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es, and again

Ashes, and again 2

https://youtu.be/G89Qxv2LO0s


그리고 준이 에잇을 다시 만나는 데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 탓에 하늘은 오전 내내 어두웠고, 준은 셔츠 하나를 걸친 채 미친 듯이 숲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준의 혼인을 두고 가족과 막 싸운 참이었다. 준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는 죽기보다도 싫다고 외쳤다. 관심도 없다고 했다. 자기는 준비가 될 때까진, 운명적인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혼자이고 싶다고. 그리고 준은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그냥 남들과 같으면 안 되겠냐고. 결국 모두가 언성을 높였고 준은 물건 몇 가지를 던져버린 다음, 다신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집을 뛰쳐나왔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옷가지는 빗물에 푹 젖어 몸에 들러붙은 지 오래였다. 발이 자꾸만 꼬였다. 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탓에 준은 진창길에 엎어졌다. 진흙이 온몸에 묻었고, 준은 한동안 땅에 엎어져 있다가 등을 대고 누워버렸다. 빗방울이 나뭇잎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자기 얼굴을 때려댔지만 준은 개의치 않았다. 대자로 누워 숨을 골랐다. 폐가 쥐어짜이는 것 같았고, 심장도 머리도 두근거렸다. 어지럽고 구역질이 났다. 그제야 준은 서러워졌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 못할 물이 준의 얼굴에 가득했다. 볼썽사나운 울음소리도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결국 준은 목 놓아 울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준은 가늠할 수 없었다. 열기가 식어서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몸이 덜덜 떨려도 준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멈추지 못한 것일 수도. 희뿌옇게 가려진 준의 시야 속에서 녹림의 색이 아닌 무언가가 보였다. 주변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가 불쑥 시야에서 튀어나오더니, 점점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서 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 손은 준의 얼굴보다도 차가웠다. 준은 몸을 움츠리면서도 그 그림자를 알아보려 애를 썼다. 순간 파란 빛이 시야에 스쳤다. 아, 준은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준은 에잇의 저택 안에 있었다.

안락의자에서 준은 몸을 펄떡였다. 거의 튕겨 나오듯 의자에서 떨어진 준은 어리둥절하게 사위를 살폈다. 옷이 갈아입혀져 있었다. 눈앞에 있는 벽난로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왔고, 준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진 담요 몇 가지가 보였다. 뒤를 돌아보고 준은 또 한 번 몸을 펄떡였다.

“아! 놀라라!”

“내가 할 말 아닌가?”

그렇게 대꾸하는 에잇의 얼굴은 태연했다. 옅은 한숨과 함께 에잇은 준에게 손을, 정확히는 잔을 든 손을 내밀었다. 준은 멍하니 잔을 받아들였다. 따뜻했다. 준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잔을 들고만 있었다. 에잇은 그런 준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떨어진 담요 하나를 주워 준의 어깨에 얹어주었다.

“마시라고 준 건데.”

“그건 나도 알아요.”

“그럼 마셔.”

에잇은 준이 앉아있던 안락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준은 그 동작을 눈으로 쫓다가, 잔에 담긴 걸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홍차였다. 그것도 설탕이 몇 스푼 들어간. 준은 왜인지 감동 어린 눈빛으로 에잇을 쳐다봤다. 에잇은 벽난로를 보다가, 준의 시선을 느끼고 준을 쳐다보았다.

“…왜?”

“…….”

준은 또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코가 찡해지더니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준은 에잇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황급히 뒤돌았다. 눈을 꾹꾹 감아 눈물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그리고 홍차를 한 입 더 마셨다. 심호흡을 두 번 했다. 후, 후. 그리고 준은 뒤돌았다. 에잇이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준을 보고 있었다. 대체 뭐하냐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표정은 버논도 자주 지었었다.

“고마워요.”

에잇은 대답 대신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감동에 찬 얼굴로 홍차를 홀짝거리는 준을 가만 보다가 말을 붙였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

괜찮다면. 준이 빤히 바라보자 에잇이 황급히 덧붙였다. 준의 얼굴에 또 무언가가 벅차오르고 있었다. 준은 다시 뒤돌았다. 방금 전처럼 홍차를 마시고 심호흡을 하는 준의 모습에 에잇이 이마를 짚었다. 어려웠다. 오랜만에 상호 작용하는 상대가 이런 아이라는 건.

“그, 에잇.”

작은 목소리에 에잇이 이마를 짚었던 손을 치웠다. 어느새인가 준은 에잇에게로 조금 다가와 있었다. 에잇은 살짝 놀랐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응?”

“묻고 싶은 게 많아요.”

아까와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벽난로에서 타는 불꽃의 빛을 받은 준의 얼굴이 반만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상을 받은 에잇이 물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은 살짝 웃더니, 잔을 아무 데에나 내려다 놓고 물었다.

“에잇.”

에잇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뱀파이어 맞죠.”

이번에도 에잇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준은 그 눈빛에서 그와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살짝 무서움을 느꼈으나 그래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와인 잔 돌려주러 왔었을 때, 저 봤어요. 당신 송곳니. 귀신은 아닐 거 아니에요. 나한테 홍차도 만들어줬는데.”

그리고 숲에 엎어져 있던 사람을 데려와 주고. 준이 살짝 상기된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 공부했어요. 뱀파이어에 대해서. 그리고 이걸 제일 물어보고 싶었어요.”

에잇이 벽난로로 고개를 돌렸다. 준은 그 고개를 따라 움직였다. 벽난로를 등지고, 준은 물었다.

“외로워요?”

에잇은 아무 움직임도, 말도 하지 않았다.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만 들렸다. 준은 참을성 있게 에잇의 대답을 기다렸고, 에잇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준이 내려놓은 잔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준이 어깨 위의 담요를 단단히 감싸며 에잇의 뒤를 쫓았다.

준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건 에잇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살았다는 점이었다. 에잇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했다. 그중에는 깨끗하게 세탁된 준의 옷가지를 다시 준에게 내미는 것도 포함이었다. 준은 자신의 옷을 돌려받고 나서야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이 자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했다. 누군가는 준의 옷을 갈아입혔다는 뜻이고, 이 저택에는 사용인이 없다. 그렇다면….

단 한가지의 가능성에 생각이 미친 준이 비명을 꽥 질렀다. 그래도 에잇은 반응하지 않았다. 준은 거의 우는 목소리로 에잇에게 뭐라 뭐라 소리쳤지만 에잇은 대꾸 하나 없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준은 옷과 담요를 아무렇게나 껴안고 허겁지겁 에잇을 뒤쫓았다.

결국 둘은 가장 처음 만났던 서재에 있게 됐다. 정확히는 먼저 들어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는 에잇에게 준이 사정사정해 억지로 들어왔고 에잇은 준은 저지하려는 노력을 관둔 채 책상에 앉아 깃펜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준은 그가 쓰고 있는 게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지만 예의상 보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서 잠시 시선을 떼고 그의 책장을 구경했다. 다양한 책이 많았다. 준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쓰인 책들도 있었고, 대부분은 문학책이었다. 시집과 희곡들. 준은 그중에서 아무거나 꺼내서 훑어봤다가 금방 꽂아 넣길 반복하고 있었다. 아직도 내리고 있는 빗소리 사이로 에잇이 깃펜을 탁,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준이 에잇을 뒤돌아봤다.

“나는 네가 왜 숲에서 그러고 있었는지를 물었는데.”

아까 전과는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외로우냐고.”

“…네.”

“…….”

에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에 놓여 빛을 내던 가스 랜턴을 들고서, 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날처럼, 준이 뒷걸음질 쳤으나 이번엔 책장이 준의 도망을 막았다. 결국 둘은 또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게 섰다. 준은 에잇의 얼굴을 바라봤다. 에잇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랜턴이 따스한 빛을 내고 있었지만 그게 에잇의 얼굴까지 따뜻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에잇은 랜턴을 한 번 흔들어 보였다.

“네가 만졌던 랜턴이다. 기억 나나.”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

에잇은 그렇게 단언했다. 무엇이? 준은 그렇게 되묻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했다. 에잇이 미간을 좁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이 대치 속에서 준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과하게 긴장한 탓에 어깨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준이 부동자세를 유지하다, 조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에잇은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일상이 지루해서, 잠깐의 재미를 찾는 사람들이 나에게 흥미를 느끼지. 나는 너 또한 그럴 것이라 생각해. 그러니 나가. 이제 더는 너를 견딜 수 없다.”

에잇이 그대로 랜턴을 놓았다. 철제인 랜턴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준은 그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에잇은 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뒤돌아 서재에서 나가버렸다. 딸꾹. 준이 뒤늦게 딸꾹질을 했다. 떨어진 랜턴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준은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째서인지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가 준 담요를 좀 더 껴안아 봤지만, 준은 더 이상 따뜻함을 느낄 수 없었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다.

에잇은 빠른 걸음으로 창고로 향했다. 사납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있는 힘껏 문을 닫았다. 꽝, 하는 소리가 조용한 저택에 울렸다. 이 정도 소리라면 그 아이도 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에잇은 마른세수를 했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입술을 너무 강하게 깨문 탓에 피가 배어 나왔지만 에잇은 개의치 않았다.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눈을 감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예의 먼지 냄새와 재 냄새가 났다. 에잇은 자신이 이런 곳에 있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죽음의 냄새가 나는 곳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에잇은 외로웠다. 외로운 게 맞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에잇이 외롭지 않았던 때는 이제 까마득히 먼 옛날이 되어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저 한때 배웠던 지식처럼, 관념의 하나로 외롭지 않은 게 무엇인지 알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준의 존재가 먼지 속에 묻혀 있던 에잇의 어떠한 감정을 건드렸다. 에잇은 그게 특히나 싫었다.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 내일을 기대하게 되는 마음. 이대로 영원히 고립되고 싶지 않다는 감정. 그 필사적인 발버둥. 이젠 모두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런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는.

숲에서 인간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에잇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은 에잇의 흡혈을 위한 사냥터였고 사람들은 이런 깊은 곳까지 잘 오지 않았다. 그때도 에잇은 사슴의 목숨을 빼앗는 중이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에잇이 고개를 돌렸을 때에도, 소리의 근원지로 점점 다가가고 있을 때에도, 에잇의 입에서는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볼썽사납게 진창 속에 누운 인간, 준을 발견했을 때 에잇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입가를 닦는 것이었다. 자신이 이런 존재라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닦으면서도 에잇은 ‘왜?’라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준도 죽이면 되는 일이었다. ‘왜?’ 누워있던 준의 얼굴을 닦아주면서도 에잇은 이 생각뿐이었다. 왜. 기절한 인간을 등에 업고 저택에 돌아왔을 때, 에잇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기 얼굴에 빗물만이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에잇이 견딜 수 없는 건 준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였다.

자신의 그 감정들을 모두 이해하면서도 준에게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한 자신이 역겨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지금쯤 준은 화를 내며 저택을 나서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준이 영영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도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수 있게.

그리고 그때였다.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은.

에잇이 반사적으로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쓰러진 한 사람을 발견했다.

준이 눈을 떴다. 이번에는 푹신한 침구 위였다. 준이 눈을 대굴대굴 굴렸다. 어디지?

그리고 무심코 들이킨 숨에서 어딘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향기. 에잇의 침대 위였다. 준이 헉 소리를 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마에서 수건이 팩 떨어졌다. 그게 수건임을 인지하자마자 준의 머리가 핑 돌았다. 어, 맥없는 소리를 내며 준이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관자놀이를 꿰뚫는 것 같은 두통에 눈을 꽉 감았다.

“…가만있지.”

이젠 익숙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겨우 눈을 뜬 준은 에잇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아, 기쁜 듯한 소리가 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에잇이다.”

에잇은 준의 웅얼거림에 대답하지 않고 준의 이마에서 떨어졌던 수건을 집어 다시 미지근한 물에 적셨다. 물을 필요한 만큼만 짠 뒤에, 준의 이마에 턱하고 얹어버렸다. 차가운 탓에 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준은 헤헤,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있죠… 저 여기 누워보고 싶었어요….”

준은 열에 달뜬 채 계속 웅얼거렸다. 침대 곁을 뜨려던 에잇이 제법 파격적인 준의 발언에 눈썹을 들어 올리고 멈추어 섰다.

“향이 너무 좋아서…… 맨날 당신…… 안기는 생각을 했는데.”

진짜 포근하다…. 그렇게 말한 준이 입을 다물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로 봐서는 잠들려는 것 같았다. 에잇은 코웃음을 살짝 흘린 뒤, 방에서 나가려 했다. 손잡이에 손을 올린 그때였다.

“…좋아해요….”

에잇이 동작을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준은 눈을 감은 채 이불에 푹 묻혀있었다.

준은 며칠을 꼬박 침대 위에서만 보냈다. 비를 그렇게나 맞아댄 것이 화근이었다. 에잇은 기억을 더듬어 준을 간병했고, 그가 과하게 젖은 수건을 던지든 뭘 하든 헤헤, 웃으며 받아 넘겼으나 에잇이 만든 스튜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한 숟가락을 떠먹고 나서는 준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에잇은 그 표정을 보고 그릇을 빼앗아 가려고 했지만 – 어차피 자신의 요리 실력이 생전보다 형편없어졌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걸 시각적으로 확인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준이 그릇을 부여잡고 놓지 않았다.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었지만 에잇은 그런 준을 가만히 두기로 했다. 어차피 알아서 먹는 걸 포기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에잇의 예상과는 달리, 준은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의연한 얼굴을 한 채 그릇을 치우기 위해 에잇이 방을 나섰을 때, 에잇은 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었다.

그런 병간호 중에 에잇은 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 긴 이야기 속에서 에잇은, 준이 보기보다 강단 있음을 느꼈다. 하기야 그러니까 와인 잔 하나를 돌려주겠다며 여기로 쳐들어왔던 거겠지. 에잇은 혼자서 납득했다.

“그래서 가출한 거라고.”

“네. 안 돌아갈 거예요. 아, 돌아가라고 할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베드 트레이 위에서 식사 중이던 준이 수저를 에잇에게 겨눴다. 그러고는 아, 하고 바로 사과했다. 사과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에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생각도 없었어.”

“그나저나 고기는 잘 굽네요, 에잇.”

준은 에잇의 요리 실력은 무엇이든 최악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멀쩡한 스테이크가 식사라며 준에게 내밀어졌을 때, 굉장히 의외였다. 직접 만든 거냐고 물었더니 에잇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온 에잇의 대답 또한 의외의 것이었다.

“고기라면 이골이 났으니까.”

준은 반사적으로 왜, 냐고 물으려다가 이유를 깨달았다. 준이 입을 다물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에잇의 표정만이 태연했다.

“신경 쓰지 마. 네 말대로 난 피를 먹는데다 엄청 늙었거든.”

준의 침대 곁에 앉아있던 에잇이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대꾸했다. 준은 그 말에 먹던 스테이크를 뱉을 뻔했지만 겨우 참아낼 수 있었다. 대신 사레가 들려 기침을 심하게 했다. 에잇의 침구에 음식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던 준은 필사적으로 트레이를 향해 기침했다. 에잇은 그런 준을 잠자코 보다가, 자신의 조끼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준에게 내밀었다. 준은 고마움을 표시하면서도 억울하게 중얼댔다.

“전 늙었, 콜록, 다고 한 적 없, 는데, 요.”

“읽었다며, 책.”

그럼 알겠네, 에잇은 그렇게 덧붙였다. 눈물까지 맺힌 준은 에잇의 손수건에 입을 묻고 눈을 깜빡였다. 찬찬히 생각해보고 나서야 에잇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몇 년이고 하수구에 틀어박혀 살아서 등이 굽고 외형이 볼품없이 퇴화했다는 흡혈귀가 나오는 소설을 떠올렸다. 준은 그 내용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에잇을 위아래로 훑어보기만 했다. 무례한 행동인 건 알았으나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에잇은 그런 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전처럼 무심한 그 파란 눈으로 준을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에잇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기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 어떤 건지 알아?”

준은 그런 도축과는 아무 연관 없는 삶을 살았다. 오히려 단순히 파는 쪽에 가까웠다. 준이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날 먹으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준이 울상을 지었다.

“절대로 그 사냥감을 죽이면 안 돼. 죽이면 사후 경직 때문에 고기가 뻣뻣해져서 맛이 없어지지. 기절시키거나 간신히 숨만 붙은 상태로 만드는 거야. 그 상태에서 가죽을 벗기고 손질해야 해. 내장은 특별히 손질하지 않으면 별 맛이 없으니 버리고, 살코기는 잘 발라내어 핏물을 빼야 하지. 피를 빼지 않으면 냄새가 심하거든. 물론 준, 네 덕분에 피는 맛있게 먹었다. 널 돌보느라 여유롭게 사냥할 시간이 없어져서 말이야. 어쨌거나 맛있다니 다행이구나.”

에잇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색이 된 준의 얼굴을 보더니 후훗, 하고 작게 웃은 그는 뒤돌아 방을 나갔다.

에잇이 완전히 문을 닫고 나가 방에서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준은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삐걱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베드 트레이 위 남은 스테이크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문을 한 번 더 본 뒤, 다시 접시를 봤다. 스테이크가 단순한 요리로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붉은색의 고깃덩이를 선명히 떠올린 준은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다행히 준의 입 밖으로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준은 도무지 마저 먹을 수 없었다. 얼마 후 방으로 돌아온 에잇은 그릇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준은 에잇의 저택에 몇 달 동안 얹혀살게 되었다. 정확히는 억지로 눌러앉은 거에 가까웠는데, 에잇은 준에게 나가라, 견딜 수 없다는 둥, 랜턴을 던진다던가 하여튼 그런 행동을 또 하지는 않았다. 준은 이게 잘된 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다. 이젠 또 색다른 패턴으로 놀라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준은 매일매일 긴장 상태였다. 물론 에잇의 눈에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준은 마치 이 저택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마냥 굴었다. ‘뱀파이어는 정말 햇빛을 보면 안 되나요?’라는 준의 질문에, 에잇이 고개를 끄덕여준 뒤로 준은 아침마다 커튼이 열려있는 방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느라 진땀을 뺐다. 당연히 모든 방을 쏘다니며 확인했다. 거기다 준은 에잇에게 무언가 필요한 게 없는지도 꼬박꼬박 물어왔다. 어차피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는 에잇은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매번 묻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준의 질문은 그래도 꾸준했다.

그것 말고도 준이 하는 일은 많았다. 어디서 찾은 건지도 모를 먼지떨이를 들고 이 방 저 방을 쏘다녔고, 또 어디선가 나타난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청소했다. 에잇은 준의 행동이 오히려 더 많은 먼지를 내는 것 같았지만 본인의 쓸모를 찾아 기쁜 듯한 그 얼굴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준이 들어갈 수 없는 방이 하나 있었다. 아주 구석에 위치한 방이었는데, 희한하게 그 방의 손잡이에만 손을 올리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던 에잇이 느닷없이 등장해 준의 손 위로 손을 포개왔다. 그리고는 예의 그 미소 – 희미하고 미세한, 웃음이라고도 부를 수 없을 것 같은 그 표정을 지었다. 안 된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준은 그러고도 두세 번 더 그 방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에잇의 차가운 손에 저지당했고 결국엔 그 공간을 침범하는 걸 포기했다.

에잇은 준에게 방을 하나 준비해 주었다. 현관과 그다지 멀지 않은 방이었고, 에잇의 방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에잇은 준의 몸에서 열이 떨어지자마자 그 방을 안내했다. 이제는 자기도 자기 방을 써야겠다면서. 준이 ‘흡혈귀는 잠을 자지도 않잖아요’라고 버텼지만 평범한 인간인 준은 에잇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손목이 잡힌 채 억지로 끌어 나와진 준은 딱 봐도 청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렇지만 오래되었음을 숨길 수 없는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다. 준의 등 뒤로 문이 닫혔고, 준은 털레털레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철제 침대가 삐걱댔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던 준은 방금까지 에잇이 잡고 있었던 본인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러곤 가볍게 쥐어봤다. 처음엔 어느 정도 힘이 느껴졌지만, 이곳까지 자신을 이끈 에잇의 손아귀는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았다. 날 조심히 대해주는 걸까? 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맥박을 느껴보려 애썼다. 옅은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 에잇은, 나를 참아내고 있는 걸까.

저택에서의 식사는 준과 에잇이 같이 하는 일이 드물었다. 준이 부산스럽게 저택을 들쑤시고 다닌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때는, 에잇도 낮 동안 깨어있으면서 준에게 이런저런 참견 – 사실 그냥 아무 말 없이 준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준은 그의 눈빛이 조금은 자신을 재단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금방이라도 ‘이제 됐으니 나가’라고 할 것만 같은…. – 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에잇도 준의 일상에 익숙해진 것인지 낮 동안은 에잇의 방에서 잠자코 있었다. 아무래도 자는 것 같았다. 처음엔 의아해서 몇 번 방문을 두드려보곤 했지만 지금은 관두었다. 그래서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은 준 혼자만 할 때가 많았고, 에잇은 밤마다 어디론가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에잇도 준도 아무런 말을 나누지 않았다. 에잇은 그 외출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고, 준은 모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아무튼 준은 해가 떠 있을 동안 온전히 자유로웠다.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고, 원래 살던 집보다 훨씬 넓은 이곳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청소를 끝내고 아침을 먹은 뒤에는 에잇의 정원을 맘껏 돌아다녔고, 숲에도 가끔씩 산책을 다녀오곤 했다. 에잇의 저택 주변은 놀랍도록 인적이 드물었다. 몇 달이라는 시간 동안 준은 한 번도 에잇이 아닌 사람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마을과 멀다 해도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았는데도. 준은 가족들이 이곳에 있는 자신을 찾아내면 어떡할까, 이런 생각도 종종 했었지만 그다지 오래 하진 않았다. 준은 이 자유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에잇이 어떻게든 해주리라 생각했다. 에잇도 이제는 자신이 없으면 불편할 거라고 준은 멋대로 그렇게 자만했다. 아무렴 이제는 그 을씨년스럽던 저택이 번듯한 곳이 되었는데. 준은 자기 덕분에 에잇의 저택이 사람 사는 집다워졌다고 생각했고, 그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다. 정확히는 흡혈귀가 사는 집다워졌다고 해야겠지만. …애초에 흡혈귀가 사는 집이라고 하면 이전의 모습이 더 맞긴 했지.

그런데 오늘 준은 식사 자리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자리에 앉은 에잇을, 준은 어색하게 바라봤다. 여느 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에잇은 준이 당황하든 말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

특별히 감정이 실리진 않은 목소리였다. 준은 어색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앉기 전에 의자에 몸을 한번 부딪쳤다. 으,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준이 부끄러워했으나 에잇은 항상 그래왔듯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식기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에잇의 그릇은 빈 채였고 준의 그릇 위에는 아직 김이 따뜻하게 올라오는 스테이크가 있었다. 준은 어색하게 나이프를 집어 들고 에잇의 눈치를 봤다. 에잇은 먹어도 된다는 듯 고개를 한번 움직였다. 음…. 준은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고기에 나이프를 가져다 댔다. 전에 에잇이 얘기해 준 도축 이야기가 잠깐 생각났지만, 준은 그 생각을 이어 나가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서 에잇의 눈치를 마저 보기로 했다. 에잇은 빈 그릇을 앞에 두고는 와인 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다만 준은 그게 와인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와인 잔에 담긴 내용물은 와인처럼 붉은 빛이기는 했지만 와인에서는 볼 수 없는 약간의 점성을 띠고 있었다. 딱 하나, 준의 뇌리에는 그런 성질을 가진 물질이 떠올랐다. 애써 모른 척 하고 싶었다. 아니, 모른 척 해야 했다. 어떡할까, 준은 고민했다. 아예 눈을 감고 고기를 썰어야 하나? 제법 황당한 생각에 도달한 준이 진짜 실행에 옮기기 직전, 에잇이 입을 열었다.

“몇 달 동안 여기서 지냈는지 기억해?”

“저, 저요?”

그럼 너 말고 누구겠어, 같은 눈빛으로 에잇이 준을 바라봤다. 고기를 자르다 말고 준은 눈을 잠깐 굴렸다. 그러니까 대략….

“…세 달?”

“그쯤이지. 그래서 말인데.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가는 게 어떨 거 같아?”

에잇이 차분하게 일렀다. 준은 에잇이 어떻게 안 건지 약간 놀랐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흠, 숨소리를 내고 준은 식기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고민했다. 적어도 고민하는 척을 했다. 당연히 집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 달동안 깜깜무소식으로 살았으니 집으로 돌아가 봤자 벌어질 일은 뻔했다. 결혼 강요를 다시금 받게 되겠지. 하지만 그 전에 벌을 받을 거였다. 엄마도 아빠도 자식이 제멋대로 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일을 저지른 나도 참 나다. 준은 그런 감상을 남겼다. 어떻게 혼나게 될까? 창고에 갇히기? 그럼 에잇의 저택에서 나간다고 치고 에잇에게 혼나는 것 좀 연습하게 해달라고 할까? 그 말을 한다면 에잇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준은 벌써 떠올릴 수 있었다. 조금 웃겼다. 히죽이는 준을 보고 에잇은 마침 준이 상상하는 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준은 공상에 빠져 버려 에잇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보지는 못했다.

에잇은 준의 얼굴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나갈 생각이 없다는 걸. 은 나이프를 손에서 굴리던 에잇은 손을 멈추었다. 그대로 나이프를 거꾸로 쥔 채, 칼끝으로 그릇 위를 가볍게 쳤다. 도기와 날붙이가 부딪혀 나는 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준은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갈 생각이 없나 보구나.”

“…안 될까요?”

작은 목소리로 준이 대꾸했다. 자기의 눈치를 보는 작은 동물 같은 얼굴에 에잇도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에잇은 준에게 대답하지 않고 와인 잔을 든 채 피 냄새를 맡으며 잠깐 고민했다. 준에게 나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본 건 더 이상 이 아이가 지내기에 저택이 안전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이 잔 속에 들어있는 피도 운이 나빴다면 구하지 못했다.

마을 주민들이 숲 근처를 얼쩡대기 시작한 지도 제법 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에잇도 그저 우연인 줄 알았다. 드물긴 했어도 가끔씩 사냥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게 왜 드문 일이었냐 하면, 근처의 ‘잡기 쉬운’ 동물들은 에잇이라는 포식자 덕분에 거의 없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개체 수는 알아서 조절하고 있었다. 다만 그 조절은 에잇 본인을 위한 조절이었다. 마을의 사람들이 사냥할 정도의 개체는 없었다. 이곳 말고도 숲이 많았으니, 사람들은 자연히 이곳에서 멀어졌다. 벌써 몇 년도 더 된 일이다. 그들에게 여기는 못 쓰게 된 사냥터였다. 그러니 사냥을 위해 이곳으로 돌아올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였다. 바로 에잇의 존재. 혹은 저 아이의 존재. 준은 자주 숲을 들락거렸다. 에잇의 감은 왜인지 에잇 스스로와 준 둘 다 그 이유가 될 것이라고 하고 있었지만, 에잇은 그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적어도 아이를 이 저택에서 내쫓고 나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곳을 떠날 셈이었으니까. 문제는 에잇이 짐작하듯 저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에잇은 말라붙기 시작하려는 와인 잔의 내용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차가우면 맛이 비려져서 싫었지만 굳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반대편에서 준이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에잇이 눈을 움직였고, 준과 눈이 마주쳤다. 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세 달이라는 시간 동안 저 아이는 몇 번이고 이런 자신을 봤는데도 여전히 놀란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저 순진한 아이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었다.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가 에잇의 뇌리 한편에 자리 잡은 지도 오래되었다.

이런 에잇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은 스테이크를 박박 썰고 있었다. 테이블 예절이 다 틀려먹었다고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준의 칼질 덕분에 테이블 위에 놓인 집기들이 달그락댔다. 에잇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가기 싫다고 하니, 끼고 살아볼까 싶다가도 이런 모습을 보면 어쩐지 속이 답답해졌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멈출 때쯤 에잇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에잇의 눈에 들어온 건 스테이크를 한껏 우물거리고 있는 준의 모습이었다. 왜인지 맥이 풀리는 모습이라 에잇은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은 고민을 관둔 건지 별생각 없이 스테이크를 맛나게 먹었다. 에잇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와인’도 다 마셨으니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에잇이 움직이자 준도 에잇의 눈치를 보며 따라 일어나려 했다. 에잇은 어정쩡하게 선 그를 말렸다.

“마저 먹어. 그럼 아직은 나가지 않는 걸로 알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고.”

그렇게 말하며 식당을 나서는 그의 옷자락에서는 풀숲 향이 아스라이 났다. 준은 그 향을 맡으며 고기를 꿀꺽 삼켰다. 에잇의 까만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준은 에잇을 지켜봤다.


공교롭게도 그 날도 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우중충한 창밖을 보다 질린 준은 숲으로 향했다. 흐린 탓에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후 세 시쯤일까? 준은 저택을 나서며 그렇게 짐작했다. 오늘은 에잇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 더욱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뭐, 저녁 먹을 시간이면 알아서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엄마처럼. 한가로운 생각이나 하며 준은 숲을 거닐었다. 준은 심심할 때 곧잘 숲을 돌아다녔다. 큰 이유는 없었다. 동식물 이것저것을 구경하는 게 즐거웠고, 숲은 소란스러우면서 고요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에잇의 저택은 단순히 고요하기만 했다. 그 안에 앉아있으면 어쩐지 좀이 쑤시는 것 이상으로 견디기 힘든 기분이 들어 준은 바깥으로 나오는 게 더 좋았다. 그러면서도 그곳을 떠나고 싶진 않았다. 에잇 때문이었다. 준은 에잇의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그 검은 옷가지를, 그 파란 눈을 보는 게 좋았다. 될 수 있다면 거기 아주 눌러앉아 에잇만 보면서 지내고 싶었다. 항상 그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도 훔쳐 맡으면서. 피를 마시는 모습은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흡혈귀란 건 동물의 피만 마셔도 괜찮은 걸까? 그렇진 않을 거 같은데. 부작용, 뭐 그런 게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아는 게 있어야지. 준은 너무 무지했다. 에잇과는 그런 주제로 많이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 준은 여전히 궁금한 게 산더미였는데도. 입을 삐죽대며 눈에 뜨인 돌부리를 괜히 발로 걷어찼다. 툭, 데굴데굴. 돌멩이는 힘없이 굴러갔다. 돌이 향한 곳에 있던 수풀 속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바작거리는 소리. 준은 수풀로 다가갔다. 상체를 조금 기울여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준의 눈에 들어 온 건,

사람의 눈이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커플링
#잇휘
추가태그
#셉페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