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13)

로판AU

변명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작정하고 '신'에게 엿을 먹이려 저지른 짓은 아니었다. 그냥 조금 심란해서 충동적으로 부린 객기가, 윤정한의 예상을 벗어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뿐. 실상 처음부터 제대로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면 섣불리 피해를 주려 하진 않았을 테니, 솔직히 말해 '신'의 자업자득이었다.

윤정한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정상적으로 결말을 보고 본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하여. 그래서 최대한 빨리 식을 올리고 싶다고 강경하게 주장했으나, 이런저런 절차와 외교적 관계를 전부 고려하였을 때 못 해도 일 년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여기에 꼼짝없이 일 년 씩이나 붙들려 있어야 한다니, 윤정한도 그 순간만큼은 눈앞이 아찔했다. 절대 안 된다고, 어떻게든 더 서두르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조슈아 손 붙잡고 나가서 아무 신전에서나 식 올려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연로한 관리 하나가 무척이나 쩔쩔매며 말문을 떼었다.

"최대한 빠른 성혼을 유일한 목적으로 두신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오나....... 부디 이것이 역심이나 망령된 의도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님을 전하께서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대체 뭐길래 그래."

"...전하께선 아직 황태자 즉위식을 치르지 않으셨으니, 엄격히 따지면 현재 황자의 지위에 불과하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황자의 예에 따라 식을 올린다면, 우호국 사절을 반드시 자리에 모셔야 할 의무가 없으니 준비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습니다."

사방에서 헉 하는 경악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다들 윤정한의 눈치를 슬슬 보았다. 정작 윤정한은 진심으로 의아할 뿐이었다. 내가 설정을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

"내가, 황태자가 아니야?"

순수한 의아함에서 빚어진 질문이 그들에게는 살벌한 협박으로 들린 모양인지, 가뜩이나 불안에 차 있던 회의장 내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를 이끌어가실 유일무이한 재목이십니다!"

"황위를 이으실 정통한 후계자는 오로지 전하 뿐이십니다!"

하나같이 황급히 입을 열어 윤정한의 정통성을 열성적으로 주장하기 바쁘니, 무어라 더 캐묻기도 뭣했다. 결국 그 자리는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 파하고, 윤정한은 만만한 부승관을 찾아가 물었다.

"승관아, 내가 황태자가 아니야?"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세요?"

부승관은 고개도 들지 않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나 즉위식 안 올렸잖아. 그래서 황자의 법도에 따른 식을 올릴 수 있다던데."

그제야 부승관은 보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동그란 눈으로 윤정한을 바라보았다.

"아, 미친. 그런 방법이 있긴 했지......."

"가능한 방법이야?"

"가능은 하죠. 즉위식 안 올린 건 맞으니까....... 근데 제정신이라면 안 할 방법이죠. 이미 암묵적으로 황태자 대우 받으신 지가 벌써 몇 년인데, 이제 와서 자기 입으로 난 황태자 아니다~ 라고 공표할 바보가 어딨어요."

"여기 있는데? 그렇게 하자. 황자 식으로 결혼하면 얼마나 빨리 할 수 있어?"

"전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미치셨나이까?"

"말투만 공손하다고 불경죄가 아닌 건 아니지, 승관아?"

"제정신이신 거면 더 큰 일인데요. 어떻게 제정신으로 저런 발상이 나오지? 나라 말아먹는 게 꿈이셨어요? 아니면 반란군 육성이 취미신가?"

"아니, 나도 잘 몰랐는데 내 꿈이자 소원은 슈아랑 하루빨리 결혼하는 거더라고. 그러니까, 말 해 봐. 얼마나 빠르게 가능해?"

"...이것저것 타협해서 최대한 빨리 진행하면 앞으로 보름요."

"우와, 진짜 빠르다. 그렇게 하자."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는 윤정한의 대답에 부승관이 빽 소리를 질렀다.

"잠시만요! 반발이 엄청날 거라고요. 전하의 입지가 얼마나 흔들리실지 생각은 해 보셨어요?"

솔직히 말해, 어차피 떠날 윤정한한테 황태자로서의 입지고 자시고 별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부승관은 퍽 심각해 보였다.

"아직도 방계 쪽에서는 그 신탁 가지고 전하께 자격이 없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치들이 암암리에 있잖아요. 날 잡아서 한 번 또 싹 쓸어도 모자랄 판에 왜 굳이 물어뜯을 거리를 주시냐고요!"

"무슨 신탁?"

"전하께선 황제가 못 되신다는 그 신탁이요! 태어나셨을 때! 그래 놓고 어차피 후사도 못 낳았으면서, 그 황비가 짜고 친 사기극이 지금까지도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런 비화가 있었구나. 윤정한은 내심 감탄했다. 부승관은 사기 신탁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용한 예언이었다. 본래 여기 살던 윤정한의 혼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윤정한은 결혼과 동시에 저 살던 세계로 훌훌 떠나버릴 테니 '윤정한'이 황제가 될 일은 영영 없으리라.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윤정한은 그럴듯한 사기에 착수했다.

"에이, 승관아, 어차피 조슈아랑 결혼하면 황제가 된다면서. 그럼 당장 내가 황자니 황태자이니 그게 중요해? 일단 빨리 결혼해야 황위가 확정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내가 지금 황태자면 뭐해. 일이 꼬여서 누가 갑자기 슈아랑 결혼하게 되면, 그 사람이 미래의 황제 되는 건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는지, 부승관이 잠시 침묵하다 중얼거렸다.

"...일리가 있네요. 아무리 그래도, 어찌 됐건 반발이 없을 수는 없는데, 그걸 최소화 하려면. 결혼 하자마자 바로 즉위식으로 아예 못을 박아버리는 게 낫겠네요. 그 준비까지 같이 진행해야 할 걸 고려한다면......."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머리를 팽팽 굴리던 부승관이 문득 시선을 들어 윤정한을 바라보았다.

"삼 주면 될 거 같아요. 전하 결혼식."

"그럼 그렇게 진행하자."

"잠깐, 조슈아 님과 합의는 되신 거죠?"

윤정한은 빙긋 웃어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 말하러 가야지. 일단 그대로 진행은 해~"

뻔뻔할 만큼 느긋한 보폭으로 서재를 나서는 윤정한의 뒷모습을 부승관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멀거니 바라보았다.

"네, 전하. 저도 빠를수록 좋아요. 너무 기뻐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조슈아가 여전히 낯설었다. 그러니까, 조슈아가 생글거리는 거 자체는 매일 보던 표정이라 익숙하지만, 저와의 결혼을 논하면서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점이 윤정한은 낯설었다. 저를 마주 좋아하는 조슈아를 상상해 본 적이야 있었지만, 그마저도 언제나 윤정한이 조금 더 절박한 쪽이고 조슈아는 난처함과 연민을 기반으로 적선처럼 다정을 행하는 형태로 그려지곤 했으니까. 무도회에서는 혼자 절절한 짝사랑을 해 왔던 사람처럼 한껏 아련하고 처연하게 굴던 조슈아는, 윤정한이 갑작스러운 신탁에도 아무런 반기를 들지 않고 도리어 기다렸다는 듯 강경하게 일을 추진하려 들자 환희를 숨김 없이 내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눈에 빤히 보이는 형태로 열렬하게 자신을 좋아하는 조슈아는 어쩔 수 없이 어색했고, 이 상황이 허구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으며, 그로 인해 윤정한을 조금은 비참하게 만들었다.

"너는 내가 왜 좋아?"

맥락 없는 질문에도 조슈아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마냥 해맑게 대답했다.

"처음 만났던 그 어린 시절부터, 전하께선 친절하셨고, 똑똑하셨고, 재미있으셨으니까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농담처럼 덧붙인다.

"놀랄 만큼 예쁜 아이시기도 했고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허허 웃기만 하자, 조슈아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어릴 때 그리신 초상화가 아직 황후 궁에 남아있다죠? 그거라도 남겨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래? 있는 줄도 몰랐네."

"그새 잊으셨어요? 재작년 즈음인가, 제가 그 초상화는 남들 다 보는 데 전시해야 한다고 했더니 질색을 하셨잖아요. 어린 시절에 하도 모델 서는 걸 싫어하셔서 겨우 한 점 남아 있는 게 전부인데, 그 하나를 내보이기도 싫어하셔서."

그것을 화두로 조슈아는 조잘조잘 유년의 추억을 회고하기 시작했다. 유학을 떠나기 전, 윤정한과 에스쿱스와 가까운 친척처럼 어울려 놀던 시절의 추억을. 즐거운 기억으로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조슈아는 종종 "전하께서도 기억하세요?" 혹은 "그때 정말 재미있었죠?" 따위의 말로 윤정한의 호응을 유도했다. 그러나 조슈아와 궁정에서 노닐던 추억은 없는 인생을 살다 온 윤정한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초상화 모델을 서다 말고 지루하다고 몰래 도망쳤던 일화, 황궁 안의 호수에 작은 배를 띄워 노를 저어 놀았던 때, 파티에서 음료수로 착각하여 술을 홀짝인 바람에 앓아누웠던 이야기. 조슈아가 그런 기억을 읊을 때마다, 윤정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추억은 완전히 다른 것들이었다. 연습실에서 고달픔과 불안감에 눈물이 새어 나올 때마다 곁을 지켜주었던 든든함과 동질감, 긴장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꼭 잡아주던 온기, 땀 범벅인 채 힘겹게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환하게 눈을 반짝이던 무대 위의 모습. 애써 덮어 두었던 괴리감이 부피를 키워나갔다. 네가 좋아하는 윤정한은 내가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조슈아는 네가 아니다.

다행히도 그 후로 한동안 조슈아를 볼 기회가 없었다. 결혼식과 즉위식 준비를 동시에 하려니 가뜩이나 바쁜데, 윤정한은 제 업무와 이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시피 했으니 특히 더 그러했다. 그리고 무릇 윗선이 속 터지게 일 처리를 하면 아랫사람은 그 배로 고생을 하는 법이라, 윤정한의 주변인들도 조슈아까지 살뜰히 챙길 정신은 딱히 없었던 모양이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부승관이 당황이 역력한 표정으로 조슈아 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말을 고했으니.

"슈아가? 왜? 반지 고르는 날이 오늘이었던가? 근데 그거 세공사를 그냥 공작저로 보내기로 한 거 아니었어? 여기서 같이 골라?"

"아니요, 반지 세공은 이틀 전에 맡겼습니다. 그... 식전까지 황궁에서 머무를 수 없겠냐고 그러시던데요."

"뭐라고?"

"짐마차도 달고 오셨습니다."

"가출이야?"

"정황상 그래 보이시긴 하는데......."

별 일 없이 조용히 공작저에 머무르기만 한다고 방심할 게 아니었다. 얼핏 얌전한 듯 보여도, 수틀리면 제대로 미친 짓을 저지르는 게 조슈아인데. 윤정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거 당장 급한 일 아니지? 슈아부터 만나야겠다. 밖에 있어?"

웬만하면 일이나 하라고 독촉했을 부승관도 어지간히 당혹스러웠던지, 순순히 대답했다.

"여기로 모셔 오겠습니다."

몇 분 후 서재로 들어온 조슈아는, 딱히 윤정한에게 악감정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하기사 가출의 원인이 윤정한에게 있었으면 황궁으로 찾아오진 않았겠지만, 조슈아는 상식적이고 예측 가능한 형태로 반항과 일탈을 하는 부류가 아니었으니 혹시나 했다. 다만 그 눈가에는 미처 다 숨기지 못한 짜증과 피로가 은은하게 어려 있었다.

"갑자기 시간을 뺏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무슨 일이길래 그래."

윤정한의 목소리에서 옅게 배어 나오는 염려에 조슈아가 살풋 웃었다. 일순 죄책감이 밀려왔다. 윤정한은 그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기나긴 짝사랑을 하는 입장으로서는 조슈아가 숨 쉬듯 베푸는 다정이 오히려 더한 절망과 괴로움을 불러일으킬 때가 잦았지만, 어느 때고 그것이 달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 이 조슈아도, 그만큼 윤정한을 좋아하기에 윤정한이 저를 걱정한다는 그 당연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리 다 드러나게 기뻐하는 것이다. 하지만 윤정한은 어찌 해도 본래의 조슈아와 이곳의 조슈아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동일한 사람으로 대할 수가 없었다. 너 역시 조슈아이기에 지극한 다정함을 줄 수는 있겠으나, 그건 영영 사랑에는 미치지 못 하리라.

"폐를 끼치게 되어 너무나 송구하지만, 혹시 식전까지 황궁에 머무르면 안 될까요?"

"당연히 괜찮지."

정말로 괜찮은지는 알지 못했으나, 이 드넓은 황궁에 예비 황태자비 하나 묵을 곳이 없진 않을 터이다. 윤정한은 무턱대고 수락의 말부터 뱉었다. 조슈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무슨 일 때문에 그래?"

조슈아의 웃음이 살짝 흐려졌다.

"음... 아버지랑 싸워서요. 홧김에."

이 나이에 부모와 싸워서 가출을 감행하는 조슈아라니, 신선하다. 어머니를 지극히 모시던 본래 조슈아에게 익숙해져 있던 윤정한으로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심각한 건 아니고?"

"네. 그냥, 한 집에 있으면 계속 마주칠 수 있으니까, 그게 싫어서 나왔어요."

"잘했어. 잠깐만 기다려, 승관이 불러올게."

조슈아는 유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승관은 문밖의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슈아 식전까지 황궁에 있겠다는데."

"그렇게 하기로 하셨어요? 그럼 별궁을 준비시키라고 하겠습니다."

별궁이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던 윤정한은 그냥 고개만 주억거렸다. 부승관은 잠시 주춤거리더니 끝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이시래요?"

"아버지랑 싸워서 가출했대."

"아... 뭐, 그럴 수 있죠. 원래도 사이 나쁘다는 소리가 많았잖아요."

부승관이 아무런 의문 없이 쉬이 납득하길래, 윤정한도 더한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곳의 조슈아는 그랬구나, 아버지란 인간이 얼마나 인성에 하자가 많으면 딴 사람도 아닌 슈아가 저렇게까지 할까, 그 정도 생각만 하고 말았을 뿐.

보다 상세한 속사정은 그로부터 또 일주일이 흐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신탁과 속전속결로 처리되고 있는 절차들 때문에 생각도 못 했는데, 원래 정식으로 약혼식과 청혼까지 했어야 하는 걸 대강 서류 상으로 한 척 처리만 해 두었다더라. 그렇다 해도 초상화로 기록을 남길 필요는 있다 하여, 급히 조슈아와 약속을 잡아 별궁 뒤편의 산책로에서 프러포즈 장면을 연출하기로 했었는데 시간이 되어도 슈아가 나오지를 않았다. 그간 바쁘다는 이유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아프다던가 별 일이 생겼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그만 깜박 잊은 건 아닐까 싶었다. 슈아가 별궁에 머무르기 시작한 이후, 공작가 후계자다운 능력으로 결혼식 준비에 지대한 도움을 주어 승관이가 일을 많이 덜었다고 기뻐하는 걸 보았다. 오히려 전하보다도 빠릿하니 낫다고 할 정도면 쉬운 일 한 두 가지만 맡긴 수준에 그치진 않았던 듯한데. 식 준비가 어찌나 복잡한지 윤정한은 줄줄이 달린 보좌관들이 하나하나 일러주지 않고서는 그날 무슨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조차 파악이 안 되는 실정이니, 암만 일 잘 한다는 조슈아라도 급하게 잡힌 초상화 일정 하나 쯤은 잊을 법 했다. 그럼 내가 데리러 가야겠다! 정작 조슈아가 몇 층에 머무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괜한 오기로 구태여 남에게 묻지 않고 느낌대로 걸음을 옮겼다. 약혼자가 입궁한 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그 거취조차 제대로 모르는 냉혈한으로 오해받긴 싫었다. 사용인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았더라면 조슈아에게 이미 선객이 찾아와 있음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계단을 반 층 쯤 올랐을 때부터 이미 웬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들을 수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계속 올랐더니, 조슈아의 목소리도 분간해낼 수 있었다. 윤정한은 두 남자가 언성을 높여가며 다투고 있는 방 앞에 가만히 서서, 섣불리 문을 두드리지도 못한 채 숨죽여 엿들었다.

"황실의 일원이 된다 한들 넌 내 아들이야! 가문에 다해야 할 의무는 여전해!"

"저를 아들로 여겨주신 적은 있으시고요? 후계자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비싼 값으로 팔아 먹을 소유물로만 생각하셨잖아요. 아버지의 이득을 위해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는."

조슈아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그가 그렇게나 서늘한 어투로 말하는 걸 윤정한은 난생처음 들어보았다.

"그게 네가 다해야 할 도리니까. 운 좋게 내 아들로 태어나 네가 누린 것들을 생각해! 그 모든 투자가 드디어 빛을 발할 시기인데, 이제 와서 황실에 갈취당할 것 같더냐?"

"...정작 저는 그런 것들을 원한 적도 없었지만, 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서든 모두 갚겠다고 말씀 드렸어요. 새로운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 드는 비용과 노력도, 전부 제가 책임지도록 할게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전하께 그 무엇도 요구하실 수 있는 권리가 없으시다고요."

난데없이 들려온 '전하' 소리에 윤정한은 눈을 깜박였다. 여기서 내 얘기가 왜 나와?

"하! 벌써부터 날 이렇게나 질시하는 네놈인데, 끽해야 준 만큼만 간신히 되돌아와도 감지덕지겠지. 그걸로 넌 네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지 않겠느냐. 허나, 투자의 목표는 결코 원금 회수 따위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나는 널 내어주는 대신 황실로부터 최대한 많은 걸 뜯어낼 것이다. 그게 신탁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공작가의 재산을 강탈해 간 황태자가 행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며, 공작가의 아들이라는 자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네가 결코 반대해서는 안 될 대의이다!"

아무래도 공작은 줄곧 이 결혼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세기의 결혼이 아무런 장애물도 마주치지 않았던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그러나 제일 큰 문제는, 조슈아는 이 상황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맥락 상 공작은 이 결혼을 구실로 황실에 무언가 요구하길 원하는데, 조슈아가 그걸 중간에서 계속 막고 있었던 듯했다. 윤정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내내 시달리다 못해 가출이라는 강수를 두면서도, 윤정한에게 털어놓고 상담할 생각조차 않고. 윤정한은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 공작이 무얼 요구하든 자신은 별 고민 없이 선뜻 내주었을 것이다. 이 세계에 소속감 자체가 없으니, 나라를 잘 꾸려나가야겠다는 신념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 무리한 요구이네 마네 하며 언성을 높일 일은 없었을 터이다. 그러니 조슈아만 무의미한 고생을 한 꼴이다. 자신을 위해서.

"나가세요. 그리고 이런 일로 또 찾아오시지 마세요. 아무리 직위로 찍어 누르셔도 통하지 않도록, 절대 들이지 말라고 별궁의 모든 사용인들에게 단단히 일러 둘 거예요. 전하를 찾아가실 생각은 더더욱 마시고요.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제 동의 없이 전하께 허튼 요구를 하시는 순간, 저는 무슨 수를 쓰든 이 결혼을 파기할 거예요. 도망치는 게 안 된다면 호수에 몸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요. 그럼 공작가의 명예에 참 도움이 되겠죠?"

단순 협박에 불과할 뿐, 조슈아는 공작 따위 때문에 스스로를 해할 일은 절대 없으리라. 조슈아는 그럴 성격이 아니고, 그래서는 안 된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작은 아비가 되어서는 그조차도 모르는 양, 불만스럽게 혀를 차더니 조소하며 내뱉었다.

"어리석은 놈."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음이 들렸다. 그제야 윤정한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뒷걸음질 쳤다. 방금 엿들은 대화를 온전히 소화해내기도 전이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자명했다. 조슈아는 윤정한이 이 상황을 알길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대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 윤정한은 황급히 계단을 올라 몸을 숨겼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공작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윤정한은 잠시 고민하다 공작이 별궁을 떠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을 즈음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그리고 내내 그 자리에서 기다렸던 것마냥,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느긋한 태도로 몸을 기대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조슈아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슈아야!"

드물게 냉랭하던 얼굴이 그 부름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밝아졌다. 배회하던 시선이 윤정한의 얼굴을 찾아낸 것은 그다음이었다.

"전하! 오래 기다리셨죠, 늦어서 죄송해요."

반쯤 뛰다시피 가까워져 오는 조슈아를 향해, 윤정한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했다.

"아니야. 물어봤더니 너 누구 만나고 있다고 해서, 여기서 놀고 있었어."

"아... 아버지께서 오늘 회의 때문에 입궁하신 김에 들르셨더라고요. 잘 지내는지 궁금하셨다고. 혹시 나가시는 길에 마주치진 않으셨나요?"

부자 사이에 오간 게 평범한 안부 따위가 아니란 걸 미리 엿듣지 않았더라면 아마 윤정한은 그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을 터이다. 그만큼 조슈아는 제 심란한 감정을 숨기는 데 능했다. 윤정한은 그게 안타깝고 미안했지만, 그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어, 방금 전에 나가시는 걸 보긴 봤는데, 뭔 생각을 그리 하는지 내가 여기 있는 줄 알지도 못하고 지나가시더라?"

제 아비와 윤정한이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불상사가 없었음을 확인받은 후에야 조슈아의 입꼬리가 스르르 풀어졌다.

"그랬나요. 아무튼 화공들을 너무 기다리게 했으니, 얼른 가요!"

결혼식을 겨우 일주일 남겨둔 시점, 윤정한은 과연 이 결혼이 누구에게 좋은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조슈지를 좋아하고 조슈아는 윤정한을 좋아하지만, 그들은 서로 동일인이 아니다. 다급한 결혼식 준비에 황궁 사람들은 과로를 거듭하고 있으며, 조슈아는 공작에게 시달리며 속이 문드러지고 있다. 정작 그가 그토록 아끼는 윤정한은, 조만간 이 세계에서 영영 떠나고 말 텐데. 그렇다면 윤정한은 제 사적인 목표를 위해 조슈아의 감정을 볼모 삼아 그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리 책 속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되뇌어도, 이게 옳은 길이라는 생각은 쉽사리 들지 않았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냐고 아무리 물어도, '신'은 절대 대답해 주는 법이 없었다. 실없는 농담으로 어물어물 화제를 돌리려 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쌩하니 도망가기 바빴다. 그리하여 윤정한은 홀로 끊임없이 고뇌했다. 수많은 서류를 읽고, 도장을 찍고, 형식적인 몇 가지 일정 때문에 조슈아와 손을 잡고 남들 앞에 서고, 그 연극 같은 연인 행세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슈아의 눈 밑에 드리운 그늘과 마른 뺨을 응시하고, 최근 마른 것 같다는 주위의 염려에 그저 결혼식을 대비하여 다이어트를 하는 것 뿐이라고 둘러대는 말을 들으면서. 계속, 계속 생각했다. 내가 너를 진짜 현실의 조슈아를 사랑하듯 사랑하는 일은 아마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네 괴로움을 덜어줄 방도는 없을까. 너를, 이 세상을 현실이라 여기지 않는 내가 취하기엔 지나치게 기만적이며 자기만족에 불과한 태도라 한들.

기나긴 고민 끝에 기적처럼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딱 맞추어 떠오르는 소설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윤정한은 도망쳤다. 새벽 내내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조금씩 어둠이 묽어져 가는 하늘을 초조하게 바라보다, 슬그머니 1층으로 내려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충동적인 도주였다. 황태자궁 뒤뜰의 나무를 타고 올라 담장을 넘기까지 경비 여럿을 마주쳤지만, 식을 앞두고 일찍 눈이 떠져 산책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이르자 다들 새신랑의 복잡미묘한 심경을 다 이해한다는 양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둘 중 하나가 사고를 쳐야만 한다면, 윤정한이 결혼을 회피하는 쪽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다. 조슈아는 자신처럼 쉽게 명령과 사기를 적절히 번갈아 가며 빠져나가지 못할 뿐더러, 도피에 성공한다 해도 크나큰 불명예에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물론 여파가 거세긴 하겠으나 황태자 씩이나 되어서 수습 못 할 일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결혼만 성사 되면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댔으니, 몇 주 쯤 미뤄져도 치명적이지는 않다. 제멋대로 추진한 일에 사랑으로 발목 잡혀 휘둘리기만 했던 조슈아가 조금 더 편해질 수 있도록. 최소한 제 아비로부터 협박을 당하는 일은 없도록 그거 하나라도 어떻게 해결하고 다시 결혼을 추진하겠다는 심산으로. 내가 사랑하는 네가 아니라 해도, 너와 닮은, 너를 본뜬 등장인물 하나조차 불행하게 내버려 둘 수 없는 마음이 윤정한의 사랑이라서.

윤정한은 헥헥거리며 자주 멈추어 주저앉으면서도, 뒤 돌아보지 않고 계속 황궁으로부터 멀어졌다. 마침내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황궁의 사용인들이 윤정한의 부재를 알고 난리가 날 때까지. 혼란 속에서 소식이 조슈아에게 닿아, 도무지 결혼식이 성사되지 못할 파국의 상황이 도래하기까지. 그리고, 예고 없이 세상이 무너졌다. 귀퉁이부터 시작하여, 윤정한을 향하여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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