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es, and again

Ashes, and again 1

♪KING PRINCESS - I Hate Myself, I Want To Party

준은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준을 기대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설레는 얼굴을 한 채 다가왔다가 자신이 원하던 상대가 아님을 깨닫자마자 돌아서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아아, 이래서 오기 싫다고 한 건데. 준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거절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물며 남을 최선을 다해 꼬드기는 건 성미에 맞지도 않았다. 준은 손에 들린 와인 잔을 계속해서 만졌다. 속이 타들어 갈 때마다 홀짝여대서 이제 잔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빈 잔을 이렇게 들고 다니다가 떨어뜨리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닌가, 어쩌면, 그렇게 시선을 끄는 게 더 효율적일 수도. 그 자식, 내가 첫 파티에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더니. 분명 이 저택으로 들어올 때까지는 같이 있었던 그 녀석을 찾으러 준이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책망을 위해서라도 꼭 찾을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와인 심부름도 시키고.

하나, 둘, 셋.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뜬 다음 준은 용감하게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 안을 쓱 훑어보았지만 역시 그 녀석은 없었다. 갑자기 다가오는 준을 보고 몇몇 사람들이 흥미를 느꼈지만 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 시선을 피했다. 말이라도 걸면 바쁘다고 해버릴 참이었다. 동행도 얻지 못한 남자가 그런 말을 해봤자 설득력 없을 거라는 걸 알지만. 피곤하다, 역시. 이제는 와인 잔 대신 준의 입술이 그의 신경질을 감내하고 있었다. 무도회장의 한가운데에는 빙글빙글 돌면서 춤추는 커플이 여러 쌍 있었고 현악기는 우아하게 그 동작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사실, 그 음악에 맞춰 준도 춤을 추고 싶었지만 이런 곳에서 혼자 춤을 추는 건 역시 무리였다. 이상한 놈 취급 받는 건 오늘 충분히 당했다.

준은 이리저리 헤매었다. 이 저택은 또 왜 이렇게 넓은지, 실수로 어떤 복도에서는 진하게 키스하는 사람들을 마주해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며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쳤다. 그 사람들, 지금쯤이면 나 때문에 키스도 멈췄겠지. 어쩌면 어색해져서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헤어졌을지도. 준은 반대편으로 열심히 도망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몇 개의 복도를 더 헤맨 끝에, 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 저택에서 길을 잃었다는 걸. 그때까지도 와인 잔은 준의 손에 들려 있었고, 그 녀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나갔을지도. 의리 없는 놈. 준은 약간 욱해서 복도의 벽을 치고 싶었지만 겨우 참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원에도 사람들이 좀 있지 않을까? 실내를 너무 쏘다녀서 바깥 공기도 좀 들이마시고 싶던 참이었다. 그래, 발코니를 찾아야겠다. 목적지를 정하고 나니 더 이상은 서둘러 움직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준은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목마르다, 같은 생각대로의 말을 내뱉으면서.

발코니를 찾으려면 필수적으로 빈방을 찾아야 했다. 그러려면 변태처럼 문에 귀를 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준은 이따금 별로 듣기 싫은 소리도 들어야 했고, 그때마다 준은 과장된 헛구역질을 하며 방에서 멀어지곤 했다. 그 넓은 거실과 로비를 채운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오늘 밤 이 저택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건 당연할 텐데도, 준은 빈방을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 게 놀라웠다. 헛구역질을 몇 번 반복하자, 준은 드디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혹시나 해 노크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준은 조심스레 문을 밀었고, 운이 좋게도 방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발코니는 준의 눈앞에 있었다.

헤헤,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준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서재인가 싶을 정도로 방의 벽면을 따라 놓인 책장에는 책이 빼곡했다. 방의 중간에 있는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위에 빈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발코니의 문은 이미 열려있어서 얇은 커튼 자락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준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발코니로 발을 내디뎠다. 흐음, 하고 숨을 들이켠 순간,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준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도, 옷차림도 모두가 까만데 옅은 파란 눈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마호가니 책상 곁에 서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준은 당황한 낯빛을 숨기지 못했고 검은 남자는 눈을 매섭게 떴다. 어쩌면, 준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준의 대답을 기다리며 무표정했지만 준은 설명 못할 두려움을 강하게 느꼈다. 반사적으로 준은 뒷걸음질 쳤다.

“고양이가 혀라도 물었나.”

준이 한 발짝씩 남에게서 멀어질 때마다, 그 남자도 서서히 준에게로 다가왔다. 남자의 검은 구두가 마룻바닥과 부딪혀 나는 소리가 흉흉했다. 어쩌면, 이것도 준의 착각일 수도.

“아, 저, 는.”

툭. 준의 허리께가 발코니의 난간에 부딪혔다. 겨우 내뱉던 말이 난간에 부딪히면서 다시 멈추었다. 아, 준은 더 이상 이 남자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준은 난간에 손을 짚으며 침을 삼켰다. 손바닥에 난 땀 때문에 손이 난간 위에서 미끄러졌다. 준은 무서운 와중에도 창피했다. 미끄러진 손을 얼른 다시 난간 위에 얹었다.

하지만 그 어설픈 준의 몸짓에도 남자는 웃지 않았다. 남자는 이제 커튼 곁에 서 있었다. 그제야 달빛에 그 남자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하고 파란 눈이 인상적인 그 남자는 준의 기억에 없는 남자였다. 모르는 사람이 확실했다. 준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척추에서부터 한기가 들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끼면서, 준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 저는―”

“여긴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전했을 텐데. 못 들었나?”

남자는 준의 말을 잘랐다. 예의 없이 들어온 건 자신이니 말이 잘려도 싸다는 생각 한편으로, 이 사람 사람 말을 안 듣네, 싶어서 또 한 번 준의 속마음이 울컥했다. 그에게서 얼굴을 피한 채로 준은 꿍얼거렸다.

“…몰라요. 저택에서 길을 잃어서.”

“길을 잃어?”

남자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들어있었다. 준이 살짝 분한 얼굴로 남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준의 예상과는 달리 대놓고 비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어쨌거나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고 미세하게 웃고 있었다.

“보통이면 그런 말 안 믿는데.”

“…근데요?”

“아예 터무니없으니 역으로 믿을 만하네.”

“…….”

준은 어쩐지 분함을 느꼈다. 물론 자신은 어리고,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젊어 보이긴 했지만 준의 또래는 낼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준은 이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저기, 근데.”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준을 쳐다봤다. 준은 비스듬히 얼굴을 돌린 채 그의 얼굴을 한번 흘긋 보고, 말을 마저 이었다.

“…저랑 처음 보시면서 왜 그런 말투세요.”

“……….”

남자의 입에서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이젠 그저 희한하고 신기한 걸 다 본다는 눈빛으로 준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냐는 눈빛. 준은 속으로 알게 뭐냐고 대꾸했지만 어쩐지 입 밖으론 내지 못했다. 준이 고개를 돌리고 왜 그랬지, 하는 후회와 함께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자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monsieur.”

준이 고개를 휙 돌렸다. 마주한 남자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Monsieur, 이 방은 오직 나만 출입이 가능해서 말입니다. 안내 사항을 초대장과 함께 송부해드렸으나 읽지 못하신 것 같군요. 당신과 만나서 더없이 기쁘나 monsieur, 안타깝게도 오늘 밤은 날이 좋지 않습니다. 퇴실을 정중히 부탁드리지요.”

남자는 우아한 몸짓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내린 채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준에게 인사했다. 준이 ‘어, 아. 음.’ 같은 소리만 겨우 내고 있을 때, 남자는 커튼 곁에서 물러나며 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언젠가 저런 몸동작이 신사가 지녀야할 기본이라고 본 적 있는 것 같은. 준이 삐걱거리며 발코니에서 실내로 향했다. 그 남자의 곁을 지날 때, 어쩐지 엄청나게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향수? …장미꽃 향? 마른침을 삼켜가며 정면만 바라보고 겨우 방문 앞에 섰을 때, 남자가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그럼. Au revoir, monsieur.”

겨우 쳐다본 남자의 얼굴엔 다시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준은 어색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방문을 나섰다. 문은 준의 뒤에서 조용히 닫혔다. 달칵, 소리가 남과 동시에 준은 자기 심장 위로 손을 얹었다. 영문을 모를 정도로 심장이 맹렬히 뛰고 있었다. 뭐지. 뭐지? 반사적으로 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올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 같았다. 그냥 속이 울렁였다. 준은 한참이나 심호흡하면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겨우 진정했을 때쯤, 방 안에 자신이 와인 잔을 두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아, 아아.’라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 방문을 노크하러 뒤돌았을 때, 문이 다시 열렸다. 그 남자였다.

“이거.”

준이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그 남자가 와인 잔을 내밀었다. 준은 홀린 듯이 잔을 받아 들었다. 잠깐 닿았던 그의 손끝이 유별나게 차가웠다.

“두고 갔네요.”

“감사, 합니다….”

준이 고개를 어색하게 숙였다. 그 남자가 옅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제 정말로 안녕.”

우아한 억양, 목소리. 준의 숙인 머리 앞으로 문이 다시금, 닫혔다.

정말 안녕…. 준은 닫힌 문 앞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짙은 향수의 잔향을 의식하자 지독하게 목이 말라왔다.


준이 눈을 떴다.

준은 요즘 자주 꿈을 꿨다. 꿈 대부분은 그 남자를 처음 봤던 그때를 다시 반복하는 내용이었다. Au revoir. 준은 그 꿈을 꾼 날이면, 잠에서 깨어 멍하니 그 말을 되뇌곤 했다.

그날 너무 넋을 놓은 바람에 두고 왔어야 할 와인 잔도 같이 집으로 들고 와버렸다. 준은 며칠 동안 그 남자의 눈, 말투, 몸짓, 향수의 잔향을 계속 곱씹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와인 잔을 들고서 함께 파티에 간 그 녀석, 버논에게 주의 사항에 대해 따졌다. 버논은 준의 말을 듣더니 ‘엉? 그런 게 있었던가….’하고 조끼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접힌 초대장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게 왜 아직도 그 주머니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준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버논은 종이 뭉치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중에 하나를 꺼냈다.

“이런 기회가 닿아서 반갑고 어쩌고저쩌고, ‘당신을 초대합니다. 추신. 저택 3층 오른쪽 가장 끝 방의 옆방은 그 날 하루 동안 출입이 불가합니다. 이는 저택 주인님의 부탁 사항으로 꼭 유념하시기를.’라네.”

“아, 그럼 너 때문에 나만 고생한 거잖아.”

“아니, 그게 왜 내 탓이야. 그냥 회장에 가만히 있지.”

“초대장 받은 건 너니까 네가 알려 줬었어야지.”

“나 참. 미안해. 그 와인 잔은 그래서 어떡하려고.”

“몰라.”

“모르면 어떡한담.”

준의 대답에 버논의 얼굴이 어이없음으로 바뀌었다. 에휴, 하고 숨을 내쉰 버논은 너덜너덜한 종이 뭉치를 준의 손에 쥐여 줬다.

“미리 안 알려준 건 미안해. 파티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도. 갑자기 어떤 사람이 자기랑 꼭 대화 좀 하자고 쫓아오는 바람에 나도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그랬어. …그 사람 눈이 너무 무서워서 잡히고 싶지 않았어.”

버논은 어딘가 아스라한 곳을 보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준은 버논이 어떤 체험을 한 것인지 대강 짐작했다. 그래서 더 뭐라 하지 않았고, 대신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가 그 저택 주인이었구나. 그래서… 말투를 따졌을 때 그런 얼굴이었구나. 준은 자기 얼굴과 함께 종이를 확 구겼다. 그러다 금세 다시 펴보았다. 그 저택의 주소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옆에서 버논이 참 이상한 짓을 한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준은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마침 주소는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구겨져 있었고, 준은 종이를 곱게 접어 자기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몸을 홱 돌려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버논이 외쳤다.

“어디 가는데!”

“이거 돌려주러!”

준이 와인 잔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대답했다. 버논은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네. 그런 말도 중얼거리면서.

 

준은 저택을 향해 계속 달리고 달리다가 걸어서는 갈 수 없는 거리임을 깨달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난 뒤에야 마차를 잡고 저택의 대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마부도 준의 손에 덜렁 들린 와인 잔을 별나다는 듯 흘긋거렸지만 준은 개의치 않았다. 저택은 준이 사는 곳에서 제법 많이 떨어져 있었다. 종종 뒤를 돌아보며 돌아갈 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짐작도 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도착한 준이었지만….

그때도 크다고 생각했던 저택은 낮에 보니 더더욱 컸다. 대문이 무슨 산만하네. 평범한 상인의 집안에 태어나 자란 준은 자신의 첫 파티가 이런 저택에서 열린 파티였음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이런 저택은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 거지…. 이런 예의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버논이 더 밝았으므로 아예 그 녀석을 데리고 올 걸, 하고 준은 후회했다. 그렇지만 그 거리를 다시 돌아갔다 올 만큼의 돈이 주머니에 남아있지 않았다. 준은 잠깐 대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슬쩍 몸으로 문을 밀어보았다. 근데 의외이게도, 대문이 밀렸다. 오? 준의 감탄사와 함께 대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생각보다 쉽게 열려서 준은 당황했다. 이 집은 이러다가 도둑이라도 들면 어떡하려고 이러지. 그렇지만 그건 준이 알 바는 아니었다. 준은 약간 신난 발걸음으로 현관까지 향했다. 그때까지도 준을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용인을 많이 두지 않는 집인 건가. 준은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현관문의 고리를 붙잡고 두세 번 두드렸지만, 준의 예상대로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에 귀를 가져다 대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준은 현관에서 멀어져 저택을 다시 올려다봤다. 그제야 창문마다 커튼이 닫혀있음을 알아냈다. 준은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하기야, 오늘은 햇빛이 조금 세긴 했다. 근데 그렇다고 모든 창문을 다 가리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준은 한참 동안 창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현관을 두드렸다. 집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렇다면 혹시? 준은 대문을 밀었던 것처럼 현관에도 몸을 기댔다. 그리고 힘을 주어 밀었다. 육중한 현관문은 맥없이 밀렸다.

그날처럼 준은 아무도 없어 보이는 현관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진짜로 아무도 없을 것 같진 않았지만, 이번엔 자신도 ‘길을 잃었다’는 것보다는 훨씬 그럴싸한 명분이 있었다.

현관문이 닫힌 저택 안은 준의 기억보다 어두웠다. 자연광이라고는 실내에 한 줌도 들지 않고 있었다. 다만 벽에 걸린 촛대들이 은은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던 그때와는 왜인지 다른 느낌에 준이 흠칫 놀랐다. 이 집은 대체 뭐 하는 집이지. 준은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둡고 텅 빈 로비는 쓸쓸해 보였고, 어딘지 먼지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파티를 한 날로부터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준은 천천히 로비 정중앙에 놓인 원형 탁자로 다가갔다. 조용해서인지 타일 위를 지나는 준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탁자 위엔 불이 밝혀지지 않은 가스 랜턴이 있었다. 그 유리 부분을 준이 손으로 살짝 쓸어보았을 때였다.

“Monsieur. 그대는 어디든 몰래 들어오는 게 취미인가 봐.”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준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들며 가스등을 만지던 손을 확 뒤로 뺐다.

“아니, 그. 이건요.”

준은 뒤늦게 자신이 도둑처럼 보일까 싶어 무서웠다. 남자는 그날처럼 어둑한 계단 위에서 옅은 파란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준이 우물쭈물하자, 남자는 준이 서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때처럼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늘은 무슨 일이지? 보시다시피 파티를 하고 있진 않은데.”

“아, 그.”

준은 허둥지둥 와인 잔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원형 탁자 반대편까지 온 남자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제야 준은 그에게서 그날과 다른 점을 발견했다. 남자의 한쪽 눈에 단안경이 걸려있었다. 잘 어울린다. 준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거 돌려드리려고.”

“…그럴 필요 없는데.”

남자의 입에 예의 그 미소가 걸렸다. 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지만 돌려드리고 싶어서요. 그날 일은 죄송하기도 하고.”

“사과 받아들이지, monsieur.”

남자는 그날과 같은 몸짓을 취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동작. 우아하게 살짝 숙여진 고개. 단안경 끝에 달린 얇은 사슬이 그의 몸짓을 따라 흔들렸다. 준은 홀린 듯이 그걸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젓고는 탁자 위에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 저 놀리는 건 관두세요.”

“이런. 이 말투‘도’ 마음에 안 드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리고 있음이 더욱 확실해지자 준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귀가 홧홧해진 것 같았지만, 준은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저택 주인이신 줄 몰랐어요. 그러니 그만 놀려주세요, 미스터.”

“그럴까?”

남자가 숨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준은 자기 귀가 뜨겁게 느껴지는 게 분했다. 준은 티 나게 헛기침을 한 다음, 그날부터 쭉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미스터.”

“그 전에 그대 이름부터 들을까.”

먼저 물은 건 난데. 준은 또 한 번 분했다. 그래서 용기 내 탁자의 반대편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자는 준을 피하지 않았다. 그 옅은 미소가 얄미웠다. 준은 그의 코앞에서 멈춘 채 또박또박 말했다.

“준이요.”

“그렇구나.”

“미스터는요?”

“없어.”

“…장난치지 마시고요.”

준이 그렇게 대꾸하자 남자의 입이 양옆으로 더 움직였다. 그러더니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준은 여전히 그의 몸짓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알고 싶어?”

“그러니까 물었죠.”

살짝 퉁명스럽게 말한 준은 뒤늦게 후회했다. 그렇지만 기왕 엎질러진 물, 준은 뻔뻔하게 고개를 조금 치켜들기까지 했다. 남자가 다시 한번 더 웃었다. 이번에는 짓궂다기보다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에잇.”

“에?”

“숫자 여덟. Eight. 그냥 그렇게 불러.”

“그게 이름이에요?”

“이름이 못 될 건 없지.”

그렇게 답하며 그 남자, 에잇은 원탁에 손끝을 올려놓은 채로 준에게 다가왔다. 준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에잇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왔다. 원탁의 표면과 그의 손이 마찰해서 나는 소리가 조용한 로비에 크게 울렸다. 준은 계속해서 탁자를 따라 움직였지만 원형이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준이 와인 잔을 내려놓은 곳까지 돌고서야 둘의 걸음은 멈췄다. 멈추었을 때는 이미, 에잇이 준에게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선 모양새였다.

“준.”

“느, 네.”

혀를 씹었다. 준은 아픈 것보다 또 귀가 홧홧해지고 있는 게 창피했다. 그의 숨소리도, 자신의 숨소리도 너무 크게 들렸다. 숨소리 사이로 그날 맡았던 그 향기가 났다. 준은 눈을 이리저리 어색하게 돌리며 숨을 더 크게 들이켜고 싶었지만 참아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아프게 느껴질 때쯤, 에잇이 입을 열었다. 그는 어쩐지 준의 반응을 보고 즐기는 것 같았다.

“나에게 볼일은 더는 없을 것 같은데.”

준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준은 에잇의 얼굴을 이제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단안경으로 가려졌어도 그의 눈매는 날카로웠고, 그의 까만 머리칼 중 몇 가닥이 질서 없이, 그렇지만 예쁘게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목덜미를 덮는 그의 뒷머리가 단아해 보였다. 그리고 준은, 괜히 그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 나가줄래.”

에잇의 말은 의문형이었지만 말끝은 올라가 있지 않았다. 그러니 동의를 구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나가라는 말이었다. 준은 그사이 그의 입술 사이에서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입속에서 평범히 보이는 게 아닌 무언가가….

톡.

에잇이 손끝으로 원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준이 어깨를 떨었다. 눈을 움직여 입술이 아닌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에잇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셔 있었다.

에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준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입꼬리를 움직였다. 준은 원탁에서 벗어나 현관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에잇의 고개는 준을 향해 있었다. 그 서늘한 파란 눈만으로 준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준은 곁눈질로 자신이 현관에 거의 다 다가왔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툰 몸짓으로 정중히 인사했다. 에잇도 눈을 살짝 내리깔며 목례했다. 준은 그 순간 뒤돌아 문을 있는 힘껏 밀고 바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날처럼, 심장이 너무 두근거렸다. 입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아 힘들었다. 사용인이 보이지 않는, 대낮에도 어두운 저택을 벗어나려고 준은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는 중에도 준은 벌써, 그의 향을 다시 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놀렸나?

에잇은 햇빛에 닿지 않게 조심히, 현관문을 밀어 닫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한 번씩 본 인간은 많았지만 또다시 만나러 온 인간은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괜히, 심술을 부린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 그 아이의 반응이 재밌었다. 다가가면 눈이 커지고 조금 놀리면 귀가 빨개지고. 발코니에서 맞닥뜨렸을 때는 조금 성가셨지만 그의 나이를 짐작해 보니 어쩐지 자신의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그뿐이었다. 흠, 에잇은 짧게 숨을 내쉬며 단안경을 벗어냈다. 그 아이가 문을 더 크게 열어젖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에잇은 몸을 돌려 원탁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보기 좋게만 놓여있었을 뿐이기에, 물건들 위에는 먼지가 얕게 덮여 있었다. 그중 가스등에만 그 아이의 손이 닿아 먼지가 벗겨져 있었다. 에잇은 그것에 손을 뻗었다가, 닿기 직전 멈추었다. 대신 손을 돌려 잡동사니 중 가장 새 것인 와인 잔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에잇은 3층의 그 방, 서재로 돌아왔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그 아이가 아직도 저택 근처에서 뛰고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대신 에잇은 손에 든 와인 잔의 림 위를 천천히 손끝으로 쓸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청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서둘러 움직이는 발소리는 아주 작게 들렸다. 날쌘 아이구나, 에잇은 그렇게 생각했다. 더욱 집중한다면 그 아이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관두기로 했다. 기왕 짓궂기로 한 거, 에잇은 그것보다 더 짓궂은 짓을 한 번 해볼 셈이었다. 미간이 좁혀지도록 와인 잔에 신경을 집중했다.

잠시 후 에잇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로 눈을 떴다. 아무래도 너무 놀린 게… 맞는 것 같았다. 와인 잔을 통해 보게 된 최근 며칠간의 준의 모습은, 여러 의미로 에잇에게 놀라웠다. 특히나 ‘Au revoir’를 몇 번이고 말하는 준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기분을 안고 에잇은 와인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준이 어디에 사는지도 보았으니 필요하다면 – 어떤 식으로 그 아이가 필요해질지는 몰랐으나 에잇은 그냥 그런 직감이 들었다. - 그 아이를 찾아 갈 수도 있었다. 에잇은 한숨을 폭 쉬었다. 잠깐 멍하니 책장을 의미 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서재를 나섰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에잇은 파티가 끝난 뒤에도 미뤄놓은 청소를 할 셈이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청소는 창문을 열 수 없기에 지금 시간엔 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복도에 자신의 발소리만이 나직이 울렸다. 저택은 너무나 고요했다. 가끔씩 에잇은 여기가 과하게 적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방금도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며칠 전 파티의 소음을 떠올렸다. 역시 이대로가 좋은 것 같았다. 차분히 발을 내딛은 계단에서는 작게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이 저택도 조만간 버려야할 지도 몰랐다.

몇 가지의 생각을 하는 새에 에잇은 다시 로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작은 이변이 사라진 로비에는 이전과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단순한 외로움. 에잇은 그 감정을 피부로 느끼며 원탁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가만히 잡동사니들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가져다 놓은 것인지도 모를 낡은 시집이 하나 있었다. 분명 아주 좋아했던 시였던 거 같은데, 지금은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은 모든 걸 덧없게 만들었다. 에잇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시집을 집어 들어 옆구리에 꼈다. 시간이 나면 아주 태워버릴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 옆으론 말라 비틀어져 바스라지고 있는 장미 몇 송이가 꽂힌 기다란 꽃병이 있었다. 이런 꽃병이 입구부터 놓여있는데 파티에 온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단 말이지. 에잇은 그 사실에 기묘한 재미를 느꼈다. 가벼운 코웃음을 흘리며 장미, 라고 부르기도 뭐한 그것에게서 눈을 뗐다. 나머지는 전부 의미 없는 물건들이었다. 위층으로 가려고 몸을 돌린 순간, 원탁 위의 물건 하나가 신경 쓰여 에잇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아이, 준의 손이 닿은 가스 랜턴. 에잇은 그걸 위층으로 들고 갈지 말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 랜턴은 며칠, 몇 달, 몇 년, 혹은 까마득한 몇 십 년 만에 에잇의 손에 들릴 수 있었다.

에잇은 해가 질 때까지 여러 방에 드나들었다. 언제 가지게 된 것인지 모를 물건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나는 물건도, 모두 이 저택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거슬렸다. 창고로 쓰는 구석진 방에 더 이상 에잇에게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물건들을 몰아넣었다. 그 방에 있는 내도록 케케묵은 먼지 냄새가 에잇의 코를 떠나지 않았다. 가끔은 재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에잇은 그 냄새들에서 어떤 감상을 남길 수 있었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방에서 에잇이 과거를 청산할 동안 준의 손이 닿았던 램프만이 비교적 새것 같았다. 그 램프는 방을 은은하게 밝혀주었다. 그 탓에 자꾸만 밀려드는 상념이 에잇을 짜증나게 했다. 물건들을 이리저리 구겨 넣는 도중 에잇은 몇 번씩이나 눈을 감아버렸다. 자신의 숨소리에만 온전히 집중했다. 그러기를 몇 번 더 반복한 뒤에야 에잇은 정리를 끝내고 창고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제 완전한 밤이었다. 3층 서재로 들어온 에잇은 드디어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 수 있었다. 발코니로 나서자 서늘한 밤바람이 그에게로 불어왔고, 그제야 에잇은 자신을 짓누르던 감정들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창문에서 뒤돌았다. 에잇의 책상 위에는 준이 돌려준 와인 잔 옆으로 그가 만진 랜턴 또한 놓여있었다. 에잇은 다시 눈을 감았다. 오늘은 더 이상 무언가를 느끼고 싶지 않았다.

에잇은 그렇게,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발코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래도 송곳니였다.

준이 에잇의 입술 틈에서 본 건.


이제 준의 신경을 빼앗은 건 우아했던 프랑스식 인사가 아닌 뾰족한 그의 송곳니였다. 준은 자신이 보통보다 긴 송곳니를 봤다는 것도, 이상했던 저택의 모습도, 에잇의 이름이 에잇이라는 것도 모두 신기했다. 에잇에게 물어볼 게 산더미였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볼썽사납게 뛰쳐나가 놓고 다시 그를 찾아간다는 건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다 지나고 나니 자신이 왜 도망간 건지도 잘 모르게 되었고. 에잇의 근처에 있으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뭔가… 쫓기는 것처럼. 준은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그걸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답답해하는 동안, 그의 생각은 평소처럼 다른 것들에 떠밀려 잊혀졌다.

준은 그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냥 그런 기분이,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준은 자력으로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했다. 준의 호기심에 희생당한 것은 버논이었다. 준은 와인 잔을 돌려주고 왔다는 그날 이후로, 버논에게 자꾸만 이상한 걸 물었다. ‘사람의 송곳니가 고양이처럼 긴 경우가 있을까’ 같은. 버논은 그 질문을 듣고 잠깐 이해할 시간을 가진 다음, 역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서야 ‘뭐라고?’ 하고 준에게 되물어야 했다. 준은 같은 질문을 했고, 버논도 같은 질문을 몇 번 더 반복하고 나서야 준이 뭘 보고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는 버논도 같이 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버논은 준에게 몇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실내가 어두운 탓에 준이 잘못 봤을 가능성이었다. 준이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갸웃거려도, 이게 제일 그럴싸한 결론이었다.

두 번째는 그 ‘에잇’이라는 남자는 사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 저택의 주인도 아니며, 그 저택에 들린 유령이라는 설이었다. 버논은 첫 번째의 경우가 아니라면 이게 맞는 것 같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준은 조금 떨떠름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글쎄…. 그렇다기엔 좋은 향기도 났는데.”

준은 그런 말을 중얼거렸고 버논은 또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준에게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궤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버논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귀신이라고 향기 안 나리란 법 있나. 귀신도 향수 뿌릴 수 있어. 진짜 날진 안 날진 나도 모르겠지만.”

그래놓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형이랑 있으니까 나까지 이상해지는 거 같은데, 이거.”

결국 두 번째는 음모론처럼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뭐야, 무서워.’ 정도의 이야기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세 번째 가설은… 마찬가지로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로 출발했다. 사람이 아닌데, 유령도 아니라면. 답은 하나였다.

“마법사인가.”

“버논, 같이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 힘들면 더 안 해도 돼. 식사 시간 놓쳐서 이러는 거 같다 너.”

“나 진지해. 배 아직 안 고프고. 아, 마법사가 아닌가. 아니, 형, 들어봐.”

“알겠어. 뭔데.”

“마법사가 송곳니가 길 리는 없지. 그리고 마법사도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뭐겠어.”

“뭔데.”

“늑대인간, 아님 뱀파이어.”

“………….”

준과 버논 사이에 아주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서로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결국 둘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럴 리가 없지.”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에잇’의 존재를 놓고 벌어진 두 사람의 회의는 이렇게 끝이 났다. 준도 버논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식사를 했다. 준은 잠들기 직전, 문득 그가, 정말로 뱀파이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가 정말 뱀파이어라면, 송곳니를 보여 달라고 하고 싶었다. 이불 속에 파묻힌 채 그의 향을 떠올리면서 실실 웃다가 준은, 곯아떨어졌다.

다음날부터 준은 자료 조사에 돌입했다. 일 년에 몇 번 가볼까 말까한 도심으로 마차를 타고 갔다.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버논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물어물어 드디어 들어간 도서관에서 준은 입구에서부터 풍겨오는 책과 그 먼지 특유의 냄새에 압도당했다. 얼떨떨한 기분을 안은 채로 준은 그 수많은 서적들 속에서 책등을 보며 띄엄띄엄, 글자를 읽어나갔다. 생각보다 뱀파이어와 관련된 서적은 많았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진실인지, 그래서 정말 흡혈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인지 아닌지, 준에게는 헷갈리는 것 투성이었지만 그래도 흥미로웠다. 에잇을 다시 보지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서 혼자서 호기심을 해결하려고 한 건데, 결과적으로 에잇을 다시 보고 싶다는 준이 욕망이 더욱 커졌다. 그에게 이 책을 그대로 내밀면서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로 타인의 피를 먹어야만 하냐고. 햇빛에 닿으면 안 되냐고. 그래서 커튼이 쳐져 있었던 거냐고. 여태까지 몇 년을 살아왔냐고. 책은 준의 호기심을 해결하기보다 증폭시킨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한동안 준은 에잇에 대한 생각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준은 파티에 다녀온 이후부터 계속 가족에게 생각을 방해 받았다. 이제는 가업이나 이으면서 결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고루한 이야기. 준은 알겠다고만 하고 제대로 된 대답을, 그러니까 가족이 원하는 대답은 내놓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떠한 선택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자유. 준은 계속 그 단어에 매달리고 있었다.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준은 왜인지 자유를 그 남자와, 에잇과 연관시키고 있었다. 준은 그 남자가 적어도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준은 책에서 읽은 내용들을 떠올렸다. 초인적인 힘과 변신 능력, 동물을 부릴 수 있는 능력에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삶까지. 그는 영원이라는 시간동안 대체 무얼 하고 지냈을까. 준은 에잇에게 그걸 가장 묻고 싶었다. 그 저택은 처음부터 그와 함께였을까? 그의 파란 눈은 처음부터 파란색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흡혈귀인데도 눈이 파란색이네. 왜인지 흡혈귀 눈은 붉은색일 거라 생각했는데. 파티에서도 검은 옷, 지난번에 봤을 때도 검은 옷차림이었는데, 검은색을 좋아하는 걸까? 그리고,

그 넓은 저택에서 혼자면 외롭지 않을까.

자유는 외로움일까?

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창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얼굴. 준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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