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完)

로판AU

어떻게 윤정한의 집까지 당도했는지 흐릿했다. 매 순간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정신은 아직 소설 속 세계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며칠 동안, 윤정한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가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자 빙의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비로소 이해가 가는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아하기만 한 것들. 그리고, 만약 제 가정이 옳다면, 그 전제가 성립한다면, 그렇다면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듯한 몇 가지 것들을.

조슈아는 현관문 앞에 당도하고서야 전화를 걸었다. 퇴로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아마 윤정한은 꿈속의 조슈아가 진짜 자신이었던 줄을 아직 모르고, 고로 자신이 왜 이 시간에 찾아왔는지도 모를 테니 오밤중에 몰래 도망치지야 않겠다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연결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 슈아야."

살짝 잠긴 목소리. 조금 전까지 기나긴 꿈을 꾸고 있던 여파겠지. 조슈아는 다짜고짜 선언했다.

"나 너희 집 앞이야. 잠깐 들어가도 돼?"

"...이 시간에?"

"자세한 건 들어가서 말해줄게. 춥다, 여기."

사실은 그렇게까지 추운 건 아니었으나, 이렇게 말하면 더는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문을 열어주리라는 걸 알고 한 소리였다. 한때는 그게 그저 걱정이 많은 성정 때문에, 타인에 대한 염려도 깊은 것 뿐이라 되뇌곤 했다. 이렇게나 투명한 단서들 투성이었는데, 왜 결론은 못 내고 같은 곳을 맴돌기만 하였는지. 실은 지금도 제 가정에 확신은 없으나, 적어도 윤정한이 그 확신을 제게 줄 수 있도록 담판을 지을 용기와 의지는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예감도 함께. 웃기게도, 그 세계에서 겪었던 일 덕택이었다. 모든 게 일시적 환상이며 허구라 믿었던 세상에서, 되돌아보니 내내 현실과 변함없이 올곧게 빛나고 있었던 건 너의 애정과 다정이었으니까.

"...지금 나가."

예상한 대로 윤정한은 지체 없이 문을 열어주었으며, 맨얼굴에 잠옷 차림이긴 했어도 바로 직전까지 자다 막 깬 얼굴은 아니었다. 조슈아와 거의 동시에 소설 속 세계에서 퇴거하였으니, 저와 비슷한 시간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는 못했던 것이리라. 떠보듯 물었다.

"안 자고 있었어?"

"자다가 깼는데 잠이 안 와서."

윤정한도 마찬가지로 조슈아의 옷차림을 눈으로 쓱 훑고는 되물었다.

"너야말로, 자다 나온 거 아냐?"

잠옷 위에 아무렇게나 집히는 대로 외투 하나 간신히 걸치고 나왔으니, 합당한 추론이다. 결코 평소의 조슈아답지는 않은 행동이었으나, 그는 집안으로 발을 들이며 뻔뻔스레 대꾸했다.

"응, 나도 자다 깨서."

"자다 깨서, 갑자기 여기로 온 거야? 악몽이라도 꿨어?"

농담으로 하는 소리인 걸 안다. 놀려대는 어조와는 상충 되게, 윤정한의 시선은 혹여 조슈아에게 무언가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봐 그의 표정을 낱낱이 뜯어보는 중이었으니까. 저 역시도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고 난 직후임에도, 기이하게 구는 그를 먼저 걱정하여서. 그런 일 없다고 안심부터 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조금은 허황되지만 동시에 중대한 이야기의 화두를 떼기에 이보다 좋은 말은 없을 듯해, 조슈아는 진지하게 받아쳤다.

"처음에는 황당했고, 짜증도 좀 나고, 답답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좋은 꿈이었어. 들어 봐."

그렇게 조슈아는 한밤중에 갑작스레 윤정한의 집에 들이닥쳐,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제가 꾼 꿈 얘기의 큰 줄거리를 풀어나갔다.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은 실존하지도 않는 어떤 나라의 공작가 도련님이었고, 어느 무도회에 갔다가 갑자기 황태자와 결혼을 해야 할 상황에 처했는데, 그 황태자가 너였다고. 다른 멤버들도 각기 다른 신분과 직업을 가진 채 그곳에 있었고, 굉장히 무례한 아버지도 있었으며, 결혼을 서두르느라 정신 없고 바쁘긴 했지만 재미있기도 하였고, 마침내 결혼이 성사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고. 시작부터 익숙한 설정에 당황으로 얼룩진 눈동자를 마구 굴려대던 윤정한은, 이내 창백하게 표정을 굳힌 채 아무런 첨언도 없이 가만히 조슈아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했다.

"...신기한 꿈을 꿨네."

"정한아, 모르는 척 하지 마. 너도 같은 꿈 꿨잖아."

윤정한은 말없이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아니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웃으며 부정하고 싶지만, 이미 조슈아가 모든 걸 확신하고 이 자리에 앉아있으니 부질없는 반항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거겠지. 한참이나 이어진 침묵 끝에 윤정한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게 진짜 너인 줄은 몰랐지만."

"나도 진짜 너인 줄 모르고 있었어. 돌아오기 직전에야 알았지."

"진짜 꿈 같은 경험을 했네. 다른 멤버들한테 말해봤자 못 믿겠지?"

윤정한은 부자연스러우리만치 가벼운 태도를 꾸며내며 조슈아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덧붙인다.

"그러니까, 우리도 그냥 꿈 꾼 셈 치자. 서로가 진짜인 걸 알아보지도 못하고, 너나 나나 환상으로 치부하던 경험이잖아."

말은 태연하게 하면서, 그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는 빤히 다 들여다보였다. 이건 윤정한의 필사의 발버둥이다. 어떻게든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발악. 아무리 승률이 높은 도박이라 하더라도, 감히 그들의 이 관계를 판돈 삼을 수는 없는 그의 나약한 구석. 그렇지만, 윤정한이 약해질 때마다 그를 단단히 받쳐주는 건 언제나 조슈아의 몫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항상.

"정한아, 없던 일로 덮어두길 원했다면 내가 이렇게 널 찾아왔겠어?"

윤정한이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지. 알겠어, 슈아야. 뭐가 그렇게 궁금해?"

"물어보면 대답해주긴 할 거고?"

"여긴 발언의 제약도 없는 세계인데 무슨 그런 걱정을 해."

그보다는 곤란한 질문에 윤정한이 회피를 택할 것을 걱정하여 뱉은 물음이었지만, 제 의도를 알 텐데도 저렇게 의뭉을 떤다. 조슈아는 그를 가볍게 흘겨보며 물었다.

"너도 원작 소설을 읽었던 거야?"

"인터넷에 있던 그거? 읽었지."

"너도 여주인공을 만난 적은 없지?"

"어. 처음부터 없었어. 사실 있었어도 몰랐을 걸. 워낙 대충 읽었더니 누가 누군지 기억도 잘 안 나더라."

"약혼반지는, 일부러 우리 반지처럼 만든 거고."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그렇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슈아 너도 한눈에 알아봤겠네. 그래서 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구나.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네 의사대로 만든 결혼반지보다도."

이런 모습도 문득 의아했던 순간이 있었다. 어떻게 너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부러 외우려 드는 기색도 없이 무심하게 다 꿰고 있는지. 이제는 그 의아함마저 제 기대를 뒷받침해 줄 하나의 증거가 되었으나, 속단하지 않으려고 맘에도 없는 핀잔을 구태여 주었다.

"네가 내 의사 챙겨주려고 그랬겠어? 그냥 디자인하기 귀찮았던 거면서."

윤정한은 재차 웃음으로써 대답을 무마했다. 조슈아는 다음 질문들을 혀끝에 올렸다. 사실 이제까지는 이미 얼추 이해하고 있던 것들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문답은 지금부터였다.

"너는 언제부터 소설 속에서 지냈던 거야?"

"현실 시간으로는 어젯밤부터지. 너도 그렇지 않아?"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도. 그러면... 소설 속 시간으로는?"

윤정한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열심히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세어 보더니, 되려 조슈아에게 되물었다.

"헷갈리는데. 슈아 넌 언제부턴데?"

"황궁 무도회 날."

"아~ 그런 거 같긴 했어."

그러고는 잠시 멈추었다가, 희한한 질문을 추가로 던진다.

"너는 거기서 있었던 일을, 전부 한 번씩만 겪었지?"

"뭐라고?"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질문을 되감아 본 후에야 조슈아는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잠깐, 그럼 너는 여러 번 겪었다는 소리야?"

"두 번. 그래서 정확한 일수가 좀 헷갈리네. 두 번째에서는 식을 좀 더 빨리 올렸으니까. 며칠이나 차이 났었더라......."

다시 손가락을 접기 시작하는 윤정한을 제지하며 조슈아가 다시금 물었다. 지금 일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두 번? 똑같은 일을?"

"어. 무도회도, 신탁도, 반지며 식 준비도 전부."

절로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 솔직히, 너도 현실에서 빙의된 걸 수 있겠다는 의심을 했었거든? 근데 에잇이가 하도 단호하게 그럴 리 없다고 한데다가, 네가 평생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황태자 일을 잘 하니까, 그냥 내 착각인 줄 알았어. 그런데 한 번 해 봤어서 잘 했던 거구나."

"부승관 채찍이 무섭긴 하더라. 처음에 걔가 날 얼마나 들들 볶았는지 너도 겪어봤어야 했는데."

윤정한은 저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조슈아에게 물었다.

"근데 에잇이랑 뭔 일이 있었길래 그런 대화를 다 했어?"

조슈아는 마탑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다 듣고 난 윤정한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너는 그런 대화를 다 할 수가 있었다고? 에잇이랑? 제약 없이? 와......."

"에잇이랑만. 너한테 말해보려고 했을 때는 안 됐으니까. 넌 마탑주랑도 못 했던 거야?"

"에잇이랑만 가능했던 게 아니라, 나랑만 불가능했던 거일 걸. 그건 빙의해 들어온 주인공한테만 적용되는 제약이고, 주인공은 하나 뿐인데, 그게 네가 아닌 나였으니까."

"넌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

이번에는 윤정한이 제 이야기를 풀어놓을 차례였다. 조슈아보다는 훨씬 길게 이어진 이야기였다. 윤정한이 겪은 어설펐던 첫 회차의 경험과, 그때 경험했던 소설 속의 조슈아, 그리고 그게 영 어색하고 불편해서 끝끝내 도망치다가 딱 걸렸을 때. 그의 이야기 중 반쯤은 '신'을 향한 불평이었다. 지 세계에 있는 애들이 누굴 본떠서 만들어졌다는 그 사실 하나를 몰라서 일을 이렇게나 꼬았으며, 느닷없이 여주인공이 사라진 것도 그래서였다고. 무슨 감정 에너지가 필요해서 사람을 주기적으로 납치해온다는데, 걔 사정이야 솔직히 알 바 아니고. 윤정한은 그렇게 단호한 태도로 세계의 시간이 되돌아가던 순간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걔가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길래 도망까지 가냐고 따지길래, 대충 조슈아가 진짜 같지 않아서 별로였다고 대답했지.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 너까지 홀랑 납치해올 줄은 진짜 몰랐어."

"너한테는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 '신'이라는 존재의 글씨도 안 보이고 제약도 없었던 걸까?"

윤정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그리고 지금 와서 든 생각인데, 걔 말대로라면 날 끌어올 때에는 이전의 케이스에 비해 여유가 있었을 거란 말이야. 적합한 껍데기가 이미 있어서 여주인공 롤을 삭제하기까지 했고, 자기 입으로 빙의자에게 대화까지 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생겼다고도 했고. 그래서 늘 그랬듯이 한 명만이 아니라, 너까지 추가로 끌어올 여력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 네 껍데기도 어차피 그곳에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오, 일리 있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의아했던 몇 가지 사안이 그렇게 해소되었다. 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하늘이 조금씩 밝아져 오고 있었다. 얼마간 창밖을 응시하던 윤정한이 먼저 운을 떼었다.

"이 정도면 궁금한 건 다 해결됐지?"

슬슬 축객령을 내리려는 신호일 터이다. 하지만 응해줄 생각은 없었다.

"하나 남았어."

윤정한은 말없이 눈짓으로만 재촉했다. 얼른 털어내고 마무리 짓자고. 어쩌면 안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겪은 기현상을 해석해 보려는 문답만 오갔지, 둘 중 누구도 먼저 약혼자라는 특수하고 간질간질했던 관계와 서로의 감정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까. 조슈아도 저와 마찬가지로 이 일을 덮길 바란다고 여기고 있을까. 그러나, 조슈아는 그저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마지막으로 안배해 두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난제. 조슈아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수많은 버전의 각기 다른 질문들을 속으로 웅얼거려보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하나를 택해 내뱉었다.

"너는, 내가 애초에 왜 그런 소설을 읽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윤정한은 찰나 간 얼어붙어, 약간은 크게 뜨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맥없이 시선을 미끄러뜨리며 대꾸했다.

"너도 안 물어봤으면서."

"넌 제대로 대답 안 해 줄 거잖아."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처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발 늦게 돌려주었다.

"나는... 그게 지나친 기대일까 봐, 그래서 못 물어봤어."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하는 윤정한의 표정에는, 체념과 기대가 정확히 반반의 비율로 혼재되어 있었다. 점차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긴장으로, 혹은 설렘으로.

"그런데, 물어봐도 돼?"

여기까지 와서도 제 의사를 묻는다.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많은 신호를 주고받았으며, 명백한 근거가 차고 넘치는 데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 입으로 똑똑히 밝히는 의사가 아니라면 어느 것도 속단할 수 없었던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착각이며 망상이라고 치부했겠지. 조슈아 자신이 그러했듯. 99.9% 믿으면서도 영원히 100%를 확신할 수는 없는. 마지막 한 걸음을 떼기가 무척이나 떨리는. 이 어리석은 불신과 망설임이, 너와 내가 공유하는 이 감정이, 그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어.

이제는 전부 마무리 지을 때이다. 조슈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널 좋아해서 그랬어. 정한아, 나는 널 좋아해."

고요한 새벽. 윤정한의 긴 속눈썹이 깜박이는 소리마저 들릴듯하다. 그가 해석하기 어려운 묘한 표정으로 조슈아를 하염없이 응시하다 속삭였다.

"다시 한번만 말해줘."

"한참 전부터 널 좋아했어."

"한 번만 더."

"널 좋아해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이뤄야 했던 소원이 너와 결혼하는 거가 된 거야,"

윤정한이 입가를 허물어뜨리며 웃었다. 어느새 그의 눈가가 축축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슈지 바보. 그건 내 소원이었어."

그가 식탁 너머로 손을 뻗었다. 주저 없이 그 손을 마주 잡자, 윤정한은 다른 한 손도 마저 뻗어 간절하게 조슈아를 붙들었다. 두 손을 모아, 마치 기도하듯 절실하게.

"나 때문에 네가 휩쓸린 거야. 내 소원이 너였어."

"정한아."

"좋아해......."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양 어렵게 비집고 나온 고백은, 그에 걸맞은 무게로 마음에 내려앉았다. 황실의 결혼식마냥 화려한 자리도, 시처럼 아름다운 노랫말 같은 고운 미사여도 없다. 다만 그간 윤정한이 보여주었던 모습이, 이제야 오롯이 이해되는 지나간 행동과 말이, 짧다고 결코 가볍지는 않은 순수한 말에 담겨 와르르 무너지듯 덮쳐올 뿐.

"휩쓸렸어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네가 나 좋아하는 줄 계속 몰랐을 거야."

"같이 겪고도 몰랐던 내가 뭐가 돼, 그럼."

"바보인 거지."

실없는 웃음이 동시에 새어 나왔다. 새삼 무엇이 그리 어렵다고 이렇게 빙빙 돌아와야 했을까 싶다가도, 그게 너니까, 쉽게 포기할 수도 가볍게 내칠 수도 없는 너니까 어려울 수밖에 없었거니 싶었다. 윤정한도 마찬가지였겠지. 둘 다 상대를 향한 애정을 온전히 숨기지도 못하면서, 미련하게도 그걸 감히 연심이라 확신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세월이 아깝다거나, 헛되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애틋하고 소중했다.

슬슬 새벽보다도 아침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조슈아가 먼저 일어나 멀뚱히 자길 바라만 보고 있는 윤정한도 일으켜 세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감싸 안는 손을 토닥이며 어르듯 말했다.

"나 슬슬 가야 하는데. 내일 스케줄 있고."

"자고 가."

당연하다는 양 들러붙는 모양새가 어이없기까지 했다. 방금 전까지 달달 떨던 거에 비해, 지나치게 적응이 빠르지 않나. 헛웃음을 내뱉으며 물었다.

"아침에 승관이가 보면 뭐라고 하게?"

"뭐 상담할 거 있어서 왔다고 해."

뻔뻔한 행세에 동조해주는 게 과연 현명한 짓일까 고민이 들긴 했지만, 긴 시간 끝에 갓 이어지게 된 연인을 두고 가고 싶지는 않았던 마음이 결국엔 승리했다. 무언의 대답이 곧 긍정을 뜻한다는 바를 이미 잘 아는 윤정한이 곱게 웃었다.

"이 시간이면... 두세 시간은 더 잘 수 있겠다."

"너도 좀 더 자."

"알겠어."

말은 그렇게 해 놓고, 나란히 누워서도 여전히 잠 기운 하나 없이 또랑또랑 밝게 빛나는 눈으로 쳐다보기나 한다. 계속 서로 방긋거리며 보고만 있다가는 끝이 없을 듯해, 조슈아가 먼저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엄포를 놓았다.

"난 진짜 잔다?"

대답 대신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꿈보다 더 달콤해서 반대로 현실일 수밖에 없는. 이래서야 잘 수가 없잖아. 조슈아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팔을 뻗어 윤정한을 더 단단히 감싸 안았다. 숨이 섞이고 키스가 깊어진다. 그래, 어차피 이제 와서 다시 잠들기엔 밤은 짧았고,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인 그들의 해피 엔딩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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