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15)

로판AU

윤정한은 아침에 상쾌하게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 사용인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공작가에 사람을 보내서, 조슈아한테 최대한 빨리 입궁하라고 전해줘."

"예, 전하."

"아, 에스쿱스도 불러오고."

윤정한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전날 있었던 일을 되새겼다. 다짜고짜 "너 내가 모르는 사이에 폐위 됐었니?" 라니, 회귀 이전의 조슈아와는 정반대의 반응이었다. 그것이 윤정한은 진심으로 유쾌했다. 조슈아가 훗날 황후가 되리라는 신탁이라니, 모두가 그것을 '조슈아의 짝은 윤정한이다' 라고 이해하는 가운데 교묘하게 '조슈아가 고르는 짝이 황제가 된다' 라고 해석을 비트는 꼼수도 영리했다. 때때로 전혀 생각지 못한 순간에 광기에 가까운 기발함을 발휘하는 면모 그대로였다. 물론 거기에 반역죄라는 꼬투리가 달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던 것 같지만.

마침 황궁 안을 얼쩡거리고 있던 에스쿱스는 몇 분 되지 않아 윤정한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나 불렀다며? 네가 아침부터 웬일이냐?"

윤정한은 아무런 꿍꿍이도 없다는 듯 말간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나랑 같이 접견실로 가자.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

그리하여 에스쿱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윤정한을 따라갔고, 갑자기 외부인을 접견한다는 소식에 놀란 근위대장 도겸이 디노를 데리고 헐레벌떡 나타났으며, 불행하게도 어떻게 저 혼자 에스쿱스를 제압할 수 있을지 난처한 고민에 빠져있던 윤정한의 눈에 바로 띄어버리고 말았다.

"얘들아, 마침 잘 왔다. 귀 좀 대 볼래."

윤정한은 성큼성큼 도겸과 디노 바로 앞까지 걸어간 뒤 속삭였다. 뒤에 남겨져 혼자 멀뚱히 서 있는 에스쿱스에게는 들리지 않을 소리였다.

"쟤 좀 묶어라."

침묵이 흘렀다. 도겸과 디노는 에스쿱스를 쳐다보았다가, 설마 저 분을 묶으라는 건 아니겠지, 방 안에 다른 누가 있겠지, 라는 간절한 희망을 품고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어딜 봐. 저기, 에스쿱스 묶으라고."

"...네?"

당황한 목소리들을 무시하며 윤정한은 싱긋 웃었다.

"당장 안 묶으면 항명죄로 처벌한다."

"저기... 무슨 잘못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족이신데......."

디노가 소심하게 의견을 피력하고 도겸도 옆에서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윤정한은 냉정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쟤는 그냥 황족 1이고, 나는 황태자지. 그럼 누구 명령이 우선이야? 감당 가능해?"

도겸은 여전히 벙 쪄있었지만, 디노는 그나마 권력의 억압 앞에서 눈치 빠르게 처신하는 편이었다. 그는 한 번 두 눈을 꾸욱 감았다 뜨고, 천장을 쳐다보고, 깊게 한숨을 푹 내쉬더니, 진심으로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로 슬금슬금 에스쿱스에게 다가갔다. 안절부절못하던 도겸도 결국엔 디노의 뒤를 따랐다. 그쯤 되니 불길한 낌새를 느낀 에스쿱스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뭐야, 뭔데."

"쿱스야, 그냥 가만히 있자."

"죄송합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윤정한 미쳤어? 갑자기 뭐냐고!"

"어, 쿱스야, 일단 묶이면 설명 해 줄게."

극도의 황당함에 별반 반항도 하지 못한 에스쿱스는 생각보다 빠르게 제압되어 접견실 가운데의 의자에 단단히 묶였다. 윤정한이 또 다른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앞에 느긋하게 마주 앉았다. 심문이라도 하는 듯한 구도였다. 뒤에 서 있는 도겸과 디노는 면목 없다는 양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쿱스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어제? 무도회 말하는 거야? ....신탁 내려온 거?"

"어, 맞아. 신탁 내용도 알겠네?"

"그걸 누가 몰라. 곧 국혼이 있을 거라고 순식간에 소문 다 퍼졌는데."

"근데 정작 슈아가 나랑 결혼을 안 한다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황위에 오른다면, 네가 유력 용의자잖아."

"용의자?"

"반역죄 용의자."

에스쿱스가 황당함에 말도 못 잇고 어물거렸다.

"윤정한, 너 진짜, 설마 내가, 와, 아니, 너 미쳤어?"

억울함이 역력한 표정을 보아하니 자칫하다간 단단히 삐질 성싶었다. 윤정한은 웃음기를 싹 지우며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쿱스야, 진짜 서운하다. 주변에서 뭐라 말을 하든 나는 널 믿었는데, 어느 틈에 조슈아랑 작당을 하고......."

"나는 걔 귀국한 줄도 몰랐다고! 작당은 무슨 작당이야. 야, 일단 풀어, 풀고 제대로 얘기해."

"네가 그렇게 말해봤자, 어제 이미 조슈아가 나한테 한 소리가 있는데......."

"걔가 뭔 말을 했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나보고 그새 폐위라도 됐냐던데."

맹랑하다 못해 불경하기 짝이 없는 소리에 도겸과 디노는 물론이고 에스쿱스마저 순간 흠칫했지만, 그는 금방 다시 악을 썼다.

"그럼 걔한테 뭐라고 할 것이지 왜 나한테 이러는데!"

때마침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조슈아는 방 안의 기이한 풍경을 보자마자 그대로 멈추어 섰다.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근위대장과 근위대원, 묶여있는 황족, 그리고 그 가운데 앉아있는 황태자. 금방이라도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칠 듯한 모습에 윤정한이 손짓했다.

"슈아 왔어?"

도겸과 디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예를 표했다. 에스쿱스는 이렇다 할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격하게 몸부림쳤다.

"야! 윤정한! 이제 진짜 이거 풀라고!" 

"그치만 쿱스야, 내가 황제가 못 된다면 누가 되겠어. 계승권 바로 다음 순위가 너잖아? 그럼 나는 네가 딴맘 먹진 않았나 조사할 권리와 의무가 있지 않겠어?"

장본인인 조슈아까지 당도하였는데도 뻔뻔스레 자신만 추궁하고 드니 무얼 어떻게 해도 영 말이 안 통하리라 판단하였는지, 에스쿱스는 도겸과 디노에게 화살을 돌렸다.

"너네도! 너네 이러고도 뒷감당 가능해? 풀려나기만 해 봐, 진짜!"

"...저희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간언을 드렸는데... 너네가... 내 명령 무시하고도 뒷감당 가능하냐는 협박을...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하셔서......."

고래 싸움에 등 터진 꼴이 된 둘을 조슈아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작 이 모든 일의 발단은 본의는 아닐지언정 조슈아 자신이었는데도. 에스쿱스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 너! 조슈아 너 나랑 결혼할 거야?"

나왔다, 조슈아의 '너 지금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니?' 표정. 윤정한은 저항 없이 웃음을 터뜨렸고, 애먼 오해가 빚어졌다.

"그렇게까지 질색할 일이냐...? 아니, 나도 사절이긴 한데......."

"좋다, 말 나온 김에 말해봐. 무려 신탁의 주인공! 조슈아 씨, 누구랑 결혼해서 누구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결혼 계획 같은 거 없는데."

"다행이네. 나랑 약혼부터 시작해 보자."

슬슬 피가 안 통한다고 버둥거리는 에스쿱스나, "오~"하고 감탄사나 연발하고 있는 디노는 이미 뒷전이었다. 만일 현실에서 정말 진지하게 고백을 건네고, 그것이 이렇게 거듭 거절당했다면 윤정한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조슈아는 진짜와 지극히 닮았으면서도 현실의 존재는 아니며, 조슈아가 제게 티끌만큼의 연정도 품고 있지 않더라도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차피 결혼으로 내정되어 있다. 따라서 윤정한은 아무런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이 마냥 장난치는 기분으로 무작정 조슈아에게 들이댈 수 있었으며, 급기야 그게 행운처럼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그럴 날이 올 것 같진 않지만, 만에 하나 현실에서 고백을 할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한 연습이나 시뮬레이션이라 여겨도 되는 일 아닌가. 그 가볍기 그지없는 태도에 조슈아가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정한아, 넌 결혼이 장난이야?"

"아니지~ 그러니까 미래의 황후 되실 분이랑 진지하게 미래를 약속해보려는 거 아니겠어? 나 황제는 해 봐야지~"

거짓말이다. 황위 따위 알 게 뭐야. 그저 신탁을 명분 삼으려고 아무렇게나 나불대었을 뿐인데, 조슈아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거 말인데, 생각을 좀 해 봐 정한아?"

"어 뭔데."

"신탁은 원래 상징성이 강해서,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 그러니까 신탁에서 말하는 '춤'이 진짜 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지."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나 어제 처음 춤 춘 것도 슈아고, 처음 대화한 것도 슈아고, 처음 마주친 것도 슈아인데? 그 '춤'이라는 데 다른 뜻이 있다 해도, 높은 확률로 어쨌든 상대는 너일 걸."

조슈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자, 이제 어떡할래? 제가 아는 조슈아라면, 고작 여기서 포기하지는 않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조슈아는 세상에서 가장 처연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꾸며내며 말했다.

"그런데 정한아... 그래도 정말 그게 나는 아니야. 이렇게 갑자기 밝히고 싶진 않았는데... 사실 나, 얼마 전에 계시를 받은 게 있어서 신관이 되려고 했어."

와, 이건 생각 못 했다. 예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시나리오에 하마터면 윤정한은 조슈아의 면전에다 대고 폭소를 터뜨릴 뻔했지만, 각고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간신히 참아냈다.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입꼬리가 파들거리는 걸, 억지로 근엄한 표정을 지어가며 억눌렀다.

"그래? 그건 정말 중요한 일이네. 쿱스야, 가서 원우 좀 불러와야겠다."

"진짜로? 야, 신관 되면 공작가는 어쩌게!"

황태자비가 되어도 공작가 후계자 때려쳐야 하는 건 피차일반인데. 아, 그러고 보니 슈아 대신할 후계자 후보 고르는 것도 도와줘야 하네. 윤정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대꾸했다.

"계시를 받았다는데 어떡해."

"이 상황에서 그 소리를 믿어준다고?"

안 믿지. 그렇지만 재밌잖아. 윤정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설마 슈아가 종교 갖고 거짓말을 하겠어? 그러니까 일단 원우 데려와. 이런 상담은 대신관이 해야지."

"나 아직 묶여있거든?"

"아 맞다."

곧이어 황태자의 특별 사면 명령으로 풀려난 에스쿱스는 한참을 투덜거린 끝에야 대신관을 찾으러 갔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심심하니, 윤정한이 먼저 물었다.

"근데 어떤 계시였어?"

"음, 신의 뜻을 함부로 남한테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 놨다는 뜻이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장단을 맞춰주고, 덧붙인다.

"나랑 결혼하기 싫어서 그냥 한 소리는 아니고?"

정곡을 찔렸으니 조금은 당황할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조슈아는 날카롭게 눈을 뜨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정한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너도 나랑 결혼이 하고 싶은 건 아니잖아. 신탁 때문에 그러는 거지."

말문이 막힌 건 윤정한이었다. 그래, 분명 조슈아의 눈에는 윤정한이 신탁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이는 것으로 보이리라. 윤정한 본인도 일정 부분 그렇게 유도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너와 내가 이렇게 신탁으로 얽혀버린 게, 내 진심 어린 소원이 그것이라 벌어진 일이라고 '신'은 말했다. 사실은 선후관계가 반대라는 걸, 넌 영영 모르겠지.

침묵을 깬 건 노크 소리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문을 열어젖힌 에스쿱스의 목소리였다.

"원우 데려왔다! 나 이제 간다?" 

"어, 너네도 이만 가도 돼."

도겸과 디노까지 내보내고 나자, 전원우가 영 가시방석이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문을 열었다.

"음... 오는 길에 대강 얘기는 들었는데요. 계시를 받으셨다고요."

"어. 신관이 돼야 한다던데? 그래서 말인데, 계시 내려왔다고 바로 교육 들어가야 한다는 규율은 없지? 한동안 바쁠 테니까 가급적 결혼식 이후로 미루게."

"뭐라고?"

조슈아의 두 눈이 경악으로 둥글어졌다. 바보. 공교롭게도 윤정한은 '빙의자'에 관해 물으러 전원우를 찾아갔을 때, 대신관에 득시글거리던 신관들을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얻은 정보였다. 

"요즘 신관이라고 평생 독신으로 살고 그런 게 어딨어~ 슈아 몰랐던 건 아니지?"

너희가 모시는 신부터가 남의 세계 사람을 납치해와서 중매를 서고 자빠졌는데, 순결 서약 같은 게 있는 종교면 말이 안 되지. 윤정한은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했다.

"설마 진짜, 결혼하기 싫어서 그냥 한 소리였던 거 아니지?"

"조슈아 님께서는 타국에 오래 계셨으니 잘 모르셨을 수도 있죠. 거긴 아직 좀 보수적이잖아요." 

"참고로, 수습 신관 기숙사는 황태자궁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조슈아는 이미 탈탈 털려 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공허한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정한아. 근데 나 아직 너랑 결혼할 거라곤 안 했는데?"

"어, 알지~ 그러니까 일단 오늘은 약혼 공표부터 하는 게 어떨까?"

의도가 명확히 들여다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자, 조슈아는 더 떠오르는 방도가 없었는지 후퇴를 택했다.

"그런데 내가 아직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얼른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다음에 마저 얘기하자?"

"정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얼른 가. 내일 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줄행랑을 친다. 옆에서 전원우가 '이거 이대로 괜찮은 건가?' 라는 생각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조슈아는 모르고 윤정한만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이미 너 모르는 사이에 공작과 얘기가 다 되어있었다는 점. 그러니 내가 단독으로 약혼 공표를 하더라도, 공작가에서 항변할 일은 없으리라는 것. 윤정한은 전원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몸을 돌렸다.

"와 줘서 고마워. 나는 지금 바로 긴급 발표할 게 있어서, 먼저 본궁으로 가 볼게."

기상천외한 잔꾀에 있어서는 원래도 윤정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재인데, 거기다 인생 2회차이기까지 하니, 조슈아의 필패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한술 더 떠 윤정한은 공작가에 황실 주치의 이지훈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명목은 왕진의 탈을 쓴 감시였지만, 사실 조슈아의 속을 더 긁으려고 벌인 행동이었다. 잔뜩 열이 뻗쳐서는 황태자궁으로 쳐들어와 주면 재미있을 텐데. 그런 요행을 내심 바라면서.

결과적으로 그 요행은 80% 정도 이루어졌다. 잔뜩 열이 뻗친 (부승관과 함께) 조슈아가 서재로 쳐들어와 주었으니. 회귀 전의 부승관이 지금의 윤정한을 보았다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주시면 더 바랄 게 없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려 마지않았을 텐데, 지금의 부승관은 일 처리가 정말로 거지 같은 게 어떤 건지 경험을 못 해봐서 그런지, 만족을 못 하고 자꾸 윤정한을 들들 볶았다. 그걸 적당히 헛소리로 넘겨대고 있는데, 여전히 열려 있는 서재 문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던 조슈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슈아? 몸은 이제 좀 괜찮아?"

"어... 의사 보내줘서 고마워, 정한아. 얼마나 열심인지, 밤새 옆에 붙어있더라."

"다행이네. 근데 어쩐 일로 네가 날 먼저 보러 왔어?"

간밤에 벌인 짓이 있으니 진짜 응징이라도 하려고 찾아온 줄 알았는데, 딱히 화로 들끓고 있는 기색은 아니었다. 조슈아는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부탁할 게 있었는데, 바쁜 줄 몰랐어. 그냥 다음에 다시 찾아올게."

"아냐, 슈아야, 나 시간 있어. 와서 같이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 해 봐."

옆에서 부승관이 대번 항변했다.

"아니, 바쁘시다면서요!"

"어, 슈아가 용건이 있대서 바빠졌네? 일은 나중에 해야겠다, 그치?"

무슨 용건으로 온 건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계획을 그리고 있는지, 그래서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 줄 건지. 윤정한은 매 순간 조슈아가 그렇게 궁금했다. 

어느 정도 중요한 사안이긴 했는지, 조슈아는 부승관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윤정한의 곁으로 와 앉았다. 승관이 나가고 차와 다과를 들인 후에야 윤정한은 물었다. 

"그래서? 무슨 부탁인데?"

"마탑주를 만나고 싶어. 가능한 빨리."

"마탑주를?"

정말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용건이었다. 조슈아가? 마탑주를? 

"왜?"

조슈아는 새침하게 차나 홀짝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가문의 일이야."

더 물어봤자 제대로 대답을 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가문의 일이라는 게 정말일까. 윤정한은 공작가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마탑이 평소 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다. 빙의자에 대한 단서를 찾으러 마탑의 서고를 몇 번 찾아갔던 게 전부였으니. 그러니 조슈아가 무엇을 위해 마탑주를 만나고자 하는지는 추측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소박한 청을 가차 없이 거절하여 미움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뭉뚱그려도 원래는 안 되는 거 알지? 하나만 솔직하게 말해줘. 도망가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아니야."

윤정한은 가만히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온, 고로 자유의지를 지닌 윤정한조차도 도망치지 못하고 세계가 무너지며 시간이 되돌려지는 일을 겪었는데, 등장인물인 조슈아가 그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알면서도 윤정한은 물었다. 하지 못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자기는 이미 도망쳤던 전적이 있는데도, 정작 네가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있지는 않길 바라서.

"알겠어."

윤정한은 책상으로 가 종이와 깃펜을 찾아 돌아왔다. 

"최대한 빨리? 지금 바로도 괜찮아?"

"허락해주려고?"

"어. 원래는 마법의 힘을 가지고 대형 사고라도 칠까 봐 좀 더 꼬치꼬치 물어봐야 하는 건데, 차기 황후가 나라 망할 일에 마법 쓰지는 않을 거 아냐."

"너 폐위시키는데 쓰면 어쩌게?"

"재밌어지겠지? 폐태자가 즉위하는 건 아마 역사상 최초가 될 텐데."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작성을 마친 서류를 윤정한이 곱게 돌돌 말았다. 조슈아가 냉큼 손을 내밀었지만, 윤정한은 서류를 제 손에 그대로 쥔 채 입을 열었다.

"근데, 기껏 나 보려고 왔으면서 벌써 가는 건 좀 매정하잖아."

작은 투정이었다. 왜 멋대로 약혼 공표를 하냐고 따지고 들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려도, 조슈아는 대체로 한숨 한 번 쉬고는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내가 뭘 해주면 되는데?"

이렇게. 윤정한이 빙긋 미소 지었다.

"오늘 대신, 다른 날 시간 내줘. 결혼반지는 같이 맞추러 가야지."

"...알겠어, 정한아."

대답을 듣고 나서야 윤정한은 서류를 건네주었다. 원래는 결혼이 성사되기까지 최대한 조슈아를 멀리하려 마음 먹었었다. 마주쳐봤자, 괴리감만 강해지리라는 생각에. 그러나 이렇게나 현실과 닮은 조슈아라면, 괴리감이 들 리가 없지 않은가. 수줍어하며 결혼을 기대하기는커녕, 질색하는 심정을 숨길 생각조차 않으니 더 귀찮게 굴고 싶은 청개구리 성질도 발동하는 것 같고. 마저 대화를 마무리하고 조슈아를 보내면서, 윤정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바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윤정한은 발코니에 서 있는 조슈아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순순히 결혼식 얘기를 논하는 태도는 더 수상쩍었고. 역시 밖으로 드러나는 태도만 조금 달라졌을 뿐, 황태자를 짝사랑한다는 설정은 그대로인 걸까. 그렇다기에는 마냥 좋아서 결혼에 응하는 기색은 아닌데. 그러다 조슈아가 불쑥 물었다.

"정한아, 그런데 넌 나랑 결혼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난 좋은데. 왜, 슈아는 별로야?"

"장난치지 말고."

이것 봐. 진심으로 추진하는 결혼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데, 좋아서 응하는 것일 리가 없잖아. 시간이 한 번 되감긴 뒤 조슈아의 행동은 전부 의문 투성이였다.

"왜 장난이라 생각하는데?"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 너."

조금 놀랐다. 조슈아가 그 사실을 굳이 짚고 넘어가고자 할 줄은 몰랐다. 저 역시도 좋아하는 마음으로 응하는 결혼이 아니니, 피차 덮고 넘어가려고 할 줄 알았다. 진짜 조슈아를 좋아하기에, 이 '조슈아'를 진심으로 대할 수 없는 이 마음을 갑자기 추궁받을 줄은 몰랐다는 소리다. 미약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소설 속 가짜에게 죄책감까지 느끼고 싶지는 않았는데. 윤정한은 침잠하는 무력감을 흩어내며 대답했다.

"...너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알면서도 착각해버릴 만큼 닮긴 했지만, 그럼에도 너는 내가 좋아하는 현실의 조슈아가 아니니까. 윤정한은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대로 변명을 주워 삼켰다.

"근데 원래도 좋아하는 사람이랑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 완전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공작가 후계자인 조슈아라면 오히려 좋은 거 아냐? 싶었지. 슈아는 안 그랬어?"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결혼을 서두를 수가 있어? 이미 아는 사람이라 해도, 결혼 상대로는 다르잖아. 넌 안 불안해?"

"뭐가 불안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너 나랑 키스할 수 있어?"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윤정한은 '신'에게 물리적 형체가 없음이 너무나도 아쉬워졌다. 당장 불러내서 대체 무슨 업데이트를 어떻게 했길래 저런 소리가 나오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아무리 등장인물이라 해도, 저런 소리를 면전에다 대고 하면 내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 슈아야?

내 발칙한 상상 속 네가 나랑 무슨 짓까지 했는지,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걸.

윤정한은 조슈아의 손목을 낚아채고, 다른 한 손으로는 뒷목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돌발 상황에 깜짝 놀라 동그랗게 커지는 눈이 너무나 익숙해서, 윤정한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너를 차단해야, 너한테 휩쓸려버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열심히 종알거리던 입을 제 입술로 막는다. 하지만 시각 하나 차단한들 무슨 효용이 있을까. 따스한 온기가, 놀라서 움칠거리는 손이, 굳어버린 온몸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당연히 너인데. 입술을 깨물고 사이를 헤집어 깊숙이 침범하고 싶은 충동을 윤정한은 간신히 억눌렀다. 현실에선 감히 시도조차 못 할 짓을 여기서 저 좋을 대로 저지르는 건, 암만 윤정한이라 해도 너무 양심에 찔리는 행동이지 않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조슈아가 흠칫 몸을 물리는 걸, 윤정한은 얌전히 놓아주었다.

"당연히 할 수 있지. 이제 됐어? 그럼 안 불안해?"

조슈아는 힘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이 정도는 누구랑도 할 수 있잖아."

와, 당연히 더 할 수 있는 걸 참아준 줄도 모르네. 윤정한은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우리 슈아 은근히 과거가 화려했나 봐~?"

"그래서 싫어?"

"아니, 난 약혼자의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훌륭한 신랑감이니까."

마주 비웃어 주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도 조슈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별안간 윤정한의 손을 그러쥐었다.

"정한아, 우리 최대한 빨리 결혼하자."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 역시 무언가 이상했다. 아귀가 맞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자꾸만 어긋나고 엇갈린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연 이렇게 결혼을 조르는 거 보면 회귀 전과 비슷하기도 했다. 윤정한은 살풋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슈지, 너 며칠 전부터 좀 이상해."

"생각해보니까, 공작 때려치고 황후 하는 게 더 좋은 인생 같아."

불안이 솟구쳤다. 지극히 현실과 같으면서, 윤정한의 구애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는 조슈아란 정말 환상처럼 유혹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실존할 수 있을까. 윤정한의 입맛에 맞게 조작되어, 이렇게 모순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니. 눈앞의 조슈아는 종잡을 수 없고, 그래서 위태로워 보였다. 어쩌면 보다 '현실적'인 너를 바라서는 안 됐던 걸지도 모른다. 괴리감이 들지 않아 마냥 낫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적'인 네가 나를 향한 연심을 드러낸다면, 나는 그걸 간절히 믿고 싶어질 것 같아 큰일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두 눈을 감고 믿고 싶어질 것 같아. 차라리 원래 소설 속의 너처럼, 말도 안 되는 태도로 굴면서 끊임없이 이 상황이 완벽한 허구임을 끊임없이 자각시키는 게 나을지도 몰라.

"슈아야."

"너 몰랐어? 나 원래 황후가 꿈이었어."

이상한 기색을 느낀 듯, 조슈아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면피하려 들었으나 윤정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돈되지 못한 말을 머뭇거리며 이었다. 어떻게든 조슈아가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회귀를 설명하려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저 저 혼자 죄책감을 덜어내고 편안해지려는 비겁한 행동에 불과한 짓인데, 그 순간에는 충동이 앞서버렸다.

"너 진짜, 전이랑은 달라. 전에 봤던 너랑 같은 사람인데, 뭔가 많이 달라졌는데."

한마디로, 방심했던 거다.

"원래 너였으면 그렇게 말 안 했어."

"정한아,"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온 세상이 요동치는 진동이 갑작스레 밀려왔기 때문에. 주인공은 세계의 비밀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는데, 윤정한이 그걸 잊고 말실수를 해버린 탓이었다. 세계가 무너지던 순간이 떠올라 윤정한은 반사적으로 조슈아의 손을 움켜쥐었다. 어차피 도망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본능이 앞선 행동이었다. 윤정한은 이를 악물고 최악의 사태를 각오했지만, 다행히도 진동은 잠시간 울리다 서서히 약해지며 이내 완전히 멈추었다. 사소한 실수에 불과했기에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이리라.

"방금... 너도 느꼈지?"

윤정한은 막막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모양이다. 편린이나마 내막을 밝힐 생각을 하다니. 뒷수습을 위해 피곤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면서, 윤정한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과몰입 금지. '신'이 제멋대로 주무른 소설 속 조슈아에게 사사건건 의미 부여하고 혼란과 죄책감을 느껴봤자, 하등 의미 없는 짓이니까.

그래도 바보 같은 실수 덕에 득 본 게 하나 있기는 했다. 결혼 준비에 더더욱 박차를 가할 명분이 생겼다는 점. 그래서 황태자궁까지 조슈아를 불러 놓고 잠깐 나갔다 돌아오는데,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대화가 새어 나왔다.

"...그 자리가 내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

"하지만 신탁이 있었는데요. 신의 뜻대로 조슈아 님에게 안배된 자리인데, 불안해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실까요?"

"너도 대충은 알잖아. 정한이랑 내가 원래 그럴만한 사이는 아니었던 거."

이제와서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계속 듣고 있기 썩 즐거운 화제는 아닌지라, 윤정한은 전원우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결정은 내렸어, 원우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꾸며내는 건 익숙했다.

"점심, 먹고 갈 거냐고."

그러니 현실의 윤정한은 언제나 그랬듯 감정을 꾹 눌러 삼키는 쪽을 택했지만, 이곳의 윤정한은 거리낄 게 없었다. 과몰입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궁금한 건 전부 캐내고, 하고 싶은 것도 잔뜩 즐기다가, 조슈아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현실의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가망이 있을지 이것저것 재 보면서 공략법을 터득해내면 좋은 거고, 자칫하다 미움을 사더라도 돌아가면 어차피 없는 일 되는 거고. 윤정한은 그런 각오로 물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솔직한 질문을.

"'그럴만한 사이'가 뭔데?"

"모르는 거 아니잖아."

"그럼 다시 물어볼게. '그럴만한 사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왜 그런 걸 물어?"

조슈아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반응했다. 의아해하는 게 당연하다. 조슈아에게 윤정한은 앞뒤 생각 안 하고 직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여기는 어차피 시뮬레이션 비슷한 거니까'라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 윤정한은 부차적인 이유를 대었다.

"그러면 네가 좀 더 나를 내켜 할까 싶어서."

애석하게도 조슈아는 제대로 된 대답을 주지 않았다. 재차 추궁하는 대신, 윤정한은 그냥 그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잠시 허공을 배회하던 조슈아의 긴 손가락이, 조심스레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자연히 눈이 감겼다. 원래 늘 좋아하는 쪽이 약자인 법이라, 윤정한은 정말 오랫동안 제 일거수일투족에 조슈아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끊임없이 살펴왔다. 그것이 이제는 습관처럼 자리 잡을 지경으로. 지금처럼 마음 편히, 여파와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고 어리광을 부리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어차피 이런 건 지금 뿐인데, 결혼 전에 나랑 많이 놀아줘야지."

"...왜 지금 뿐인데?"

하루도 안 되어서 또 말실수를 하다니. 윤정한은 스스로의 머리를 콩 쥐어박고픈 심정이었다. 조슈아는 가끔 희한한 구석에서 눈치가 무섭도록 빨랐다. 윤정한은 재빨리 그럴듯한 변명을 지어냈다. 단지 바빠서 그렇다고. 또다시 흘려서는 안 될 말을 흘려 세상이 뒤흔들리지 않도록.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말을 흘리지만 않는다면 만사가 오케이란 뜻이었으니, 윤정한은 회귀 전에는 하지 못했고 현실에서는 더더욱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저질렀다. 어떤 것들은 등장인물 조슈아를 위한 배려였고, 어떤 것들은 현실의 조슈아를 떠올리며 끼워 넣은 이스터에그 같은 요소였으나, 사실 전부 윤정한 혼자에게만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이 조슈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허깨비니까. 그렇다 해도. 부케에 조슈아가 좋아하는 데이지를 끼워 넣고, 공작을 결혼식에 부르지 말자고 했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서, 어찌 되었건 회귀 전의 너보다는 지금의 네가 더 좋다는 일말의 진심도 몰래 털어놓았다. 소설 속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거짓말이 필요했다. 이미 한 번 겪어봐서 다 아는 사안을 처음 접한 것처럼 처리할 때나, 어린 시절의 일화를 묻는 조슈아한테 남에게 전해 들은 얘기를 마치 제 기억마냥 대답할 때 등. 그럴 때마다 소설의 플롯에 조종당하는 듯한 불쾌함이 불쑥 치밀어오르곤 해서, 윤정한은 은근하고 교묘하게 현실을 끌어오는 방향으로 소소한 반항을 꾀했던 것이다.

약혼 반지도 그 일환이었다. 결혼반지와 프러포즈 링은 전적으로 약혼자에게 맡기고 수수방관했던 황태자가, 갑자기 매우 구체적인 디자인을 들이밀며 심지어 약지도 아닌 새끼손가락의 사이즈로 맞춰오라는 특이한 주문을 하였을 때 세공사는 상당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래봤자 그 누구도, 하물며 조슈아마저, 이 반지의 진짜 의미는 모를 터이다. 때문에 반지를 건네는 게 긴장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복제품일 뿐이지만, 현실의 윤정한과 조슈아를 상기시키는 가장 큰 상징물. 의문이 가득 담긴 조슈아의 시선을 무시하고 윤정한은 그를 당겨 안았다. 가만히 이마를 맞대고, 말 못할 고백 대신 긴 한숨만 내뱉었다. 널 좋아해. 정교한 가짜에 자꾸 마음이 휘청일 만큼, 그렇지만 달콤한 거짓에 홀리고 싶지 않을 만큼. 뒤틀리고 올곧게 널 좋아해.

그날 조슈아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서기 직전, 모든 걸 털어놓으면 과연 네 반응이 어떨지 궁금증이 치솟긴 했지만, 곧바로 경고하듯 몰려오는 세계의 진동에 속으로 오만 짜증을 퍼부었다. 말 안 한다고, 상상만 해 본 거라고, 제정신 잘 붙들고 있는데 괜한 유난이라고. 속으로는 그렇게 잘난 듯이 나불거려 놓고선, 팀 반지 하나 때문에 잔뜩 들뜨긴 했던 모양이다. 느슨해진 정신머리에 찬물을 끼얹어 준 건 고맙게도 조슈아 본인이었다.

"정한이 네가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안 먹었으면, 이렇게 될 일은 없었겠지."

정작 그는 별 뜻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윤정한은 강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야, 윤정한이 허튼 맘을 먹어서 이 세계가 이 꼴로 돌아가게 된 것이니까. 맹세컨대 결혼까지 김칫국을 들이킨 적은 없었지만, 그건 턱없이 미약한 변명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조슈아를 좋아하는 마음이 방아쇠가 되어 이 모든 일을 야기한 것이었으니. 그리고 거기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정말 데이트라도 나온 것처럼 마음이 들뜨고,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식상하기까지 한 설렘이 느껴지는 건, 전부 다 회귀 후의 네가 지나치게 '진짜' 같은 덕분이다. 너는 소설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며 나를 좋아한다고 읊는 꼭두각시 같지 않아서. 자꾸만 현실처럼 느껴지는 널 마주할 때마다 속절없이 떨리는 이 감정이 '신'이 바라던 것이라 했으니, 아마 그 놈은 진작 할당량을 넘겨 에너지를 차고 넘치게 수확한 걸 기뻐하며 축배라도 들고 있겠지.

마침내 결전의 날. 문이 열리고 곱게 치장한 조슈아가 눈에 들어왔을 때, 윤정한은 깊은 안도를 느꼈다. 전날 밤까지만 하더라도, 여기서 '조슈아'와 보낸 모든 시간이 자기 혼자만의 공상으로 남을 게 조금 아쉽게 느껴지길래, 은연중에 이 세계에 미련이라도 남은 걸까 싶어서 낭패라 여기던 참이었다. 실존하는 현실 세계를 두고 애먼 곳을 그리워하며 바보같이 굴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조슈아는, 그리고 이 결혼식은, 감히 꿈으로도 꾸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다행이었다. 너무 허황되어서 미련조차 남지 않을 듯해서. 긴 영화의 마지막 엔딩 같은, 충만하고 시원섭섭한 느낌만이 전부였다.

"가자, 슈아야."

이 길의 끝에서, 자신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조슈아는 이곳에 남는다. 윤정한에 대한 기억은 무엇도 남지 않겠지만, 황태자가 존재했다는 흔적은 곳곳에 여실히 남아 있을 테니 한동안 모두가 혼란스럽겠지. 윤정한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떠난 이후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지저분한 황위 쟁탈전이 길어지지 않고 에스쿱스가 무탈하게 후계자 자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그리고 황태자 없는 황태자비로서 애매한 위치에 붕 떠버릴 슈아가 여생을 평화롭고 자유롭게 보낼 수 있도록 안배한 몇 가지 사안들. 전부 내팽개치고 돌아가기 위해 널 이 제단 앞까지 끌어들여 버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생각하지만, 부승관에게조차 말하지 못하고 온전히 홀로 비밀스레 준비한 탓에 어딘가 미흡한 구석이 있지는 않을까 아직도 살짝 염려가 되었다. 그게 표정에도 드러났는지, 조슈아가 조용히 물었다.

"정한아, 긴장했어?"

"그래 보여? 열심히 웃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눈에 걱정이 잔뜩인 걸 내가 모르겠어?"

"...아니, 너는 알겠지."

넌 어떤 것들은 바보처럼 영영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어떤 것들은 귀신처럼 빠르게 알아보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 중 조슈아가 영영 알지 못할 어떤 내막에 대하여, 윤정한은 솔직하지 못한 사과의 말을 속삭였다.

"미안해, 슈아야."

아무것도 털어놓지 못해서 미안해. 널 버리고 떠나서 미안해. 여기서도 좋아한단 한 마디를 하지 못해서 미안해. 현실의 너에게 고백할 용기는 없으면서, 허구의 너에게 안주하지도 못해서 미안해.

"방금 그게 무슨 소리야?"

"슈아야, 손."

조슈아가 불길한 낌새를 눈치채고 캐물었지만, 윤정한은 못 본 척 하며 조슈아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나 윤정한은 조슈아를 인생의 동반자로 맞이하며, 남은 평생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 조슈아는 윤정한을 인생의 동반자로 맞이하며, 남은 평생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할 것을 맹세합니다."

회귀한 후로, 모습을 꼭꼭 숨기고 아무리 불러도 모른 척 했던 '신'의 메시지가 오래간만에 시야에 떠올랐다.

'수고 많았어, 윤정한. 준비 됐지?'

정말로 엔딩이었다.

"대답해. 나한테 왜 미안해?"

"마지막으로, 맹세의 입맞춤이 있겠습니다."

조슈아는 마지막까지도 끈질기게 물었으나, 이제 와서 또 세계를 뒤흔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윤정한은 애써 무시하고 조슈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시간이 멈춘 듯, 허공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현실에서는 결코 재현되지 못할, 축복의 순간. 사랑의 결실.

"정한아."

그것을 장식하는 건 끝의 끝까지 허망하기만 한 읊조림이었다. 윤정한은 스르르 웃었다. 처음에는 뭐 이딴 일이 다 있냐며 날뛰었지만, 지금 와서는 다디단 꿈을 꿀 수 있었던 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 헤어지기 아쉬워질 것 같아, 윤정한은 길게 머무르지 않고 그를 놓아주었다. 

세계에서 존재가 분리되는 감각이 삽시간에 몰려왔다. 하객들의 열띤 환호성과 팡파레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지만, 윤정한의 신경은 온통 눈앞의 조슈아에게만 쏠려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윤정한을 빤히 바라보는 조슈아. 코앞에 놓여 있던 존재가 억지로 분리되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윤정한은 저로 인해 참 많은 일에 휘말려 버린 이곳의 조슈아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있어, 슈아야."

그리고, 암전. 현실로 귀환할 시간이었다. 아, 재미있는 꿈이었다. 윤정한은 '꿈'에 방점을 두어 다짐하듯 혼잣말을 하며, 기이한 체험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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