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윤홍]Count Down

찰칵.

20.

나 진짜 너 없으면 죽어 지수야. 한 번만 만나주라. 나 연애 잘해. 너 없으면 못살아, 응?

그럼 죽어.

뭐?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해. 너 진짜 사람이 못됐다.

바지나 놓고 말해 정한아.

홍지수는 제 바짓가랑이에 붙은 윤정한을 사대부터 중도까지 정말로 끌고다녔다. 발에 채워진 족쇄처럼 질질. 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수근대며 지나갔고, 누군가는 사진으로 찍은 것 같았다. 새 가을학기를 시작한 캠퍼스에는 사람이 많다. 에타에 올라오겠지? 그와중에도 홍지수는 고고하고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진을 잘라서 보면 고대 명화의 한장면 같았을 것이다. 비록 발목에 붙은 윤정한을 끄느라 검은 면바지 안의 다리에는 힘줄이 튀어나왔을지라도.

19.

예민하고 짜증 잘내고 신경 써줄거 많은 애정결핍 윤정한.

정한은 자기객관화의 신이었다. 과연 이런 저의 곁에 누가 평생을 남아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런게 중요한가? 아직 스물셋 밖에 안된 나이였다. 그러나 중요한 일이었다.

누군가 남아줄만한 사람이 도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홍지수.

정한이 지수와 연인 사이가 되기로 결정한 것은 그런 이유가 다였다. 다리 펴고 잘 곳이 필요했고, 머리에 꽃을 달고 영화의 명장면처럼 대포로 팝콘을 만들어 먹어도 내버려둬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 이렇게 누구한테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다? 잘못 생각 하는거야 너. 지금 날 놓치면 정말 평생토록 후회할걸. 천하의 윤정한을 못낚아챘다는 불안에 아무리 빨라도 20년은 앓게 될거라고.

그럼 20년 후에 연락할게.

고통은 지속적인거야 지수야.

윤정한은 평생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저를 잡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몸소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잖아.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홍지수는 에타에 자기 이름이 잘생겼다는 주제 외의 일로 언급되는걸 꺼릴테니까, 그래서 공들여 준비한 작전이었다. 사실 준비한건 없고 그냥 냅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진짜 사대부터 중도까지 저를 바닥에 끌며 이동할줄은 몰랐다. 비싼 후드티인데 흙투성이였다. 그나마 복대를 하고와서 어디가 까지진 않았지만.

사귀어주면 이런 개… 아니, 이상한 짓 안할거야?

윤정한은 아주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안하지. 뭐하러 하겠니 이런걸. 홍은 망설임이 없지는 않아보였으나, 종내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호. 마리오처럼 만세를 부르며 부활한 윤정한은 그럼 첫데이트로 해장국집을 가자고 했다. 정한아, 연애 잘한다며. 어쩌다 애가 이렇게 돌아버렸는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정한에게 팔을 잡힌 지수가 겨우 도착한 중앙 도서관의 입구에서 벗어난다. 첫 데이트는 역시 해장국이지. 장난치는 것도 아닌데 드물게 텐션이 높아보였다. 너 머리 안감았니? 뒤에서 가느다래진 눈을 못본척한 윤정한은 그렇게 홍지수에게 세를 들게 되었다. 조그마한 단칸방.

18.

그 새끼들 개발새발 쌍쌍도리 자진모리 업어치기 두루치기 어쩌고저쩌고.

PPT를 아예 처음부터 만들기 위해 새 슬라이드를 불러온 정한의 입이 험했다. 마감은 벌써 5시간 앞인데 이제와서 이딴 개같은 PPT를 보내왔다 이거지. 개새끼들 다 뒤졌어. 보노보노를 날려버리며 정상적인 인간이 고를법한 깔끔한 템플릿을 불러온 정한이 일단 첫페이지에서 이름을 삭제할 애니메이션을 골랐다. 존나 화려하게 효과음도 처바를 생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거 못할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나는 윤정한이다. 이미 다른 과제 때문에 하룻밤을 샌 얼굴로 정한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지수는 그럴동안 뒤에 있는 1인용 카우치에 앉아 향기로운 커피의 냄새를 음미하는 중이었다. 이 원두 괜찮네. 검은 목폴라에 하얀 셔츠가 도회적인 분위기를 준다. 정한은 신경질이 난 얼굴로 열번째로 고른 애니메이션을 다른걸로 바꾸다가 야 들어봐 조슈지야. 하고 불렀다. 지수는 우아하게 무릎에 놓인 책장을 뒤로 넘겼다. 왜?

딱히 용건이 있어서 온건 아니다. 정한이 불렀지만 정한에게도 별 용건이 없었다. 그래도 지수는 코트를 입고 왔는데, 정한은 지수가 온 시점으로 8시간 전부터 지금까지 하얀 반팔에 빨간 츄리닝 차림이었다. 어 왔니. 커피 사놨다. 두 마디를 하고 심각하게 노트북을 보고있길래 지수는 정한과 떨어진 1인용 카우치에 외투와 가방을 정갈하게 걸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보노보노 PPT는 지수가 행복한 얼굴로 새로운 커피를 내리고 있을적에 왔다. 아니 **새끼들이 진짜! 터져나온 욕지기와 송곳같은 말은 지수의 귀에 닿지 못했다. 핸드드립은 집중력이 중요했다. 한방울씩 떨어지는 드립커피가 제 자식이라도 되는양 따뜻한 얼굴로 보던 지수가 그걸 담아가지고 나오니 정한은 이미 상스러운 말들을 입에 담는 중이었다. 카우치에 앉아 옆 선반에 머그를 내려놓고 책을 꺼내들었다.

정한의 집 스탠드는 적당한 조도가 있어서 좋았다. 지수 책읽기 좋으라고 정한이 해외직구로 산 물건이니 당연하다. 어딘가의 영화에서 나올법한 고아한 분위기로 지수가 책과 커피를 즐기는 동안 정한은 천하의 양심없는 팀원들과 애초에 조별과제를 내준 이 강의의 교수, 지난주에 밟은 껌을 뱉은 이름모를 사람까지 싸잡아서 욕을 이어갔다. 내가 진짜 이 동네를 뜰거고 어쩌고, 2절 3절까지 하는 동안 지수는 감명깊은 영어문장에 형광펜을 그었다. 어떻게 여기서 형용사를 이렇게 쓸 생각을 했지?

“듣고 있는거 맞아?!”

빽 질러진 날카로운 신경질에도 지수는 응 정한아, 하고 대답했을 뿐이다. 정한은 예민하다. 밤도 샜고 아직 한끼도 못먹었고 피곤하고 인생에는 개새끼들이 설치해놓은 방지턱 뿐이고, 하여튼 총체적으로 엿같은 상태였다. 지수는 신경쓰지 않았다. 빨간 츄리닝과 하얀 셔츠가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듯한 태도였다. 문장에 형광펜이 그어진다. 갈수록 줄어들던 책장은 꽤 넘어가다가 8할쯤에서 멈췄다. 가름끈을 정갈하게 위치시키고 책을 닫은 지수가 가슴에 손을 얹는다. 조지 오웰은 정말 천재인것 같아.

너 내말 안들었지. 짜증이 가득 묻은 말에 눈을 크게 뜬 지수는 입으로 손을 가렸다. 말하고 있었어? 정한은 욕지기를 했다. 안도와줄거면 나가라 좀. 자기가 불러놓고 뭘. 지수는 듣는척도 안하고 커피를 리필하기 위해 일어났다. 뭐야? 커피 언제 내려놨어? 내건 어딨냐는 말에 지수는 여전히 고아한 얼굴로 네가 갖다처먹으라는 말을 했다. 말투가 참 고상해서 임팩트가 더 컸다. 얌전히 입에 지퍼를 채운 정한이 PPT 만들기로 다시 돌아간다. 얼마 안가 카우치로 돌아온 지수는 책을 집어넣고 요즘 도전하고 있는 프랑스 자수를 꺼냈다. 반쯤 수놓아진 잎사귀가 탐스럽다.

변을 처리하는데에는 장장 3시간이 걸렸다. 이런거 만드는데에는 도가 튼 정한에게도 넣을 자료의 양이 좀 많았다. 그래서 분업 확실하게 하자고 둘한테나 맡겼던건데. 이걸 이따위로 망쳐놓다니 상식 밖이다. 아니 내가 자료조사 다 해주고, 발표 대본 다 써주고, 그랬으면 **, 이정도는 할 수 있는거잖아. 이제는 징징댈 기운도 없어 의자에 널브러진 정한의 시야에 거꾸로 된 홍지수가 보였다. 어떻게 그러는건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미동없이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자수는 어디갔지? 저 가방에 책이랑 프랑스 자수랑 뜨개질거리들이 전부 들어가나?

“지수야.”

“응.”

“나 초밥 먹고싶다.”

기력을 소진한 멍한 목소리였다. 진짜 지쳤고 머릿속에는 초밥 생각 밖에 없다. 망할 조별원이 PPT에 넣은 생선 일러스트 때문이 틀림없었다. 지수는 어쩔 수 없다는듯이 웃고는 뜨개질거리를 정리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주가 되면 못입을 트랜치 코트를 걸치는걸 보던 정한이 일어나 깔깔이 파카를 찾았다. 차려입을 기운도 없이 그냥 이대로 초밥집 행이었다. 현관에 널브러진 쓰레빠에 발을 집어넣고 현관을 나서서, 걷다보니 들어온 곳은 타코집이었다.

? 정한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지는 메뉴를 보다가 지수야, 나 초밥 먹고싶다니까. 했다. 지수는 한결같은 미소를 지은채로 메뉴판을 보고는, 그럼 치킨 퀘사디아로. 하고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천장을 한 번 쳐다본 윤정한은 결국 쉬림프 타코를 시켰다. 콜라까지 세트로.

17.

윤정한과 홍지수가 안지는 약 3년 정도가 되었다. 시간이 참 징하게도 흐른다.

둘은 법학과였고, 정한은 중간에 경영학과로 전과했다. 술먹고 교수한테 토해서 그랬던건 아니고, 그냥 법공부라는게 지지부진하고 싫증이나서였다. 보통 그런것만 가지고 전과까지 하지는 않지만 윤정한은 윤정한이니까. 숫자놀이는 좀 더 마음에 들었다. 인간들 마음이 참 더러워 지수야. 알차게 이용해 먹어야겠어. 정한이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할 때 지수는 제 과외 학생에게 해설집을 보여주고 있었다. 학생은 신경쓰여서 힐끔댔지만 지수는 정한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그는 그런것에 아주 재주가 있었다. 사람 무시하기.

정한은 지수를 알게된지 2년 반 만에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이유는 상기에 설명한대로.

단칸방은 마음에 들었다. 정한은 그곳에 쇼파를 들이고 커다란 빈백도 들여서 마음껏 굴러다녔다. 푹신한 카펫이나 모빌 같은건 없었지만 정한은 그곳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때때로 정한은 층간소음이 발생하도록 그곳에서 쿵쿵 발을 구르고 뛰어다녔다. 목청터지게 노래를 한다 싶으면 랩을 갈기기도 했다. 이리저리 마음대로, 쿵쿵쿵. 그리고는 만족스러워서 대자로 뻗어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다.

아, 완벽한 공간. 그런 탄성이 절로나왔다.

16.

너는 내 어디가 좋아?

턱을 괴고 아침을 먹던 정한이 그렇게 묻는다. 지수는 완벽하게 만들어낸 써니 사이드업의 노른자를 옆에두고 커피를 마시면서 영자신문을 읽고있었다. 얘는 어찌 새벽까지 뒹굴어댄 후의 아침부터 이렇게 가오를 차릴까. 그래봤자 앞에 있는건 김치찌개면서. 정한은 김치찌개와 커피와 영자신문을 같은 식탁에 두는 미국인의 머릿속이 좀 궁금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했던 것 뿐인데.

대답이 없어서 정한이 한차례 졸랐다. 아 왜 대답 안해줘. 응? 나 왜 좋은데에. 

영자신문이 접힌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거의 절도가 있을 수준이었다. 정한아. 윤정한은 아직까지 실실 웃는 낯이었다. 응. 지수는 웃지 않았다. 헤어지자.

이젠 정한도 웃지 않았다. 슬그머니 내려간 입꼬리를 보던 홍지수는 무표정이었다. 담담하고 농담하는 기색도 없이.

그런거 물어볼거면.

정한이 눈을 깜박인다. 지수는 접었던 영자신문을 폈고, 얌전한 낯으로 커피를 마셨다. 아. 정한은 그런 탄성을 한 번 내고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는 김치찌개에서 김치를 들어내 입에 쑤셔넣었다.

15.

쿵쿵쿵.

쾅쾅쾅.

쿵쾅쿵쾅.

14.

홍지수가 파이프를 들고왔다.

진짜 파이프 말이야. 배관 연결하는 그거.

그는 그것을 자기 집과 정한의 집에 하나씩 놓으며, 예대 공사현장에서 주웠다고 말했다. 파이프는 한쪽 끝이 기억자로 휘어져 있었고, 심히 쥐고 휘두르기 좋아보이는 크기와 길이를 갖고 있었다. 식은땀이 가득한 정한은 지수가 그걸 들어서 반대쪽 손에 탁, 탁. 하고 두드리다가 웃는 것을 보았다.

씻은거야. 혹시 몰라서 소독했고, 녹슨 부분도 없으니 습기 없는 곳에 잘두면 벌레가 기어들어가거나 하지도 않을거라는 말이 태평했다.

층간소음은 좀 줄이기로 했다. 지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한은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목숨이 아깝다면 좀 줄이자고.

13.

“그럼 형은 왜 지수 형을 좋아하는데?”

동그란 후배는 정한의 돈으로 시킨 안주를 집어먹으며 스스럼 없이 그렇게 물었다. 야, 천천히 먹어. 더 안시켜줄거야. 주문했던 생맥을 받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더니 승관은 건방지게도 감자튀김을 두 개나 입에 집어넣었다. 대답 안해줄거야?

피해가려는 수작을 간파하다니. 윤정한은 종이라도 되는듯이 감자튀김을 가져와 입에 넣고 씹는다. 예쁘잖아 걔는. 승관은 그런 이유냐는듯이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귀여운 후배에게서 눈을 위로 돌린 정한이 머리를 좀 굴려본다. 홍지수가 예쁜건 사실인데, 저도 예쁘긴 하니까. 그럼 별로 정당한 이유로 보이지 않으려나?

저만큼 예쁜 사람 찾기가 힘든 일인데 홍지수는 그걸 했으니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가도 정한이 입을 삐죽였다. 그리고 걔는 무섭잖아.

“아… 그런 취향…?”

“아니, 이상성욕 같은게 아니라. 너 걔 파이프 들고 있는거 못봤지.”

파이프? 지수 형이? 경악하는 얼굴이 볼만했다. 캠퍼스에서의 홍지수만 아는 후배에게는 단어의 조합이 꽤나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어. 진짜 파이프. 굵기가 이만한데 걔는 그걸 한 손으로 잡아. 한 개도 아니고 두 개가 있거든? 나 저번에 떼쓰다가 진짜로 머리에 맞을뻔 한 적 있어. 굴러서 피했는데 침대가 푹 파이더라.

그런짓 할 사람으로는 안보였는데……. 승관은 좀 조심스럽게 쭈뼛대며 그런 말을 했다. 폭력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우아한 사람이 파이프를 한 손으로 잡고 사람의 머리를 맞추기 위해 휘두르다니. 내가 여름쿨톤 옷 입는것보다 더 톤그로 같다는데 정한이 네가 안봐서 그렇지 그게 걔한테 얼마나 잘어울리는지 모른다며 생맥을 마셨다. 그렇다고 파이프 든 모습이 좋다는건 아니고. 나도 목숨은 소중하니까.

“승관아. 나는 어리광 피우면서 살고 싶거든?”

진심이었다. 나이 70이 되어서 휠체어에 앉게 되어도 남한테 불 꺼달라고 찡찡대고 싶다는데, 승관이 요즘 나이 70에 누가 휠체어를 타냐고 핀잔을 줬다. 우리 할머니 지금 78세신데 아직 걸어다니신다고. 맥락을 벗어난 투덜거림을 무시해버린 윤정한이 테이블에 턱을 괸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인데. 걔는 아마 그 나이가 되어서도 무서울거야.

네가 꺼 정한아. 지팡이에 처맞고싶니? 곱게 주름진 얼굴을 휘어웃으며 그렇게 말하겠지. 승관은 단호한 얼굴로 지수 형은 그런 상스러운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너네 앞에서나 안쓰지. 이게 세입자 특전이란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정한이 그래서 좋다는 말을 한다. 걔는 지치질 않을거거든. 안지치고 계속 무서울거야.

자존심이 높고 고아하시니까. 홍지수에게는 프라이드가 있다. 윤정한 같이 자아 덜자란 사람이 아무리 떼를 써도 그 수준까지 같이 안떨어질 프라이드가. 경멸하다가 분노 게이지가 쌓이면 웃으며 파이프를 휘두를지언정 나 지쳤다고 윤정한처럼 소리를 빽 지르며 돌아서지는 않을거란 말이다. 

독립적인 홍지수는 심지어 정한에게서 안정을 찾지도 않을터였다. 자기만의 공간은 따로 만들어두고, 남에게는 허락된 공간만을 내어주며 거기서 정한이 장구를 치든 단소를 불든 봅슬레이를 하든 관심을 끄겠지. 그러다 실수해서 벽을 뚫으면 한 번씩 정색하고. 신문을 덮으며 헤어지자고 했던 날처럼.

“난 그게 좋아.”

사람이 참 완성되어 있지 않니. 쥐구멍 하나쯤은 있을테지만 그걸 굳이 파보지도 않을거야. 난 그냥 걔가 허락한 그 방이 평생동안 있었으면 좋겠어. 거기보다 편한 곳이 없거든. 직선 딱딱 강렬하고, 어느곳은 또 곡선이고. 전체적으로 좁은지 넓은지는 잘 모르겠어도.

…어째 좀 버석버석하네. 떨떠름한 목소리에 정한이 웃는다. 관아, 그런 버석버석함이 간절한 사람도 있는거야. 난 남의 수분이 나한테 옮아붙는건 딱 질색이거든. 예민해서.

“지수 형이 그 방을 계속 놔둘까?”

감자튀김에 케찹을 찍는 손톱이 둥글다. 정한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생맥을 마셨다. 크으, 죽인다.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고 나자 이번엔 소매가 젖어있었다. 신경쓰지 않고 감자튀김 옆에 장식으로 놓여있던 방울토마토를 집은 정한이 그걸 입에 쏙 넣고는 불분명한 발음을 냈다. 글쎄.

“없어지면 그 때는 파야지 뭐.”

굴이라던가. 비집고 들어가서 햇볕도 안들어오는 반지하 방에서라도 위에서 움직이는 걔 소리를 들어야지. 나는 걔를 사랑하는데 어쩌겠니.

승관이 기묘한 표정을 하는 동안 정한이 테이블 위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었다. 어디야? 간단한 세 글자에 지수 마음 속❤️ 이라는 답장을 보낸 선배가 생맥을 마저 비웠다. 꿀꺽꿀꺽.

데리러 갈 필요 없겠네^^ 매정한 답장을 눈으로 읽으며 잔을 내려놓고, 윤정한이 종업원을 부른다. 여기서 제일 비싼 안주가 뭐에요? 애인한테 쏘게 하려는데. 종업원은 친절하게 메뉴판을 가져다줬고, 승관은 고개를 저었다. 질문을 한 내가 잘못이지. 윤정한은 꼭 이렇게 두루뭉술하면서도 선명할 때가 있다. 그 모순적인 감상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승관은 알지 못했지만.

12.

윤정한이 파악한 것이 있다.

첫번째. 홍지수는 정말 고통을 생경히 느낄 살아있는 사람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를 수 있다.

두번째. 원두는 예자로 시작하는 뭐시기를 좋아한다.

세번째. 자기가 헤어지자고 하는건 괜찮지만. 내가 헤어지자고 하는건 자존심 상해서 알았다고 못한다.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헤어지거나, 네가 헤어지자고 해서 헤어지거나. 두가지 가능성에서 한가지를 제거했다. 두 개 중에 하나라니, 이게 얼마나 편한 일이야. 아주 뿌듯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그럼 헤어지자는 말만 안들으면 되는거니까. 그런거야 껌이지.

그래서, 정한은 짜증나는 일이 있는데 지수가 맞춰주지 않을 때에 이럴거면 그냥 헤어지자고 떼를 썼다. 너 이럴거면 내 애인 왜하는데. 애인한테 사랑주고 정주고 위로해주고 관심주고 그래야하는거 아니야? 나 외로워. 토끼였으면 콱 죽었을거야. 비유가 아니라 정말 자취방 한가운데에 대자로 뻗어서 그렇게 떼를 쓰면 지수의 반응은 두가지로 갈렸다. 발이나 손으로 정한의 머리를 바닥 혹은 벽에 밀어붙이거나-결코 추잡하게 폭력적이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짓이긴다는 느낌일 뿐이다-한숨을 쉬며 맞춰주거나.

이 방법은 꾸우욱 누르는 힘에 정한이 비명을 질러대거나 또는 근 한달간 최고의 텐션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지만. 지수는 한 번도 ‘그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전의 어느날 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지도 않았다. 정한은 그것이 퍽이나 만족스러웠다. 아무래도 차이는건 좀 자존심 상하지. 내가 너를 모르겠니.

그래서 좀 남용했다. 정한은 이게 제 잘못인걸 깊이 시인하고 반성하고 있었다. 아니, 정말로.

11.

그래 **, 헤어지자 헤어져. 지긋지긋하다 진짜로.

지수가 가방을 낚아챈다. 책과 프랑스 자수와 뜨개질거리가 가방 내벽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정한은 멍하게 있다가, 지수가 도어락의 개폐 버튼을 누를 때에서야 허둥지둥 정신을 차렸다. ㅇ,야 홍지수! 진짜 나가!? 그제서야 발을 움직여봐도 현관문은 거칠게 닫혔을 뿐이었다. 쾅, 하는 큰 소음이 주는 여운과 파동이 장난이 아니었다. 윤정한은 공포에 잠식된채로 우두커니 서있다.

이런건 계산에 없었는데. 진짜 나갔나? 내가 너무 자주 써먹어서 그냥 좀 약오른거겠지? 어떡하지? 지금 나가서 달리면 붙잡을 수 있나? 가오가 있지 그런. 지금 그런게 중요해? 홍지수가 헤어지자면서 나갔잖아.

홍지수에게서 헤어지자는 말만 안들으면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는데. 지금 면전에서 그 말을 들어버렸다. 그것도 두 번이나.

피가 차게 식었다. 현관이 코앞에 있는 기분이다. 자취방 말고, 지수가 내준 단칸방 말이다. 이미 단소니 봅슬레이 카트니 팝콘용 대포니 이것저것 다 들여놨는데. 이것들을 어떻게 빼지? 아니, 뺄 수는 있나? 윤정한은 못해도 홍지수는 하겠지. 발목에 매달린 사람을 끌고 300m를 걷고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애니까. 현기증이 핑 돌았다. 이럴게 아니라 지금.

허둥지둥 나가려고 발을 뻗는데, 띡띡띡띡. 도어락 버튼이 눌린다.

들어온 지수와 현관 앞에서 굳어버린채인 정한의 시선이 마주친다. 지수는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약간 망설이다가, 곧 단단한 얼굴을 한다. -방금건 미안. 내가 너무 심했어.

없던걸로 하자는데, 윤정한은 더 벙쪘다. 뭐?

지수는 또박또박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전해줬지만, 솔직히 내용을 못들어서 반문한건 아니었다. 그저 사고가 좀 느리게 돌아갔다. 프로세스가 완료된 후에 정한은 입술이 떨리는걸 느꼈다. 그걸 왜 네가 사과해?

“내가 잘못한건데 왜 네가 사과하냐구.”

지수는 무표정이었다. 내가 먼저 쓸데없는 말 한건데. 왜 다시 돌아와? 내가 나가서 무릎꿇고 빌 때까지 기다려야지. 10초만 더 기다렸으면 그랬을거라는데. 계속 침묵하던 지수가 정한아, 하고 말을 뗐다.

그럼 헤어질까?

지독하게 차갑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입을 닫은 윤정한이 곧 아씨, 하고서는 머리를 헤집었다. 이렇게 싼 무릎 아닌데. 상대가 홍지수이니 별 수가 있나. 결국 무릎을 꿇은 정한이 잘하겠다고 입에 발린 말을 낸다. 숙인 고개를 내려다보던 지수는 현관의 센서등이 꺼질 때에서야 웃었다. 그래.

10.

쥐구멍이다. 정한은 알았다.

9.

고개 숙이고 무릎을 꿇은건 자신인데. 쥐구멍을 내보인건 홍지수라, 윤정한은 심란했다. 단칸방과 벽으로 가로막힌 그 안쪽. 쥐구멍이라는게 있을거라는건 거의 확신이었고-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홍지수도 결국 사람이니까-봐도 파보지 않을거라던 것도 진심이었는데. 그치만. 이럴 때 이렇게 보여주는게 어딨어. 홍지수 이 치사한 놈. 궁금하잖아. 나 원래 그런거 궁금해하는 애 아닌데.

깔짝대다가 쫓겨나면 어떡하지? 그러면서도 정한은 슬금슬금 기어서 숟가락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큰거말고 좀 작은거. 주위나 좀 긁어보게.

홍지수가 윤정한이 잘못한 일에 대해 먼저 사과하는건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존심 때문에 헤어지자는 말 안받아주는거면 사과할 이유가 없잖아. 꼭 자기가 을이라는듯이 미안하다고 하다니.

그럼 홍지수가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나랑 안헤어지고 있다는거야? 그거야말로 정말 놀랄 노자다. 파도를 가르던 모세의 기적을 눈앞에서 목도한듯한 충격과 쇼크였다. 둘이 같은 말인가? 세부적으로는 좀 다르겠지 뭐.

계량용 티스푼을 찾은 정한은 탈룰라라고 적혀있는 봅슬레이 카트를 어깨로 대충 밀어내고 바깥과 연결되지 않은 안쪽 벽을 바라봤다. 산뜻한 연두색은 정한이 발라놓은 색이었다. 뭔가 좀 더, 세입자를 반기는 듯한 밝은 분위기로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인데. 솔직히 그냥 슈렉 색깔 같았다. 정한은 연두색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지수가 연두색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쥐구멍은 벽의 공중에 나있었다. 쥐구멍 치고는 쥐가 들락대기 참 어려운 곳에 있네. 왜 그동안은 몰랐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한 정한이 비장하게 티스푼을 쥐고 그 쥐구멍의 앞으로 몸을 옮겼다. 발길에 커피머신과 조지 오웰의 책과 쇠파이프가 채였다. 마지막건 아파서 제대로 욕을 한 정한이 발을 감싸쥐고 쥐구멍 앞에 섰다.

티스푼으로 주위를 두드려봤지만 벽이 케이크인건 아니었다. 단단한 합판은 뒷공간이 비어있다는걸 알리는듯 텅텅 소리를 냈다. 입을 비뚤게 틀은 정한이 근처에 전기장치가 있는지, 쥐덫 같은건 없는지 살펴봤다. 발치에는 영자신문이 굴러다닐 뿐이다. 

쥐구멍의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한은 문득 이상함을 느낀다.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든듯한 크기의 구멍은 딱 정한의 시야 높이 정도에 있었다. 약간 허리를 숙이면 딱 맞을것 같이. 그런 구멍을 본 사람들이 으레 그렇게 하듯이, 정한은 허리를 숙여 그 구멍에 제 눈을 맞췄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저를 보고있던 밤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8.

정한은 쥐구멍이 있을거라는 생각만 했지, 그게 구멍일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다. 저쪽과 이쪽의 틈.

왜 진작 생각을 못했을까? 나 완전 똑똑한데. 정한의 반려 형광등이 좀 깜박인다. 

7.

지수가 쉬림프 타코를 사왔다.

정한은 포장지를 뜯다가 눈을 깜박였다. 지수는 제 몫의 폴드포크 퀘사디아를 먹으며 사이다를 땄다. 목넘김이 깔끔한 소리가 맴돈다. TV에서는 넷플릭스가 두둥, 하고 효과음을 내고.

너 이거 기억한거야?

목표였던 영화를 검색해서 찾아내는 얼굴이 심각했다. 뭐를? 짧막한 반문에 정한은 계속 쉬림프 타코를 내려다봤다.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초밥을 못먹었으니 대안으로 선택했던 해산물을.

뜯어먹고 콜라를 따자 지수가 벼랑 위의 포뇨를 선택해 재생버튼을 눌렀다. 정한은 금붕어처럼 생긴 인간인지 인간처럼 생긴 금붕어인지 모를 애가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입에서 터지는 새우살을 음미했다. 톡톡.

6.

똑똑.

똑똑똑.

5.

나 찌개 안좋아해.

지수는 짜증을 냈다. 정한은 눈을 꿈뻑대다가, 제가 차려놓은 저녁밥상을 봤다. 김치찌개에 깍두기랑 동치미랑. 그냥 냉장고에 있던거 꺼내려고하니 그게 다였다. 눈을 굴리던 정한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란을 꺼내왔다.

멍하니 계란후라이를 하다가 문득 후라이팬의 뚜껑이 눈에 들어왔다. 소금간을 하고 그걸 팬 위에 덮는다. 좀 기다리다가 열었더니 예쁘장한 써니 사이드업이 정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밑은 좀 탔지만.

그걸 그릇에 옮겨 내놨더니 눈을 가늘게 한 지수가 젓가락을 들었다. 봐주겠다는 분위기였지만, 정한은 턱을 괴었다. 오늘은 영자신문은 필요 없어? 지수는 무슨 헛소리냐는듯 눈썹을 휘어 올렸다. 정한은 그냥 제 젓가락으로 지수의 계란 중 반을 훔쳐가려했지만, 철통처럼 제 젓가락을 가로막는 지수의 젓가락 때문에 투덜대며 포기했다. 네건 네가 해먹어 정한아. 이거 내가 한건데. 지수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쌀밥에 후라이를 먹고 있어도 홍지수는 우아했다. 어느 우아한 사람이 찌개 싫다고 남이 대접한 후라이를 먹지. 정한은 찌개 국물에 밥을 말았다. 연두색 벽이 진동한다.

4.

정한은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동그라미를 만들고, 그 안으로 자는 지수를 들여다봤다. 좀 오래.

3.

메리 크리스마스.

연두색의 목도리를 선물 받은 지수는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생일 선물도 포함해서 좀 비싼걸로 샀어. 킁. 빨개진 코로 코를 먹은 정한이 추워서 패딩 주머니에 손을 밀어넣었다. 백화점 브랜드의 상표가 찍힌 그 목도리는 괴랄했다. 초등학생도 엄마가 사줬다고 하면 싫어할만한 구린 연두색이었다. 연두색이라는게 본디 좀 친밀하고 밝은 좋은 색인데, 그건 방사능 경고 표시가 붙은 시약 같은 색이었다. 정한은 백화점에 들어가 5분도 채 고민하지 않고 가판대에 세일이라고 적혀있는 매장에서 그걸 건져왔다.

예쁘지. 물어보는 목소리도 건성이었다. 왜냐면 안예뻤으니까. 고고하게 생겨서 인싸들 취미는 다 따라하고 싶어하는 홍지수는 저한테 어울릴것 어울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 목도리는 명백히 후자였다. 톤도 안맞았다. 저런 연두색이 어울릴 사람이 있다면 톤이 어쩌고할게 아니라 그냥 저 목도리를 위해 태어난 사람인거겠지.

지수는 방사능 목도리를 펴서 그걸 제 목에 감았다. 또 가오 부린다고 챙겨입은 까만 코트의 위로 비져나와있던 회색 목폴라가 괴랄한 색에 가려진다. 차분하고 이지적이고 도회적인 완벽한 그에게 슈렉의 색이 섞여들었다. 두어번 감고 매듭을 지은 지수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정한을 본다.

내가 한평생 받아본 것 중에 제일 구린 선물이다 정한아.

하지만 홍지수는 웃고 있었다. 정한은 쥐구멍의 너머로 보이는 그 웃음을 오랫동안 시야에 담았다.

2.

벽의 너머로 가면 어떻게 해야할까? 습기가 싫고 단칸방이 아늑해서 평생 거기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던 윤정한은 머리를 굴린다. 째깍째깍.

1.

봅슬레이에 이름표를 붙였다. 탈룰라 1호.

그냥 1호라는 글자를 붙여보고 싶었던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팝콘 용으로 사다놨던 대포에 봅슬레이를 낑겨넣고 아픈 허리를 두드린 정한이 굴러다니던 헬멧을 주워썼다. 안전에 대한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턱끈을 조이기는 했다. 사실 정한은 봅슬레이를 타본적이 한 번도 없다. 다만 영화에서 보기로 봅슬레이는 4인승인데, 세입자는 윤정한 혼자이니 이 탈룰라 1호에도 승객은 하나 뿐이다.

해체한 스케이트 날은 구석으로 치웠다. 빙판길도 아니니 필요 없고, 대포에 넣기도 번거로워서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너머가 빙판길일 수도 있긴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 미련이 남았지만 포기하기로 한 정한이 봅슬레이에 낑낑대며 올라갔다. 어우. 이게 진짜 잘하는 짓인가. 없는 체력으로 헉헉댄 경영학과생이 가지고 온 단소로 스위치 부분을 겨냥했다. 던졌는데 실패해서 천장을 한 번 보고, 단소를 하나 더 꺼냈다. 여분의 단소는 6개쯤 남아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맞겠지 뭐. 심호흡을 한다.

달칵. 도르르.

아싸. 윤정한 개천재. 뿌듯한 웃음을 만면에 단 정한이 앞을 본다. 연두색 벽과 그곳에 뚫린 쥐구멍. 엉망인 단칸방.

헬멧 앞에 뜬 카운트다운이 줄어든다. 준비한 정한은 예견된 폭발음에 대비했다. 정말 봅슬레이를 하는 선수처럼 몸을 붙이고 최대한 공기에 저항이 없도록 한다. 대포 뒤에서 나는 연기에 타코 포장지가 굴렀다. 3. 누가 재기라도 한듯 도어락 소리가 녹음 된 녹음기가 멋대로 틀어져 소음을 낸다. 2. 연두색 목도리를 두른 지수를 그린 상상화가 흩날렸다. 1. 윤정한이 눈을 감는다.

0.

“좋아해.”

-1.

지수는 추위에 얼어붙은 뺨과 귀를 가지고 정한을 돌아봤다. 앞에서는 타종행사가 한창이고, 지수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괴랄한 연두색 목도리는 용케도 아직 지수의 목에 감겨있었다. 크리스마스에서 7일이 지나있는데도.

주변에서는 새 해를 맞는 사람들의 열띈 공기가 부풀고 있다. 둘 다 인파는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런건 인싸들이 좋아하는 일이니 홍지수도 좋아했다. 보신각은 솔직히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인파들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카운트다운 소리를 들으려면 어쩔 수 없는 위치였다. 덕분에 무슨 조명이 비추지도 않는 대로변이었다. 무슨 제야의 종 주변을 이따위로 만들어놨대. 좀 원망스럽긴 하지만.

“한 번도 말한적 없는 것 같아서.”

정한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달달 떨고 있었다. 아씨, 얘는 대체 어떻게 멀쩡하게 서있는거야. 롱패딩 대신 걸쳐입은 코트 때문에 뼈가 시렸다. 안에 히트택 입었는데 별 소용도 없는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수의 슈렉 목도리라도 훔쳐오고 싶었다. 저에게도 존나 안어울릴테니까 물론 그런 짓은 하지 않겠지만. 그런 연두색을 두르면 피부가 누렇게 떠보일게 분명하다.

지수의 반응은 밍숭맹숭했다. 쓰러진 연두색 벽의 앞은 폭발과 충격 때문에 먼지가 자욱했다. 콜록콜록. 정한은 탈룰라 1호에 타서 그 자욱한 먼지를 손으로 젓는 상상을 했다. 아우, 무슨 상상 속 공간에 미세먼지가 이렇게 많아. 여기에도 중국이 있나?

지수는 여전히 제야의 종 쪽을 보고있다. 번뇌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종. 절 대신 고층 빌딩만 수두룩빽빽하고, 홍지수는 불교를 믿지도 않으니 이런 행사는 그에게 어떤 의미도 없을텐데. 그럼 나 좀 봐주면 안되나? 밤색 눈동자에 옆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비췄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반짝반짝.

지수가 움직여서, 정한이 흠칫 놀란다. 하지만 그가 가방에서 쇠파이프를 꺼냈을 때에 비하면 그건 놀란것도 아니었다. 놀랐달까, 순식간에 하나도 춥지 않을 정도로 온몸에서 식은땀을 배출하는 정한을 돌아본 지수가 웃었다. 아. 목도리를 받았을 떄의 웃음이다. 쥐구멍 너머로 보이던.

“이딴 목도리를 줘놓고. 오늘도 고백 안하면 정말 쳐버리려고 했는데.”

목숨은 건졌네 정한아. 농담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로 그런 말을 한 지수가 남이 보기 전에 파이프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정한은 심장이 뛰는게 당최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방금 고백한 애인에게서 살인마의 얼굴을 봐서? 아니면 저 말이 실질적으로, 정한이 단칸방 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라?

“나도 좋아해.”

담백했다. 정한은 좀 멍해진다. 왜? 간단한 의문문에 말을 더듬은 정한이 그런건 좀 더… 신중하게 말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아예 말하지 않거나, 돌려말하거나, 베갯머리 송사 같은걸로 해줄 줄 알았다. 지수는 얼굴을 구겨가며 웃었다. 뭐야 그게. 그건 또 처음 보는 웃음이라 정한이 더 멍해진다. 좋아하면 그냥 말하는거지. 나 그런거에 자존심 안세워.

콜록콜록. 먼지가 좀 가라앉는다. 앞을 휘휘 저으며 남은 단소들을 바닥에 떨어뜨린 정한은 앞에 보이는 풍경에 놀라 넋을 잃는다. 지수는 반기듯이 정한의 앞에 서있고, 옆에는 1인용 카우치가 있었다. 꼭 좀 전까지 그 앞에 있었던 쥐구멍을 앉아서 보기 좋은 위치에.

그리고 그 뒤로는 무수한 방이 있었다. 정한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모로, 서늘한 습기와 따뜻한 냄새를 동시에 품으면서.

금지구역 팻말도 있고, 이미 열려있는 문도 있다. 정한은 지수의 손을 잡고 일어나서, 그 광경을 잠시 보고만 있었다. 지수가 건네준 열쇠에는 쇠파이프 모양 키링이 달려있다. 하트도 같이.

“…우리 생각보다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네.”

꽤 오래 지냈는데. 정한은 조지 오웰의 책을 줍는 상상을 한다. 지수는 여전히 처음보는 웃음을 지은 채였다. 알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겠지. 정론을 앞에두고 정한이 하늘을 한 번 본다. 습기가 스며들었다. 예민해서 옮아붙기 싫은, 하지만 새삼 나쁘지는 않은 습기가.

-1.5

“너 그 목도리 잘어울린다. 완전 그 목도리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그냥, 지수의 지금 웃음에 잘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근 4년 동안 본 얼굴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건데. 지수의 표정은 순식간에 구려졌다. 어. 이크.

뒤늦게 실수를 자각했으나 지수는 기분을 잡친 다음이었다. 기분이 나쁜 홍지수는 윤정한이 잘 아는 얼굴로 웃었다. 목도리를 벗어 정한에게 둘러주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아니야 정한아. 네가 더 잘어울리지. 박스에 가장 마지막에 남은 귤처럼 누렇게 떠보이는 피부를 어루만져준 지수가 카메라를 들어 정한의 모습을 찍었다. 괜히 코트나 입고 나와서 손 발 얼굴 귀 할것 없이 꽝꽝 얼어서는, 웃기지도 않는 못생긴 목도리를 하고 있는 그를. 풉. 사진을 본 지수가 깔깔댄다.

아씨, 내놔! 새해벽두부터 남의 흑역사나 남기고! 악마가 따로 없다며 덤벼드는 손을 재주좋게 피하며 홍지수가 계속 웃는다. 그게 이딴 목도리나 하고 초등학생처럼 언 손을 방방대는게 웃겨서라는걸 알면서도, 정한은 제 입꼬리마저 올라가는걸 제어할 수가 없었다. 아 내놓으라니까?! 고고하고 무서운 홍지수는 어디가고 딱 제 수준 만큼 유치해져서는. 프라이드니 완성되었다느니 다 개뿔이었다. 단칸방의 너머는 직선과 곡선이 어지러워 입체적이다. 좀 무서울 정도로.

정한아, 우리 투샷 찍자. 종일 킥킥대던 지수가 방심한틈에 정한의 어깨를 끌어당긴다. 정한은 이 목도리 하고는 절대로 안찍을거라고 비명을 질렀으나 지수는 시간 없다는 말로 응축했다. 무슨 시간이 없어. 새해 카운트다운도 다 끝났는데. 즐거운 눈꼬리를 흘겨보다 그냥 흑역사 하나 남겨주기로 한 정한이 브이를 그린다. 돌려진 카메라의 화면에 비춰진 저는 꼭, 아까의 지수만큼이나 이 목도리가 어울리는것 같아 보였다. 닮아버린 것처럼.

셋하면 찍는다? 하나,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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