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5)
로판AU
다시 황궁에 도착하였을 즈음엔 늦은 오후였다. 아직까지도 무료한 표정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용인은 몇 시간 만에 되돌아온 조슈아에게 의아하다는 시선을 던졌으나, 이번에도 별 말 없이 그를 들여보내 주었다. 아까와 똑같은 방향으로 그를 안내하는 시종에게 조슈아가 물었다.
"정한이는 아직도 서재에 있어?"
"네, 일이 많으니 방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아, 그럼 나도 밖에서 기다려야 할까?"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부승관이 두고 간 서류의 양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만일 오래 기다려야 할 상황이라면 그냥 내일 찾아오는 게 나으리라. 그러나 시종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조슈아 님은 언제든 맞이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로 허가를 구할 필요도 없다 하셨고요."
"...그렇구나."
시종이 은근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게 애써 보지 않으려 해도 선연했다. 세간에서 어떤 소리가 돌고 있을지는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그러했듯, 신이 맺어 준 운명이라느니, 황태자가 홀딱 반한 첫사랑이라는 둥, 온갖 낭만적 포장이 이루어지고 있겠지. 황태자의 미모를 남몰래 흠모하던 뭇 영애들이 충격으로 대거 몸져누웠다지만, 황태자가 그 약혼자를 바라보는 눈빛을 한 번이라도 목도한다면 다들 허황된 마음을 포기한 채 돌아설 수 밖엔 없다고. 그 정도로 황태자는 유난스러울 만치 사랑에 푹 빠져 황족으로서는 전례 없을 정도로 식을 서두르고 있다고. 정작 그 낭만의 당사자는 승관이가 안쓰러우니 길게 시간 잡아먹지 말고 반지 맞추러 갈 날짜만 얼른 잡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건만.
갑자기 자신이 등장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긴 하여, 조슈아는 노크 없이 벌컥 문을 열고 성큼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윤정한이 보이지 않았다. 책상에도, 티 테이블에도 앉아있지 않았다. 방 안에는 없는 듯한데, 어디 나간 것이라면 시종이 조슈아를 이곳으로 안내했을 리가 없다. 기묘한 상황이었다.
"......윤정한?"
안 보이는 곳에 숨어있기라도 한가 싶어 조슈아는 주저하며 정한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 대신 멀리서 누군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발코니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소리였다. 조슈아는 티 테이블을 지나쳐, 유리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발코니는 지상으로부터 애매하게 사람 키 정도 높이에 살짝 떠 있었으며, 바로 앞은 곱게 정돈된 관목과 화초가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 너머로는 넓은 연무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 몇이 신나게 공을 차며 먼지 나게 내달리는 중이었다. 김민규, 이지훈, 최승철, 그리고 윤정한.
나머지 셋은 어쩌다 저기 모여 있게 된 것인지 몰라도, 윤정한이 서재에서 그 모습을 목격하고는 발코니 난간을 넘어 몰래 빠져나갔으리란 정황은 뻔했다. 조슈아는 난간에 기대어 한동안 그들을 구경했다. 그는 구기 경기에 참여하는 걸 저렇게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멤버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제게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 여기저기 오가던 공이 어쩌다 민규의 머리에 빗맞고는 발코니 쪽으로 날아와 땅에 떨어졌다. 아쉬워하며 공의 궤적을 눈으로 좇던 윤정한의 시야가 조슈아에게 꽂혔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닿기엔 다소 먼 거리였지만, 입 모양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슈아?'라고 혼잣말을 읊조리는 것을.
곧바로 윤정한은 발코니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는 난간 바로 밑에 멈추어 서 조슈아를 올려다보는 구도가, 묘하게 고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터무니없는 연상에 조슈아가 픽 웃음을 흘렸다. 이럴 때마다 진짜 '로판' 속 같긴 하네.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윤정한이 물었다.
"언제 왔어?"
"방금."
"마탑에서 바로 온 거야?"
"응."
"슈아도 같이 족구 하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웃으며 그렇게 묻는다. 그냥, 왜 다시 왔냐고 곧이곧대로 물어보면 되는데. 윤정한은 때때로 진짜 묻고 싶은 말 대신 애매하게 비껴가는 질문을 툭툭 던지고는 했다. 그때마다 장난처럼 맞장구를 쳐 줄지, 아니면 직구로 받아칠지는 조슈아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조슈아는 후자를 택했다.
"아니, 너 보려고."
"그래? 실컷 봐."
그러더니 아예 꽃받침을 하고는 눈을 과장되게 깜박거린다. 뒤에서 쿱스가 공 안 주워오고 뭐하냐고 소리를 지르건 말건 모르쇠로 일관하며. 윤정한이 실없는 장난을 칠 때마다 늘 그랬듯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그가 넌지시 물었다.
"들어가서 차 마실래?"
"정한아, 나 너랑 아침에도 차 마셨고, 마탑 가서 또 마셨어. 세 번은 좀."
"그럼 같이 저녁 먹자."
"지금? 나야 괜찮긴 한데......."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물론 마탑에 다녀오느라 본의 아니게 점심을 건너뛰어 버린 조슈아에게는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정한은 아닐 텐데. 하지만 윤정한은 극구 주장했다.
"그럼 먹으러 가자. 나도 족구 했더니 배고파."
윤정한이 다시 발코니로 올라오려는 듯 팔을 뻗어 난간을 움켜쥐었다. 또다시 쿱스가 외쳤다.
"야! 어디 가는데!"
때마침 조슈아의 뒤, 방 안쪽으로부터 서재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그를 향해 걸어오는 부승관이 보였다.
"어, 왜 거기 계세요? 황태자 님은 어디....... 하."
부승관은 발코니 바깥의 윤정한을 보자마자 모든 상황을 간파해내고는 우뚝 멈추어 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창문이 하나도 없는 5층 방으로 집무실을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황태자 궁은 3층까지밖에 없는데?"
"궁을 새로 신축해서라도 꼭! 추진하겠습니다."
윤정한은 난간을 단단히 쥔 채 땅을 딛고 가볍게 뛰어올라 발코니의 바닥을 디뎠다. 예고 없이 같은 높이로 가까워진 얼굴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자, 스스럼없이 훌쩍 긴 다리로 난간을 넘어 바로 앞에 마주 선다. 시선은 조슈아를 바라보면서, 승관에게 말한다.
"마침 잘됐다. 애들 족구 하는데, 나 빠질 테니까 승관이가 대신 낄래?"
부승관은 그제야 연무장에 모여 있는 세 사람을 인지하는 듯했다. 그가 연무장과 윤정한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그럼 전하 감시는 누가 하라고요. 저거 오늘까지 끝내야 한다니까요?"
"슈아가 할 거야."
윤정한이 뻔뻔하게 조슈아를 가리켰다. 윤정한이 이렇게 사기꾼 행세를 할 때마다, 어지간하면 조슈아는 장단을 맞추어 주곤 했지만, 그래도 정한아, 할 일은 끝내야지.
"너 나랑 저녁 먹는다며."
조슈아가 무구한 표정으로 사실을 폭로하자마자 부승관이 이를 갈며 윤정한을 노려보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진짜 할게! 밥 먹으면서 봐도 되잖아! 진짜!"
몇 번이나 힘 주어 말하는 윤정한은 불신의 눈빛으로, 난간 밑에 굴러다니는 공은 갈망하는 눈빛으로 번갈아 바라보던 부승관이 끝내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옆에서 독촉 좀 해 주실래요...?"
그래, 상황을 보아하니 온종일 고생한 게 훤히 보이는데, 잠시 족구라도 하게 두어야지.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가 감시할게."
"감사합니다!"
부승관이 기다렸다는 듯 난간을 짚고 폴짝 뛰어내렸다.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승관아 빨리 와!'하며 손을 흔드는 김민규를 향해 공을 뻥 차고, 뒤도 안 돌아보고 연무장을 향해 내달린다.
"그럼 우리는 밥 먹으러 갈까?"
문을 향해 걸어가는 윤정한에게 조슈아가 대답했다.
"여기로 가져다 달라고 하자."
"여기서 먹자고?"
"넌 먹으면서 일 해야지. 아니면 저 서류들까지 다 들고 가게?"
윤정한이 뒤통수가 얼얼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조슈아는 그저 '널 약 올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승관이한테 부탁받은 바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맑은 미소로 화답했다. 윤정한은 서재 문을 열고 바깥을 향해 외쳤다.
"여기로 슈아랑 내 저녁 식사 좀 가져다줄래? 어, 고마워~"
그리고 되돌아와 책상에 풀썩 앉는다. 윤정한이 애꿎은 서류 더미를 괜스레 들쑤시다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부탁 때문에 온 거야?"
"부탁은 아니고.... 네가 같이 반지 맞추러 가자며. 언제 갈 건지 물어보려고 왔어."
윤정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갈까? 아, 지금 가기엔 좀 아까운데. 내일은 어때?"
"내일? ...될 거 같긴 해."
조슈아의 입장에선 결혼 준비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었다. 윤정한이 놀리듯 말했다.
"공작가의 후계자는 생각보다 한가한가 봐?"
"누구 덕분에 이젠 후계자가 아니게 돼서."
실제로 원래 '조슈아'가 무슨 일을 했는지, 바빴는지 아닌지는 조슈아도 몰랐다. 그래도 빙의 첫날 황궁 무도회에 가야 한다며 닦달한 게 전부일 뿐, 이후 집안에서 조슈아에게 시킨 일이라곤 일절 없으니, 아마 내일도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을 터이다. 조슈아는 숫제 서류 한 장으로 종이비행기를 접기 시작 윤정한을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 안에 일 다 끝내면, 내일 같이 가자."
윤정한이 접던 서류를 즉각 다시 펼치며 투정을 부렸다.
"네가 부승관이야? 아니, 승관이보다 더 한 거 같아."
"미룬 건 너잖아."
입을 삐죽 내밀며, 마침내 윤정한이 업무에 착수했다. 서류를 쌓인 순서대로 훑어보고 도장을 꽝꽝 찍는다.
"빠른데? 다 읽고는 있는 거야?"
"당연하지~ 승관이가 다 읽었어."
그러면 그렇지. 도장을 기계처럼 찍어대며 윤정한이 변명했다.
"황태자가 무슨 전문가도 아니고. 어차피 나보다 이거 올린 애들이 더 잘 알아. 진짜 말도 안 되는 건 이미 승관이가 반려했을 테니, 나는 주관 없이 허가나 내려 주는 게 모두에게 이득이라니까?"
"뭐... 그건 그렇다 치는데, 그럼 이렇게 금방 할 걸 뭘 그렇게 미뤘어?"
"슈아야, 나도 다 계획이 있다니까?"
윤정한이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빨리 처리해봤자 승관이가 또 '전하 제대로 안 보셨죠? 어제 뒤뜰 조경 관련해서 올라왔던 안건 내용 뭐였는지 말해보세요. 이거 봐, 또 그냥 결제봇 마냥 대충 도장만 찍었지? 아직 기한 남았으니까 다시 제대로 읽어보시라고요!' 한다니까? 자세히 읽든 대충 읽든 어차피 통과시킬 건 똑같은데. 그리고, 아예 안 읽는 것도 아니야!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기억하고 대답해. 근데 최대한 미루다 기한 딱 맞춰서 허가 내리면, 시간 없으니까 다시 읽어오라고 못 해."
그렇게 말하며 윤정한은 빙글빙글 웃었다.
"슈아 너도 두고 봐. 너도 부케 색 조합은 어떻게 할 거냐, 조명은 어떻게 할 거냐, 하면서 이거 정해라 저거 정해라 시달리기 시작하면 나랑 똑같이 행동할 걸?"
"그래도 정한이 네가 정하는 것보단 낫겠지."
식장 꾸미는 걸 윤정한에게 맡겼다가는 테이블마다 영희와 철수 컵이 놓여있게 될지도 모른다. 윤정한이 장난스레 항변했다.
"와, 내 결혼식 로망은 싹 무시하게?"
그런 게 있었다고? 호기심이 솟구쳤다.
"어떤 건데? 들어보고 괜찮으면 반영해 줄게."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부케로 뺨 맞기 하는 거?"
"오, 보고 싶긴 한데, 내 결혼식에선 절대 안 돼."
"그럼 나중에 쿱스 결혼할 때 시켜야겠다."
둘은 마주 본 채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윤정한과 이렇게 자연스레 둘의 결혼을 논할 수 있다는 게 문득 신기했다. 조슈아야 이곳이 자신의 현실이 아니라는 자각이 항상 기저에 깔려 있으니 크게 상관하지 않을 수 있었으나, 윤정한에게는 남은 삶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빅 이벤트인데 이렇게까지 가벼운 태도일 수가 있나? 조슈아는 잠시 말을 고르다 이렇게 물었다.
"정한아, 그런데 넌 나랑 결혼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윤정한은 김 빠질 정도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난 좋은데. 왜, 슈아는 별로야?"
"장난치지 말고."
"왜 장난이라 생각하는데?"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 너."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일부러 단정적인 말을 내뱉었으면서도, 사실 조슈아는 언제나 헷갈리곤 했다. 윤정한은, 언제고 내가 먼저 널 좋아한다 말만 하면 환히 웃으며 기쁘게 받아줄 것 같다가도, 다른 멤버들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종류의 감정일 뿐이었다며 곤혹스러워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건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일 거니까. 거절 당했을 때의 내 실망보다도, 거절할 때의 네 죄책감과 난처함이 싫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었다. 그래, 꼭 지금 이 표정같이.
"...너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분하지만 기분은 저조해졌다. 소설 속 윤정한은 현실의 윤정한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꼴이나 다름 없어서, 현실의 그에게 같은 물음을 던진다 한들 대답이 다르진 않으리란 예감이 든 탓이다. 윤정한이 이어 말했다.
"근데 원래도 좋아하는 사람이랑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 완전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공작가 후계자인 조슈아라면 오히려 좋은 거 아냐? 싶었지. 슈아는 안 그랬어?"
어느 쪽에 대한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정략결혼이 판치는 귀족가의 자제로서 피차 맘대로 결혼할 수 있다는 낭만 따위 없던 건 마찬가지 아니냐는 질문인지, 아니면 윤정한과의 결혼은 여러 선택지 중 오히려 좋은 편에 속한다고 생각했었냐는 질문인지. 그래서 조슈아는 대답 대신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결혼을 서두를 수가 있어? 이미 아는 사람이라 해도, 결혼 상대로는 다르잖아. 넌 안 불안해?"
"뭐가 불안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또 뻔뻔하게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진작부터 은은하게 끓어오르고 있던 분을 끝까지 참아내지 못하고 조슈아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너 나랑 키스할 수 있어?"
윤정한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봐, 놀랐지?
"아무리 쇼윈도로 살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할 거 아냐. 이러다가 결혼식 중간에 다 보는 앞에서 갑자기 못하겠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어이없을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강한 힘이 손목을 잡아끌었다. 기우뚱, 몸이 휘청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쪽 손이 조슈아의 뒷목을 감싸고 제게로 끌어내린다. 꽝꽝거리는 도장 소리는 멎은 지 오래였다. 당기는 방향대로 무력하게 추락하며, 조슈아는 윤정한의 눈이 스르르 감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는다. 키스라 하기에는, 글쎄, 정말로 수많은 하객 앞 신성한 의식 가운데에서 주고받는 경건한 맹세나 다름없이 담백한 입맞춤이었지만, 어쩐지 그게 더 마음을 울려 조슈아도 꾹 두 눈을 감았다. 예고도 없이 잡아끌었으면서 아프지 않게 스르르 힘을 빼 버리는 손이, 내 살을 간지럽히는 듯한 긴 속눈썹의 떨림이, 그저 닿아있기만 한 입술 틈으로 새어 나오는 미약한 숨결이, 전부 내가 사랑하는 너라서,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너라서─
조슈아는 제 생각에 지레 놀라 흠칫 몸을 물렸다. 이래서 허구의 결혼에 불과할지라도 내키지 않았던 거다. 기대도 실망도, 너에게 같은 무게의 마음을 갈구하는 행동은 어느 하나 하고 싶지 않았다. 윤정한은 순순히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별 동요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연히 할 수 있지. 이제 됐어? 그럼 안 불안해?"
조슈아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이 정도는 누구랑도 할 수 있잖아."
뽀뽀 정도야 멤버들 사이에서는 심심치 않게 행해지는 스킨십이었다. 물론 그게 입술 대 입술인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는 일도 아니었다. 자신과 윤정한만 해도....... 윤정한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우리 슈아 은근히 과거가 화려했나 봐~?"
"그래서 싫어?"
"아니, 난 약혼자의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훌륭한 신랑감이니까."
그러면서 또 웃는다. 분명 이 연극에서 더 상처를 받는 쪽은 조슈아 자신이리라 생각했는데, 문득 서명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사람은 이곳에선 마법처럼 존재가 지워진다고 했던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고, 남기고 간 기록과 잔해처럼 남은 위화감으로 간신히 우리 세계에 이방인 하나가 왔다 갔었구나, 를 겨우 인지할 수 있는 것이라 했던가. 조슈아가 돌아갈 곳은 확고하였으니, 그게 이제 와서 아쉽고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난데없이 약혼자를 잃고 혼자 남겨질 윤정한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신탁이 거짓은 아닐 테니 무사히 황위에야 오르겠지만,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미지의 약혼자에 대한 기록과 흔적만 온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면 몹시 혼란스러울 듯한데. 하필 조슈아는 꽤나 유명세를 얻어버려서, 지금 윤정한의 책상 한 귀퉁이에 올려져 있는 오늘 자 석간신문만 해도 황태자가 세기의 사랑을 하고 있다느니 어쩌니, 신탁의 주인공과 첫눈에 반해 결혼을 서두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화려하게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돌아간 후에 저런 기록이 남은 걸 보고 정말 우리가 절절한 사랑이라도 했던 줄 알면 어떡해. 누군지도 기억 못하는 사람을 아쉬워하게 되면 어떡해. 윤정한도 자신의 사정에 맞추어 득 될 게 있으니 흔쾌히 이 결혼을 추진하는 것이겠지만, 돌아가기 위하여 윤정한을 이용하고 있는 노릇이라 생각하니 입 안이 썼다. 적어도 돌아간 이후의 여파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최소한의 도리였다. 황태자의 결혼식이니 마냥 제 뜻대로는 안 될 가능성이 높지만, 어찌 되었건 가능한 빨리, 가능한 소박한 규모로 조용하게 목표를 달성하는 것. 그게 조슈아가 해야 할 일이다. 조슈아는 살며시 윤정한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정한아, 우리 최대한 빨리 결혼하자."
당황스럽게도, 정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조슈지, 너 며칠 전부터 좀 이상해."
아,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으니 수상하게 여길 만도 했다. 조슈아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려 애썼다.
"생각해보니까, 공작 때려치고 황후 하는 게 더 좋은 인생 같아."
"슈아야."
큰일이었다. 저건 조금도 속아 넘어가지 않은 말투인데.
"너 몰랐어? 나 원래 황후가 꿈이었어."
되도 않는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윤정한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너 진짜, 전이랑은 달라. 전에 봤던 너랑 같은 사람인데, 뭔가 많이 달라졌는데. 원래 너였으면 그렇게 말 안 했어."
윤정한은 심각한 시선으로 조슈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궁지에 몰리니 오히려 충동이 솟구쳤다. 그냥 확 말해버릴까? 전부 털어놓진 못하더라도, 나는 사실 다른 세상의 조슈아고, 너와 결혼하면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정도는. 윤정한은 흥미롭게 들어줄 것 같은데. 조슈아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정한아, 나 사실......."
그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지진은 아니었다. 실제로 흔들린 게 아니라, 세상의 근간이 휘청이고 있다는 관념적인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는 표현에 더 가까운 현상이었다. 세상 만물에, 한낱 자그마한 조약돌 하나까지도 영혼이 존재한다면, 물리적 실체는 가만히 있을지언정 그 영혼들은 빠짐없이 전부 격렬하게 요동치는 느낌.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생경하며, 동시에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오는 감각이었다. 단숨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명호가 경고했던 그 현상이구나. 세상이 불안정해진다는. 뒤늦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방금, 디에잇이 당부한 바를 까맣게 잊고 하마터면 윤정한에게 말해선 안 되는 사실을 흘릴 뻔했기에. 이 기묘한 진동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처럼 여겨졌다. 반사적으로 조슈아의 손을 꼭 붙든 윤정한의 반응을 보니, 조슈아 혼자 경험한 현상은 아닌 듯했다. 흔들림이 멈춘 후, 조슈아가 물었다.
"방금... 너도 느꼈지?"
윤정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서재 문 앞을 지키던 근위병 두 명이었다.
"무례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무사하신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
"어, 알지. 근데 나도, 슈아도 괜찮아."
아무래도 단 둘만 느낀 것마저 아닌 모양이다. 근위병들도 이상을 감지하였고, 그렇다면 아마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공통으로 느낄 수 있었던 현상일까. 한 세계의 안정이 자신의 처신에 달려 있다니. 갑자기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나마 이런 상황이 한 두 번은 아니었던지, 침착하게 대꾸하는 윤정한의 모습이 조금 의지가 되었다.
"대신전에 사람을 보낼까요?"
"살짝 흔들린 게 전부잖아. 별일 없으니까, 내일 호출할게. 거기도 지금 정신 없을 텐데."
"알겠습니다."
"승관이나 불러줘. 지금도 연무장에 있으려나? 아무튼 대충 대본 짜면서 본궁으로 오라고. 국민 여러분 안심하셔도 됩니다! 라는 발표는 바로 해야 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근위병들은 경례를 올린 후 서재를 빠져나갔다. 윤정한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미안해, 저녁은 혼자 먹어야겠다, 슈아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신경 쓰지 마."
조슈아에게도 방금 겪은 일을 소화시키고 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도리어 기꺼웠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 조슈아가 물었다.
"근데 네 저녁은 어떡하게?"
"나는 별로 배 안 고파. 이따 본궁 가서 간단하게 먹으면 돼."
바보. 아까는 족구 해서 배고프다고 했으면서. 하지만 조슈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윤정한은 서재를 나서면서도 끝까지 조슈아를 돌아보며 강조했다.
"편하게 먹고, 있을 만큼 있다가 가. 아무나 붙잡고 마차 준비시켜달라고 하면 바로 해 줄 테니까."
"알겠으니까 얼른 가."
마침내 윤정한이 나가고, 호화스러운 식사 접시를 들고 사용인들이 줄줄이 들어올 때까지 조슈아는 혼자 티테이블에 엎드려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니 앞길이 평탄하리라고 생각했건만, 자꾸 수많은 것들이 마음을 산란케 하였다. 이런 판타지 같은 상황을 꿈꾸는 사람은 많고 많았을 텐데, 어쩌다 조슈아 자신이 여기서 헤매고 있게 된 걸까. 식사는 맛있었고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은 편안했지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까지 그런 생각이 내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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