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웆밍] 예뻤어

side : 이지훈

세상에는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해나 별처럼 환하게 빛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빼앗기는 사람도 있고. 어느 쪽이냐 하면 지훈은 후자였다. 한 걸음도 아니고 한 세 걸음쯤 뒤에서 바라보면서 빛나는 사람이란 참 예쁘네, 라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생각을 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

그 애는 어느 쪽이었냐 하면,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그래서 계속 보고 싶었던, 예쁜 사람.

 

*

“니네 무슨 일 있지?”

옆 테이블에서 요란하게 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왁자지껄한 고깃집 안에서 이 테이블만 외따른 공간에 유리된 듯 머무르던 기묘한 침묵이 깨졌다. 한참 말없이 고기만 굽고 술만 따르더니 지훈이 기다리고 기다려도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정면돌파 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승철의 말은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는 화살처럼 정확하게 지훈에게 꽂혔다. 일은 무슨 일이냐며 넘길 수도 없고 무슨 소리냐며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있다고 시원스레 인정할 수도 없어 지훈은 벌주를 마시듯 잔에 담긴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지훈이, 형들한테도 계속 비밀로 할 거야?”

정한이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잔을 들고 손을 까닥이며 지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자리가 지훈을 놀리려 마련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드물게 장난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수마저도 분위기를 풀어주려 하는 말 없이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지금 다 알면서 왜 물어.”

지훈이 쥐어짜낸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작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왜 이 형들이 저를 불러냈는지 머리로는 이해가 갔다. 그게 마음까지 괜찮았다는 의미는 아니고. 모든 게 다 제 탓이었으니 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애써 덮어놓고 외면하려 하던 일을 다시 눈앞에 들이미는 기분이었다. 정작 그렇게 애써놓고 단 한 번도 잊지는 못한 일을. 지훈은 손을 뻗어 스스로 잔을 채우고,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평소에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냥 있는 대로 마시고 싶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그렇게 술을 먹던데, 먹으면 좀 나아질까 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하는 거라면 이것도 좀 이유란 게 있지 않을까 해서.

“결과는 아는데 이유를 몰라. 그냥 우리만 모르는 거면 너희 둘 문제니까 우리도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우리만 모르는 거 아니잖아. 제일 알아야 할 사람도 모르고 네가 알려주지도 않는다니까, 그럼 우리라도 들어야지.”

그래야 대신 알려주고 좀 달래 주기라도 하지. 라며 끝나는 나긋한 지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단호했다. 지훈은 애꿎은 잔만 만지작거리다 또다시 한 잔을 목 뒤로 넘겼다. 맛은 더럽게 없었다. 입이 썼다. 그리고 다시 침묵. 결국 참지 못한 승철이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 야, 내가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너 요새 걔 엉망인 거 알기는 하냐? 학교도 잘 안 나와서 명호랑 석민이가 걔 찾으러 간 게 벌써 몇 번인지 모르겠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훈의 손이 뚝 멎었다. 고개를 들자 승철이 드물게 화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표정에선 거짓이라곤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지훈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좀 힘들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힘들어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금방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 애는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니까. 지금도 이 형들이 그 애를 아껴서 이렇게 다 같이 찾아온 거니까. 그 말고도 아껴줄 사람 많으니까, 그 같은 건 좀 울고 나서 금방 훌훌 털어낼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다른 거 하라는 거 아니잖아. 이유라도 설명을 하라는 거지. 그래야 민규도 포기할 거 아냐.”

“….”

“아, 잠깐. 너 민규 그러는 거 진짜 몰랐어? 석민이랑 찬이가 말 안 해?”

둘 다 시위하듯 그에게 말하지 않은 지가 얼마나 되었더라. 처음엔 석민도 찬도 그에게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냈다. 평소엔 너한텐 우리 형이 아깝다며 민규와 매일 옥신각신하며 항상 보란 듯이 제 편만 들었던 석민도, 막내 주제에 제일 어른스러운 척 연애는 둘이서 알아서 하는 거니까 나는 말 안 할란다, 하던 찬도. 형, 왜 그랬어. 형,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응? 하며 지훈을 탓했다. 석민은 아마도 걔랑 같이 마시기라도 했는지 늦은 밤 술 냄새를 풍기며 새빨개진 눈으로 집에 들어와 대뜸 말하기까지 했다.

-형,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돼? 나 진짜 모르겠어서 그래. 형이랑 민규랑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나도 아는데. 행복했잖아.

그때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침묵하다, 늦었다. 자라.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 그날이다. 그날부터 석민은 지훈을 모른척하기 시작했고, 찬마저 나도 이번 일은 민규형 편이야, 라며 침묵에 동참했다.

“지훈아. 민규도 네가 왜 그랬는지 알 권리 정도는 있잖아. 너희 하루이틀 사귄 것도 아니고.”

정한의 말이 머리 위로 무겁게 떨어졌다. 갑자기 취기가 확 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를 틈타 숨겨두었던 속마음이 뱀처럼 스르륵 기어 나왔다. 지훈은 어질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걔 방해물 같아서. 걔는 빛나야 하는 앤데, 빛나는 사람을 빛나지 못하게 하는 건 사랑이 아니잖아.”

그리고 쿵, 술에 취한 머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눈앞이 온통 흐렸다. 온몸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아, 대체 왜 술을 마시는 거야? 다 마조히스트 뭐 그런 거야?

“야 이지훈!”

“아이고, 우리 지훈이. 완전 꼴았네.”

“내가 술도 못 마시는 애가 들이부을 때부터 알아봤다.”

“승철아, 민규한테 전화해.”

“아, 홍지수 맨날 나 시켜. 네가 해. 나 자신 없어. 걔 요새 맨날 우는데.”

“내가 언제 너 다 시켰다고 그래? 너는 동생이 울면 달래 줄 생각을 해야지, 그러고도 형이라고 할 수 있겠어?”

“야 좀 자신 없을 수도 있지!”

“둘 다 싸우지 마! 내가 친구로서 아주 말할게.”

“윤정한 뭐라는 거야.”

“내가 민규한테 전화한다구. 민규 오늘은 술 안 먹었나 모르겠네.”

세 명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섞여들었다. 아, 전화하지 마. 걔한테 하지 마…. 걔 볼 자신 없어. 자격도 없고…. 지훈은 필사적으로 중얼거렸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왔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들었어도 저 형들이 들어줄지 확신도 없었고. 그냥 민규가 좀 바빠서 여기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오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근데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보고 싶기는 해….

 

*

언제였더라. 아마 개강한 지 얼마 안 된 3월 중순 정도 되었을 때였나. 옆 건물인 건축학과에 대단한 미남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지훈이 다니는 실용음악과까지 떠들썩했다. 주위 소문에 어두운 지훈까지 알 정도니 이 정도면 그냥 공대 옆 음대만이 아니고 대학 전체에 소문이 났다고 봐야 했다. 지훈은 뭐 그런가 보다 했다. 누가 들어왔든 말든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만날 일도 없고. 제 알 바 아니었다. 누가 들어왔든 말든 지훈에게는 써야 할 곡이 더 중요하기도 했고.

“형, 내 친구 김민규. 야, 김민규. 여기가 우리 형”

“형 안녕하세요! 석민이가 맨날 형 얘기해서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세상 참 좁았다. 그 미남 신입생이 동생 석민과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단다. 어느 날 석민이 자기 친구라며 민규를 데려와서 민규와 알게 됐다. 자기들 밥 사주면 안 되냐고 조르길래 지훈은 그래, 너네 뭐 먹을래 했고 석민과 함께 신나하던 민규와 밥을 먹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까지 인상은 아, 난리 날만 하긴 했네. 잘 생기고 키도 엄청 크고. 정도였다. 거기에 제대로 보려면 고개를 뒤로 한참 꺾어야 할 정도로 키가 커서 목이 좀 아프다에 석민이랑 친해 보이네, 진짜 잘 먹네 정도였다.

“앗, 지훈이형!”

“민규 안녕.”

“형 오늘은 무슨 수업 들어요? 아 근데 형, 오늘 학식 별로래요.”

“나 오늘 교양만. 넌 그건 또 언제 들었냐.”

“준휘 형이 그러던데요? 자긴 그거 다시 먹느니 굶는대요. 형 오늘 점심 비었으면 닭갈비 어때요?”

“콜.”

그날 한번 보고 말 수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민규를 보는 날이 많아졌다. 민규는 그를 참 잘 찾았다. 찾는 것으로도 모자라 찾을 때마다 잔뜩 신난 얼굴로 그에게 뛰어와 살갑게 말을 걸고 밥을 먹자고 하고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사람한테 이런 말 해도 되나 싶긴 한데, 좀… 덩치만 큰 개 같기도 했다. 하여간 사람 진짜 좋아했고, 아는 사람도 많았다. 그의 몇 없는 친구들과 얼마 안 되는 아는 형들도 어느새 민규와 친해져 있었다. 지훈도 딱히 제게 신나서 달려오는 이 후배가 맘에 들지 않는 건 아니라서 민규가 밥을 먹자고 할 때마다 같이 먹었다. 어차피 약속이 없는 날이 대부분이기도 했고, 입맛도 잘 맞았다. 둘 다 잘 먹는 편이었고, 둘 다 부족하게 먹느니 더 시켜서 남기자는 파였다. 사실 남긴 적도 없었다. 민규와 같이 있으면 편하고 재밌었다. 남동생 둘 있는 지훈이 보기에도 민규는 좀 귀엽기도 했고.

“형, 형이 만든 음악 들려주면 안 돼요? 이석민이 맨날 자랑하는데 나 한 번도 못 들어봤어.”

그래서였을 것이다. 언젠가 민규가 그렇게 말했을 때, 작업실로 데려갈 생각이 든 것은. 민규는 작업실을 보고 연신 우와우와 탄성을 뱉었고 혹시나 제가 건드려 무언가 망가뜨리기나 할까 – 솔직히 말해서 민규는 사고를 많이 쳤다. 스스로 다 수습하긴 했지만 – 무서운지 그 큰 몸을 있는 대로 웅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민규가 마음 놓고 돌아다니기에는 작업실이 좀 난잡하긴 했다. 지훈은 작업실을 정리하지 않은 걸 조금 후회했다. 그는 소파에 이리저리 널려있던 짐을 대충 치우고 민규에게 손짓했다.

“여기 앉아.”

민규는 그제야 좀 안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소파에 몸을 구겨 앉았다. 제가 앉을 때는 넉넉했던 것이 민규가 앉으니 좀 작아 보였다. 찬이가 좀 더 큰 거 사라고 할 때 소파 좀 큰 거 살 걸. 지훈은 속으로 작업실에 온 이후 두 번째 후회를 했다. 정작 찬은 석민과 같이 앉기에 좁을 것 같다며 한 소리였고 그때 지훈은 친동생 둘에게 알아서 대충 끼어 앉으라 했지만.

지훈은 작업실 의자에 앉아 가장 최근에 작업한 노래를 틀었다. 이미 몇백몇천 번이나 들어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는데,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괜히 얼굴을 못 보겠어서 천장을 힐끔거리면서 손만 까닥거렸다. 그의 작업실, 그의 등 뒤에서 민규가 제가 만든 노래를 듣고 있다. 누군가를 작업실에 데려와 노래 들려주는 게 처음도 아니었고 노래에 대한 평가는 이미 받을 만큼 받아보았는데 왜 이상하게 평소보다 훨씬 떨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민규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말이 없었다. 지훈은 괜히 숨까지 조심히 내쉬었다.

“형.”

마침내 곡이 끝나고 민규가 그를 불렀다. 지훈은 고개를 돌려 민규를 바라보았다. 책상 의자는 조금 높고 소파는 낮은 탓에 의자에 앉은 지훈과 소파에 앉은 민규와 시선이 맞았다. 민규는 잠깐 아무 말이 없다가 빙긋 웃었다. 눈과 입이 예쁜 곡선을 그렸다.

“형이 노래하는 사랑은 진짜 예쁘네요.”

그 말이 지훈을 흔들었다. 예쁘네요. 그 말이 저를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쿵거렸다. 나 갑자기 왜 이래? 그렇게 많은 사랑 노래를 쓰고 불렀어도 진짜 사랑은 해본 적 없는 작곡 고수 노래 고수 연애 초짜는 괜히 붉어지려는 귀를 숨기려 괜히 헛기침을 했다.

“뭐냐, 민망하게.”

무뚝뚝한 답에도 민규는 웃기만 했다. 아니 형, 진짜 예쁘다니까요. 되게 좋다. 다른 것도 들려주면 안 돼요? 그렇게 말이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훈이 민규에게 혼자서 홀랑 넘어갔으니 다행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지훈은 괜히 번잡스럽게 움직이며 다음 노래를 틀었다. 민규는 그것도 좋다고 했다. 지훈은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못했다.

그날부터 형체 없던 지훈의 사랑에는 구체적인 대상이 생겼다. 쓰는 사람이 그 모양이 되었으니 나오는 곡들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말만 안 했지 노래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지훈의 귀가 다시 새빨갛게 불탔다. 사랑에는 눈치가 좀 없어도 노래는 기막히게 파악하는 석민이 형,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물을 정도였다. 그때 제대로 잡아떼지 못한 탓에 석민이 형, 누군데, 누군데 하고 달라붙어 한동안 꽤 귀찮았다.

“형, 이번 축제 나와요? 형 친구들이랑 밴드 한다면서요.”

“나? 어, 아마. 우리 두 곡 정도 할 듯. 너도 나가?”

“저 이번에 축제 엠씨 됐어요. 하기 싫은데 형들이 시켜가지구…. 아 그래도 형 나오는 거 보긴 좋겠다.”

축제 철이 되었고, 학생회와 친한 죄로 축제에 떠밀려서 나가는 건 지훈이나 민규나 비슷했다. 아마 학생회에 있는 승철이 시켰겠지. 마찬가지로 지훈도 학생회에 있는 정한과 지수에게 떠밀려 준휘와 원우, 순영과 석민과 함께하는 밴드로 매년 축제에 나가고 있었다.

“그래, 준비 잘해라.”

축제 엠씨 하면, 좀 더 잘 차려입으려나?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쟤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리기는 한데 좀 궁금하긴 하네. 지훈은 민규가 축제의 엠씨를 본다는 소식에 그런 생각이나 했다. 짝사랑을 시작했어도 지훈의 사랑이란 지훈을 닮아 직설적이지도 적극적이지도 못해서 지훈은 들키지 않기 위해 사랑에 빠지기 전이나 후나 다를 바 없이 민규를 대하려 애썼다. 같이 밥을 먹고, 시간 맞으면 같이 공부하기도 하고. 작업실에는… 아, 이건 좀 달라졌다. 작업실엔 민규를 더는 안 데려갔다. 지훈이 그대로 녹아있는 그 장소에 가면 마음을 다 들킬 것 같았고 혹시나 마음을 들켜서 이 관계가 깨질까 좀 무서웠다.

“안녕하십니까, 세봉대 학우 여러분. 좋은 밤, 아니다. 좋은 오후죠? 세봉대 축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와, 오늘 김민규 신경 좀 썼는데.”

“엠씨 잘생겼다~! ”

“쟤는 진짜 잘생기긴 했어.”

“슈퍼엠씨 김민규우우우!”

민규가 학교 축제의 무대에 등장해 첫인사를 한 순간, 축제가 펼쳐지는 중앙광장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아이돌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비명소리가 들렸고, 저기 돌고래 있어? 누구 떨어지고 있는 거 아냐? 하는 잡담이 오갔다. 학생들의 환호가 쩌렁쩌렁했다. 무대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순영과 준휘, 원우도 민규를 보더니 킥킥 웃는 얼굴로 한 마디씩 거들었다. 석민은 민규의 이름을 크게 외쳤는데, 얼마나 크게 외쳤는지 저 함성을 뚫고 민규에게 닿아, 민규가 그들 쪽을 살짝 돌아보며 웃은 것 같기도 했다. 정작 지훈은 멍하니 시선을 빼앗겨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지훈아?”

“어, 어… 아니, 소리가 커서. 좀 놀랐네.”

“아, 그치. 난 무슨 아이돌 온 줄 알았다.”

원우가 아무 말 없는 지훈이 걱정되었는지 말을 걸었다. 지훈은 애써 태연한 척 함성 탓을 했다. 소리에 예민한 명호도 아니고, 공연하는 사람이 함성에 놀랄 리가 없는데. 원우는 그 말에 그냥 넘어가 주었다.

아, 쟤 진짜 빛나네.

평소보다 멋지게 차려입은 김민규는 그 자체로 빛나고 있었다. 비단 외모나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수많은 사람 앞에 당당히 서서 축제를 이끌어가는 모든 움직임에서 빛이 났다. 저 애는 어떻게 하면 빛나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저 애가 저렇게 빛난다는 걸 다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훈은 뭔가 좀 기뻤고, 동시에 아주 조금 슬펐다.

“자 다음은, 아, 제가 아주 좋아하는 분들이 나왔네요. 소개합니다, 세봉대 인기 밴드, Shining diamond!”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 그때만큼은 지훈은 모든 것을 잊고 음악에 몰입할 수 있었다. 석민의 노래를 시작으로 원우가 드럼을 두드렸고, 준휘가 베이스를 연주했다. 순영이 키보드를 쳤고 지훈이 기타를 잡았다. 그의 파트에서 지훈은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선율이 저녁노을 아래 화려하게 춤을 추었고, 악기의 음률이 아름답게 뒤엉켰다. 지훈은 눈을 감고 소리를 느끼며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다, 문득 눈을 떠 관중들을 보았다. 눈부신 조명 탓에 눈이 아파도 그들에게 쏟아지는 시선과 그 안의 열기만큼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매년 학생회에 우리 힘들다 힘들다 해도 공연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준비할 땐 더럽게 힘들고, 할 것도 무지하게 많은데, 이 무대 위에 올라오면 그게 다 잊혀지니까. 그 모든 일이 다 할만했다고 미화되고 다시 돌아가도 또 하겠다는 마음이 드니까.

그러다 지훈은 무대 바로 아래서 그를 바라보는 민규를 보았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환하게 웃으면서 이 무대를 즐기는 민규를. 얼마나 잘 보이는지 벌린 입안의 뾰족한 송곳니마저 보일 것 같았다. 아주 잠깐 동안 이 많은 관중들이 잠시 사라지고, 함께 연주하는 동료마저 사라젔다. 세상에 민규와 지훈 둘만 남은 것 같았다. 내가, 연주를 어떻게 했더라? 노래는? 다음 가사가 뭐였지? 그것마저 잊어버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그 순간 곡은 끝났고, 처음 민규가 등장했을 때와 맞먹는 환호성이 지훈을 현실로 데려왔다.

“여러분, 즐거우신가요?”

“네!”

“아, 좋습니다. 다들 호응해주시니까 저희도 신나네요. 다음 곡도 열심히 들어주실 거죠?

”네!!!!“

”예~ 그럼 한 곡 더 가겠습니다. 형들, 준비됐지? 렛츠 고!”

석민이 마이크를 잡고 분위기를 띄웠다. 지훈은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붙잡고 원우의 드럼 소리를 기다렸다. 시원스럽게 드럼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순영의 키보드, 그 다음으론 베이스와 기타, 신나는 곡에 저절로 몸이 흔들렸다. 지훈은 다시금 눈을 감고 손을 움직였다. 지금 걔를 다시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은 그저 이 음악에 집중해야 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마지막 음을 연주하고, 마지막 가사가 끝날 때까지 지훈의 집중이 깨지는 일은 없었다. 문제는 끝난 후였다. 내려가서 공연을 지켜보던 엠씨가 다시 올라와 다음 무대가 준비되기 전까지 밴드 멤버들을 인터뷰하는 시간이었다.

“너무 멋진 공연 잘 봤습니다. 자, 노래 잘하는 걸로는 세봉대에서 이길 분이 없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이석민 학우님. 이 말에 동의하시나요?”

“제가 세봉대 학우님들을 다 몰라서… 더 잘하시는 분도 있을 텐데 공연을 안 해서 그러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그런 소문이 있어서 영광입니다. 더 열심히 부르겠습니다!”

“겸손한 모습 멋지네요. 아, 오늘 제가 듣기엔 소문이 맞는 말 같은데요. 다른 분께도 질문 드려볼까요. 자. 이석민 학우님, 이 밴드 리더가 누구시죠?”

“아, 저희 지훈이 형입니다.”

“좋습니다. 리더 이지훈 학우님과 한 번 인터뷰 해보겠습니다.”

이미 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장난끼가 눈에 스민 민규가 인터뷰라는 명목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쿵, 쿵, 쿵. 와, 나 지금 심장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데. 지훈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야, 민규야. 지금 안 오면 안 되냐. 너 지금 나한테 너무 유해한데. 지훈이 속으로 아무리 빌거나 말거나 민규는 계속 다가왔다. 그때 인터뷰가 어땠는지 지훈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냥… 그는 긴장해 떨면서 뭔가 말했고 민규는 계속 웃었다. 그것만 기억에 남았다. 모든 게 인상 깊은 날이었다. 사실 그날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좀 다른 거긴 했지만.

“형.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뭔데, 갑자기.”

“내 말 듣고 나 피하지 말기.”

“뭐냐 너. 대충 뭔지 알아야 피하든 말든 하지.”

“아, 형. 들어준다고 좀 해줘요.”

뭐지, 얘가 갑자기 왜 그러지.

축제가 끝난 후였다. 지훈의 밴드 공연은 거의 마지막 순서였고, 내려와 악기를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동안 축제 무대도 끝이 났다. 엠씨로서 마지막 인사를 마친 민규는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것처럼 엠씨 복장 그대로 후다닥 아래로 뛰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지훈을 따로 불러냈다. 기타를 정리하던 지훈은 정리를 석민에게 떠넘기고 민규를 따라왔다. 그랬더니 한다는 소리가 이거다. 지훈은 눈만 깜빡거렸다. 얘 긴장한 것 같은데.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엠씨를 볼 때도 긴장한 것 같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쩐지 긴장한 티가 확 났다. 지훈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웃으면서 말하고는 있지만, 민규가 어째 좀… 절박해 보여서.

“그, 있잖아요. 형.”

“얘기해. 안 피할게.”

“…좋아해요.”

“어. 그래… 어?”

“…좋아한다구요.”

장담컨대 갑자기 막내의 우상인 마이클 잭슨이 되살아나 눈앞에서 문워크를 췄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훈은 멍하니 입을 벌렸고, 민규가 눈앞에서 얼굴이 새빨개지는 걸 보았다. 그, 받아달라는 건 아니구, 아니, 받아주면 좋긴 한데, 아, 형, 나 안 피할 거죠…. 민규도 어색한지 발음이 꼬이고 말이 뒤엉켰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던 지훈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손을 뻗어 민규의 손을 잡았다. 손은 긴장으로 차가웠다. 지훈은 혀를 내어 입술을 핥고는, 후, 숨을 내쉬었다.

“나도.”

“…네?”

“나도 너 좋아한다고.”

이번에 반대로 멍하니 눈을 깜빡인 쪽은 민규였다. 지훈은 그 멍한 얼굴이 서서히 환하게 웃는 얼굴로 변하는 모습을 경이롭게 지켜보았다. 그날 지훈의 짝사랑이 끝이 났다. 몰랐던 사실인데, 민규의 짝사랑도 그날 끝났다.

“아니, 김민규가 형이랑? 형! 진짜야? 아니지?”

“아 진짜라고! 이석민. 불만이냐?”

“당연히 불만이지. 야, 우리 형이 아깝다. 어?”

“아 어쩌라고!”

민규와 지훈이 연인이 되었어도 석민과 민규는 아웅다웅 싸워댔다. 오히려 그걸 핑계로 더 싸우는 것 같기는 했다. 지훈은 그냥 뒤에서 웃고만 있었다. 보기만 해도 재밌었으니까. 둘이 싸우고 나면 무슨 황제의 총애를 다투는 후궁들마냥 지훈에게 달라붙어 형, 형, 이도겸이 어쩌구저쩌구, 아 형 김민규가 먼저 어쩌구 하는 것도 귀여웠고. 정작 지훈은 둘 다 달라붙을 땐 달라붙지 말라며 밀어냈다. 민규가 삐진 척하는 걸 보는 재미도 있었고 같이 밀려난 주제에 석민이 의기양양해져서는 봐봐 애인이 형제 못 이긴다, 이런 소리나 하는 것도 좀 웃겼다. 물론 민규를 나중에 좀 따로 달래줘야 하기는 했는데 그것도 뭐 나쁘지 않았고.

지훈은 민규와 혼자서는 안 해본 것들을 많이 했다. 사귀게 된 이후 지훈은 민규를 다시 작업실에 데려갔다. 민규는 지훈이 들려주지 않았던 곡을 듣고는, 형, 이래서 나한테 안 들려줬구나? 하고 씩 웃었고 지훈은 시선을 피했다. 눈치 빠르긴. 민규는 지훈이 엉망으로 어질러놓은 작업실을 깨끗이 치웠고, 지훈은 큰 소파를 샀다. 작업실에서 둘은 첫 키스를 했고… 그 다음으로도 하여간, 이것저것 많이 했다. 큰 소파를 사서 다행이지.

처음으로 뮤지컬을 보러 가봤고, 한강에 앉아서 치킨이랑 맥주도 먹었다. 남들 많이 한다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민규랑 있으니 관심이 좀 가는 것 같기도 했다. 민규가 이거 해보자, 저거 해보자, 하고 들고 오는 것들은 재미있었다. 좀 취향이 아니어도 둘이 어딜 같이 가고 함께 추억을 만드는 것 자체가 재밌기도 했다. 대신 지훈의 취향대로 하루 종일 어디 안 나가고 같이 있기도 했다. 지훈의 자취방에는 석민이 같이 살아서 주로 민규의 집이나 지훈의 작업실이 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함께 있으면 편안했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속에 충만했다. 지훈은 민규를 볼 때마다 얘는 어떻게 항상 반짝거리지, 하는 생각을 했다. 화려하게 차려입지 않아도, 무언가 하지 않아도 그냥… 민규는 반짝거렸다. 당연히 그렇게 태어난 사람처럼.

“형, 형은 졸업하면 뭐 할 거야. 음악?”

“응. 하던 거 계속해야지. 너는?”

“음… 잘 모르겠네. 전공 살릴까.”

“뭘 해도 잘할 것 같은데. 김민규 잘하는 거 많잖아.”

“오~ 애인의 칭찬 좋은데.”

“뭐 칭찬 처음 듣는 사람처럼 그래.”

그건 그래. 근데 들어도 들어도 좋다. 민규가 키득거렸다. 평화로운 오후, 나른한 햇살이 들어오는 자취방의 어느 휴일. 둘은 침대에 누워있었고, 두 사람의 체온으로 데워진 침대는 따뜻했다. 민규가 틀어놓은 잔잔한 음악이 향기처럼 감돌았다. 지훈은 눈을 깜빡이다 문득, 행복이 있다면 이런 거겠구나 싶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냥 느낄 수 있었다. 함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그리고 지훈은 민규도 그가 행복한 만큼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 오늘 연극 어땠어?”

“재밌던데. 그, 뭐더라. 남주 배우 멋있더라.”

“진짜? 형이 멋있다고 한 사람 처음 봤네.”

“내가 그랬나? 뭐 멋있으니까 멋있다고 하지.”

사실 지훈은 연극을 보든 뮤지컬을 보든 나오는 사람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편이었는데, 그 남자 주인공 배우는 어쩐지 민규를 좀 닮은 것 같기도 해서 눈길이 갔다. 눈길이 가니 잘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극장에서 나와 나란히 대학로를 걸었다. 민규는 한참 말이 없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형, 나 배우 할까.”

“너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배우 김민규 멋있겠네.”

“그게 뭐야.”

그래놓곤 멋있다는 말에 기분이 풀렸는지 민규는 다시 웃었다. 다른 사람 멋있다고 해서 질투했나. 그렇게 생각하니 좀 더 귀여웠다. 지훈은 작게 웃고는 장난스럽게 민규의 등을 몇 번 두드렸다. 배우 김민규라. 진짜 잘 어울리긴 하네. 잠깐 상상만 해 봐도 엄청날 것 같긴 했다. 인기 정말 많을 것 같은데….

“저기요, 혹시 번호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여자가 다가와 민규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의 뒤에는 몇 명의 여자들이 발을 멈추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일행인가 보네. 어쩐지 눈들이 죄다 기대로 반짝거리는 게 친구들이 번호 따는 걸 응원하는 것 같고. 지훈은 일단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번호를 달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진 않았지만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 죄송합니다. 애인 있어서요.”

“아… 네, 죄송합니다.”

하긴, 굳이 배우 안 해도 김민규 인기는 지금도 많지. 꾸벅 인사하고 멀어지는 여자를 보며 지훈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민규가 눈치를 보듯 지훈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지훈은 아까의 민규처럼 잠시 말없이 걸었다. 민규도 따라 말이 없었다. 지훈은 속에서 말을 좀 고르다 지하철역 입구 앞에서 툭 입을 열었다.

“왜 눈치 보냐. 너 잘 쳐냈는데.”

“아니 그냥….”

웅얼거리는 게 지훈의 반응이 신경 쓰였나 보다. 좀 불편한 티를 낸 건 지훈도 알았다. 그것도 알았다. 괜한 질투 한 거. 새삼, 둘이 같이 걸어도 사람들이 연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아무것도 없는 민규의 손이 눈에 밟혔다. 둘 다 남자라 주위 사람에게 숨기고 애인이 아닌 척하는 그런 구식 이유는 아니었고 – 애초에 둘은 사귀기 시작한 다음 날 석민과 찬에게 연애 사실을 알렸고, 그 다음 날 밴드 멤버들에게 알렸으며, 같은 날 저녁 너네 사귄다며? 하고 들이닥친 형들 셋에게 축하주 명목으로 술을 받았다. 참고로 우리 형 술 못 마신다며 지훈의 몫까지 민규가 다 마셨다 – 그냥 좀 작업할 때나 기타 칠 때나 손이 번거로우니까, 그런 거였는데.

“우리 반지 맞출까?”

지훈이 물었고, 민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둘은 그날 바로 반지를 맞추고 싶었으나 시간은 이미 늦어 밤이었다. 잔뜩 신난 민규는 바로 다음 날 아침 일찍 자고 있던 지훈을 깨워 반지를 맞췄다. 확실히 반지를 끼니 민규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확 줄어들긴 했다. 지훈은 만족했다. 반지가 있는데도 접근하는 대단한 사람도 있긴 했지만 거기서부터는 정말 좀 이상한 사람들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이 소중한 현재가 오래도록 계속되길.

지훈이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딱 그 정도였다. 지훈이 졸업을 하고 음악을 하고, 민규가 졸업을 하고 배우를 하든 무엇을 하든 자기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걸 찾아서 하게 되고, 그들이 처한 환경이 달라져도 그들은 그대로이길. 같은 반지를 나눠 끼고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잠들었다 깨고, 그럴 수 있길.

소박하지 않나 싶었던 그 바람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게 참 거창한 꿈이었구나 느끼게 된 게 언제였을까. 해가 바뀌고 찬이 세봉대에 입학했고, 밴드에는 승관이 추가되었으며, 승철의 동생인 한솔도 같은 대학에 왔다. 그만큼 아는 사람이 조금 늘었고 원우가 찬과 사귄다는 소식에 지훈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쫓아가려다가 민규에게 잡혔다.

-김민규 너 이거 안 놔?

-야, 찬아 원우형 대피시켜 빨리! 아, 이석민 너도 진정해!

어쨌든 그 둘도 약간의 고난과 역경 끝에 사귀게 되었고… 그 사건만 빼면 나름대로 평화로웠는데. 모든 게 괜찮아 보였는데.

“야 민규야. 넌 졸업하면 뭐 할 거야?”

“승철아 요즘 그런 거 물어볼 거면 돈 줘야돼~”

“민규야, 승철이한테 벌금 달라 그래.”

“아, 그런 거 아니라고~ 내가 무슨 명절 때 이상한 거 물어보는 삼촌이냐. 그냥 민규 뭐 하고 싶은지 궁금해서 그러지.”

어느새 열세 명의 아지트 비슷한 게 된 학생회실에서 축구를 보자며 다 같이 모인 어느 날 승철이 물었다. 민규는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잘 모르겠는데, 했다. 전공 살릴까 하더니 생각이 좀 바뀌었나, 그때까지 지훈은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어, 그러고 보니 민규 너 교수님이 무슨 교환학생 얘기하지 않았어? 너 추천했다며.”

“그거 안 간다고 했는데. 아, 씨. 이석민.”

“아, 맞다. 미안.”

석민의 말에 민규가 팔꿈치로 석민을 퍽 쳤다. 석민은 그제야 말실수를 했다는 자각이 들었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몇 명의 날카로운 시선이 석민에게 쏠렸다. 지훈은 방을 감도는 묘한 공기에 허리를 바로 세워 앉았다. 석민이 민규와 그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대부분은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훈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물었다.

“민규야. 너 유학 그거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교수님이 나 교환학생 가는 거 어떠냐고 했는데, 어차피 안 갈 거라 말 안 했지…. 미안.”

“너 왜 안 가는데.”

“어?”

그 질문에 민규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 형이 나한테 내가 들은 대로 말한 게 맞나? 그렇게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지훈은 뭔가 그냥 좀 화가 났다. 교수가 추천한 교환학생이라면 분명 꽤 좋은 기회일 텐데 그걸 상의도 안 했다는 게 좀 속상했고, 그걸 당연하게 거절했다는 것도 조금 화가 났다. 그리고 지금 가장 화가 나는 건 그 말에 화가 나면서도 민규가 어디 안 간다는 말에 안심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나 뭐 하는 놈이지?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민규가 가고 싶다고 했으면? 그럼 어땠을까. 갑자기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른스럽게 잘 다녀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미래를 응원해줄 수 있었을까. 쉽게 당연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건 그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너 지금 쟤가 더 빛날 기회를 막고 싶은 거야? 속에서 그런 말이 들렸다.

“형, 나 교환학생 갈 생각 없고, 안 갈 거야. 이거 끝난 얘기야.”

“너 전공 살릴 거면 가는 게 낫잖아.”

“야야, 너네 여기서 둘이 싸울 거면 집에 가. 아니면 과자 먹어. 나 축구 봐야 돼.”

승철이 분위기를 살피더니 둘의 싸움을 말렸다. 민규는 약간 원망스러운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고, 지훈도 시선을 피했다. 속이 들끓었다. 스스로도 어쩌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머리로는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 논의도 하지 않은 민규에게 화가 났고, 마음으로는 안심했다. 그 다음엔 다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머리는 너무 차갑고 마음은 너무 뜨거워서 도무지 온도를 맞출 수가 없었다.

그날의 축구는 이겼는지 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끝까지 있기는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끝나 있었고 남들은 정리를 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명호와 석민과 민규가 없었다. 걔네는 셋이 야식 먹으러 갔어~ 정한이 설명했다. 그 많은 사람이 나가는 것도 모를 만큼 정신이 빠져 있었다. 그날 지훈은 한참을 그냥 앉아 있다가 혼자 집에 갔다. 연락은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민규가 지훈의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석민과는 미리 이야기가 되었는지 민규가 찾아오자 석민은 나 간다, 하며 민규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나갔다. 집에는 둘이 남았고 지훈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눈치를 보던 민규가 입을 달싹거리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와중에 민규가 눈치를 보는 것도 좀 짜증이 났다. 내가 왜 쟤 눈치 보게 만들지. 웃는 거 봐도 모자랄 판에.

“형, 나 이걸로 형이랑 싸우기 싫어… 말 안 한 건 미안해. 근데 진짜 갈 생각 없어서 그랬어. 괜히 심란하게 하기도 싫었구.”

그래, 이건 끝난 일이다. 지나간 일이다. 지훈은 속으로 들끓는 감정을 삭혔다. 자기 스스로도 감정 정리를 못 하면서 민규에게 화내는 건 온당하지 않았다. 지훈은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드물게 먼저 팔을 벌렸다. 민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민규는 있는 힘껏 몸을 구겨 지훈에게 안겨들었고, 지훈은 민규를 안은 채로 숨을 골랐다. 그래, 괜찮아. 괜찮을 거야. 속으로 되뇌며. 팔을 둘러 감싸 안은 몸은 따뜻한데, 어쩐지 좀 멀게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 서로가 서로의 표정을 알지 못해서 그럴지도. 누가 포옹은 가장 가까운 이별이라던데, 왜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로 둘은 그 일이 없던 것처럼 지냈다. 지훈도 민규도 그 언급을 피했고, 다시 모든 게 자연스럽게,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모른 체한다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지훈은 민규를 데리러 건축학과에 갔다. 민규가 말한 강의실로 가려는데,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부르는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김민규, 너 이거 진짜 좋은 기회인 거 몰라? 오죽하면 교수님이 너 이번 건 좀 다시 설득해 보라더라. 너 저번에도 안 가더니 왜 또 안 가는데. 너 사귀는 사람 있어서 그래?”

“아니 선배 진짜 그런 거 아니고요… 그냥 제가 안 가고 싶어서 그래요.”

“너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 없는데. 잘 생각해라. 어? 결혼할 것도 아니고, 나중에 졸업하고 유학은 어쩔래. 그때도 안 갈 거야? 이걸로 먹고 살 거 아니야? 사랑에 눈멀어서 다 버릴래?”

“선배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은데요. 하신 말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저 생각 안 바꿀 거구요. 안 갈 거예요. 교수님께는 제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제 인생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 순간 지훈은 절절히 느끼고 말았다. 아, 쟤, 또 나 때문에 안 가네. 지훈이 생각해도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김민규가 이지훈 때문에 미래의 좋은 기회를 포기한다. 명확하게 정리된 명제가 지훈의 가슴에 꽂혔다. 내가 저 빛나야 하는 애, 저 빛나는 애 발목을 잡고 있나. 가슴 한구석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늘 반짝반짝 빛나는 애인데, 더 빛날 수 있는 앤데, 그걸 나 때문에?

동시에 지훈은 생각했다. 이번에 안 가도 건축학과로 전공을 살리려면 유학을 가는 게 좋다는 것쯤은 알았다. 지훈도 그 일 이후 좀 찾아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아무래도 유학을 가야 전공 살리기 쉽다고 했다. 그때는 어떡하지? 민규가 유학 가면?

사실 이지훈도 자신이 없었다. 나, 쟤 안 보고 버틸 수 있나? 한두 해 기다리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이면? 우리가 서로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안지도 못하면. 나는 여기 있는데, 너는 저 멀리 가버리면. 그게 헤어지는 거랑 뭐가 다르겠어. 근데 나 때문에 네가 안 가면,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거 포기하면, 그럼 나는 만족할까?

이건 아니었다. 이래서는 안 됐다. 지훈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려 반쯤 뛰듯 계단을 내려갔다. 도저히 민규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남는 정신을 붙잡아 메시지부터 날렸다.

「민규야, 미안한데.」

「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점심 같이 못 먹겠다.」

「밥 맛있게 먹고.」

「형 무슨 일인데?」

「괜찮아? 심각한 거 아니지?」

「형도 밥 꼭 챙겨 먹고.」

「이따 봐~ 사랑해」

그 말에 차마 답장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이게 사랑이 맞나? 덜컥 두려움이 들었다. 이건 그냥 집착 아닌가? 지훈은 항상 사랑을 쓰고 노래하던 사람인데, 이걸 사랑이라 느끼며 살았는데 갑자기 지금까지 그가 했던 게 과연 사랑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민규가 빛나는 사람이라 반했는데, 정작 그가 민규를 빛나지 못하게 하면 이 사랑에 무슨 의미가 있지. 좀 미칠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건 아닌데. 이거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날부터 며칠간 지훈은 민규를 좀 피해 다녔다. 생각을 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지훈은 있는 대로 정보를 머리에 쑤셔 넣고 감정을 빼고 판단하려 애썼다. 그런데 김민규 일인데 이지훈이 어떻게 감정을 빼지. 그러니까 더 풀리지 않았다. 지훈은 민규의 연락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무슨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던 어느 밤 지훈은 새벽에 물을 마시다 생각했다. 그 애가 얼마나 반짝이는지. 얼마나 예쁜지. 그 애를 자기가 망치기라도 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내 손에서 흐려지게 하느니 놔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그는 민규에게 헤어지자 말했다. 그날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최악이었고, 제일 최악은 이지훈 그 자신이었다. 지훈은 그날 집에 돌아와서 좀 죽고 싶었다.

 

*

눈을 떴더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술 탓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누가 나 집에 데려다주긴 했나 보네. 마지막에 민규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훈의 생각이 뚝 멈췄다. 어두운 방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 전화했네. 하지 말라니까.

눈이 마주쳤다. 지훈은 말을 잃었고, 민규는 말이 없었다. 익숙한 눈에 물막이 끼더니, 눈에 가득 찼던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민규가 울고 있었다. 한 번도 우는 얼굴 못 봤는데. 늘 반짝거리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민규야.”

목이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훈은 그 눈물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손을 뻗고 싶었는데 그래도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았다. 쟤가 우는데, 민규가 우는데,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지훈이 머뭇거리는 사이 민규가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침대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불 위로 번지는 눈물이 지훈의 마음을 찔렀다. 지훈은 멍하니 손을 뻗어 민규의 눈물을 닦았다. 눈물이 너무 뜨거워서 손을 델 것 같았다. 민규가 지훈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형, 우리 행복하자고 사는 거잖아. 나 형 없이 안 행복한데, 왜 나한테 헤어지자 그래…. 형도 안 행복하잖아. 나 형 없이 뭐 하기 싫어….”

우는 김민규는 빛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 대체 뭐 한 거야. 이성의 판단이 날아가고 그저 감정만이 남았다. 지훈은 그대로 팔을 뻗어 민규를 껴안았다. 큰 몸이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민규야 나는….”

안은 몸이 떨렸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지훈은 차마 벌벌 떨며 제 허리를 안은 손을 어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민규야, 나는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어째야 할까. 나도 모르겠다. 그냥….

-

 사족) 1년 후 입학한 실음과 후배인 승관도 민규와 친했는데, 가끔 어유, 김민규 말티즈야 말티즈. 근데 이제 덩치 보면 왕티쥬지. 하는 걸 듣고 지훈은 그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긴 했다.

사족2) 제목 출처 : 데이식스의 예뻤어 

사족3) 중간에 밴드가 연주한 곡은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민규 시점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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