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심포니 02
양쪽 손등을 부딪쳐주세요
*장애를 가진 인물, 장애에 대한 언급 및 묘사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16부작 드라마는 어느새 12화 촬영을 끝마쳤다. 촬영과 운동시간을 제외하고 원우와 종일 붙어있게 되면서 이제 아이패드 없이도 원우와 어느 정도 대화할 수 있었다. 수어 선생님을 또 둔 것이 결국 들켰는데 원우는 오히려 칭찬을 해줬다. 촬영 현장도 함께 못 나가는 저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을 거라고.
나는 형이랑 대화하고 싶어서 배운 거야. 그 말에 원우는 느린 속도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잘했어. 칭찬의 의미로 민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손가락 두마디 넘게 자란 머리가 사르륵 손가락 사이에서 부서졌다.
“형이 그랬잖아. 드라마 끝나면 쓸 일 없을 거라고.”
민규가 손짓과 함께 입을 열었다. 구화와 수어를 동시에 한다면 원우가 제 맘을 두배로 알아줄까 싶어서.
잘나가는 배우, 배우 이전 아이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돈 많고, 시간 많고, 있을 것 없을 것 다 지닌 사람들은 인생이 심심하다고. 그래서 호기심이 들었나? 귀가 안 들리는 저에게, 어쩌면 살면서 다시 볼 일 없는 농인이라는 존재가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가 끝나고, 무대로 돌아가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면 저는 점차 잊혀질 것이고 귀찮아질 것이며 언젠가는 아 그때 걔? 데리고 놀기에 재밌었지 혹은 아 그 재미없는 새끼. 정도의 말로 축약될 것이라는 생각들.
“평생 쓸 거야. 형이랑.”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애정이 담뿍 담긴 눈을 보면 쓸데없는 믿음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거리를 두고싶다가도, 외면을 하고 싶다가도 넘치는 애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민규를 보고 있으면 그 애정에 답을 하지 않는 것이 죄 같았다.
이렇게 솔직한 내 앞에서 언제까지 너 스스로의 감정을 모른 척 할거야. 가까이 하고 싶잖아. 외면하기 싫잖아. 상처받을까봐 두려운거잖아. 내가 감히 널 아프게 할 사람같아? 믿음을 가져.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원우야, 어쩌면 너가 날 더 사랑하잖아.
언젠가 입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을 지우면 원우는 한결 솔직해진다.
[좋아해. 김민규.]
고요 심포니
양쪽 손등을 부딪쳐주세요
01.
사고를 당한 지 10년. 장애를 얻게 된 지도 10년. 평생을 청인으로 살아온 덕에 인공와우만 있으면 청인과 구분되지 않았다. 가나다라마바사. 미묘한 차이는 머리가 아닌 혀의 근육이 기억하고 있었고, 쨍쨍 찢어지는 인공와우의 자극으로 말소리와 차 소리, TV 속 배우들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변한 것은 단 하나, 자신에 대한 확신. 청인은 가질 필요도 없는 ‘다르지 않다’는 믿음. 스스로 듣지 못하는 소리를 만들어내며 사고 전과 후가 다를 바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했다.
‘원우야. 네 누나도 있잖아. ’
태어날 때부터 청각신경이 좋지 않아 말을 떼기도 전에 소리에 반응하지 못하던 누나는 엄마, 아빠 소리를 내기 전 수어를 배웠다. 적당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자 구화를 배웠지만 이해가 쉬울 뿐, 그가 농인인 걸 모르는 사람들에겐 비웃음만 샀다. 태생이 밝고 씩씩한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라고. 걔들은 듣는 거 말고 나보다 잘난 게 없어. 누나 덕에 어렸을 때부터 수어가 제2 언어였던 원우는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누나가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인지를 깨달았다.
누나처럼 씩씩하지 못한 원우는 일부러 입을 닫았다. 어설픈 발음으로 사고 이전의 삶을 흉내 내고 싶지 않았다. 알고 있는 발음대로 소리를 추측하며 대화하는 누나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행위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발악처럼 느껴졌다. 사고 이후 연을 맺은 사람들에겐 자신이 어떤 경위로 농인이 됐는지, 청인의 삶을 살아본 적 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사고를 겪고 청력을 잃었음을 알리면 받게 될 설익은 동정이 소름 끼쳤다. ‘불쌍해’. 처음부터 들리지 않았다면 그 싸구려 동정의 값어치를 몰랐을까. 원우가 말을 하지 않으면 마치 금기인 것처럼 그 누구도 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사고 이전 꿈꿨던 생활은 전부 접어야 했다. 중학생 이후 앉아본 적 없는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꿈의 대안을 찾았고, 중고등생활을 모조리 쏟아부은 꿈과 비교할 바 못하지만 적당히 흥미를 느꼈다. 여기저기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나무조각들을 구상하고 만드는 것은 꽤 재밌는 일이었다. 눈 앞에서 바로바로 보여지는 결과물, 0.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 원우가 살고싶던 삶과 정확히 일치하면서도 정반대에 있는 삶이었다.
인공와우 수술이 의미 없는 누나와 다르게 아직 청신경이 일부 살아있는 원우는 사고 직후 몸이 회복되자마자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다. 조약돌만 한 크기의 자석이 귀 뒤에 찰싹 붙었다. 자석의 세기가 아파서, 기기의 탈부착에 따라 서 있는 세상이 바뀌는 게 낯설었다. 부품 없이 움직이지 못하는 기계가 된 기분. 원우는 ‘잘 들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 음악 소리, 자동차가 부릉부릉 시동을 울리는 소리, 길고양이가 먀옹 우는 소리 전부 알았다. 그래서 인공와우가 대신 울려주는 쨍쨍거리는 소리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건 내가 아는 소리가 아니야.
그나마 살아있는 청신경의 유지를 위해서 인공와우를 계속 붙인 채 살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원우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들리지 않는 것들이 앞으로 더 잘 들릴 리 없었으니까. 인공와우를 붙인 채 이전과 차원이 다른 소리를 듣는 대신 아예 듣지 않는 편이 좋았다. 사고 이전의 삶으론 돌아갈 수 없다. 부질없는 희망을 안고 살고 싶지 않아서.
그런 원우를 바라보며 가족들은 사고 당시에도 하지 않던 걱정을 시작했다. 원래도 조용하고 차분하던 아이가 더욱 말이 없어지니 원우의 아버지는 정신과 상담을 예약했다. 어머니는 농인 커뮤니티 중에서도 원우처럼 후천적 농인이 된 사람들의 모임과 원우를 이어주려 노력했다. 원우의 누나는 원우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직 낯선 세상이 적응이 어렵냐고 절망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이 세상도 너의 세상이야. 누나의 말에 자신이 어리광을 부렸음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어루만져 주는 위로가 있고 나서야 현실 감각이 일깨워졌다.
[쉽진 않을 거야, 원우야. 험난하겠지. 그렇지만 우리가 가는 길엔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 네가 새로 꿈을 찾은 것처럼, 사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기회들이 너를 찾아올 거야.]
원우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외부 활동이 있을 때면 안전을 위해서라도 인공와우를 부착했지만, 집 안에서는 오롯이 고요를 느꼈다. 그러나 누나가 남긴 위로는 원우의 가슴에 무겁게 앉았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맞으며 새 세상에서 찾아오는 것들을 불행이 아닌 기회라고 수백번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원우는 다른 차원의 행복을 찾을 준비를 했다.
02.
13화의 여자주인공 수아는 여전히 남주 현민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현민의 마음은 그녀를 처음 보고 반했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듣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을 느꼈다. 수아의 지인들이 뒤에서 쑥덕이는 말들. 수아를 향한 안타까움의 시선. 속상해하는 수아 부모의 눈물. 결국 관계를 먼저 놓는 것은 현민이었다.
“현실성 없다.”
[어디가?]
“둘이 이대로 헤어지는 거 말이야.”
[너무 현실적인데요. 애초에 쉽지 않은 거 알았잖아요.]
원우형, 혹시 너 T야? 민규가 입을 삐쭉이더니 말한다.
“우린 이런 일 없을 거잖아. 너는 이런 오해로 내 손 안 놓을 거잖아.”
원우는 그 입 모양을 전부 보았고, 대답 대신 시선을 대본으로 향했다.
수아가 말했다. 내가 널 이해하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이렇게 쉽게 내 손을 놓는 거야? 현민이 이별을 고하기까지 느꼈을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이해가 없는 대사. 현민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현민은 수어를 완벽하게 할 줄 모르는 수아를 보며 차근차근 손을 움직인다. 수아가 이해하기 쉽도록 단어 사이를 쉬어가면서.
넌 별이고, 하늘에서 반짝여. 난 여기 바다 아래 있는 바위야.
우린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위에 있어.
원우는 민규의 대본 위를 콕콕 짚은 뒤 따라 하라는 듯 손을 움직인다.
넌 별, 하늘. 난 바다, 바위.
우린 절대, 평행선.
민규가 곧잘 따라 한다. 별, 하늘, 바다, 바위. 몇번을 반복하더니 이내 싫증이라도 난 듯 대본을 거칠게 덮어버린다. 뭔가 맘에 들지 않는다.
“오늘 우리 집 갈래?”
원우가 한참을 고민하니 성질 급한 민규, 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지금 거절하면 그림 진짜 이상해지는 거 알지.”
턱을 괴고 민규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던 원우가 결국 피식, 바스락거리는 웃음소리로 답한다.
[거절할 생각 없었어요.]
“그러면 왜 고민했어?”
재깍재깍 받아치며 답하던 원우가 유달리 느리게 손을 움직였다. 뭐라고? 처음 보는 단어가 이해되지 않아 되묻자 원우는 아랫입술을 한참 깨물더니 겨우 키보드를 내려쳤다.
[오늘, 우리… 그거 해?]
애초에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전원우 네가 먼저 자극한 거야. 열린 문 사이로 민규 뒤를 따라 들어오며 허리를 감는 팔에 결국 허벅지 내리쳐가며 참아오던 색욕이 터져 나왔다. 오늘 우리 그거 해? 순진함이 묻어나온 글자들은 이미 자음과 모음이 흩어져 맞물린 입술 사이로 녹아들었다. 그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되묻자 귀 끝은 붉어진 채로, 그거 있잖아.…그거. 부끄러움에 적지 못하는 단어. 난 그냥 우리 집 구경시켜주고 싶어서. 발뺌하자 이미 붉은 몸의 끝부분들은 터질 듯 발개지고. 근데, 형이 원하면.… 정도를 모르고 짓궂어지자 주먹으로 쿵, 아프지 않게 가슴을 내리친 뒤 등을 돌리는 전원우. 멀어지려는 원우의 팔을 붙잡고 그 길 그대로 차에 올라탄 민규는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를 원우가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랐다.
그러나 민규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감싸 안고 그 어느 때 보다 솔직한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원우 덕에 민규는 이내 창피 같은 걸 느낄 여유 따위 없음을 깨닫는다. 행위가 낯설지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민규와 자신의 아래를 움켜쥐고 민규를 흥분의 정점으로 이끄는 원우의 손가락은 손을 이용해 말을 할 때만큼이나 낭창하고 아름다웠다.
“읏...!”
기어코 원우의 몸 안을 온전히 탐색하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원우의 목소리가 밭은 숨에 섞여 나왔다. 원우는 알까. 지금 제가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듣는 목소리가 너무 야하고 간지러워서 가랑이 사이로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민규의 아래가 단단하게 팽창한다.
“눈 감지 마, 원우야.”
나 봐. 우리 지금 서로를 알아가고 있잖아. 전원우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하며 원우를 하나라도 더 알아가는 과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달고 더웠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원우의 볼로 툭툭 떨어지자 찡그리며 눈을 감는 얼굴. 미간에 손을 얹고 구겨진 피부를 만져주자 붉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저를 올려다보는 원우의 눈동자 역시 색에 취해있었다.
나 봐줘. 눈 감지 말고 내 마음을 봐줘.
쉴 새 없이 앞뒤로 흔들리는 골반, 잔뜩 힘이 오른 하체가 내 마음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비웃을 테지만
“…아!”
가득 찬 하체가 버거워, 열에 달아오른 짐승처럼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민규의 목뒤로 감긴 두 팔을 풀지 않는 원우를 보며 민규는 그가 제 마음을 오롯이 삼켰음을 알았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하체와 하체를 더 깊게 잇고, 반경이 커지는 하체의 움직임에 어깨에 매달린 다리가 더 높이 매달려 달랑거렸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뒤를 감싸고 있던 팔이 툭 떨어져 이불을 움켜쥔다. 파스스 떨리는 어깨와 꾹 깨문 아랫입술, 마음을 봐달란 말에 어떻게든 흥분을 이기고 민규의 얼굴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 하나하나 사랑스럽지 못한 것이 없어서 민규는 원우의 종아리에 입을 맞췄다.
[야경 예쁘다.]
한바탕 뒹굴고 손 하나 까딱일 힘도 없어 보였는데, 물을 마시러 주방에 간 사이 이불로 온몸을 감싸 안고 유리창 앞에 선 원우는 창 너머 도심 한 가운데의 강을 내려다본다. 달빛을 받아 일렁이는 물결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에 한참이나 시선을 빼앗겨 뒤에서 몸을 감싸오는 민규에 움찔거리며 놀라면서도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나보다 더 예뻐요?”
대답으로 원우가 주먹을 쥔 채 검지로 엄지를 살짝 튕겼다. ‘조금’.
“나 아까부터 궁금한 거 있는데.”
한 쪽 눈썹을 살며시 들어올리는 원우를 확인하곤 민규가 말을 이었다.
“이거, 무슨 목걸이야?”
민규의 손이 원우의 목덜미로 향한다. 조금 전 까지 물고 핥은 상처 위로 금속 줄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쇄골과 쇄골 사이로 무겁게 떨어진 줄 가운데에는 낡고 달아 흠집이 잔뜩 난 펜던트가 보인다. 동그란 원형과 가운데로 유치한 셀로판지를 덮은 플라스틱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싸구려 금속에 가격을 매길 수 없는 허접한 세공. 그럼에도 원우 목에 달랑달랑 매달려 존재감을 잃지 않는 장신구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민규의 시선을 따라 펜던트를 어루만지던 원우가 대답했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열쇠]
눈과 눈을 맞추며 더 설명을 바라자 원우가 목걸이를 조심히 풀어 민규에게 건넸다. 손에 쥐고 바라만 보는 민규를 향해
[이제 너 해. 드라마 기념 선물.]
양팔로 끌어안듯 몸을 부딪쳐 결국 목걸이를 걸어준다. 차가운 금속의 속성이 무색하게 원우의 온도를 입고 따듯하게 목덜미를 덥혀온다. 민규는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쓰다듬었다. 원우의 세월과 아픔, 희망과 좌절, 설렘, 의지를 갉아먹은 펜던트가 민규의 손안에서 무겁게 빛났다. 한 눈에도 그다지 값져 보이지 않는 것을 긴 세월 묻어날 정도로 오래 끼고 있던 이유가 궁금해서, 자신이 모르던 시간을 질투해서 던졌던 질문에 답이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그동안 그 유리를 통해서만 좁은 세상을 봤다면, 이젠 원 밖의 세상도 보는 거야. 민규는 이제 수어도 할 수 있으니까 네 세상이 더 커진 거지. 십여 년간 착용했던 목걸이를 빼자 목 주변으로 허전함이 몰려왔다. 그 허전함을 달래 줄 새로운 사람이 있다 믿는 원우는 민규의 목에 걸린 자신의 열쇠를 보며 목걸이를 선물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잉, 감동이야 저너누우. 커다란 덩치를 구기며 안겨 오는 민규. 잠시 식었던 몸을 감싸는 따듯한 체온이 마냥 싫지 않아 안기는 걸 다 받아주니 허리를 더듬던 손길이 끈적해졌다.
‘네 세상을 알아가고 싶다’는 민규의 고백에 대한 원우의 화답이었다. 너는 그럴 자격이 충분해. 나를 알아가 줘. 나를 이해해줘. 외치는 말들. 부끄러움에 원우의 몸을 만지며 욕구가 달은 척 해보지만, 원우의 목덜미로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며 민규는 다짐했다. 그 어떤 세상에서도 네 용기를 내가 먼저 놓지 않겠다고.
03
드라마 방영과 함께 막내가 제대했다. 오랜만에 맞춰보는 군무에 뼈가 삐그덕거리는 듯했다. 1년 반가량 쉬었던 노래를 다시 부르려니 헤드폰 속 스스로의 목소리가 어색해서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피디의 잔소리 역시 덤. 리더형과 곡 작업도 시작했다. 당장 다음 앨범에 실릴 순 없더라도 직접 음계를 그리고 가사를 쓴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조금 여유 있게 될 줄 알았던 생활이 오히려 ‘본업’을 되찾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민규 너 연기 못하지?]
드라마 첫 화를 본방사수한 원우의 첫 마디였다.
“너 댓글 찾아봤지.”
부루퉁 튀어나온 입술에 눈을 찡그리며 즐거워하던 원우가 말했다.
[원래 그런 건 나 같은 사람이 더 잘 봐.]
대사 읊을 때 입 모양, 혀의 쓰임, 입꼬리, 눈썹 근육, 눈꺼풀.… 비장애인은 그냥 넘어가는 것도 나한테는 소통의 창구니까. 그래서 알았어. 너 발연기야. 발음 엄청 구려.
솔직히 인정. 1년 반 쉬고 왔다고 없던 연기실력이 늘 리 만무, 애인이 생겼다고 갑자기 애정연기에 메소드가 될 리 역시 만무. 그래도 애인한테 핀잔 당한 건 조금 속상해서 오쪼쪼 서운함을 표하던 차에 원우는 민규의 손을 붙잡고 쓰다듬은 뒤 말했다.
[그래도 수어는 잘했네. 누가 가르친 거야?]
“아 전원우! 그건 칭찬이 아니라 자뻑인거 알지?”
수업이 사라지니 함께 있는 시간도 줄었지만 원우는 민규의 연기를 챙겨보았고, 민규는 틈이 날 때마다 원우의 작업실과 공방, 집 문을 두드렸다. 순항하는 연애, 서로에게 찾는 안정감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과 비례하는 애정이 싹텄다.
드라마의 시청률은 고공행진이었다. 탄탄한 연기력의 여주, 대본 연출의 퀄리티, 남주를 맡은 민규의 팬덤 세박자가 골고루 갖춰져 온갖 커뮤니티와 연예 뉴스를 장악했다. 때론 민규의 연기에 대한 혹평도 있었으나 전작 대비 나아진 연기력에, ‘그의 미래가 기대된다’는 평 역시 존재했다.
긴 군백기를 끝마치고 완전체로 컴백한 그룹의 4번째 정규앨범은 판매 신기록 547만장을 세웠다. 기세를 몰아 투어 일정도 잡혔다. 반년에 걸쳐 착착 세워진 일정에 그렇지 않아도 바쁜 민규는 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민규의 집이 비어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그 공백을 원우가 채웠다. 하나였던 칫솔은 친구가 생겼고 현관문을 열면 두 쌍의 슬리퍼가 나란히 집주인을 반겼다. 커다란 집에 하나, 둘 원우의 물건들이 채워질수록 원우가 없는 공간의 여백은 더욱 여실해졌다.
이럴 바에 그냥 들어와 사는 거 어때?
여기 형 작업실이랑도 가깝고 공방이랑도 가깝잖아. 어차피 요즘 집도 잘 안 들어가는데 그냥 우리 집 들어와.
원우는 전세 계약을 해지하고 곧장 민규의 집으로 모든 짐을 옮겼다. 안무 연습으로 자리를 비운 집 주인은 드레스룸의 옷장 한편을 깨끗하게 비워놓았다. 차곡차곡 얼마 되지 않는 옷가지로 드레스룸을 채우자 화려한 패턴과 색감으로 어지럽던 공간 속에 무채색이 나란히 균형을 이뤘다.
나 뽀뽀. 앞으로 월세 대신 하루에 세 번 먼저 뽀뽀해주기.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린 원우가 민규의 볼을 부여잡고 가볍게 쪽쪽 입을 맞췄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벌어진 입술 사이를 끈적하게 파고들려는 것을 막아서며 원우가 말했다. 유려한 손과 소리 없이 말을 내는 입 모양으로.
[뽀뽀는 그냥 해줄 수도 있는데.]
아 괜히 말했어. 뽀뽀 그냥 받고 섹스 같은 거로 할걸. 억울해. 눈썹이 잔뜩 늘어진 민규의 볼을 쓰다듬으며 이제는 익숙하게 민규를 달래온다. 내가 뭐 하나 만들어줄게. 뭐가 좋을까? 테이블? 민규가 몸을 구겨 자신보다 작은 키의 원우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넘치는 사랑을 눌러 담아 짓이기듯 품 안에 넣는다. 콩콩 숨 막힌다며 등을 내리치는 손이 귀여워 목덜미 사이로 코를 박는다.
소파 어때. 침대까지 가기 급하단 말이야.
원우는 새로 들어오는 의뢰까지 마다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디자인부터 세밀한 가공까지 전부 원우의 손을 거친 파란 소파가 큰 거실 한 가운데를 차지했다. 색은 민규가 골랐다. 민규가 드러눕고도 살짝 남을 정도의 큰 소파였다. 가구를 처음 들인 날, 월세를 대신해 선물했던 소파 위에서 한참을 시달린 원우는 땀에 젖은 민규 품에 안긴 채 일 년 치 월세 정도는 메꿨다고 생각했다.
새로워진 집, 그럼에도 익숙한 환경 속에서 둘은 사랑을 했고 사랑을 키웠다. 가끔은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둔다고 싸웠고, 매일 라면만 먹는다며 투정을 부렸다. 어떤 날은 책 읽는 데 방해 좀 그만하라며 성질을 부렸고, 함께 짝은 맞춘 게임에서 연패해서 투덕거렸다. 그래도 밤이 되면 민규는 침대 왼편에 누운 원우를 짓눌렀고, 원우는 민규의 따끈한 몸을 끌어안고 잠을 자는 일이 당연해졌다.
04
“형. 애들이 형 보고 싶대.”
[누구?]
“우리 멤버들.”
[싫어.]
형은 왜 내 세계는 안 궁금해? 화보 촬영이 있다던 민규는 화장기가 묻은 얼굴 그대로 귀가했다. 종일 굶다 들어와 원우가 끓인 라면을 세젓가락으로 끝낸 민규의 조심스러운 청원이였다. 원우의 대답은 역시나 고민도 안 한 거절. 민규의 머릿속엔 어느 날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확신을 할 수 없는 관계 속 반복되는 거절, 불안함을 무기로 덤빈 게임에 화답했던 말캉한 혀. 이번엔 어떤 대답을 줄까.
[그냥, 싫어.]
“전원우.”
저너누, 혀엉. 발음을 뭉개며 부르던 호칭 대신 또박또박 입 모양을 만든다.
“난 네가 알고 싶어서 드라마 촬영 끝나고도 1년 넘게 수어 선생님 찾아가. 어떤 게 배려일지, 어떤 게 널 연민한다고 오해할지 몰라서 묻고 싶은 게 있을 때 마다 백번은 더 넘게 고민해. 등진 너를 붙잡고 싶다가도 네가 놀랄까 봐 네가 뒤돌아볼 때까지 기다려. 네 손을 잡고 싶다가도… 네 말을 듣고 싶어서 너를 지켜보기만 해.”
너는 어때?
빠르게 쏟아지는 말에 집중하는 눈이 어지럽다가도 정확히 초점을 사로잡는 네 글자, 너는 어때. 너는 뭘 하고 있냐는 비난. 넌 나를 위해 무슨 희생을 하고 있어? 나는 매 순간 너를, 네 세계를 이해하려 고군분투하는데 너는 내 가족 같은 동료 만나는 것도 힘들어?
사랑이란 감정에는 무조건 희생이 동반될까. 희생이 동반된다면 그것은 언제나 좀 더 ‘나은’환경의 사람의 몫일까. 민규를 향한 애정을 의심한 적 없었지만,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것들이 머릿속을 자욱하게 만들었다. 나는 과연 민규를 알기 위해, 민규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나 좀 사랑해주라.”
김민규는 여태까지 저의 애정을 의심한 적 없었을까.
[민규야, 다음에. 다음에는 진짜 꼭....]
등을 돌린 민규에게 말을 걸 수 없어서 원우의 문장은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어느 연인들이 그렇듯 냉전은 시시하게 끝을 맺었다. 옷 벗었으면 바로바로 세탁실에 갖다 놔. 응 미안. 사과 제대로 해. 내민 볼을 톡톡 치는 손가락, 먼저 내민 화해의 손에 입술을 쪽 맞댄다. 머쓱함에 올라간 입꼬리가 창피해 한 손으로 가린 입술을 쉽게 제압하고 침입하는 뜨거운 혀. 원우는 민규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며, 이번엔 민규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한다. 원우가 그린 손가락의 모양대로 열이 홧홧하게 올라왔다.
[♡]
한국에서 3일간의 콘서트가 끝났고 두 달간 일본을 왔다 갔다 하는 일정이었다. 중간중간, 드라마의 성공으로 얻어낸 화보 촬영도 있었다. 하필 함께 보내는 밤과 밤사이 공백이 길어지는 시점에서 쏟아진 불만에 원우와 민규 둘 다 생각할 시간이 길어졌다. 매일 보내던 메시지도 며칠이 멈췄고, 둘 모두 채팅방을 들락날락하며 하지 못한 말들을 쓰고 지우는 고민이 이어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녹아버릴 걸 알면서도.
[민규야. 그날은 미안해.]
“내가 말이 좀 심했어.”
[나 공연 초대해줘.]
뭐? 진짜?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민규가 원우의 제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말고 광대를 올리며 웃었다. 꼭 일주일 만에 산책하러 나가는 멍멍이 같아. 이웃집 개가 무서워 집 대문으로 가는 골목 입구에서 누나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너가 그 멍멍이였으면 누나 귀찮게 안 했을 텐데.
[언제야?]
자카르타 공연 끝나고 한 달 뒤, 아직 공개하진 않았지만 한국 공연 회차가 적어 아쉬워하는 한국 팬들을 위해 앵콜공연이 마련되어 있었다. 어쩌면 원우가 민규의 무대를 처음 보는 날이 될 수도 있다. 아이돌 남자친구를 두고서도, 그의 무대를 한 번도 찾아보지 않던 원우가 처음으로 민규의 무대에 관심을 가졌다. 뭐야 전원우, 진짜 많이 미안했나 보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원우가 했을 고민이 여실히 와닿아서, 또 민규에게 진심을 알려줄 최선의 답안지를 찾아낸 것이 기특해서. 마음이 봄날의 눈처럼 사락거린다.
05.
“김민규. 너 요즘 연애해?”
연습생 시절부터 리더의 입대 전까지는 숙소에서 5명이 동고동락을 같이 했기에 멤버들 사이에선 비밀이 없었다. 민규는 원우와 처음 마음을 나눴던 시점부터 새로운 연애에 대해 털어놓았다. 수어 선생님인데, 듣지 못해서 수어로 얘기해. 어리벙벙한 멤버들의 얼굴에 대고 당부도 했다. 너희한테만 얘기하는 거니까 회사에 얘기 들어가지 않게 쉴드좀 잘 쳐주라.
그게 1여년 전인데,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건가?
“왜. 어디 기자가 딜이라도 하재?”
“이 실장님이 애 많이 쓰신 거 같더라. 너한테 아는 척하지 말라는데 그래도 네 일인데 입 닫는 건 아닌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사이드미러와 룸미러를 번갈아보며 좁은 골목을 향해 차를 모는 매니저 형은 궁금한 게 많다는 듯 한참 입을 들썩였다.
“그 양반이? 웬일이래. 다른 데 같았으면 불러다가 진작 쥐잡듯이….”
“너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 때문 아니야? 실장님이 많이 아끼는 거 같던데.”
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원우는 아무래도 일반인. 거기다가 뉴스 중에서도 연예 뉴스라곤 펼쳐보지도 않는, 이 세계와는 먼발치에 선 사람이었다. 드라마 때문에 시작된 연, 민규를 도와주다 깊어진 사이인데 민규때문에 일상이 깨지는 일은 회사에서도 원치 않았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원우는 농인이었으며 그에 대해 말 한마디씩 올리는 무개념들이 없진 않을 것이다. 민규는 모처럼 이 실장의 일 처리가 맘에 들었다.
근데 실장님이 아낀다는 건 무슨 소리야?
“실장님이 누굴 아껴? 나를?”
“…너 몰랐어?”
네 수어 선생. 실장님이랑 형 동생 하더만. 너 연애하는 거 비밀로 해도 실장님은 이미 알고 계셨을걸.
불현듯 처음 원우를 소개해줄 때 실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협회를 통해 선생을 구한 게 아니고, 알음알음 구한 거라고. 그 알음알음이란 게 자기 지인이었던 거였네?
“형.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인지 알아?”
민규의 집 앞에 차를 정차시킨 매니저는 고개를 저었다. 너도 모르는 걸 내가 무슨 수로 알아. 직접 물어봐.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민규가 방 한 칸을 비워 마련해준 서재 안에서 작업에 여념 없던 원우가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낯선 공기, 아침에 뿌린 향수가 옅어져 은은하게 코끝을 감쌌다. 웅웅 거리는 공기, 불퉁한 입술이 방금 분명 뭐라고 한 거 같았는데….
“이 실장. 형이랑 아는 사이라며.”
가끔 민규의 질문들이 채찍질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수업은 어쩌다 맡으신 거예요?’
민규와의 수업 첫날, 몇 마디 나눠 보지도 못한 시점에 그가 물었다. 원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규가 던지는 물음표가 콩알만 한 심장에 창살처럼 콕콕 박혀오는 기분. 너는 나에게 한 가지를 묻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10가지로 분산한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원우의 누나와 가족, 사고 이전의 삶, 원우의 꿈 같은 것들. 네가 나를 하나라도 더 알았으면 좋겠던 마음은 이런 뾰족한 질문들을 만날 때 전부 무력해져 갔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내가 상처받지 않을까. 어디까지 말해줘야 네가 실망하지 않을까.
눈을 감으면 민규의 목소리가 사라진 말끝이 그려진다. 사람들은 질문을 할 때 말끝을 올리지. 들리지 않는 너의 목소리는 나에게 질문을 던지다 지쳐 얼마만큼 올라가 있을까. 답하지 못한 질문에 죄스러움을 느끼다가도, 네 질문이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 실장이 얘기한 줄 알았어.]
“어떻게 안 사인데?”
[그냥…어쩌다.]
그만 물어봐. 다섯 글자가 그대로 치환된다. 민규의 입을 쳐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는 원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숱이 빡빡한 정수리에서 결코 먼저 입을 열지 않겠다는 고집이 느껴진다. 원우의 침묵 앞에서 또다시 무기력함을 느끼는 순간, 공연에 초대해달라며 머쓱하게 머리를 긁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원우는 노력하고 있어. 나만큼 너도 노력하고 있을 거야. 이해하기 힘든 세계에 발을 들이겠다고 먼저 문을 두드린 것은 자신이다. 전원우는 그저 가만히 있다 열린 문틈으로 침입해온 침입자를 품었을 뿐이다.
형, 우리 싸운 지 얼마나 됐지? 맨날 라면만 먹는다고, 같이 운동 안 간다고 투닥인거 말고. 나 일본투어 다니는 사이에 대판 싸웠고, 화해하고도 태국이니, 마카오니 다니느라 정신없었잖아. 그니까 우리 같이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까. 노력하겠다는 다짐이 지난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나 좀만 더 기다릴게. 형이 진짜 나 사랑해주기를.
06.
일찌감치 공연장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스탠딩석은 민규의 팀 응원봉을 든 팬들이 메워 차고 있었다. 원우 주변으로는 앳된 소녀들이 민규의 사진과 이름이 인쇄된 것들을 들고, 공연 시작 전부터 한껏 들떠있다. 나 여기 와도 되는 건가…. 리허설 때문에 아침 일찍 외출준비를 끝마친 민규가 신신당부하던 것이 선명했다.
‘원우야. 꼭 끝까지 보고 가. 매니저 형한테 말해놨으니까 꼭 대기실 들리구. 애들이랑 인사하고 집 같이 가자.’
그래. 약속한 거니까. 민규의 세계를 알아가기로. 더 이상 민규를 혼자 나에게 오게 하지 말자. 서로를 만나러 가는 길, 그 중간에서 만나기로 다짐했으니까. 처음 와보는 공연장의 열기에 압도된 듯 신경이 바짝 섰다. 이런 대규모의 콘서트는 성인이 되고선 처음 와보는 것이다. 거리에서 헤드폰을 쓰고 숨어들어 갈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들으러 온 사람들, 느끼러 온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위해 백조의 발길질처럼 한 시도 쉼 없이 긴장해야만 했다. 공연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손에 땀이 나 주먹을 꾹꾹 눌러 쥐는 것은 원우 몫이었다.
스피커의 소리가 둥둥거리며 심장을 울려왔다. 사방의 팬들이 내지르는 고함, 암전된 조명. 하얀 핀 조명과 함께 무대 아래에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는 남자들. 그 한 가운데의 김민규. 공연이 시작됐다.
음악을 멀리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음계 대신 진동이 느껴졌다. 쿵쿵, 쿵. 둥둥둥둥. 귀가 간지러웠다. ▶ 대신 ⏸아이콘이 떠 있는 화면에는 재생 바가 초를 바꾸며 길어지고 있다. 들리는 것은 없었다. 재생 바를 이동해 봐도, 볼륨을 조정해도 화면만 바뀔 뿐 변하는 게 없었다.
‘청각장애인도 음악을 즐길 수 있어요.’
농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깨기 위해 농인 협회들이 제작하는 홍보물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어릴 적 누나도 그랬다. 원우야, 청각장애인도 음악을 느낄 수 있어. 쿵쿵 거리는 진동이 심장까지 흔들잖아. 그게 음악 아니겠어?
개소리.
귀를 때리는 진동이 뇌파를 스치고, 혈관을 타고 흘러 심장을 자극할 수 있다면 그 정의는 반드시 ‘고통’이어야 할 것이다. 수십번도 넘게 따라 불렀던 노래, 노래방처럼 3, 2, 1을 띄우지 않는 이상 쫓아갈 수 없는 유희.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초별로 떨어지는 선고. 끔찍한 악몽은 단 한번으로 족했다. 원우는 음악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민규의 콘서트가.
통역가의 도움 없이는 노래의 가사도 알 수 없었다. 민규가 화면을 잡힐 때 아니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쿵쿵, 홀을 울리는 진동만으로는 지금 그가 노래를 하고 있는지, 멘트를 치고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모두가 들으라고 입에 가까이 댄 마이크 때문에, 원우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입 모양이 가려서. 팬들에게 고맙다고 하는 걸까. 기분이 좋다는 걸까. 사랑한다는 걸까.
땀으로 젖어 잘생긴 얼굴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4층까지 꽉꽉 매어 찬 공연장을 훑는 시선의 끝이 멀었다. 원우는 고작 1층 객석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참 멀구나.
청인인 김민규, 농인인 전원우. 무대 위에서 춤추는 김민규, 무대 아래에서조차 박수칠 수 없는 전원우. 좀처럼 접점이라고 없는 관계. 전원우보다 한 살 어리고, 또 많이 어린 김민규. 무대 위 쏟아지는 함성에, 전원우가 아닌 사람들이 던져주는 애정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받는 만큼 주고 싶어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내는, 사랑이 넘쳐나는 김민규. 가까이서 봤을 때 어렴풋이만 느껴졌던 사실들이 귀를 제외한 모든 신경으로 선연하게 느껴진다.
곧 조명이 바뀌고, 쿵쿵거리는 진동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온다. 째질 듯한 고함을 추측하는 것은 소녀들의 표정이었다. 공연 시작 전부터 손을 전부 적셨던 긴장감이 온 몸의 신경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어째서 좌석이 있는데도 모두들 서 있는 건지,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같이 서 있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사방의 응원봉들이 같은 박자에 맞춰 앞뒤로, 양옆으로 흔들렸다. 쿵쿵, 둥둥. 이젠 이 진동이 음악 소리인지, 심장박동인지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식은땀으로 낮아진 체온에 오한과 구토감이 몰려왔다.
우린 너무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애써 눈 감고 무시하던 현실. 네가 가장 빛날 수 있는 곳에서 나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는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함께 하는 순간마다, 네 손을 잡고 두 눈을 맞추는 순간마다 이 고통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못하겠어.
민규야, 나는 이런 거 못 견디겠어.
공연장으로 출발하기 전 민규가 쥐여줬던 응원봉을 자리에 그대로 둔 채, 원우는 자리를 뛰쳐나왔다.
[전원우, 어디야.]
[영통도 안 받고, 톡도 안 읽고 어디 간 거야?]
[매니저 형이 너 찾겠다고 2시간을 공연장에서 헤맸어.]
[집 도착한 거지? 나 애들이 뒤풀이 하자는데 못 빠질 거 같아.]
[집 들어왔다고만 알려줘. 원우야.]
공연이 끝나고,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집에 도착하니 새벽 4시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까지 원우와의 채팅방에는 숫자 1이 그대로였다. 돌겠네. 아무래도 뒤풀이는 빠졌어야 했나 보다. 갔더라도 얼굴만 비추고 나왔어야 했나 보다. 오랜만에 연애하더니 사랑에 눈 돌아 동료고 뭐고 다 버리고 가냐는 장난 섞인 빈정거림에 반응해서는 안 됐다.
“원우형.”
모든 조명이 꺼지고 어두운 거실. 한 구석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원우가 서재에 있음을 알린다. 자신이 온 줄도 모른 채 작업이든, 독서든 뭔가에 열중하고 있을 전원우. 서재 문을 여니 역시나, 문을 등지고 책상 위에 구부정이 앉아있는 뒷모습.
딸깍, 딸깍.
방 조명을 한번 껐다 켜며 귀가했음을 알린다. 그제야 바퀴 달린 의자를 돌려 저를 봐주는 전원우.
“여태 안자고 뭐 했어?”
[생각 정리.]
“몸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간 거 아니었어?”
공연 중간에 나가는 거 다 봤어. 그제야 머쓱하게 웃는다. 물기가 다 말라 버석한 머리가 눈썹을 다 가린다. 잠옷으로 입은 흰 티는 한쪽으로 늘어져 쇄골을 적나라하게 보인다. 건조한 얼굴, 애써 웃으려는 입 모양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공연은 내가 하고 왔는데, 지친 건 전원우다.
민규는 걸음을 옮겨 원우에게 다가선다. 차마 제대로 지우지 못한 무대화장과 땀 냄새를 가리려 쏟아부었던 향수 냄새가 여실하다. 머리를 꽁꽁 싸맨 비니와 내내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집에 들어오고 나서야 벗겨져 귀에서 달랑거리는 마스크. 화려한 무대의상을 대신 검은 트레이닝바지와 흰 티. 화려한 얼굴 아래로 익숙한 차림이 오히려 이질감을 만들었다.
“카톡은 왜 안 봤어?”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폰을 찾는다. 대체 무슨 정신인 거야, 전원우.
“그렇게 가버리면 내가 걱정할 거란 생각 안 해? 연락이라도 줬어야지.”
[미안. 정신이 없었다.]
성의없는 변명이 민규의 피곤함 위로 기름을 부었다. 공연 내내 렌즈를 끼고 있느라 뻑뻑한 눈을 찌푸려본다. 술기운까지 더해져 머리가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공연 끝나고 6시간 지났어. 공연 절반만 보고 나갔다 쳐도 8시간 지났고. 무슨 생각을 정리했는데? 들어나 보자.”
얌전히 고개 숙인 정수리를 노려본다. 제 손톱만 만지작거리며 쉽게 답을 주지 않는 원우를 내려다본다. 두통이 몰려왔다. 앙다문 입술, 고통스럽다는 듯이 찌푸려진 미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야.
원우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차단 된 시야. 원우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회피였다. 그러나 감은 눈 사이로 좀 전의 화려한 무대가 아른거린다. 땀에 젖어 행복하게 웃고 있는 민규가 그 위로 떠 오른다. 어렵게 수어를 하지 않아도, 손에 쥔 마이크 하나로 수 만명과 대화하는 김민규의 웃음이 그려진다.
평범하게 데이트하는 김민규. 연예인이라는 신분으로 편하게 돌아다니진 못해도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다면 애인과 하고 싶은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원우와 데이트하는 김민규. 입 모양을 가릴 수 없어 마스크와 모자를 쓸 수 없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연인들. 손을 잡고 팔짱을 낀다. 김민규와 전원우는 그럴 수 없다. 손을 잡으면 말을 할 수 없다. 운전하는 김민규 옆 조수석에 앉는 그의 연인. 라디오 소리를 키우고 졸지 말라며 재잘거린다. 가끔 민규가 클락션을 울리면 시끄럽다고 잔소리를 한다.
원우는 그럴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오늘처럼 김민규가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순간들이 올 때 원우는 그 옆에 함께 설 수 없다. 김민규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들 속에서 원우는 함께 박수를 쳐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민규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헤어지고 싶어.]
겨우 그거였다.
07.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모든 투어 일정이 종료되었다. 드라마의 성공으로 몇 개의 대본이 들어왔다. 1여년 남짓 남은 계약기간을 최대한 뽑아먹기 위해 미니앨범 준비가 다시 시작됐다. 투어를 다니느라 잠시 정지상태에 있었던 리더와의 곡 작업은 리더형 부분의 녹음을 끝마쳤다. 김민규만 나서면 됐다. 김민규만.
“야, 김민규! 휴가 딱 일주일이라고 했지! 너 이 새끼 정신 안 차려?!”
“형. 시끄러워. 자꾸 소리 지르면 전화 끊는다.”
언제부터 둘의 온기가 익숙했다고, 커다란 침대는 김민규 혼자만의 체온이 낯설다는 듯 차갑디차가웠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걸린 감기는 휴가 기간 일주일을 꽉꽉 채우고서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돌기 좋아하던 김민규가 일주일 휴가도 집구석에 콕 박혀있더니, 이젠 스케줄도 펑크내겠다고 전화가 왔다. 침대에 누워있느라 죄 눌린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 ‘나 일주일만 더 쉴래.’
로드매니저, 스케줄 매니저까지 두 손 두 발 다 떼고 나서야 이 실장이 나섰다.
“속상한 건 속상한 거고. 일은 해야지.”
“그동안 모르는 척하느라 애썼네, 이 실장도.”
원우가 집을 나간 지 일주일이 되었다. 갈 곳이라고야 뻔했다. 살림을 합치며 정리한 오피스텔 대신 본가, 혹은 작업실 그것도 아니면 공방. 찾아가려면야 찾아갈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자는 전원우, 제대로 된 이별의 이유도 말해주지 않는 전원우에게 그랬다간 정말 영영 도망가버릴 것만 같았다.
“형은 전원우랑 연락해? 잘 지낸대?”
“…그렇게 가까운 사이 아니야.”
“잘 지내는지만 알려줘.”
공연 날 새벽, 피곤과 술에 적셔진 채 방 스위치를 깜박거리던 민규를 향해 원우는 이별을 고했다. 느린 타자로, 또박또박 여섯글자에 마침표까지 찍었다. 수어로 하면 못 알아듣겠다고 생떼라도 피울 텐데, 너무도 잘 이해해 먹는 글자들이 모니터를 채웠다. 헤어지고 싶어.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패드를 켜면 그 메모장이 화면에 덩그러니 띄워진다. 여섯글자와 마침표 뒤로 커서가 깜박 깜박인다. 더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더 말할 사람은 사라졌는데도.
민규는 오열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연습생 생활과 군 복무 중에도 연애는 틈틈이 해왔었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까인 적도, 까였다고 빌어본 적도 없었다. 전원우 발치에 무릎을 꿇고 한 번만 살려달라 애원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려달라고, 다 고치겠다고 매달렸다. 원우의 무릎이 떨어지는 눈물로 축축이 젖었다. 그런데도 계속 빌었다. 화장은 덜 지워지고, 머리는 엉겨 붙고, 땀 냄새 풀풀 나고…. 개같이 추했다. 그런데도 전원우 눈을 끝까지 쳐다봤다. 혹시나 제 소리를 못 들을까 봐. 입 모양을 조금이라도 놓칠까 봐.
외출이 피곤한 건지, 김민규가 질린 건지 얼굴에 짜증이 잔뜩 묻은 전원우가 물었다.
[내가 얘기하면, 이해는 해?]
그리곤 민규가 알아먹기 힘든 속도로 손이 움직였다. 드문드문,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과 모르는 단어들이 원우의 손에 섞여들어 갔다. 민규와 대화할 때와는 다른 속도였다.
“천천히. 원우야. 좀만 천천히….”
[지금 네가 느끼는 기분. 난 너랑 대화할 때 매일 느껴.]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타닥타닥 귀를 간지럽히던 귀여운 소리가 아닌, 쿵쿵거리며 고막을 때리고 심장을 때리는 소리였다. 민규 대신 키보드에 화를 푸는 사람처럼 키 버튼을 하나하나 누를 때마다 손끝에 힘이 실렸다. 차라리 때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원우는 민규를 봐주지 않았다. 공연 중간 사라지더니, 새벽이 다 되도록 연락 한번 없었단 사실에 치밀어 오르던 화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되었고, 애원과 항변으로 점철된 울음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내가 잘못했어. 더 잘할게, 응? 더 노력할게. 네가 얼마나 높은 벽을 세우든 내가 다 부시고 들어갈게. 형, 제발.”
[민규야. 그건 벽이 아니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거봐, 넌 내 세상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잖아. 부수면 허물어지는 벽인줄 알잖아. 원우는 친절해서 비난마저도 친절하게 말했다. 눈물이 차올라 곧 울 것 같은 눈을 하고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울음을 참으려 코끝이 빨개진 주제에 매정이 친절인 줄 알고 민규를 비난하려 들었다. 그 속내가 투명해서, 정말 어쩌면 조금 더 떼 써보면 붙잡혀줄 것 같아서. 민규는 끝까지 품에 안은 원우의 다리를 놓지 못했다.
“내 세상은 너야.”
그때 전원우가 그랬다. 이번엔 수어였다. 수십번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기에 절대 까먹을 수 없는 말이었다.
넌 별이고, 하늘에서 반짝여. 난 여기 바다 아래 있는 바위야.
우린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위에 있어.
개 같은 이별 고백이었다. 조금의 희망도 품지 말라는 선언.
그 수어를 보고 나서야 아, 이별이구나 싶었다. 전원우의 6시간. 이별을 고민하고 선언하기까지 고작 6시간이 걸렸다는 게 오히려 ‘많이 힘들었나 보네’ 싶었다. 고작 6시간 동안 혼자 무슨 땅굴을 판 거냐는 비난 같은 건 쏙 들어갔다. 그냥…. 그냥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어떤 죄로 잡혀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추궁하면 했던 모든 행동을 죄 삼아 술술 불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원우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전원우의 세계로 어느 정도는 들어갔다고 믿었는데 눈을 뜨고 현실을 자각하니 전원우의 세계는 처음 본 날 301호의 두꺼운 철문처럼 단단하게 닫혀있었다. 14:00 전원우와의 약속 시간. 시계 시침은 13:59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네가 원하면 물어는 볼게. 근데, 다시 말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거만큼 가까운 사이 아니야.”
폰을 붙잡을 힘도 없어 볼 위에 얹혀둔 채 맥없이 누워있던 민규가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침실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원우의 짐들이 제 자리는 이곳이라고 항변하듯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향한 민규는 지난 밤 까둔 채 절반을 넘게 비운 위스키를 잔에 채웠다. 목덜미부터 정수리까지 찌릿찌릿하며 두통이 울렸다. 머리가 무겁다. 온몸이 무거웠다. 넘칠 만큼 가득 채운 잔을 들고, 그 언젠가 야경이 예쁘다며 눈을 반짝이던 원우가 서 있었던 그 자리에 발을 맞대고 선다. 반짝이는 야경 대신, 잔뜩 헤집어진 머리와 말라비틀어진 눈물 자국, 볼품없이 꺼진 볼, 술에 절어 검게 오른 얼굴이 유리창에 비쳤다. 아, 못났다.
그리고 그제야 여전히 제 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싸구려 목걸이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원우의 열쇠. 전원우와 세상을 연결해준 열쇠. 전원우를 만나고, 전원우의 세상으로 들어오는 문을 활짝 열라며 전원우가 걸어준 선물.
“실장님. 진짜 미안한데요. 나 좀만 더 쉴게.”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폰 하나 쥐는 것도 무거워 원우가 선물해줬던 파란 소파 위로 대충 던져버린다. 잔을 가득 채운 위스키가 꿀꺽거리며 목으로 넘어간다. 갈증 나.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계속 갈증이 났다. 갈증이 나면 술로 채우고, 그래서 더 갈증이 났다. 남은 술을 탈탈 털어 마시고도 부족해서 진열장에서 새 병 하나를 뜯었다. 이번엔 잔을 채우기도 귀찮아서 병에 입을 댄 채로 들이킨다. 안주도 없이 한 병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야 술기운이 올라 소파 위로 눕는다.
아 여기 누우면 안 되는데. 아직 원우냄새 남아있는데. 몸을 일으킨다. 서재로 향한다. 애초에 남은 방을 원우의 서재로 바꾼거라 책상, 책장, 컴퓨터까지 전부 전원우꺼다. 소파보다 더 위험했다. 결국 좀 전까지 누워있던 침실로 향한다. 일주일 동안 혼자 누워있었는데도, 본능적으로 원우가 눕는 왼쪽 자리는 건드리지도 않았나보다. 원우가 누운 모양 그대로 베개가 구겨져 있다. 시발. 전부 다 전원우였다. 화장실에는 초록색 칫솔과 짝맞춰 보라색 칫솔이 비스듬히 꽂혀있다. 쓰레기통에 처넣으면 그만인 것을 그러지 못해서 욕실에서도 도망치듯이 나왔다. 집주인은 김민규인데, 여기저기 붙여진 이름은 전부 다 전원우라 민규가 있을 곳이 없었다. 현관마저도 가지런히 놓여있는 슬리퍼 한 쌍이 또 다른 이의 부재를 증명한다. 민규는 그마저도 견딜 수가 없어 문을 열고 나온다. 제집이 제집 같지 않아서, 발 길이 닿는 대로 도망쳤다. 얼굴을 가릴 생각은커녕 외출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했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커다란 강이 눈앞에 있다. 산책로 대신 우거진 수풀이 있는 수변, 매일 밤이면 원우의 눈길을 받던 물결이 여느 때 처럼 반짝인다. 목에 걸린 목걸이, 반짝이는 한강의 물결. 전원우로 부터 도망쳐 왔는데도 보이는 게 전원우라. 다 좆같았다.
“시발….”
듣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떻나 싶어서
“씨바알!”
소리도 질렀다.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는 허접한 세공과 오래된 세월답게 조금만 힘을 줘도 쉽게 뜯어졌다. 손안에 쥐어진 목걸이를 한 번, 눈앞의 강을 한 번 바라본 민규는
“다 꺼져.”
있는 힘껏 손안의 것을 집어 던졌다. 바람 소리와 거센 물소리 때문에 퐁당 하며 펜던트가 빠지는 소리 따위는 들을 수도 없었다. 진짜 이별이다. 일주일 전에 고해진 이별에 이제야 응답한다.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후련함이었다. 일주일을 울고불고했으니, 슬픔은 잔여분이 없었다. 후련하다! 시발, 잘 가라! 욕도 내뱉으면서 전원우를 보내려고 했다. 소리를 지르고 쌍욕을 뱉으니 몸도 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불과 일 분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가벼움이, 꼭 해선 안 될 짓을 한 기분이었다. 허전한 목 주변을 매만진 뒤에야 아차 싶었다.
아씨, 헤어져도 돌려는 줘야 할 거 같은데.
방금 던졌으니까 어딘가에 걸려서 떠내려가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민규는 대충 구겨 신고 나온 슬리퍼를 내던졌다. 잘 꾸며놓은 한강공원이 아닌, 잡초가 허리까지 올라오는 외진 곳이라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다른 곳이었으면 진작 119든 112든 출동했을 것이다. 아이돌이자 배우 김민규 한강공원서 자살 시도 연예 뉴스 1면을 장식하기엔 아직 할 게 많았다. 아니, 그니까 내가 지금 자살 시도를 하는 게 아니라 목걸이만 가지고 나오는 거잖아. 주변 수풀을 다 뒤집어봐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진짜 물에 들어갔나 보다.
설마 멀리 갔겠어. 간만에 느끼는 찬 바람과 명치부터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술기운에 사리 분별 잃은 민규는 한 발짝, 한발짝 강물로 향한다. 차가운 물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에워싸더니 발등을 덮고 금세 종아리까지 차올랐다. 민규는 허리를 숙이고 땅을 짚으며 펜던트를 찾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손의 촉감만을 이용하며 가는 모랫바닥을 헤집었다. 쉬울 리가 없었다.
“어, 어어!”
순식간의 일이었다. 한발 한발 앞으로 향하던 발이, 이내 쑥 꺼지고 중심을 잃은 몸이 기어코 앞으로 고꾸라졌다. 종아리 가에서 넘실거리던 물이 온몸을 덮쳤다. 놀란 마음에 두 발이 허우적거리더니 쑥, 푹 꺼진 땅을 밟았다. 종아리에서 허리, 가슴까지 순식간에 물이 차오른다. 시발, 살려줘. 나 진짜 죽을 마음은 없었다고. 소리를 지르려 벌린 입으로 강물에 몰아친다.
방향감각도 상실했다. 뒷걸음질만 하면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발은 더 깊은 땅을 밟는다. 강물이 입술을 덮고, 코까지 밀려들어 올 때가 돼서야 민규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래…. 시발. 그래도 자살보단 실족사가 덜 쪽팔릴 텐데. 실족사로 기사 났으면 좋겠다. 원우는 되도록 소식을 몰랐으면 좋겠다. 원래도 연예 기사에 눈감는 사람이니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절대 모를지도. 아, 실장님. 형 미안해. 일주일만 더 시간 달라 그랬는데, 이렇게 영영 사라지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그래도 원우형 탓은 하지 말아줘. 나 이별의 상처 그딴 거 아니고 그냥 사고니까.
원우야. 형. 미안해.
뭔지 모르지만 내가 다 미안해.
네 탓 아니니까 제발 잘 살아줘.
강물은 어느새 민규의 정수리를 덮으며 186cm의 거구를 집어삼킨다. 입과 코, 귀와 눈 온몸의 모든 구멍으로 침입하며 민규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귀까지 물이 차고, 사방은 어두움뿐이다. 팔다리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물 아래는 고요하다. 살려달라는 스스로의 고함까지도 잡아먹힌다.
넌 별이고, 하늘에서 반짝여. 난 여기 바다 아래 있는 바위야.
원우야. 나 지금 강 아래로 잠겼어. 여기 되게 조용하다. 너에게 세상은 이렇게 고요한 곳이었구나. 물 아래 단단히 박힌 바위처럼 고여있는 원우야. 기어코 내가 너의 세상을 이렇게 맛보는구나.
허우적거림이 멈추고 다시 고요가 찾아온 자리. 민규를 삼킨 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요하다.
08.
민규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2014년 12월. 정확히 10년 전의 겨울 한 가운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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