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부]마녀의 집
“후회하지마, 최한솔.”
툭, 튀어나온 푸른 머리를 보자마자 알았다.
아, 저것이 마녀로구나.
“너 왕자님이야?”
한솔은 곤란했다. 툭 튀어나온 부리입과 더불어 힐끔 쳐다보는 눈이 경계의 빛을 띈것과는 다르게 시선이 너무나 기대에 차있기 때문이다. 발목에 부목을 덧대 감아주던 남자는 난감한 낯빛의 한솔에게 마저 이것저것 떠들었다. 아니, 금발은 아니지만. 생긴게 좀 그냥저냥 보는 인간들이랑은 다른것 같아서. 머리도 곱슬이고, 속눈썹도 길고, 피부도 하얗고…….
종알종알 떠드는 입의 너머에는 벽난로가 켜져있다. 한솔은 그게 정말 불쏘시개로 켜진 불인지, 아니면 일종의… 한솔은 이해못할 어떠한 힘으로 켜져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평범하게 지핀 불이라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그저 은은하게 따뜻하기만 할 수도 없을거고, 색이 보라색이지도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 책이 빼곡하게 꽂힌 벽면과 잉크와 양피지로 어지러운 책상, 놀랍도록 부드러운 카펫, 편안해보이는 침대까지. 누가봐도 생활공간인 이곳에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있는 한솔은 붕대가 야무지게 감길 때마다 찌릿대는 통증을 감내했다. 음, 이정도면 되나? 여전히 부리처럼 입을 내밀고 있던 남자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봐. 이마에도 뭘 좀 붙여야겠다.
실수였다. 헛디뎠다고 생각했더니 이렇게까지 굴러버릴줄은 몰랐다. 절벽 아래에서 기절했다 눈을 뜨니 만월이었고, 한솔은 이대로 제가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나마 갑옷 덕분에 즉사는 면했지만, 몸이 무겁고 접지른 발목이 너무 아팠다. 동그란 달에 어머니를 한 번, 작은 별에 먹이를 챙겨주던 고양이를 한 번 그리다가, 꼴사납게 눈물만큼은 흘리지 않으리라 다짐했을 때였다.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불쑥 튀어나온 푸른 머리와 동그란 뺨. 호기심 넘치게 절 바라보는 눈. 한솔은 꼼짝없이 다시 한 번 죽음을 실감했으나.
“수상한거 아니고 약초야.”
한솔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미리 그렇게 말한 남자가 찢어진 이마에 풀내음 가득한 무언가를 얹는다. 습. 이건 발목을 고정하는 것보다 조금 더 아팠다. 참으라고 무뚝뚝하게 말하는것 치고는 흐르는 풀즙을 닦아내주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헝겊을 대어 약초를 고정시킨 남자가 한걸음 물러나 자신이 해놓은 작품을 감상한다. 음. 완벽하군. 건너편 거울에 비친 모습은 꾀죄죄하고 여전히 풀즙이 흘렀으나, 남자는 어쨌든 제 처치가 마음에 든 듯 했다. 좋아! 발랄하게 소리치고 의자를 끌어온 남자가 한솔의 맞은편에 털썩 엉덩이를 붙인다. 그리고는 입고있던 로브의 안쪽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빚을 지게 했으니까 계약서 쓸거야. 어디보자, 일단 만월이고-
남자는 마녀다.
보라색 불이 일렁이는 벽난로나 수상한 장서들이나, 카펫 아래로 튀어나와있는 마법진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인간 같지 않게 푸른빛이 도는 은발과, 월광에는 금색으로 보이는 눈. 왼쪽 눈꼬리까지 기어오른 식물무늬. 서쪽 숲에 산다는 마녀였다. 인간을 잡아먹고 악마와 계약을 했다는.
한솔은 주먹을 쥔 손에서 한참전부터 나고있던 식은땀을 흙투성이인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빼앗긴 갑옷은 출입구와 한참 먼곳에 널브러져 있었고, 가지고 있던 검은 불썽사납다며 마녀가 벽난로로 집어던져버렸다. 가까이 가도 뜨겁지 않은 보라색 불은 신묘하게도 검의 손잡이까지 남김없이 녹여놓고는 시치미를 떼고있다. 어린아이마냥 발을 엇갈려 흔들며 양피지에 잉크를 새기는 손이 유연해서, 한솔은 그걸 보고만 있다.
“그래서 왕자야 아니야? 이거 되게 중요한 문제인데.”
막힘없이 써지는 글자가 유려했다. 글씨 되게 잘쓴다. 한솔은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다가, 곧 저에게 던져진 물음에 알맞은 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중요한 문제라니 거짓말을 쳤다가 걸리면 뼈도 못추릴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니까. 한솔이 답을 망설이자 마녀가 쓰던 깃펜으로 그를 삿대질한다. 거짓말하면 개구리로 만들어버릴줄 알아. 잘생겼으니 목만 잘라서 박제하든지. 저도모르게 목 부근을 움츠린 한솔이 저도 모르게 비죽 튀어나와있는 마법진을 봤다. 사람을 개구리로 바꾸거나, 목과 몸을 분리시키는 용도일까? 알아보지도 못할 기호와 선이 복잡하다.
협박에도 엄청나게 망설였지만. 결국 한솔은 입을 열었다. 왕국은 없어졌는데. 삑, 잘만 나가던 깃펜이 팍 엇나가면서 잉크가 튄다.
“뭐! 언제!”
남자는 매우 경악한것 같았다. 그리고 한솔은 굉장히 곤란했다. 그게… 한 50년 전쯤에. 지금은 왕정이 아니라 귀족들의 연합체제로 국가가 굴러가고 있어서, 굳이 말하자면 지금 서쪽 숲에 출입할 ‘왕자’라는건 없다. 너무 기겁하고 놀라서 입을 벌린채로 굳어진것 같았던 남자는 곧 마루를 더듬대며 발을 옮기더니, 원에 신발끝이 걸리자마자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새어나오는 푸른빛에 남자와는 다르게 경악한 한솔이 물러나려고 일어났다가 발목 때문에 급하게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빽 소리를 질렀다. 구라치는거지 지금!!
“거짓말 아닌데…….”
“아니기는!! 그렇게 홀랑 망할거면 왜 왕이라고 불러!?”
“망할 조짐은 100년도 더 전부터 있었는데-”
“그럼 왕자가 없단 말이야!?”
거짓말 안하고 진짜?? 강산이 다섯 번은 변하고도 남을 시간 동안 관련된 단서 하나 잡지 못했었는지, 남자는 심히 놀란것 같았다. 왕자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가. 한솔은 흥분한 마녀가 저를 정말 개구리로 변하게 할까봐 슬금슬금 걸음을 뒤로 물렸다. 아직도 용도모를 마법진의 푸른빛이 형형하다. 달래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제와서 거짓말이었다고 한들 위험도가 낮아질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뭔가 말해보려고 했던 한솔이 걸음을 한 번 더 물렸다가, 그게 다친 발목이어서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지른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한솔을 양서류로 변하게하려던 마녀는 그것 하나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친 발을 딛으면 어떡해!”
놀라서 소리친 남자가 한걸음에 한솔이 물러난곳으로 달려간다. 꺼진 푸른빛에 겨우 안심하자 통증이 밀려왔다. 부목 댄지 얼마나 됐다고. 저가 더 안절부절 못하며 바닥에 주저앉은 마녀가 발목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눈썹을 내린다. 개구리가 될까봐 겁먹었던건 언제고, 한솔은 그 모습을 조금 떨떠름하게 내려다봤다. 많이 아파? 누가보면 아픈건 남자의 쪽인것 같다. 욱신대는 통증을 참으며 발을 살짝 내려놓은 한솔이 얼결에 괜찮다는 말을 했다. 물론 뭐가 괜찮냐고 빽 소리를 지른 마녀에게 허벅지를 맞았지만.
하여간에 못살아 내가. 갑자기 왕국은 망했다고 하질 않나, 다친 발을 호기롭게 딛지를 않나. 투덜대며 일어난 남자가 도로 양피지 앞에 앉는다. 중간에 선이 찍 그어진 것은 뭉쳐서 벽난로로 던져버리고 꺼낸 새 양피지가 뻣뻣했다. 깃펜으로 잉크를 찍는 손은 신경질적이다. 좀 믿길만한 거짓말을 해. 내가 치료까지 해줬는데 구라나 치고. 이래서 인간들은.
“정말 몰라?”
“뭘!”
왕국이 망한지 50년도 더 됐다는건 거짓말이 아니다. 마녀의 집에 갑옷도 검도 없이 발목이 다친채로 앉아있었는데, 한솔이 무슨 배짱이 있어서 거짓말을 치겠는가. 하지만 남자의 태도도 꽤나 완고한 것이, 저를 놀리려고 하는 연극인것 같지도 않았다. 절뚝대며 걸어와 도로 의자에 앉은 한솔이 어떤식으로 이야기를 해야하나 고민한다. 무조건 저가 맞다고 우긴다한들 믿을것 같지도 않았다. 귀를 막고 안들린다고 하지 않을까. 애처럼 떼쓰는게 퍽 어울리는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한솔이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다잡았다. 이곳은 마녀의 집. 저건 마녀.
“왕자가 없으면 곤란해?”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나갈수 밖에 없다. 한솔은 깃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살폈다. 다행히 남자의 발은 정갈하게 놓여서, 마법진과는 꽤 멀어졌다. 곤란하긴 뭐가. 내용과 다르게 말투가 무지하게 신경질적이었다. 한솔은 눈치를 보며 다음 질문을 이어도 될지 판단한다. 양피지를 찍어누르는 깃펜이 경고하는듯 했지만, 바깥에 왕국도 왕자도 없는것은 사실이었다. 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것은 곤란하다. 기사서약에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문구가 들어가기도 하고. 그리고 혹시, 이게 마녀의 약점 같은것과 연관된다면.
“없다니까 화난 것 같아서.”
탕. 깃펜이 내려진다. 한솔은 쫄지 않은척 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노려보는 시선에 아랫입술을 축인 한솔이 개구리로 변할 각오를 하고 마저 말을 잇는다. 거짓말한적 없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국도 없고 왕자도 없는건 맞으니까.
왕이라는건 자연소멸하지 않는다. 나라는 온통 시끄러웠었다. 서쪽 숲 부근은 원채 마녀의 소문이 파다해서 사람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지만, 그걸 모를 수가 있나? 한솔은 거꾸로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그러거나말거나 여전히 한솔을 노려보던 남자는 다시 깃펜을 들어 양피지에 글씨를 휘갈긴다. 끊어짐 없는 필기체가 유려하게 공백을 꽉 채우고 나자 마녀가 일어섰다.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팩 내민 양피지가 흔들린다. 계약서.
“서명해.”
내용을 읽은 한솔은 침착해한다. 얼른 하라는듯 흔들리는 종이가 가벼웠다. 이하 피계약인은 어떠한 앞뒤를 막론하고 자발적이며 순종적인 계약인의 노예가 될 것을…….
“이런 계약서에 사인을 하라고?”
카펫 아래에서 푸른빛이 돈다. 싫으면 말든지. 한솔은 이죽대는 마녀의 얼굴과, 여전히 널브러진 제 갑옷과, 흉흉한 푸른빛을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아까 벽난로에 던졌던 계약서는 이런 내용이 아니었던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것은 온전히 왕자가 어쩌고하며 자신이 쓸데없는 질문을 올렸기 때문이다. 한솔은 책임소재가 분명해지자 꽤나 빠른 수긍을 했다. 오빠는 이상한 곳에서 포기가 빨라서 걱정돼. 언젠가 들었던 여동생의 목소리를 재생하며 한솔이 건네진 깃펜을 손에 든다.
잉크가 찍혀있지 않은 깃펜을 양피지에 대자 묘한 빛깔의 글씨가 새겨진다. 피계약인, 최한솔. 적고 건네주니 채듯이 받아간 남자가 한솔의 이름 위에 글자를 쓴다. 계약인, 부승관.
“내 허락없이는 왕국이든 귀족국이든 단 한 발자국도 못들일줄 알아.”
글자가 살아나 '피계약인'의 이름이 최한솔에서 다른 글씨로 바뀐다. 이름을 빼앗는 것은 가장 간단하고도 강력한 속박이었다. 한솔은 설명 한자락 없이도 제 머릿속에서 희뿌옇게 변하는 자신의 이름을 느꼈다. 묘한 빛깔의 펜선이 꿈틀대다 곧 모양을 갖춘다. 버논.
그게 이제 네 이름이야. 창문 밖의 만월이 밝았다. 한솔은-버논은 짜증이 가득한 푸른 머리칼에 얹힌 빛을 보며 마음을 다 잡았다. 일단은, 인간으로 살아나가는걸 목표로 하자고.
***
“이 바보야! 멍청아! 어떡할거냐고!!”
서럽게 터지는 분노에 버논이 자신을 걷어차려는 발을 피해 의자를 방패로 삼았다. 미안. 침착하게 내뱉었지만 사과로 끝날 일이라면 승관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도 않았을 터였다. 의자를 사이에 두고 잠시 대치했으나 승관의 설움이 한 번 더 터지는게 먼저였다. 제일 아끼는거였는데!! 하얀 손에 너덜너덜해진 와인빛 로브가 애처롭게 들려있다.
너는 도대체 할줄 아는게 뭐냐는 일갈에 돌려줄 말이 없었다. 기껏 노예로 채용했는데! 밥도 태워먹어, 설거지하다 그릇도 깨먹어, 이제는 빨아오라고 한 로브까지 엉망으로 만들고!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은 처음이라는 분노에 버논이 침착해했다. 집안일 같은건 소관이 아니라서……. 나이는 먹을대로 먹어놓고 망할 불효자식이 어쩌고 하더니 그냥 개구리로 만들어 버려야겠대서 버논이 의자를 끌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바느질도 못할거 아니냐고 하는데 돌려줄 답이 없었다. 바느질도 못하니까. 정말 제대로 짜증이 난 마녀가 분노를 주체 못하겠는지 버논이 방패막으로 삼고있는 의자를 걷어찼다. 얼굴 빼고는 도움 되는게 하나도 없어!!
노예 계약이 부당함은 백번천번 말해도 모자라지만, 버논은 이순간 만큼은 마녀에게 진정으로 미안함을 느꼈다. 저는 가사일에 관해서라면 일을 해주는 타입이라기 보다는 일을 만드는 타입이어서 그랬다. 여기는 도시도 뭣도 아니라 버논이 만든 일의 뒷수습은 마녀가 비명을 지르며 전부 해야했다. 그는 아침 댓바람부터 탄 밥을 솥에서 긁어내고, 거기에 2인분의 밥을 짓고, 나물이랑 장아찌도 꺼내오고, 깨진 그릇도 꺼내서 버리고, 몰래 치우겠다고 나대다가 다친 한솔의 손도 치료하고, 이제는 아끼던 로브까지 잃었다. 미안하지 않다면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개구리로 변하는건 싫었다. 그건 미안한 것과는 별개의 일처럼 느껴져서.
“집에서 뭐하고 자란거야 대체!!”
“철 들 때부터 쭉 기사수련생이어서…….”
기사수련생이라고 가사를 안하는건 아니다. 군대에 있으려면 대부분의 가사는 알아서 해야하기는 했다. 그러나 가마솥의 화력은 야영지에서 피우는 모닥불과는 달랐고, 제대로 된 ‘접시’를 사용해서 먹는 음식들의 설거지는 교회 봉사자들이 해주고, 빨래는… 로브가 그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적어도 땀에 절은 무명천을 빡빡 씻을 때처럼 힘을 주면 안된다는걸 진작에 알아챘어야 했다. 그래도 청소는 할 줄 알아. 항변의 목소리에 마녀가 무서워서 뭘 시키겠냐고 로브를 팍 던졌다. 기어들어가서 반성이나 해! 부모님 있는 방향으로 죄송하다고 절 하고!
절은 왜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솔은 마녀의 앞에서 성질을 돋구다가 개구리가 되기는 싫어 착실히 어제 배정받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침대도 있고 책상도 있고 옷장도 있는 방이었다. 승관이 어젯밤에 아, 그러고보니 잘 곳이 필요하지, 하더니 벽을 몇 번 두드려보고는 손짓 한 번으로 추가시킨 공간이었다. 이름 뺏었으니까 가져가래서 갑옷도 가져와 넣어놨다. 그러나 그것 외의 짐은 전혀 없었던터라 책상이 있어도 책은 없고 옷장이 있어도 옷은 없다. 텅 빈 방에서 별 할게 없었던 버논은 절은 생략하고 침대에 누웠다. 맞은편에 있는 책상에서 정오의 햇볕이 들어온다.
침대는 약간 비좁고 굉장히 삐걱댔다. 만들 수 있는거라면 좀 더 푹신하고 좋게 만들 수는 없나 싶었지만, 하인도 아니고 무려 노예인데 있는것만해도 감지덕지인가 싶었다. 어쨌거나 열다섯명이 구겨자는 방의 해먹이 아니라 수련생 때 보다는 쾌적하기도 하고. 멍하니 천장을 보던 버논은 아까 승관이 밥 차리라고 소리지를 때 까지 하고 있던 생각을 이었다. 버… 음… 혹시 박씨인가? 절대 아닌것 같기도.
평생을 불린 이름인데, 이렇게 바로 잊을 수가 있는건가? 조금 미스테리다. 버논은 진지하게 생각나지 않는 자신의 원래 이름을 되찾으려 천장을 노려봤다. 빼앗기는줄 알았다면 좀 더 생각하고 적을걸 그랬다. 가족들의 이름을 생각해서 하다못해 성이나 돌림자의 힌트라도 얻으려고 했건만, 묘하게 그것마저 흐릿했다.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이 있다는건 확실하고 추억들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는데 유독 이름만이 뿌옇다.
뭐, 지금 당장은 이름을 떠올려도 여기를 탈출할 수 없다.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겠고, 서쪽 숲은 이름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도 미로같은 곳이었다. 지도는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다. 버논은 생각나지 않는 문제는 빠르게 넘기고 이어서 숲에 들어오기 전 계속해서 읽었던 마녀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의 술수에 대처하는 법에 대해 떠올리려 애썼다. 대략… 마녀가 오른발을 들고 왼팔로 원을 그리면 입을 막아야 한다는둥 그런거였는데. 마녀의 피부는 초록색이고 코가 엄청 크니까 그 코를 바늘로 찌르면 퇴치할 수 있댔나.
퍽 진지하게 읽은 기억이 있으나 실제의 마녀는 이상한 포키댄스를 추지도 않았고 코를 바늘로 찌르려면 상당히 가까이 가야만 했다. 대부분 기괴하게 그려졌던 삽화와 다르게 승관은… 화만 안내면 귀엽게 생겼다. 머리를 물들이고 문신만 가리면 사실 당장 마을에 나가 살아도 아무 문제 없을만큼이었다. 마녀마다 다른거거나 책이 아예 거짓말을 했거나 그런거겠지.
한숨을 삼키고 돌아누우려다가, 발목이 걸려 버논이 밑을 내려다본다. 야무지게도 감아놓은 부목이 아직까지 고정되어 있었다. 일어나서 살펴보자 붓기가 가라앉아있다.
“진짜로 치료해준건가?”
긴가민가하여 중얼거리게 된다. 통증은 확실히 덜했다. 이마의 헝겊을 만지자 거기는 이제 따갑지도 않아 버논이 천을 떼어낸다. 어제 처치를 받을 때는 상처를 더 악화시키는 풀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공연히 이마를 만져보던 버논이 어제 비명 좀 질렀다고 제 발목을 안절부절 못하며 쳐다보던 승관의 표정을 생각한다. 정말 걱정하는듯 보였던.
못일어나겠어? 절벽 위의 마녀가 했던 말을 되짚어본다. 도와줄까? 멀뚱히 내려다보면서, 도움을 원하냐고 묻던 얼굴도. 별 악의 없이 동그란.
마녀가 맞기는 할까? 자신이 승관을 처음 마주하자마자 했던 제 생각과는 상반된 의견이기는 했다. 하지만 버논이 아는 마녀는 화형 시켜야만하는 괴물들인데. 사람을 잡아먹고 악마와 계약해서,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작자들이란 말이다. 승관이 마법을 쓰는 것은 직접 눈앞에서 본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승관은 무고한 사람을 해치기는 커녕…….
“야 버논!!”
벌떡 일어나려다가 다친 발목을 부딪힐뻔 해서 몸이 튀었다. 책이나 들고있게 나오라는 가시돋친 목소리가 높다. 가고싶지 않다고 생각한대도 몸은 이미 멀쩡한 발을 침대 밖으로 내딛었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골치 아픈 일이었다. 승관이 하는 말은 거역할 수 없고, 그의 말대로 숲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저를 강제하는 힘은 억세고 거친 느낌이었다. 목줄을 콱 잡아당기는 것 마냥.
“지금 가!”
그럼에도 이런식으로 굳이 대답을 뱉게되는 것은- 글쎄, 뭐랄까. 아마 이름을 빼앗기지 않았어도 제가 이렇게 헐레벌떡 나가게 될 것을 알아서일지도. 어쨌든 저 목소리는 정말 서슬퍼렇다. 안절부절 못하며 뭐라도 해서 달래주고싶을 만큼이나.
***
“기사서임은 누가 해줘?”
툭, 질문이 나온다. 버논은 스튜를 뜨다말고 입을 벌린 좀 흉한 자세로 승관을 보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왕 없다며. 그럼 기사서임은 누가 해주냐고. 뚱해서는. 턱을 괴고 스튜를 젓기만 하는게 먹을 생각이 전혀 없어보인다. 눈치를 보던 버논은 다시 당근을 떴다. 교황님이.
개구리가 되지 않기가 꽤나 힘이 든다. 말인즉슨 승관의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오늘로 일주일 째. 버논의 이름을 가져간 마녀는 말을 걸면 화를 냈다가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가 빽 소리를 지르거나 이유없이 짜증을 내거나 했다. 혼자산지 얼마나 됐냐고 물었더니 알아서 뭐할거냐고 신경질을 냈고, 마녀들은 정말 닭 피로 목욕을 하냐고 하니까 냅다 숟가락을 던졌다. 일주일 째가 된 오늘 버논이 익힌 요령은 승관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물어본 말에는 답하고. 그 결과 승관은 짜증은 덜 냈지만 반동으로 우울해졌다. 어쩌면 좋은건지 갈피 잡기가 힘들다.
이 일주일 간 버논은 착실하게 노예의 본분을 이행했다. 승관이 찾아낸 버논의 쓸모는 ‘독서대’였다. 마녀는 할 만한 일이 없으면 항상 책을 읽거나 뭔가를 쓰거나 했는데, 버논은 그 옆에서 시중을 드는 역을 맡았다. 책을 고개 숙이고 보지 않아도 되도록 앞에 펼쳐들어주고, 해가 지면 촛불을 들어주고, 잉크가 닳으면 명령대로 새 것을 찾아와 갖다준다. 생각해보니 독서대가 갑자기 말을 걸면 저도 좀 놀라고 화날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승관이 항상 가시가 돋아있나?
어찌되었든 별 상관은 없다. 밥 세끼 나오고 잠도 자고 자유시간도 있으니, 수련하는 것보다 편한게 사실이라.
“교황의 아들은 뭐야? 교황자인가?”
“교황님한테는 아들이 없지.”
성직자들은 전부 동정 서약을 하니까. 아들이 공식적으로 있으면 좀 곤란하다. 버논은 얌전히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눈꺼풀에 경련이 나는 승관의 눈치를 봤다. 푹, 숟가락이 그릇에 꽂힌다. 아 그래. 둑 터지는 분노 대신 마녀는 스튜를 떴다. 차라리 화내는게 나은것 같았다. 대체 매일매일 왜 그러냐고 물으면 다리가 차이려나. 맞은편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난폭한 마녀의 성질을 긁는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버논은 수련생으로 몇 년을 썩고도 길러지지 않은 제 눈치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누구 눈치 안보고 사는걸 인생 모토로 삼았었으니 안길러진거야 당연하지만.
“그럼 너 봤겠네, 교황.”
어떻게 생겼어? 잘생겼냐고 묻는데, 버논은 침묵한다. 잘만 대답하다 뭐냐는듯 휘어지는 눈썹이 가파른데도 버논은 눈만 굴렸다. 잘생기지는 않았을걸. 제가 듣기에도 애매한 대답이라 추가 설명이 붙는다. 엄청 나이 들어야 할 수 있는거야. 잘생겼다 아니다를 따지기에는 좀… 연세가 있으시지. 물론 갓 취임한 젊은 교황은 마흔 안팎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교황은 그 자리에 앉은지 13년이 되어간다. 외모를 따지기에는 주름이 자글하고 흰수염과 눈썹이 긴 분이기는 하겠지. 500도 안넘었는데 주름이 자글해? 승관은 정말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묻는듯 했다. 500이라니, 얘는 나이가 대체 몇살이길래. 언뜻 봐서는 버논의 또래거나 그보다 어린것만 같았다. 얌전히 수저를 움직인 버논이 추가로 말을 붙인다. 그리고 꼭 기사서임을 하는데에 교황님이 오시는건 아니야. 바쁘면 추기경님이 대신 해주시기도 하고.
“그럼 너 서임할 때는 추기경이 해준거야?”
순수한 질문에 버논은 입맛이 떨어져간다. 그릇의 가장자리를 닥닥 긁던 버논이 말할까 말까 싶어 시선을 힐끔댄다. 승관은 또 대답하지 않는 버논 때문에 다시 눈썹이 올라가 있었다. 왜 말을 안해? 무언의 압박이 담긴 말에 버논이 의미없이 당근을 쪼갠다. 이 스튜에는 당근 밖에 들어있지 않은것 같았다. 멀건 죽에 물을 3L 정도 더해서 끓인것도 먹어봤기 때문에 이정도는 아무렇지 않다. 숟가락을 내려놓은 버논은 결국 목줄이 잡아당겨지는 듯한 감각을 무시하지 못하고 진실을 입에 담았다. 아니.
“서임한적 없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으나 그나마도 성공했는지 알 수 없다. 승관은 숟가락을 입에 넣은채로 눈을 깜박였다. 아직 수련생이라고. 못알아들었을까봐 낸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이 사안에 대해 아무렇지 않다는걸 어필하기 위한 덧붙임이었다. 철 들었을 때부터 수련생이었다며. 나흘 전에 했던 이야기를 잊지도 않고 내서는, 명치가 푹 찔리는 기분에 버논이 입안의 스튜를 넘겼다. 그렇지.
“나이가 몇인데?”
프라이버시라는 단어에 마녀는 눈을 가늘게 한다. 한숨을 쉰 버논은 승관이 자신을 야만인 취급하며 하루마다 한 번씩 씻으라고 쫓아내는 통에 부들부들해진 머리를 잡아당겼다. 서임 할 뻔한 적은 많았는데, 일이 좀 안풀렸어. 이것 또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었으나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일이 좀.
출신 때문이다. 어쩌면 눈치 볼 줄을 모르는 제 성격탓인지도 모르고. 적당히 비위 맞추고 아첨 좀 떨어가며 올라가야하는데, 버논은 그런걸 할 줄을 몰랐다. 저한테 엿같이 구는건 무시할 수 있어도 약은 짓을 하는걸 보고하지 않을 성정이 되지도 못했다. 뒤에 빽이라도 있고 집안이라도 좋으면 그런 성격은 강직한 이 시대의 기사 모범이 될만했지만, 버논에게는 그런것도 없었다. 수련생이 된 것도 집이 가난하니 먹을 입을 하나라도 줄여드리고 싶어 선택한 길이다. 버논이 기사 수련생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두 개였다. 하나는 가난해서 가세가 다 기울어졌어도 어쨌든 집안의 작위 자체는 자작이라는 것. 둘은 얼굴이 괜찮아서 기사단의 홍보가 된다는 이유.
그냥 의장병이나 하라는 말을 들을걸 그랬나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버논이 그리 모든걸 못하는 것도 아니다. 가사일은 젬병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검술도 방어술도 격투도 전술도 청렴함도. 먼저 서임받은 동료들보다 뒤지는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것들이 바로 기사가 될 자격을 정하는 척도가 되어야하지 않나? 버논은 책에 써있는 말을 철썩같이 믿는걸 좋아한다. 바른 말이니까 써있고 비싼 종이에 잉크가 찍혀서 나온거 아닌가. 그러나 세상은 책에 적혀진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저번 기사서임에도 후보까지만 올라간 것에 대해 직접 따졌더니 돌아온 답은 이랬다. 저번에도 공작가 아들이 밑애 애들 괴롭힌거 꼰질렀지?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야지. 그리고 나서 동정하듯이 이름을 불렀는데 지금은 이름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만식아, 재철아, 뭐 그랬을지.
평생 동안 수련생만 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다. 기사서임이라는게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집안의 작위가 백작쯤이 되면 그냥 나이차면 해주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 아래로는 좀 더 ‘증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버논은 자신이 해야할만한 증명은 모두 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저번에는 집에서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듯한 뉘앙스의 편지까지 받았다. 기사가 되는것 말고도 길은 많다는 식이었다. 자신의 가족은 저를 사랑하니까, 걱정해서 그런 말을 했던거겠지. 그러나 별개로 그게 카운터처럼 생각되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버논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주겠지 싶어 추기경이 방문할 때마다 고개를 빼는 짓을 반복할, 그런 시간은.
그래서 서쪽 숲에 들어왔다. 증명할 것이 필요했다. 한 번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서, 저의 평가를 높은 분들 비위도 맞출줄 모르는 머저리가 아니라 청렴강직하고 그야말로 열심히 노력해 온 기사의 모범으로 돌려놓을만한 그런 증명. 단순히 계기만 되어도 좋았다. 해놓은 것들이 있는건 정말이다. 버논은 그저.
“담력시험 통과하면 기사서임 시켜준대?”
승관은 당근을 다시 입에 넣었다. 버논은 말이 없다. 화제가 넘어가길 바랬지만, 그렇다고 버논이 꺼낼만한 다른 화제가 있는것도 아니었다. 당근은 대체 어디서 구하는거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우유를. 버논이 알기로 이 근처에 당근 밭이나 목장 같은건 없었다. 쌀을 제배할 논도 없고. 승관은 그냥 시간이 되면 어디선가 재료를 가져와서는 2인분의 식사를 만들어 내놓았다. 첫날에 솥을 깡그리 태워먹은 이후로 버논에게는 주방 출입 금지명령이 떨어져서 더더욱 알 수가 없다.
승관이 문득 숟가락을 멈춘다. 그는 침묵속에서 불현듯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자세를 정지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서 기사서임을 받기 위해 서쪽 숲에 들어왔다는 수련생. 승관은 나흘 전에 제가 가볍게 불에 던져버렸던 검과, 아직 그의 방에 있을 갑옷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숲에서 산책을 하거나 멧돼지 따위를 사냥하기 위한 것 치고는 지나친 무장이었다. 그냥 폼인줄 알았는데. 능력의 증명.
“-너 날 잡으러 온거구나.”
갑작스러운 깨달음이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생각하다보니까 나온 결론처럼. 승관은 제가 뱉은 말에 스스로 충격받은 것 처럼 동공을 확장시킨채로 굳어있었다. 서쪽 숲은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인간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다. 마녀가 산다는 소문이 파다하니까. 기사가 될만한 자격을 증명할 무언가. 배경과 청렴한 성정 때문에 계속 뒷자리로 밀려나는 가여운 기사가 혼자서 공을 세울만한 어떤 것.
마녀는 사람들의 적이다. 하물며 온갖 이야기로 내려오는 서쪽 숲에 산다는 마녀를 직접 잡아 증명할 수 있다면. 적어도 마을로 끌고갈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일개 수련생일 뿐인 버논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할 때는 하는 놈이구나. 공을 치하할 때는 추기경이 참가할 수도 있다. 그렇게만 되면.
버논은 자신이 거짓말을 해야할 타이밍이라는걸 알았다. 지금 해야한다. 평생 해본적 없었지만. 안하는걸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냥 살아왔지만. 그래도 해야한다. 개구리가 되기 싫다거나, 생존본능 같은 것과는 동떨어진 감각이었다. 지금 승관이 멈춰있을 때, 아직 다른 정보들까지 소화되기 전에 수습해야 했다. 지금 당장.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끼익, 의자가 밀려난다. 버논은 마녀가 급하게 다 먹지도 않은 제 스튜그릇을 채버리는걸 보고만 있었다. 일어나. 이름을 빼앗긴 기사수련생이 일어난다. 네 방에 들어가. 한 발자국도 나오지말고. 버논은 명령이 제 발 끝을 잡아당기는걸 알았지만, 한 번만 버텨보았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나오는 소리가 없었다. 승관은 그저 버논을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고, 저를 강제하는 어떤 힘이 점점 강해졌다. 버논이 발끝에 힘을 준다.
“왜 그렇게 배신당한 듯한 눈으로 봐?”
승관이 대답하지 않아 뒤이으려던 질문은 입 속에 멤돈다. 왜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고 있으면서 손을 떠는거야? 어째서 그렇게. 상처받고 슬픈 눈을 하는지. 버논이 여기 있는 것은 그가 제 이름을 빼앗고 계약서를 썼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들어가.”
낯짝도 보기 싫으니 꺼지라던지, 평소처럼 욕을 했다면 좀 더 기분이 나을 것 같다. 버논은 제 의지와 상반되게 돌아가는 발을 결국 내버려두었다. 삐걱대는 마루를 밟고, 그새 익숙해진 문을 열고 닫는다.
뒤를 돌아 바라본 문의 너머가 당연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로 돌아가려던 버논은 제가 바닥에 딛은 발을 보았다. 물끄러미 보다가, 천을 풀어 부목을 뺀다. 그저 멍자국이 남았을 뿐인 발로 다시 바닥을 딛는다. 어젯밤에 승관이 조금 있으면 다 낫겠다고 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뿌듯해하던 웃는 얼굴이랑, 제 다리에 닿던 손도. 그리고 아까보았던 무언가가 두려운 표정도.
***
배고프다.
공복 정도는 참을만 했다. 기사 수련생들은 3~4일 정도는 굶어도 괜찮게끔 훈련을 받고는 한다. 기사단에 들어가 전쟁을 겪게 되면 식량이 부족한 경우야 일상처럼 맞게 될테니까. 버논은 다만 그게 진짜인지, 아니면 훈련이랍시고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군단장이 땡까먹는건지 항상 햇갈리고는 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뭐, 어디 사는 백작의 사돈의 팔촌쯤 된다하니 증거를 잡는다고해도 그 사람이 잘릴 일은 없겠지만. 경험에 의한 결론이다.
버논은 그냥 누워있다. 아까까지는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방에서 할 수 있는 기타 스트레칭 혹은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제가 언제 이 방에서 나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거라면 체력을 보존시키는게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멍을 때리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다. 그저 천장을 보며 제 맥박에 주의를 기울인다.
해가 한 번 지고 떴으니 이제 버논이 이 방에 갇힌지 이틀이 되었다. ‘들어가’라고 명령 당했고, ‘나와’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으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잠은 거의 자지 않았는데 바깥에서는 들리는 소리가 없다. 버논은 승관이 정말 문 너머에 있기는 한지도 의문이다. 어디를 나갔을까?
승관은 가끔 나가기도 했다. 나갈 때마다 아끼는 로브를 입을 수 없어 불만을 한바탕 쏟아내고는 집 잘지키고 있어, 하고는 문을 나섰다. 한 번은 저도 따라나가서 시중을 들어야하는게 아니냐고 물은적이 있었는데. 승관은 발목도 아픈 애가 어딜 나다니겠다는거냐고 잔소리를 했다. 발목을 다친 사람을 2시간씩 세워놓고 독서대로 써먹는건 괜찮나? 어쨌든 승관은 후자보다 전자가 압도적으로 발목에 무리가 가는 행위라 생각하는듯 했다. 그렇게 서있고도 이제 발목은 완전히 나았으니, 사실은 승관이 맞을 수도 있고.
멍하니 천장을 보던 버논은 멍 때리기에 실패한다. 어제 보았던 표정과 말들이 머릿속을 꾸역꾸역 차지했다.
어쩌면 승관은 곧 울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을지 모르겠다.
버논은 제가 했던 말들의 어떤 것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제가 그를-마녀를 잡기 위해 숲에 들어왔다는게 그토록 충격적이었던걸까?
일주일 동안 동고동락한 사람이 사실은 자기를 죽이러 온 인간이라는데, 놀라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 안전불감증 뭐 그런 결의 문제. 그러나 승관의 그 얼굴은… 단순히 놀라거나 화가 난 것과는 달랐다. 저는 눈치가 없고 사람들 표정을 잘 읽는 편도 아니었지만. 어떤 감정은 그저 드러난것만으로 뭔가를 전달한다. 그 때의 승관은 그냥, 그 상황 자체에 상처를 받은듯 했다. 버논은 저를 화형대에 끌고가기 위해 왔고. 자신이 그걸 알게 된 상황에.
어쩌면 버논이 이때까지 자신의 목적을 전혀 티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라는대로 했으면 했지 버논은 승관을 혐오하거나 그를 꾀어내려 한 적은 없다. 영문 모르게 승관을 분노하게 한적은 많았어도. 대놓고 목을 노리지도 않고, 속셈 따위는 없는척 굴어놓고 사실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게 했을까? 그래서 배신받은것 같은 표정을 지었나? 그렇다면……. 생각조차 입이 다물리고 만다.
마녀가 저에게 원하는게 뭘까?
사실 그동안은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뒤척이자 천이 바스락대며 달라붙었다. 마녀가 제게 원하는 것.
사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버논은 승관이 저를 보고있지 않을 때마다 그를 살펴보기 바빴다. 혹시 약점을 캐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했던 행동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하는 것도 그랬다. 언젠가 속박이 풀리고 자유로워지면, 그러면…….
생각이 복잡해져 버논은 눈을 감는다. -새삼스레 달라질 것들은 없었다. 어차피 마녀를 잡아 공을 세우지 않으면 저는 5년이고 10년이고 수련생 상태에서 머물러야한다. 기사서임을 받고 싶은 것은 다른게 아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서임 못받는다고 혀를 차고 비웃는 녀석들에게 증명 해야해서 그랬다. 너희처럼 쓰레기 같이 살지 않더라도 원하는걸 이룰 수 있다는걸. 저는 제 방식대로 바랬던걸 쟁취하고, 늘 그랬듯이 외부의 시선에게서 제 세상을 보호할 것이다. 누구도 그의 삶의 방식을 미련하다고. 머저리 같다고 낮잡아볼 수 없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되게 되어있는거겠지. 이건 약간의 엑셀일 뿐.
한숨을 쉬고 또 몸을 뒤척인다. 그것도 사실 당장 문이 열리고 제가 개구리가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양서류로의 변신은 별로 겁나지 않았다. 버논이 지금 후회하는건.
거짓말 조금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저 그런게 아니라고. 숲에 들어온건 우연이고, 너를 만난것도 그렇다고 말만 하면 됐던 것을. 그렇게 말한다고 철썩같이 믿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적어도 그런 표정을 짓게 하는걸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괴롭고 상처받은 얼굴을 하게 만든게 자신이라니 위가 뒤틀렸다. 수련생 생활을 끝내려면 마녀를 불에 태워야만 하는데. 머리로는 아는데도, 단지 말로 상처준 것 만으로도 이렇게 죄책감이 넘쳐흘러버려서. 그저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맴돈다.
똑똑.
환청인줄 알았는데, 다시 소리가 들렸다. 똑똑.
언젠가 불호령을 들었을 때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만 이틀만에 듣는 목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나와봐. 급하게 문쪽으로 발을 뻗는 중에도 목소리의 톤이 신경쓰였다. 명령조인데. 푹 가라앉아서 바닥에 붙은것 같은 소리였다. 끝이 갈라지는.
문을 열자 마녀가 서있다. 잠을 자지 못한듯한 얼굴을 하고, 약간 창백해진 채로.
“먹어. 굶고있을거라는 생각을 못해서 일단 이거라도 가져왔어.”
내밀어진 빵덩이를 바라만보고 있자 마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받으라는듯 더 내밀어지는걸 겨우 받고, 얌전히 입에 넣자 마녀가 뒤를 돌아 거실에 있는 긴 쇼파에 몸을 구겨 앉는다. 마녀의 몸에서는 바깥공기의 냄새가 났다. 역시 나갔다 온 모양이네. 마을에서 먹어본 맛인지 아닌지를 재보다가, 퍽퍽한 잡곡반죽을 목 뒤로 넘긴 버논이 부스러기가 묻었을지 모르는 입가를 닦았다. 이런거 줘도 돼?
“나 먹을건 따로 있어.”
“그런게 아니라.”
난 널 잡아가려고 온 사람인데. 힘 나게 빵 같은걸 챙겨줘도 되냐고. 덤덤한 목소리에는 답이 없다. 마녀는 파묻히고 싶은것마냥 의자에 다리를 올린채였다가, 그대로 손을 한 번 휘저었다. 버논의 방에 있었던 갑옷들이 덜거덕대며 알아서 기어나오더니 보랏빛 화로에 제 몸들을 던진다.
“앉아.”
버논이 앉는다. 일어서. 이번에는 서고. 돌라는 말에는 제자리를 한바퀴 돌았다. 쳐다보던 마녀가 손을 한 번 더 젓자 주방에 있던 식칼이 날아와 버논의 앞에 꽂힌다. 들어보라길래 들고, 다리를 찔러보래서 오른손이 들렸다. 허벅지에 날이 찍히기 직전에 그만이라는 소리가 들리니 또 손이 멈췄다. 다시 손짓에 칼이 주방으로 돌아간다.
하고싶은 말은 그게 끝이라는듯 마녀가 고개를 원위치했다. 버논이 하고싶은게 무엇이던, 그걸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버논은 칼을 들었던 오른손을 몇 번인가 쥐었다 펴봤다.
“찌르게 놔두지 왜.”
굳이 하지않게 막을 필요는 없다.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되어도 독서대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누구를 싸이코처럼 생각하냐는 신경질은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지만,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다. 버논은 가까이 가려고 했는데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듣자 다시 발이 멈췄다. 말이 입 안에서 돌았지만 나오지를 않는다. 뭐에 대한 사과를 해야하지? 기운을 차리게 해주고 싶은데. 사과를 한다고해서 기뻐할것 같지가 않다.
“나갔다 온거야?”
대신이랄것도 없었지만. 할 수 있는 질문을 하자 마녀가 알거 없다면서 투덜댄다. 안에서 내내 귀 기울이고 있었는데 소리가 전혀 안나길래. 굴하지 않고 잇는 주제에 버논을 한 번 쳐다본 승관이 제 푸른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바깥 좀 보고 왔어. -진짜 네 말대로 왕국이 없어졌는지 싶어서.
처음에도 거짓말하지 말라고 몰아붙였지만. 저를 잡으러 온 용사 나부랭이라는걸 알게 됐으니 더더욱 거짓말만 했을지 몰라 확인하러 갔다. 하인을 멀리 보내는건 리스크가 있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어서.
저 말고도 하인이 있냐는 질문에 승관은 지루하게 눈을 반쯤 감았다. 사역마 말하는거야. 보통은 숲이나 마을로 보내 식재료를 가져오게끔 하거나, 약초를 캐러 보내는데. 마을보다 더 먼 곳으로 날리려다보니 승관도 숲 외곽쪽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사역마와 시야를 공유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 어지러워서 금방 돌아올 수도 없었고. 당근과 우유의 출처를 이렇게 알게 될줄이야.
“그래서, 확인했어?”
마녀는 제 머리를 만지던 손을 툭 놓는다. 그래.
어디를 봐도 왕가의 인장을 찾을 수가 없었던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새 인장이 있는것도 아니고. 수도까지 사역마를 날리는건 아무래도 불가능해서 직접 성을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원래는 왕가에 조공을 하던 상인들의 짐들을 꽤나 기웃거렸는데도 안보였던걸 보면 아무래도 진짜인듯 했다. 마력이 다 닳을 때까지 온종일 찾았었는데. 해가 다시 뜨는걸 보고서야 미련이 가득한 걸음으로 느릿느릿 돌아왔다. 마력을 이렇게 써본 것도 까마득한 일이어서는.
그래서 저렇게 창백한거구나. 해가 다시 떠서야 왔다니, 밤을 샌건가 싶다. 하얗게 뜬 얼굴과 그 위로 기어올라와있는 식물 무늬를 보고있던 버논이 승관아, 하고 이름을 불렀다. 감히 제 이름을 부르냐는듯 치떠지는 눈을 무시하고 버논이 이것 좀 풀어달라는 말을 한다.
휘어지는 눈썹에는 바닥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는 발을 몇 차례 당기는 것으로 답했다. 아직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이 풀리지 않아서. 그러나 마녀는 내가 왜 그걸 풀어주냐고 어이없는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숨겨둔 날붙이 따위로 콱 죽이려고들면 어쩌게. 짜증이 가득한 말에 버논이 입을 비뚤게 한다.
“그럼 숨겨둔거 없는지 물어봐.”
“뭐?”
“숨겨둔 날붙이나 무기 같은거 없는지 답하라고 명령하면 되잖아.”
그럼 싫든 좋든 답해야하는거 아니야? 꺼내보라고 하던지. 담백하게 말하고는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드는 것에 미간을 한껏 찌푸린 승관이 눈을 굴렸다. 행동을 제어할 생각을 했었지 그런식으로 명령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답하라고 하면 할것은 확실했지만.
조금 오래 생각하던 마녀는 곧 신중하게 말을 냈다. -너 지금 나한테 숨기는거 있으면 전부 말해.
입을 열었던 버논이 그걸 도로 닫는다. 비틀리는 눈썹이 제법 볼만했다. 숨겨둔 날붙이나 무기처럼 한정한게 아니라서, 멋대로 움직이려는 혀를 제어해보려 안간힘을 쓰는걸 마녀가 그대로 바라봤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건가 했는데. 역시 또 뭔가 있구나. 차갑게 가라앉는 시선의 너머로 버논이 결국 주술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기 같은거 없어.
“그냥, 무릎이라도 베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버논은 깜박여지는 마녀의 눈을 보며 좀 낭패라는 생각을 한다. 마녀는- 음. 곧바로 얼굴을 구기고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사실대로 말하라니까? 언령이 잘 안듣나?
이름을 빼앗는건 상대를 속박하는 가장 간단하고 강력한 주술이다. 해본적은 없어도 말하라는 명령을 어길 수는 없을텐데. 사실대로 말한거라는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승관이 다시 앉으라는 명령을 했다. 한숨을 쉰 버논은 다시 앉고, 일어서라고 하니 서고, 앞구르기를 해보래서 또 하다가 테이블 다리에 머리를 박는다.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제 머리를 감싸는걸 의심스럽게 보던 승관이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제대로 사실을 말하라고.
“마력도 엄청 쓰고 해 뜨는걸 보고 왔다며! 피곤할 것 같아서 그냥. 아니면 침대에 누워도 되고. 근데 내가 누우라고 한다고 가서 누울건 아니잖아.”
그래서 옆에 앉을 생각을 했을 뿐이라는데, 혹이 생긴 머리를 내려다보는 승관의 눈이 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내가 뒤지게 피곤한건 피곤한거지. 네가 왜 그걸 신경써서 무릎베개까지 해줘? 잠들면 치게?
계약으로 묶여서 노예취급이나 받는 주제에. 잡아가려고 온 마녀랑 닿으면 너도 화형대에 묶여야되는거 아니녜서, 기사 수련생이 그렇게 되는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닿았다고 나도 화형받을거였으면 잡겠다고 들어오지도 않았을거라고. 그런게 아니라, 진짜 사실대로 말한거야. 명령 내린건 너잖아.
“어제부터 엄청 신경쓰여.”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할줄은 몰랐으니까. 불러서 나왔더니 아파보여서 더더욱 그렇고. 내가 하라는대로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겠지만, 딱히 숨긴 계획이 있는건 아니니까 그냥 쉬면 안되겠냐는 말에 마녀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좀 둑 터진듯이 쏟아진 말들이다. -진심인가. 죽이러 온거라는걸 일주일 동안 말도 안했던 주제에. 내가 걱정된다는 소리를 저렇게 뻔뻔하게 할 수 있다니.
현관쪽에서 뭔가가 날아온다. 버논은 날렵하게 생긴 손바닥만한 와이번 세마리가 제 옷을 까뒤집고 제 뒷덜미를 입으로 물어 띄우고는 탈탈 털어대는 동안 속절없이 비명을 질렀다. 무기 같은거 없다니까 그러네! 사실대로 말하라는 언령에 거스를 수도 없었으니 마녀의 사역마가 제 몸을 뒤져대도 아무것도 못하는건 마찬가지다. 결국 뭔가 중요한걸 빼앗긴 사람마냥 주저앉은 동안 와이번을 앵무새들마냥 팔에 얹은 승관이 겨우 입을 열었다. 옆에 앉아도 돼.
이건 한숨을 쉬거나 불만을 말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잡아가려고 온 것임을 부정도 하지 못한 것도, 일주일 동안 말하지도 않은건 저니까, 신뢰를 잃은건 그럴만하다. 그래도 좀 까칠하게 옷을 단정하게 갈무리한 버논이 드디어 승관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온당치 못한 대우를 받았음을 딱딱한 자세로 표현하려고 했는데, 승관이 풀썩 제 허벅지 위로 머리를 눕히자 힘이 풀린다. 흩어진 푸른 머리칼이 가볍다.
“하나도 안편하네.”
살집도 없는게 무슨 무릎을 빌려준다고. 중얼거리면서도 감은 눈이 뜨일줄을 모른다. 와이번들이 담요를 찾아 마른 몸에 덮어주고는 옆으로 누운 몸선 위에 다닥다닥 붙어앉았다. 조금 뒤척이던 마녀가 곧 팔을 뻗어 버논의 허리를 안는다. 밀착되는 체온이 낮아 한차례 소름이 끼쳤다. 아니면 전율이었나.
“몇 십년 만인 것 같아.”
중얼대는 입에서 나오는 숨이 간지러웠다. 버논은 조금 망설였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푸른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었다. 사락대며 사이로 흩어지는 감각이 간지럽다.
“무릎베개?”
마녀는 좀 더 품을 파고들었을 뿐이다. 사역마는 버논을 경계하는 대신 그냥 승관의 몸 위에서 저들끼리 졸고 있었다. 밤을 샜던건 승관뿐만은 아니었을테니까.
사실, 마녀를 공격하기 위해서 따로 날붙이가 필요한건 아니다. 진작에 서임을 받았어야할 수련생은 체술 분야도 발군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언령을 내지 못하게 입을 막고 목을 졸라 기절시킨 다음 마을까지 끌고가면 버논의 인생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사역마 같은게 있는줄은 몰랐지만 세마리나 있는걸로 봐서는 기회는 지금 뿐이다. 이정도로 마력을 다 써버릴만한 일이 또 있을것 같지는 않았다. 마법은 할줄 알아도 전투훈련을 받은적은 없을테니 자신이 몸싸움에서 질 일은 없겠지. 그러니 지금 당장 움직여야 했지만.
“왜 왕자가 중요한거야?”
전부 알고서도, 수련생의 손은 지친 마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다. 스스로도 자신이 모순적이게 생각 되었으나 사실- 이제와서는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발목은 완전히 나았고, 절 죽이려고 왔다는 사람에게 마녀가 내민 빵으로 배고픔도 가셨다. 의심하고 혹이 생기게 하고 몸수색까지 했으면서 무방비하게 누워있는 몸이 구겨져있었다. 버논은 어렴풋이 아까했던 고민의 답을 알 것 같았다. 마녀가 저에게 원하는 것.
“오기 전에는 못나가.”
그런 계약이라는 말이 떨어진다. 왕자가 숲에 들어와 저를 구해주기 전까지는 나가지 못한다고. 영원히.
영생에 가까운 삶과 특별한 힘에 대한 댓가였다. 마녀들은 때가되면 자신들에게 주어진 숙명을 짊어지기 위해 어떠한 힘과 계약한다. 바깥에서는 악마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사실 사악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저 힘을 내어주고 그에 맞는 계약을 할 뿐인, 일족들이 대대로 함께하는… 친구라고해도 좋다.
어린 승관은 욕심 많은 아이였고, 보통보다 많은 것을 바랬다. 온갖 재주가 뛰어났으니 저에게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떠한 힘'은 고민하다가, 제게 그 댓가로 계약을 걸었다. 왕자가 나타나 너를 숲 밖으로 이끌기 전까지는 숲을 벗어나지 못할거라고. 그래도 괜찮겠냐고 하길래. 왼손을 내밀었다. 심장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한 식물무늬와 푸르게 변색된 머리카락은 힘의 증표가 되었다. 어쩌면 저주라고 해야할지.
“그게 몇 년 전인데?”
“프라이버시거든.”
톡 쏘는 말에 버논은 웃어버리기까지 했다. 적어도 왕국이 멸망하기 전이었겠지. 그럼 그 계약을 하고서는 계속 숲에만 있었던거냐고 해서, 마녀는 몸을 살짝 뒤챘다. 그랬지. 오랜 시간을 그냥.
왕자가 오고말고, 그런걸 신경 쓸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의 승관은 바빠서 혼자 있어도 시간은 잘만 흘렀다. 얻은 힘을 어떻게하면 더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계속해서 고민했고, 집을 일주일마다 바꿔보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책을 읽고 쓰고- 하여튼 바빴다. 자고 일어나고 하다보면 10년은 훌쩍 지날만큼이었다. 숲은 상당히 넓어서 갇혀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힘들었다. 사역마들이 전해주는 소식으로, 마을에서 붙잡혀 불에 탈뻔 했다는 다른 일족의 이야기들도 들었다. 불 따위가 진짜 마녀들을 태울수는 없겠지만, 자신들을 잡겠다는 빌미로 죄없는 사람들이 죽는다고. 그런 놈들이 우글대는 곳에 발을 들일바에는 여기서 혼자 사는게 낫지.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왕자라는건 언젠가 올테니까. 승관에게 저주는 그냥 언젠가 자연히 해결될 일에 지나지 않아서.
“어떻게 그런 확신을 해?”
“왕자라는건 계속 있는거잖아.”
왕자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왕자가 또 태어나고, 그런거 아니냐는 말에 버논이 눈을 굴렸다. 하기사 보통은 그게 맞지. 특정개인이 아니라 호칭일 뿐이니까. 그래서 승관은 자신이 언젠가 숲에서 나갈 것을 의심한적이 없었다. 그 많고 계속 존재할 왕자 중 하나는 언젠가 숲에 들어올터였다. -버논이 오기 전까지만해도 그렇게 생각해서.
하지만. 닫히는 입을 내려다보던 버논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봤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왕국도, 왕자도 없고. 승관은 그저 이 숲과 집에 갇혀 언제까지고 살아야만한다. 어쩌면 그 계약은 이렇게 될 것을 상정하고 내밀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세상경험이 적은 승관은 왕국이라는게 언젠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던거고. 정말로 고립되어버릴거라는 생각은 한 적 없다. 영원히 이 숲 속에서.
“인간들이 가끔 오기도 할거잖아.”
“1년에 네다섯쯤인가.”
그나마도 대부분은 나갈 때 기억을 지우고 나간다. 계약이었다. 승관과 마주칠만한 깊은 숲까지 들어온 사람들은 길을 잃었거나, 곤란한 상황일 때가 많으니까. 버논처럼 다쳤을 수도 있고. 그럼 선심을 써서 도와주고 빚을 지게 만든다. 승관이 구하는데 애를 먹는 고급진 옷이나, 책 같은 것들을 들고 오게끔 한 다음 풀어주면서 기억을 지우는 식이었다. 뭐, 대부분 요구하는건 책이지만. 버논은 승관이 구겨서 불에 던져넣었던 첫번째 계약서를 생각한다. 저에게 내밀 예정이었던 것도 그런 내용이었겠지. 더불어서 제가 찢어버린 로브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 더 몰려왔다. 괜히 아끼는거라고 했던게 아닌것 같은데.
기억을 지우는거야, 마녀의 집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면 토벌대가 올지도 모르니까 그런거지만. 그런 이유로 한 번 마주친 인간들을 몇 번씩 보는건 거의 없는 일이고, 그런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만남들을 계속 기다리기에는 생이 너무 길었다. 최근에는- 근 10년 정도는 그래서 왕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했다. 외로워지기 시작해서.
“…미안하네.”
왕자가 아니라서. 비꼬거나 빈정 상한 표현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제가 왕자였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원래의 계약서를 구기고 충동적으로 노예계약서를 쓴 이유도, 마녀가 저에게 원하는 것이 뭔지도 확실해졌다. 혹시 왕자냐고 묻던 들뜬 목소리와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왕자여서. 남은 평생의 외로움을 해결해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나 버논은 왕자는 커녕 다 망해가는 자작가 태생에, 몇 년 동안 기사서임조차 받지 못한 수련생이다. 그런 주제에 승관에게 최악의 소식이나 물어다주고는 심지어 그를 희생양으로 삼아 하찮은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주일 동안 사람과 함께 지내본 것도 정말 오랜만인 일이었을텐데. 버논은 별 능력도 없는 노예를 독서대랍시고 앞에 세워놓던 마녀를 기억한다.
전날의 그 배신 당한 표정을 그제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토벌대가 올까봐 사람들의 기억도 지우면서 돌려보낸게 몇 년 째인데. 버논의 목적을 예상조차 못했을만큼 자신이 몰려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거겠지. 계약으로 억지로 붙든거라고는 해도, 그렇게 잡은 사람이 절 죽일 궁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하얀 뺨을 만지자 푸른 머리가 좀 더 품을 파고든다.
마녀는, 이건 어쩌면 벌인거라고 생각했다. 이름 따위를 빼앗고 옆에 둔거니까. 그냥- 익숙치 않은 일들이라 그런것이다. 누군가랑 이렇게 오래 있어본 것도 그렇고. 그냥.
승관이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키자 와이번들이 담요와 함께 주르륵 미끄러졌다가 퍼득 날아오른다. 날개에 맞는 바람에 빨개진 광대부근을 감싼 버논이 벌써 일어나냐고 물었는데, 마녀는 손짓으로 종이와 잉크병을 날아오게 만들기만 했다. 사각대는 소리는 근 일주일간 버논이 익숙해진 소리였다. 깃펜대가 종이를 긁는 소리.
“자.”
내밀어진건 계약서라고 써있는 종이다. 쇼파에서 아예 일어난 승관이 최근에 생긴 방 앞으로 향할 동안 버논의 눈은 글씨를 훑었다. 마지막의 마침표. 서명란에는 승관의 이름이 써있고, 아래에는 제 이름을 써넣을 공간이 있다. 버논이라고 적으면 된다는 말과 함께 마녀가 손짓으로 문을 없애는 것이 보였다. 버논의 손 근처에 깃펜이 둥둥 떠다닌다.
“미안한 말인데, 어차피 난 숲 밖으로 못나가서 네가 날 마을로 끌고갈 수는 없어. 끌고 간다고 해도 경계선을 벗어나는 순간 난 마녀가 아니게 되니까.”
일을 끝낸 뒤 침대에 털썩 앉은 몸이 무거웠다. 진짜로 좀 자야지. 사역마 붙여줄테니까, 숲에서 나가면 이름을 알려줄거라는 말이 늘어진다. 그럼 이름도 다시 찾을 수 있을거야.
버논은 그게 들리지도 않는것처럼 계약서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숲에서 나가는 순간 모든 기억을 잃는 것에 동의한다. 마지막 문장이 빙글빙글 돈다. 누워서 이불을 덮고 몸을 뒤척이던 마녀가 답이 없는 버논 때문에 몸을 돌렸다가,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 진짜 토벌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서임도 언젠가 받을거야. 그럴 자격 있으면.
사정이 딱한 것 같으니 웬만하면 화형대에 올라가줘도 괜찮겠지만, 말했듯이 숲 밖으로 나가면 힘을 잃게 되니까 마을에서 화형 당했다간 진짜 죽을터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자니 한 명도 아니고 사람들을 다 끌고오면 승관도 좀 힘들거고. 원래는 죽여야 되는데 그냥 보내주는거라면서 하품을 한 마녀가 이불을 도롱이 벌레처럼 두르고 몸을 웅크렸다. 억지로 잡아놔서 미안했어. 마지막 말은 중얼거린듯 작다.
그대로 잠에 들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소리가 마녀를 도로 깨웠다. 찌익.
귀를 의심하며 뒤를 돌아보니 버논이 두 갈래로 깔끔하게 찢긴 양피지를 한 번 더 찢고 있었다. 네 조각이 난 종이를 내려놓는걸 경악하며 보는데, 알아서 일어나 책상 근처를 기웃대는 몸이 황당하다. 뭐하냐고 물었더니 새 종이를 찾는다는 말이 돌아왔다. 근처에 있었던것 같은데. 아, 찾았다.
“너 지금 뭐해?”
“잠깐만.”
좀 유려하게 쓰고싶은데, 찢은 계약서에 써있는 글씨에 비해서는 영 삐뚤한게 신경쓰인다. 그냥 포기하고 대충 글씨를 적은 버논이 서명칸의 줄도 그었다. 직선이라기보다는 대각선이 되었지만. 어쨌든 이름을 적어넣는다. 버논.
자. 건네진 계약서는 받지 않아도 내용을 읽을만은 했다. 얘 글씨 진짜 못쓰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밀어두고 미간을 구긴채로 내용을 읽던 마녀가 입을 여닫는다. 위를 쳐다보자 깃펜을 내밀고 있던 버논이 눈썹을 휜다. 얼른 서명 안하고 뭐하냐는듯이.
계약서의 내용은 이랬다. 피계약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일주일에 한 번 이하의 간격으로 혼자 마녀의 집을 방문하며, 그에게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마녀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계약자는 피계약자에게 댓가로서 이름을 돌려준다. 피계약자, 버논. 계약자, 공란.
“…이게 뭐야?”
산만큼 올라간 한쪽 눈썹에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다리를 접은 버논이 마녀의 손에 직접 깃펜을 들려주었다. 더 추가할거 있으면 적어도 괜찮아. 이런걸 써본적은 처음이라 좀 허술하게 적었을 수도 있다. 기본 골자만 그대로 있으면 된다는 말에 얼결에 깃펜을 쥐게 된 승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뭐냐고 물었잖아 지금.
“거짓말 했어야 했어.”
내가 널 잡으러 온거라는걸 네가 눈치챘을 때에. 그런거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었다고. 부정 안한걸 계속 후회했었는데. -후회한 이유도, 거짓말을 못했던 이유도 있으니. 그래서 기억을 잃는건 싫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쌓인다.
원래 그런 성격인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하는 척이라던가, 꼼수라던가, 돌려 말하는 것도 특기는 아니었다. 처세술을 가사일보다도 못해서 여지껏 수련생인거니까. 그렇다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전날에 거짓말을 하지 못했냐고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버논은 그걸 방 밖으로 나와서 승관을 보고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은건, 앞에 있는 사람을 속이고 싶지 않아서다.
별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버논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하는 이교도를 화형대에 세우기 위해 단신으로 숲에 들어와서는, 일이 꼬이는 바람에 그 마녀에게 이름을 빼앗겨 노예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주제에 마녀를 진지하게 대하고 싶어 거짓말도 하고싶지 않아지다니. 하지만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녀를 제압할 유일한 기회를 날리고 있는게 당연한 것처럼.
일주일 동안 봐 온 승관은 입이 걸고 좀 폭력적이긴 하지만 인성이 틀려먹었다거나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버논은 그런 인간들을 실제로 봐왔기 때문에 승관이 그렇지 않다는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는… 오히려 꽤 다정하고. 사람을 신경 쓸 줄 안다. 책을 들고 있는 버논의 팔이 떨리면 다 읽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아파서 못읽겠다며 책을 내려놓게 시킨다. 버논이 땅콩을 못먹는다는 이야기를 한 뒤로 식탁에 땅콩버터가 올라오는 일이 없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버논의 발목을 봐주고는 들어간다. 잘자. 하품을 하며 그렇게 말하고 침대에 들어가서는. 아침에 처음 얼굴을 마주하면 좋은아침이라는 말을 한다. 대부분 짜증에 차있지만 웃는 일도 있었다. 퍽 잘어울리는 밝은 웃음.
이름까지 빼앗겼다. 더 험한 일을 시키려면 그럴 수 있는데. 가사일을 못한다는걸 안 시점에서 그냥 개구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승관은 매일 삼시세끼를 2인분을 차리고, 버논에게 방을 만들어줬다. 오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왜 그러는지 퍽 궁금했었지만. 이제는 이유조차 명확했다. 그는 단지 외로웠던 것이다. 그리고 평생 이대로 외롭게 지내게 될 것이 무서웠을 뿐이고.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같이 지낼동안 다른 생각 같은거 한 적 별로 없어.”
약점 같은걸 찾거나, 이름을 떠올리려고 했던것도 초반쯤 뿐이었다. 버논은 일주일간의 생활이 괴로웠다거나, 계획을 위한 초석이라는 생각으로 뭔가를 참았던적은 없다. 승관이 싫었던 적은 더더욱 없었고. 지금 생각하면 좀 허무맹랑 했던것 같다. 별 잘못도 없는 사람을 불에 태울만큼 머리가 어떻게 된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풀려나는 댓가로 기억을 잃는건 싫다. 버논은 지냈던 시간이 결코 나쁘지도 않았고, 오히려.
“…숲에 너무 자주 들락대면 소문 날텐데.”
중얼거린 말이 떨어진다. 승관은 좀 멍한 상태였다. 마녀인 자신과 만나는걸 들키면 화형 당하는건 제가 아니라 버논이 될지도 몰랐다. 꽤나 진지한 이야기였으나 버논은 어깨만 으쓱였다.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게. 뭘 알아서 한다는건지, 정말이지 손톱만큼도 신뢰가 가지가 않는다. 빨래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게 무슨.
“나 안끌고 나가면 서임은 어떻게 받을건데.”
“서임 같은건 언젠가는 될거야.”
승관이 말했듯이, 자격이 있다면. 그러면 언젠가는 될 일이다. 버논은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있다고 생각했지만, 숲에 발을 옮긴것부터가 그걸 부정하는 일이었던거겠지.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초조해했던 것 같다. 제 삶의 방식을 미련하다고. 머저리 같다고 낮잡아볼 수 없게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버논 본인이 사실은 진짜로 그런걸까봐 두려워한걸지도 모른다. 그거야말로 머저리 같은 일이지. 제 삶이 어떤것인지를 증명하는데에 꼭 기사 서임이라는 형태적인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알고 있을 셈이었으나.
안되면 그냥 농사 일이나 해도 되고. 말이 참 가벼워서 마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진심인가? 그러나 아까부터 그 생각은 반복되기만하고 있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내밀어진 계약서에는 여전히 공란이 있다.
“너 이거 내가 써야 효력이 있다는거 알기는 해?”
일반인이 대충 쓴 글씨에 서명이나 한다고 강제성이 생길거라고 생각하는지. 손을 저을 필요도 없이 사역마인 와이번 중 하나가 새 종이를 물고와서, 승관이 깃대를 고쳐쥔다. 글씨도 이게 뭐야 진짜. 이런건 수련 안하냐고 종알종알 떠드는 말투가 근 일주일처럼 돌아와 있었다. 이렇게 말도 많고 표정도 다양한데,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혼자 지냈다니 믿기지 않는 수준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얼굴이 안심으로 풀어져 있다는건 버논 본인이 제일 잘 알았지만.
명필이 종이에 흔적을 남겼다. 허술했던 짧은 문장들에 이것저것 세부사항이 추가되어 형식을 갖췄다. 기본적인 내용은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더 고칠게 있는지 세심하게 글자들을 뜯어보던 승관이 결국 깃펜을 바꿔들고 서명란에 제 이름을 적어넣는다. 첫날처럼 잉크 없이 새겨진 글자에서 묘한 빛깔이 났다. 부승관.
“너 이거 진짜 서명할거야?”
의심스러운 목소리에 답하듯 버논이 거칠것 없이 깃펜을 움직였다. 유려한 글씨 사이에서 혼자 삐뚤하게 쓰인 이름 두 자가 지워지지 못하도록 종이에 스며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을 유동적으로. 만약 오지 못할 사정이 생긴다면 알릴 것. 마녀가 자신에게 돌아온 계약서에 쓰인 그 문장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이제 마녀가 이름을 돌려주면 끝이었다. 얌전히 기다리는데, 승관은 계속 글자만 본다.
“이럴 가치 있어?”
새삼스럽다는듯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여기서 마을까지는 거리도 꽤 되고, 길을 외우는 것도 쉽지 않을것이다.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했지만 정말로 마녀를 숨겨주고 있다는 오해라도 받으면 인생이 통째로 흔들릴 수도 있다. 버논은 그저 자신의 억지로 머무르게 된 것 뿐인데. 동정심으로 이런 계약서까지.
자리에서 일어난 버논이 승관의 손에서 계약서를 가져온다. 혹시 잉크가 번질까봐 탁자에 조심히 두고, 저를 올려다보는 승관이 눕기 좋게 이불을 끌어올려주는 손이 다정했다. 가치라.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 못보게 되는건 싫으니까.”
아까 ‘숲에서 나가는 순간 모든 기억을 잃는 것에 동의한다’는 문장을 읽자마자 생각한 일이다. 사실 버논은 그리 세상을 복잡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느끼는 것들이 가장 진실된 것이라고 믿으니까. 그러니 아까의 그 감정도 분명.
얼굴을 빼놓고 모두 이불에 감싸인 상태인 승관은 제 위에서 웃고있는 버논을 보다가, 곧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눈을 구겨가며 웃는 얼굴에는 많은 것들이 담긴듯 했지만. 결국 버논이 일주일간 봤던 모든 모습 중에 가장 기뻐보인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버논은, 그 얼굴을 마음 깊은 곳에 담기로 하고.
“후회하지마, 최한솔.”
안놔줄거니까. 마녀들은 원래 끈질기거든.
버논은- 한솔은, 마치 새 이름을 받은듯한 기분이 든다. 돌려받은거라는걸 알면서도. 사실 원래 이름은 전혀 다른 것이었고, 이건 마녀가 또 다시 내려준 완전히 새로운 이름이어서. 이제부터의 삶은 마녀가 칭해준 그대로 살아가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마녀들은 죄없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잡아먹는다고 했던가. 푸른 머리가 흩어진 뺨을 한 번 쓰다듬어본 한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아먹힌다고 해도, 이름을 빼앗기지 않은 상태로도 아마 마녀가 하고싶은대로 놔두게 되겠지. 그것만을 확신한채로 뒤를 돈 수련생이 사라진 제 방문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새로 만들어달라고 할 때는 좀 더 푹신한 침대를 부탁해야지. 짜증이 찬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들떠서, 한참 전에 남긴 빵을 가지러 가는 걸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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