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8)

로판AU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란 참으로 묘했다. 회의실에 계신다고 하길래, 다른 귀족들까지 와글와글 모여 있는 자리인 거면 어쩌지 싶었다. 실례지만 제가 아버지 얼굴을 몰라서 그런데, 제 아버지이신 분 손 한 번만 들어주시겠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긴장한 채 발을 들인 드넓은 회의실 안에는 중년의 남자 한 사람만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슈아 자신과는 닮은 구석이 요만큼도 없었다. 냉랭한 표정 탓에 딱딱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고, 그 나이대의 여타 아저씨들에 비하면 조금은 우월한 풍채와 풍성한 머리숱을 뽐내고는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그냥, 길 가다 우연히 스쳐 지나갔더라면 10초도 안 되어 기억에서 증발되었을 흔하디 흔한 얼굴이었다. 전형적인 중년 엑스트라 상이라고나 할까.

"...아버지?"

시험 삼아 불러 보자, 남자는 그제야 시선을 들어 조슈아를 일별하더니 무미건조한 어투로 대답했다.

"앉거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 전부터 가시방석이었다. 얼른 용건이나 말하고 끝내야겠다.

"정한이...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보냈어요. 아버지께서 여기 계시니까 공작가에서 초대할 하객 리스트를 함께 정하라고요. 저는 따로 초대할 사람이 없으니, 아버지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공작은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조슈아를 한참 바라보다 대답했다.

"알겠다."

"리스트는 바로 작성해 달라고도 했어요."

"그렇게 하지. 어차피 전하께서 곧 이리로 오신다지 않았느냐? 알아서 넘길 테니, 더 용건 없으면 가도 좋다."

긴장하며 온 게 무색하게도 공작과의 독대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들이 아니라 흡사 비서를 대하는 듯 건조한 부자 관계가 이렇게 감사히 여겨지다니 조금은 면목 없었으나. 저런 아버지라면 본래 이 세계에 살던 '조슈아'도 딱히 좋아하며 따랐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양심의 가책 없이 마음껏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칼같이 돌아서려는데, 공작이 갑작스레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그러고 보니 식 날짜는 정해졌느냐?"

조슈아는 아까 들었던 그대로 대답했다.

"열흘 후라고 하셨어요."

"빠듯하군. 알겠다."

졸속으로 정해진 날짜를 듣고서도 공작은 별 동요가 없었다. 이쯤 되니 궁금했다. 암만 애정 한 톨 없는 부자 관계라 한들, 난데없이 후계자를 교체하게 되었는데도 이렇게까지 무덤덤한 게 정상인가? 감정적으로 굴 이유가 하등 없는 건 알겠다만, 공작답게 오로지 실리만 따져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조금은 반발하는 게 합리적인 반응 아닌가? 조슈아는 망설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혼사가 정해졌을 때 놀라지도 않으셨어요?"

공작이 여전히 감흥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신탁이 있기 전, 전하께서 내게 따로 언질을 주셨다."

"...신탁 전에요?"

조슈아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공작에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기에.

"그래. 야밤에 근위대장 하나만 덜렁 달고 막무가내로 저택에 들이닥쳐서는, 앞으로 대략 보름 이내에 내 아들과 성혼할 것이라 선언했지."

공작은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윤정한을 고깝게 여기는 기색이 선연했다.

"광증이라도 온 줄 알았다.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내쫓으려 하는데, 사흘 후 있을 황궁 무도회에서 신탁이 발표될 것이라는 말을 흘리더군. 신탁의 내용까지도 말이다. 그 말이 맞다면 어차피 너는 결국 황실 소유를 벗어나지는 못할 처지이니, 기왕이면 가장 비싼 값에 넘겨야 하지 않겠느냐. 성혼까지의 과정에 간섭하지 않기로 한 대신, 그 자리에서 몇 가지 이권을 조율하는 것으로 얘기를 마무리했지."

꼬투리 잡을 구석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일단, 친아들을 제 멋대로 거래할 수 있는 상품처럼 취급하는 말투부터가 정말이지 거슬렸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정한이가 어떤 신탁이 내려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어떻게......."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련한 것. 황권이 달린 일이다. 그깟 신탁, 며칠 신관들의 입을 단단히 단속한 채 물밑 작업 다 끝내둔 뒤에야 마치 그 순간 방금 내려온 것마냥 꾸미는 일이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대신전이 황실에서 뜯어가는 헌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긴 하느냐? 쯧, 아직도 이렇게 정치를 몰라서야."

대놓고 타박하는 어조였다. 그래, 이 곳 정치판의 현실이야 조슈아보단 공작이 더 잘 알 터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윤정한의 수상한 행보가 한둘이 아니었던 터인지, 의구심은 여전히 머릿속에 눌어붙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윤정한을 붙들고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낱낱이 실토하라며 짤짤 털고만 싶었으나,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는 세상이 멸망하는 꼴을 겪을 노릇이니 이도 저도 불가능했다. 조슈아는 답답한 맘에 길게 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권은,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기밀 거래다. 이제 공작가의 일원도 아니게 될 너에겐 밝힐 이유가 없지."

공작에게서 추가로 얻어낼 만한 정보는 없어 보였다. 설사 있다고 해도, 여기서 더 얘기를 나누다간 아버지고 뭐고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을 만큼 밉상인지라 그냥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예의상 고개만 한 번 주억거리고 냉큼 말했다.

"알겠습니다. 용건 끝나셨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공작도 이번엔 그를 붙들지 않았다. 조슈아는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 내내 공작과의 대화를 반추했다. 정말로 윤정한은 진작 내려왔던 신탁을 무도회 날까지 함구했던 걸까. 전원우에게 물어보면 대답해 줄까?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대신전의 대형 비리나 다름 없는 비화를 그렇게 냉큼 털어놓을 리가 없지. 그러니 미심쩍은 마음만 가득할 뿐, 윤정한이 정말로 다른 속내가 있다는 명명백백한 물증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가 없다. 조슈아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윤정한이 수상하다는 생각 자체가 조슈아의 비약이다. 암만 현실 같아 보여도, 결국 여긴 조슈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돌아가는 세계이다. 모든 일이 그와 윤정한이 얼른 결혼할 수 있게 등 떠미는 식으로 이루어져도,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섭리인 세계라는 것이다. 이제는 조금 지겨웠다. 앞으로는 영화나 소설 속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단 생각은 1초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그러다 조슈아는 저 혼자 피식 웃었다. '아버지'가 그렇게나 그린 듯한 소설 속 악역 조연의 스테레오타입 그대로인 건 돌이켜보니 조금 우스웠다. 아무리 현실처럼 느껴진대도, 어쩔 수 없는 픽션이긴 한 모양이다.

저택으로 돌아왔더니, 준이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꾸벅 인사를 올리더니 말했다.

"곧 식을 올리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도련님."

"응, 열흘 후야."

"정말 금방이네요. 식을 올리고 나면 황궁으로 들어가실 테니, 슬슬 짐을 챙기고 방을 정리하라는 공작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조슈아가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작의 인성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돌아오자마자 이런 전언을 들으니, 하여간 그 인간은 아들을 얼른 내쫓으려고 아주 혈안이 됐구나, 하는 삐뚤어진 생각이 절로 들었다. 조슈아는 툭 던지듯 물었다.

"준휘야, 네가 보기에도 아버지와 내 사이, 원래부터 별로였지?"

결국 아들이 바꿔치기 당한 것도 못 알아봤잖아, 그 인간. 사실 소설 속 조슈아도 어찌 되었건 현실의 조슈아를 기반으로 한 인물이니, 평상시의 성격이나 취향에 있어 큰 위화감은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역사와 기억을 지닌 꼭 같은 사람은 아니니,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이라면 마땅히 무언가 어긋난 부분을 감지했어야 할 터인데. 아니나 다를까 준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렇죠. 사이가 좋으셨으면, 어머니를 잃은 어린 외아들을 십 몇 년 동안이나 혼자 외국에 던져 놓지는 않으셨겠죠."

그런 인간도 아버지랍시고 혼주 석에 앉혀두어야 하나? 설마, 손 잡고 입장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밀려온 끔찍한 상상에 조슈아는 꾹 주먹을 쥐었다. 아예 오지도 못하게 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좀 구석 자리에 처박아 둘 수는 없냐고 꼭 물어봐야겠다. 같이 입장한다던가, 양 가 부모에게 감사의 큰절을 올리는 순서가 있다면 무조건 생략하자고도 말하고.

"네가 보기엔 왜 아버지가 날 싫어하시는 거 같아?"

조슈아는 순수한 궁금증으로 물어보았을 뿐인데, 준의 표정이 대번 아련해졌다. 평생을 외로움에 떤 도련님 마음속의 깊은 상처... 뭐 그런 걸 상상하는 양. 하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 감성 넘치는 사연을 읊어주지는 않았다. 대답은 가차 없고 명쾌했다.

"그냥 원래 사람을 싫어하시는 분이셔서요."

잔웃음이 터져 나왔다. 준이 황급히 덧붙였다.

"공작님께는 제가 이런 소리 했다고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당연하지."

어차피 조슈아는 가능하다면 앞으로 영영 공작과 말 섞을 일을 만들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는 상쾌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신 방 정리 좀 도와줄래? 뭘 챙겨야 할지 모르겠어."

애초에 저로서는 며칠 쓰지도 않은 여전히 낯선 방이었으니까. 다행히도 준은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입니다, 도련님."

남은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어지간한 것들은 황궁에 이미 다 마련이 되어 있을 테니 개인적인 물건들 외에는 옷가지와 신발, 장신구 종류만 챙기면 된다고 하길래 금방 끝날 줄만 알았건만, 오산이었다. 드레스룸이 어찌나 풍성하게 차 있는지 그것들을 다 살펴보고 추리는 데에만 한 세월이었으니까. 그냥 여기 다 냅두고 갈까, 싶은 충동도 들었지만 준이 넌지시 말해주었다. 공작저에 두고 가는 개인 재산은 공작에게 양도 증서를 작성해서 넘겨야 한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조슈아는 가진 거 전부를 아득바득 싸 들고 가기로 마음 먹었다. 공작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을 줄까 보냐. 종래에는 침대며 책상까지 황궁으로 옮겨달라는 걸 말리느라 준이 고생깨나 했다.

이튿날은 예정대로 황궁에 가 재봉사를 만났다. 당연히 반지를 고를 때보다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결정해야 할 건 얼마 없었다. 황실 공식 행사에서 입는 예복은 전통에 따라야 한다는 이유로, 색상이며 기본적인 디자인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브로치 하나의 형태까지도 전부 규정되어 있던 덕택이었다. 그 안에서 조슈아의 주관이라 해 봤자 고작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소맷단의 감침질을 아이보리색과 순백색 중 어떤 실로 할지를 결정하는 데 쓰일 뿐이었으니, 솔직히 말해 대충 아무거나 골라도 티 하나 안 났다. 윤정한은 매번 황실 전속 재봉사로부터 옷을 맞추었으니, 치수는 조슈아 혼자 재면 될 것을 구태여 옆에 붙어서 자기가 한 번 재 보겠다고 조슈아의 어깨며 허리를 조물거리다가 결국 팔뚝을 한 대 얻어맞았다.

기왕 만난 김에 부케도 같이 골랐다. 어차피 그것도 어떤 꽃이 어떤 모양새로 들어가는지 얼추 다 규정된 바가 있다고 하길래 괜히 잘못해서 어색해지기만 할까 봐 그냥 그대로 하자고 했는데, 윤정한이 먼저 데이지를 넣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데이지를 추가해 넣고, 푸른 리본을 둘러 장식하기로 했다. 부케를 들고 입장하는 쪽은 당연하다시피 조슈아로 정해져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시집을 오는' 쪽은 조슈아가 맞았으니 얼추 예상했던 사실이었으며 딱히 유감이 있지도 않았지만, 윤정한이 들고 입장한다면 정말로 잘 어울렸을 것 같아 조금은 아쉽긴 했다.

어쩌다보니 저녁까지 함께 먹고 슬슬 돌아가려던 참에, 조슈아는 불현듯 전날 했던 생각을 상기하고는 넌지시 운을 띄웠다.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께선 참석 못 하시지?"

"기적이라도 일어나 갑자기 정신을 차리시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아무래도 그렇겠지."

윤정한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제 친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덤덤한 태도였다. 하기야 공작가만 해도 이렇게나 콩가루이니, 황실 꼴도 알만 했다.

"그럼 너는... 가족 중에서는 올 사람이 없는 거 아냐?"

"그래도 사실 상관 없긴 한데, 일단은 쿱스가 황실 대표로 오기로 했어."

"그렇구나......."

윤정한이 대번 미심쩍은 기색을 눈치채고 떠보듯이 물었다.

"근데 갑자기 왜? 혹시 공작 부르기 싫어서?"

"어떻게 알았어?"

놀라 묻자, 윤정한이 생글거리며 웃었다.

"둘이 사이 나쁜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싫으면 부르지 마."

"그래도 돼?"

"가족석은 그냥 없애버리지, 뭐. 황제 폐하도 참석 못 하시는 자리에 감히 너 혼자 오려고 하냐, 설마 네가 황제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냐, 역심을 품었구나, 하는 식으로 몰아가면 별 말 못할 걸?"

대놓고 궤변이었지만 황태자가 그렇게 추궁한다면 그 누구라도 항변하지 못할 터이다. 상상만으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공작과 겨우 하루치 앙금밖에 쌓여있지 않았는데도 부담이 크게 덜어진 기분이니, 일평생 쌓인 게 많았을 본래의 '조슈아'였다면 이 순간이 얼마나 든든하고 기쁘게 느껴졌을까. 문득 자신이 그의 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본래 이 역할을 맡아야 했던 원작 속 여주인공에게만 초점이 집중되어, 정작 원래 살던 '조슈아'가 무언가 빼앗겼다는 발상까지는 하지 못했었다. 이름과 얼굴과 성격이 같으니 빙의했다 한들 자신이 '타인'의 자리를 갈취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으니까. 그 조슈아도 이렇게나 너와 얽히고설키게 되었다면 결국엔 널 좋아하게 되었을 텐데. 가벼움과 장난스러움으로 포장한 네 다정함과 사려 깊은 면모를, 어쩔 도리 없이 사랑하게 되었을 텐데. 물론 소설 속 그는 윤정한이 아니라 여주인공을 좋아했지만, 지금처럼 어쩌다 약혼 관계로 묶이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를 일이다.

"넌 옛날의 내가 더 좋지 않아?"

뜬금없는 질문에 윤정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옛날 언제?"

"그냥... 이렇게 되기 전에. 그러니까 무도회 전?"

"아, 너 완전히 귀국하기 전에?"

"응, 그 쯤."

눈치껏 말을 맞췄다. 윤정한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지금이 더 좋은데? 그땐 별로 내가 알던 슈아 같지도 않았어. 너 계속 해외에 있느라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어서 그런가, 솔직히 만날 때마다 엄청 어색했지.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다시 이름 불러줘서 좋다고. 지금은 진짜 너 같아. 이렇게 된 게 신기할 정도야."

가벼운 어조에 비해 두 눈은 어느 때보다도 진중했다. 괜히 귀 끝이 달아오르고 마음이 벅차오르려는 찰나, 찬 물을 끼얹듯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주아주 약해서 당사자 외의 다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테지만, 그에게는 확연한 경고로 다가오는 뒤틀림. 조슈아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우 이 정도의 발언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인 거야? 예민하기도 하지.

"다행이네. 혹시 내가 널 너무 편하게 대한다고 생각할까 봐 그랬어. 아무튼, 아버지는... 아예 초대도 안 하는 건 좀 그런데, 가족석 없애는 건 좋다. 그냥 눈에 안 띄는 구석 자리에 앉혀달라 해 줘."

대놓고 화제를 돌리려는 게 분명 티가 났을 테지만, 윤정한은 옅게 미소 지으며 이를 묵인해주었다.

그 다음날에는 눈뜨자마자 또다시 황궁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와 황태자궁의 응접실에서 청첩장 시안을 보며 아침을 먹어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경우 없이 굴어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컨펌이 나야 오늘 안에 부칠 수가 있다며 부승관이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해명했다. 그러면서 하객 리스트도 한 번 더 확인하라고 명단 한 뭉치를 뻔뻔하게 같이 내밀었다. 이렇게 매일 황태자궁에 출퇴근 도장을 찍게 만들 거면 피차 편하게 차라리 이 많은 방 중 하나만 내 달라고 했더니, 청혼도 받기 전에 동거는 황실 이미지에 별로라 안 된단다.

"그게 중요해?"

어이가 없어 되물었더니, 부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하죠. 엄밀히 따지면 청혼도 아직 안 받은 사이에."

"한 방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크기의 건물인데? 그렇게 따지면 한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전부 동거 중이게?"

"한 아파... 뭐요?"

아, 실수했다. 조슈아는 건성으로 수습했다.

"말이 헛나왔어. 아무튼, 진짜 안돼?"

부승관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중요한 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냐는 거니까요. 솔직히 지금도 너무 날치기로 진행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 나오는 거, 온갖 낭만이며 아름다운 로맨스로 간신히 포장해 둔 거니까 조금이라도 스크래치 나면 절! 대! 안 돼요. 홀딱 반해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골인하는 거, 세기의 찐사랑으로 보일지 둘 다 눈 훼까닥 한 불장난으로 보일지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요! 대신, 뭐, 황태자궁 말고 별궁 숙식은 가능할지 한 번 여쭤는 볼게요. 그거라도 괜찮으시면요."

그래서 조슈아는 눈을 휘어 미소 지으며 완전 괜찮다고 답했다. 이미 공작저의 개인 짐은 대부분 정리를 해 두었으니, 당장 내일부터라도 편히 황궁 내에서 출퇴근 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부승관도 조슈아를 더 가까이 두고 일을 시킬 생각에 은근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오후에는 역시나 부승관과 함께 식장을 어떻게 꾸밀지 궁리했다. 날씨가 좋을 것으로 예상이 돼 중앙 정원에서 야외 웨딩을 치를 예정이라고 하였다. 본궁 메인 홀에서 하는 것보다야 규모는 작아지겠지만, 대신 다른 쪽으로 신경 쓸 게 배가 됐다며 부승관이 투덜거렸다.

"다른 건 하나하나 절차 따져가며 준비하던데, 이런 건 또 자유롭나 보네? 메인 홀에서 안 해도 괜찮은 거였어?"

조슈아가 그렇게 묻자, 부승관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사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예요. 전하께서 단순 황자 신분으로 식 치르기로 하신 덕분에, 메인 홀에서 할 자격이 못 된답니다. 정작 장본인은 이참에 야외 웨딩으로 하자고, 슈아가 그 편을 더 좋아할 것 같다고 오히려 신나 하던데, 하여간......."

"어, 난 좋은데? 야외 웨딩이라니, 너무 좋아."

"그러시겠죠. 낭만적이긴 하죠. 근데 덕분에 정원사들은 완전 비상 걸렸다고요. 조경 어떻게 꾸밀지 같이 생각해 주셔야 해요?"

"이건 전통이니 뭐니 그런 지켜야 할 거 없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더 문제에요. 저희가 처음부터 다 생각해야 하니까......."

"왜 없대? 야외 웨딩은 트렌드가 아니었나?"

"트렌드고 자시고, 일반적으로 황실 결혼식은 최소 일 년 전부터 날짜 잡고 준비하니까요. 일 년 뒤 날씨를 어떻게 알고 야외 웨딩을 하자고 해요?"

"그럼 우리가 황실 역사 상 처음이야? 재밌겠다."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정말, 진심으로, 너무나도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그렇지. 둘은 몇 시간 동안 종이를 펼쳐놓고 분수며 아치와 오케스트라, 하객석과 핑거푸드 테이블 등을 어떻게 배치할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보냈다. 그러다 버논이 찾아와, 식 당일까지 별궁에 머물러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부승관이 얼른 돌아가 이삿짐이나 싸라고 조슈아의 등을 떠밀었다. 아직 노을이 지기도 전이었기에 아직 일이 산더미인데 벌써 돌아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부승관은 지금 겨우 한두 시간 더 부려 먹는 거보다 최대한 빨리 짐 싸 들고 24시간 궁에 붙어있는 인력이 되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골수까지 뽑아 먹겠다는 결의가 이글거리는 시선과 마주쳤을 때에는 내가 내 무덤을 팠나, 하는 후회가 찰나 간 스쳐 지나갔으나, 그래봤자 굶겨가며 일 시키는 것도 아니고 몸이 힘든 작업도 아니니 며칠 더 부려 먹히면 어때 싶었다.

공작저로 돌아가서 당장 다음날부터 황궁에서 지내겠다고 선언하니, 준은 놀라지도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오래 곁에서 모시지 못하는 건 아쉽네요. 날 밝는 대로 짐마차를 수배해 두겠습니다."

"천천히 부쳐도 돼. 어차피 정식 입궁은 아니고, 별궁에서 며칠 지낼 거라서."

"알겠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알고 계신가요?"

"모르실 텐데, 물어보기 전에는 굳이 말씀드릴 필요 없어."

"먼저 말씀 드리지 않으면 아마 결혼식 당일까지도 도련님께서 집을 나가신 줄 모르고 계실 텐데요."

"어, 바로 그거야."

눈이 마주치자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삿짐 더미를 점검하러 가겠다기에 조슈아는 준의 어깨를 몇 번 토닥여주었다. 낯선 세상 속, '내 집'임에도 마찬가지로 낯설게만 느껴졌던 이 집 안에 익숙한 네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는 고마움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만 전하면서.

공작저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결혼식까지, 앞으로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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