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2)

로판AU

조슈아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기 전, 이번엔 정말로 익숙한 천장이 보이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하지만 오늘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는, 조슈아가 이 해괴망측한 세상에서 이틀째를 맞이하였음을 묵묵히 고할 뿐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 하나쯤은 있었다. 소설의 도입부부터 시원하게 망쳐버렸으니 (물론, 일을 망친 건 따지자면 조슈아가 아니라 윤정한이었지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으리라는 희망. 판타지 장르에선 흔하지 않은가, 필요한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무한히 특정 하루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그런 이야기. 그러나 그 미약한 희망 또한,

"일찍부터 죄송합니다, 도련님... 조속히 입궁하라는 명이 내려와서요......."

잔뜩 울상을 지으며 방으로 찾아온 시종 하나로 인해 무참히 깨어졌다.

말인 즉슨 어제 벌어졌던 일이 전부 현실, 최소한 이 세계에서는 현실이라는 뜻이다. 어제 벌어졌던 일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다. 윤정한한테 휩쓸려서 얼떨결에 춤 한 번 췄고, 근데 그 춤 하나 때문에 졸지에 미래의 황후 된다고 코 꿰였고, 윤정한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실실 웃으면서 너 나랑 결혼해야겠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대고, 조슈아는.......

"정한아, 너 내가 모르는 사이에 폐위 됐었니?"

수용의 한계를 넘어선 정신 나간 상황에 이성줄을 시원하게 놓아 버린 채, 지하 감옥이 아니라 무사히 공작저에서 아침을 맞이한 게 용할 정도의 발언을 환한 미소와 함께 투척했다. 옆에서 기겁하여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건 말건, 윤정한은 마냥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직 내가 황태자 맞는데, 왜?"

대체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고. 지나치게 진실된 감상은 속으로 한 번 삼켜내고, 조슈아는 그래봤자 크게 나을 바 없이 비등하게 불경한 발언을 또 한 번 투척했다.

"그럼 네가 황위까진 못 오르나보다. 어떡해."

'응~ 나 너랑 결혼할 생각 없어~'의 지극히 우아한 귀족식 돌려 말하기이자, 윤정한이 당장 황족 모독 겸 반역 죄로 즉결 처형을 명해도 할 말 없을 발언이었다. 하지만 너그러운 황태자께서는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연신 웃음만 터뜨려댔다. 사색이 된 건 축하드린답시고 모여들었다가 몸 둘 바를 모르게 된 주위 청중들 뿐. 조슈아는 몸을 틀어 전원우를 바라보았다. 부러 놀란 표정을 꾸며내려 크게 뜬 두 눈에는 은은한 광기가 번들거렸다.

"정말! 중대한 신탁이었네요! 저랑 결혼할 사람이 황제가 된다니, 충격이 극심하여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졸지에 불길한 신탁을 선포한 당사자가 되어버린 전원우는 빠르게 인파를 헤치고 도망쳐버린 조슈아를 잡지도 못한 채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나...?

조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재빨리 제 마차를 찾아 올라탄 뒤 (마차 하나마저 온갖 장식으로 잔뜩 튀게 꾸며 둔 공작가의 위세에 그때만큼 감사한 적이 없다) 졸고 있던 마부를 재촉해 그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나치게 빠른 귀가에 당황한 사용인들을 전부 물리고 방에 틀어박혀 되새겼다. 그래, 황태자와 첫 춤을 춘 이가 황제의 반려가 된다고는 했지만, 신탁 속 황제가 윤정한이라고 누가 그래? 원래 서양사는 음모와 반란과 혁명이 판 치는 법 아니겠어? 황태자가 무사히 황위까지 오른다는 보장이 없잖아? 조슈아는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나는 윤정한이랑 결혼한다는 신탁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결혼할 사람이 황제가 된다는 신탁을 받은 거다, 와 내 미래의 배우자는 좋겠네, 따위의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첫 단추부터 단단히 잘못 꿰었다는 사실을 열심히 부정하다 스르르 잠에 빠져들 때까지.

그렇게 이튿날 아침을 맞이한 조슈아는 30분 만에 휘몰아치는 외출 채비를 끝마치고, 그래도 우리 도련님 굶길 수는 없다는 일념 하에 주방장이 쥐여준 토스트 하나 손에 들고 삽시간에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른 참이었다. 날 부른 데에는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하고, 나는 어제 무도회의 여파로 몹시 피곤하니 황궁에 갈 의향이 추호도 없음을 열심히 피력해보았지만, 한낱 사용인 신분이 제국 유일무이 황태자 전하의 명을 어찌 거역할까. 고집을 부려봤자 불쌍한 가솔들 낯짝만 시시각각 핏기를 잃어갈 따름이라, 조슈아는 한숨 한 번 폭 내쉬고 져 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윤정한을 필두로 한 이 가혹한 소설 속 세계에까지 져 줄 마음은 없어, 가는 길 내내 조슈아는 다시 소설을 정상 궤도에 올려 둘, 그러니까 윤정한과의 결혼이 기정사실화되지 않을만한 비책을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신탁 속 황제가 윤정한이 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는 주장은 여전히 퍽 논리적이라 여겨졌으나, 보다 명료해진 이성으로 생각해보니 자칫하단 정말 반역죄로 교수대 끌려가기 십상인 발언이라 또 쓰긴 다소 위험했다. 하여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궤변 후보 넘버 원은 다음과 같았다: 원래 신탁은 은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지니 들리는 대로만 해석해선 안 되는 고로, '첫 춤'이 정말로 문자 그대로의 '춤'을 의미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음, 그럴듯한 주장인데?

그러나 사람 일이 뜻대로 되게 놔두면 윤정한이 아니지. 논리나잇으로 다져진 궤변력을 십분 발휘한 조슈아의 모든 다채로운 주장 후보들은 접견실에 들어서자마자 머릿속에서 휘발되었다. 대체 왜 에스쿱스가 난데없이 의자에 묶여있는 것이며, 옆에서 찜찜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도겸과 디노는 또 어찌 된 영문인지. 일단 태연한 표정으로 정중앙에 앉아있는 윤정한이 원흉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문 앞에서 떨떠름하게 서 있는 조슈아를 향해 윤정한이 손짓했다.

"슈아 왔어?"

도겸과 디노가 즉시 묵례로 예를 표한다. 에스쿱스는 격한 몸부림을 치며 외친다.

"야! 윤정한! 이제 진짜 이거 풀라고!"

그러나 윤정한은 근엄한 얼굴로 고개만 저었다.

"그치만 쿱스야, 내가 황제가 못 된다면 누가 되겠어. 계승권 바로 다음 순위가 너잖아? 그럼 나는 네가 딴맘 먹진 않았나 조사할 권리와 의무가 있지 않겠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제야 알겠다. 그래, 소설 속 최승철은 대충 윤정한의 사촌 뻘 되는, 황가의 방계였다. 황태자가 금지옥엽 외동아들인 탓에, 황제와 황태자가 모두 사망할 시 황위를 물려받을 위치에 있는. 그러고 보니 황제는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연회장에서 보지 못한 건 물론이고 이 사달이 났음에도 딱히 무어라 의견 표명을 했단 소리를 못 들었다. 앓아누워 있기라도 한가. 기억을 되새겨봐도 소설 속 황제의 행적에 대해서는 딱히 떠오르는 정보가 없었다. 조슈아가 설렁설렁 읽은 탓도 있겠으나, 애초에 이건 유사의 유사에 의한 유사를 위한 팬픽인 바, 불필요한 서술은 과감히 생략하는 허술한 설정값의 작품인 연유가 더 컸다. 그런데도 막상 들어와서 겪어보니 의외로 디테일이 섬세한 건 꽤 놀라웠다. 뭐, 아직까지도 이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 무의식의 농간에 불과하다는 의심이 백 퍼센트 사그라진 건 아니었지만.

에스쿱스는 의자가 덜그럭거릴 지경으로 날뛰며 이번엔 도겸과 디노에게 화살을 돌렸다.

"너네도! 너네 이러고도 뒷감당 가능해? 풀려나기만 해 봐, 진짜!"

둘은 눈에 띄게 움찔한다. 서로 난감한 듯 눈빛 교환을 하더니, 도겸이 디노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네가 말해. 디노는 항명이 간절한 표정이지만, 별 수 있겠는가. 난 근위대장이고, 넌 근위대원이야! 말없이 엄포를 놓는 도겸의 등쌀에 결국 두 눈 꽉 감고 입을 연다.

"저희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간언을 드렸는데... 너네가... 내 명령 무시하고도 뒷감당 가능하냐는 협박을...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하셔서......."

치사하고 더러운 신분제 사회로 인해 사이에 끼인 불쌍한 근위대 둘만 안타깝게 되었다. 조슈아가 연민 어린 눈길로 그들을 짠하게 바라보는데, 돌연 에스쿱스가 이쪽을 향해 외쳤다.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 너! 조슈아 너 나랑 결혼할 거야?"

이건 또 뭔 소리야? 자기도 모르게 너무나 진심 어린 표정을 지어보인 모양이다. 윤정한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고, 최승철은 갑자기 조금 상처 받은 얼굴을 한다.

"그렇게까지 질색할 일이냐...? 아니, 나도 사절이긴 한데......."

윤정한이 간헐적으로 웃음을 뱉어내며 끼어든다.

"좋다, 말 나온 김에 말해봐. 무려 신탁의 주인공! 조슈아씨, 누구랑 결혼해서 누구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그래, 지금 조슈아가 도겸과 디노를 안쓰럽게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자기 앞가림만 해도 벅찬데. 여기서 무구하게 미소 지으며 '나? 나는 쿱스!' 발언을 던지면 과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짓궂은 호기심이 순간 치솟긴 했으나, 슬슬 피가 안 통하니 제발 좀 풀어달라고 호소하는 승철의 모습이 불쌍해 조슈아는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결혼 계획 같은 거 없는데."

"다행이네. 나랑 약혼부터 시작해 보자."

노빠꾸 직진 발언에 디노가 "오~" 감탄사를 내뱉다 도겸에게 한 번 더 옆구리를 찔렸다. 조슈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정한아, 넌 결혼이 장난이야?"

"아니지~ 그러니까 미래의 황후 되실 분이랑 진지하게 미래를 약속해보려는 거 아니겠어? 나 황제는 해 봐야지~"

무슨 황제 된다는 목표를 음악방송 1위보다도 더 가벼이 읊는다. 저거야말로 자칫하다간 반역 논란 휩쓸릴 발언 아닌가, 싶은데 다른 애들은 눈 한 번 깜박을 안 한다. 역시 이 동네 황제는 없는 것만 못한 취급인가 보다. 조슈아는 이 시점에서 오는 길 내내 준비했던 비장의 논리를 꺼내 들었다.

"그거 말인데, 생각을 좀 해 봐 정한아?"

"어 뭔데."

"신탁은 원래 상징성이 강해서,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 그러니까 신탁에서 말하는 '춤'이 진짜 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지."

옆에서 승철과 도겸은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될 수가 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디노는 애쓴다...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반면 윤정한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나 어제 처음 춤 춘 것도 슈아고, 처음 대화한 것도 슈아고, 처음 마주친 것도 슈아인데? 그 '춤'이라는 데 다른 뜻이 있다 해도, 높은 확률로 어쨌든 상대는 너일 걸."

신이시여....... 그러니까 대체 왜 황태자가 황실 주최 연회에서 몰래몰래 쏘다녀서 이런 사달이 나는지. 나는 왜 하필 그때 그 기둥 뒤에 숨어 있었던 건지. 어쩌면 정말로 조슈아가 원작과는 다른 행동을 했기에 이야기가 달라진 걸지도 모른다. 태연하게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더라면 다짜고짜 윤정한을 독대할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 사실 여주인공이랑 같이 안 온 것부터가 근본적 문제잖아. 그것도 사실 내가 중간에 알아서 잘 매너 있게 약혼녀 픽업을 갔었어야 하는 건가? 상당히 신빙성 있는 가설이다. 그럼 진짜로 완전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인 실정인데....... 일단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니 현 상황부터 수습을 해야 할 텐데, 플랜 A는 이미 장렬히 실패였다. 조슈아는 혼신의 힘을 다해 지극히 무구하고 미안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비장의 표정 연기를 선보였다.

"그런데 정한아... 그래도 정말 그게 나는 아니야. 이렇게 갑자기 밝히고 싶진 않았는데... 사실 나, 얼마 전에 계시를 받은 게 있어서 신관이 되려고 했어."

그리고는 새빨간 거짓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시전했다. 신탁도 있는 세계관인데 계시도 있겠지. 팔자에도 없는 개종을 하게 생겼지만, 실존하지 않는 허구의 종교에 불과하니 부디 큰 죄는 아니길 바랄 뿐이다. 돌아가면 정말 회개 기도 열심히 올려야지....... 조슈아는 신실하게 양손을 곱게 모아 쥐고 윤정한을 바라보았다. 오, 드디어 윤정한도 조금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그건 정말 중요한 일이네. 쿱스야, 가서 원우 좀 불러와야겠다."

최승철은 대놓고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진짜로? 야, 신관 되면 공작가는 어쩌게!"

"계시를 받았다는데 어떡해."

"이 상황에서 그 소리를 믿어준다고?"

그래, 어째 내가 듣기에도 너무 티 나는 거짓말 같긴 했다. 플랜 B도 실패로구나. 조슈아가 겸허히 결과를 받아들이고 플랜 C를 어떻게든 급조하려 하는데, 윤정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설마 슈아가 종교 갖고 거짓말을 하겠어?"

오, 이쪽 조슈아도 이곳의 신앙에 나름대로 신실했던 모양이다. 사실 에스쿱스는 의심을 하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 없다. 윤정한만 어떻게 하면 되는 일이니까. 의외로 잘 먹혀들고 있는 듯한 플랜 B에 조슈아는 다시금 희망을 품었다. 여전히 찜찜하다는 낯짝의 승철에게 정한이 재촉한다.

"그러니까 일단 원우 데려와. 이런 상담은 대신관이 해야지."

"나 아직 묶여있거든?"

"아 맞다."

이윽고 풀려난 에스쿱스는 뻐근해진 관절을 보란 듯이 이리저리 돌려가며 투덜거렸다. 윤정한이 달래듯이 물었다.

"우지 불러줄까?"

"아냐, 그 정도는."

"그럼 얼른 가서 전원우 불러 와."

최승철의 뾰로통한 시선이 대번 꽂혀들지만 윤정한은 장난기 어린 미소만 짓는다. 질린다는 어조로 "알겠다고!"를 외치고 승철이 접견실을 나섰다. 근위대 둘은 이제야 조금 덜 가시방석인지 안색이 조금은 나아졌고. 조용히 대신관을 기다리는 사이 윤정한이 물었다.

"근데 어떤 계시였어?"

없는 계시를 어떻게 꾸며낼까. 조슈아는 그냥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음, 신의 뜻을 함부로 남한테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번에도 윤정한은 조슈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듯했다. 정말로 신의 뜻만 갖다 붙이면 뭐든 먹히는 세상인가 본데? 끝내주는 조커 카드를 발견한 걸지도 모른다. 조슈아가 내심 기뻐하기도 전에, 윤정한이 넌지시 덧붙인다.

"나랑 결혼하기 싫어서 그냥 한 소리는 아니고?"

조슈아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윤정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마땅히 찔려야 할 발언이지만, 대놓고 저런 소리를 들으니 희한하게도 조금 부아가 치밀어서.

"정한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네가 나한테 그렇게, 추궁하듯 말하면 안 되잖아. 왜냐하면.

"너도 나랑 결혼이 하고 싶은 건 아니잖아. 신탁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래, 사실 이거야말로 조슈아가 기를 쓰고 윤정한과의 결혼 루트를 피하고자 하는 참된 이유였다. 물론 제대로 된 결말을 보고,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거 중요하지. 근데 그것보다도, 윤정한이 신탁이라는 편리한 소설적 장치에 얽매여 자신과 감정도 없는 결혼을 추진하는 게 싫다. 설사 감정이 실리게 된대도, 그게 더 싫다. 너는 어차피 첫 춤의 상대인 그 익명의 아무나와 사랑에 빠지게 짜여져 있을 뿐이고, 내가 어쩌다 실수로 그 자리에 끼어들어가버린 꼴일 테니까. 나는 널 좋아하지만, 그런 건 바란 적도 없어. 진짜도 아닌 윤정한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미리 정해진 허구의 사랑을 받는 거, 설레기는 커녕 비참하기만 할 테니까.

얼어붙은 공기를 깬 건 예의 바른 노크 소리와, 그 노크가 무색하게도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문을 열어 제끼는 승철의 외침이었다.

"원우 데려왔다! 나 이제 간다?"

"어, 너네도 이만 가도 돼."

윤정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 근위대에게 휘휘 손짓한다. 서늘한 분위기에 눈치만 보고 있던 도겸과 디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승철을 따라 줄행랑을 친다. 전원우만 덩그러니 윤정한과 조슈아의 사이에 끼여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음... 오는 길에 대강 얘기는 들었는데요. 계시를 받으셨다고요."

전원우는 분명 조슈아를 바라보며 운을 떼었건만 대답은 윤정한이 선수 쳤다.

"어. 신관이 돼야 한다던데? 그래서 말인데, 계시 내려왔다고 바로 교육 들어가야 한다는 규율은 없지? 한동안 바쁠 테니까 가급적 결혼식 이후로 미루게."

"뭐라고?"

조슈아의 두 눈이 경악으로 동그래진다. 윤정한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요즘 신관이라고 평생 독신으로 살고 그런 게 어딨어~ 슈아 몰랐던 건 아니지?"

아, 윤정한 역시 거짓말인 거 다 알면서 믿는 척 했던 거구나... 이러려고....... 하긴, 이 소설의 본질은 멤버들과의 두근두근 연애 소설이며 전원우 본인이 대신관이니 연애 및 결혼 금지 조항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한데, 미처 그 생각까지는 못 했던 조슈아의 패착이었다.

"설마 진짜, 결혼하기 싫어서 그냥 한 소리였던 거 아니지?"

전원우가 눈치를 보다 슬쩍 두둔한다.

"조슈아 님께서는 타국에 오래 계셨으니 잘 모르셨을 수도 있죠. 거긴 아직 좀 보수적이잖아요."

"참고로, 수습 신관 기숙사는 황태자궁 바로 옆에 붙어 있다?"

플랜 B, 장렬하게 실패.

"하하, 그랬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정한아. 근데 나 아직 너랑 결혼할 거라곤 안 했는데?"

"어, 알지~ 그러니까 일단 오늘은 약혼 공표부터 하는 게 어떨까?"

이젠 최후의 방도 뿐이다. 회피.

"그런데 내가 아직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얼른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다음에 마저 얘기하자?"

양해를 구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니 윤정한도 마주 웃는다. 정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얼른 가. 내일 봐~ 박제된 미소 그대로 휙 몸을 돌려 뛰다시피 걸음을 옮기며 조슈아는 결심했다. 공작저에 돌아가는 대로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지. 내일 또 입궁하라고 부르기 전에. 애석하게도 조슈아가 몰랐던 사실은, 윤정한이 알아서 하겠다던 '나머지'에 합의도 않았던 약혼의 공표 절차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황태자와 공작가의 혼약 소식은 조슈아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수도 곳곳으로 퍼져나가 버렸다.

돌아온 조슈아를 맞이하는 사용인들의 어색한 표정에서 조슈아는 이변을 눈치챘다. 그리고, 등 뒤에서 오가는 "그럼 이젠 도련님 대신 황태자비님이라고 칭해 드려야 하는 거야...?" "...그건 식 올린 이후부터 아냐?" 라는 대화에 골이 띵 울리는 듯했다. 순순히 보내주는 듯 굴고선 이렇게 통수를 쳤단 말이지? 한술 더 떠서, 조슈아가 간신히 방으로 돌아가기가 무섭게 황궁에서 마차 하나가 도래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온 건 우지였다.

"황실 주치의 이지훈입니다."

갑자기 의사가 왜? 조슈아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우지는 '나도 정말 이러기 싫은데 윗선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처지라 어쩔 수 없었다'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현타맞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약..혼자..의 건강이 염려된다고 보내셨습니다."

"그냥 푹 쉬면 나아질 테니까 괜찮아."

물 흐르듯 거절하고 다시 문을 닫으려 하는데, 우지가 진심으로 난감하단 표정을 지으며 닫히려던 문을 턱 막아선다.

"그... 하... 송구합니다만, 밤새 옆에서 지켜보라는 명을 받아서요."

"나 멀쩡해. 아니지, 멀쩡하진 않은데,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야."

"그렇게 보이긴 하는데요."

우지가 잠시 고뇌한 끝에 이실직고했다.

"사실 병세가 문제라기보단... 몰래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감시하라고 하셔서요."

황궁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을 윤정한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거기까지 내다보다니, 역시 세븐틴 심리전 최강자다웠다. 그래도 나름 뚝심 있는 성정의 조슈아였으나, 우지의 초점 없는 지친 눈을 바라보자 마지막 남은 전의마저 스르르 흘러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우지야, 네가 무슨 죄가 있겠니... 피차 윤정한에게 시달리는 처지에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조슈아는 의자에 앉아 온몸을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알겠어... 있어도 되는데, 잠깐 집사장 좀 부르는 건 괜찮아?"

"아, 네, 저는 신경 안 쓰시고 편하게 일 보셔도 됩니다."

어쨌든 남은 하루는 꼼짝없이 방 안에 머물러야 할 판이니, 공작저 안에서 그러모을 수 있는 정보라도 모아야 했다. 실상 조슈아로서는 사용인들의 얼굴조차 잘 몰랐지만, 그래도 대강 집사장 정도 위치면 충분히 친밀하고 충성스러우며 차기 공작부인이 될 아가씨의 신상 정보 따위는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으리라. 그러한 판단 끝에 불려온 집사장은, 뜻밖에도 또 하나의 반가운 얼굴이었다.

"문준휘!"

네가 공작저 집사장이었구나, 대충 읽어서 놓쳤었나 보네, 옷 잘 어울린다. 대놓고 못할 소리는 속으로만 삼키며 조슈아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문준휘가 고개 숙여 묵례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어, 바쁜데 미안해.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준이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우지를 흘끔거리는 모습에 조슈아가 재빨리 덧붙였다.

"우지는 오늘 여기 있어야 된대서. 근데 신경 안 써도 돼."

일단은 황실의 사람이니 그 앞에서 수상쩍은 대담을 주고받아도 괜찮을지 염려를 안 한 것은 아니었으나, 퍽 대단한 얘기가 오갈 것도 아닌데다가 듣는다 한들 누가 설마 '이 세상은 소설이며 나는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는 조슈아의 목적을 짐작이나 할까. 더군다나, 우지라면 옳다구나 윤정한에게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조슈아의 모든 발언을 일러바칠 사람은 아니었다.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정은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하게 조슈아를 바라보는 눈초리에, 단순히 우지가 하룻밤 머무르게 된 사정만이 아니라 조슈아의 약혼 소식까지 이미 다 들었다는 말뜻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조슈아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안 그래도 말이야....... 내 약혼자 분 있잖아, 그분은 괜찮으시대?"

"...황태자 전하 말씀이십니까?"

"아니! 정한이 말고, 그 전 약혼자. 그 귀족 아가씨 분 말야."

문준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도련님의 전 약혼자라고요?"

대화의 흐름이 대단히 꺼림칙하다. 조슈아는 스멀스멀 끼쳐오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말했다.

"어, 내 원래 약혼자인 아가씨."

"도련님은 약혼을 하셨던 적이 없는데요."

그럴 리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조슈아 본인의 설정이었으니 헷갈렸을 리도 없다. 소설 속 조슈아에겐 분명 약혼녀가 있었고, 조슈아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원체 누구에게나 다정한 태도 때문에 약혼녀는 그들 사이가 애정 없는 귀족 간의 의례적 관계라고만 생각했고. 그래서 윤정한과 엮이기 시작하며 그와 사랑에 빠졌고, 그리하여 조슈아는 가슴이 미어졌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의 행복한 앞날을 기원해주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혼란에 빠진 조슈아에게, 가만히 듣고 있던 우지가 쐐기를 박았다.

"저도 조슈아님의 약혼 얘기는 이전에 따로 들었던 바가 없습니다. 공작가 쯤 되는데 혼약을 맺었다면 알려지지 않았을 리도 없고요. 진짜 몸 안 좋으신 거 아닙니까?"

머리가 핑핑 돈다. 저게 정말이라면, 조슈아에게 약혼녀가 없었다면, 이 소설은 어디서부터 꼬여 있는 거지? 어쩌면 처음부터 여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인 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현실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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