 대답을 했다. 허. 민폐가 아니면 따라와?

가는 애들 중에 네가 2차를 따라갈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건데. 황당한 목소리에 그럼 가는게 민폐냐는 질문이 순수했다. 그런거면 그냥 집에 갈게. 농담도 아닌 것 같고, 돌려말하기도 아닌 것 같고. 구경은 아까걸로 충분하지 않았녜서 디카프리오는 다시 어깨를 으쓱인다. 2차는 어떤지도 궁금해서. 2차도 가본적 없거든.

이해하지 못할 호기심에 멍을 때리던 승관이 불현듯 지나간 생각을 붙들고는 밖으로 내보냈다. -혹시 친해지고 싶은 사람 생겼어?

자신이 뱉은 말이 귀로 들어오자 승관은 갑자기 아까 적립한 잔소리가 환한 빛과 함께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설마? 혹시?? 얌전히 구경만 하더니 드디어 생겼나??

그래, 그런게 아니면 이 대리석 조각이 굳이 2차까지 또 따라온다는 말을 하겠어.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에 표정이 환해졌는데, 안타깝게도 한솔은 눈만 몇 번 깜박였다. 프로젝트 담당자가 다시 절망에 빠지기에는 충분한 반응이었다. 심지어 비협조적인 출연자는 눈치없이 쐐기까지 박았다. 음. 딱히 그런건 아닌데.

“딱히 그런건- 아니, 그럼 왜 2차까지 따라가고 싶어 하는건데??”

“한가해서?”

할 과제도 없냐고 쏘아붙였더니 기한 남았다고 하고, 가면 너도 N빵해야한다고 하니 자기도 고기 먹을거라는 말이나 한다. 둘러대는거야? 진짜 친해지고 싶은 사람 있어서 따라가는거 아니냐는 추궁에도 다비드상은 눈썹이나 휜다. 꼭 그런게 있어야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냥저냥 다 좋은 애들인것 같기는 했는데. 그 태평한 말투에 매끈한 자갈 같은 인내심이 콱하고 부서진다.

“야! 너 진짜 친구 사귀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해?!”

빽 높아진 목소리가 공기를 진동 시킨다. 골목 밖을 지나가던 사람이 놀라서 한 번 쳐다보고 갔을 정도의 성량이었다. 깜짝이야. 바로 앞에 서있어서 데미지가 두 배인 한솔이 덜걱댄 심장께를 손으로 감싼다. 놀랐든 말든 안중 밖이었다. 어? 있기는 하냐고! 대답해 화상아!!

종아리를 걷어찬건 100% 술기운에 의한 행동이었다. 그래봤자 아프지도 않은 이능력자는 승관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입만 여닫는다. 친구 사귀고 싶은 마음? 시간이 다소 걸리는 처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승관이 마저 말을 쏟아냈다. 뭐 때문에 이런데까지 끌고온건데! 좀 찾으려는 성의라도 보여라! 친해지고 싶은 사람도 없으면 2차는 뭐하러 따라와!!

“친구 사귀라고 데리고 온거였어?”

전혀 예상도 못했다는 목소리가 열받아서 승관이 머리를 쥐어 뜯었다. 이 고구마답답아. 진짜 환장하겠다. 그럼 내가 뭐하러 근 한달간 네 앞에 연도 없는 사람들을 데려갔겠냐는 말에 한솔이 눈을 굴린다. 그냥 우연인줄 알았는데. 넌 항상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니까 그냥.

세상 너같이 눈치없고 분위기 못읽는 애는 처음 본다며 날뛰는 승관을 앞에 둔 한솔이 뒤늦게 퍼즐을 맞춘다. 둘만 있는건 별로여서 자꾸 친구들을 데려오나 싶었던 적은 있었는데. 설마 소개 시켜주려고 했던 일일줄이야.

“과모임은 왜 끌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딱히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냥 오라길래 왔을 뿐이다. 내가 하라고 하면 바다에 입수도 하겠다고 불을 뿜길래 그정도야 아마 할거라는 말은 삼켰다. 죽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과모임 있으니까 한 번 나오라고 한걸 따랐을 뿐인데, 선배 하나가 MT 필참이니 오라고 했을 때도 그냥 갔던 인물인 최한솔은 눈치 못채서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달 동안 꽤 정성들여 사람들을 소개 시켜줬던것 같은데. 사람들을 데려온게 승관이라는 것만 기억나고 그가 누구를 데려왔었는지는 흐릿했다. 그다지 친구 사귈 마음이 없었으니까.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있는줄 몰랐어.”

눈치채지 못한 단순한 이유를 그대로 읊으니 이제는 제 풀에 지친 참이었던 승관이 한솔을 노려봤다. 그렇게까지라니. 나는 그냥 친구만 해주고 끝인줄 알았어서.

인정하자. 오지랖이 넓었던건 맞다. 훅, 하고 숨을 내보낸 승관이 자신을 진정시켰다. 친구 좀 사귀라고 소개 시켜주는거라는 말을 더 일찍하지 않은 제 잘못도 있었다. 진작 말했으면 되는걸 괜히 참고 있다가. 

“너는 관심 없겠지만, 너 싫어하는 열등감 덩어리들이 주변에 아주 발에 채이도록 있단 말이야. 신경 끄고 사는거 쿨하고 멋진데 그래도 네 편 해주고 오해 정정해줄 애들은 몇 명 있어야지!”

진정할 셈이었는데 끝에 가서는 또 언성이 높아졌다. 역시 술기운이기는 했다. 정치질은 쪽수가 기본인거 모르냐느니, 한솔은 거북이마냥 눈을 꿈뻑대며 긴 문장을 소화하다가, 드디어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아. 뭔가 했는데. 날 걱정해서 그랬던거구나.

굳이 친구를 소개시켜준 이유가 생각이 안나서 어정쩡했었는데. 다비드상이 드디어 이가 드러나도록 웃는다. 얘는 웃을 때 입이 하트모양이 되네. 별게 다 매력덩어리라고 생각하려니 사과가 귀에 닿았다. 그런걸 생각해줄줄은 몰랐어. 그냥 평생 이렇게 살았어서 별 생각 없었는데.

“미련곰탱이 아냐?? 무슨 평생을 이렇게 살아!”

“어디서든 어울리기가 좀 힘들었어서.”

아는 사람들 많이 만들면 좀 나아지려나. 농담인지 아닌지도 모를 말에 승관이 어이가 없다는듯 숨을 뱉는다. 반응이 눈에 들어오기는 한건지 성큼 거리를 좁힌 디카프리오가 도와주는거냐는 말을 냈다. 너처럼 아는 사람 많아지게. 진짜 그랬던적이 없어서 좀 서툴지도 모르는데.

“이미 도와주고 있었다고! 네가 눈치를-”

“너 되게 착하다.”

별로 잘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도와주고. 너무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아서 말허리를 자른 짜증도 들어가버린 승관이 목을 움츠렸다. 아니, 이렇게 가까이서 말할 필요는 있나. 그보다 문장 자체도 어이가 없다. 착하기는 개뿔. 네가 잘생긴 덕이라고 쏘아붙이려던 승관이 좀 더 진짜에 가까운 이유를 간단히 포장해 뱉었다. -같은 이능력자잖아.

외로웠을걸 안다. 아니라면 승관에게 먼저 찾아와 말을 걸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이쯤은 도와줄 수 있었다. 오지랖이라고해도.

하트가 더 커졌다.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조각되는 다비드상 같은건 없으니까. 대리석이 아니라 그제야 좀 사람으로 보이는 기분이었다. 같은 이능력자니까. 들이밀어졌던 얼굴이 한발짝 물러난다.

“발견당한 기분이야.”

드디어 출연자에게도 촬영협조를 얻어낸 감독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데, 또 대본에 없는 말이다. 아까 쥐어뜯느라 망가진 머리를 정리하려던 승관은 대답 대신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발견당한 기분?

“내내 떠 있는것 같았거든.”

평생. 그런데 네가.

“잘 보이는 능력이라서 그런걸까?”

별은 못본다고 했었지만. 여전히 커다란 하트를 얼굴에 새기고, 유쾌한 말투를 해서. 그럼 이제는 의도를 알았으니까, 자기도 노력해보겠다는 말이 뜬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전문가 같으니까 보고 배우겠다는 말에 한솔을 지나치게 오래 쳐다보던 승관이 어렵게 시선을 돌렸다. 미쳤어? 자전거 겨우 타는 애가 비행기 조종하는거 봐서 뭐하게.

 괜히 노력한다고 어색해지지나 말라는 조언에 한솔이 말 잘듣는 학생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이 말걸면 단답으로 끝내지 말고. 상대가 대화 이을 수 있게 질문 같은것도 좀 하고. 그렇다고 억지로 술자리 같은곳에 나올 필요는 없고, 거를만한 애들도 있으니까 말건다고 다 친해지면 안된다는 잔소리에 한솔이 휴대폰을 켰다. 메모 좀 하게 다시 말해봐. 농담이 아닌것 같아서 저도 진지하게 도로 읊어주려는데, 건물 쪽이 소란스럽다. 한솔의 뒤로 고개를 뺐더니 익숙한 얼굴들이 우루루 나오고 있었다. 승관과 눈이 마주친 동기가 어! 하고 탄성을 낸다. 아 돌아간줄 알았네! 부승관 여기서 뭐하냐?

“2차 가?”

“어어. 갈비 뜯으러 간다. 야 만보기 애비! 도망 못가게 비욘세 좀 잡아라!”

안잡으면 다비드상에 눈이 멀어서 우리를 버릴거라느니, 잡으라고 했다고 잽싸게 튀어나온 경원에게 제압당한 승관이 비명을 질렀다. 아 뭐하냐고 진짜! 원래 갈거였거든? 간다니까!? 있는대로 소리를 질러서야 연행하듯 손목을 외투로 묶은 경원이 경례를 해보였다. 잡았습니다 서장님. 어 그래그래. 우리 하경사가 아주 어? 행동이 굉장히 재빨라요. 가자 얘들아.

다 술에 꼴아서는, 되도않는 상황극을 한다고 투덜대면서도 연행되는 그대로 무리에 합류하는 승관의 뒤를 한솔이 따른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던 바람에 고깃집에 자리잡고 앉은 다음에야 한솔을 발견한 아이들이 놀라는 헤프닝이 있었지만. 한솔은 평소처럼 어깨나 으쓱이고 마는 대신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맞은편에는 뿌듯하게 웃는 얼굴이 있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우주선에서 내려오는 걸음이 살짝 가벼워지는듯 해서.

-그렇게, 좋게 스타트를 끊었으면 완벽했을테지만.

2시간 뒤 한솔은 머리에서 술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서늘한 눈을 하고 서있고. 그의 머리에 병을 갖다 깬 취객은 피를 흘리기도 전에 나아버리는 상처를 보고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친다. 뭐야 미친. ㄱ,괴물이야.

그대로 도망치는 취객에게 사자후를 내지른 승관이 뛰쳐나간 동안 한솔은 뒤를 돌아 움찔 물러나는 사람들을 봤다. 다친곳이 있냐는 질문은 오히려 한솔에게서 나왔다. 병에서 유리조각이 튀었을까봐.

단체로 고개를 내젓는 아이들의 눈이 다시 우주선을 띄운다. 땅과 텔레포트빔 사이에 발을 걸친 한솔은 그 시선들을 한참이나 마주했다. 조금. 지나치게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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