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웆홋]Right Place

“I love you, ain’t that the worst thing you ever heard?”

And I snuck in through the garden gate

Every night that summer just to seal my fate

And I scream, for whatever it’s worth

“I love you, ain’t that the worst thing you ever heard?”


“뭘 한다고?”

황당하다는듯한 한국어가 복도에 울려퍼지자 학생들이 한 번씩 지훈을 흘깃댄다. 적당히 책과 노트등이 굴러다닐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맨 채인 지훈의 앞에서 순영이 자랑스럽게 브이를 그린다. 완전 대박이지. 역시, 낯선 언어와 낯설지 않은 얼굴을 흘깃대는 시선이 한 번 모였다 흩어졌다.

오하이오에 위치한 글랜브룩 하이스쿨의 분위기는 한참 들떠있는 와중이다. 머리를 뜯게하던 기말 테스트는 과거의 일이 되었고, 남은 것은 슬슬 온도를 높이고 있는 쾌적한 바깥과 그 안에서 일어날 환상적인 여름 추억뿐이다. 어디서는 파티를 계획하고, 어디서는 가족과 떠날 여행에 대해 떠들고는 한다. 화학 수업의 뒷자리에 앉았던 커트는 아버지의 낡은 중고차로 떠날 필드트립에 대해 말을 부풀리느라 선생님이 들어온줄도 몰랐었다. 누구의 집에 며칠날 몇시까지 모이느니, 어디에서 쇼핑을 할거라느니. 저마다 계획을 떠드느라 바쁜 사람들이 있다면 방학 계획의 대부분이 그저 '알바하기'인 학생들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계획은 다 낡아가는 중고 앰프를 더 좋은것으로 바꾸고자하는 더 큰 계획의 일부분일 수 있었지만, 그런 내막까지 아는 사람은 다섯명도 없으니까. 그리고 지훈은 그 다섯명 중 하나인 순영도 자신과 비슷한 계획을 가진줄로만 알았다. 1분 전까지는.

“미성년자잖아.”

지훈은 언짢다기보다는 황당하다는 어투로 말을 이으며 캐비넷을 닫았다. 뭐 어때, 사람들 부모님이랑 저녁먹으러 자주 가. 지훈이 가방을 열 수 있도록 자연스레 짐을 받은 순영은 거의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까지 공범으로 만들 생각이 만만인 태도다. 아주머니한테 이를거라는 으름장까지만 한국어였다가, 복도 끝에서 다가오는 애런을 발견한 지훈이 말을 영어로 바꿨다. 하여튼 안도와줄거야. 순영은 영어인지 한국어인지 애매한 의성어로 애교를 부려대며 팔에 붙기나 한다. 편곡 해주라- 인터넷에서 찾는건 못미덥단 말이야. 악기도 다 다르고. 소매를 밀고 당기는 손이 어이없어서 떨어지라고 팔을 흔들자 열린 지퍼 안에서 필통이 덜그럭대는 소리를 내며 굴러다녔다. 그래봤자 기타 아니야? 다룰 수 있는건 딱 가장 대중적인 그거 하나인 주제에 무슨 악기가 달라서 어쩌고. 브라스로 편곡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밴드 편곡이야 어떤 노래든 널렸을텐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건 천재 작곡가가 편곡해준게 아니잖아. 코웃음이나 칠 아첨을 하며 순영이 책을 가방에 밀어넣고 지퍼를 잠가준다. 해줄거지? 억지스러운 부탁에 제대로 된 답을 돌리지 않는 지훈도 지훈이었다. 팔을 흔드는 애런에게 인사하려 올린 손을 덥석 붙잡은 순영이 간절한 눈을 한다. 방학 때 뭐라도 해야지. 네가 유일한 희망이라는 말에 지훈의 시선이 밑으로 돌아간다. 방학 때 뭐라도. 아랫입술이 말려들어갔다가, 아직 잡혀있는 손을 흔들어 빼낸 지훈이 시선을 억지로 발목에서 떼어냈다. 순영은 여전히 애교를 부린다. 아 한 번만.

―그러고는 도착한 애런의 차례였다. 순영을 빼놓은채 인사를 주고받고, 예정되어 있던 역사 과제를 하러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뒤에서 한국어가 터져나왔다. 5시에 기다린다! 답은 가운데 손가락이었지만, 지훈은 머릿속에서 5시에 볼 예정이었던 아티스트의 생방송 일정을 조용히 지울 수 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 다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가 사라진다. 안가면 새벽 5시까지라도 기다리고 있을 순영의 얼굴과, 그한테 시간이 그렇게나 남아버린 이유까지도.

***

"진짜 존경스럽다."

별로 좋은 의미를 담는 말투는 아니다. 지훈은 당장이라도 고개를 젓고싶은 기분으로 앰프의 볼륨을 조정했다. 파란 일렉기타를 맨 순영은 비언어적 표현을 알아듣기는 한건지 뿌듯한 얼굴로 그곳이 자기자리인 양 놓여있는 피크를 집어들었을 뿐이다. 넓은 차고의 벽에 노가다로 붙인 방음 스펀지의 귀퉁이가 덜렁댔다. 왜인지 낡은 쇼파의 손잡이에 거꾸로 올라가있는 시계는 5시 10분을 표시한다. 또 누가 가는데? 석민이?

“민규가 드럼도 해준대.”

“너네 그러다 교회 쫓겨난다 진짜로."

동네에 하나 있는 한인교회를 신앙때문에 다니는게 아닌건 지훈도 마찬가지였지만. 교회에서 만난 또래들과 차린 오합지졸 밴드로 방학동안 술집에서 공연을 한다는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네가 키보드 해주면 안되냐? 잔소리를 한귀로 흘리는 방법만 갈수록 숙달하는 친구의 부탁을 넘겨버린 지훈이 이미 들었던 내용을 다시 물어봤다. 어디에서 하는거라고?

벌써 바깥은 20도를 웃돌기 시작했다. 유난히 느릿느릿 가기 시작한 태양이 비추는 낡은 차고는 지훈과 순영이 함께 있는 시간의 절반가량을 보내는 곳이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데, 정리도 안되어있어 개판이어도 나름 아지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순영이 개러지 밴드 영상을 보고와서는 여길 개조하자고 난리를 치기 전까지 들어와본적도 없는 곳이었지만, 지훈의 부모님은 남의 집 아들이 부려대는 애교에 져서 이곳을 청소년들의 공간으로 내줬다. 지훈이 본격적으로 음악작업을 하게 되고 나서는 여기서 먹고 자는 일도 흔해졌고, 순영이 가출을 해서는 일주일 동안 살기도 한 곳이었지만-지훈이 순영의 어머니에게 매일마다 보고를 해드려야했다-여전히 먼지 냄새와 시멘트 바닥인 곳이었다. 둘은 이 차고에서 세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다. 지훈의 물음에 순영은 기타줄을 의미없이 튕기며 침음을 냈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

왓쳐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는 레코드 가게에 발품을 팔러 다니면서 몇 번 본적이 있다. 고급스러운 곳은 절대 아니고, 맥주가 가장 많이 팔리는 소위 펍 같은 곳이었는데. 그래도 음식점이라기 보다는 술집이라는 말이 훨씬 어울릴만한 곳이긴 했다. 걱정마. 아저씨랑 가봤는데 피자 맛있더라. 피자가 맛있는거랑 이 전체적인 문제에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훈은 눈을 반쯤 감은채로 그냥 넘어갔다. 너네 아저씨랑 갔던데면 걸리는거 아니야? 순영은 언제나 당당했다. 아저씨한테는 허락 받았어.

말인즉슨 어머니한테 걸리면 뼈도 못추린다는 얘기다. 허락이라고 해봤자 기분 좋게 취하셨을 때 날치기로 물어보고 어어, 같은 답이나 받은거겠지. 비슷한 수법으로 덜걱 사들인 일렉기타를 멘 순영이 벽에 기대어져있던 스케이트보드를 발로 눌러 한 발로만 올라탄다. 아슬아슬한 균형 때문에 쳐다보자 순영이 다시 뻔뻔한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편곡해줄 곡은 골랐어?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존경스럽다. 알바를 할거라고 하길래 당연히 다이너나 세차장 따위의 일을 구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방학이 일주일 남은 시점에서 갑자기 '얘기가 잘 통하는 사장님'의 술집에서 밴드 공연을 할 생각을 하다니. 그야말로 평범하게 다이너나 세차장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지훈이 듣기에는 어마어마한 계획이었다. 기타도 그래봤자 1년 남짓 뚱땅거린게 다면서 무슨 공연을 한다는건지. 더욱 대단한 점은 그 일과 한 점의 관계도 없는 지훈이 당연히 공연할 곡을 편곡해줄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순영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역시 이런 뻔뻔함은 대단하다고 감탄할만 하다. 돈을 줄 것도 아니면서.

“빌리 아일리쉬 노래로 해주라.”

“양심이 터져도 유분수지.”

코웃음을 쳤지만 지훈의 손은 노트북의 터치패드에 있다. 순영이 오기 전까지 띄워놓고 있던 프로그램을 다시 화면에 돌려놓고, 나눠져있는 퍼커션을 만지자 박자에 맞춰 가벼운 드럼비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지고 놀던 보드를 버리고 뛰어온 순영이 옆에 털썩 앉자 지훈이 약간 거리를 벌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이해하지 못할 화면을 쳐다보며 감탄을 낸 순영이 들뜬 목소리를 냈다. 뭔데? 자작곡이야?

“자작곡 아니야. 일단 뭔 악기가 들어가는지부터 알아야지.”

“기타! 그리고 드럼이랑― 단소?”

“농담이지?”

자기도 모르겠다는듯 으쓱여지는 어깨가 참 가볍다. 정한이 형이 자기는 그거 제일 잘분대. 고개를 저은 지훈이 못들은 셈 치고 다시 키를 만졌다. 보컬은 석민이가 해준다고 치고. 베이스는.

내가 이걸 왜 해주고 있지. 한켠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젠가처럼 디테일을 끼워맞추는 손이 분주했다. 민규는 드럼 얼마나 칠줄 아는데, 베이스 없으면 세션 못 해, 너 이런거 칠 수 있어? 등등. 별 지식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공연을 잡은 담대한 내향성 인간이 대답을 하거나 감탄을 하거나 한다. 기지개를 켜면서 닿는 살갗을 피해 지훈이 다시 거리를 벌리면, 순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터치패드를 건드렸다. 손이 부딪히려다 말았다가, 끝내 부딪히거나 한다. 지훈은 포기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베이스 구해오면 곡 만들어줄거야?”

연락을 돌릴 생각인지 스마트폰을 만지는 엄지가 바쁘다. 영어로 쳐지는걸 보면 아예 학교에도 공지를 돌릴셈인듯 했다. 뭐, 돈 나눠준다고 하면 누구든 한 명쯤은 해주겠지. 걱정하는건 그런게 아니라서, 지훈의 눈은 가늘기만 하다. 너 진짜로 할 셈이구나.

“어차피 춤도 못추니까.”

말투는 한없이 가벼운데도, 지훈은 눈을 피할 수 밖에 없다. 수술자국이 남은 발목은 계절 때문에 천에 가려지지도 못한채 흉하게 드러나있었다. 순영은 그게 흉한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겠지만. 지훈은 그 단순함이 가끔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뇌에서 밀어내고는 한다. 어차피, 라. 프로그램을 만지는 손이 느려지다가, 인터넷 창이 대신해서 열렸다. -편곡은 해줄게.

노려보면 답이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화면을 보고있던 순영이 느낌표를 띄우며 고개를 돌린다. 그게 너무 부담스러운 거리라서 저도 모르게 손을 세운 지훈이 빌리 아일리쉬 노래는 무리일거라는 첨언을 했다. 네 실력 가지고 할 수 있는거 찾으려면 밤 새야할거다. 어차피 순영은 그런걸 구분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니 지훈의 몫이 될터다. 그래도 어쨌든 해줄 것이다. 왜냐고 물으면 돌릴 말이 없지만, 순영은 진짜냐고 거듭 물었다가 멋대로 지훈을 껴안고 구르려고만 한다. 아 미친! 떨어져! 질색을 하며 벗어나려고 하는 지훈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있었다. 비록 자신을 미련곰탱이라고 생각할지언정, 즐거운 것을 표현하지 않기는 너무 힘든 연유로.

***

물이 허파까지 들어차는 감각이 든다.

지훈은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는 제 손끝을 슬로우모션처럼 느꼈다. 답답하고 느리고 괴로운 공기방울들이 그 끝을 어이없게 스쳐가고, 태양빛을 삼켜버린 수면이 무정하게 저를 내려다본다. 없는 공기를 토해내며 축 쳐지는 사지를 버둥거리는 순간에 생각하는 것은 한 명 뿐이었다. 무거운 것이 물에 빠져들어 출렁이는 결을 느낀다.

지훈은 이 다음의 전개를 안다.

그래서 깨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뻗어지는 손을 잡으려고 필사적인 제 손 끝이 감겨드는 피부를 사정없이 긁어댔다. 저에게 고정 시키고 싶지만 미끄럽고 무거운 물이 그걸 방해한다. 그럼에도 손은 달래듯이 지훈을 붙잡고, 단지 방울이 될 뿐인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채 그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하지 말라고 소리쳐도 소용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꿈 속이라도 바꿀 수 없었다.

체온에 끌어안긴 지훈이 공포에 잠식된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헤드라이트가 그곳에 있다.

빠앙. 잊을수도 없는 소리와 함께 지훈은 물에서 내쫓긴다.

그리고 남은 권순영은.

***

“짠.”

건네진 것은 봉투였다. 안에 뭐가 있는지 추측하기 전혀 어렵지 않은 크기의 흰 봉투. 지훈은 큽, 하고 못참은 웃음을 기어코 내보냈다가, 어쨌든 그 봉투를 받았다. 어우, 뭘 이런걸 다. 꾸며낸 어른같은 말투에 똑같이 터져버린 순영이 어깨동무를 했다. 아이, 너 없었음 망할뻔 했는데 당연히 그정도는 줘야지.

밴드 공연은 애매하게 성공했다. 그러니까, 대충 돈을 받을 정도는 되었다는 뜻이다. 지훈이 받은건 일주일에 한 번씩 공연을 한지 한 달이 지나서 받은 첫 정산금의 일부였다. 얇은 액수에 눈썹을 올릴것도 없이, 공연은 밴드인데 거의 1인분 정도의 값이나 받았기 때문이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혼자서 통기타 매고 노래 불러주는줄 알았대. 밴드 공연을 할거라고 고용주에게 미리 말도 안해준걸 뭐라고 생각해야할지. 어쨌든 네 명-지훈까지 다섯명-이 나눌만큼의 금액은 어느정도 추가로 얹어줬다고 했다. 돈 벌려고 온게 아니라 재밌어 보여서 학예회 마냥 연습 좀 해준 멤버들이라 쿨하게 넘어간게 다행이다. 어차피 순영을 제외하면 교회에서 매 주 하는걸 곡만 하고 싶은걸로 바꿨을 뿐인 수준이라.

“가자. 내가 햄버거 쏜다.”

“겨우 햄버거?"

“보스가 여기서 먹으랬는데 엄마한테 진짜 작살난다고 했더니 쿠폰 주셨거든.”

그건 쏘는 것도 아니잖아. 태클이 걸리면서도 웃음이 가득한 순영이 먼저 계단쪽으로 향한다. 밥 사준다고 꼬드긴 것 때문에 온 것처럼 굴기는 했지만, 지훈이 온건 공연을 보고 싶어서니까 뭘 먹는지는 상관 없다. 그것도 딴에는 일이라고 새벽까지 연습하는걸 봐준 것도, 맞지도 않는 박자를 코칭해준 것도 지훈이니 결과물을 한 번쯤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간에 나레이션이랍시고 공연을 도와준 우리 지훈이, 따위의 멘트를 칠줄 알았다면 안왔겠지만.  ―아니면, 뭐. 무대에서 기타를 든 채로도 괜찮은 순영을 봐야만 했다거나. 그런 이유도 있었고.

공연을 도와준 멤버들은 회식도 질린다며 내일 연습이나 하자고 먼저 갔다. 계속 같이 밥 먹는 것도 질린다나. 공연 직전에 구한 베이스 멤버가 정한인걸 생각하면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다. 평소같으면 섭섭해했겠지만, 어차피 너 있으니까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는 목소리가 여상해서 지훈은 잠시 입을 닫았었다. 그리고는 짠, 하고 건넨게 돈이었던 것이다.

나가는 길에 아까 테이블에 있었던것 같은 놈들이 공연 좋았다며 강남 스타일이라는 이름을 써서, 순영이 갱넘이 아니라 강남이라고 가운데 손가락을 들며 지나친다. 꼭 발음도 못하는 것들이 저런다고 하는 것까지 들렸을텐데 좋다고 웃어재끼는 폼이 취한 것 같았다. 지훈이 몸에 감기는 술냄새를 피해서 벽쪽으로 걷자 앞서던 순영이 걸음을 늦춰 옆으로 붙는다. 그래도 재밌었다. 뿌듯함이 넘치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마구 헝클여준 지훈이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눈치있게 잘 빠져줬지. 발신인에 찍힌 정한의 이름에 답장도 안하고 화면을 꺼뜨린다.

지하를 벗어나자 낮보다 온도가 낮아진 공기가 들어온다. 해가 저물어도 외투가 필요 없어진지 꽤 된 것 같았다. 오하이오의 여름은 지훈이 초등학교를 끝으로 남겨두고 온 고향보다 길고 쾌적하다. 방금 공연했던 노래를 흥얼대며 노후된 보도블럭을 밟는 스니커즈의 앞코가 닳아있었다. 햄버거 사고 돈 남으면 신발이라도 사려나. 그럴만한 액수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가 소리를 질렀더니 그 누나가 내 뒤통수를 빡! 하고―“

“네 잘못이잖아 완전.”

“아니 진심 땜빵 생긴 것 같다니까? 볼래?”

여보라는듯 돌려지는 검은 머리에 감자튀김을 던지자 웃겨 죽겠다는듯 고개가 원위치한다. 이틀 전에도 연습 봐준다고 만났는데,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모를일이었다. 처음에는 사이즈와 느끼한 맛에 거부감마저 느꼈던 미국식 햄버거는 반쯤 먹힌 상태였고, 콜라는 중간에 다 마셔서 리필을 해왔다. 4인석을 차지하고 떠들어대는 청소년들에게 직원이 추가로 시킨 코울슬로를 가져다주고 떠난다. 갈릭소스를 2배로 추가시킨 햄버거를 입에 가득 차게 베어문 순영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뭉게진 발음을 추측해보면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온 모양이었다. 시간이 1초라도 생긴 젊은 10대들이 항상 그렇듯이, 지훈도 휴대폰의 알림을 확인한다. 별다른 알림은 없었지만.

이주해 온 낯선 나라에서의 여름은 느릿느릿 지나간다. 지훈은 진지한 멋내기로 금발 탈색을 했고, 구한 세차장 알바에서 급여를 받기까지 5일 남짓이 남은 상태다. 알바가 끝나고나면 부모님을 따라 고향에 가는 김에 치과를 갔다오고-어쨌든 미국의 의료비는 너무 비쌌다-순영이 부탁한 게장 따위를 안고 돌아오게 되겠지. 그러면 눈 깜짝할 새에 가을이 되어서, 수업시간에 휴대폰으로 작업을 하다 선생의 눈초리를 받는 생활로 돌아갈터다. 지훈의 이번 여름은 세차장 알바와 새로 살 앰프를 제외하면 작년과 별다르지 않았다. 아침 9시까지 맥북을 만지다가 오후 4시에 일어나고, 교회에서 성경의 말씀을 흘려들으며 이어폰으로 셀린 디온의 노래나 듣다가, 앞에서 까부는 교회 청년부의 애들을 걷어차고, 음반을 내거나 레이블사에 메일이라도 넣자고 떼를 쓰는 순영을 무시한다.

방학마다 하는 일이고, 몇가지는 그냥 일과였다. 느릿느릿하지만 여름은 벌써 반이나 지나갔다. 올해도 이렇게 평화롭게 끝마치게 되겠지. 마저 이렇게 지나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언제나 바라는대로만 될 수는 없어서. 햄버거 집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종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지훈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어버리고.

“아.”

지훈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감탄사는 반대쪽에서 나온 것이다. 놀란듯이 입과 눈을 동그랗게 한 찬이 문을 밀다 말고 멈춰서, 지훈이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답장을 끝낸 순영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뒤로 돌린다. 어, 뭐야. 곧바로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일어서자 찬이 마저 문을 밀고는 들어왔다. 뭐야,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이런데서 다 보네. 찬의 뒤로는 지훈도 아는 얼굴의 아이들이 따라왔다. 너희 전부 햄버거 먹으러 온거야? 단체로 뭔일이래.

“연습 일찍 끝나서.”

사람이 많아서인지 4인석의 옆에 앉지는 못하고, 찬이 먼저 가서 앉으라는듯 일행들에게 손짓을 해 보내고는 지훈에게도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다. 어, 오랜만이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지훈은 맥박이 불안정해지는걸 느낀다. 너네 오랜만인가? 감자튀김을 집어서 입에 던져넣은 순영이 자문자답을 했다. 아, 그렇네. 나 입원했을 때 보고 안봤을테니까.

그러고보면 연습 장소가 가까웠나.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찬과 순영이 간단하게 대화하는 동안 리필한 콜라를 입에 머금은 지훈이 일부러 휴대폰을 잡았다. 아무 것도 없는 알림바를 비우고, 메신저 앱에 들어갔다가 아까 무시했던 정한의 문자를 보고는 모음 하나를 보낸다. 그래도 온 신경은 맞은편에 쏠려 있었다. 아직도 그 크럼프 파트 수정 해? 어. 잘 안되네 그게. 대회까지 여유있으려면 이번주에는 끝내야지. 수정하면 또 보내줄게. 저번에 보내준 영상은 봤어?

뒤쪽에서 부르는듯한 소리가 들린건 5분 남짓이 지나서였다. 슬슬 메뉴를 골라야해서 그런것 같은데. 찬이 금방 가겠다는 제스처를 보내고는 모자를 돌려썼다. 그럼 가볼게. 발목 신경써서 회복하고. 순영은 수고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붙였다. 찬은 지훈에게도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지훈이 들키지않게 숨을 길게 내는 동안 순영이 코울슬로를 떠먹으며 찬의 등을 가늘어진 눈으로 봤다. 쟤 밥먹고 또 연습하러 갈 것 같은데. 갈 때까지 남아있다 말려야하나.

“뭘 굳이 말려.”

“안말리면 빠꾸가 없단 말이야. 쟤까지 다치면 대회는 어떻게 나가.”

투덜대며 코울슬로에 스푼을 꽂는 행위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걸 알지만, 지훈은 울렁거림을 참아냈다. 잘하겠지, 라던가, 대답할 말은 혀에 얹었는데 막상 뱉을 수가 없었다. 대신 나간 말은 이랬다. 보내준 영상이라는게 뭐야?

지훈의 여름은 작년과 별차이가 없지만. 순영의 여름은 작년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옆에 놓아둔 기타도, 밑창이 미끄러운 스니커즈도, 동작에 방해가 되는 멋내기용 악세서리도. 이맘때쯤이면 모두 순영의 방이나 지훈의 차고에 있어야하는 물건들이다. 사실은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 햄버거 따위를 먹는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순영은 아무렇지않게 그것들을 두르고 있지만-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건 아닐터다. 아니, 물론 본인이 걸친것들이었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보고 받은거 보니까 안무 새로 하는거 헤매는 것 같길래. 참고할거 보내줬지.”

“보고를 받아?”

“당연한거 아니야? 내가 리더인데.”

통솔은 찬이가 알아서 하고 있겠지만. 자리 내려놓은거 아니라는 말을 한 순영이 다시 햄버거를 베어물었다. 저번에도 가서 봐줬다는 말에 답을 하지않자 분위기를 읽은 순영이 에이,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낸다. 심심해서 잠깐 갔다온거야. 구경만 하고 왔어.

두꺼운 깁스는 두 달 전쯤에 풀었다. 성장기라 무리없이 회복할거라는 의사의 말을 옮겨 들었었는데도, 지훈은 순영이 과장된 의성어와 함께 두 발을 짚고 나타났을때 거의 다리힘이 풀릴뻔 했던 것을 기억한다. 두부랑 고기만 배터지게 먹은게 효과가 있었다니까. 뜀박질을 하려던걸 뒤통수를 때려 만류하고, 수술 흉터를 자랑스럽게 찍어올린 인스타그램에 징그럽다고 코멘트를 달고, 목발을 짚는 속도에 맞춰 걸음을 조절하던걸 그만두게 된지도 두 달인데도. 아직도 재활이 남았고, 안전을 위해 겨울까지는 무리한 동작은 금물이다. 조금만 무리를 하면 시큰대고 퉁퉁 부어오르는 발목으로 댄스대회를 준비할 수는 없었다. 그게 거진 1년 동안 순영과 그의 크루들이 피 말리게 기다려온 것이라도 상관없이.

대회는. 병원복을 입고 사과를 집어먹던 순영은 한참이 걸려 나온 질문에 너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었다. 못나가는거지 뭐. 지훈은 멀쩡하게 서서 침대 옆에 있고. 여름만을 기다리던 순영은 침대에 누워서, 아작난 발목을 기구에 걸고. 아무렇지 않게.

“뭔 그런 표정을 하냐 또. 덕분에 기타치고 돈도 벌었잖아. 아 먹어먹어. 다 식었다 감자튀김.”

바구니에 담긴 튀김을 밀어줬으니 손을 옮겼지만, 입에 넣는게 식었는지 말았는지도 모르는 표정일게 눈에 선했다. 그래도 순영이 골치 아프다는듯 머리를 터는 것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휴대폰에 진동이 울리자 화면에 정한의 메세지가 떴다. 슬슬 털고 고백할 때도 되지 않았어? ―지훈은 물이 들어찬 폐에 공기를 넣기 위해 숨을 들인다.

“그래서, 보내준 동영상이란게 뭔데?”

아까와 비슷한 질문이었지만, 뉘앙스가 다르다는건 순영도 눈치챌만 했다. 대번에 밝아진 얼굴로 의자를 당겨앉아 휴대폰의 홀드를 푼 순영이 영상을 보여주려 몸을 기울인다. 이게 진짜 오래된 영상인데, 동작이 하나도 안촌스러워보이고 특히 3분쯤 부터가―

***

“괴롭힘 당한건 아니지?”

얼음잔에 맺힌 물이 미끄러져 테이블에 고인다. 테라스의 의자에 대충 발을 올리고 있던 지훈은 휴대폰 액정에 손을 올린채로 그런거 아니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한솔도 대충 말해본 것일 뿐이라 더 말을 얹지는 않았지만, 물어본 저의가 뭔지는 알만했다. 그런 애 아니야. 그런식으로 복잡하게 복수할 바에는 아예 안만날 성격이니까. 순영을 모르는 한솔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형이 그렇다면 그런거겠지만.

지훈의 어머니가 취미로 여는 일일 클래스는 생각보다 발품이 드는 일이다. 오늘도 밀가루가 다섯 포대나 필요하다느니 허리 상태가 별로라느니, 쇼파에 게으르게 누워있었을 뿐인 아들의 양심을 건드리는 말씀을 하시는 바람에 예정에 없던 외출이 생겼다. 아들 하나 끌고왔다고 돌아갈 때 장을 어마어마하게 볼 계획까지 세우셨으니 앞으로 2시간은 꼼짝없이 1층 카페에 갇혀있어야만 했다. 혼자서도 2시간쯤은 대충 보낼 수 있었지만, 마침 한솔이 작업한 곡을 들고 온다기에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노는 시간이니까.

그 곡에 대한 얘기도 30분 전 쯤에 끝난 참이었다. 지금의 대화 주제는 순영의 밴드에 대한 얘기다. 진지하게 하는 얘기라기보다는 그냥 근황에 대해 말하다가 나온 주제지만.

“그걸 방학 끝날때까지 한대?”

“어. 한 두 번 남았나.”

얼마나 받았냐는 말에 내놓은 액수에 한솔이 웃음을 터뜨린다. 저작권료도 안나오겠네. 동감하는 바이지만, 딱히 돈 받겠다고 해준건 아니긴 했으니까. 밴드 세션으로 편곡하는 작업 자체는 순영과 친구들이 할 수 있을만한 난이도의 곡을 고르는 것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것도 아니었다. 한 번 더 보러 갔었는데 코드를 틀려놓고 완전 뻔뻔하게 진행시키더라고. 정한이 형이 알아서 맞췄으니 망정이지, 혼자 터져서 고개를 돌리고 있느라 큰일이었다는 말에 한솔이 큼지막한 웃음을 걸었다. 재밌었겠네.

홈스쿨링을 하고 교회에도 나가지 않는 한솔은 지훈의 주변에서 순영과 관계 되어있지 않은 거의 유일한 연이었다. 애초에 건넛다리로 알았던게 아니라 SNS에 올린 매쉬업 동영상을 계기로 맺은 인연이니까. 작업 때문에 차고를 오가다 만나본적은 있고, 동네의 한인 커뮤니티가 크지도 않은 연유로 건너건너로는 다 아는 사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순영의 억지로 밴드 편곡을 해줬다는 이야기에 ‘괴롭힘을 당한거냐’고 물을만한 사람은 희귀하긴 하니까.

“그 사람은 아직도 춤 못추는 거야?”

한솔에게 순영의 이야기는 지훈에게 듣지 않으면 들을 이유도 계기도 없는 일이라, 근황을 알턱도 없다. 빨대로 반쯤 녹은 얼음을 저어대며 겨울까지는 안될거라고 들었다는 말을 하자 한솔이 콧소리를 냈다. 형도 고생이네. 그건 이제까지 이어진 대화-강제로 밴드 편곡까지 해줬다거나, 연습을 봐줬다는 이야기-를 통틀어서 한 말이었는데, 지훈이 무심하게 중얼댄다. 내가 망친건데 뭐. 한솔은 잠깐 침묵하고.

“아직도 신경 써?”

아. 제가 뱉은 말도 자각하지 못했다가, 혀를 빼어문 지훈이 자신이 짜증난다는듯 고개를 젖혔다. 또 금방 이러네. 아니라고 말을 수습해도 한솔은 콧소리를 내며 탄산수를 마셨을 뿐이다. 곡에 대한 이야기는 진작에 끝냈고, 지훈의 어머니가 나오기까지도 시간이 남았다. 한솔의 예정된 스케줄은 돌아가서 오늘 들고왔던 곡을 좀 수정하는 정도가 끝이고. 쳐다보는 눈에 어깨를 으쓱이는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머리 위로 실뭉치를 그린 지훈이 고개를 돌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본다.

몇개월 전에 같이 하던 협업작업을 좀 미룰 수 있냐는 메일이 왔을 때, 한솔이 별 상관 없지만 이유는 궁금하다는 식의 답장을 보낸건 당연한 일이다. 마감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미로 하는 콜라보였지만, SNS에는 좀 미뤄졌다는 말을 올리기는 해야하니까. 당시의 지훈은 ‘친구가 다쳐서’라고만 말했었는데. 한솔은 나중에 만나서 자세한 사정을 들을 때까지 친구가 다친것과 지훈이 작업을 중단하는것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당시에는 막연하게 뭔가 도와줘야하나보다, 하고 생각 했었지만.

“그냥 교통사고잖아. 형이 아니었어도 구했을법한 사람이라며.”

그렇게 계속 신경 쓸 필요는 없는거 아니야. 지훈이 파악하는 한솔은 꽤나 단순명쾌한 사람이다.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성숙해서, 2살이 더 많은 지훈이 속절없이 앓는 문제를 말 몇마디로 말소시켜주기도 한다. 또는, 지훈이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핵심을 찔러준다거나. 턱을 괸 지훈이 명쾌한 해답에서 눈을 돌려 의미없이 피드를 갱신한다. 그렇지.

지훈이 아니어도 구했을 것이다. 지훈이 직접 한솔에게 했던 말이었다. 친구 분은 좀 회복 됐대? 한솔은 운동화를 사러, 지훈은 예약을 걸어놨던 앨범을 사러 다운타운에 나온 날이 겹쳐서 만났던 날이었다.  그 부근에서 둘이 대화할 가장 큰 이슈는 중단된 작업이었고, 한솔의 질문은 메일로 주고받은 질답과 마찬가지로 당연했다. 지훈은 어어, 좀 있으면 퇴원한대, 까지만 말하고 넘기려고 했지만, 가볍게 먹을 생각으로 시켰던 푸틴이 전타임에 밀려든 단체손님들 때문에 워낙 느리게 나오고 있었다. 둘 모두 말이 많은 성격도 아니었고. 그래서 그냥, 지훈이 털어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래도 좀.”

말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훈도 한솔의 말이 백번 옳다는건 알고 있다. 지훈의 잘못도 아닌 일이고,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계속 신경쓰고 후회할 필요도 없다고. 부외자의 생각이 가장 객관적인건 당연한 일이었다. 경적을 울려대는 트럭 앞에 있던 사람이 누구던지, 어느정도의 윤리와 선량함을 갖춘 사람이라면 눈앞에서 사람이 죽기 전에 뛰어들었을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트럭의 바퀴를 미처 피하지 못할 수도 있고. 정말로, 지훈이 아니었더라도 순영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둘 다 다치지 않았을수도 있었지만 운이 안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한솔은 단순명쾌한 사람이지만, 공감능력까지 떨어지지는 않는다. 비워진 유리컵이 테이블에 내려진 다음에 생긴 공백에는 배려가 있었다.  그새 검은 뿌리가 자라기 시작한 머리를 뒤섞은 지훈이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놨다. 그냥, 내탓이니까.

경적을 울려대는 트럭 앞에서 굳어있던 사람이 누구던지, 순영은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밤 11시였고, 도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훈은 저를 부르는 순영의 말을 무시하고 바깥으로 나왔었다. 순영이 그 자리에 있었던건 지훈 때문이다. 멍청이 같이 그 도로에 앉아 있었던 것도 지훈이었고, 나이에 맞지도 않는 술을 넘겼었던 것도 지훈이었고, 그 탓으로 다가오는 트럭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도.

총체적으로, 그저 엿같은 날이었을 뿐이지만. 그랬다는걸 지훈도 알지만. 사실 모든 것은 지훈의 탓이었다. 그 파티에 갔었어도 안됐고, 갔었더라도 그런― 그런식으로. 추하게 질투해서는 안됐던거였다. 잘못은 지훈이 했는데 침대에 누워서 그 좋아하던 춤도, 제 자부심을 보여줄 기회도 전부 잃어버린건 순영이고. 그런 주제에 그는 괜찮다고 웃기나 하면서.

“공연하던거 엉망이더라.”

한 번 말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둑터지듯이 나온다. 엉망이었던건 당연했다. 돈은 받았을지 모르겠지만. 뒤늦게 생각해보면 전혀 괜찮지 않았다. 처음 본 날은 괜찮은 것 같았었는데. 그 햄버거 집에서 찬을 만나고, 다음주에 봤던 공연은 최악이었다. 순영은 똑같이 했는데, 지훈이 괜찮지 않았던 탓이다. 어느정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무대에서 우뚝 서 있는 권순영이라니.

되도않는 무대매너를 선보이기는 했지만, 그가 좋아하는건 기타도 밴드도 아니었다. 지훈의 차고는 연습실보다 가깝고 사용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으니까. 거울을 가져다놓고 날이 셀 때까지 연습하다 널브러진걸 언제나 지훈이 건지고는 했다. 좀 쉬면서 하라고 핀잔을 줘도 이거 잘하게 되면 무지 멋있을거라고 눈을 구겨가며 웃던 얼굴을 기억한다. 스크린 데뷔하면 마스크 쓰고 살아야하니까, 지금 많이 봐두라고 들이밀어지는 얼굴을 밀어낼 때마다 저도 웃고는 했다. 어깨가 탈골 될 때까지 연습하면서 우승은 당연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있게 우승할 수 있을까 따위를 진지하게 생각하던 애였다. 지훈이 보기에도 정말 멋있었다. 너 아니면 누가 이기겠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렇게 말하면 뿌듯하게 차오르던 자부심을. 그 자랑스러움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봤던건 지훈인데.

“난 그냥. 내가 걔를 안좋아했다면 이렇게까지는 안됐을거라는 생각 밖에 안들어.”

지훈이, 순영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면. 일이 이렇게까지는.

―한솔은 침묵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거야말로 형 잘못이 아니잖아.

지훈은 웃을 수 밖에 없다. 조용하던 휴대폰이 타이밍을 재기라도 한듯 울리자 지훈이 화면을 돌렸다. 떠있는 이름에는 실소도 나오지 않고, 통화 아이콘을 옆으로 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왜 차고에 없어? 방이야? 지훈은 손목시계를 보고는 슬슬 갈 준비를 하듯 신발끈을 묶었다. 나라고 맨날 차고에 있냐. 어떤 답도 듣지 못한 한솔도 그저 내놓은 지갑을 챙긴다. 따가운 햇빛만 선명한 계절이었다.

***

정원으로 연결된 문을 열자 낡은 소리가 났다. 지훈은 신경쓰지 않고 들어간다. 어차피 안들릴걸 아니까.

여름 밤은 열대야도 없이 쾌적했다. 초등학생 때는 찌는 더위와 습기 때문에 방 밖으로는 절대 나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곳은 겨울도 고향보다 춥지 않아서 사계절 외출이 일과가 되었다. 방에 갇혀있으면 생각이 뭉치기만 하니까. 그러나 밤공기를 맞고나면 그 생각들은 손과 목을 타고 나온다. 특히 작년의 여름을 보내고 나서는 산책의 빈도수가 점점 잦아졌다. 누워있기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너무 많아져서, 산책을 한다고 그게 해결 되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차고 뒤편에 달아놓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대충 앉을만한 창틀이 나온다. 당연히 거기 올라가서 앉아놓으라고 만든 구조물은 아니었지만, 간 큰 미성년자가 꺼려할 정도로 위험한 곳은 아니었다. 앉고나면 건너편에 불이 켜진 방의 창문이 보인다. 인영은 없었지만, 어차피 알고서 올라온 참이었다. 순영의 집은 어머니의 퇴근이 늦은 것이 일상적이라 저녁을 꽤나 늦게 먹으니까. 갖고 올라온 기타줄을 튕기자 익숙한 소리가 난다. 그대로 두고 창에 기대면 별 하나 없는 하늘이 보였다.

지훈은 미국이 싫다.

아니, 아마 어느 나라에 있었어도 다 똑같았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있는곳이 미국이니까. 이주의 계기는 부모님의 전근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국제결혼을 한 친척이 먼저 근처에서 살면서 영주권도 얻은 상태라 도움받기도 쉬웠고, 애초에 해외발령이 난걸 지훈이 어느정도 자랄 때까지 부모님이 기다려줬던 것에 가까웠다. 초등학교까지는 다니던 곳에서 졸업하고 가는 편이 깔끔할테니까. 지훈의 의견을 물어보기는 했지만 빈 집에 혼자 남고 싶었을리도 없다. 지훈은 낯선 곳이 불안하고 싫었지만, 티내는 것도 자존심 상했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냥 순응한 상태로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서 살던 곳보다 훨씬 넓은 집에, 기후도 달라서 첫 일주일은 여행을 온 것 마냥 좋았지만. 학교에 가게 되면서 그런 생각은 싹 날아갔다. 그러니까- 한 3시간 만에?

이주할 생각이었으니 영어는 꽤 배웠었는데. 전화 영어 따위도 해보고, 원어민 선생님이랑도 대화 조금 해보고, 가족들끼리도 연습이랍시고 모국어 대신 영어를 썼어서 괜찮을줄 알았다. 하지만 온갖 곳에서 들리는게 영어뿐이고 수업까지 영어로 듣는건 좀 다른 이야기였다. 집중을 조금만 잃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필기체로 써지는 칠판을 눈을 가늘게 한 채로 노려보고, 누군가 와서 말을 걸어도 제대로 된 말이 나가지도 않았다. 친절한 또래가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보라고 했을 때는 몸에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기다릴 수 있다는듯이 친절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목을 붉게 만들었고, 화를 내고 싶었는데 그걸 표현하지도 못했다. 선생님이나 어른들한테 똑같은 말을 들었던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자존심이 꺾일대로 꺾여서, 얼마나 매달렸는지 모를 일이다. 죽어도 발음이나 문법 따위에서 지적을 듣고 싶지 않았다. 거쳐온 문화마다 발음도 다 다르고 여기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문법이 엉망인 애들이 넘쳐나는게 당연했는데도.

단 몇 개월만에 원어민 수준의 발음으로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된 지훈에게 다른 또래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아시안이라 공부 되게 독하게 하나봐. 유쾌한 분위기에서 나온 칭찬이었고, 네가 자랑스럽다고 하길래 주먹질을 했다가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왔다. 지훈의 이주 후 1년은 대충 그런식이었다. 험난했다고 하기에는 대부분 다 이런식이었겠지 생각했지만.

적응하고 나서도 미국이 좋아졌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흘러가는대로 꾸역꾸역 살다보니 뭐든지 익숙해졌지만, 그래봤자 이제는 여기가 고향이라던가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와중에 음악을 시작하게 된것도 그래서였는데. 말투가 어떻니 발음이 어떻니 하는것들에 음을 붙이면 어떻게든 괜찮아지기 마련이어서였다. 사촌이 호기롭게 사놓고 안쓰던 디제잉용 턴테이블이나 장비를 빌려와서 대충 써보거나, 유명한 노래를 취향대로 편곡해보는 정도가 다였지만. 그마저도 그냥 취미여서 지훈이 음악을 건드린다는걸 아는 사람도 없었다. 어디가서 말하는 일도 없었고, 친구는 더더욱 없었고, 그냥.

권순영을 만난건 지훈이 미국으로 이주해온지 꼭 3년만의 일이다. 처음 본건 한인교회에서였는데, 이 동네의 한인교회에는 소위 말하는 ‘청년부’가 있었다. 한국 교회에는 그냥 평범하게 있는것이기도 했고, 하는것도 한국에서와 비슷했다. 지훈은 악기나 좀 배워볼까 싶어 들어갔다가 오히려 다른 애들을 가르쳐주고 있던 때였는데. 새로 왔다면서 우렁차게 한국어로 인사하는걸 어이 없다는듯이 봤던게 첫 기억이었다. 물이 빠진 붉은머리에 올라간 눈. 청년부에 있던 애들 절반 이상은 못알아들었을 자기소개를 해놓고 손을 흔들어서는, 소개해주겠다고 데리고 온 정한이 영어로 그걸 번역해줘서야 나머지가 아아, 하는 반응을 보였던가. 엥, 하고 당황한 얼굴 때문에 제가 더 부끄러워 쓰던 악보에 음표나 그려넣었던 기억이 난다.

두번째는 학교에서였다. 점심 먹기가 싫어서 그냥 도서관에서 읽지도 않을 책을 빌리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환한 얼굴이 불쑥 앞에 나타나서 넘어질뻔 했다. 너 저번에 교회에 있었던 애지! 목청이 워낙 크기도 했지만 그 말도 한국어였다. 지훈이 굳어서 기억을 되살리는 동안 감탄을 낸 순영은 뒤늦게 영어로 말했는데, 주어도 목적어도 엉망이어서 겨우 제대로 말한게 영어 유치원에서나 쓸법한 기본적인 문구였다. 당연히 알아 듣기는 했지만. 얼마간 말을 고르다가 그냥 한국어로 하라고 했더니, 순영은 놀라서는 이렇게 말했다. 너 한국말 되게 잘하는구나!

그러니까, 순영에 대한 첫인상은 온통 헛웃음이었다. 초등학교때까지 한국에 살았다는 말을 하니까 진짜냐고 신나서 우다다 말을 쏟아내는게 좀 웃기기도 했다. 미안, 한국말 하는 애 찾기가 진짜 어려워서. 온지 얼마 안돼서 영어가 서투른 바람에 단어를 대여섯개 던져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느니, 학교에서 이렇게 많이 말해본건 처음이라고 들떠있는게 무슨 기분일지 알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그대로 붙잡혀서 남은 점심시간을 모두 허비했다. 이름부터 시작해서 나이에, 다음 수업 일정에, 숙제라는데 못알아들었다면서 건네준 페이퍼 내용에, 살고있는 집 위치까지 전부 말해줬다. 순영은 그렇다쳐도 지훈도 학교에서 그렇게 말을 많이한건 처음이었다. 딱히 한국어여서가 아니라.

원래는 낯을 가리는 성격인 지훈이 만난지 10분만에 줄줄 말했던 신상정보 중 중요한게 있었다. 순영은 주소를 듣더니 한 블럭 더 가면 이만한 개를 기르는 집이 있고, 매일 누가 시끄럽게 보드를 타서 새벽 3시마다 깨는 곳이냐고 물었다. 지훈은 거기까지만 들어도 잡히는 단서가 있었는데, 건너편에서 왼쪽으로 한 집을 넘겨서 나오는 곳에 누가 이사 왔다는 얘기를 들었었으니까. 아버지가 애들이랑 엄마가 한국인이던데, 하고 말했던건 기억하고 있었다. 어차피 한인촌이 가까운 곳이고, 그 집은 지훈이 이사를 왔을 때부터 쭉 비어있던 매물이라 별 이상한 우연이라고 칠 수도 없었다. 나이도 동갑인 애가 살고 있는것 정도는 좀 특이했지만.

순영은 운명이라는 말을 쉽게도 뱉었다. 다행이라고 거의 울먹이기까지 했다. 어머니가 재혼을 해서, 아버지랑 한국에 남는것 보다 미국물을 먹어보는게 낫지 않겠나 싶어 왔던건데. 갑작스럽게 결정한거라 뭘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고. 원래도 영어 같은거 못했는데 막상 와보면 다들 할 줄 알게 된다길래 그냥 와본거거든. 망하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하나 했는데, 벌써 옆집에 사는 한국인 친구를 만들다니. 운 하나는 끝내준다고 팔을 덥석 잡고 흔드는 통에 지훈은 입을 열었다 닫기만 했다. 그리고는 이런 생각을 했고. 이거, 혹시 망한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실제로 그 이유 그대로 됐고. 순영은 이틀만에 지훈의 집에 들어와서 부모님과 통성명을 했고, 허구한날 지훈의 옆에 붙어서 별걸 다 물어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순영은 영어공부 마저도 지훈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어머니랑 아저씨한테 특훈을 받고있기는 한데, 둘을 학교까지 끌고올 수는 없다는게 이유였다. 수업시간에 뭐라는거야? 라고 적힌 쪽지가 넘어오는건 예삿일이 되었고, 어딜가든 순영이 따라붙었다. 점심이고 쉬는시간이고 공강이고 가릴게 없었다. 귀찮아서 좀 떼어놓으려고 하면 울먹이는 눈을 해서는 너 없으면 아무랑도 얘기 못한다는 말을 하기까지 했다. 어이가 없었는데, 지훈은 그걸 또 떼어놓지를 못했다. 웃기니까, 불쌍하니까,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느정도 기뻤던것 같다. 3년이 지나도 낯선 나라에서 외로워했던건 지훈이었으니까. 순영과 있으면 마치 남기고 와버렸던 고향에서의 학창시절을 보내는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동창들 얘기를 들어보면 또 전혀 아닌것도 같았지만. 그냥 느낌이.

순영의 영어는 금방 늘었다. 쓰는건 그렇다쳐도 말은 정말 순식간에 배웠다. 아마 지훈과는 다르게 많이 말해서 그런거겠지. 순영은 안되는 영어로 아무 단어나 막 뱉어놓고는 별로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상대방이 알아들으면 그거라고 한국어로 소리쳐놓고는 급하게 다시 영어로 말하는게 버릇인 수준이었다. 지훈이 3년전에 두려워했던 것과 달리 별로 비웃는 애가 없었다. 가끔은 있었는데. 그러면 순영은 한국어로 욕을 잔뜩 쏟아냈다. 지훈은 한국욕을 그렇게 오래 들어본것도 오랜만이라 웃음을 참으려 고개를 돌려야했고, 흔히 말하는 ‘Jerk’는 당황하고는 했다. 거 발음 갖고 되게 뭐라고 하네, 넌 한국어 알아? 영어 밖에 못하는 주제에 뭘 잘났다고 어쩌고 저쩌고. 지훈만 웃겨서 죽어가고, 상대는 얼굴이 울긋불긋해져서, 주먹이라도 휘두르면 피하는 몸이 잽싸서 닿지도 못했다. 싸움이 크게나면 지훈은 말리기는 커녕 상대의 안면부터 주먹으로 뭉갰다. 부모님은 학교에서 마주치면 서로 어색하게 인사하고는 했다. 상담을 받고 나와서 어깨가 쳐졌다가, 둘이 눈이 마주치면 웃어버렸다. 일상이 된건 순식간이었다. 벌로 받는 봉사활동 말고, 순영과 어울리는 것들이.

춤을 춘다는건 비교적 늦게 알았다. 어느정도 영어도 늘어났을 무렵에 들어갈 서클을 고민하는것 같더니, 춤 동아리는 없냐고 물어서. 지훈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무심하게 모른다고 말했다. 댄스서클은 왜. 휴대폰으로 뽑기 게임을 하면서 물으니까 순영은 그게 제 진로라고 말했다. 엥, 하는 반응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취미도 아니고 하고싶다도 아니고, 그게 진로라고. 응. 샌드위치를 야무지게도 베어먹은 순영은 마요네즈가 묻은 얼굴로 웃었다. 여기 온다고 좀 쉬었는데,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으니까.

아마 지훈은 ‘네 덕분에’라는 말을 좀 곱씹었을지도 모르겠다. 순영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서 일취월장한 영어로 뒷말을 이었다. 없으면 만들지 뭐. 학교말고 아예 바깥에서 만드는것도 괜찮을지도. 중학교 때도 그런식으로 하나 만들어서 들어가 있었다느니, 그런 말을 하길래 굉장히 뒤늦게 질문을 입에 담았다. 너 춤도 춰?

말한적 없었던가, 따위의 말을 놀란 얼굴로 한 순영이 보여주겠다면서 음악을 틀었기 때문에, 지훈은 좀 질색했었다. 아직 학교인데 뭔. 하지만 노래가 끝날때 쯤에는 순영이 말한 ‘진로’라는게 그냥 말해보는 헛소리가 아니었다는걸 알았다. 주변에 애들이 엄청 모여있었는데, 몇 명은 동영상도 찍은것 같았다. 지훈도 찍어놓을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순영은 모르는 애들이랑 잔뜩 하이파이브 따위를 했고, 지훈에게 돌아와서는 어땠냐고 물었다. 어. 멋있네.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리 말했더니 뿌듯해했다. 지훈은 그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근데 너무 아시안 클리셰인거 아니야.

미국의 컨텐츠들에서 대상화하길 좋아하는 아시안들의 클리셰는 두가지였다. 악착같이 공부하는 너드. 그게 아니면 춤추는 애들. 뭐, 차용되는 횟수는 압도적으로 전자가 많았지만. 지훈은 어디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 공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과목을 설렁설렁 공부했다. 순영은 저보다도 공부를 대충했으므로 당연히 너드 클리셰 같은곳에는 속하지 않은줄 알았다. 그런데 춤이라니. 뱉어놓고는 친구끼리 하기에도 무례한 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순영은 눈썹을 휘어 올렸었다. 그리고는 그게 뭐? 라고 대답했다. 그런게 있어? 라거나, 그런 말이 아니라. 

그 말은 조금 오래 머리에 맴돌았다. 어쩌면 갑작스럽고 굉장했던 춤보다 더.

생각해보면, 순영은 항상 그런걸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것 같았다. 자기 발음이 남들에게 어떻게 들릴지라던지, 한국어를 쓰는것도. 지훈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며 비웃는 시선이 싫어 악착같이 애썼는데. 순영은 아무데서나 그냥 한국말을 썼다. 지훈이 영어 배우고 싶어하지 않았냐고 뒤통수를 누르며 금지명령을 내렸어도 조금만 답답하면 그냥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주위에 아무도 없던 100명이 있던 신경도 안썼다. 짧은 단어를 내든 문법이 안맞든 의사소통만 되면 상관 없다는듯 굴었다.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던 관심 없는것처럼.

반면에 지훈은 그런것에 재능이 없어서. 순영을 만나기 전인 3년 동안 꽤나 애를 썼었다. 무시받는건 질색이고, 남들이 생각하는 틀에 자신을 끼워맞추게 놔두고 싶지도 않아서, 반골 성향이라도 있는듯이 행동했다면 그랬다. 누구나 그럴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뭐?’는 좀 충격적이었다. ―부럽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열등감이 들었을지도 모르고. 아주 조금.

사랑에 빠진건 언제였지?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도 1년이 훌쩍 지났을 때. 

아니, 정확하지는 않다. 그 전부터 좋아했겠지. 그냥, 자각의 이야기다.

튕기는 기타줄의 소리가 청명하기만했다. 지훈은 아직도 불만 켜져있는 창문을 보다가, 내려갈 채비를 했다. 허밍으로 나오는 음은 조금 새로웠다. 내려가고나면 악보에 음표라도 몇 개 더 쓰게 되겠지. 사다리에 발을 걸치고 올려다보는 사각형의 창은 텅 비어있다. 어쩌면,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익숙한 얼굴이 창틀에 튀어나오기를 빌었을지도 모른다. 제가 바라는게 그런것인지, 전혀 감도 못잡겠지만.

***

“안 가.”

꽤 단호한 목소리다. 애런은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얘도 적잖이 물어볼 사람이 없었던걸테니까. 하지만 그런것까지 신경 써줄만큼 좋은 인성은 아니다. 특히나 이런건.

이번만 부탁한다고 하는 목소리가 꽤 간절했는데도 지훈은 발치로 온 농구공을 주워들었을 뿐이다. 아무리 고향처럼 습하지는 않다고해도 길거리 농구코트의 햇볕은 뜨거웠다. 그래도 구기종목이라면 뭐든지 빼는 법이 없기는 했다. 그에 반해 원래도 공을 갖고 노는것에는 센스가 없는 순영은 지훈이 비워버린 이온음료를 사겠다고 코트를 나갔다. 지극정성이라고 휘파람을 부는 놈들에게는 손가락 욕이나 해주고. 원래 농구를 할 수 있었대도 지금은 음료를 사오는것 정도가 전부긴 하겠지만. 그래서 지훈은 입이 더 쓰다.

스코어는 지훈이 들어간 팀이 5점 정도 앞서고 있다. 키가 전부인 스포츠긴 해도 어차피 아마추어들이었다. 덩크 같은건 못해도 2점슛 정도야 가뿐하게 한다. 작고 말랑한 아시안 따위를 제 팀에 안끼워주려는 놈들이 하도 많아서 혼자 새벽까지 코트를 전세 내가며 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 때도 순영이 없는 센스로 1on1을 해주거나 했던가. 너무 못해서 연습도 안될줄 알았는데, 안끼워주려던 놈들의 실력이 권순영보다도 못했었던건지, 팀에 들어가기만하면 승률은 8할이었다. 슬슬 돌아오고 있을 까만 머리를 생각하며 지훈이 티셔츠로 대충 땀을 닦았다. 애런은 포기하지 않았다. 할 줄 안다고 들었단 말이야. DJ 없이 어떻게 파티가 돼?

“너희가 알아서 할 일이지.”

“당장 내일이라서 그래.”

그 말은 아까 들었다. 이미 거절했는데, 이대로면 다음 세트가 시작하기 전까지 계속 물어볼 것 같아 지훈이 쉬고있는 다른 애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관심 없으니까, 까지 말했더니, 애런이 앞을 막았다. 오는 애들의 리스트를 줄줄 읊어줘도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지훈은 치어리더는 물론이고 럭비부의 애들도 관심없다. 누가 잘나가고 누가 얼마나 예쁘고 잘생겼고, 누가 하이틴 사회의 정점에 있고, 그런것들은 지훈과 아무 상관 없다. 지훈에게 그런 사회는 이방의 것이었다. 이주한지 6년이 됐든 10년이 됐든 상관없이, 아직도.

새학기 시작하기 일주일도 안남았잖아. 너도 이런것 좀 즐겨야지. 다시 생각해보라는듯 팔을 벌리는 애런을 지나치자 코트의 철망 쪽에 서있는 순영이 보인다. 봤나, 싶었다가. 봤으면 어떠냐는 생각이 치고 들어왔다. 금방 그만뒀지만. 다가가니 웃는 낯으로 녹색 음료를 흔들어준다. 한 판 남았으니까 15분만 기다리라는 영어에 순영이 그늘에 가있겠다고 했다. 난 뛰지도 않았는데 존나 덥다. 미국에서 지낸지 3년이 됐는데 얘는 아직도 밖에서 한국말을 쓴다. 반면 지훈이 한국말을 쓰는 상황은 딱 두가지였다. 가족끼리 있을 때와 순영과 있을 때.

“재미 없었다.”

치익, 캔이 따지는 소리가 울린다. 차고로 돌아가는 대로변은 이제 좀 서늘하기까지 했다. 한참 땀을 흘리고는 식혀서 그런지, 정말로 여름이 끝나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훈은 따진 콜라 캔을 기울이기 전에 고개를 저었다. 그니까 뛰지도 못할걸 뭐하러 같이 나와서.

농구는 이겼다. 별 반전도 아니었고, 순영의 말대로 재미없는 시합이었다. 이제 방학도 끝물이니 다들 시간을 보낼만한게 떨어졌을 뿐이다. 차고에서 문자를 받았을때는 지훈도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 순영이 바깥공기를 쐬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너 그러다 곰팡이 나. 차고에 얼마나 있었냐고 물었던 30분 전의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하는게 아니었다. 자기는 제 소유도 아닌 곳을 전세낸 것처럼 들락대면서, 주인이 15시간쯤 틀어박혀 있는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바깥공기는 창문 열어서 쐬면 되는 것을. 새로 들인 앰프의 성능을 좀 만끽한것 뿐인데, 그걸 고깝게 여길줄이야. 억지로 끌려나간것 치고 순영은 앉아만 있고, 뛰어다니는건 저였으니 더 재미 없었다. 그래도 저녁 공기는 괜찮았다. 여름의 낮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모님은 괜찮으시대?”

“어. 심한건 아니시래.”

이번 고향 방문의 중점은 아무래도 궤양으로 입원하신 지훈의 이모를 뵙는 일이 되었었다. 물론 치과도 갔다왔고, 순영이 부탁한 게장도 가지고 왔지만. 순영의 이모도 아니니까 돌아온지 이틀이 되었어도 얘기는 아까 차고에서나 했다. 순영도 진짜 면식도 없는 지훈의 이모를 걱정해서 물어본 말은 아닐터였다. 코트에서 차고까지는 꽤 걸어야해서 아직 중간도 못왔다. 입에 들어찬 탄산이 만족스러울 만큼 목을 긁고 내려갔다. 넘기고 나니 생각나서 지훈이 웃는다. 이모가 아직도 콜라 못끊었냐고 묻더라. 순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킥킥댄다. 거짓말한건 아니지? 아프신 분한테. 지훈은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고는 마저 콜라를 입에 담았다.

한국에는 일주일 정도 있다가 왔다. 가면 침대도 없이 친척 집에서 자고 일어나야하고, 언제 이렇게 크고 영악해졌는지 모를 사촌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줘야하고, 간당간당하게 연락하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들에게 헤드락을 당해야 하고, 정말 난리도 아니다. 할머니는 마주칠때마다 한국으로 언제 돌아오냐고 묻는게 일과셨다. 지훈은 부모님이 결정할 일이라 모르겠다고 하고, 부모님은 언제나 잘모르겠다고 말씀드리고는 한다. 할머니가 그러시면 외삼촌이 나무라듯 말한다. 거기 평생 눌러붙는게 좋은거지, 이 좁아터진 땅덩이에 뭐하러 돌아오라고 하냐고. 미국 가서 떵떵거리며 사는게 지훈이를 위한 일 아니겠어? 이미 거기가 더 익숙할텐데. 그럼 지훈은 머슥하게 웃는다.

“로밍 얼마 나왔냐.”

“몰라. 대충 고지서 나오면 등짝 맞겠지.”

보드를 가져올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다가, 순영 때문에 일부러 안챙겼던걸 새삼 깨닫는다. 보도블럭과 아스팔트의 경계를 걷던 순영은 지훈의 덤덤한 말이 뭐가 웃긴지 어깨를 치기까지 했다. 아 뭐. 어차피 매년 있는 일에, 먼저 전화하는건 자기면서. 네가 문자 먼저 보내니까 전화하는거잖아. 논리적이지도 않은 말을 하다가, 반대쪽에서 차가 오자 보도블럭으로 들어온 순영이 어깨동무를 해왔다. 지훈이는 안그렇게 생겨서 외로워하니까 어쩔 수 없지. 보고싶어할거 뻔하니까 전화 정도는 해주는 수 밖에.

“땀냄새 나니까 떨어져.”

“어우, 상처받게.”

저는 뛰지도 않았으면서 반팔을 끌어올려 냄새를 맡는게 어이가 없다. 나한테서 난다고. 순영은 샐쭉 웃고는 그럼 자기는 상관 없다는 말을 했다. 덤비려고 준비하길래 멀끔히 피했더니 어깨가 쳐진채로 따라온다. 일주일 동안 얼굴도 못봤는데 서운해. 지금 8시간째 붙어있는거라는 자각은 없는 모양이지. 말했다가 그건 그렇네, 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할까봐 꺼내지 않는다.

당분간은 그냥 걸었다. 이런게 그립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지훈은 자신이 한국에 가면 그곳이 마치 집같이 느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의 이지훈이 이방인이라면 그가 속할 곳은 고향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름의 며칠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으면, 그곳도 그다지 제자리가 아닌것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휴대폰 화면에 써져있는 권순영이라는 이름을 보면 웃어버리고는 하는것이다. 고지서 따위는 알바가 아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이리저리 끌고다니는건 부모님이니까. 불효막심하대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해서.

“아까 걔랑은 무슨 얘기했어?”

팅, 캔뚜껑을 긁던 손가락이 튕겨나간다. 어깨동무를 거절당한 순영은 다시 보도블럭의 경계를 걷고있었다. 걔?

예의상 물었지만 순영이 저렇게 꺼낼만한 일이 많지는 않다. 내내 구경하고 있었으니 지훈이 누군가와 말을 하면 다 들었을터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못들었을만한 대화는 한 개 뿐이었다. 순영은 아무렇지않게 추가 설명을 했다. 애런인가? 입술 길쭉한 애.

애런의 입술이 길쭉한지 어쩐지 생각해본적도 없지만, 지훈은 좀 침묵했다. 곧바로 답을 하지 않는게 이상해 보일거라는걸 아는데도 그랬다. 한발자국 뒤에서 걷던 순영이 살짝 뛰어서 지훈의 옆으로 왔다. 귀찮게 하던데. 시비라도 걸었던거냐고 해서 답이 더욱 궁해졌다. 걱정해서 하는 말인가? 진짜 시비였으면 지훈이 어떻게 나갔을지 모르는건 아닐테고. 고민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지훈이 눈을 바닥으로 박아버린다. 그냥. 파티에 디제이 필요하다길래 거절했어.

깜박깜박. 순영은 한박자를 쉬고는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고. 그리고… 침묵이다.

지훈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순영의 발목으로 간다. 쥐꼬리만하게 번 알바비에 용돈까지 털어서 산 새 운동화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유행지난 하이탑이었다. 새하얘서 아직 흙먼지도 묻지 않았다. 차고에 오자마자 자랑했는데, 그래도 흉터를 전부 가리지는 못했다. 비죽 튀어나온 수술자국이 걸을때마다 흔들린다.

“그럼 가지 그래?”

우뚝, 걸음이 멈춘다.

지훈이 멈추자 순영도 한두발자국 앞에서 멈췄다. 뒤돌아본 순영은 왜 멈췄냐는듯 눈썹을 휘고 있었다. 지훈은 입을 벌렸다 닫았다가, 곧 주먹을 쥔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가지 그러냐니.

“나도 저번에 들었어. 호세네 집에서 하는거지? 재밌어보이던데.”

수영장도 있대. 어깨를 으쓱이고는 웃는 얼굴이 아무렇지 않았다. 아는 애들도 꽤 있는 모양이고, 누구들처럼 거기서 밤새고 올 수는 없겠지만. 부모님도 너무 안나가는거 걱정하시지 않겠냐고. 이제 여름도 다 끝났는데, 한번쯤은.

안 가. 딱딱한 말이 떨어진다. 애런에게 말했던것보다도 높낮이 없는 어투였다. 흥미도 없고, 가기도 싫다고. 그래. 가기 싫다. 왜 그런곳에 가기 싫은지 누구보다 잘 알고있을거면서, 재밌어 보인다느니 수영장이 있다느니. 굳어버린 지훈의 얼굴을 보던 순영이 뒷목을 좀 문질렀다. 그리고는 무마하려는듯 웃고 이렇게 말했다. 너 디제잉 엄청 잘하잖아. 저번에도 꽤.

“가고싶으면 가.”

난 안간다고. 이제는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네가 가고싶어서 그러는거면 상관없으니까. 이제는 순영도 웃지 않는다. 대충 넘어가지 못할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훈은 상황을 당장 수습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치켜뜬 눈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일주일만에 보고있는거니까 이런 상황은 피하고 싶은데. 결국 또 자존심 문제였다. 이방에서 6년 동안 헤매고 있는 새에 쌓인 그 곰팡이가 또.

순영이 먼저 눈을 피한다. 어색하게 땅을 툭툭 건드리는 발끝이 무거웠다. 심호흡을 하는듯 숨을 들이는걸 봤을 때, 지훈은 순영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았다. 있지.

“네가 나 때문에 이러는거, 좀 별로야.”

툭, 하고 내뱉어진 말이 구슬처럼 굴렀다. 도르륵 소리라도 내는듯하다가 지훈의 발밑에 멈춘다. 주먹을 쥐니 제 귀에만 마찰소리가 났다. 어느새 손에 가득한 식은땀을 감추듯이 지훈이 소리를 냈다. 뭐가.

“나 괜찮아.”

발목이 들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콩콩, 몇 번 뛰어도 본다. 이제는 아프지도 않다고했다. 뛸 수 있는데 네가 말리니까 네 앞에서 안뛰는거야. 춤도 금방 출거고. 트럭이나 차 조명을 봐도 움찔대거나 하지 않는다. 순영은 정말 순조롭게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냥, 겨우 몇 개월. 평균 수명을 80살이라고 가정하면 손톱의 때만큼도 못되는 시간이었다. 이걸로 순영의 인생이 바뀌는 일은 없다. 대회는 내년에도 있다는 말이 흘러나와 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는 괜찮은데. 네가 안괜찮은건 안괜찮아. 굳어진 입꼬리가 뒤로 물러나 있었다. 지훈은 어지러워서 잠시 눈을 짚는다.

별로. 별로라고.

너때문에 내가 이러는게.

―그야 그렇다. 알만했다. 순영은 불편해한다. 다친 발목이 아니라, 순영의 발목을 다치게 했다는 이유로 계속 저를 걱정하고, 예민하게 구는 지훈을. 그 파티에서부터 줄곧 지훈의 눈치를 보는건 순영이다. 지훈을 구해준 것도, 다친것도, 춤을 못추는것도, 오래 열망한 대회를 그저 '내년에도 있다'고 흘려넘기는 말을 해야하는 것도 모두 순영인데도. 그런데도 뭔가 잘못한 사람은 자신인것처럼, 그러고도 지금까지 말도 안하고 참았다. 그렇게 인내심이나 배려심 깊은 성격이 아니라는것까지도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시끄러운거 싫어하는거 알잖아.”

가까스로 말이 나왔다. 결국 변명처럼 튀어버린 대화에 순영이 침묵했다. 지훈은 시끄러운 것도 싫어하고, 사람이 많은 것도 싫어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싫어했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있었다. 하지만 너니까. 너는, 시끄러운걸 좋아하고, 사람이 많은 것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니까. 나는 그런 너를 동경해서. 사랑하니까. 좋아하기 때문에, 한번쯤은 닮고 싶어서.

조심스레 잡아오는 손에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런거면 괜찮아. 드물게 낮게 나온 목소리가 덩굴처럼 들렸다. 그런거면, 그냥 시끄러운거 싫고, 파티 같은거 싫어서 그런거면 괜찮다고. 나 때문에 안가는거 아닌거 확실한거지. 온갖 악기를 다루느라 이곳저곳에 굳은살이 있는 손이 만져졌다. 그런건 좀 그래. 검지를 문지르는 손가락이 낯설다. 이상하잖아. 네가 나를 그렇게나 신경쓰는건. 왜냐면.

손을 뺐더니, 순영이 눈을 올렸다. 목 뒤까지 차고 올라왔던 말이 나오지 않아 지훈은 혀를 깨물어버리고 싶다. 한걸음을 물러나도 순영은 자리에 서있었다. 왜그래? 당황한 목소리 때문에 물러나던 발도 꼬일뻔했다. 가까스로 그것만큼은 막은 지훈이 갑자기 영어를 뱉었다. 이 얘기 그만하자. 순영은 미간을 구겼다. 갑자기 웬. 그러나 대답 대신 입술만 깨문 지훈이 한참만에 내놓은 다음 말도 영어였다. 파티 갈거야? 입을 벌렸다 닫은 순영이 영어로 답한다. 글쎄, 네가 가면?

“알았어.”

그게 다였다. 당황한 순영은 눈을 많이 깜박였다. 알았다니, 가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전혀 괜찮아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 순영이 더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지훈의 휴대폰이 울리는 타이밍이 더 빨랐다. 구세주라도 되는듯 재빨리 통화버튼을 옆으로 밀어버리는 지훈을 아연하게 보던 순영이 지훈이 손을 빼버렸던 제 손을 쳐다봤다. 뭔가 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화를 빨리도 끝낸 지훈은 다시 한국말을 꺼냈다. 너 아저씨가 들어오래. 문득 정신을 차리고 제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니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너희 어머니 빨리 들어온다고. 그러고보면 무슨 스튜를 한다고 했었나. 도와줬으면 하니 일찍 들어오라고 하셨던것 같은데, 돌아가는 길이 좀 늦어져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급한거 아니냐면서 지훈이 등을 떠밀었다. 아니, 전화해서 들어간다고 하면 되는데. 지훈은 갑자기 편의점을 들려야겠으니 따로 가겠다고 한다. 너 왜그러냐고 물어도 막무가내였다. 진짜 파티 가? 지훈은 대충 대답했다. 진짜로? 다시, 지훈은 대충 대답했다. 순영은 불신했지만 더이상 건드려서 좋을게 없어보였다. 데리러 가? 이 말에는 부정이 돌아왔다. 알아서 갈거야. 겨우 평소다운 답을 들어서야 순영이 발끝을 세워 버틴다. 뚝, 미는 힘이 멈췄다. 단순히 발목에 무리가 갈까봐. 멀쩡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래. 그럼 음… 그 때 만나.”

당장 내일이니까. 어색해진 말투를 읽었는지 말았는지, 지훈은 시선을 아래로 둔 채였다. 뭔가 좀 곱씹는듯한 얼굴인걸 보다가, 순영이 몇개월 전을 생각한다. 그 때랑 똑같이 말했네.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해야할지 고민하는 새에 지훈이 등을 밀던 손을 내려놨다. 그래. 그게 끊어내는 말투였기 때문에, 순영도 입을 닫았다. 어, 음. 응. 

그리고 끝이었다. 지훈은 정말 편의점이라도 들를것처럼 방향을 꺾었고, 순영은 좀 서있다가, 휴대폰을 들어 부재중 전화가 찍힌 연락처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왜 이런 타이밍에 전화를 하고 그래요, 금방 가는데. 나무라는 어투를 쓰며 발을 돌렸다가, 찌릿한 아픔에 순영이 신경질적으로 발목을 털었다. 네, 아니 뭘, 이렇게 당장 사과하시면 어떻게 화내요. 크하학, 알았으니까 저번처럼 당근 썰다 베이지말고―.

***

“그거 입고 가?”

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이다. 지훈은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은 청소년들이 하는 행동을 했다. 어. 걱정을 무시당한 어머니는 눈을 가늘게 했다가, 빗을 들고 와서는 머리를 올려주려고 들었다. 아 무슨 프롬도 아니고. 절대 싫다고 이리저리 고개를 피하는 아들의 목을 닭처럼 잡은 어머니가 그나마 튀어나와있는 탈색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해줬다. 약 하지말고. 내가 수사 드라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엄한 신신당부에 내가 미쳤냐고 말한 지훈이 청자켓 속으로 들어오는 향수에 질린 표정을 했다. 오늘 안들어오게 될 것 같으면 말하고. 아 진짜! 빽 질러진 소리에 깔깔댄 어머니는 등이나 툭 밀어주고 거실쪽으로 돌아가버렸다. 방학동안 알바하는 곳 아니면 차고만 왔다갔다 하던 열여덟 아들이 갑자기 파티를 간다고 한다면, 모든 부모가 저렇게 반응하는걸까?

아니, 민규놈은 저녁 10시 전에 안들어오면 현관에 머리 박아야한다던데. 저 같은 놈의 부모가 저렇게 열린 마인드여서 누구에게 득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현관을 연 지훈은 부쩍 서늘해진 밤공기 때문에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떼기 싫은 걸음을 떼었다가, 어쩌면 어머니가 봄에 일어났던 사건 때문에 더 과장되게 반응하는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지훈의 어머님은 훌륭한 양육자임이 틀림없지만. 아니, 어느 훌륭한 양육자가 아들에게 억지로 양배추찜 따위를 먹이려고 들겠어. 중문을 열고 대로변으로 나가자 본격적으로 걸음이 소처럼 늘어진다.

간다고 했더니, 애런은 차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렇게 상전 모시듯이 데려갈 만큼 좋은 실력인 것도 아니라고 거절하니까 천사 이모지를 보내왔다. 관심 없었다. 불쌍해서 디제잉 해주려고 가는게 아니니까. 그냥, 어제의 그 ‘왜냐면’의 맥락을 끊고싶었을 뿐이다. 이게 그 업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핑 돌 수준이지만. 이미 뱉어버린걸 어쩌겠어.

버스라도 타면 더 일찍 도착하겠지만, 지훈은 그냥 걷기로 했다. 그쪽에서야 디제이가 빨리 도착해야 분위기가 살겠지만서도. 말했듯이 도와주기 위해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욕까지 얻어먹고 싶지는 않아서 플레이리스트는 짜왔다. 괜찮게 분위기가 사는 음악이야 여름 초입에 순영의 밴드 편곡을 위해 수십개씩 들었으니까. 가는 길목에 어쩔 수 없이 순영의 집 앞을 지나쳐야했는데, 불은 켜져있고 차는 없었다. 먼저 간 모양이었다. 차라리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어폰을 꽂으니 주변 소리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다. 방향이 맞는지만 간간히 확인하며 걷는 여름밤은 청량하기만 했다. 문득 그게 1년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해서 길가의 돌부리를 걷어찼다. 괜히 센치해질 필요는 어디에도 없는데, 아니, 절대로 센치해져서는 안되는 상황인데. 여름 공기가 자꾸 발목을 붙들었다. 싫어도 신경질적이게 된다. 지훈은 그냥 이어폰의 볼륨을 높였다. 기타 소리가 귀를 긁어대도록.

네 덕분에.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얼굴을 기억한다.

차고의 창틀 위였다. 하나가 올라가도 위험해보이는 곳에 둘이나 올라가서, 순영은 제 집이 보이는 것을 신기해했다. 여기서 감시하거나 그러는거 아니지? 그 때는 아직 미쳤냐며 질린 얼굴을 할 수 있었다. 그곳은 그저 지훈에게 ‘공기가 좋은 곳’에 불과했다. 그 때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순영은 말라빠진 다리에 감긴 청바지를 쭉 내밀고는 기지개를 켰었다. 기분 좋다. 지훈은 웃었던가.

대단한 날도 아니었다. 둘은 차고에서 방학이 끝나기전에 몰아보겠다고 정한 좀비 드라마 시리즈를 연속해서 봤고, 한시간만 더 실내에 있었다가는 저희들이 좀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항복을 부르짖은건 순영이었다. 제발 좀 나가자. 아직 다섯편이나 남았다고 나무랐지만 지훈도 잠깐 나가는 것 정도는 찬성이었다. 그때의 차고는 지훈의 아버지의 차가 타이어가 펑크 난채로 들어있었고, 덕분에 기름냄새가 났다. 좀비 아포칼립스에는 어울리는 냄새였지만 환기도 안되는 곳에서 장시간 맡다보면 자연이 그리워졌다. 정원으로 나와 살겠다는듯 숨을 쉬고, 나간 김에 둘은 떨어진 콜라나 나쵸 따위를 사왔다. 그리고는 바로 기름냄새로 돌아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게 다였는데.

땅에서 2m 정도를 떨어져있으면 감성적이게 되는건지. 아니면 그냥 둘의 나이가 열일곱이어서 그랬던건지는 모를 일이다. 순영은 제 몫의 비타민 음료를 마시다가 문득 하늘을 봤다. 있지. 그렇게 시작하는 문장을 지훈이 싫어해본적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작업하던 가사를 보고있던 지훈은 무심하게 왜, 라고 대답했다. 순영은 좀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뭐가? 단촐한 물음에 고개가 돌아왔다. 미국이.

대충 입은 티셔츠 안으로 바람이 불었던것 같다. 순영이 입은 후드에는 VIVA AMERICA라는 우스운 문구가 쓰여있었다. 눈에 띄는 성조기를 봤다가, 갑자기 왜냐고 물었었다. 이렇게 뜬금없이.

원래는 완전 싫었거든. 비타민 음료를 2m 밑으로 추락시킬까봐 뚜껑을 닫은 순영이 그걸 얌전히 창틀의 빈 자리에 올려놓았다. 나 영어 같은것도 처음엔 하나도 못했잖아. 지훈은 껌딱지처럼 저에게 붙어다녔던 1년전의 순영을 떠올렸었다. 완전 민폐였지. 뭐가 재밌다고, 깔깔대는게 참 실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완전 민폐였잖아. 너한테도 엄마한테도 아저씨한테도.

아버지랑 한국에 남아도 된다고 하길래, 싫다고 말했던건 충동이었다. 별 이유는 없었다. 아버지도 괜찮은 사람이었고, 부모님이 이혼하신건 순영이 일곱살이 되기도 전의 일이었으며, 심각한 가정불화나 범죄가 연루되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둘 모두 저희가 헤어져도 남은 아이들을 케어할 만큼의 책임은 질 사람들이라는걸 알아서, 그래서 둘은 이혼했다. 어린 순영은 대충 이해했던것 같다. 이해랄까, 적응했던거겠지. 하여튼 미디어나 여기저기서 그리는 이혼가정들만큼 불우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더 있었던 누나는 조금 엇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순영은 흘러가는대로 너무 튀지않게 살아왔다. 부모님은 저희가 이혼했기 때문에 순영이 감내해야했던 것들을 보상해주듯이, 하고싶은건 뭐든 할 수 있게 해줬다. 또래보다 게임기도 장난감도 많았고 춤에 관심을 들였을때는 지원도 적극적으로 해줬다. 이혼했으면서 매번 시즌이 되면 가족끼리 항상 여행을 가줬다.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이혼가정 그딴거 별거 아니다. 그러니 재혼가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순영이 미국행에 관심을 보인건 순전히, 뭔가 해내는 사람들은 한 번 씩 외국에서 살다 오는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서였다. 유학파 같은 타이틀 하나 붙이면 멋있겠지. 본고장 스트릿댄스 같은것에도 어느정도 관심이 있었다. 제가 제일 잘하는건 춤인데, 이게 과연 바깥에서도 먹힐까 싶은 호승심도 어느정도 있었다. 어머니가 재혼한다던 사람은 농구선수 같은 키를 가진 흑인이었고, 순영은 첫만남부터 그가 영상을 봤다면서 ‘춤 잘추던데’하고는 대뜸 피스트 범프를 해줬기 때문에 그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걸 기회로 생각했다. 어차피 가서 안되면 아버지한테 돌아가면 되지. 한국에도 집이 있고 미국에도 집이 있고, 그러니까 거릴 것이 없었다. 순영은 추진력만큼은 세종대왕에게도 지지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온 미국이었지만.

사실,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생각보다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가오도 없냐고 뺨을 때려가며 관광차 뉴욕이든 어디든 돌아다녔었지만, 일단 의사소통의 문제가 컸다. 그냥 관광이었는데 일주일만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자기가 모르는 곳을 돌아다니며 낯선 사람들한테 말을 걸고 다니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 때 깨달았다. 엄마의 새 남편분은 차 안에서 심각해진 순영의 눈치를 봤다. 관광 완전 재밌다고 엄지 두 개를 올렸지만 사실 남편분도 그리 한국어를 잘하지는 못했다. 엄마한테 진작에 좀 배워둘걸. 자기가 오겠다고 해놓고 이게 무슨짓인지 싶어 몇 번이고 머릿속의 제 엉덩이를 걷어찼다. 하자, 해내자, 싶은 중에 관광은 끝나고, 새 집에 도착했다. 짐을 풀다가 호칭이 ‘아저씨’로 정의된 엄마의 남편분이 한인교회의 이야기를 해줬다. 내내 말이 안통해서 심각해하던 순영을 신경써서 그랬던거겠지. 학교 가기 전에 친구도 사귈겸 해서 한 번 갔다와보는게 좋겠다고 해서 주소를 받았다.

드디어 엄마 말고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날 생각에 들떴지만, 한인교회도 사실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거의 2세대 3세대들이라 1언어는 영어고, 한국어는 가족 중 나이 든 분들이 있거나 유학생인 경우에나 하는 정도였다. 그나마 정한과는 말이 통했는데, 그는 유학생이라 고등학교 졸업한지 1년은 됐단다. 한인교회도 주말 점심에 나오는 김치찌개나 얻어먹으러 오는거고, 바빠보이기도 그랬다. 아이. 망했다. 학교는 다닐수나 있을라나. 비자니 뭐니 받느라 개고생을 시켰는데 이제와서 이사온지 이틀만에 돌아가겠다고 하기도 좀. 그래도 몇 달은 버텨봐야할텐데 근심이 가득했다.  미래에 먹구름만 보이고. ―지훈을 만나기 전까지는.

네가 구세주였잖아. 불쌍하다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의 정, 크으.

지훈은 눈을 가늘게 했었다. 구세주는 무슨, 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데리고 다녀준건 사실이었지만 별로 좋은 태도였다는 기억은 안드는데. 순영은 어쨌든 너 아니었으면 큰일날뻔 했다고 아부 같은 말을 계속 뱉어냈다. 새삼 쑥스러워져서 발을 찼더니 시원하게 웃었었다. 툭. 순영이 창문에 기대는 바람에 창이 조금 흔들렸다. 그래도 좀 오래 별로였는데. 너랑 지내다보니까 그렇지도 않은것 같아.

드르륵. 옆에서 누군가가 보드를 타고 지나간다. 덜걱거리는 소음에 얼굴을 구겼던 지훈이 이어폰을 빼고 가까워진 목적지를 노려봤다. 왜 걷다보면 도착해버리고 마는걸까. 그야 그쪽을 향해 걸었으니, 당연한 일을 두고 지훈이 한숨을 삼켰다. 앞뜰에 있던 애들 중 아는 얼굴이 지훈을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우리 디제이 도착했다! 전혀 원하지 않았던 관심과 환호성을 받으며 지훈이 파티주최자의 집에 입성한다. 모세의 기적마냥 갈라지는 끝에 턴테이블이 있고, 제 이름도 모를 애들하고 하이파이브를 해대고, 그나마 억지로 나온거라는 분위기를 내지 않을 사회성은 있다. 부스에 가까이 갔더니 누군가 무리에서 튀어나와서는 지훈을 덮쳤다. 늦었잖아! 얄쌍한 대신 길쭉한 입술의 애런이 깔깔대며 지훈을 공중에서 한바퀴 돌린다. 발로 차고 싶었지만 이건 애런의 생일파티였다. 시야가 높아진 김에 힐끔 쳐다본 주위에 찾는 얼굴이 없었다. 잘부탁한다고 등을 팡 때리는 손길이 매워서 지훈이 짜증을 눌러참는다. 예예, 디제이짓 해드려야지요. 건네지는 헤드셋이나 쓰고, 휴대폰에 잭을 연결한다. 알아서 틀어줄테니까 원하는거 있는 애들은 한 명씩만 오라그래. 까칠한 말투에도 생일의 주인공은 기죽지 않는다. 덕분에 살았다. 고맙다길래 손을 저었다. 과제 같이 한 정이니까.

작곡을 한다고? 미친거 아니야?

플레이리스트의 첫곡이 나가자마자 환호성이 터져나와서, 지훈은 띵한 머리를 표현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해! 빽 소리를 지르는 과거의 얼굴을 안구의 먼 뒤쪽으로 보내려다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디제잉 같은것도 할 줄 알아? 이런 파티 디제이 따위 눈감고 스크래치만 몇 번 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직업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어차피 유명세를 타는 디제이 기대했다면 지훈을 여기에 앉혀놓을 이유도 없으니까. 진짜 대단하다. 어쩌면 유명한 사람이 올 예정이었다가 파토난걸지도 모르겠지만.

디제이가 막 출근했는데 어디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쨍. 저녁 8시밖에 안됐는데 벌써 술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너무 정신 사나워서 지훈은 편두통이 있는 사람처럼 눈썹을 문질렀다. 테이블에 있는 볼에 담긴건 보기에는 펀치 같았는데, 예상을 못했던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 정도로 저번과 비슷한 상황이 되자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순영을 닮은 얼굴이 있었는데, 순영은 아니었다. 고개나 처박고 플레이리스트를 점검하는척 굴었더니 누가 말을 걸려다가 다시 돌아가거나 했다. 경찰이라도 확 들이닥쳤으면 좋겠다는 성격 나쁜 생각을 했다가, 그네들도 대충 봐주겠지, 하고 생각한다. 경찰들도 미국인이지 않겠어. 그 사람들도 어렸을때는 다 이렇게 놀았을테니.

이런게 일상인 삶에 끼어드는건 대체 무슨 기분일까. 간간히 아는 얼굴들이 저들끼리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아서, 지훈은 한참이나 반복했던 고민이고 뭐고 벌써 탈출하고 싶었다. 시끄럽고 어둡고 머리 아프고, 대충 기계를 조작해서 톤을 높여주니 알아서들 소리를 지르는 폼이 우습다. 심호흡을 했다. 파티니까 와서 노는 애들이 잘못인건 아니었다. 그저, 그러니까. 지훈은 이런곳에 올때마다 제 발밑을 확인하는게 거북했다. 봄의 전에는 그러지 않았었는데. 이주를 하고 난 이후로 꾸준히 거북했던 그 고민이 멈췄던 단 10개월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오히려 전보다 장기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놈의 그 파티랑. 순영 때문에.

“웬일이야?”

고개를 들었더니 민규가 있었다. 무슨 형광팔찌를 대여섯개씩 양쪽에 걸치고, 누가봐도 파티에 온 사람 같은 차림이다. 트레이닝복을 입고오지 않은게 그나마 다행힌 저와는 비교되는 차림을 해서는 양껏 당황한 얼굴이었다. 지훈은 그나마 익숙한 얼굴에 숨통이라도 트이는듯 헛웃음을 띄웠다. 오면 안돼? 저에 비해서야 이런 곳이 있다하면 나타나는 놈이니 마주친게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아니라, 하고 말을 뗀 민규가 주위를 둘러봤다. 순영은? 한국어였으면 형이라고 부르라고 찼겠지만, 영어였으니 넘어갔다. 근처에 있겠지.

아직 들어와서 만나지는 못했다. 플레이리스트도 겨우 3곡째였다. 먼저 간거라고 생각하고 오기는 했지만. 기묘한 얼굴을 한 민규가 애런이 부른거냐고 다른 말을 했다. 부르려고 했던 사람이 파토냈대잖아. 용돈벌이나 하는거지. 그렇게 가볍게 말할 일이 아니라는건 알았다. 민규는 저번 봄의 파티에도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던 사람중에 하나니까. 침묵하다가, 이런거 다시는 안할줄 알았다는 말에 지훈이 헤드셋을 내렸다. 펀치나 마셔 새끼야. 그나마 웃는 얼굴이어서 민규가 얌전히 손에 들고 있던걸 홀짝였다. 아오, 누가 술 넣었어. 미쳤나? 야 애런!! 그런식으로 소리치면서 가길래. 지훈은 그냥 의자에나 앉았다. 이름도 모르는 애가 밴드 사운드는 없냐고 묻길래 믹스나 틀어주고, 멍을 때렸더니 민규가 돌아왔다. 손에는 까나페가 들려있었다. 아니 장난 아니고, 너 괜찮은거냐고. 

“권순영이 가보래잖아.”

큰소리로 말한것도 아니었는데, 그게 들렸는지 민규가 입을 다물었다. 불퉁한 목소리였음을 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다였다. 순영이 자기 때문에 안가는거냐고 물었으니까. 부정하려면 오는 수 밖에 없었다. 왜 부정해야하냐면, 그건 ‘이상한 일’이고,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끄러운것도 싫고 이런 분위기도 싫고 다 싫지만. 결정적으로는 권순영 때문에 이런데에 오기가 싫은거니까. 둘러봐도 까만 뒤통수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왔나 싶지만.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거기서 거기인 청소년들의 파티가 기억의 커튼을 내렸다. 멍하게.

그 봄의 파티 때, 권순영은 완전히 파티의 중심에 있었다.

그 애의 파티였던 것도 아니다. 아마 그 파티의 주인공이 지훈이었다면 꽤나 삐졌거나 화를 낼 만큼이었다. 뭐가 어떻게 됐던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던게, 그 때도 지훈은 디제이로 불려가있었고, 디제이가 하는건 부스에 앉아서 헤드셋이나 목에 걸치고 음악이나 트는거니까. 그리고 지훈은 파티랍시고 머리를 넘겨놓은 상태였던 순영과 눈이 마주치지 않게 위해 인생 최고의 집중력을 동원하던 참이었다. 마주치면 멍을 때릴것 같았는데, 그런 상태를 들키고 싶지가 않았다. 비웃음 당할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뭔가를 들키거나.

그 파티에 가게된건 순전히 권순영 때문이었다. 지훈은 관심 없지만, 관심 없는 지훈마저도 알 정도로 학교에서 인기가 있는 아이가 파티를 연다느니 만다느니, 시니어가 된 기념으로 모두를 전부 초대하니 마니 뭐 그랬던것도 같다. 지훈은 엮일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듣고 있었다. 그러나 식당에서 열심히 생토마토를 골라내면서 뒷자리 애들이랑 떠들던 순영은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디제이가 어쩌고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락말락 했을 때, 순영이 갑자기 얌전히 핸드폰이나 하던 지훈의 손을 들었다. 지훈이가 할 줄 알아! 그 때의 지훈은 순영과 거리가 1cm만 가까워져도 알레르기처럼 목이 붉어지려고 하던 때였다. ―그래서. 뭐? 라고, 멍청이 같이 반문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디제잉을 할 줄 아는것도 순영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다 걔 탓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스트릿댄서들이 맞붙을 때는 가끔 디제이가 선곡을 골라준다. 배틀 디제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는데, 순영은 가끔 그걸 해달라고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지훈을 조르고는 했다. 순영이 억지를 써 개방한 차고에 악기 관련 짐을 옮길 때 구석에 처박아뒀던 사촌의 턴테이블을 들켰기 때문이다. 있으면 재밌단 말이야. 영상 찍기도 좋잖아. 나 춤추는 것도 보고. 그걸 내가 왜 해야하냐고 하면서도 지훈은 순영이 해달라는거라면 뭐든지 해줘버리고는 했고, 그래서 순영은 지훈이 디제잉을-그것도 꽤 잘-할 줄 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학교 애들 중에 그런걸 아는 애가 몇이나 있었을지. 하다못해 지훈이 음악을 한다는걸 아는 사람도 얼마 없었고, 아니, 어쩌면 순영밖에 없었을텐데. 순영은 그 때 그게 기회라도 된다는듯 지훈의 팔을 높이 처들었던 것이다.

지훈은 당황했다. 함부로 잡힌 손목의 온도가 높았다. 조금 높이 있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정적이 있었다가, 평생 얘기도 해본 적 없었던 치어리더 복장의 아이가 그럼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지훈이 마른침을 삼킨건 그 애 때문이 아니었지만. 대답을 순영이 해버렸다. 당연하지. 지훈이 얼마나 잘하는데.

SNS에는 편곡이나 자작 믹스테잎이나, 매쉬업 등을 올리고 놀고는 했다. 그것도 순영이 파티에서 다 떠들어대서 들켰었다. 지훈은 결단코 그런것들을 바운더리에도 없는 이방인들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는데도. 모두가 ‘그렇게 안봤는데’라는 흥미로운 눈으로 절 바라보는게 메스꺼워서, 지훈은 더욱더 디제잉 테이블에나 집중했다. 그러니 언제 분위기가 달아올라서, 언제 권순영이 그 중심에 있고, 언제 걔를 애들이 데리고 가버렸는지 기억이 없었다. 지훈은 그냥 내내 속이 메스꺼운걸 달랜다고 술이 들어간 펀치를 잔뜩 처먹고 순영을 생각하고 있었다. 디제이가 중간에 나가면 안되겠지. 그냥, 같이 차고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방인들이 없는 둘의 장소로.

왜냐하면, 미국에는 네가 있잖아.

공중에서 체류해있던 여름 공기를 생각한다. 감은 눈과 호선을 그리던 입을 생각한다. 순영은 가끔 지훈이라면 평생 담아두기만 할것 같은 말을 잘도 밖으로 꺼냈다. 그래도 좀 오래 별로였는데. 너랑 지내다보니까 그렇지도 않은것 같아. 왜냐하면, 미국에는 네가 있잖아. 그러니까 미국이 좀 좋아졌어. 네 덕분에.

그 때 처음 들었다. 순영이 아무데서나 한국말을 쓰고, 원주민들의 텃세 따위에 기죽지 않는건 지훈이 생각했던것 만큼 동경할 만한 이유가 있는게 아니었다는걸. 그가 이방인들을 신경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그저, 조금 있다가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이방인일 그가 제 위치를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시비가 붙으면 맞서고 답답하면 소리지르면 된다. 그는 애초에 이런 낯선 나라 따위에 속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니, 남들이 저를 이방인 취급하는 것도 개의치 않아했다. 그래서.

순영에게는 한국에도 집이 있다. 국적을 어떻게 할지는 순영이 성인이나 된 다음에 진지하게 고민하면 될 일이었다. 못버티겠다 싶으면 그냥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된다. 1년 남짓만 버티면 돌아가겠다고 해도 어머니는 적응에 실패했겠거니 하실거고. 하이스쿨이 아닌 고등학교에 돌아가서, 대학 갈 때는 이만큼 미국에 있었다 쓰거나. 음, 사실 대학에 가고싶은 마음이 있는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정말 상관 없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순영은 처음부터 길어봤자 2년일거라고 생각하고 왔다. 이주했다기 보다는 유학인거지. 아마 비자도 다를것이다. 행정처리는 어머니가 해주시고, 자신은 적으라는거 적고 서명하라는거에 서명하는거라 잘 모르지만.

그랬는데. 지훈을 만나고나서― 정확히는 오래 지내보고 나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어쩌면 널 만나려고 여기까지 온걸지도 몰라. 실없는 농담이나 하는 것처럼, 순영은 그 창틀에 앉아 지훈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이 낯선 이방에서, 여기가 제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네 차고 말이야. 어쩌면 그냥 네 옆이거나.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곳만큼 편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지훈은 그런. 마치 고백같은 말을 하는 순영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다른게 아니라 머릿속에 퍼지고 있던 수상쩍고 낯선 색 때문에. 너무 낯간지러웠나? 별 대답이 없는 지훈 때문에 머슥해졌는지 순영은 웃어버렸고, 창틀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다가 비타민 음료를 2m 아래로 낙하시켰다. 어어, 하고 비명을 지르고는 급하게 사다리를 붙들길래 넘어질까봐 기겁해서 여름밤의 공기는 금방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조심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순영은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사다리를 내려가서는 명을 달리한 비타민 음료를 붙잡고 오열했다. 그 때는 흐지부지 됐지만. 기억이 날아가는건 아니라서, 지훈은 잠 못드는 날들이 늘어났다. 자꾸만 그 말을 곱씹게 되었다. 여기가 제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미국도 한국도 아닌, 다른걸 모두 이방으로 생각한대도. 오로지 지훈의 옆이.

그게 지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순영은 알지 못해서. 그래서 아마 열 달 동안 지훈의 기분이 널을 뛰는 새에 순영은 멀쩡하게 굴었던거겠지. 지훈도 알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희열 따위를 제가 순영에게 전할 일은 없을거라는걸. 그 말을 들었음에야 비로서 제 자리도 생긴것만 같았던 그 기분도, 몇 년동안이나 붕 뜬 것처럼 어디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짓누르고 억지로 심으려고 하는 것들 사이에서 겨우, 있고싶어서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얻어낸 기쁨도. 그냥 눌러삼키는 것 외에 제가 취한 행동이 없다는걸. 지훈도 알았지만.

긴장의 나날이었다. 그냥 고백해버리라고 답답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훈은 누가봐도 수상했는데, 순영의 눈치는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주변에서 지르라고 재촉하니 지훈도 해버려도 될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싫어할리가 없다니까. 정한은 대놓고 그렇게 말했지만, 대체 무슨 말로 마음을 고백한단 말인가? 네가 좋아? 으. 대신해서 못담긴 말들은 가사로 써냈다. 순영은 들을 때마다 대박이라고 지훈의 어깨를 쳐댔다. SNS에만 올리지말고 회사에 보내자니까. 차고에 드러누워 그렇게 떼를 쓰는걸 볼 때면 약간은 즐거웠다. 그 곡들이 좋게 나온 이유를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질 때도 있었다. 어쩌면 괜찮을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랬는데. 그 파티에서의 순영은 진창 취한채로, 이방의 정수인 것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뒤에서 부르는 순영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파티를 빠져나가며 지훈은 그런 생각을 했었다. 뭘 혼자서 멋대로 생각했던걸까? 하고.

지훈이 본건 정말 별게 아니었다. 당장 넷플릭스에서 아무 하이틴 영화나 틀어서, 재생바의 4분의 1정도를 클릭하면 나올듯한 그런 장면. 파티의 주인공인 잘나가는 학생이 제게 어울릴만한 MVP를 뽑아서 환호성과 함께 상을 주듯 입맞춤 따위를 해주는, 그게 진심이라고는 들어가있지 않은것을 알아 상대도 유쾌하게 웃어주는, 그런 단순한.

그러니까, 딱히 순영이 다른 사람과 부대꼈기 때문에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리를 박찬것은 아니다. 지훈은 그저 그 전체적인 풍경이. 하이틴 드라마처럼 찍어내져있는 그 구도가 역겨운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이방의 풍경에 아직도 내외하는 자신과, 저를 남겨두고 혼자 그 풍경에 서있는 순영을 향한 같잖은 원망 때문에. 그래서.

뭘 혼자 멋대로, 그냥 감성적인 상태로 권순영이 내뱉은 헛소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멋대로 울타리 안에는 저희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게 진짜라고 믿었던걸까? 지훈은 열 달 내내 새삼스레 순영의 존재가 제 안에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세느라 벅차서 머저리 같이 굴었던 것이다. 순영이 말한 ‘자리’라는 것은 어쩌면 제 옆이 아니라 미국이었을터다. 지훈을 연결고리로 해서 미국이 조금 더 좋아져서, 그래서 이방인처럼 굴기를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니까 순영은 더이상 어중간히 제 옆에 떠있지 않고 이 이방 안으로 자신을 들인 것이다. 아직도 이 곳을 낯선 곳이라고 생각하며 발을 못붙이는 지훈을 남겨두고, 순영은 훌륭하게 이 나라에 스며든다. 치어리더를 짝사랑하고 영어를 떠들어대면서, 이런 파티에서 행가레를 당하며 술이 든 펀치 따위를 마시고, 퀸카에게 잡혀서 입술이나 부딪히고, 다른 친구에 연인을 만들어서 멀쩡히 여기를.

야, 지훈아! 잠깐만!

머리가 아팠었다. 분명 애들이 갖고오는대로 넘겨버렸던 펀치의 탓이었다. 순영이 쫓아오고 있었는데 발을 멈출 생각이 안들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발이 계속 풀을 밟다가 블럭을 밟다가 했다. 이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절대 아니겠지. 그냥 다른 애들이랑 파티에서 놀았던것 뿐인데. 순영은 지훈이랑은 달라서 곧잘 애들에게 초대를 받고, 하지만, 그 애도 대부분 그런 제안은 거절했었다는걸 알았다. 갑자기 이렇게 저까지 끌고온 이유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아마 아까 생각한듯이 이제 순영은 이방에 속하고 싶었던거겠지. 저도 사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순영이 웃었으니까. 순영이 제가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잘한다고, 손목을 잡고. 웃고있었던 것이다. 지훈은 그거면 되었기 때문에. 순영의 옆이라면 이런― 지금까지 피해 온 낯선 문화에도 자리가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보는건 다른 이야기였다. 마음대로 거품 따위를 뿌리고 순영을 중심으로 몰아가는 손들이 부러웠다. 자신은 그 이방에 끼지 못한다. 지훈은 그래서, 그런 사실에서 잠깐 도망치고 싶었을 뿐인데.

빠앙.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놓은 노래에서 경적이 울린다. 정신을 차리니 민규가 앞에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순영이 형 찾아볼까?”

어눌한 한국말이 웃겼다. 입술을 핥은 지훈이 헤드셋을 벗어서 내려놨다. 그냥 내가 가볼게. 민규는 찾으면 돌아오겠다면서 부스를 이탈하는 지훈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엥? 아니, 뭘 또 가기까지― 전화해보면 되잖아! 황당하게 소리치든 말든 도망치는듯한 걸음이 빨랐다. 민규는 황당하게 해드셋을 들고있다가, 아씨, 말걸지 말걸, 하는 소리를 육성으로 냈다. 그냥, 민규도 저번 봄의 파티에서 울렸던 앰뷸런스의 소리가 적잖이 놀랄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랬던건데. 주인 잃은 헤드셋을 그냥 들고 선 민규가 건너편에서 애런과 눈이 마주친다. 눈썹을 휘는 그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인 민규가 이미 안보이는 지훈의 탈색머리를 뒤늦게 찾았다. 안돌아오는건 아니겠지. 불안한 예감을 억지로 누르며.

***

앉았더니 이슬이 옮겨붙는듯 했다.

청승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변명을 하자면 장소가 가까웠다. 평생 단위로 오고싶지 않았는데 왜 여기로 왔는지 지훈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해는 당연히 졌고, 잔디의 냄새가 났다. 텅 빈 고속도로에 차 하나 지나가지 않는다. 원래 잘 쓰지 않는 낡은 도로라서. 그러면서 왜 그 때는 잘만 트럭이 지나갔는지 미스터리다. 무릎을 안고 얼굴을 묻었더니 숨이 조용해졌다. 그 상태가 꽤 마음에 들어서 지훈이 눈을 감는다.

―순영이 저를 원망할지. 지훈에게는 결단코 풀리지 않는 난제 중에 하나다. 객관적으로는 당연히 할 것 같았는데 순영은 마치 그렇지 않은것처럼 굴었고, 그래서 햇갈리는 탓이다. 누군가 지나가는지 앞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멀어진다.

그 사건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것 처럼 트럭의 소리를 듣지 못했었던건 아니다. 클락션 소리는 들었지만, 그러니까. 아마 지훈은 그 순간에 충동적으로 자신이 그냥 치였으면 했던것 같다. 살다보면 사람이 한 두 번쯤은 바보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거니까. 자주 바보 같았던건 제가 아니라 순영이었는데. 어쩌면 그 전제 자체가 틀렸을 수도 있고. 지훈은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싫은 것이다.

ㅇ,야, 권, 의 다음 어절. 믿기지않아 건드렸더니 터져나온 찢어지는듯한 비명이 삼켜버린 그 어절이 입을 맴돌았다. 지훈은 정말 당황해서, 제가 대리석이 된줄 알았다.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깜빡이는 트럭의 전조등과 뒤늦게 몰려온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막에라도 씌인듯 멀었다. 지훈은 저를 깔고 쓰러진 순영의 밑으로 피 웅덩이가 맺히는걸 방관했다. 시야를 조금 움직였더니 바퀴에 깔린 운동화가 보였다. 온몸이 덜덜 떨렸던 감각을 기억한다. 그게 제 몸이 떨렸던건지 3톤 트럭 밑에 발목이 깔린 순영이 아픔에 떨었던건지 구분이 안됐다. 창백하게 지훈의 옷을 그러쥔 순영은 눈이 마주치자 한숨을 쉬고는 지훈의 품으로 고개를 떨궜었다. 다행이라는듯이.

뼈가 조각났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훈이 보기에는 트럭바퀴에 발이 완전 아작났던것 같았는데, 바퀴는 둥글어서 틈새가 있으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근육조직은 짓이겨진게 맞았지만 뼈가 재생 못할 정도로 조각난건 아니어서, 특수골절 처리를 했다. 바퀴가 네모였으면 절단 났겠지? 농담이랍시고 깔깔대는 얼굴에 오렌지를 던지고 싶었지만 지훈은 대신 그걸 먹는걸 선택했다. 목 뒤에서 넘어오는걸 함께 삼키기 위함이었다. 순영은 한참 웃다가도 지훈의 분위기에 머슥하게 입을 닫았었다. 다인실에 켜져 있는 TV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는데도 순영은 항상 그걸 노려보고는 했다. 지훈은 제가 그의 병실에 앉아서 목석처럼 앉아있는게 그를 불편하게 한다는걸 알았지만, 퇴원할때까지 매일 들리는걸 거르지 못했다. 자기혐오와 자기위로를 함께 수행했다. 안그러면 그냥 도로에 나가서 저도 치여버리는게 좋을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바보같지는 못했기 때문에.

원망은 순영이 아니라 순영의 의붓아버지에게 받았다. 술 마셨다며. 그런 파티에 간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는데, 결과가 이렇다면 반성은 하겠지. 지훈은 고개를 떨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대신해서 사과했다. 병원비는 보험으로 처리했다고 들었다. 병상의 순영은 자기는 돈문제는 잘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였었다. 어렵사리 순영의 부모님에게 물어봤는데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고만 했다. 너도 놀랐을텐데 너무 마음쓰지 말고. 아마 헬슥해진 모습 때문에 예의상 해주셨던 말일터다. 아들 발목 조져놓은 애가 뭐가 예쁘다고 위로를 해주셨겠어. 실제가 어떻든 지훈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어서.

어느날은 병원에 갔을 때 찬을 포함한 순영의 댄스크루들을 마주한 일이 있었는데. 다들 머슥하게 인사를 해서 3분도 못견디고 나왔다. 저 때문에 리더를 잃어서 붕 떠버린 대회에 대해 사과할 정신이 없었다. 무릎부터 꿇었어야했는데. 근데 그렇다고 걔들 마음이 편해지나? 뒤에서 욕이나 실컷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러고보면 대회 날짜가 어떻게 되더라.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끝나버렸을지, 아니면 내일일지 불투명했다. 지훈은 그런것들에서 저를 최대한 떼어놓고 살았다. 그렇게까지 마조히스트처럼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순영이 퇴원하자마자 제 차고로 다시 출석을 찍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우울해하는건 이상한 일이니까. 본심대로 행동하면 의심받을것 같기도 했고.

하긴, 이제와서는 무슨 소용인지. 지훈은 마른 안구로 도로의 건너편을 노려봤다. 의심 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게 무슨 소용이지. 숨기는건 꽤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 그보다는 순영의 없는 눈치에 대한 믿음이 있지만. 그럼에도 의심받지 않았는가. 네가 나 때문에 이러는거, 좀 별로야. 어제의 말이 고막 안쪽에 고인다.

절 구하다가 발목이 다친 친구를 계속 신경 쓰는건 이상한 일인가? 저 때문에 발목까지 희생한 친구는 순영 정도가 다라서 기준을 잘모르겠다. 그러나 한솔도 아직도 신경쓰냐고 물었었던 것이다. 슬슬 죄책감 같은건 털어내는게 맞는거겠지. 하지만, 그러니까. 그 친구가 다친 이유가 궁극적으로 제가 그를 좋아해서라면, 조금 더 길게 신경쓸 수도 있는거 아닐까. 

하지만 이런 사실은 순영에게 알려져서는 안된다. 양심의 문제였다. 얼마나 지긋지긋하겠어. 다쳐서 아프고, 내내 준비하던 대회도 못나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몇 달 동안 제 눈치를 봐야했는데. 그게 전부. 그저 지훈이 저를 사랑해서라고 한다면.

털썩, 옆에 사람이 앉는 소리가 들린다.

지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볍게 뛰는 발자국 소리는 들렸었다. 인기척도. 여전히 건너편을 노려보고 있던 눈앞으로 불쑥 작은 봉지 감자칩이 내밀어진다.

“훔쳐왔어.”

목소리가 조금 숨차보여서, 지훈은 눈 뒤가 따가워졌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어떻게 딱 주방 바구니에 있더라. 그게 웃긴지. 주방 바구니라니, 파티음식이 아니라 평범하게 집주인의 비상식량이었을텐데. 지훈은 잔소리를 하는 대신 그냥 봉지를 집었다. 팡, 하고 열자 합성시즈닝 향이 올라왔다. 입에 넣었더니 바삭바삭하다. 순영의 손이 시야에 튀어나와 감자칩을 가져갔다. 헉. 매운맛이네.

애런이 잡아오래? 어떻게 알고 여기를 왔는지라던가, 물어볼것들은 따로 있었지만. 지훈은 그 질문들에서 나올 순영의 답을 회피하는 기분으로 다른 소리를 했다. 타바스코맛 감자칩을 입에 넣은 순영은 아니, 하고 부정을 냈다. 민규가. 태연스러운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남겨놓고 나온 멀대같은 체구를 생각해본다. 좀 미안하긴 하네. 울며 겨자먹기로 부스에 묶여있을게 눈에 훤했다. 순영이 감자칩을 먹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뭔가가 내밀어진다. 그게 제 휴대폰인걸 알아봐서야 지훈이 순영의 쪽을 돌아봤다. 동네 편의점에라도 가는 차림인 지훈의 친구가 웃고있다. 놓고 갔길래.

그야 놓고갔지. 스피커에 연결돼서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있었을테니까. 이탈은 해도 곧 돌아올거라는 보증 같은걸로 남겨놓은건데. 이걸 가져왔다니 애런의 파티에서 노래를 틀고있는건 어느 기계일지 심각해졌다. 이걸 어떻게 가져왔냐는 표정을 읽은건지 순영이 팔로 상체를 지탱하고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뽑아서 가져왔는데. 민규가 알아서 하겠지.

나중에 저주받는다는 나무람에도 웃기나한다. 저를 더 저주할지 순영을 더 저주할지, 싸잡아서 인형을 두개 만들지 궁금해졌다. 밥이나 사줘야지. 걔도 나도 많이 먹어서 좀 깨지긴 하겠지만, 받았던 알바비 얼마나 남았더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코앞의 도로에 차가 지나가자 지훈이 저도모르게 움찔 몸을 움직였다. 아이씨. 욕이 절로 나왔는데, 뱉지도 못하고 삼킨 지훈이 순영을 피해 앞으로 고개를 돌린다. 본게 분명한데도 순영은 감자칩이나 더 가져갔을 뿐이다.

“넌 생일파티 간다는 애가 옷이 뭐 그러냐.”

할 말이 없어서 불퉁한 말이 나갔다. 순영은 엥, 하고 말했다가, 제 차림을 내려다보고는 탄성을 냈다. ―그러는 지는. 나는 이거라도 걸치지 않았냐고 청자켓을 들어보였더니 코웃음이 튀어나왔다. 빨랫줄에 걸려있는거 아무거나 입고 온걸거면서. 네가 봤냐는 시비에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듯 순영이 감자칩을 또 털어넣는다. 멋부리는데에 관심이 없는건 사실이더라도, 지훈에게도 입을만한 괜찮은 옷은 있다. 본지가 몇 년인데. 옷장 정리할때도 옆에서 뒹굴었잖아. 건넨 지훈의 휴대폰 대신 제 것을 꺼낸 순영이 뒤이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뱉는다. 뭐, 어차피 올 생각도 없는 파티였으니까. 어떻게 입던지 상관 없긴하지.

침묵이다. 그렇다고 지훈의 머릿속도 조용하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뒤통수가 근지러워서 긁고싶은 충동이 났다가, 그냥 감자칩을 가져간 지훈이 뒤늦게 순영의 차림을 힐끔댄다. 멋부리는데에 관심이 없는 지훈과 다르게 평소에도 상하의 매치 따위를 신경쓰는 애인데. 지금 입고 있는건 낡아서 나염이 빈티지마냥 벗겨진 VIVA AMERICA 티셔츠였다. 아까도 봤는데 이제야 눈치채서 지훈의 머리가 과도하게 돌아간다. ―일부러? 아니, 절대 아니겠지만.

“넌 오고싶어서 왔던거 아니냐.”

표현이 맞는지 좀 햇갈렸다. 지금 여기가 파티장인건 아니니까. 순영은 누군지 모를 사람-아마 찬인것 같았지만-과 문자를 하다가, 못들었다는듯 되묻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지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시선은 휴대폰에 그대로 둔채로 한쪽 눈썹을 위로 휘어올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는듯이. 내가 어딜? 애런네 파티?

“난 걔 풀네임도 모르는데.”

수업 겹치는 것도 없고, 있다해도 친하게 지내고 싶을만큼 뭐가 있는 애도 아니고. 나쁜 애라는건 아니지만? 얼굴이랑 이름 정도는 알아도 그게 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떴다. 걔를 알고 모르고가 문제가 아니라. 아니, 생각해보면 잘 알지도 못하는 애의 생일파티에 굳이 오는것도 이상하기는 한가? 정식으로 초대받은적도 없다길래 지훈의 얼굴이 약간 아연해진다. 얘기를 들었다기에 지훈은 당연히.

그럼 왜 온거냐는 질문은 렉이 걸렸다가 갑자기 풀린 프린트처럼 툭 튀어나왔다. 에러코드처럼 생각이 너무 산발적으로 많이 진행되고 있는 탓이었다. 순영은 자기가 감자칩을 다 먹을 생각인지 뭔지 또 한웅큼을 가져갔다가, 진짜 이상한 질문이라는듯 미간을 구겼다. 왜냐니. 네가 간다며. 목소리에는 황당함 마저 묻어있었다. 지훈은 그제서야 어제의 영어 문답이 생각났다. 파티 갈거야? 글쎄, 네가 가면?

“별로 오고싶지 않았는데 내가 간다니까 온거야 그럼?”

결론이 황당해서 말로 나갔던건데, 순영은 이제는 얘가 왜이러나 싶은 눈을 하고 있었다. 풀네임도 모르는 애의 생일파티에 제가 올 이유가 따로 있냐는듯한 표정이다. 별로 오고싶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기 싫었어. 그래서 늦장 부리다 갔더니 민규가 네가 나 찾으러 나갔대잖아. 데리러가냐고 물었더니 알아서 가겠다고 해놓고, 막상 가니까 없어서 그 길로 감자칩만 훔쳐 나왔다는 말이 약간 불퉁했다. 찾았으니 망정이지, 휴대폰도 놓고가고.

지훈이 할 수 있는건 렉이 걸린 머릿속에서 그나마 가장 걸리는 것들을 선별하는것 뿐이다. 방금의 대화에서 가장 의외인 말은 '오기 싫었어'였다. 별로 오고싶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왜? 파티 좋아하잖아.”

머리가 복잡해서, 질문이어야할 것이 거의 혼잣말처럼 옅게 나왔다. 싫어서 거절했다는데 굳이 얘기를 잇길래, 사실 생각해보면 그 맥락에서 순영이 파티를 가고싶어하는 듯한 의사를 비친적은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뒤늦게 도착할 동안 순영은 지훈의 혼잣말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나?

내가 파티를 좋아하나?의 축약판 같은 음절이었다. 그랬던 적이 있었나 심각하게 재고해보는 눈이 하늘로 향해있었다. 물론 친구들끼리 하는 파티야 신나고 재밌으니까 좋아하지만. 지훈의 질문은 주최자가 애런처럼 안친한 애라도 파티라니까 덥석 갈만큼 좋아하지 않느냐, 뭐 이런 맥락일테니까. 민규처럼? 그렇게 따지면 일평생 그랬던적은 없었기 때문에, 순영은 다시 감자칩을 집어먹었다. 설마. 나 낯가리는거 몰라?

순영은 낯을 가린다.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의 텐션을 생각하면 절대 생각지 못할 명제였지만, 사실인건 지훈도 알고 있었다. 저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때의 선례가 있었으니 안믿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친해지고 싶어지면 불도저가 따로 없을 뿐이지 실제로 모르는 곳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얌전해지는게 디폴트였다. 저와의 첫번째 두번째 만남에서는 단지 구세주를 발견한 사람의 이상텐션이었던거고. 물론, 지훈은 순영보다도 더 낯을 가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훈보다 순영이 나서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그렇다고 순영이 모르는 사람의 파티에서 아무하고나 yo bro거리며 친분을 쌓는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니까.

상반되는 모순된 정보가 끄집어내져서, 지훈의 머리가 과열된다. 낯을 가려 모르는 사람의 파티를 별로 안좋아하는 권순영.

“그럼 저번에는 왜.”

흘러나온 말이 끝맺어지기 전에 지훈이 입을 닫아버렸다. 그래봤자 이미 나온 말이고, 순영은 전부 들었다. 시즈닝이 묻은 손을 털던 순영의 입이 일자가 되는걸 확인한 지훈이 마르는 입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본능적으로, 이번에는 피할 수 없다는 감이 든다. 여름의 끝자락까지 미뤄진 대화.

그야. 앉은곳도 이곳이니까. 지훈도 자신이 왜 여기에 앉아있는지 모르겠는데, 순영은 지훈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체감시간을 생각하면 지훈의 집이나 다른곳을 헤매다가 온것 같지도 않았다. 순영은 지훈이 봄의 사고현장 근처에 있을걸 반쯤 확신하고 온 것이다. 어제의 대화 때문일 수도 있고. 파티의 분위기가 비슷해서일 수도 있고. 그저 감이 좋은걸지도 모르지만.

“술 마셨잖아.”

바삭, 감자칩이 부서졌다. 더이상 볼 것도 없어보이는데 순영은 여전히 휴대폰을 건드리고 있었다. 아. 지훈은 대충 그런 탄성을 냈다. 그 펀치.

저번이라는게 언제를 말하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 없었다. 지훈도 그곳에서 그 펀치를 마셨었지만 순영도 꽤 들이켰다. 처음에는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몰랐었기도 해서. 아무리 그래도 중간쯤에는 알았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술이 들어간 상태이니 뭐 어떠냐 싶어지니까. 부어라 마셔라 정도는 아니어도 꽤 취한 상태였었다. 미성년자때 알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순영의 주사는 끝모르고 올라가는 텐션과 해제되는 소심함이다. 옆에 있는게 누구든지 같이 캉캉춤을 추고 소리높여 깔깔대는, 약간 전형적인.

솔직히 너랑 눈마주치기 전에는 뭘 하고 있었는지 별 기억도 안나. 의미없이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갱신하며 순영이 덤덤한 목소리를 잇는다. 한 30분 정도가 뇌에서 들어내져 있달까. 뭔가 시끄럽고 많이 웃고 영양가 없는 말들을 했던것 같은데, 주변에 애들이 굉장히 많았고― 그리고 지훈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 네가 그 '주변 애들' 안에 없다는걸 몰랐었다고. 지훈은 헛웃음을 냈다. 디제이가 노래 틀어야지 어딜 가. 그러니 취했었다고 말하지 않았냐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그래서 너 보자마자 술이 확 깼잖아.”

어, 싶어서. 이지훈이 저기 있으면 지금 내가 팔을 두르고 있는건 누구지. 정확히 그런 생각을 했었던것 같았다. 찬물 맞은것처럼 정신이 깼는데 지훈이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는 바람에,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서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하다가 우뚝 멈춘 곳이 도로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전에 조명이 지훈을 집어 삼켜서.

“나도 마셨었으니까.”

지훈은 자기가 뱉어놓고도 참 그럴싸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순영도 술을 마셨지만 지훈도 마셨으니까. 하지만 한없이 양심에 찔려서, 목소리는 작디 작게 줄어들어 있었다. 순영은 킥킥댔다. 그것도 그렇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둘을 훑고 지나간다. 당분간은 또 대화가 끊긴채였다. 순영은 한층 가벼운 표정을 해서 휴대폰 대신 도로의 건너편을 보고, 지훈의 시선은 자신의 발치다.  흐름으로 봐서는 서로 바보같이 취해서 일어났던 헤프닝으로 끝날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는걸 아니까. 그래도 이제까지처럼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지훈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

저에게로 돌아오는 시선이 시야 밖에서도 보였다. 지훈은 더 말을 덧붙일 용기가 나지 않았고, 순영은 입을 몇 번 여닫았다. 3번째에 완전히 입을 닫고 다시 도로로 고개를 돌린 순영이 펴고있던 다리 한쪽을 접고는 머리를 털었다. 이제 다 나았다니까 그러네. 어느정도 답답하다는듯한 목소리에도 돌릴 답이없다. 넌 진짜 다 좋은데 너무 옹고집이야. 투덜투덜.

“대회 며칠이야?”

“괜찮다니까― 그런것 좀 신경 쓰지마.”

“어떻게 신경을 안쓰냐고 또.”

“야 지훈아.”

나 이거 후회 안해. 보란듯이 걷어보인 흉터가 깊다. 대회는 무슨. 평생 춤 못춘다는 소리 들었어도 후회 안했을거라고. 하물며 낫기까지 했는데 뭔 상관이야. 그렇게까지 말해도 흉터에 박힌 눈이 물러가질 않아서, 순영이 걷었던 밑단을 내려버렸다. 네가 자꾸 이렇게 의식하면 나 악몽 꾼단 말이야. 그 때 너 못구하는 악몽.

“네가 그런걸 왜 꿔?”

“맨날 차라리 네가 치였어야했다는 얼굴로 쳐다보잖아! 안꾸게 생겼어?”

타임머신이라도 구해올 것 같은 얼굴을 해서는. 발목 좀 다친게 대수라고. 지금 몇개월째냐는 채근에 지훈이 걱정을 해줘도 뭐라고 한다고 툴툴대는 말을 냈다. 사과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이 나가는게 참 못되어먹은 인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순영이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네가 뭐 때문에 그렇게 미안해하는지 모르겠는데. 진짜 이상해. 알아?

“이거 내 잘못이잖아.”

근데 왜 네가 계속 자책을 하냐고. 신경질적으로 나온 뒷말에 지훈에게 일시정지가 걸린다. ―네 잘못?

한 번 더 한숨이 있었다. 아까랑은 다른 의미로 렉이 걸린 지훈을 힐끔댄 순영이 그냥 펴져있던 나머지 다리도 접고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었다. 애초에 내가 거기까지 끌고간 잘못이니까. 그 때 손까지 들어가며 오바안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텐데.

순영이 집중했던 단어는 딱 하나였다. 디제이. 파티가 어쩌고 어디서 몇시에 누가 저쩌고, 그런것들은 어찌되든 좋았지만. 단순히 그 단어가 귀에 꽂힌 다음에는, 뭐랄까. 옳다구나 싶어서. 전혀 이해가 안되는 내용에 지훈이 미간을 구기자 순영이 말을 얼버무리다가 결국 시선을 피했다. 아니. 나는 그냥, 너 좀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지.

할줄 아는것도 진짜 많은 이지훈. 영어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게임도 저보다 잘하는데. 그 중에서 제일 잘하는건 음악이고, 그런데도 그걸 자랑하는 일이 없다는게 항상 순영의 소소한 불만요소였다. 맨날 회사에 보내보자고 땡깡을 부려도 쿨스루하고, 천재라고 주접을 떨어대도 빈말인줄 아니까. 순영은 그냥, 지훈이 얼마나 대단한 아이인지 애들이 좀 알았으면 했을 뿐이다. 눈에 띄기 싫어하는 것도, 남들한테 칭찬받는것 따위는 신경도 안쓴다는것도 알기는 하는데. 그래도 좀, 기회가 있으면 한 번 정도는 자랑하고 싶었달까. 한번 쯤은.

“그게 뭔 개소리야.”

“아니, 솔직히 그렇게 생각 안해? 아깝잖아!”

제가 해달라고 졸라댄다는 이유로 해주던 배틀디제잉도 끝내주게 하니까, 애들 파티에서 배경음악 골라주는것 정도는 박수가 절로 나올 정도로 할텐데. 그런 재능을 썩힌다는건 너무 아까운일이다. 사람들은 좀 더 지훈의 천재성이나, 그가 하는 음악에 대해 알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제가 추는 춤이 얼마나 대단한지 대중들이 알 필요가 있는것처럼.

SNS에 올리잖아. 황당하다는 어투였지만 순영은 불퉁하게 부은 볼을 했다. 익명이잖아. 아무리 익명이라도 그렇지, 꽤나 큰 관심을 받고는 있는데. 네가 인스타말고는 SNS를 안하니까 모르는거라는 일침도 모른척한 순영이 뻔뻔하게 말을 잇는다. 하여튼. 그래서 그 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굉장한 이지훈의 굉장한 일부를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는 기회.

“굉장한 일부는 무슨-”

“실제로 잘했잖아!”

“파티 가자마자 집에 가고싶어져서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뭔,”

“제대로 안한건데 그정도인거면 더 대단하지.”

허, 하고 헛웃음이 나온다. 너 디제잉 전문가야? 내가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단할 경험치라도 있냐는 말에 순영이 저는 좋았다고 억지를 썼다. 항상 좋았단 말이야. 그러니 그 파티에서도 잘했던게 맞다. 순영은 드디어 합법적으로 지훈을 대놓고 자랑할 수 있게 된 기쁨에 전날부터 지나치게 들떠서, 잘모르는 얼굴들에 섞여서도 겁먹지도 않고, 주는대로 먹고, 아무나 붙잡고 얘기를 하고.

하지만 어쨌든, 그게 문제였던거겠지. 너무 들떴던 탓이다. 자랑하는데에 바빠서 실제로 지훈이 그 파티에서 어땠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파티 같은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다 저보다도 더 낯을 가리는 애라는걸 모르지도 않았는데. 부스에 혼자 남겨두고는 술에나 취하고. 제 욕심 때문에 하마터면 지훈이 트럭 따위에 치일뻔 했다는걸 생각하면 아직도 모골이 송연하다. 악몽을 꾼다는건 지어낸 말도 아니었고. 순영은 그저.

“…날 자랑할 생각에 들떴었던거라고.”

말을 찾느라 답이 느렸다. 순영은 너는 모른다느니, 그런 어린애 같은 말을 내고는 뒤로 드러누워버렸다. 아, 나도 이게 육갑이라는거 아는데. 그치만 너는 좀 심하잖아. 주목 받기 싫어하는건 알지만, 좋아하는 일 하는건데 남들한테 칭찬 좀 듣는게 어디가 어때서. 지훈은 말도 안되는 말을 하며 징징대는 순영의 얼굴을 한참이나 보다가, 느리게 입력되는 머릿속에서 출력할 문장을 뽑았다. 칭찬은 네가 해주잖아.

SNS에 올리기도 하지만. 그런 곳에서 받는 관심이 어찌되어도 좋은건 사실이다. 순영이 말했듯이 익명이고, 결코 지훈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할 사람들의 말이니까. 고맙지 않다는건 아니라도 그냥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그런 거리감 있는 관심이 아니라, 지훈이 받고싶은 칭찬은. 항상 순영이 해주니까. 듣는 사람 쪽팔릴 정도로 과장해서, 매 번 들을때마다.

“내 칭찬은 별 의미 없잖아.”

진심을 다해 말해도 잘 듣지도 않고. 토라진것처럼 돌려져있는 고개가 우스웠다. 그때까지도 들고있던 감자칩을 내려놓은 지훈이 내내 방어적으로 모으고 있던 다리를 편하게 풀숲에 널브러뜨린다. 네 칭찬이 어떻게 의미가 없냐. 지훈은 그 말을 제가 뱉고서도 꽤나 놀랐다.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제가 이런 톤을 낼 수 있다는것도 몰랐을 만큼.

돌아온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웃음이 나왔다. 순영은 말도 없이, 눈을 돌리지도 않고 그걸 꽤 한참이나 보다가, 정면인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참으려고 하는것 같은데 비죽 올라가는 입꼬리가 다 보여서 곤란하다. 너는 뭘 그렇게 하나하나 솔직하고 단순해서, 그런것들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지. 지훈은 문득 지금 제 표정이 어떨지 생각해본다. 속절없이 녹았겠지. 저도 참 주책이다.

“크흠. 아무튼. 애초에 욕심내서 널 끌고간건 나였으니까. 이렇게 된 것도 내 탓이다 그거야.”

그러니 네가 계속 미안해 할 이유가 없다고. 좀 취했으면 트럭 오는지 모를 수도 있지. 오히려 내 발목 하나 다친걸로 끝나서 다행이지 않냐. 네가 치였었으면 아마 평생 단위로 속죄하고 살았을거라느니, 과장되게 떠드는 말이 귀로 들어왔다 빠져나간다. 지훈이 문득 궁금해져서, 어제도 그 말을 하려고 했던거냐고 물었더니 순영이 눈을 깜박였다. 이러는거 이상하다고 했었잖아. 그 뒤에 그냥, 네 탓인데 왜 계속 미안해하냐고 말하려던거냐고. 순영의 답은 단순했다. 근데 네가 끊었잖아. 갑자기 영어나 쓰고.

지훈이 계속 미안해하는건 좀 이상하다. 발목을 다친건 자기탓이지 지훈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러니 그만 미안해해도 된다. 이걸 말하려다가, 지훈이 갑자기 말을 끊는 바람에 제대로 못말했다, 인가. 정보를 정리한 지훈은 이렇게 생각했다. 얘는 진짜 눈치가 더럽게 없네. 제가 이렇게까지 오래 미안해하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본적이나 있을까 싶었다. 눈치 없는건 알고는 있었지만.

무릎이 시야를 가리지않는 정면에는 사고가 있었던 도로가 있었다. 지훈은 전까지 순영이 그 파티에 가기 위해 절 매개로 썼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애들이라면-그러니까, '이방인'이라면 대부분 다 가고싶어할만한 파티였으니까. 제가 디제이로 안갔어도 혼자 갔을거라고도 생각했고. 너무 잘 놀아서 파티를 좋아하는줄 알았다. 저를 혼자 남겨두고 그런 문화에 적응한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권순영은 사실 별것도 아닌 저를 애들한테 자랑할 생각 하나로 오바하고. 일생 처음으로 취해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을 못하다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술이 깼다고.

눈치가 없는게 어느쪽인지. 지훈이 아스팔트를 보는 그대로 손만 움직여 감자칩을 집어먹었다. 바삭바삭.

“취해서 트럭 오는지 몰랐던거 아니야.”

목소리가 깔끔하게도 나왔다. 별도 없는 하늘을 노려보던 순영은 못들었다는듯 반문했다. 트럭 오는거 알았다고. 근데 확 치여버리고 싶어서 안피했어.

말이 없던 순영이 상체를 일으킨다. 지훈의 3년지기 친구는 평소에는 발로 차여도 무해하게 들러붙어오면서, 가끔 몸 어디에 구멍을 낼 기세로 시선을 거두지 않고는 한다. 대부분은 화났을 때. 지훈은 돌아보지 않은채로 다시 입에 감자칩을 넣었다. 뭔소리야 그게. 삐진게 아니라 화가 난 권순영의 목소리를 듣는건 꽤나 드문 일이었다. 지훈은 여전히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알지도 못하는 애랑 입술이나 비비고 있었잖아. 짝사랑 상대가 그러는거 보고 심란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어.

그렇다고 트럭에 치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할 사람이 있나. 사실 지훈도 잘 몰랐다. 제가 영화처럼 세상에서 잠깐 없어졌으면 했던건 훨씬 복잡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복잡한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설명한다고 순영이 그걸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그러니 약간 거짓말은 섞어도 괜찮았다. 말하고 싶은 바가 더 확실히 전달 되는게 중요하지 않겠어. 특히나 고백이라는건.

“입술을 뭐?”

초를 세어봤는데, 이 대답은 약 72초만에 나왔다. 당황, 혼란, 황당, 더해서 뭔가 이것저것 섞이느라 목소리가 가로등보다도 높았다. 지훈은 눈을 반쯤 감았다. 기억 안나는구만 저거. 생각으로 멈추지않고 말로 나갔기 때문에, 순영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미끄러졌다. 누구랑. 내가? 이름을 말해줬더니 뭔가 짚이는게 있는지 입이 벌어졌다. 아, 어. 제정신이 아닌채로 벌였던 일들 중 하나의 단서가 잡혔는지 침착해진 얼굴이 정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침묵이었다. 아마 ‘입술이나 비비고 있었다’의 다음 문장으로 사고가 넘어간 모양이었다. 짝사랑 상대가.

“그.”

그런것 때문에. 트럭에 치이고 싶었다는게 말이 돼. 화를 내고 싶었던것 같지만, 목소리가 너무 흔들리는데다 강약 조절이 하나도 되지 않아 엉망이었다. 마지막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지훈은 시시각각으로 달아오르는 옆모습을 보다가, 머릿속으로 음계를 몇 자락 썼다. 가사는 뭘로 붙이지. And I scream, for whatever it’s worth…….

지훈이 대답하지 않아서 침묵의 연속이었다. 혼란스러운 그대로 풀밭을 손으로 더듬길래 지훈이 감자칩 봉지를 쥐어줬는데, 그게 마지막 구호식량이라도 되는듯이 한 번에 입에 털어넣는게 좀 불썽사나웠다. 가루도 다 떨어지고. 적어도 입안에 가득 찬 감자칩을 전부 삼킬 때까지의 시간을 번 순영을 기다리던 지훈이 다시 무릎을 끌어모았다. ―그래서 미안해 했던거야. 내가 피할 수 있었는데 안피했던거니까. 내가 피했으면 안다쳤을거 아니야.

“그건 맞는데. 아니. 음.”

그렇구나? 그랬구나? 웬지 너무 심하게 신경쓰더라? 뱉어놓고도 자기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는듯 했는데, 순영이 불시에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다. 식은땀이 가득한데 얼굴은 침착했다. 패닉한 눈 그대로 순영이 이렇게 말한다. 나 솔직하게 말해도 돼? 지훈은 헛웃음을 냈다. 안된다고하면 안말할거야?

“생각해 본 적 없어.”

지나치게 진지한 말이었다. 어. 그러니까. 네가 날 좋아한다던가? 그런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짝사랑이라고 한거 맞아? 내가 잘못들은거면 쪽팔리니까. 횡설수설, 나오는대로 일단 말하고 보는 뒤집힌 목소리가 컸다. 지훈은 예상했기 때문에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가능성을 상정이라도 해봤다면 예년에 눈치를 챘었겠지. 여름 끝자락까지 거의 1년을 숨길 수 있었다는건 결국 순영은 지훈을 그런쪽으로는 생각해본적 없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건 이미 알았지만.

“그래서, 없는데, 그게.”

“좀 진정해.”

나무라는 말투에 다물려진 입이 작다. 적어도 문장으로 말하라는 말에는 짜증도 신경질도 들어가있지 않았다. 패닉한 사람을 단순히 도와주는것처럼. 평소랑 별 차이 없었는데, 뒤늦게 지훈의 귀에 시선이 닿은 순영이 입꼬리를 뒤로 당겨 입을 일자로 만든다. 토마토라고 해도 믿을 귀를 보다가, 한 번 심호흡을 하고. 그 다음에 순영이 한 행동은 미간을 구기는거였다. 그리고는 손으로 제 티셔츠 앞판을 잡아당겨 그걸 노려봤다. 아이씨.

“왜."

“아니. 좀 괜찮은 걸로 입고올걸 싶어서…….”

어쨌든 파티 가는거니까 좀 차려입어도 괜찮았는데. 어제의 지훈은 영문 모르게 누가봐도 말을 돌리려고 파티에 간다는 말을 했었으니까, 만나면 대충 데리고 나올 생각만 하느라 정말 아무거나 입었던거라서. 고백 받을줄 알았으면 적어도 티셔츠보다는 더.

―뭔 상관이야? 멋있게 입고 차면 그림이 더 좋을까봐? 황당한 목소리에 올라온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지훈의 체온이 올라간다. 순영은 지훈이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뭐, 왜, 하는 시비조를 낼 때까지 눈을 피하지 않다가, 아니지. 하고 어절 하나를 뱉었다. 그게 아니지. 찰거면 뭐하러 옷 같은걸 걱정해?

“뭐?”

“그게 아니라. 나중에 계속 두고두고 생각날텐데. 그럴때마다 아쉬울거잖아.”

하필 다 낡은 티셔츠나 꿰어입고 갔냐. 몇 번이고 그렇게 후회할것 같아서, 그러니 지금 차림이 신경쓰이는 것일 터다. 그래. 자기가 말해놓고 스스로 긍정한 순영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게 지금 누굴 놀리나. 두고두고 생각나기는 무슨. 동창회에서라도 얘기 꺼내게. 황당했지만 초조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불만이라는걸 모르지 않기에 지훈이 침묵을 택한다. 순영은 아까보다도 더 지훈을 뚫어지게 보다가, 한참만에 답을 입 밖으로 꺼냈다. 있지. 나 지금 엄청 기쁜 것 같아.

“생각나는대로 막 뱉지말고―”

“아니. 진짜로. 나 지금 완전, 진짜 너무 기쁜데. 그래서 이런가봐.”

인생에서 손꼽히게 기쁘고 벅찬 순간이라.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잘모르겠고. 그렇게 말하더니 순영이 웃었다. 와. 그리고는 입을 가리고. 우와, 하더니, 웃음을 주체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와 대박이다. 산만해지는 순영에게 비웃는거냐고 미간을 구겼더니 힘차게 고개가 저어졌다. 그리고는 불쑥 손이 뻗어져서, 지훈이 반응하기도 전에 입술에 뭔가 닿는다. 아주 가볍고 짧았지만.

퍽. 악. 0.1초 간격으로 나란히 들린 소리가 컸다. 지훈의 발에 옆구리를 맞은 순영이 나뒹구는 동안 앞의 도로에서 자동차가 하나 더 지나갔다. 미쳤냐!? 빽 터진 목소리에 바닥에 뒹군채인 순영이 아하하, 하고 청량한 웃음소리를 냈다. 너 얼굴 좀 봐. 거울도 없고 있다해도 보고싶지도 않았지만, 지훈은 제 얼굴이 어떨지 스스로 너무 잘 알것 같은 바람에 순영을 한 번 더 찼다. 꽥. 카툰 같은 소리를 내고는 두세바퀴를 과장되게 구른 순영이 잔디를 잔뜩 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음이 너무 커서 더 달아오를게 없는 얼굴의 온도가 또 높아지는 것 같았다. 진짜 미안.

“하고 싶어서.”

신기하다 그치. 생각해본적 없는건 진짜인데. 만면에 가득 웃음을 달고서는, 문장 통째로 전부 진실이라는걸 알기에 지훈은 앓는 소리를 내고 싶어졌다. 너는 진짜. 

사귀었다가 헤어지면 못만나나? 그거 생각하면 좀 싫기도 하고. 아까보다도 가까운 자리에, 사실상 몸이 부딪힐 정도로 가까이에 다시 앉은 순영이 제가 버렸던 감자칩 봉지를 주워 세로로 길게 접는다. 여전히 토마토인 지훈은 순영의 쪽에서 안보이게 한손만이라도 얼굴에 올리고 있었다. 넌 뭘 사귀기도 전에 그런걸 생각하냐. 퉁명스러운 말에 가린 보람도 없게 얼굴을 기울여보던 순영이 큼지막한 웃음을 띄운다. 그건 그렇네.

“지훈아.”

“뭐.”

“대단하다.”

너 원래 이런거 하는 타입 아닌데. 그치. 한 대 더 차려고 했더니 순영이 알아서 피했다. 어차피 내가 하려고 했으면 1년은 더 걸렸을거 아니야. 무뚝뚝한 애가 고생 했을거 생각하니까 마음 아프네. 와중에 그런 말을 하는게 맞는 일인지, 지훈이 대답을 할지 다시 차버릴지 고민하는 동안 어깨에 순영의 머리가 얹혔다. 스프레이도 왁스도 없는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스친다. 딴 얘기인데. 지나치게 가까워서 목소리마다 피부가 울렸다. 전말을 알았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이거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것 같아. 눈 앞에서 들린건 깡마른 발목과 하이탑이다. 미안해 할 일 아니잖아. 나 좋아하는건.

도로 대신 시야에 걸리는 흉터는, 이제와서 눈치챈거지만 많이 아물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지훈은 그 수술자국을 한참이나 보다가, 어깨에 기대어져있는 머리에 제 머리도 기댔다. 한숨을 쉴까하다 참고는 눈을 감는다. 그렇네. 그럴지도. 얘는 대충 축약해버린 거짓말을 듣고서는 어떻게 이런 말을 할까. 다 파악하고 하는 얘기도 아닐텐데, 어쩌면 이렇게.

순영이 들었던 발목을 내린 후로도 조금 길게 있다가, 다시 자동차가 지나간 뒤 기댄 어깨에 애정 어리게 뺨을 비빈 순영이 몸을 원상태로 되돌려놓는다. 다 접은 감자칩 봉지는 쪽지모양으로 접혀 순영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그렇게 안하면 한국인 소리 못듣냐? 한바탕 난리가 난 후였는데도 똑같이 나오는 말투가 지훈 본인도 신기했다. 깔깔댄 순영이 일어나서는 묻은 풀들을 대충 털고, 가볍게 손이 내민다. 얘기 끝났으니까. 가서 민규 구해줘야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퍽 장난스럽고 다정해서. 지금 제 얼굴이 어떨지 상상도 못하겠다고 생각하던 지훈이 시야에 들어오는 티셔츠의 나염을 본다. 펄럭이는 성조기와 VIVA AMERICA.

“옷 있잖아.”

옷? 내민 손은 내민채로 그대로여서, 좀 당황한 소리를 냈더니 지훈이 웃는다. 이게 제일 완벽한것 같은데. 아까 두고두고 후회할거라고 했었지만. 무슨 자켓이니 셔츠니, 잘어울리는 옷들 많다는거 지훈도 아는데. 그치만 그런것들보다. 그 말에 제 티셔츠를 내려다봤던 순영이 눈썹을 휘어올린다. 이게? 하고 묻고싶은 얼굴인걸 무시하고 지훈이 손을 잡았다. 우와. 긴장을 놓고있을 때 잡아당겨서 잠깐 휘청였지만, 알아서 일어난 지훈의 표정을 본 순영이 곧 얼굴을 녹혔다. 정말 사랑스럽게.

―지훈은, 그냥 그걸로 완벽하다는 생각을 한 번 했다. VIVA AMERICA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저를 따라 사랑스러운 표정을 하는 권순영의 옆. 잃어버린줄 알았던 자리에 다시 발을 붙이자 뒤늦게 늦여름의 냄새가 났다. 머릿속 음계에 가사가 붙는다. And I scream, for whatever it’s worth. I love you, ain’t that-

“김민규 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유튜브에서 파티 음악 플레이리스트 찾아서 틀고 있는거 아니야. 저들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사람을 놀리는 말이나 주워 섬기면서, 뻗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저주 받기는 싫으니까 노래 대충 틀어주고 넷플릭스나 보러 가자. 일으켜주느라 잡았던 손은 놓지않고, 저보다 한걸음을 앞서가는 뒤통수가 웃음에 흔들린다. 다친 발목은 전혀 아프지 않은것처럼 보였다. 순영이 항상 말하던대로.

한번도 떠난적 없던 자리의 바깥으로 울타리를 친다. 다만 더 넓게, 전처럼 함께.


Fever dream high in the quiet of the night

You know that I caught it

Bad, bad boy, shiny toy with a price

You know that I bought it

Killing me slow, out the window

I'm always waiting for you to be waiting below

Devils roll the dice, angels roll their eyes

What doesn't kill me makes me want you more

And it's new, the shape of your body

It's blue, the feeling I've got

And it's ooh, whoa oh

It's a cruel summer

It's cool, that's what I tell 'em

No rules in breakable heaven

But ooh, whoa oh

It's a cruel summer

With you

Hang your head low in the glow of the vending machine

I'm not dying

We say that we'll just screw it up in these trying times

We're not trying

So cut the headlights, summer's a knife

I'm always waiting for you just to cut to the bone

Devils roll the dice, angels roll their eyes

And if I bleed, you'll be the last to know

Oh, it's new, the shape of your body

It's blue, the feeling I've got

And it's ooh, whoa oh

It's a cruel summer

It's cool, that's what I tell 'em

No rules in breakable heaven

But ooh, whoa oh

It's a cruel summer

With you

I'm drunk in the back of the car

And I cried like a baby coming home from the bar

Said, "I'm fine," but it wasn't true

I don't wanna keep secrets just to keep you

And I snuck in through the garden gate

Every night that summer just to seal my fate

And I scream, "For whatever it's worth

I love you, ain't that the worst thing you ever heard?"

He looks up, grinning like a devil

It's new, the shape of your body

It's blue, the feeling I've got

And it's ooh, whoa oh

It's a cruel summer

It's cool, that's what I tell 'em

No rules in breakable heaven

But ooh, whoa oh

It's a cruel summer

With you

I'm drunk in the back of the car

And I cried like a baby coming home from the bar

Said, "I'm fine," but it wasn't true

I don't wanna keep secrets just to keep you

And I snuck in through the garden gate

Every night that summer just to seal my fate

And I scream, "For whatever it's worth

I love you, ain't that the worst thing you ever he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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