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10)

로판AU

그 밤, 윤정한이 다정한 남자친구마냥 별궁 문 앞까지 조슈아를 바래다주고, 헤어지기 싫은 양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괜히 손을 매만지고 바람이 시원하다는 둥의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다가, 마침내 헤어진 후 방으로 돌아와 잠이 들기 전까지, 조슈아는 내내 왼쪽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익숙하기에 더욱 낯선 감촉이었다. 윤정한이 제 궁으로 돌아가기 직전, 용기를 가득 그러모아 혹시 이 반지를 이전에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느냐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온 세상이 제게 경고하듯 불길하게 울렁이는 느낌이 훅 하고 몰려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발언의 자유를 가차 없이 박탈하는 막돼먹은 이 세계에 대한 욕만 속으로 무진 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쉬이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거린 건 당연지사였다. 다음날 공식 석상에 조슈아를 세우기 위해 일찍부터 치장을 도우러 온 사용인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참담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제는 술과 야식판 때문에, 어제는 갖가지 상념으로 인해 이틀이나 연달아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않았으니 조슈아 자신이 보기에도 눈가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나 보이긴 했다.

"조슈아 님께서는 원체 아름다우시지만, 그래도 결혼식 날에는 생애 그 어떤 순간보다도 빛이 나셔야 하니까요. 주제넘은 참견일 수도 있지만, 푹 쉬실 수 있게 일을 조금 줄여달라고 요청하시는 게 어떠실까요?"

그의 머리를 매만지는 내내 하고픈 말이 많은 양 계속 입술을 달싹거리던 사용인 하나가 마침내 눈 딱 감고 직언을 고했다. 다른 사용인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는지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사실 일 때문에 늦게 잔 건 아니었으니 조슈아의 양심만 조금 찔려왔다.

"일이 버거워서는 아니고, 그냥 잠이 잘 안 와서....... 걱정 끼쳐서 미안. 신경 쓸게."

멋쩍은 기분에 그렇게 대답하자 다들 황공함에 머리를 조아려 조슈아를 더욱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저들끼리 잠이 잘 오는 향을 피워야 한다느니, 차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다가, 급기야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보는 게 낫지 않을지 열띤 의논을 시작한 건 덤이었다.

각종 제안과 권유 속에서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윤정한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본궁에 가 있을 줄 알았는데."

윤정한이 깍듯한 태도로 한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별궁 앞뜰부터 벌써 기자들이 쫙 깔려 있더라. 그래서 마중 나왔어."

"다정한 약혼자처럼 보이겠네."

"그것보다는, 너 혼자 오다가 놀랄까 봐 에스코트 온 거지."

방심하고 있을 때마다 꼭 한 번씩 저렇게 윤정한은 눈 한 번 깜박 안 하고 꿀 바른 말을 했다. 정작 조슈아의 알맹이는 이제 와서 기자들 따위에 기죽을 영혼이 아니었는데도. 현대처럼 다들 핸드폰에 대포 카메라 찰칵거리며 서 있을 것도 아닐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항 않고 얌전히 윤정한의 손을 맞잡자,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반지, 잘 어울려."

"어떤 반지?"

스타일이 전혀 다른 반지 두 개가 나란히 손에 끼워져 있는데. 물론 조슈아의 마음이 기우는 반지는 단연 팀 반지의 복제품이나 다름 없는 약혼반지 쪽이었으나, 윤정한 역시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윤정한은 순간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긴 속눈썹만 여닫더니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 당연히 둘 다 어울리지. 결혼반지도 분명 잘 어울릴 거야."

"그것도 벌써 완성됐어?"

"아직. 그치만 디자인만 봐도 딱 알겠잖아."

"그래? 난 너랑 더 잘 어울릴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예쁘잖아."

다른 의도 없이 그냥 떠오른 대로 툭 던진 말이었는데 윤정한이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왜 조용해졌나 싶어 흘깃 옆을 바라보았더니, 고집스레 앞을 쳐다보는 그 입가가 억지로 표정을 숨기려는 양 단호하게 억눌려 있는 모양새가 눈에 띄었다. 기분 탓일까, 마주 잡은 손도 조금은 축축해진 것도 같다. 설마 수줍음을 타고 있는 걸까. 어이없어. 내가 너한테 예쁘다는 소리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한 말이라고, 이렇게 갓 사귀기 시작한 풋풋한 사이처럼 어색한 반응을 하는지. 가끔 윤정한은 이랬다. 애정과 인정을 확인받고 싶다는 티를 넌지시 비치다가도, 정작 솔직하게 칭찬을 퍼부으면 별것 아닌 말에도 미약한 당황을 내보였다. 그게 재미있고 또 귀여워서 놀려대고 싶었지만 희한하게도 윤정한의 긴장이 저한테도 옮겨오는 듯해, 덩달아 심장이 들떴다. 지금까지 사심 채우지 않고 열심히 사무적 태도로 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깟 반지 한 쌍 나누어 끼었다고 속절없이 과몰입을 하는 꼴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그렇지만 갑자기 등장한 '팀 반지'라는 존재는 여태껏 가상 현실 정도로 느껴지던 낯선 세상에 요상한 친밀감을 섞어버렸다. 같은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나누어 낀 윤정한은 한층 더 현실의 윤정한과 동일하게 느껴졌으니. 그래도 의식 안 하는 척 태연하게 굴고 싶었는데, 아마 실패한 모양이었다. 별궁을 나서 본궁으로 향하는 길에 깔려있던 기자들이, 제각기 수첩을 손에 든 채 뭐 하나라도 캐물으려고 다가오다가 둘 사이에 흐르는 은근한 기류에 다들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으니.

본궁은 조금 더 경비가 삼엄하다는 점을 제외하고선 황태자궁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김새였고, 황실의 실시간 방송이 송출된다는 '크리스탈 홀'은 조슈아의 짐작대로 기자회견장과 흡사한 구조였다. 카메라 대신, 단상 앞에 거대한 타원형 크리스탈 판이 세워져 있다는 점만 특이했다. 윤정한이 이끄는 대로 그 앞에 나란히 서자, 평범한 거울마냥 크리스탈이 그들의 상을 그대로 맞비추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모습이 그대로 전국에 방송되는 거야?"

"응. 안 그래 보이지?"

"솔직히 그냥 거울 같아 보이니까. 거울아 거울아, 하는 동화 속 나쁜 왕비가 된 기분이야."

그 말에 윤정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내가 착하고 불쌍한 공주야?"

어딜 사람을 냉큼 악역으로 만들려고. 조슈아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정한이 넌 원래도 왕자님인데 왜 공주 자리까지 노려. 그건 다른 사람한테 양보해."

"다른 사람 누구. 왕자님이 결혼할 사람은 나쁜 왕비 하신다는데."

태연히 그렇게 대답하는 꼴에 도리어 조슈아가 말문을 잃고 말았다. 오늘따라 더 이런 일이 잦은 것 같았다. 윤정한이 연애사에 능글맞게 구는 사람이라 여겨본 적은 없는데, 평소라면 못 할 말을 지금은 잘만 뱉고 있었다. 청혼 승낙까지 받았으니 이제 마음이 편해진 걸까. 잡은 고기라 이건가. 윤정한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알면서도, 그 속내를 알 길이 없으니 조슈아는 도르륵 눈만 굴렸다. 마침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고했다.

"전하, 기자들을 들이겠습니다."

문이 열리며 열댓 명의 기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이 착석하는 동안 로브를 입은 마법사 하나가 단상으로 다가왔다. 혹시 디에잇이나 호시일까 봐 유심히 보았으나, 이 마법사는 처음 보는 얼굴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윤정한을 향해 꾸벅 인사를 올린 후 크리스탈에 한 쪽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준비 되셨으면, 크리스탈을 시동하겠습니다."

윤정한은 회장의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 앉았음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조슈아와도 눈을 맞춘 후에야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도록."

곧바로 크리스탈에서 웅웅거리는 나지막한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증폭되던 그 소리는, 크리스탈에서 은은하게 하얀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하며 잠잠해졌다. 신기한 눈길로 시동 과정을 지켜보던 조슈아에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자체 뽀샤시 필터까지 있네'라는, 방송에 지극히 익숙한 현대인다운 발상이었다. 마법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주었다. 윤정한이 별반 긴장한 기색도 없이 운을 떼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국민 여러분. 윤정한입니다."

자고로 이런 대국민 발표는 근엄하고 권위 있기 마련인데, 하필 발화자가 윤정한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그리 딱딱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윤정한은 생글거리는 웃음과 함께 지체 없이 본론을 투척했다.

"최근 제게 평생을 함께 하고픈 사람이 생겼습니다. 다행히도 그 분 역시 저와 같은 마음이었음을 확인하여, 얼마 전 약혼 관계를 맺은 바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윤정한은 자연스럽게 조슈아의 왼손을 잡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네 번째 손가락에서 휘황한 빛을 발하고 있는 화려한 반지가 크리스탈에 선명하게 비쳐 전 국민에게 보이도록.

"그리고 어제, 서로를 향한 그 마음이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을 확신하며 그 분께서는 제 청혼을 받아주셨습니다. 앞으로 5일 후,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황실의 일원이 되실 저의 반려이십니다."

윤정한이 눈짓으로 이제 조슈아가 인사 할 차례임을 알렸다. 조슈아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조슈아입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많이 배우고 노력하여 국민 여러분께 부끄럽지 않은 모습 보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옆에서 윤정한이 슬며시 웃는 게 곁눈으로 다 보였다. 제 생각에도 결혼 발표보다는 오디션 프로 출연자의 각오와 흡사한 발언이긴 했지만, '예쁘게 잘 살겠습니다' 따위의 말을 하는 건 조금 낯간지러웠다. 그런 건 윤정한의─정확히는 보좌관들이 써 준 대본의─몫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식을 서두른 데에는 우선, 황제 폐하께서 병상에 계신 현 상황에서는, 허례허식 없이 신속하고 간소하게 식을 진행해 황실과 민생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이 있었으며─"

윤정한이 그럴듯한 말을 한참 나불거리는 동안 조슈아는 그 소리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며 고운 미소를 유지하기나 하는 중이었다.

"─물론 여전히 우려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비록 저희의 약혼 기간은 짧았으나, 저와 조슈아는 어린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로, 서로를 오래 알아 온 만큼 견고한 신뢰와 우정에 기반한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윤정한이 달게 웃으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순간 넋을 놓고 하염없이 마주 보고 있게 만드는, 정말로 순수한 기쁨이 담뿍 담긴 듯한 시선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침묵이 흐르다, 윤정한이 다시 크리스탈을 돌아보며 말했다.

"믿고 지켜봐 주시며, 저희의 앞날을 함께 축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열심히 속기를 하며 윤정한의 발표를 듣고 있던 기자들로부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법사가 다시 크리스탈에 손을 올리자, 어른거리던 빛이 점차 희미해지더니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회견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윤정한이 이번에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관계 상, 딱 다섯 분만요."

열렬한 손들이 천장을 향해 솟구쳤다. 윤정한은 그 중 아무나 하나를 꼽아 가리켰다. 지목 받은 기자가 들뜬 표정으로 일어서더니 물었다.

"프러포즈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나요?"

윤정한은 이미 이런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한 옅은 미소를 띄고, 절차와 편의성만을 우선했던 별 볼 일 없는 청혼을 온갖 낭만으로 포장해댔다. 졸지에 호수 앞은 그들이 유년 시절 자주 함께 놀았던 추억의 장소로, 한 자리에서 같이 골랐던 프러포즈 링은 조슈아의 평소 취향을 고려해 윤정한이 고심 끝에 선택한 깜짝 선물로 포장 되었으며, 애초에 프러포즈 시나리오의 작성자였던 조슈아는 뜻밖의 이벤트에 무척이나 놀라고 감격하여 뛸 듯이 기뻐했다는 날조가 이루어졌다. 거기서마저 적당히 멈출 줄을 모르고 "얼마나 기뻤는지 슈아가 눈물을 글썽─"까지 이르렀을 때 더는 참지 못한 조슈아가 남몰래 윤정한의 손을 터뜨리기라도 할 기세로 꾹 움켜쥐었고, 윤정한은 재빨리 "─할까 기대도 했지만, 울지는 않더라고요~"로 말을 끝맺었다.

다른 질문들도 결이 비슷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황태자의 로맨스를 하나부터 열까지 캐내고 말겠다는 열띤 호기심이 이글거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윤정한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는 그들의 니즈에 꼭 맞는 스토리를 뚝딱 지어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셨다고 하는데, 그것이 연심으로 발전한 건 언제부터냐'라는 질문에는 '단순한 친구라고만 여겼었는데, 슈아가 긴 유학 생활로 떠나있을 때 그가 몹시 그리워져 이게 단순한 우정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라고 답했고, '정식으로 약혼 발표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어떤 식으로 교제가 이루어졌냐'라는 질문에는 '슈아가 한 해의 대부분은 타국에서 지냈기 때문에 서신을 많이 주고받았다'는 대답을 하였다. '공작가가 외척으로서 정계에 지나친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라는 다소 예민한 질문이 하나 나왔으나, 이 역시 예상한 질문인지 윤정한은 단호하고 당당한 태도로 이 결혼으로 인해 공작가가 얻은 특혜는 아무것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일축했다. 물론 조슈아는 '아버지'와의 대화로 인해 윤정한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꼬집지는 않았다.

이내 마지막 질문자였다. 기자는 조심스레 조슈아를 응시하며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질문에는 조슈아 님께서도 함께 대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서로의 어떠한 점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셨나요?"

흔한만큼 쉬운 질문인 동시에 너무나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조슈아가 곧바로 답하지 않고 망설이자, 윤정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황족의 결혼은 개인의 마음만으로 강행하기엔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슈아는 황자비로서도 부족한 점 없이 훌륭히 책임을 다하리란 생각에, 제 평생의 동반자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모범적인 답변이었다. 너도 이렇게, 적당히 대중들이 듣기 좋을 말로 응수하면 된다는 듯, 윤정한이 조슈아를 향해 눈짓했다. 기자들 역시 조슈아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망설였던 건, 무구한 기자의 질문이 괜히 조슈아의 아픈 구석을 찔렀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버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라는 말 못할 진실. 그러나 실은, 원래부터 자신은 윤정한을 좋아했기에 이야기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와 버린 것이라는 구차한 내막. 마침내 조슈아가 입을 열고 내뱉은 대답은, 윤정한의 대답 못지않게 낭만의 탈을 쓴 거짓으로 점철된 말이었다.

"저는 아주 옛날부터 정한이를 좋아했어서, 정한이가 제 마음을 알아주고, 또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려주었을 때 당연하게 결혼까지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정한이의 마음을 보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여태껏 스스로는 특별히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던 조슈아의 솔직담백한 발언에 기자들이 대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윤정한이 살짝 커진 눈으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조슈아는 모른 척 외면했다. 윤정한도 피차 대외용 거짓말을 떠벌려댔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 앞에서 입에 발린 말을 뻔뻔스레 내뱉은 건 상당히 부끄러웠다. 더 듣고 싶은 비화가 많은지 또다시 기자들이 열심히 손을 들고 흔들었지만, 뒤늦게 윤정한이 엄정한 태도로 선언했다.

"이상으로 질의응답을 마치겠습니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쉬운 기색을 내보이며 기자들이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냈다. 윤정한은 조슈아의 손을 잡고 일어선 후 크리스탈 홀을 나섰다. 띄엄띄엄 경비를 서고 있는 인원 이외에는 한산한 복도를 함께 걸으며, 윤정한이 치하의 말을 건넸다.

"수고했어. 잘 하던데."

"음,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낯설지 않아서."

윤정한이 짧게 웃었다.

"낯설지 않다고만 할 수준이 아니던데. 대답을 너무 설득력 있게 했잖아. 날 그렇게 오래 좋아했어?"

장난스런 말투다. 똑같이 짓궂게 받아칠까 잠시 고민이 되었으나, 잠이 부족한 탓인지 그러기도 피곤하여 조슈아는 무던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그냥, 너 대답하는 것처럼 따라 한 거지."

"너도 승관이가 대본이라도 써 줬어?"

"그건 아닌데."

"그럼 어쨌든 즉석에서 지어낸 말이라는 거잖아. 와, 슈아 적성 찾았네. 앞으로 공식 회견은 네가 나 대신 다 해 줘야겠다."

"아니야. 전부 지어낸 건."

윤정한이 눈만 두어 번 깜박였다. 그리고는 물었다.

"어떤 게 지어낸 말이 아니었는데?"

조슈아는 알 수 있었다. 아마 지금 윤정한이 바라는 대답은 '널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말'이라는 걸. 하지만 그거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내가 좋아한 건 엄밀히 따지자면 황태자 윤정한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진실이었던 쪽은.

"네 마음을 보고 결심했다는 말. 정한이 네가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안 먹었으면, 이렇게 될 일은 없었겠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널 좋아하던 내가 이 세계에 빙의된 탓에 네가 본래의 여주인공 대신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게 이 세계의 탈출 조건이 되지 않았으면'이겠으나, 거기까지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당연히 그랬겠지."

낮고 조용한 대답에 조슈아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슈아를 마주 보는 대신 허공을 아무렇게나 응시하고 있는 윤정한의 눈빛이, 유달리 공허하고 서글퍼 보임에 당황했다. 꼭 제가 한 말에 상처받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까지 서운할 말을 한 것 같진 않았는데. 아, 듣기에 따라서는 윤정한이 황태자라는 입지를 휘둘러 결혼을 강요했다는 암시로 들릴 수도 있으려나.

"잠시만, 정한아, 네가 신탁 때문에 억지로 결혼을 시켰다는 의미가 아니라─"

"에이, 처음에 약혼하기 싫다고 했던 건 맞잖아.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써?"

윤정한이 다시금 미소 지으며 방금 전보다는 밝은 목소리로 받아쳤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아내는 미소가 아님은 자명했다. 어떻게 해명해야 좋을지 조슈아가 입술만 달싹거리는 사이, 윤정한은 야외로 이어지는 문을 열며 말했다.

"나는 이제 황태자궁으로 갈게. 슈아는 다시 별궁으로 가지? 피곤해 보이는데, 푹 쉬어."

윤정한을 붙잡고 싶었다. 진실은 어느 하나 밝힐 수 없다곤 하더라도, 이대로 윤정한을 상처 받은 채로 그냥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그치만, 붙잡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 제게 이 윤정한은 소설 속 허상에 불과하며, 이 윤정한에게 자신은 며칠 후면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기억 한 조각 남기지 않을 무의미한 존재일 텐데. 결국 조슈아는 멀어져가는 윤정한의 손끝을 다시 붙들지 못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응, 그럴게. 많이 바쁜 것 같던데, 혹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불러줘."

"어, 승관이 편에 보낼게. 고마워."

무미건조한 인사를 남기고, 둘은 각자의 방향을 향해 발을 돌렸다. 걸음걸음마다 마음에 돌이 얹힌 듯 무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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