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회오리토끼
조슈아는 휘황찬란한 연회장의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며, 어젯밤을 조금 후회했다. 간만에 여유로운 밤이라 일찍 잠자리에 누웠건만, 피곤했던 하루는 아니었던지라 곧장 잠을 청하는 대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던 게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다음 실수는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하고 많은 것들 중 하필 트위터에 접속한 것이었다. 조슈아는 다른 멤버에 비해 서치를 자주 하
조슈아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기 전, 이번엔 정말로 익숙한 천장이 보이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하지만 오늘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는, 조슈아가 이 해괴망측한 세상에서 이틀째를 맞이하였음을 묵묵히 고할 뿐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 하나쯤은 있었다. 소설의 도입부부터 시원하게 망쳐버렸으니 (물론, 일을 망친 건 따지자면 조슈아가 아니라 윤
여주인공의 존재 여부 자체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조슈아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몇 없었다. 도련님의 정신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영 찜찜하단 표정으로 쳐다보는 우지와 준에게 너무 실감 나는 꿈을 꿔서 잠시 헷갈렸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놓고, 급격히 피로해진 심신을 달래기 위해 잠을 청해 보았지만 머릿속이 혼란한 탓에 쉬이 잠들지 못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마탑으로 향하는 길은 소설 속에 빙의된 이래로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현실로 돌아갈 방책을 구할 마지막 희망이어서이기도 했지만, 마탑이라는 존재 자체가 본질적인 영향이었다. 호그와트 같은 장엄한 성채, 혹은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묘한 분위기를 두른 드높은 벽돌 탑을 상상했다. 물론 지금까지 목격했던 공작저와 황궁도 충분히 화려하며 웅
다시 황궁에 도착하였을 즈음엔 늦은 오후였다. 아직까지도 무료한 표정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용인은 몇 시간 만에 되돌아온 조슈아에게 의아하다는 시선을 던졌으나, 이번에도 별 말 없이 그를 들여보내 주었다. 아까와 똑같은 방향으로 그를 안내하는 시종에게 조슈아가 물었다. "정한이는 아직도 서재에 있어?" "네, 일이 많으니 방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셨
다음 날 늦은 오전 황궁에서 마차가 당도한 것은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었다. 오늘 반지를 함께 고르자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확정된 사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건부 약속이었지 않은가. 윤정한이 일을 다 끝마친다면 어울려 주겠다는. 그러나 어제 결국 윤정한은 서류를 미처 다 보기도 전에 다른 일로 인해 가버렸으니까, 무효가 된 줄로만 알았다. 공작저에 돌아와
조슈아가 식사를 마치고 김민규가 황태자를 찾아온 용건을 해결한 뒤 떠나자, 윤정한이 물었다. "이제 세공사 불러와도 돼?" "응, 난 좋아." 이때까지만 해도 조슈아는 고작 반지 하나 고르는 게 얼마나 큰일이 될 지 짐작도 못했었다. 그냥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다 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고, 손가락 치수만 재면 끝이라고 생각했지. 진짜 본인의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란 참으로 묘했다. 회의실에 계신다고 하길래, 다른 귀족들까지 와글와글 모여 있는 자리인 거면 어쩌지 싶었다. 실례지만 제가 아버지 얼굴을 몰라서 그런데, 제 아버지이신 분 손 한 번만 들어주시겠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긴장한 채 발을 들인 드넓은 회의실 안에는 중년의 남자 한
조슈아는 며칠 지내는 데 필요한 옷가지 정도만 들고 온 가벼운 몸으로 별궁에 입성했다. 황궁의 가장 외곽에 위치해 있어 일전엔 잘 몰랐는데, 말만 별궁이지 사실상 황궁의 1/3을 잡아먹는 규모였다. 황실의 일원이 아닌 자들이 머무르는 곳을 한데 묶어 통째로 별궁이라 칭하는 듯했다. 따라서 초청을 받은 귀빈들이 머무르는 최고급 손님용 공간은 물론이고, 황실
그 밤, 윤정한이 다정한 남자친구마냥 별궁 문 앞까지 조슈아를 바래다주고, 헤어지기 싫은 양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괜히 손을 매만지고 바람이 시원하다는 둥의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다가, 마침내 헤어진 후 방으로 돌아와 잠이 들기 전까지, 조슈아는 내내 왼쪽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익숙하기에 더욱 낯선 감촉이었다. 윤정한이 제 궁으로 돌아가기 직
마음이 편치 않으니 하루가 참 길었다. 차라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라도 하면 괜한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으나, 이럴 때만 꼭 희한하게 한가로이 붕 뜨는 시간이 생겼다. 산책 삼아 별궁 주변을 세 바퀴나 빙빙 돌다 결국엔 황태자궁까지 찾아가 뭐라도 일거리가 없냐는 닦달까지 하였으나, 윗선의 결정이 필요한 사안은 남아있지 않
윤정한은 과하게 화려한 낯선 방 안의 드넓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꿈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다. 그야, 눈앞에 빛나는 글씨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으니까. '소설 속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주의: 이것은 꿈이 아닙니다.' 라는. 다시 생각해보면, 이걸 한낱 꿈 취급하며 한참을 헛발질하는 사람이 어찌나 많
변명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작정하고 '신'에게 엿을 먹이려 저지른 짓은 아니었다. 그냥 조금 심란해서 충동적으로 부린 객기가, 윤정한의 예상을 벗어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뿐. 실상 처음부터 제대로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면 섣불리 피해를 주려 하진 않았을 테니, 솔직히 말해 '신'의 자업자득이었다. 윤정한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
한계까지 체력을 끌어다 쓴 연습을 끝내고 '와... 죽겠다' 라는 생각을 한 적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정녕 본능의 차원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낱 인간은 세계가 통으로 무너지는 가운데에서 탈출할 방도가 일절 없으며, 그것은 곧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는 걸.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윤정한은 아침에 상쾌하게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 사용인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공작가에 사람을 보내서, 조슈아한테 최대한 빨리 입궁하라고 전해줘." "예, 전하." "아, 에스쿱스도 불러오고." 윤정한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전날 있었던 일을 되새겼다. 다짜고짜 "너 내가 모르는 사이에 폐위 됐었니?" 라니, 회귀 이전의 조슈아와는 정반대의 반
어떻게 윤정한의 집까지 당도했는지 흐릿했다. 매 순간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정신은 아직 소설 속 세계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며칠 동안, 윤정한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가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자 빙의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비로소 이해가 가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