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14)

로판AU

한계까지 체력을 끌어다 쓴 연습을 끝내고 '와... 죽겠다' 라는 생각을 한 적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정녕 본능의 차원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낱 인간은 세계가 통으로 무너지는 가운데에서 탈출할 방도가 일절 없으며, 그것은 곧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는 걸.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바스러지던 세계가 점차 빠르게 무너지며 깊은 균열이 그를 향해 우르르 몰려올 때, 윤정한은 최후를 예감하고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혼을 빼놓을 듯 몰아치던 진동이 멎었다. 제 심장 쿵쿵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게. 나 진짜 죽었나? 이렇게 허무하게, 가족도 친구들도 없이 홀로 동떨어진 낯선 세계에서?

그렇게 윤정한이 슬그머니 실눈을 떴을 때, 시야에 꽉꽉 들어차게 보인 것은 익숙한 '신'의 메시지였다.

'너 미쳤어?????????????'

글자들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파들거리더니 이리저리 방방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돌려가며 주위를 살피자, 세상은 윤정한을 중심으로 겨우 몇 발자국의 공간만을 남긴 채 무너지다 만 상태로 멈춰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에게는 시간을 멈추었다가 되돌릴 수도 있는 능력이 있었지. 윤정한은 내심 안도하며 되물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거야? 이번엔 누구한테 해선 안 될 말 한 것도 아닌데."

'네가 소원의 성취를 거부하고 도망갔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그게 어때서. 나만 아쉽고 말 일인데, 왜 갑자기 세상이 무너진 거야?"

'신'은 침묵했다. 윤정한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세상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전과 다름없이 대답을 회피하고 도망치지는 않으리라는 짐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신'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새기듯 천천히 글자를 띄웠다.

'내가 여태 데려온 빙의자들 중에서 네가 최악이야.'

한 번 말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았는지, 두 글자만 강조하여 세 번을 더 깜박여댄다.

'최 악'

글이 아니라 말로 하였더라면 분명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내뱉었으리라. 윤정한이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아, 역시 내가 처음이 아니야?"

여러 번 해 본 것 마냥 익숙하고 침착하게 윤정한을 대하는 '신'의 응대를 보며 -물론 상대가 윤정한이었던 탓에 매뉴얼적 대응이 잘 먹히진 않았다만- 일찍이 짐작했었는데, '신'은 이제 와서야 순순히 확언해주었다.

'그래.'

"왜 걔네들을, 나를 이 세계로 데려온 건데?"

'너희는 이 세계의 에너지 공급원이었어.'

이어진 설명은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 '신'은 그렇게 제 앞에서 거들먹거린 것과는 다르게 아직 제 세계를 독립적으로 온전히 구축할 능력은 없는 일개 수습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렇게 텍스트를 통해 빙의자와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을 만큼 힘을 갖춘 것도 실상 윤정한이 처음이란다.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더 속 터지기만 하니, 네 다음부터는 그냥 말 안 걸고 말려고.' 라는 사족을 굳이 덧붙이긴 했지만. 아무튼 자력으로 세계를 운용할 능력이 부족하기에, 윤정한의 본래 세계에 소설의 형태로 기생하며 '빙의'의 형식으로 종종 누군가를 끌어와 이쪽 세계에 에너지를 공급하였다고 했다. 별개의 두 세계를 억지로 연결하려면 어느 정도의 개연성이 필요하기에, 윤정한의 세계에서 괜찮은 소설을 고른 후, 거기 나오는 인물과 사건을 제 세계의 적당한 시기와 장소에 그대로 본떠 형성해둔다고 했다. 그리 하면 두 시공간의 동질성 덕분에 한층 쉽게 세계를 연결할 수 있기에.

'이곳은 작은 세계라, 가끔가다 한 명씩만 잘 낚아와도 한동안 충분할 만큼의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었어. 어차피 한 번에 이방인 여럿을 데려오면 세계가 불안정해져 위험하기도 했고. 그 대신 한 번 데려올 때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도록, 고심해서 고르긴 했지. 이 세계를 운용하는 힘은 너희의 감정 에너지로부터 오기 때문에, 이곳에서 최대한 큰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했지. 즉, 이곳에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사람. 소설을 읽으면서 속으로 간절하게 바라던 무언가가 있던 사람.'

"감정적 에너지면, 큰 절망이나 고통을 느끼게 할 생각은 안 했어?"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았을 뿐인데, '신'은 펄쩍 뛰면서 바락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누굴 악덕 사기꾼으로 알아?! 물론 내막을 100% 밝힌 건 아니지만,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고마운 주체에게 지킬 도리는 다하고 있다고! ...그리고, 방금 봤잖아. 너처럼 무언가 수틀려서 도망치거나 하는 바람에 에너지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이 가. 그러니 웬만하면 도망치고 싶지 않게 좋은 것만 시켜주어야지.'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도망쳤나."

억울함에 투정 부리듯 말하자, '신'이 득달같이 물어왔다.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왜 도망갔는데? 뭐가 부족해서?'

"나 아직 궁금한 거 남았어. 그거 다 대답해주기 전엔 말 안 할래. 내가 빙의자인 걸 밝히면 세계가 불안정해지는 건 왜 그런 거야?"

'네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니까! 세계는 무조건 이방인을 배척하려는 자기방어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그래서 빙의자들을 위장하기 위해, '주인공'을 공백으로 두었지. 너희가 밖에서 읽고 온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구현하되, 소설 속 주인공에 해당하는 인간은 일부러 혼이 없는 허수아비로 두었어. 그래야 너희가 그 안에 숨어, 본래 이 세계의 인간이었던 것마냥 섭리를 건드리지 않고 머물다 갈 수 있으니까. 너희가 본래 세계로 돌아가고 나면 껍데기만 남은 허수아비 따위 원래부터 없었던 존재로 폐기하는 건 나한텐 일도 아니고.'

'신'은 잠시간 침묵하더니 한탄하듯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꼼수였는데, 사실 이번엔 조금 이상하긴 했어. 원래 너는, '조슈아'와 맺어지고 싶어 했으니까 마땅히 여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거든? 그런데 어쩌다 황태자의 혼을 흡수하고 그 자리에 들어간 건지 모르겠다. 덕분에 급하게 여주인공 껍데기를 삭제하느라 골머리 좀 썩였어. 황태자랑 이름이 같은 게 뭔가 영향을 끼쳤나?'

"이름만 같아서가 아닐 걸. 날 모델로 만든 인물이라 그랬던 거 아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하여 윤정한은 자신이 본래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명인이며, 때문에 자신을 모델로 한 소설이 많이 있고, 그가 읽다가 빙의된 소설 역시 그중 하나였다는 설명을 '신'에게 늘어놓았다. 일개 수습일지언정 한 세계의 신에게 새로운 개념을 가르치는 기분은 기묘했다. 설명이 끝나자 '신'은 망연하게 말했다.

'그래서 손쓸 새도 없이 혼이 합쳐져 버린 거였구나. 원래 너의 일부를 본떠 만든 거라... 그리고 너랑 조슈아까지 합쳐서 열셋이나 그런 존재라고? 그런데 하필 장본인 중 하나가 적격으로 꼽혀 빙의가 되다니....... 잘못 골라도 단단히 잘못 골랐네. 앞으로는 그런 소설은 빼고 골라야겠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신'과는 별개로 윤정한은 방금 들은 정보를 되새겼다. 와중에 하마터면 여주인공 몸에 빙의될 뻔했다는 건 조금 아찔했다. 이 '신'은 정말이지 편견도 없었다.

"마지막 질문. 세계는 왜 무너진 거야? 내가 도망치긴 했지만, 다시 잡아 오거나 나중에 식 날짜를 새로 잡았어도 됐잖아."

'내내 고분고분 굴다가 직전에 마음을 달리 먹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나는 널 돌려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세계와 세계를 연결해두면 너와 네 본래 세계와의 연결이 뚜렷해져서 네 이질성이 훨씬 두드러지게 된단 말이야. 겉껍데기로 잘 위장을 해 두어도, 넌 '신'의 계약자 비슷한 존재라 가뜩이나 일거수일투족이 세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그게 한층 강화되기까지 했으니, 네 세계는 널 포착해냈다고 신나서 압박해 들어오지, 근데 결혼 성사가 안 돼서 에너지 보충은 안 됐지, 결국 견디다 못한 내 세계가 산산조각나려던 걸! 가까스로 정지시켜 둔 거야... 말하다 보니 네 죄가 진짜 깊다. 한 대만 맞을래?'

애석하게도 '신'은 그래봤자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글자들의 나열일 뿐이라, 파들거리면서도 윤정한에게 그 어떠한 물리적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 여기서 온갖 희로애락을 다 느꼈는데, 그 감정 에너지로 어떻게 참작이 안 될까?"

'말마따나 네가 여기서 느낀 모든 감정이 전부 에너지로 충당되긴 하지만, 문제는 정산일이야. 다시 말하지만 너와 난 일종의 계약을 맺은 것 비슷한 형태라-'

"와, 난 내용도 들은 적 없는 계약을 자기 맘대로 했다 이거야? 그럼 효력 없지 않아?"

'그러니까 비슷한 형태라고! 아무튼, 세계의 법칙과 신들의 사정에 의해서 빙의자의 감정 에너지를 넘겨받는 날은 소원, 그러니까 네 경우에는 결혼이 이루어지는 순간으로 미리 정해져 있다고. 어쨌든 결혼은 해야 한다니까?'

살다살다 부모님도 아니고 이세계의 신한테 빨리 결혼이나 하라는 잔소리를 들을 줄이야. 윤정한은 제 주위를 둘러싼 검은 공백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네 사정이고, 나는 그냥 저리로 뛰어들면 내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냐?"

'네 눈엔 저게 멀쩡한 통로 같아? 저건 자기 세계의 부산물을 회수하려고 자동으로 움직이는 진공청소기 같은 거야. 그 과정에서 네가 온전히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보장은 없어. 혈액 한 방울을 뽑아냈는데, 그걸 다시 몸 속으로 돌려받겠다고 무작정 입을 벌려 삼켜버리는 꼴이라고. 핏방울 입장에선 그걸 온전한 귀환이라 할 수 있겠어? 하지만 계약이 완수된다면, 나는 널 정확한 위치에 다시 주사해 넣어줄 수 있지.'

윤정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의 주장이 그저 에너지를 뽑아내기 위해 그럴듯한 거짓말로 윤정한을 얼마간 이 세계에 붙들어 두려 하는 거짓말일 수도 있겠으나,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기는 했다. 그리고 윤정한은 재미는 추구할지언정, 불확실한 가능성에 목숨까지 걸 정도로 대책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상식선에서 일절 설명이 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면 더더욱. 누그러지는 기색을 눈치챘는지 '신'이 구슬리듯 덧붙였다.

'그래봤자 한 달이야. 이렇게까지 상황이 어그러진 이상, 그냥 통으로 리셋해버릴 생각이거든. 아니지, 한 번 해 봤으니까 더 빠르게 준비해서 식을 올릴 수도 있겠다. 너 하기에 달렸어.'

"오래 두고 에너지 뽑아 먹을수록 좋은 거 아냐? 왜 이렇게 빨리 보내려고 해?"

'오래 두다간 네가 또 무슨 사고를 쳐서 내 세계를 위태롭게 할지 불안해서 그런다, 왜!'

장난스레 건넨 질문에 벌컥 화를 내는 꼴이 제법 진심 같았다. 최소한도의 에너지만 뽑아먹고 빨리 윤정한을 치워버리고자 하는 진심. 도무지 한 세계의 '신'다운 성스럽고 신비로운 태도는 아니었지만, 도리어 그런 점에서 윤정한은 더욱 진실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윤정한은 눈 딱 감고 몇 주만 '신'의 바람대로 움직여주기로 마음 먹었다.

"알겠어. 이번엔 제대로 결혼까지 잘 해볼게."

'잘 생각했어. 그럼 이제 대답 좀 해 줄래? 대체 뭐가 불만이라 결혼식 당일에 갑작스레 도망쳤는지.'

문자로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신'은 시간을 되돌리기 위한 작업에 이미 착수하였는지, 주위의 검은 공백이 서서히 메워지는 게 보였다. 아침 해가 다시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별이 떴다가 노을이 졌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구경하며 윤정한이 대답했다.

"이곳의 슈아는 내가 좋아하는 슈아가 아니라서. 나는 내 세계에서 나와 함께했던 조슈아를 좋아했던 거야."

기껏 대답해줬건만, '신'은 이미 다른 곳에 집중한 듯 대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세상만 점점 더 빠르게 되감겼다. 달이 뜨고,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과정을 빠르게, 더 빠르게, 눈앞이 어지러워지도록 반복하다, 이내 시야가 희게 바래는 듯한 착각이 들 때쯤.

윤정한은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익숙해진, 황태자궁의 침실이었다. 그가 이 세상에 처음 떨어진 그날로 되돌아왔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알려줄 건 다 알려줬다 이건지, 이번에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내용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윤정한도 부러 '신'을 불러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들을만한 정보는 충분히 들었고, 자신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검증 뿐이었다. 윤정한은 침대에서 일어나 벌컥 문을 열고 대기 중이던 사용인에게 다짜고짜 외쳤다.

"대신관 좀 불러 와!"

다음 날 윤정한은 마탑의 서고에 있었다. 전원우를 불러 혹시 다른 세계에 대해 뭐 아는 게 없냐고 물었더니, 다짜고짜 호출해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해대는 황태자가 낯선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는 당황도 않고 차분히 대답을 해 주었다. 세계 내의 법칙을 따르는 일은 신전의 소관이지만, 세계 밖의 일과 규칙의 예외에 관한 사안은 마탑의 자문을 구하셔야 한다고. 그래서 윤정한은 곧바로 마탑을 찾아가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때마침 등장한 부승관이 할 일이 산더미인데 대체 어딜 가시냐며 날뛰길래 당장 실행에 옮기진 못하였다. 대신 부승관이 안긴 서류를 후루룩 해치워 다시 넘겨주며, 내일은 꼭 마탑을 방문해야겠다고 다시금 주장했다. 윤정한의 가공할 일 처리 속도에 깜짝 놀란 부승관은 멀거니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한 번 다 보고 처리했던 서류들이라는 건 부승관으로서는 알 길이 없을 터이니. 마탑을 찾아갔을 때 그를 맞이하여 준 건 디에잇이었다. 어디에 있나 했더니 이 세계에선 마탑주로 살고 있었다. 이 세계 밖의 일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다고 밝혔더니, 디에잇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황태자는 어떠한 기밀도 열람할 권리가 있으니 마음껏 지식을 탐닉하셔도 좋다고 그를 서고 안에 자유롭게 방생해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간 틈틈이 윤정한은 '빙의자'에 대한 기록을 찾아 읽었다. '신'의 설명과 불합치하는 부분은 없었다.

이제 '신'은 아무리 불러도 나와주지 않았다. 회귀한 직후, '신'은 딱 한 번 등장하여 시간은 정상적으로 되돌렸으며, 너랑은 말을 섞어봤자 귀찮은 일만 생기는 것 같으니 메시지를 띄우는 기능을 아예 폐쇄해 버리겠노라 못을 박았다. 그간 반쯤은 '신'을 놀리는 재미로 버텨왔던 윤정한은 강력히 항변했지만, '신'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어차피 한 번 해봤고 이제 아는 것도 많으니 알아서 잘하지 않겠냐고 가차 없이 윤정한을 방생하였을 뿐. 그래도 마지막 남은 양심은 있었는지, '그래도 네 의사는 확실히 알았으니, 조금 손을 써 뒀어. 전보다는 몰입하기 수월할 거야.' 라는 말을 남기긴 했으나, 한동안 그 말뜻을 짐작할 수는 없었다. 대체 뭐가 수월해졌다는 건지. 업무는 조금 수월한가 했건만, 모처럼 일을 똑바로 하는 황태자를 보고 잔뜩 신이 난 부승관이 서류를 배로 들고 오는 바람에 그마저도 도루묵이었다. 윤정한이 진정으로 상황을 파악한 것은, 황궁 무도회에서 다시 한번 조슈아와 조우하였을 때였다.

지난 번에는 뭣도 모르고 팡파레 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화려한 입장을 하였지만, 이미 겪어 본 이상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할 윤정한이 아니었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귀족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줄 필요가 없었다. 이 무도회의 효용성은 오직 조슈아와 첫 춤을 춘 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신탁이 공표되는 데에 있었다. 윤정한은 남들의 이목을 피해 일찍부터 연회장 가장 구석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번의 조슈아는 공작으로 인해 괜한 압박을 겪지 않도록, 며칠 전 밤에 은밀히 찾아가 앞으로 이어질 결혼 준비 과정에 일절 개입하지 않겠노라는 약조도 받아왔다. 대가로 무얼 요구하든 다 들어줄 각오로 찾아간 것이니, 거래가 성사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공작은 아마 윤정한이 신탁을 이용하여 황권을 확고하게 거머쥐려 든다고 짐작했을 터이다. 그 목적을 위해 공작가에 이권 몇을 떼어다 주는 것까지 감수할 정도로 절박하다고도. 황태자가 애타게 자신을 포섭하려 든다는 착각에 빠져, 욕심이 잔뜩 번들대는 눈을 마주하면서도 윤정한은 그저 웃었다. 어차피 결혼식이 끝나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자신의 존재는 완전히 지워지리란 사실을 확인한 후였다. 그렇다면 공작과 맺은 뒤가 구린 약조 역시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말소될 것이며, 저로 인해 나라에 망조가 들 일도 없을 것이다. 

결혼에 소요되는 기간을 단축할 자신도 있었다.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고, 어떤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지 이제는 다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허둥거리며 삼 주가 걸렸으니, 이번에는 보름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해야 하긴 하겠으나, 조슈아와 조우할수록 미묘한 괴리감과 죄책감이 커질 뿐이란 걸 익히 경험한 바 있으니 차라리 일을 핑계 삼아 마주칠 일을 줄이는 게 현명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오늘을 기점으로 이어질 수많은 일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되새겨보고 있는데, 누군가 이쪽으로 걸음 하는 게 눈에 띄었다. 어둠 속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윤정한을 보지는 못하였는지, 도중에 멈추어 서 기둥 뒤에 몸을 숨기는 한 남자. 조슈아였다. 윤정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창 연회장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귀족들의 사탕발림을 들으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할 공작가의 도련님께서 왜 이런 곳에 숨어 들어왔을까. 그런데, 무언가 영 불편하고 낯설다는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조슈아는 공작가 도련님다운 태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리 사위가 어두울 망정 다른 이를 조슈아로 착각했을 리는 만무했다. 회귀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이질감이었다. 그저 시간을 돌렸을 뿐 아닌가? 어떻게 윤정한이 아닌, 이 세계에 속한 다른 사람의 행동거지가 저렇게 달라졌을 수 있지? 그때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래도 네 의사는 확실히 알았으니, 조금 손을 써 뒀어. 전보다는 몰입하기 수월할 거야.'

혹시, 조슈아에게 무언가 조작을 가한 걸까. 자신을 꼬박꼬박 황태자로 대우하고, 온전히 숨기지 못한 연심을 내보이는, 소설의 설정에 지극히 충실할 뿐이지만 윤정한에겐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조슈아가, 조금 더 그에게 익숙하고 친숙한 형태가 될 수 있도록. 그래봤자 '진짜'가 되지는 못하고, 그저 보다 정교하게 본을 뜬 것에 불과할 뿐일 테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절로 눈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지, 얼마나 현실의 조슈아에 근접하였을지 호기심이 샘솟았다. 윤정한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조슈아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돌아봤다.

"......윤정한?"

자연스레 이름을 부르는 것부터가 벌써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닮게 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어야지. 하긴, 조슈아가 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걸 '신'도 얼마 전에야 알았지. 윤정한은 유쾌함을 감추려는 노력도 않으며 대놓고 생글거렸다.

"드디어 이름으로 불러주게? 맨날 '어떻게 감히,' 이러면서 선 긋더니."

어쩌면 지난 회차의 조슈아와는 그것이 가장 큰 괴리였던 걸지도 모른다. 한낱 호칭 따위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의 이름을 편하게 불러주지 않는 조슈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조슈아 같지가 않았으니. 윤정한의 말을 질책으로 오해하였는지, 조슈아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깜짝 놀라서 실수... 했습니다. 황태자... 님? 황태자 전하?"

"그냥 편하게 하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기 공작이면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 슈아야."

아무리 공작이라 해도 제게 말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윤정한은 무작정 우겼다. 다시 어울리지도 않는 공대를 받고 싶진 않았다. 조슈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겠어, 정한아."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윤정한이 물었다.

"근데 왜 여기 숨어있어? 수상하게?"

"좀 피곤해서, 시작 전에 잠시 혼자 쉬고 있었어."

아까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확실히 얼굴에 피로가 어려 있긴 하였다. 윤정한은 습관처럼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깟 말투 조금 바뀌었다고, 삽시간에 '진짜' 조슈아처럼 느껴지는 감각에 취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는 너는? 너야말로 왜 이런 데 있어."

조슈아가 되묻는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아마 자연스럽게 그의 이마를 짚어보고 진짜로 어디 아픈 건 아닌지 면밀하게 살피었을 것이다. 그것이 황태자와 공작가 후계자 간에 일상적인 접촉은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윤정한은 내밀던 손을 스리슬쩍 거두며 답했다.

"요란하게 등장하기 싫어서. 맘 같아선 아예 안 나올까 싶었는데, 그럼 승관이가 엄~청 뭐라 할 거 아냐."

"그렇구나. 난 역시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라, 그냥 얼른 돌아가 봐야겠어. 재밌는 시간 보내."

조슈아는 옅은 미소와 함께 그리 말하고는, 정말로 몸을 돌렸다. 무슨 소리야. 가긴 어딜 가. 너 나랑 첫 춤은 춰야 해. 윤정한은 고집스레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무작정 밝은 쪽을 향하여 걸음을 떼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 곡만 추고 가."

"춤을? 정한아, 다음에 할게."

역시 황태자를 짝사랑한다는 설정이 없는 조슈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편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는 점에 윤정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조슈아가 '진짜' 조슈아 같아서 편하다니, 조금은 비참한 명제 아닌지. 윤정한이 대답은 않고 꿋꿋하게 연회장의 중앙을 향해 나아가자, 조슈아가 다시 한번 항변했다.

"나 지금 약혼자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그럼 나랑 춰."

조슈아가 한 번 마음을 먹으면 그 고집을 꺾기란 쉽지 않았다. 설득을 한다손 잘 먹히는 법이 없으니, 무작정 떼를 쓰는 편이 오히려 작게나마 가능성이 있었다. 윤정한은 조슈아의 나머지 손까지 붙들면서 재차 말했다.

"나랑 한 곡만 추자."

당황한 귀족들의 반응과, 흐트러진 오케스트라의 연주나, 부승관이 열불을 내는 소리는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우리의 결말은 이미 결혼으로 확정되어 있고, 이 춤이 그 시작이 되리란 사실만이 중요하지. 윤정한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스텝을 밟았다. 조슈아는 순순히 춤에 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뻗대지만도 않는다. 윤정한의 리드에 최소한도만 따라주며, 가끔씩 보란 듯이 틀린 동작을 뻔뻔스레 선보였다. 파트너로서 부끄러운 꼴을 보이면 도망가기라도 할 줄 알았나. 회귀 전의 무도회에서, 그 누구보다 빛나는 스텝을 보였던 조슈아와는 퍽 대조되는 행태이기야 했다. 그러나 윤정한은 그 모습 하나하나 전부 재밌기만 할 따름이니, 조슈아는 결국 무곡이 끝날 때까지 윤정한에게 붙들려 있었다. 윤정한은 놀리듯 말했다.

"진짜로 오늘 몸 안 좋나 보네, 조슈지."

"그렇다니까."

일부러 틀리게 춘 거면서, 뻔뻔스레 거짓말을 한다, 윤정한은 또 웃었다.

"알겠어. 첫 춤도 춰 줬으니까, 보내줄게."

어차피 목적은 달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때맞춰 거대한 트럼펫 소리가 울렸다. 도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연회장을 울린다.

"대신관 님의 긴급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수군대는 인파가 자연스레 두 갈래로 나뉘고, 그 사이로 흰 로브를 입은 전원우가 걸어 나왔다.

"연회를 중단시키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윤정한은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채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조슈아 외의 다른 이들은 이전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듯했다. 전원우는 회귀 전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을 읊었다.

"중대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순식간에 연회장에 긴장된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슈아 역시 몸이 굳어서는, 경건한 태도로 눈을 감는다. 이미 신탁의 내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윤정한만이 여전히 태연한 태도로 서 있었다.

"오늘 밤 황태자와 첫 춤을 춘 이가, 훗날 황궁의 안주인이자 황제의 영원한 반려가 되리라."

이로서 첫 단추가 꿰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조슈아를 향했다. 반복은 지루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들뜨게 될 줄은 몰랐다. 윤정한은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었다. 이번의 조슈아는 연심으로 발갛게 귀 끝을 붉히지 않았다. 오히려 퍽 낭패라는 듯 한숨이나 내쉬고 있었다. 짝사랑을 하는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윤정한은 차라리 이 편이 더 달가웠다. 나를 좋아하는 조슈아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조슈아가 더 필요했다. 윤정한은 한 걸음 다가가 팔을 벋어 조슈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슈아야."

"왜."

조슈아는 꿋꿋하게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이것이 현실임을 거부하려는 듯한 태도로. 윤정한은 전연 개의치 않고, 조슈아의 귓가에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너 나랑 결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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