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12)

로판AU

윤정한은 과하게 화려한 낯선 방 안의 드넓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꿈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다.

그야, 눈앞에 빛나는 글씨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으니까.

'소설 속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주의: 이것은 꿈이 아닙니다.' 라는.

다시 생각해보면, 이걸 한낱 꿈 취급하며 한참을 헛발질하는 사람이 어찌나 많았으면 시작부터 저렇게 대놓고 선전포고를 했을지 조금 불쌍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정한은 출처도 모르는 정보를 주는 대로 순순히 믿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멀쩡히 제 방에서 평소처럼 잠들었는데 푹 자고 깨어나 보니 낯선 곳이라니, 그런데 카메라도 마이크도 전혀 안 보인다니. 그렇다면 이건 '꿈이 아닌 척 하지만 실제로는 진짜 꿈'일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겠는가. 그래서 윤정한은 제 볼을 살며시 꼬집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요즘엔 꼬집어도 아픈 꿈이 다 있나 보네."

그러자 허공에서 아른거리던 글자들이 깜박이며 보다 강한 빛을 내뿜었다.

'이것은 꿈이 아닙니다.'

윤정한은 손을 들어 정체 모를 빛의 글자들을 휘적거렸다. 형체 없는 글씨는 잡히지도, 만져지지도 않았다. 홀로그램처럼 둥둥 허공에 떠 있는데, 어디에서 빛을 쏘고 있는지 그 근원지도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360도 모든 방향을 가려보았지만 글씨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잘만 번쩍거렸다.

"역시 꿈이네. 이런 요상한 게 다 있고."

'이것은 꿈이 아닙니다.'

글자들이 더 빠르게 깜박거렸다. 조금은 짜증스런 기색이었다. 한낱 줄글 몇 자에 선연히 감정이 배어나는 게 조금 우스워, 윤정한은 부러 더 안 믿는 척을 했다.

"근데 재미있는 꿈도 아닌 거 같으니까, 난 다시 자야겠다."

그러나 과장된 태도로 벌러덩 다시 드러눕자마자, 윤정한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급히 일으켜야만 했다. 정신없이 점멸하는 글씨들이 삽시간에 시야를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잠깐만 진정해 봐."

허깨비 같은 글씨한테 대화를 시도하는 꼴이라니. 말을 한다고 들어는 주려나 걱정이었지만 다행히도 불어났던 글씨들은 순순히 사라졌다. 말이 통한다면, 질문에 대답도 해 주려나? 윤정한은 도르륵 눈을 굴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꿈이 아니라, 소설 속 세계라고?"

'그렇습니다.'

윤정한은 다시 한번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서양식으로 꾸며진 휘황찬란한 실내의 풍경. 유럽 어딘가의 궁전 같은 모습이었다.

"...설마 내가 자기 전에 읽었던 그거?"

'그렇습니다.'

이 시점에서 윤정한은 이 상황이 꿈이 아님을 진정으로 믿게 되었다. 정도 이상으로 황당무계한 건 원래 꿈보다도 현실이었다. 하여간 윤정한은 지금 여타 판타지 창작물에서 보았던 것처럼 제가 읽었던 소설에 '빙의'라도 된 모양이었는데, 문제는 그 소설이 애초에 소설이라 부르기도 조금 뭣한, 자신을 포함한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쓴 팬픽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은 멸망을 앞둔 세계를 구하지도,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고 자유를 쟁취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어떤 익명의 여주인공과 돌아가며 썸을 타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빙의된 입장에서는 위험할 일 하나 없는 지극히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이 아닌가. 더군다나 윤정한의 기억이 맞다면, 이 소설 속에서 그의 역할은 무려 황태자였다. '빙의'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옛말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 하물며 윤정한은 이런 호사가 꽁으로 주어진다면 처음부터 피할 생각 하나 없었다.

"잘됐네. 이참에 그냥 뒹굴거리면서 쉬다 가야겠다."

윤정한은 또 한 번 침대에 푹 몸을 파묻으면서 길게 하품을 하였다. 포근하고 푹신하고 딱 좋았다. 의문의 글씨들도 별 말 없이 잠잠했다. 사실 이건 열심히 살던 윤정한을 어여삐 여긴 신이 특별히 포상이라도 내려준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생각이 무참히 깨지기까지는 단 세 시간이면 충분했다.

"승관아, 나 진짜 눈 빠질 거 같아......."

"자업자득이잖아요. 누가 늦잠 자느라 한 시간이나 지각하래요?"

"나는 진짜 몰랐다니까?"

"제가 어젯밤에도 다섯 번이나 강조했잖아요! 다음 주 무도회 때문에 일 많으니까 야근하기 싫으시면 일찍 나오시라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윤정한은 속으로만 궁시렁거렸다. 난 어제 황궁이 아니라 연습실에 있었는데. 빙의자 윤정한이 나태하게 빈둥거릴 수 있던 건 딱 30분이 한계였고, 그 후에는 낯선 얼굴의 시종 하나가 무척이나 송구하단 태도로 슬금슬금 들어와 지금 즉시 황태자 전하를 서재로 모셔 오라는 엄명이 있었다며 허겁지겁 윤정한을 씻기고 입혔으며, 이끄는 대로 무작정 따라와 보니 부승관이 산처럼 쌓인 서류 뭉치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진짜 현실의 부승관과 똑 닮은 모습을 신기해한 것도 잠깐이지, 그 후로는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온갖 보고가 윤정한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래봤자 어차피 들어도 모르는 거창한 이름들의 향연인 바, 한 귀로 흘리면서 대강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더니 부승관이 또 그걸 귀신 같이 눈치채고 이것저것 함정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제대로 이해한 보고가 하나도 없다는 참사가 바로 뽀록났다. 보고서를 미리 올린 지가 언젠데 그걸 하나도 안 훑어보셨냐는 부승관의 원망 섞인 한탄은 제법 억울했다. 이 윤정한은 그걸 받아본 이력이 없었으니까. 원래 이 세계의 '윤정한'은 어디로 갔는지 몰라도, 이딴 걸 나한테 떠넘기고 튀다니. 하지만 헛소리 할 시간이 있으면 한 장이라도 더 읽으라는 부승관의 등쌀에 윤정한은 해명 한 마디를 못 했다. 읽는다 한들 이해 안 가는 내용이 태반인데, 부승관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어 농땡이를 피울래야 피울 수도 없었다. 어지간히 일이 급하긴 했는지, 잠깐 쉬는 시간 삼아 농구나 하자고 살살 꼬셨는데도 씨알도 안 먹혔다. 그렇게 오전 내내 꼼짝없이 붙들려 있다가, 그래도 한국인의 인간미가 남아 있었던 모양인지 마침내 부승관이 선언했다.

"점심시간이네요. 그래도 밥은 먹어가며 해야지... 30분만 쉴까요?"

"난 30시간 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승관아. 30일도 좋고."

"네, 30분이요. 먼저 드세요. 저는 잠깐 떼 올 서류가 있어서."

부승관이 서재를 나서는 것과 동시에 시종 여럿이 제각기 큼직한 접시를 나르며 들어왔다. 고작 컵라면 하나 쥐여주고 후딱 먹고 마저 일 하라 할까 봐 내심 불안했었는데, 다행히도 황실의 품격이 살아있는 호화스러운 만찬이었다. 상을 차린 시종들이 물러가고 비로소 혼자 남자, 윤정한은 허공을 향해 말했다.

"야, 나 집에 돌려보내 줘. 근데 기왕이면 밥은 먹고 보내주면 더 좋고. 그게 안 되면 그냥 지금 보내줄래?"

'쉬다 간다며?'

한참 잠잠했던 글씨들이 말을 걸자마자 눈앞에 다시 생겨났다. 퐁퐁 튀어 오르며 나타나는 게 어쩐지 저를 보고 고소하다는 듯 키득거리는 거 같았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얘 성격 상당히 별로다. 은근슬쩍 말도 짧아진 거 봐.

"이건 쉬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빙의 체험 충분히 했으니까, 이제 원래 세상으로 보내 주세요."

애석하게도 둘 사이에서 아쉬운 쪽은 윤정한이었으니, 그는 아까에 비하면 퍽 공손해진 말투로 다시 한번 부탁했다. 을의 설움이었다.

'그냥은 못 가.'

어째 불길하더라니, 그럼 그렇지. 함부로 지장 찍고 다닌 기억은 전혀 없는데, 저도 모르는 새 지독한 부당 계약에 제대로 얽혀버린 모양이었다.

"뭘 해야 보내 주는데? 영혼이라도 팔까?"

억울함에 다시 부루퉁한 어조가 됐으나, 기이한 글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깜박였다.

'여기서 네 소원을 이루면 돌아갈 수 있어.'

소원? 웃기는 소리였다. 소설 속 세계에서 이룰 소원이 뭐가 있다고. 원래의 가족도, 친구도 이곳엔 없다. 멤버들은 있지만, 그들 역시 등장인물에 불과하므로 외형과 성격만 일부 차용해 온 생판 다른 사람이나 다름 없다. 하물며 법적 문제 없는 세후 600억 따위를 소원으로 요구한다 해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텐데. 아니, 따지고 보면 내가 황태자인데, 여기서 뭐 더 바랄 게 있나? 부도 권력도 다 가진 거 아냐? 윤정한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내뱉자, 글씨가 다시금 깜박거렸다.

'여긴 네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한 세계야.'

"네가 뭔데 내 소원을 이루어 준대?"

'이 세계의 신.'

글씨가 자신만만하게 웅웅댔다. 윤정한은 진심으로 터져 나올 뻔한 폭소를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무슨 신이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납치해서 소원을 강매하고 앉아 있어. 아까 계속 꿈 아니냐 했더니 빡쳤던 거 보면 속도 엄청 좁은데. 별 덜떨어지고 할 일 없는 신이 다 있네. 그렇지만 윤정한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니, 일단은 얌전히 믿어주는 척 맞장구쳤다.

"와, 대단하다. 나 신 처음 만나 봐."

'난 인간 많이 만나 봤어.'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신은 개뿔 그냥 할 일 없는 백수 하나랑 시답잖은 채팅이나 주고받는 느낌만 점점 강해졌다.

"걔네들도 다 소원 들어줬어?"

'응.'

자선 사업을 벌이는 신이라. 그런 기특하고 고마운 짓을 하기엔 애가 진짜 그냥 심심한 날백수 같은데. 착하지도 않은 거 같고.

"왜? 그런 걸 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말 안 해 줄 거야.'

역시, 뭔가 얻는 게 있긴 한 모양이었다. 진짜 영혼이라도 대가로 받아 가나? 불손한 의심의 눈초리가 느껴지긴 하는지, 자칭 '신'이 구슬리듯 덧붙였다.

'네가 내 세계의 주인공이라 해 주는 거야. 너한테 해가 갈 일은 없을 테니까, 잠자코 즐기기나 해.'

윤정한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꾸했다.

"근데 난 여기서 이룰만한 소원이 없는데?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거 말고는."

'왜 없어.'

글씨가 윤정한을 놀리듯, 눈앞에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너 조슈아 사랑하잖아.'

느닷없이 폭로된 순수한 단어에 윤정한은 그대로 굳었다. 꽁꽁 감추다 못해, 윤정한 스스로도 결코 정의내린 적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안 보면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닿고 싶은, 끊임없이 궁금하고 예쁘고 밉고 서운하고 간지럽고 애타는 감정이 과연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가 있을까. 너무나도 간절해 가끔은 딱 죽을 것만 같이 힘들다가도, 결국엔 이런 마음을 들켜서 지금의 거리마저 유지할 수 없게 될까 봐 꿈결에도 감히 말 못한 채 뻔뻔스레 친구 행세만 늘어 갔는데. 윤정한이 말문을 잃고 입술만 달싹거리는 기회를 놓칠세라 얄미운 '신'이 우다다 말을 늘어놓았다.

'이 소설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 했잖아. 고마워 해. 내가 이루어줄게. 이제 이 소설은, 네가 조슈아랑 결혼하는 거로 끝을 맺을 거야.'

"아니, 나는......."

그런 생각으로 읽었던 게 아니다. 그냥 우연히,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아 아무나 눈에 띄는 대로 대강 팔로우를 해 두었던 모니터링용 SNS 계정을 심심풀이로 훑다가, 별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링크를 하나 눌러보았을 뿐이고, 그러니 저 자신이 황태자였는지조차 긴가민가할 정도로 건성으로 읽으며 슥슥 넘겼을 따름이다. 물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윤정한'과 여주인공의 결혼식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사랑하는 여자가 딴 놈이랑 행복하길 기도하는 소설 속 조슈아의 엔딩을 "조슈지 바보 아냐?" 소리로 비난하면서도, 소설 속 그가 여주인공에게 보였던 절절함의 절반이라도 자신에게 보일 일이 있을지 따위의 비참한 생각을 잠깐이나마 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미 오랜 짝사랑에 이골이 난 윤정한이었으니, 한숨 몇 번 쉬다가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은 금방 밀어내고 잠이나 청했었는데. 그렇다고 그딴 소원 빈 적 없다고 하기엔, 살면서 단 한 번도 조슈아와 잘 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느냐 묻는다면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결혼이면 온건하지, 내가 무슨 상상까지 해봤는데. 자조적인 그 표정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신'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넌 가만히 있으면 돼. 내가 알아서 다 이루어줄게!'

가만히 있는 건 윤정한이 제일 잘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물론 일 좀 제대로 하라며 열심히 쪼아대는 부승관 때문에 정말로 가만히 숨만 쉬고 있지만은 못 했으나. 대충 결혼만 성사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듯한데, 그냥 졸속으로 혼인 신고만 하고 얼른 떠나면 안 되나 싶어 조슈아의 행방을 물어봤더니, 아직 해외 체류 중이시며 무도회 날에 맞추어 귀국하실 예정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듣고 보니 소설의 시작도 무도회였던 것 같았다. 갑자기 조슈아 님은 왜 찾으시냐는 질문은 상큼하게 무시했다.

낯선 곳에서 익숙지 않은 일에 시달리며 지나가는 시간은 느리고 지루하기만 했다. 자기만 믿으라는 '신'의 호언장담이 썩 믿음직스러운 건 아니었으나, 어차피 무도회 날까지는 조슈아를 만날 방도가 없으니 윤정한은 얌전히 제 궁에만 콕 박혀있었다. 처음에는 제게는 외국이나 다름 없는 낯선 도시를 둘러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앞섰으나, 황태자가 정식으로 행차하려면 어찌나 많은 절차와 준비가 필요한지, 나가보기도 전에 진이 빠져버린 탓도 한몫했다. 그럼에도 어쩌다 보니 멤버들을 거의 다 만나볼 수는 있었다. 승관과 우지, 도겸, 그리고 디노는 어차피 황궁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에스쿱스와 민규는 원체 자주 심심풀이 삼아 황궁을 드나드는 듯했다. 버논과 원우는 각각 아카데미와 신전의 대표로서 회의에 종종 얼굴을 비추었다. 호시는 마탑주의 심부름을 왔다는 걸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고, 한 번은 준이 어떤 귀족 영감을 따라온 걸 먼 발치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윤정한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했던 소설 속 멤버들의 역할과 위치를 알음알음 익혔다. 조슈아를 제외하고선 멤버들 중 오로지 디에잇 하나만 여태 만나보지 못했으나, 그 성격 상 어디 조용한 데에서 잘 살고 있겠거니 싶어 걱정은 없었다.

첫인상만 보았을 때엔 꽤나 수다스럽다고 여겼던 '신'은 의외로 자주 튀어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윤정한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듯했는데도 엄청 몸을 사렸다. 윤정한도 딱히 남들 앞에서 헛것을 보는 티를 내고 싶진 않았기에, 혼자 있을 때에만 재미 삼아 자주 '신'에게 영양가 없는 말을 나불대고는 했다. 그래도 처음엔 부를 때마다 재깍 와 주더니, 윤정한이 별 용건도 없이 호출하는 걸 얼마 가지 않아 눈치챘는지 가끔은 아무리 불러도 감감무소식이곤 했다. 물론 윤정한은 금방 대처법을 터득했다. "아, 역시 이거 전부 꿈 같은데......." 소리를 중얼거리면, 꿈 운운에 어지간히 노이로제가 있는지 득달같이 달려와 500pt의 사이즈로 불만을 표하곤 했으니까. 그것도 서너 번이지, '신'은 금세 자신이 똥개 훈련을 당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항의했다.

'그만 불러! 난 인간이랑 이렇게 자주 얘기하지 않는다고.'

"아닌데. 너 나랑 노는 거 되게 좋아하는 거 같은데. 너 나 없으면 심심하잖아."

'그거 자의식 과잉이야. 내 세계 사람도 아닌 외부인이 뭐가 예쁘다고.'

"와, 그럼 네 세계 사람은 살뜰하게 챙겨줘?"

'당연하지! 애초에 너 같은 애들을 굳이 불러오는 것도... 아니다, 이 얘기는 그만.'

아깝다.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여간 어설픈 듯해도 은근히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윤정한은 괜한 오기는 부리지 않고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아무리 잘 챙겨줘도, '신'이 할 일 없이 이러고 다니는 거 알면 원우마저도 너한테 정 떨어질 걸?"

'내가 오고 싶어서 와? 네가 계속 귀찮게 하잖아!'

놀리면 놀리는 대로 즉각 반응하는 이런 타입이야말로 윤정한이 가장 놀려먹기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몇 번 그렇게 골려대다 보면 '신'은 신 주제에 팽 토라져 쓱 말없이 사라지곤 했지만, 그래봤자 꿈 소리를 입에 올리면 또 극대노하여 튀어나올 게 뻔했다.

부르지 않았는데도 헐레벌떡 나온 적도 한 번은 있었다. 요 며칠 왜 이렇게 일 처리가 답답하냐며 부승관이 빽 소리를 질렀을 때, 윤정한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좋은 질문이다, 승관아. 사실 내가 이곳 사람이 아닌데......."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믿어주리라 기대하고 털어 놓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평소에 윤정한이 해대는 헛소리가 한둘은 아니니, 또 농담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걸 알면서 한 가볍디 가벼운 발언이었다. 난데없이 온 세상이 요동치더니 부승관이 숨도 쉬지 않는 채 굳어버릴 줄은 단연코 예상하지 못했다.

"...승관아?"

기이하게 고요해진 세상 속에서 미친 듯이 빛을 발하는 글자들이 튀어나와 시야를 가렸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나? 그냥 승관이랑 얘기 중이었는데."

'그러니까 무슨 얘기 했냐고!'

"내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미치겠다 진짜!!! 그거 밝히면 안 된댔지?!'

"네가 언제?"

'언제는 무슨 언제야! 너 오자마자 처음에...'

글씨가 뚝 끊겼다. 너 정말로 나한테 그런 소리 한 적 없다니까. 윤정한은 당당한 태도로 글씨를 노려보았고, '신'은 잠시 침묵하다 아까보다 한층 작아진 글자들을 띄엄띄엄 자아냈다.

'...네가 하도 정신 사납게 해서 깜박 잊고 말 못 해준 거잖아.'

허. 신도 남 탓을 하네. 스스로도 계면쩍었던지 '신'은 한 풀 꺾인 태도로 설명해주었다.

'내가 불러오긴 했지만, 넌 이방인이라 사실 존재만으로도 이 세계의 질서를 뒤흔드는 존재야. 그래서 '빙의'의 형태로 간신히 구색을 맞추고 있는 건데, 만약 다른 사람한테 네 진짜 정체나, 이곳이 책 속이라던가, 아무튼 그 비슷한 얘기를 하면, 세상이 불안정해져. 심하면 아예 무너져버릴 수도 있고.'

"그런 중요한 얘기를 이제서야 한다고?"

'...보통은 너처럼 그렇게 아무렇게나 밝히지도 않거든?! 아무튼, 하지 마. 절대 하지 마. 내가 수습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엄중한 경고에 윤정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공중에서 거꾸로 3연속회전을 하는 듯한 어지러운 감각이 왈칵 몰려오더니, 어느 순간 부승관이 다시 멀쩡하게 빽빽거리고 있었다.

"전하 혹시 뭐 잘못 먹었어요? 왜 이렇게 요 며칠 일 처리를 답답하게 해요? 신종 시위야? 내가 지금까진 황태자라 참았는데, 이젠 차라리 잘리는 게 속 시원하겠다!"

아, 시간이 되돌아갔구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신기한 현상도 겪게 해 준다니, 처음으로 '신'이 좀 신 답다고 느꼈다. 윤정한은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고,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과는 다른 대답을 하였다.

"정말? 근데 승관아, 과연 그냥 잘리는 걸로 끝날까? 세상엔 황족 모독죄라는 게 있다고 하던데."

그게 부승관의 혈압에는 더 악영향을 미친 듯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세계는 무사했다. 나중에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금기시되는 발언일까 궁금해 아무나 붙잡고 "도를 아세요?"부터 차근차근 물어보면 어떨까 했으나, 생각만 했는데도 용케 눈치채고는 '신'이 눈앞에 각종 경고창을 빽빽하게 띄우는 바람에 단념했다. 윤정한의 눈빛에서 불길한 낌새를 느꼈다고 하더라. 눈치만 빨라가지고는. 그래도 저렇게까지 하지 말라고 난리를 친다면 개인적인 호기심 정도는 곱게 접어두자고 결정했다. 윤정한은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지만, 재미만을 위해 돌이킬 수 없는 트롤링을 하는 사람은 또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세계를 산산조각낼 뻔 한 건 단언컨대 절대로 윤정한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무도회에서 처음으로 이 세계의 조슈아와 마주쳤을 때만 해도, 윤정한이 느꼈던 건 미약한 죄책감 정도였다. 그는 현실의 조슈아가 아니니 한낱 도플갱어와 다를 바 없음을 알면서도, 제 사심 때문에 뒤틀린 줄거리에 휩쓸려 버렸으니 약간은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는 말이다. 황태자의 입장을 알리는 큰 팡파레 소리가 울리는데도, 고개를 돌린 채 제 쪽엔 시선 한 번 던지지 않는 조슈아를 보고 윤정한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더란다. 결혼까지 가는 길이 쉽지는 않겠구나 하고. 그런데.

"...황태자 전하."

조슈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귀족들을 물리고 그의 앞에 섰을 때,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수그리며 핑크빛으로 귀를 물들이는 그는 윤정한이 경험한 적 없는 조슈아였다. 에이, 설마.

"슈아 안녕."

인사 한 마디 건넸을 뿐인데 조슈아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눈꼬리와 입가는 태연하게 미소를 자아내면서도 마음이 요동치는 게 다 드러나도록.

"....이제는 일 년에 한 두 번 뵙는 게 고작인데도, 전하께서는 언제나 어릴 때처럼 불러 주시네요."

유학을 가 있었다고 얼핏 듣긴 했지만, 그렇게 가끔 밖에 못 보는 사이였어? 제가 빙의하기 전까지의 과거는 알 길이 없으니, 윤정한은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져. 너도 그냥 이름 불러도 돼."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현실의 조슈아와의 사이에선 흔히 겪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잘조잘 온갖 이야기가 퐁퐁 샘솟거나, 아예 입도 벙긋 하지 않아도 편안하기만 한 침묵이 흐를 뿐이었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난감함은 퍽 낯설어서, 오케스트라의 첫 음이 울리자마자 윤정한은 냅다 물었다.

"나랑 춤이라도 출래?"

"전하랑요?"

조슈아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대책 없이 떠오르는 대로 던진 제안이지만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대강 훑기만 했대도, 소설의 첫 장면만은 제대로 읽어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그의 약혼녀이자 이 소설의 여주인공과 첫 춤을 추었고, 한참을 가만히 자리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던 '윤정한'이 별안간 오랜 친구의 약혼자라면 자신 또한 춤을 청하는 게 예의라며 본격적으로 여주인공과 얽히게 되었다. 고로 춤 신청은 가장 무난한 호감의 표시임과 동시에, 지금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치면 조슈아가 약혼녀와 춤을 출 기회를 뺏을 수 있었다. 윤정한에겐 적극적으로 조슈아를 꼬실 대담함은 없었으나 -애초에 그게 그렇게 쉽게 가능했더라면 현실에서 진작 꼬셨을 터이다- 당연하게도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조슈아와 맺어지는 게 달갑지는 않았다. 품 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기회를 왜 굳이 마다하겠는가.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본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니, 윤정한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빌어도 조슈아가 끝까지 제 약혼녀를 고집한다면, 나와 결혼하지 않을 시 네 주변인들을 죄다 교수대에 올리겠다는 협박까지 불사할 결심도 했었다. 폭군 한 번 되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거야.

"어, 나랑. 싫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윤정한은 조슈아의 손을 붙잡았다. 단호하게 뿌리칠지도 모른다는 염려와는 다르게, 조슈아는 작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살며시 윤정한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닙니다, 전하. 영광입니다."

답지 않은 존댓말은 여전히 생경했지만, 윤정한은 묵묵히 조슈아를 홀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윤정한이 이곳의 춤곡을 깡그리 망각했다는 사실을 어쩌다 보니 알게 된 부승관이 기함하면서 스파르타 속성 과외를 시킨 덕분에, 윤정한은 아무런 무리 없이 왈츠를 소화해낼 수 있었다. 조슈아가 훌륭한 실력의 파트너인 덕택도 있었다. 다만, 춤 역시 사교 행위의 일환이기에 파트너와 적절히 대화를 주고받아야 한다고 배운 게 무색하게도, 그들 사이에는 내내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윤정한이야 벼락치기 한 동작을 행여 놓칠세라 딴 데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조슈아는 왜 반쯤 넋을 놓은 것처럼 굴었을까. 윤정한과의 춤이 불편하고 어색해서 그랬다고 하기엔, 음악이 멈추고도 조슈아는 먼저 손을 놓지 않은 채였다. 아까부터, 모든 신호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도 이 조슈아는 윤정한을 좋아하고 있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고. 심지어 그게 하루 이틀의 얕은 감정이 아니라, 너무 깊고 절절한 나머지 도저히 숨길 수도 없게 밖으로 흘러넘치는 정도라고. 윤정한은 그게 반갑기는커녕 의아하기만 했다. 너는 원래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그 순간, 거대한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겸이 연회장 내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쳤다.

"대신관 님의 긴급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수군대는 인파가 자연스레 두 갈래로 나뉘고, 그 사이로 흰 로브를 입은 전원우가 걸어 나왔다.

"연회를 중단시키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사과하는 전원우에게 윤정한은 고개를 저었다. 원작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던가? 졸면서 읽은 탓에 긴가민가했다. 있긴 했던 거 같은데, 뭐였더라.......

"중대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아, 맞다.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지만, 윤정한과 여주인공을 맺어주기 위한 억지 신탁이 하나 있었다. 윤정한은 아직 저와 손을 맞잡은 상태로 곁에 서 있는 조슈아를 일별했다. 슈아랑은 어떡하지, 그럼? 이곳의 신탁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것 같은데, 그걸 거스르고 슈아랑 결혼하려면... 야반도주라도 해야 하나. 황태자가 그래도 되나? 윤정한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건 말건 전원우는 근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오늘 밤 황태자와 첫 춤을 춘 이가, 훗날 황궁의 안주인이자 황제의 영원한 반려가 되리라."

모든 이의 시선이 조슈아에게 꽂혔다. 황태자와 첫 춤을 춘 이. 공작가의 조슈아. 황제의 반려가 될 자. 즉, 윤정한과 결혼할 사람. 삐걱거리는 프로세스로 뒤늦게 신탁의 진의를 깨달은 윤정한이 멍하니 조슈아를 바라보는데, 시야 한 켠에서 장난스레 깜박이는 글씨가 눈길을 잡아 끌었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신탁이라면, 애초에 저 '신'이 내리는 것이었을 텐데.

'내가 다 이루어준다고 했잖아. 알아서, 잘.'

'너는 즐기기만 해!'

자신만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봐도 오래전부터 자신을 좋아해 온 조슈아. 거기에 더해서 신의 뜻으로 아예 묶여버린 운명. 자신은 정말 이런 걸 바라고 있었나?

그로부터 대략 삼 주 뒤, 윤정한은 야반도주를 실행에 옮긴다. 조슈아는 없이, 홀로. 그의 결혼식 전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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