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The Golden Bough)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 03화

두 번째 만남

* 트위터(@12_ria_12) 지참금결혼썰을 기반으로 일부 내용과 설정이 수정 및 보완되었습니다. 

* 지참금(신부의 집안에서 신랑의 집안으로 결혼을 위해 보내는 물질적 재산) 제도가 주요 설정으로 나오며, 이로 인한 폭력 및 살인에 대한 언급이 나올 수 있습니다. 불편하신 분들은 사전에 피해 가 주세요.

* 알파오메가 세계관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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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라한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정한은 살면서 누군가를 부러워해 본 적이 없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제멋대로 살아도 누구도 뭐라 않는 알파의 삶을 부러워한 적은 없냐고? 아니. 난다긴다 하는 알파들보다 가진 게 많았고, 머리가 좋았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말 그대로, 남 부러울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인생이었다. 단지 오메가란 이유 하나로 지참금결혼과 같은 원치 않는 일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살면서 완전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괜찮았다. 윤정한도 은하 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처음으로 부러운 상대가 생겼다.  

"형아, 우리 아난 가서 리치빙수 먹고 가면 안돼? 나 달달시원한 거 땡겨어."

떼 쓰고 조르고 어리광 피우고 땡깡을 부려도 언제나 막내라서 용서받을 제 사촌 승관이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정확하게는 그 애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리고 승관의 결혼상대가 그 애한테 관심이 다분한 알파라는 사실이. 아주 조금이었지만 부러웠다.

"우리 호텔도 이런 거 팔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진짜 매일 하나씩 사먹을 텐데. 여긴 눈치 보느라 맘대로 오지도 못하잖아." 

"누구 눈치를 봐, 네가." 

"어…?" 

"뭐가?" 

생각없이 무심코 뱉은 말이었는데 정한을 보는 승관의 눈이 동그래진다. 너무 티를 냈나, 내가. 그래도 승관인 동생인데. 형씩이나 되어서 동생 손에 든 사탕을 샘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렇지 않다. 금세 제 행동을 반성한 정한은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넌 그런 눈치 안 봐도 된다고. 먹어, 얼른. 녹겠다." 

"빨리 같이 먹어, 형아도." 

입앞에다 스푼을 내미는 승관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니 토라진 얼굴로 삐죽 입을 내미는 모양이 꼭 노란 아기새 캐릭터 같다. 그래서 이번엔 억지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웃어줬다. 부럽고 안 부럽고를 떠나 온전히 승관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왜애, 먹기 싫어?" 

"형아 식단관리 중." 

눈꽃빙수를 크게 푹 떠서 입으로 와앙 넣을 준비를 하던 승관이 움푹 패인 우유얼음 산에 도로 스푼을 꽂았다. 아니, 이 형아가 진짜. 눈을 똥그랗게 떠서 정한을 새초롬하게 쳐다본 승관이 말했다. 

"외숙모가 시켰지, 또."  

"아냐, 그런 거."   

"외숙모도 참. 형이 뺄 데가 어딨다구. 내가 아들이었음 아주 착유기에 넣어서 지방 한 방울까지 쪽쪽 짜냈겠다." 

"외숙모가 시킨 거 아냐, 승관아. 그냥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래." 

최 대표와 처음 만나는 자리를 갖기도 훨씬 전부터 이미 두 사람에게 세간의 집중이 몰려 있던 터. 하물며 다가올 결혼식은 당연하게도 모든 언론이 앞다퉈 보도할 것이다. 승철과 달리 아직 미디어에 공식적으로 노출된 적 없는 정한에게는 처음으로 대중에게 저를 내보이는 날이고, 처음 공개될 모습에는 조금의 흠결도 없어야 했다. 다른 누가 아닌 정한 스스로가 그러길 원했다.  

"그럼 형, 드레스… 입을 거야?" 

무엇보다 승관이 짚어낸 것처럼 가장 중대한 문제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쪽 집안에서 원한다면 그래야겠지." 

조금씩 바뀌는 추세이긴 하나 오메가는 성별과 상관없이 결혼식 때 웨딩 드레스를 입는 것이 오랜 관습이다. 상류사회에선 더 엄격했고, 정한이 보고 들은 선에서는 상류층 남성 오메가 신부가 결혼식을 올릴 적에 웨딩 수트를 입은 적이 전무했다. 

그러니 정한도 그들과 같은 수순을 밟아야 할 테다. 태어나 단한번도 입어본 적 없는 드레스를 결혼식 때 입어야 한다. 정한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정략결혼 상대와 그의 가족, 그리고 언론을 통해 '윤정한'을 보게 될 수많은 이름모를 사람들을 위해. 그것 또한 이 세계의 황금가지를 지키는 늙은 왕들의 임무였다. 


황금가지(𝐓𝐡𝐞 𝐆𝐨𝐥𝐝𝐞𝐧 𝐁𝐨𝐮𝐠𝐡)

3화. 두 번째 만남

by. illyria


귀가한 정한은 집안 어른들에게 일과를 보고하고 최 대표가 정해달라던 상견례 날짜를 받아 제 방으로 올라왔다. 핸드폰에 저장해둔 체크리스트에서 오늘 한 것들을 지워놓고 최 대표에게 상견례 일자를 전하려는데, 주소록에 최 대표 연락처가 없었다. 정한은 곧바로 결혼 준비로 연락을 주고 받는 최 대표의 비서 전원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최 대표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용무를 말씀하시면 대표님께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말하고 싶은데요." 

「죄송합니다, 정한 님. 대표님께서 워낙 일정이 많으셔서… 그냥 제가 전해드리면 안 될까요?」

"비서님한테도 말할게요. 근데 적어도 결혼할 상대 연락처쯤은 알았으면 싶어요. 그게 서로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아서요."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어놓고 몇 시간 동안 콜백이 없던 전 비서는 마침내 문자로 11개의 숫자를 보내왔다. 평범하기만 한 전화번호의 주인은 대체 뭐가 그리 특별해서 결혼할 사람한테 연락처 하나 알려주지 않는 걸까. 

내가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들었나. 

저 또한 그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니까 그쪽도 응당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두 사람의 결혼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닌지라. 비록 2분 머물렀을 뿐이지만 최 대표는 어제의 식사 자리에 나타났고, 또 그가 이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이상 정한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고민할 시간도 아까워 정한은 최 대표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문자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뵌 윤정한입니다. 전 비서님 통해 연락처 받았습니다.」 

평범한 인사로 시작한 메시지는 어제와 오늘 사이 정한이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며 준비한 내용을 담은 업무 보고서였다. 결혼 준비에 있어서는 최 대표가 저한테 결혼 준비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넘겼기 때문에, 이런 절차는 사실 불필요하다. 연락처 교환도 안 할 정도로 상대에게 무관심한 사람이 결혼 준비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궁금해할 리도 없었다. 

하지만 정한은 이런 식으로라도 대화의 물꼬를 트고 싶었다. 앞으로 몇 십 년을 부부로 살아야 할 텐데, 서로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서로에 대해 알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두 번째로 후계를 위해선 불가피하게 자녀 또한 낳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제 아이가 한 마디 대화조차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 씨 일가가 저로 하여금 최 대표 전처의 비극을 반복하게 만들 계획이 아니라면. 

화면을 초조하게 지켜보며 답장을 기다리던 정한의 수고는 물거품이 됐다. 알겠다, 고생했다, 하다못해 메시지에 확인 표시를 누를 수도 있는데 최 대표는 그날 밤에도, 다음 날에도, 사흗날이 지나도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그냥 형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버려, 이것저것 참견할 바엔 오히려 땡큐 아냐? 아, 형! 이참에 엄청나게 화려하게 해 버리자. 제씨카는 비욘세 불렀잖아. 형은 레이디 가가 불러.' 

승관이 아직 어리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기에 가능한 소리다. 최 대표가 알아서 다 맡기겠다 한 것은 알아서 거슬리지 않게, 즉 자신의 취향과 제 부모의 취향, 호부와 여러 상황을 잘 고려해 선택하라는 뜻이지, 말 그대로 정한이 좋아하는 대로 정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승관이 가급적이면 오래도록 모르고 살아가길 정한은 진심으로 바란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겠네요. 말씀 주신 내용은 대표님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전 비서와의 메시지는 대체로 5분 이내에 답장이 오갔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데 문자 몇 번 주고 받았다고 'ㅎㅎㅎ'나 'ㅠㅠ' 같은 자음을 쓰는 전 비서 태도에 정한은 점진적으로 열을 받기 시작했다. 서재에서 할머니와 함께 책을 읽고, 오전에 들어온 꽃으로 어머니와 화병을 꾸미고, 주말에 배구 경기를 보러 갈 승관과 함께 청민동 부티크에서 신상 옷을 고르는 와중에도 최 대표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도대체 제가 결혼할 알파는 어떤 인간이기에 약혼상대의 문자를 씹는지, 정한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하룻밤을 더 참은 정한이다. 마침내 날이 밝은 넷째날에, 정한은 신혼집이 될 펜트하우스의 인테리어를 맡은 디자이너가 가져온 시안을 물끄러미 보다 결단을 내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셔도 될 것 같네요. 상의해 보고 다시 연락 드릴게요." 

시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해외에서 여러 상을 받기도 한 유명 디자이너가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모던, 미니멀&심플, 내추럴, 스칸디나비아, 빈티지, 앤티크, 프렌치, 유니크, 웨인스코팅… 인테리어 스타일만 못 해도 아홉 가지였다.  

문제는 그래서 최 대표의 취향은 이 중에 뭐냐는 것이다. 전 비서한테 물어보면 되지만 싫었다. 이렇게 되면 제 부모가 그러하듯 결혼 후에도 부부의 모든 일에 전 비서가 관여하게 될 확률이 큰데, 정한은 애초부터 그것을 차단하고 싶었다. 

디자이너를 보내자마자 정한은 곧장 제 방으로 올라와 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을 확률이 다분하게 높다는 걸 알면서도 제법 오래 반복되는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기다렸다. 딱 한번만, 딱 한번만 더 듣고 끊어야지 싶던 차에 연결음 소리가 뚝 끊겼다.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었다. 최 대표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제 전화를 받은 것이고, 소리샘 연결이 된다면 그의 손으로 직접 수신거부한 것일 테고. 

"여보세요…?"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말을 꺼냈을 때 적어도 소리샘 안내 멘트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안도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긴장이 됐다. 정한은 조금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최승철 대표님?" 

「아- 정한 님. 저 전원우입니다.」 

또다.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대신 받았습니다.」

중요한 회의 중이라니. 그렇다면 결혼은 그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건가? 이 결혼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지는지, 무엇을 얻게 되는지, 결코 모르지 않을 텐데. 

"상견례 전에 따로 만나고 싶어요, 대표님과." 

「실례지만 혹시 어떤 일로…」 

"용무가 있어야만 만날 수 있나요? 최 대표님과 저, 결혼할 사인데."

「아,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대표님께서 일정이 워낙 바쁘셔서-」

"전 비서님."  

「네, 정한 님.」

"전 비서님은 결혼할 사람과 달랑 두 번 만나고 식장 들어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 그건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대표님께 여쭤보세요."  

「예?」 

전 비서가 곤란해 하는 것이 전화기 너머로 빤히 보였지만 정한은 멈추지 않았다. 제가 오늘 벌이는 일이 양가 어른들에게 다 흘러 들어간대도 상관 없었다. 지금 묻는 말은 양가 어른들에게 또한 해당되는 질문이므로.  

"무슨 일로 전화했냐 저한테 물으셨죠. 그게 궁금해요, 저는. 비서님이 대표님께 그 답 대신 받아다 주세요." 

「정한니임….」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일부러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정한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머리색은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던 말 한 마디에 바로 그날 저녁 미용실에 가 얌전히 톤다운까지 했는데 받는 대우가 고작 이런 식이라니. 최 대표에게는 정말로 이 결혼이 사업 확장의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가 싶어 순간적으로 좌절감이 들었다. 기왕 하는 결혼, 살아가면서 서로가 마음에 끝내 들지 않는대도 잘 해보고 싶었는데. 책잡힐 거리 하나 없이 완벽한 그 집 며느리가, 또 아내가 되어야겠다 싶었는데. 그를 귀찮게 하지 않는 선에서, 눈에 거슬리지 않는 한에 최소한 동반자의 역할은 해보자고 애써 먹은 마음을 최 대표는 몇 번이고 무너뜨린다.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서도. 

「정한 님, 전원우입니다. 대표님께서 이번 주말에 라운딩을 나가시는데 혹시 합류 가능시냐고 여쭤보셔서요.」

그래서 반쯤 포기했던 제 질문에 대한 최 대표의 답은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다. 정한이 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던 날 늦은 밤에, 전 비서를 통해. 

"알겠어요." 

「그럼 토요일 아침에 댁으로 기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전 비서님." 

「네.」 

소문을 믿지 않는 정한이지만 두려움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알겠다 말을 해놓고도 최 씨 일가의 소문은 정한의 머리 한구석에 남아 그의 손에 땀이 배게 했다.  

"고맙다고 전해주실래요?"

「네, 예…?」 

"답변 빨리 줘서 고맙다고요. 토요일에 뵙겠다고, 전달 부탁드려요." 

하지만 그럴수록 0에서부터 시작을 해 보고 싶은 것이다. 다른 누구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한 본인이 직접 찾아내고 싶었다. 최승철이라는 알파에 대해. 

정한은 간만에 밤잠을 설쳤다. 짧게 되풀이되는 꿈속에서 그는 최 대표의 라운딩 약속에 동석했고, 치는 족족 해저드나 벙커로 공이 빠졌다. 미스샷을 치고 나면 최 대표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애초부터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평온하기까지 한 그 얼굴이 이 꿈에서 가장 최악의 구간이었다. 차라리 한심하다는 표정이라도 짓는 편이 나았을 텐데. 

그러고 보면 라운딩에 나가는 거의 십 년 만이다. 어려서부터 운동신경이 좋아 승마며 수영, 테니스, 사격에 양궁까지, 안 해본 운동이 없는 데다가 골프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따라 라운딩을 다니며 꾸준하게 쳤다. 실력이 꽤나 출중했고, 선수를 하면 어떨까 잠깐이지만 고민해 본 적도 있었다. 

모든 상황이 오메가 판정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골프는 알파들이 전유하는 스포츠였고, 오메가는 대체로 알파의 동반인 자격으로나 라운딩에 참여할 수 있었다. 정한도 열아홉 살에 오메가로 발현한 뒤로 라운딩에 못 나갔다. 악몽 아닌 악몽을 꾸게 된 이유는 그래서였을 것이다. 행여 잘 치지 못해 저를 초대한 사람이 실망하진 않을까. 물론, 꿈에서 본 표정처럼 기대가 조금도 없는 상태라면 실망할 일도 없겠지만.  

최 대표가 보낸 차 안에서 정한은 긴장한 상태이면서도 꾸벅꾸벅 얕은 잠을 잤다. 그러는 사이 부드럽게 주행하던 차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컨트리클럽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살풋 잠에 든 동안 미미하게 새어나온 향이 느껴진 탓에 서둘러 갈무리하고 창문을 열어 잔향을 없앴다. 

그리고 열린 창문 너머로 정한은 최 대표를 발견했다. 포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 대표는 정한이 타고 온 차가 멈춰서자 손수 뒷자석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정한은 그에게 숨겨진 쌍둥이가 있었던 것일까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편하게 왔습니다. 감사해요." 

정한이 차에서 내리고 대신 문을 닫던 승철이 갑자기 눈썹 사이를 좁혔다. 멈칫하는 모양새가 이상해 왜 그러는지 물었을 때, 승철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죠. 이쪽에 서 있어요." 

"오늘 만나뵙는 분은 누구신가요?" 

"당신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곧 도착하신다고 했으니 같이 들어가는 편이 좋겠어요." 

아는 사람이라면 그냥 알려주면 되잖아요? 라고 물으려다가 정한은 가만히 입술을 닫았다. 왜 굳이 저럴까? 저와 말 한 마디 더 나누는 것조차 싫은 게 아니라면. 하지만 손님이 오고 있다니 따져 물을 새가 없었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확신한 것은 그로부터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멀리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자동차 엔진 소리 때문이다. 

"잠시… 어깨에 손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검은 세단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하자 최 대표가 물었다. '왜?'나 '싫은데요.'라는 답은 여기서 오답이다. 청하는 말이지만 허락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다. 정답을 알고 있는 정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어깨 위로 최 대표 손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미안합니다. 잠깐이면 돼요." 

"네." 

순간적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가 느껴졌다고 생각한 정한이었다. 컨트리클럽 라운지에서 서비스하는 디저트의 냄새인가 싶었는데 그보다는 제 어깨를 덮은 최 대표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더 신경이 갔다. 그래서 평소의 정한이라면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하라고 말했을 것을, 그냥 알겠다며 사과를 받아낸 것이다. 지금 기다리는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이 지독한 독선주의 알파가 쩔쩔매는지,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차에서 내리는 백발의 나이 지긋한 알파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최 대표의 말마따나 정한 역시 매우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 남성이 '알파'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정도로, 정한과는 가까운 사이였다. 

"교수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정한이 크게 외쳤다. 그러면서 뛰다시피 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잘 지내셨어요? 찾아뵙지도 못 하고. 어떠세요, 장관 일은, 할 만 하세요?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구요?"

정신없이 쏟아내는 질문 공세에 허허허, 인자하게 미소만 짓던 송해진 교수는 정한의 대학 시절 은사이자 대학원 지도교수였다. 정권 교체와 더불어 내각이 새롭게 구성될 적에 그린하우스에서 교수를 불러들였고, 그렇게 송 교수는 국토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 

"하나씩 물어요, 정한 씨. 장관님 어디 가시는 거 아니니까." 

어느새 다가와 말하는 최 대표 목소리가 제법 다정했다. 정한 옆에 나란히 서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는 모습을 본 송 교수의 관심이 그제야 최 대표에게로 옮겨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관님. 정한 씨 약혼자 최, 승철입니다." 

"신성물산 최승철 대표. 내 모르는 건 아니지. 만나서 반갑네." 

"만나뵙게 돼 제가 더 영광입니다."

"이렇게 인연이 이어질 줄 어떻게 알았겠나."  

두 사람이 비록 오늘 처음 만났지만, 그 전에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는 정한이 알지 못한다. 다만 유추하자면, 둘의 만남이 성사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저라는 거다. 그게 아니고서야 최 대표가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난 저한테 진짜 약혼자같은 애티튜드를 보일 리 없다. 송 장관이 가족을 끔찍하게 여긴다는 것은 이미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일이니, 장관의 '애제자'라는 패를활용한 것은 꽤나 좋은 전략이었다. 

밤잠을 설친 것 치고는 썩 컨디션이 좋았다. 꿈은 현실과 반대라 했던가. 악몽에 가까웠던 꿈과 달리 정한은 녹슬지 않은 실력을 내보이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살짝 각도 조절에 실패해 벙커에 빠졌던 공을 깔끔하게 쳐 올려 그린 위에 올려놨을 때는 최 대표가 제일 먼저 굿 샷이라며 박수를 치기까지 했다. 1홀에서 긴장을 너무 많이 해 드라이브 실수만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정한은 승철보다도 타수가 적었을 것이다. 아쉬워하는 정한의 등을 괜찮다며 토닥이던 승철은 꿈에서 마주한 것과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고, 정한의 18홀 마지막 샷이 끝나자 곧바로 다가와 대신 채를 건네받던 그가 크게 지은 함박웃음은 지금껏 어떤 미디어를 통해서도 접한 적 없는 미소였다.   

정한이 놀란 것은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 만남이 절대 비즈니스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기로 작정했는지 승철은 라운딩 내내 송 교수와 제 약혼자의 학창 시절에 대해서만 줄곧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정한에 대해 그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마치 정한에게 직접 들은 것마냥 소소한 일상까지 모두. 

그런 것들까지 이미 조사가 돼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정한에게는 물어볼 게 애초부터 없었던 걸까. 이미 정한과 만나기 전부터 윤정한이라는 오메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한은 여태 제가 승철을 오해했나 싶었다. 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 수도, 혹은 여전히 관심은 없을 수도. 단순히 암기과목 외우듯 머리에 집어 넣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정한은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 

"타요, 정한 씨." 

직접 앞좌석 문을 열고 정한이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손으로 막아주기까지 하는 승철을 해진은 흐뭇하게 지켜봤다. 

신성물산의 추문을 해진 또한 알았다. 질 나쁜 소문의 주인공인 최승철 대표가 끊임없이 저한테 연락을 취해왔지만 단 한번도 응답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기도 했다. 가장 아끼는 제자 중 한 명인 정한이 그의 재혼처로 낙점됐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 자와는 더더욱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한 씨가 무척이나 존경하는 분이시라 들었습니다. 결혼 전에 꼭 한번 인사 드리고 싶습니다.' 

정한과 함께 찾아뵙겠다는 말에 마지못해 잡은 약속이었고, 라운딩을 도는 초반에는 줄곧 의심을 놓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판단을 번복하는 일이 생기다니, 저도 나이가 들긴 한 모양이었다. 

"그럼 식당에서 뵙겠습니다, 장관님."

"조심히 오게." 

장관의 차가 먼저 출발하고나서야 승철은 운전석에 올랐다. 쿵, 낮은 울림을 내며 문이 닫히자 차 안에는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오전 내내 정한이 보았던 최승철은 사라지고,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의 최 대표가 다시 돌아온 듯 했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네." 

정한의 대답에 승철은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커브가 심한 언덕길조차 조금의 쏠림없이 부드럽게 내려갔고, 정한은 오로지 운전에만 몰두해 있는 승철을 빤히 바라봤다. 어떠한 표정도 담겨 있지 않은 저 얼굴로 지금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 둘만 남겨진 이 상황이 그는 어색할까. 아니면 내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을까. 여러 생각을 하다 우회전을 하느라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간 승철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 그제야 승철의 얼굴에 담겼고, 정한은 대뜸 말을 꺼냈다. 

"송 교수님이 대표님한테 어떤 도움이 되나요?" 

반나절 동안 라운딩을 함께 하며 정한이 알아낸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당연해 보이지만-승철이 실리적인 대화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한도 필요한 용건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승철이 원하는 바를 파악해 거기에 맞는 지원을 하는 편이 낫겠다. 

정한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아챈 승철은 저 너머 노랑불을 보고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정지 신호로 바뀐 뒤에도 잠시 고민하던 승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차기 국무총리로 거론되고 계세요. 그동안은 적당한 채널이 없어 만나뵐 수가 없었고요." 

"저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 맞죠?" 

"네." 

"그럼 저한테 하나 빚진 거예요. 이런 내용까진 우리 계약서에 안 들어가 있었으니까."

반쯤은 농담 삼아 한 소리였는데, 그 말을 듣고난 승철이 물끄러미 정한을 쳐다봤다. 뭘까, 이 싸늘한 기분. 설마. 

"있어요…? 그런 내용까지?" 

그럴 리 없는데. 내가 분명히 꼼꼼하게 내용 다 확인했는데. 내심 불안해져 눈동자 움직임이 빨라지는 정한이었다. 

그때까지도 아무 말 없던 승철은 다시 고개를 돌려 빨갛게 켜져있는 신호등을 봤다. 톡, 톡, 굵은 손가락으로 핸들을 느릿하게 두드리던 승철이 다시 바뀐 초록불에 브레이크를 떼며 말했다. 

"'부부로서 각자의 의무를 충실하게 한다.'라는 조항이 있지만 정한 씨 말을 들으니 의미가 불분명해 해석의 여지가 있겠네요. 게다가," 

"그냥 장난 좀 쳐봤어요,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일 아니구요. 대표님 저한테 빚 안 졌어요. 됐죠? "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정한이 기운없이 말했다. 반나절 사이 그래도 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하려고 했던 말, 마저 해도 됩니까?"

설마 자기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고 기분이 얹짢아진 건가? 벌렁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애써 모른 체 하며 정한이 짧게 대답했다. 하세요. 

"당신과 난 아직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고, 계약 조항을 이행할 의무가 없으니까. 내가 정한 씨한테 빚을 진 게 맞다고 말하려 했습니다." 

"아……." 

정한은 여전히 헷갈린다. 첫만남의 최승철, 오늘 아침의 최승철, 그리고 지금의 최승철 중 어느 게 진짜 최승철의 본모습일까. 셋 다 아닐 수도 있다. 두 번의 만남 동안 제가 본 최승철 모두 거짓일 수도. 

"송해진 장관 만나려고 당신 이용했고, 그래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오늘 두 번째네요."

"뭐가, 말입니까?"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거요. 아까도 내 어깨에 손 올리면서 사과했잖아요."

"그것도 빚을 졌네요, 제가." 

승철의 대답에 정한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보다 계산이 칼같은 신성물산 건설부문 최승철 대표가 그의 빚 하나 제대로 기억 못 하다니. 조금 허술하다 느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봤기 때문에. 

"앞으론 고맙다는 말을 더 듣고 싶은데요. 안 좋은 빚 말고, 좋은 빚 가져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 

"어려운 부탁일까요?" 

대답이 없는 승철에게 물음을 덧붙이면서 정한은 조마조마했다. 싫다고, 안된다고 할까 봐. 늘상 가장 나쁜 상황을 먼저 떠올리는 정한은 이번에도 최악을 준비하고 있었다. 

 "…종종 비슷한 일이 생길 겁니다. 오늘 일처럼 며칠 전에 갑자기 부탁하게 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미리 사과하시려고요…?" 

정한이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물었을 때 하필 또 차가 멈춰섰다. 그리고, 

"아뇨. 고맙다고요. 도와줘서." 

의외의 답을 들었다.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그래도 첫만남 때보단 그 목소리가 제법 부드러워졌다고 느낀 것은 착각인지도 모른다.  

식당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대화는 더 오고가지 않았다. 하지만 정한은 그가 궁금해하던 것들에 있어 몇 가지를 더 알아낸 뒤였다.  

우선 옆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온은 저보다 높은 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추위를 잘 타는 저와 반대일 테니 신혼집의 온도조절 기능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겠다. 같은 침실을 쓰게 될지, 각자 방을 사용하게 될지는 아직 논의하지 않았지만 침구도 체질에 맞춰 준비해야 할 테고.

그리고 처음 만난 날에 묻고 싶던, 승철의 향을 정한은 희미하게나마 알게 됐다. 차 안에 아주 은은하게 배여 있는 달달하고 포근한 향기. 아침에 그가 저를 맞이했을 때 맡았던 것과 정확히 같은 향이었다. 동시에 콧속 깊이 파고드는 약간의 매캐한 내음은 물론 차량용 디퓨저의 인공적인 향일 수도 있겠지만, 아주 옅은 그 향으로 인해 정한은 저도 모르게 열감을 느꼈다. 그것은 차 안에서 정한이 느끼는 정체 모를 향이 디퓨저가 아닌 어느 알파의 페로몬 향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날카롭고 위협적인 향을 상상했는데. 정한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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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The Golden Bough)⟫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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