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1)

로판AU

조슈아는 휘황찬란한 연회장의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며, 어젯밤을 조금 후회했다.

간만에 여유로운 밤이라 일찍 잠자리에 누웠건만, 피곤했던 하루는 아니었던지라 곧장 잠을 청하는 대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던 게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다음 실수는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하고 많은 것들 중 하필 트위터에 접속한 것이었다. 조슈아는 다른 멤버에 비해 서치를 자주 하는 편도, 잘 하는 편도 아니었다. 정직하게 그룹명과 제 이름, 끽해야 자주 불리는 별명 두어개, 그마저도 가끔가다 변덕처럼 검색해 보는 게 전부였다. 이번에는 마침 바로 그날 공개되었던, 자신이 출연했던 예능에 대한 반응이 궁금해졌을 뿐이었고. 제법 호의적인 반응을 흡족하게 둘러본 후 이제 정말로 핸드폰을 놓고 눈을 감을까 하다가, 조슈아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또 하나의 이름을 나란히 덧붙여 엔터 키를 눌렀다.

처음에는 긴 짝사랑에서 빚어진 호기심이었다. 조슈아는 언젠가부터, 어쩌면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윤정한을 좋아했지만,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예전에는 드높은 목표를 함께 바라보며 힘겨운 순간들을 버티기만 해도 벅차서. 지금은 이 안정적인 상태를 섣불리 깨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윤정한도 나를 좋아할지 확신이 없어서.

그러니까, 윤정한이 자신을 멤버이자 친구로서 지극히 아낀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연애 감정으로 발전이 가능한 애정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니까. 그의 애정은 아직도 조슈아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단순한 친구의 선은 진작 넘은 것 같은데, 질풍노도의 시기에도 질리도록 붙어 있던 '멤버'라는 사이는 세간의 흔한 동료니 친구니 하는 관계보다는 다소 유난스럽고 끈끈한 사이이기 마련이라, 어디부터 의심해야 하고 어디까지 당연히 여겨야 하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그냥,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그저 자기 몫의 다정함을 퍼붓는 건 조슈아의 특기 중 하나였고, 대부분의 경우 조슈아는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와는 상관 없이, 난 너를 좋아해'의 마음가짐으로 윤정한을 대하는 것이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울적해지는 날이 있는 법이고, 그러던 어느 날 조슈아는 별 생각 없이 제 이름과 나란히 정한의 이름을 함께 놓고 검색을 해 보았었다. 이런 식의 소비가 제법 인기가 있으며, 인기가 있는 만큼 회사에서도 주지하고 있는 나름의 셀링포인트임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알던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별개의 경험이었다. 제삼자의 시선에서 윤정한과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정작 그 자리에 있던 자신은 놓쳤었던 윤정한의 시선, 표정, 행동을 바라보는 건 의외로 위안이 되었다. 그게 정말로 저를 향한 애정의 증거라고 믿는 건 허황에 불과하단 것을 알면서도.

그래서 어젯밤도 조슈아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두 이름을 하나로 묶어 서치를 돌렸고, 쏟아지는 결과물들을 슥슥 넘기며 구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다 한 팬픽의 링크를 발견한 건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누군가가 '정한이 너무 멋있는 와중에 슈아가 자꾸 눈에 밟혀요 이놈의 섭남병ㅠㅠ' 하는 답글을 남긴 것이 서치 결과에 걸렸고, 대체 무얼 봤길래 저런 반응이 나오나 궁금해져 눌러보았고, 원본 트윗이 어떤 사이트에 게재된 창작 소설의 링크임을 알게 된 게 수순이었다. 프로 아이돌인 조슈아는 팬픽의 존재도 이미 알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때때로 이루어진 비밀스런 서치의 결과물로 윤정한과 자신을 대상으로 쓴 소설도 여러 번 발견해 흥미롭게 훑어본 경험 또한 있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창작의 산물이 아닌, 어디까지나 현실의 윤정한에게만 관심이 있었으므로, '신기하네' 내지는 '잘 썼네' 따위의 얕은 감상만 남은 채 지나쳤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단순 구경이나 해 볼 심산으로 링크를 눌러보았을 뿐이고, 그게 예상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기에 읽어내리게 되었을 뿐이다.

첫째로, 그것은 멤버들끼리 애정 관계로 묶은 것이 아니라 익명의 여주인공이 여러 멤버들과 엮이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배경 설정이 드레스와 황궁과 귀족들이 등장하는, 한국 대중들이 흔히 '로맨스 판타지'라고 부르는 장르에 해당했다. 조슈아로서는 존재만 알고 있었지 제대로 접해본 적은 없던 장르라, 전원우가 신관으로 나오고 명호가 마법을 부리며 승관이 황궁 안을 바삐 뛰어다니는 걸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결국 끝까지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여주인공이 황태자 윤정한과 결혼하는 해피 엔딩이었으며, 참고로 조슈아는 본래 여주인공의 약혼자였던 공작가 도련님이지만 여주인공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연심은 뒷전으로 한 채 그녀를 무한정 지지해주는 애처로운 역할이었다. 한없이 가벼운 내용이었던지라 술술 읽혔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시간이 제법 늦었던지라 조슈아는 지체 없이 잠을 청했다. 기껏 널널한 밤이었는데, 괜히 내일 피곤할 짓을 자처한 건 아닌지 미약한 낭패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조슈아는 한동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드높은 낯선 천장과 거대한 샹들리에부터 말이 안 되는 풍경이었고, 노크 후에 들어온 시종이 깍듯한 태도로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아침 식사를 대령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에는 소설 하나 읽고 잤다고 이런 꿈까지 꾸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꿈은 꿈임을 자각하면 금방 깬다더니 꼭 그런 것도 아니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슈아는 대체 이 지나치게 정교한 무의식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기꺼이 두고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침 식사는 순간 꿈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맛이 기막히게 잘 느껴졌고, 어차피 현실의 몸에는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칠 테니 즐기자는 심산으로 한 접시를 더 부탁했다가 오늘은 황궁 무도회이니 삼가는 게 좋겠다는 권유를 빙자한 질책을 들었다. 황궁 무도회?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득달같이 사용인 다섯 명이 더 들어와 무도회 준비를 시작하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옷을 고르고 머리를 매만지고 신발부터 단추 하나까지 이게 낫네 저게 낫네 부산스레 구는 꼴을 남들이라면 부산스럽다 여겼겠으나, 다행히도 조슈아는 타인이 저를 곱게 매만지는 일에 익숙한 프로 아이돌이었다. 진한 무대 화장을 얹고 그마저도 틈 날 때마다 곁에 붙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것에 비하면 부산스러운 축에도 못 끼었다. 가끔가다 뭐가 더 나은지를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틈에다가 툭툭 "난 이게 나은 것 같은데" 하는 의견을 던지면, 즉시 다들 "역시 도련님의 안목이 참으로 뛰어나십니다!"로 의견이 통일되는 꼴이 재미나기도 했다. 그래서 조슈아는, 치장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타기까지도 이 희한하고 정교한 꿈을 퍽 즐기고 있었다.

처음으로 위화감이 느껴진 건 황궁에 도착해서였다. 연회장의 입구에서부터 시작해 마차가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고, 초청객들이 차례로 내리면 앞에서 신원을 확인한 후 우렁찬 목소리로 누가 입장하는지 하나하나 선포하는 듯했다. 마부가 "바로 들어갈까요?"라고 묻는 걸 보니 공작가의 조슈아는 기나긴 줄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는 모양이었지만, 구태여 먼저 들어갈 필요성이 따로 있을까 싶어 느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앞쪽의 마차들이 하나둘 줄어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 입장을 외치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저 톤, 저 성량, 저 발음까지. 와, 도겸이 목소리랑 되게 닮았다, 라고 생각했을 때, 마침 노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열렸다. 놀랍게도 내리자마자 보인 건 정말로 도겸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종이 뭉치와 깃펜을 들고 피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승관이도.

부승관은 조슈아의 얼굴을 흘깃 올려다보고 대충 깃펜을 휘갈겼다.

"공작가에서 조슈아 님, 확인 되셨습니다~"

"승관이 네가 왜 여깄어?"

무척 놀라 다짜고짜 그렇게 묻자 승관은 대놓고 '이 형이 귀찮게 또 왜 이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게 제 일이니까요?"

"네 일이라고?"

순수한 의문에서 튀어나온 질문이었는데, 승관은 그걸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였는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불만이시면 제발! 황태자님께 휴직계 수리 좀 해달라고 말 좀 해주세요. 진짜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이라니까......."

그렇게 질러놓고선 뒤늦게 이 자리가 황궁이라는 자각이 들었는지, 승관은 급하게 양옆을 두리번거리고는 대강 손짓했다.

"아무튼, 얼른 들어가세요. 줄 긴 거 보이시죠? 도겸아, 빨리."

제복을 번듯하게 차려입은 채 서 있던 도겸이 입을 열고 외친다.

"공작가의 후계자, 조슈아 님 입장하십니다!"

몇 발자국 앞, 연회장 내부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지만 조슈아는 불현듯 든 생각에 정신이 팔렸다. 황궁에서 일하는 부승관, 황실 근위대로 추정되는 옷차림의 도겸, 그리고 공작가 후계자인 자신. 이거... 그냥 꿈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아까 읽었던 소설의 설정을 따라가고 있는데?

조슈아는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제게 말 한 마디라도 붙이고자 슬금슬금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제일 구석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으슥한 기둥 뒤에 기대어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감각. 연신 볼을 꼬집어도 고통만 선명할 뿐, 현실에서 눈을 뜨게 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소설 하나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상황. 암만 무의식이 위대하다지만, 구경하듯 대강 훑기만 한 소설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구현해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떠오르는 가설은 하나였다. 바로 책 속에 빙의되었다는 것. 매체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즐겨 쓰이는 소재이긴 했지만, 그걸 실제로 겪게 될 줄이야. 심지어 멤버들을 소재로 한 팬픽으로. 아무래도 잠들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하필 그것이었던 탓이다. 조슈아는 어젯밤을 조금 후회했지만, 금방 털어냈다. 그래, 그나마 유혈이 난무하는 공포 스릴러물 따위가 아니었던 게 어디야.

그렇다면 이제 조슈아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대부분의 창작물 속에서, 현실로 돌아가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바로 소설의 결말을 보는 것이었다. 그래, 그깟 결말 보면 되지. 공작가 후계자인 서브남주로서는 그냥 방해 않고 가만히 구경이나 하다 가끔 여주를 향해 애틋한 표정이나 몇 번 지어주면 될 일이니까....... 이 시점에서 조슈아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자각해냈다. 그러고 보니, 여주인공이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가의 귀족 영애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마저도 후작가였는지 남작가였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사실 조슈아의 탓은 아니었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딱히 자아며 특색이랄 게 없는, 아무나 이입할 수 있게 만들어진 익명의 한 캐럿에 불과했으니까. 여주인공과 황태자를 결혼시켜야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점치고 있던 조슈아에겐 크나큰 낭패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소설의 시작도 황궁 무도회였는데. 조슈아는 머릿속으로 찬찬히 소설의 흐름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래, 분명 황궁 무도회에서 여주인공이 황태자, 즉 윤정한과 첫 춤을 추게 되었고, 그런데 갑자기 신관이 나타나서 오늘 윤정한과 첫 춤을 춘 상대가 미래의 황후가 되리라는 신탁이 내려왔다고 고하고, 그래서 이미 조슈아라는 약혼자가 있던 여주인공이 몹시 당황하고....... 그렇다면 이대로 춤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면 자연히 여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될 텐데, 그렇다기에는 다소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분명 여주인공은 약혼자 조슈아와 함께 마차를 타고 함께 연회장에 입장했다. 그런데 조슈아는 공작저에서 여기까지 누구와도 합류하지 않고 홀로 들어오지 않았나. 설마 소설 속에 나온 황궁 무도회와는 아예 다른 무도회인 건가? 기껏해야 잠들기 전 심심풀이로 휙휙 날려 읽은 소설, 디테일까지 전부 기억이 날 리 만무하니 이 무도회가 그 무도회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만약 다른 무도회라면? 어찌 되었건 일 순위는 여주인공을 찾는 것이니,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기라도 해야지. 아무래도 이 소설 속 조슈아는 나름대로 사교계의 유명 인사인 모양이니, 어지간하면 제 약혼 상대가 누구인지 정도는 다들 알고 있을 성 싶었다. '실례지만, 혹시 제 약혼자가 누구인지 아시나요?'라니, 상상만으로도 머쓱한 질문이지만 다른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도 소설 속 조슈아는 여주인공에게 마음이 없다는 오해를 사고 있었는데, 어째 그 오해만 깊어질 듯하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약혼자의 존재조차 잊은 무심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에게나 다정한 성정 때문에 정작 여주도 스스로가 생판 남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위치라는 지레짐작으로 조슈아를 향한 마음을 홀로 정리하고, 실은 여주를 진심으로 연모하고 있었던 조슈아가 후회하게 되는 흐름이었지만. 제 성격과 닮은 듯 허황된 플롯에 풋 웃음을 흘렸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혹시 윤정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조슈아는 누구에게나 다정하니, 딱히 자신만을 특별 취급하는 건 아니라고. 조슈아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모두에게 다정하게 굴더라도, 윤정한에게는 공평하지 않은 정도의 관심과 애정을 주고 있으니까. 모를 리 없을 정도로.

그래봤자, 암만 현실이 아니래도 일단 모르는 여자와 윤정한의 결혼을 적극 추진해야 하는 입장에서 썩 유쾌한 생각은 아니었다. 조슈아는 다시 고개를 휘휘 저으며 불필요한 생각의 잔해를 털어내고, 우아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는 연회장 중앙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슬슬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나가서 미지의 약혼자를 찾아야겠지? 우선 윤정한이 누구와 춤을 추는지부터 살피고, 역시 공개적으로 질문했다가는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 내 약혼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이따 공작저에 돌아가서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속으로 오늘의 계획을 다시 한번 되새긴 후 무도회의 한복판으로 뛰어들 결심을 하며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아 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 손목을 붙들었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어슴푸레한 불빛 속 은은하게 반짝이는 옅은 금발 머리가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찬란히 반짝이고 있는 웃음기 어린 두 눈도.

"......윤정한?"

무대 의상 뺨치게 화려한 복식을 갖추어 입은,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윤정한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웃었다.

"드디어 이름으로 불러주게? 맨날 '어떻게 감히,' 이러면서 선 긋더니."

아차, 시작부터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윤정한은 자신이 아는 윤정한과 한없이 닮은 듯해도, 어쨌거나 소설 속 황태자인데.

"아, 깜짝 놀라서 실수... 했습니다. 황태자... 님? 황태자 전하?"

무엇이 옳은 호칭인지도 모르겠다. 흘끔 윤정한의 기색을 살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아니. 도리어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그냥 편하게 하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기 공작이면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 슈아야."

그런가?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니 스스로 판단할 도리가 없다. 그래도 부득불 우기는 것보다야 등장인물의 뜻대로 적당히 맞추어주는 게 덜 위험하겠지.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겠어, 정한아."

윤정한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가 물었다.

"근데 왜 여기 숨어있어? 수상하게?"

"좀 피곤해서, 시작 전에 잠시 혼자 쉬고 있었어."

피곤했다는 소리에 윤정한이 즉시 한 손을 뻗는다. 아마 이마, 혹은 뺨을 향해 다가오던 그 끄트머리가 닿기 전에 조슈아가 되묻는다.

"그러는 너는? 너야말로 왜 이런 데 있어."

윤정한은 내밀던 손을 자연스레 거두고 태연히 대답한다.

"요란하게 등장하기 싫어서. 맘 같아선 아예 안 나올까 싶었는데, 그럼 승관이가 엄~청 뭐라 할 거 아냐."

입구에서 그 찰나의 대화만으로도 상당히 맺힌 게 많다는 티가 팍팍 나던 부승관이 떠올랐다. 그리고 소설의 도입부를 다시 되새겼다. 그래, 소설 속에서는 윤정한이 등장하면서 팡파레가 어쩌고, 황태자의 축사가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역시 이 무도회는 아예 다른 무도회일 터이다. 아마도 소설의 내용이 시작하기도 전의. 여기서 여주인공의 정체를 알아낼 일은 요원해졌으니, 더 남아있을 필요는 없겠다. 조슈아는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난 역시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라, 그냥 얼른 돌아가 봐야겠어. 재밌는 시간 보내."

그리고 곧바로 돌아서는데, 윤정한이 여전히 손목을 단단히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자 본인이 앞장서 밝은 빛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 곡만 추고 가."

"춤을? 정한아, 다음에 할게."

그러나 윤정한은 고집스레 조슈아를 연회장 한복판으로 끌고 간다. 이런 곳에서 추는 춤은 알지도 못하는데. 조슈아는 다시 한번 항변한다.

"나 지금 약혼자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다. 황태자라면 분명 훗날 공작 부인이 될 영애가 누구인지는 알 테니, 윤정한이 '저기 있잖아'라며 인파 속 약혼자를 집어내 주면 그 정체를 알게 되어 이득이고, 만약 이 안에 없다면 첫 춤은 꼭 약혼자와 추어야 하는 고지식한 도련님 행세를 밀고 나가면 된다. 그러나 윤정한의 반응은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럼 나랑 춰."

어느새 연회장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눈길이 그들을 향해 있었다. 웅성거리는 말소리 틈으로 승관이 열불내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어디에도 없더니 저건 대체 왜 저기서 나오는 건데!' 황태자의 돌발 등장에 오케스트라조차 주춤하며 음악이 흐트러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정한은 조슈아의 다른 한 손마저 움켜쥐며 재차 말한다.

"나랑 한 곡만 추자."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윤정한이 먼저 스텝을 밟는다. 눈치를 보던 악단이 스리슬쩍 연주를 재개한다. 주위의 사람들도 하나둘, 주저하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조슈아는 윤정한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어렵지는 않지만, 처음 경험해보는 춤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몸짓이 꼬일 때마다 윤정한은 즐거움을 숨기지 않는다. 이 모든 게 하나의 거대한 장난인 것마냥 구는 그를 몇 뼘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응시하며, 조슈아는 그를 파악해보려고 애쓴다. 황태자 윤정한은 현실의 윤정한보다 더 종잡을 수 없다. 이 세계의 우리는 원래도 온 연회장의 시선을 그러모으며 춤을 추곤 했던 걸까.

영원처럼 느껴지던 무곡이 순식간에 끝났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일 게 분명한 조슈아를 바라보며, 윤정한이 말했다.

"진짜로 오늘 몸 안 좋나 보네, 조슈지."

"그렇다니까."

별 것도 아닌 대화에 윤정한이 또 웃는다.

"알겠어. 첫 춤도 춰 줬으니까, 보내줄게."

더 있으라 해도 어떻게든 빠져나갔을 걸. 속으로만 그렇게 말하며,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거대한 트럼펫 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막았다. 도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연회장을 울린다.

"대신관님의 긴급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훅 끼쳐왔다. 수군대는 인파가 자연스레 두 갈래로 나뉘고, 그 사이로 흰 로브를 입은 전원우가 걸어 나왔다.

"연회를 중단시키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사과하는 원우에게 윤정한은 고개를 저어 보인다. 여전히 즐거워 죽겠다는 웃음을 지은 채로. 전원우가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마주한다.

"중대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순식간에 연회장에 긴장된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 반응만으로도, 신탁이라는 것이 얼마나 희귀하고 중대하며 절대적인 것인지 느껴진다. 그리고 조슈아는, 그 신탁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오늘 밤 황태자와 첫 춤을 춘 이가, 훗날 황궁의 안주인이자 황제의 영원한 반려가 되리라."

두 눈을 감고서도 제게 꽂혀드는 시선이 느껴졌다. 깊은 한숨이 튀어나온다. 이 무도회가 그 무도회... 맞잖아....... 대체 여주인공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기에. 누군가 옆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안 봐도 윤정한이겠지.

"슈아야."

"왜."

조슈아는 고집스레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한다. 지금이라도 이 눈을 뜨면, 다시 익숙한 제 방이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윤정한의 웃음서린 목소리는 여전히 터무니없는 비현실을 고한다.

"너 나랑 결혼해야겠다."

이래가지고서야, 제대로 결말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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