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9)
로판AU
조슈아는 며칠 지내는 데 필요한 옷가지 정도만 들고 온 가벼운 몸으로 별궁에 입성했다. 황궁의 가장 외곽에 위치해 있어 일전엔 잘 몰랐는데, 말만 별궁이지 사실상 황궁의 1/3을 잡아먹는 규모였다. 황실의 일원이 아닌 자들이 머무르는 곳을 한데 묶어 통째로 별궁이라 칭하는 듯했다. 따라서 초청을 받은 귀빈들이 머무르는 최고급 손님용 공간은 물론이고, 황실 전속 변호사와 재봉사 등의 인력들이 업무를 보는 용도의 건물에, 일반 사용인들의 숙사까지 혼재하여 거진 아파트 한 단지의 규모를 이루었다. 조슈아의 안내를 맡은 건 우지였다. 그 또한 황실 의사로서 별궁에 거처를 두고 있었으며, 진작 조슈아와 안면을 튼 적이 있기에 적격으로 꼽힌 모양이었다.
우지는 관광 가이드에 소질이 있지는 않았다. 화사하게 꾸며진 별궁의 앞뜰을 가로지르며 그가 설명했다.
"여기가 조슈아 님께서 성혼 전까지 머무르실 접대용 숙소입니다. 안에 사용인들도 다 있고요. 조슈아 님께서는 특실까지 배정 받으셨으니, 황태자에 준하는 초호화 대우를 받으실 겁니다."
"네가 일하는 데는 어디야?"
조슈아가 눈을 빛내며 묻자, 우지는 눈앞의 건물 너머를 두루뭉술하게 손짓하며 답했다.
"이 건물 뒤편에 있습니다. 보시면 알 거예요. 누가 봐도 이 건물보다는 덜 번쩍거리게 생겨서. 일반 사용인용 숙사는 그것보다도 덜 번쩍거리게 생겼고요."
"가면 너 볼 수 있어?"
그냥 같이 야식 먹을 사람이라도 필요해질지 모르니 가볍게 한 질문이었는데, 우지는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의사는 보러 올 일이 적을수록 좋죠."
"진료 말고, 그냥 심심할 때 말이야."
"괜히 감기라도 옮아 가시면 제가 혼납니다."
"누구한테?"
"누구겠어요."
심드렁히 말하는 게 아무래도 윤정한을 일컫는 모양인데,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평소에 잔기침을 달고 사는 게 누군데. 어이가 없어 조슈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우지는 그걸 불만의 표시로 알아 들었는지 무마하듯 말을 덧붙였다.
"뭐, 오시면 어지간해선 있기야 할 텐데. 호출 받고 왕진이라도 나가 있으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윗사람들께서는 직접 찾아오시는 건 안 좋아하셔서요. 왕진을 자주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네가 놀러 올래?"
"어우, 그거야말로 진짜 혼납니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장엄한 건물의 현관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여느 호텔 못지않은 로비의 광휘에 둘은 잠시 말을 잃었다. 화려하기로 따지자면 본궁마저도 능가하였다. 황궁의 다른 부분은 오랜 역사에 걸맞는 기품과 우아함을 기조로 하고 있다면, 이곳은 오로지 방문객의 경외와 감탄을 자아내겠다는 오기로 똘똘 뭉친 것 같다고나 할까. 우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도 이 안까지는 처음 와 보는데... 대단하네요."
먼지 한 톨 없는 멀끔한 유니폼을 차려입은 시종이 깊게 허리를 숙이며 둘을 맞이하였다.
"어서 오세요. 무슨 용건으로 오셨을까요?"
"어... 제 방으로 안내받고 싶은데요. 공작가에서 온 조슈아입니다."
차마 예비 황태자비라고 스스로를 칭할 뻔뻔함은 낼 수가 없어 공작가의 이름을 대었는데, 다행히도 시종은 두 번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옆에 계신 분은 조슈아 님의 동행인이실까요?"
그러자 우지가 단호하게 뒷걸음질 쳤다.
"아, 저는 이제 돌아가 볼 거라서요."
"방은, 같이 구경 안 해?"
조금은 시무룩한 어조로 물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여기까지 안내해드렸으면 충분하죠. 저도 할 일이란 게 있는 사람이라."
"알겠어. 놀러 갈게!"
"안 그러셔도 되는데......."
중얼거리는 걸 무시하고 생글거리는 눈웃음을 짓자, 우지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찌 되었건 마주 미소 지어주었다.
이후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섰을 때, 조슈아는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었다. 각종 스케줄을 다니며 온갖 숙소에는 다 묵어 봤는데, 이 정도로 고급지다 못해 부담스러운 곳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찬찬히 방을 하나씩 둘러보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을 때, 중앙의 테이블에 놓인 꽃다발에 뒤늦게 시선이 가닿았다. 장미와 데이지, 그 외 이름 모를 꽃들이 불규칙하게 섞여 있는 꽃다발은 그날 아침 막 정원에서 따 온 양 싱그러운 생생함을 자랑했다. 곁에는 초콜릿 한 박스가 함께였고, 그 위에 'WELCOME'이라 적힌 자그마한 카드가 얹혀 있었다. 별궁의 손님을 위한 의례적인 환영 선물인가 보네. 조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벼운 손길로 카드를 집어 들었다가,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카드의 뒷면엔 빈말로도 유려하다고는 말 못할 필체로, '황궁에 온 걸 환영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윤정한의 필체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짤막한 인사말에 불과했다. 그가 이걸 다 손수 준비했다고 믿지도 않는다. 황태자의 귀한 손으로 카드 한 장 쓰고 숟가락만 얹은 게 분명하지.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런 작은 것 하나에 속절없이 심장이 요동치는 게, 변명할 수 없는 제 마음이었다. 문득 그가 보고 싶었다. 오늘도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만나기 힘들다고 했는데. 그러다 조슈아는 자신이 이젠 현실의 윤정한과 이곳의 윤정한에 별반 선을 그어 구분 짓지 않고 있음을 눈치챘다. 좋지 않은 태도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경각심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황태자 윤정한은 알면 알수록 현실의 윤정한과 똑같았으니까. 제 약혼자 노릇에 무척이나 적극적이고 우호적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아, 이래서 온갖 픽션 주인공들이 허구의 세계에 정 붙이게 되는 걸까. 말 그대로 too good to be true잖아.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어차피 며칠 있으면 영영 겪을 수 없을 상황인데, 지금 조금 즐기는 게 어때서?
남은 하루는 온종일 어제 하던 식장 디자인 작업을 마무리 짓는 데에 쏟아부었다. 이사를 끝마친 뒤 늘 그랬듯 황태자궁의 서재로 찾아가려 했는데, 거기서 하도 일에 시달렸더니 이젠 좀 환경을 바꾸고 싶다는 부승관의 강경한 주장으로 오늘은 별궁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러다 무료하다며 부승관을 찾으러 놀러 온 김민규와, 조슈아가 잘 있는지 확인해보라는 명을 받고 온 디노까지 눌러 앉아 조슈아의 응접실은 제법 왁자지껄하였다. 동생 둘이 툭툭 던져주는 야외 예식을 위한 아이디어는 태반이 우스갯소리였지만, 그래도 개 중 몇 가지 쓸만한 거리는 있었으니 수확이 전무하지만은 않았다.
"여기가 이렇게 시설이 좋을 줄은 몰랐네. 형, 나 오늘 자고 가면 안 돼?"
김민규가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 플래터를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털어 넣으며 물었다.
"네 맘대로 해. 근데 너는 황궁 자주 오는 거 같았는데, 별궁에 들어와 본 적이 없어?"
"그치. 어차피 집이 코앞에 있는데, 굳이 별궁에 묵게 해 줄 리가 없잖아."
"아, 그러네."
옆에서 가만히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부승관이 불쑥 끼어들었다.
"김민규 진짜 자고 갈 거야?"
"너는 왜 나만 김민규야?"
김민규가 대답 대신 그렇게 묻자 부승관이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네가 경칭 붙이면 거리감 느껴진다고 싫다매......."
대체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추란 건지. 혼자 나지막이 꿍시렁거리는 소리에 김민규가 억울함이 가득한 어조로 반박했다.
"나한테 도련님 소리 하라는 거 아니거든? 저 형이랑은 아직 말 안 놓았냐고 물어본 거거든?"
"형은 똑같은 귀족이고, 조슈아 님이랑 어렸을 때부터 본 사이니까 몰라도, 나는 멋대로 말 놓았다간 귀족 모독죄로 잡혀가거든?"
"난 편하게 불러도 상관 없는데."
조슈아가 생긋 웃으며 끼어들었으나, 부승관은 손사래를 쳤다.
"조슈아 님을 형이라 부르면, 그럼 황태자 전하는 형수라 부르게요? 족보 꼬여서 사절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김민규를 향해 휙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아무튼 그래서, 자고 갈 거냐고!"
"몰라. 그럴까 했는데. 왜?"
"그럼 사람 많은 김에 밤에 와인 시음하고 핑거 푸드 뭐로 내놓을지 같이 고르자 하게. 야식 겸해서."
"지금 먹는 건 안 돼?"
"주방에서도 미리 준비랄 걸 해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빨리 결정해. 자고 간다 하면, 지금 바로 주방에 말 넣게."
"좋아! 종류별로 다 먹어보자."
김민규가 잔뜩 신이 난 표정을 지었다.
"디노는?"
조슈아가 고개를 돌리며 묻자 디노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어, 저도 와도 됩니까?"
"당연하지. 야식도 충분할 거고, 사람 많을수록 의견 듣는 데에도 도움 되고."
"그럼 야간 근무 신청하고 오겠습니다!"
"와, 야무지게 야근 수당까지 이중으로 받아먹으려 하네."
부승관이 그렇게 틱틱거렸지만 디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뛰쳐나가느라 대답도 않았다. 이후 디노가 에스쿱스와 함께 돌아와서는 황태자 전하께서도 엄청나게 가고 싶어 하셨지만 어떻게 해도 시간을 못 내시는 듯하고, 대신 그 옆에 얼쩡거리던 에스쿱스 님이 따라오셨다고 설명하였다. 그새 조슈아가 우지까지 설득하여 데려와, 최종적으로 방에 모인 건 여섯 명이었다. 조슈아한테야 지극히 익숙한 사람들이지만 소설 속 멤버들은 각기 다른 신분과 직업 상 이런 조합으로 한데 모일 일이 없었을 테니 처음에는 조금 쭈뼛거리는 듯했으나, 종류별로 늘어선 와인병을 몇 번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금방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이곳의 화제는 조슈아에겐 익숙지 않은 것들이 태반인지라 그는 대부분 가만히 듣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를 지경이었다. 익숙하고 그리운 이들과 함께였기에.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다가 언제 까무룩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음날 조슈아가 눈을 찌르는 햇빛에 부스스 깨어났을 때, 멤버들은 저와 딱히 다를 바 없는 꼴로 아무렇게나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우지와 디노만 이미 가고 없었는데, 테이블 위를 살펴보니 빈 병과 음식의 잔해들 사이에 메모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우지의 필체로, '디노 깨워서 먼저 가봅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밤새 술을 퍼 마시고도 터덜터덜 출근을 해야 하는 이들의 비운이었다. 나머지는 아직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는데, 창밖을 보아하니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지 오래인 모양이라 일단 깨워보는 게 좋을 성싶었다.
"쿱스, 일어나. 민규야, 승관아. 해 떴어."
어깨를 살짝씩 흔들어가며 깨우자, 그들은 눈을 끔벅이며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에스쿱스는 비척비척 화장실을 찾아갔고, 김민규는 테이블 위에서 물을 찾아 들이켰으며, 부승관은 멍하니 앉아있다가 조슈아의 손에 들린 메모에 관심을 보였다.
"그건 뭐예요?"
"아, 디노랑 우지는 먼저 갔대. 그러고 보니 승관이 너는 출근 안 해도 돼?"
"저는 따지자면 이게 일이니까요. 지금 대략 26시간째 연속근무 중이라 볼 수 있죠."
부승관이 하품을 하며 여상하게 대답했다.
"이래 봬도 열심히 기록도 해 뒀어요. 음식이랑 와인이랑 맛이 어땠는지. 어디다 뒀더라......."
그가 더듬더듬 주위를 살피더니, 살짝 구겨진 종이 뭉치를 찾아내어 번쩍 들었다.
"여기 있다! 보실래요?"
술자리 틈틈이 무언가 적고 있더라니 이거였나. 부승관이 넘긴 리스트에는 각종 핑거 푸드 및 와인의 이름과, 각각에 따른 짤막한 평이 남겨져 있었다. 처음에는 '산미가 강함,' '야외에서 냉장 보관이 가능할지 검토 필요,' '화이트 와인과 궁합이 좋은 편,' '나이프 사용이 불가피하여 손쉽게 먹기엔 어려움이 따름' 등 나름대로 참고할만한 의견이 많았으나, 뒤로 갈수록 필체가 흐트러지며 '조슈아 님 취향은 아님,' '아까 마신 거랑 비슷함,' '김민규가 크림 흘림' 등 시답잖은 끼적임 위주가 되어 가는 게 우스웠다. 부승관 본인은 후반부 내용이 이 지경인 걸 알기나 할까 싶었지만, 이런 한 줄 평이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야 도움이 되겠거니 하는 생각에 그저 수고 많았다는 말만 하며 리스트를 돌려주었다.
밤을 꼴딱 새다시피 놀다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났으니, 얼추 매무새를 가다듬고 제정신을 되찾았을 때엔 이미 점심시간마저 살짝 지나간 후였다. 누구 하나 썩 배가 고픈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남은 빵이나 몇 조각 뜯어먹다 에스쿱스와 김민규가 마침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나니 벌써 늦은 오후였다. 곧이어 부승관마저 팅팅 부은 얼굴로 자기는 황태자궁에 다녀와야 하니 먼저 하객 리스트 보면서 좌석 배치 좀 하고 있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자, 방 안은 언제 그렇게 시끌벅적했냐는 양 고요하기만 했다. 어질러진 응접실을 정리하려 하인 하녀들이 우르르 들어오길래 옆에서 도울까 했지만, 윗전이 알짱거리니 불편해 죽겠다는 기색을 풍기길래 조슈아는 얌전히 침실로 피신하였다. 달리 할 일이 없어 부승관의 부탁대로 하객 자리 배치나 해 볼까 했건만, 빙의자 조슈아가 이 세계의 귀족들 인간관계를 알 턱이 있나. 생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다가 결국 포기한 채 침대에 드러누운 조슈아는 어느새 까무룩 다시 잠들었다.
"조슈아 님!"
짧은 단잠을 즐기던 그를 깨운 건 언제 돌아온 건지 눈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부승관의 목소리였다.
"이러실 때가 아니에요! 빨리 단장해야 하니까 세수부터 하고 오세요!"
"단장?"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부승관은 침대 위를 뒹굴고 있는 하객 좌석표를 들춰보더니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못 살아, 이건 손도 안 대셨네?"
남들 일하러 간 사이 빈둥거리기만 한 한량 취급을 받는 듯해 조슈아는 억울한 표정으로 해명했다.
"해 보려고는 했는데,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부승관이 탄식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아 맞다, 얼마 전까지 국외에 계셨지. 맨날 까먹는다니까요, 한 십 년 쯤 매일같이 얼굴 본 사이처럼 느껴져서. 아니, 어젯밤만 해도, 에스쿱스 님이나 디노랑은 몇 번이나 봤다고 그렇게 쿵짝이 잘 맞아요? 완전 신기했다니까."
십 년 쯤 매일같이 얼굴 본 사이가 맞긴 하니까....... 조슈아는 속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은은한 미소로 말을 눙쳤다.
"아무튼 그럼 이건 제가 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빨리 준비하세요! 사용인들도 다 밖에서 대기 중이에요!"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숫제 등을 떠밀어 댈 기세라, 조슈아는 순순히 화장실로 향하면서 물었다.
"근데 뭐 때문에 그러는데?"
"반지요! 그새 깜박하고 있었는데, 오늘 세공사가 약혼반지랑 프러포즈 링 완성해가지고 왔대요! 그러니까 밤에 당장 프러포즈 이벤트 있어요. 하, 스케치도 즉석에서 바로 할 텐데, 디톡스에 팩 얹고 있었어도 모자랄 판에 야식 판을 벌이다니......."
그래봤자 짜고 치는 프러포즈고, 초상화는 알아서 적당히 좀 미화해 그려주지 않으려나. 그렇게 정작 조슈아 본인은 별 생각이 없었으나, 부승관은 '부승관리'의 이름값을 말아 먹은 게 적잖게 분한 모양인지 눈에 불을 켜고 조슈아의 꽃단장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면서 조슈아가 취해야 할 적절한 행동에 대해 일러주기도 하였다. 일단 황태자 전하와 저녁 식사부터 함께 하실 거고, 전에 조슈아 님이 쓰신 시나리오 대로 밥 먹고 밤 산책을 함께 하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청혼을 받으실 거고, 근처에 화공들이 대기 중일 테니 적당히 놀라고 기쁜 척 해 주시고, 근데 너무 의식하지는 마시고, 등등. 옷을 입히고 머리를 매만지던 사용인들의 손길이 거두어지자 부승관이 비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이해 하셨어요?"
"응."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부승관은 눈앞의 문을 냅다 열어젖혔다.
"그럼 다녀오세요!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요."
그 기세에 밀려 힘차게 걸음을 내딛던 조슈아가 번뜩 떠오르는 의문에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잠깐만, 근데 나 어디로 가야 해?"
그러다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누군가를 보지 못해 발을 헛디딜 뻔 하는데, 그가 자연스레 팔을 잡아 받치며 부승관 대신 태연자약하게 대답하였다.
"나만 따라오면 돼."
윤정한이었다. 빙긋 웃는 얼굴이 벅차게 반가웠다. 며칠이나 못 봤다고.
등 뒤에서 사용인들이 꺄꺄 들뜬 환호성을 내는 소리가 들려 괜히 귀 끝에 열이 올랐다.
"어제 애들 불러서 놀았다며? 재밌었어?"
윤정한이 가는 대로 나란히 따라 걸으며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의 해 뜰 때까지 깨어 있었어."
"아, 나도 가고 싶었는데."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 아이 같은 어조에 조슈아는 피식 웃으며 윤정한의 팔을 토닥였다.
"다음엔 미리 말 할게. 너 일정 뺄 수 있게."
"다음이 있어?"
윤정한이 불쑥 그렇게 말했다. 질문보다는 혼자 읊조리는 한탄에 가까운 어조에 조슈아는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아마도 분명, 그냥 아쉬운 마음에 던진 별 뜻 없는 투정일 텐데, 꼭 조슈아가 곧 떠나리란 걸 아는 사람 같이 말을 하니까.
"...없지는 않겠지?"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태연한 척 표정을 꾸며내며 조슈아는 속으로 되뇌었다. 돌아가면, '진짜 너'랑 몇 날 며칠이라도 밤을 새워 어울려 줄게. 윤정한은 가만히 조슈아와 시선을 마주하다 묘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되물었다.
"결혼 전 마지막 자유의 밤, 뭐 그런 거 아니었어? 총각 파티라고 하나. 근데, 그걸 또 하는 거면, 조슈지 인생 계획엔 결혼이 몇 번이나 들어가 있는 거야?"
아, 뭐야,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거야? 윤정한의 얼굴엔 걱정 한숨이 가득 끼어 있는데, 조슈아는 차마 억누르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런 거 아니었어! 총각 파티라니, 생각도 못 했네. 그냥 하객들 대접할 음식이랑 와인 고르려고 시식해보는 자리였는데. 승관이한테 보고서 못 받았어?"
"....응. 안 주던데."
윤정한이 여전히 조금은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부승관도 맨정신에 다시 읽어보니 그대로 윗선에 올리기엔 좀 창피하다 싶었나보다. 조슈아는 윤정한의 머리를 슥슥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무튼 그런 의미 아니었어. 다음에 이렇게 밤새 모여 놀 일 있으면 너도 같이 놀자는 소리였지."
윤정한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저런 오해는 어쩌다 생겨난 건지. 별궁 내의 레스토랑에서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이 어이없는 해프닝이 자꾸만 떠올라 조슈아는 중간중간 난데없이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밖으로 발을 옮겨 넓게 펼쳐진 정원을 돌아다녔다. 그때 버논이가 뭐랬더라, 후원의 호수 앞이 적당할 거 같다 그랬는데, 여기가 후원이긴 한 건지, 호수는 어느 쪽으로 얼마나 가야 나오는지 알 리가 없으니 윤정한이 언제 반지를 꺼내들련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큰 의미 없는 절차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금방이라도 그에게 프러포즈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긴장이 되었다. 태연하게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싶었는데, 막상 입을 열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예쁘게 하고 나왔네."
다행히도 윤정한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 응. 이 옷차림 그대로 초상화에 들어간다며."
"긴장 돼?"
사실 초상화 때문은 아니었지만,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었으니 조슈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너무 의식하지 마. 정식 초상화도 아니고, 구도 상 멀고 어두워서 제대로 묘사도 안 될 거야."
"익숙해 보이네. 네 초상화는 자주 그리는 편이야?"
윤정한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원랜 더 있어야 했는데, 내가 하도 질색을 해서 몇 점 없대. 마지막으로 그렸던 게 언제라 했더라... 하여간 어릴 때 초상화인데, 아직도 황후궁에 있을걸?"
"와, 보러 가면 안 돼?"
꼬마 왕자 윤정한의 초상화라니, 말도 안 돼. 너무 보고 싶어. 조슈아가 눈을 반짝였다. 윤정한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내뱉었다.
"너는 아직 황후궁 못 들어가."
"네가 초상화만 떼 오면 안 돼?"
"나는 보기 싫은데."
"그럼 넌 보지 마. 들고 오기만 해."
"안 들고 올 거야. 정식으로 황족 되면 네가 직접 보러 가."
결혼 이후에 하고픈 일 따위 없었는데, 방금 하나 생겼다. 조슈아는 생각했다. 나를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시점은 언제가 될까? 부부가 되겠다는 맹세가 끝났을 때? 아니면 피로연까지 끝난 후? 여기도 혼인신고 절차가 따로 있나? 그것까지 끝마쳐야 하려나? 이전까진 신랑 신부 행진 끝나자마자 뿅 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만을 바랐는데, 지금은 하룻밤 정도의 말미는 주어지면 좋겠다는 심보였다. 황후궁에 슬쩍 들어가 볼 여유가 있도록.
언젠가부터 잔잔한 물 소리가 들린다 싶더라니, 어느새 눈앞에 윤슬이 반짝이는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싱그러운 초목의 향기와, 적막을 깨는 풀벌레의 울음소리까지 어우러져 참으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와, 너무 넓어서 순간 바다인 줄 알았어! 궁 안에 어떻게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을 수가 있지?"
그렇게 외치며 윤정한을 돌아보는데, 창백한 달빛 아래 서 있는 그의 손 위에 무언가 얹혀 있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네모난 상자와, 그 안에서 찬연한 빛을 반사하고 있는 반지 하나.
"슈아야."
평소보다 살짝 낮은, 진중한 목소리. 이성적으로는 전부 인지하고 있었다. 이건 다 진작 합의했던, 조슈아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까지 짠 쇼에 불과하고, 저 풀숲 어딘가에 화공들이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거고,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다 알면서도, 한 발짝 다가와 내 왼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는 윤정한에게, 웃음기 하나 없어 조금은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짓고 날 올려다보는 윤정한에게, 그리고는 내 손끝에 이마를 가져다 대며 간절한 기도를 올리듯 두 눈을 꾹 감는 윤정한에게 조금도 떨리지 않을 방도가 있을까?
"나랑 결혼해줄래?"
손바닥에 살짝 땀이 배어드는 듯해 꽉 주먹을 쥐고 싶었으나, 윤정한이 여전히 손끝을 붙들고 있던 터라 그러지도 못했다. 조슈아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살짝 빨라진 심장 박동과는 달리, 제 목소리만은 떨리지 않고 평온한 어조로 들려 다행이었다. 온몸에 엔돌핀이 도는 기분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한 기분도 아니었으니 사실 당연한 현상이었다. 지극히 기뻐하고 감동받기엔, 이 청혼은 '진짜'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마터면 웃으며 휘어지는 윤정한의 눈빛에 깜박 속아 넘어갈 것만 같아, 조슈아는 속삭이며 재촉했다.
"얼른 끼워줘."
그제야 윤정한이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 실물로 보니 더욱 터무니없이 화려해 보이는 프러포즈 링을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반지 위에 입을 맞추었다. 상당히 오래. 기다리다 못해 조슈아가 살짝 손을 흔들며 타박을 줄 정도로,
"언제까지 꿇고 있게?"
윤정한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속닥거렸다.
"지금이 하이라이트니까 좀만 더 기다려. 스케치는 끝낼 수 있게 해야지."
다분히 현실적인 발언에 다행히도 상황 파악 못하고 떨렸던 심장이 차차 진정되었다. 윤정한은 몇 분을 더 그 상태를 유지하다 갑작스레 외쳤다.
"다 끝났어?"
그러자 나무 그늘 아래, 풀숲 사이, 하여간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 틈 여기저기에서 화공들이 쏙쏙 튀어나오며 대답했다.
"네, 전하!"
그제야 윤정한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화공들에게 말했다.
"어, 수고했어, 늦은 시간에. 이제 돌아가도 돼."
화공들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주섬주섬 스케치 도구를 챙겨 들고, 윤정한과 조슈아가 걸어왔던 방향으로 하나둘 사라졌다. 맥 빠질 만큼 허망한 마무리였다.
"끝났으면 우리도 돌아갈까?"
조슈아가 묻자, 윤정한은 반대편 길을 고갯짓하며 대답했다.
"별궁은 이쪽으로 가는 게 지름길이야."
"아, 그래?"
윤정한이 이끄는 대로 조용히 걸어가자니, 침묵이 묘하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반지의 무게가 느껴지는 왼손을 그에게 잡힌 채라 그런지, 아니면 형식 상이더라도 아무튼 방금 난생 처음으로 청혼을 받은 참이라 그런지. 그래서 조슈아는 침묵을 깨기 위해 부러 말을 걸었다.
"수고했어, 이렇게 준비 하나 또 끝냈네!"
"그러네. 슈아 너도 수고했어."
먼저 입을 연 보람 없이 또 침묵이 흐르려나 싶었는데, 윤정한이 덧붙였다.
"내일은 공식 발표가 있어서, 시간 되면 황궁으로 오라고 할 거야. 너는 그냥 인사말 정도만 하면 되니까 부담 가지지 마."
"알겠어. 아, 근데 이 반지는 내가 계속 끼고 있어?"
문득 생각나서 묻자, 윤정한이 서서히 걸음을 늦추더니 이내 완전히 멈추어 서며 대답했다.
"내일 발표 때까지는. 많이 불편해?"
"아냐, 괜찮아. 안 끼다가 그래서 좀 어색한 것뿐이지. 그것도 겨우 하루밖에 안 되는데."
"다행이네. 그리고 슈아야, 마침 반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윤정한이 주머니에서 또 다른 케이스 하나를 더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열어 보였을 때, 조슈아는 순간 너무나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처음 디자인을 고를 때부터 팀 반지가 떠오른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완성품을 직접 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흡사했다. 윤정한은 한 쌍의 반지 중 하나를 먼저 꺼내 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건 우리 약혼반지야. 앞으로 며칠 안 남긴 했지만, 결혼식 날까지는 계속 끼고 다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 마음에 들어?"
그리고는 제 새끼손가락에 그 반지를 끼워 넣었다. 삽시간에 머릿속이 두배로 복잡해졌다. 원래 이 세계는 약혼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나? 아니면 어두워서 잘못 낀 걸까.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에 낀 걸 보니 그럴 가능성도 충분해 보였다.
"정한아."
속절없이 흔들리는 제 목소리가 윤정한에게는 어떻게 해석된 걸까. 그가 남은 반지 하나를 마저 집어 조슈아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워 넣으며 설명했다.
"일을 급하게 하느라, 이 자리엔 프러포즈 링부터 들어가게 됐잖아. 그래서 약혼반지는 그냥 새끼손가락 사이즈에 맞춰 달라고 했어."
왜일까, 윤정한의 눈빛도 조슈아 못지않게 심란해 보였는데,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다만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조슈아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순간 입이라도 맞추려나 싶었는데, 윤정한은 그저 조슈아와 이마를 맞대고 긴 한숨만 폭 내쉬었다. 제 얼굴을 간지럽히는 그 숨결을 느끼며, 조슈아는 두 눈을 감고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고백의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달빛 아래 호수처럼 로맨틱한 장소도 아닌, 그냥 흔한 오솔길 가운데인데. 순간 이 윤정한이 그와 같은 기억과 경험을 지닌, 현실의 윤정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한참을 어리석게 가슴 뛰게 만들었다. 아마 전부 우연에 불과할 텐데, 그럴 리 없다고 명호도 말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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