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3)

로판AU

여주인공의 존재 여부 자체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조슈아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몇 없었다. 도련님의 정신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영 찜찜하단 표정으로 쳐다보는 우지와 준에게 너무 실감 나는 꿈을 꿔서 잠시 헷갈렸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놓고, 급격히 피로해진 심신을 달래기 위해 잠을 청해 보았지만 머릿속이 혼란한 탓에 쉬이 잠들지 못했고, 한 시간을 넘게 뒤척이다 결국 최후의 보루로 우지에게 수면제라도 있는지 물어보았으나, 송구하게도 아무것도 챙겨오지 않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너 진료 보러 왔다며?"

황당함이 역력한 목소리로 묻자, 우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핑계였죠. 진짜로 아프셨어요?"

"핑계였지."

눈이 마주치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만큼은 실없는 장난을 주고받던 평상시의 멤버와 다를 바 없이 느껴져서, 조슈아는 넌지시 물었다.

"넌 내내 의사였어? 항상?"

"뭐... 그렇죠? 원래 의사가 되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카데미 학부를 어쩌다 그쪽으로 가게 돼서."

"그럼 의사가 안 됐으면, 아카데미를 안 갔으면 지금 뭘 하고 있었을 것 같아?"

"글쎄요....... 음악가려나?"

고민 끝에 돌아온 대답에 조슈아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음악가? 가수? 너랑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불행하게도 피어오르던 기대감은 금방 짓밟혔다.

"아뇨, 가수는 진짜 생각도 안 해봤고, 그보다는 연주자 쪽이요. 황실 행사에서 오케스트라 볼 일이 많은데, 좋더라고요."

그 대답에서 무언가 숨기려는 티는 조금도 나지 않아서, 조슈아는 눈앞의 우지가 아무리 제가 알고 있는 우지와 같아 보여도, 세븐틴으로서의 삶은 전혀 알지 못하는 별개의, 창작 속 인물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우지 뿐만이 아니다. 준휘도, 쿱스도, 도겸과 디노, 승관이, 원우, 지금까지 만났던 멤버들과 아직 만나지 못한 멤버들 모두가, 아무리 익숙하게 여겨져도 결국엔 조슈아가 알고 좋아하는 그들은 아니다. 윤정한마저도.

이 세계에 온 뒤 처음으로, 조슈아는 서글픈 외로움을 느꼈다.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지기에, 반대로 그들에게 무엇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게 힘겨웠다. 조슈아는 힘겹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듣고 보니 그게 훨씬 잘 어울리네."

현실의 우지를 그대로 본떠 만든 황실 주치의 이지훈이니까, 그 역시 조슈아가 좋아하고 아끼던 우지의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그대로 가지고 있으리라. 그러나 조슈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꼽자면 단연 그들이 함께 쌓아온 기억과 함께 걸어온 발자취였다. 그러니 너희 모두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어도, 내가 윤정한과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

간절한 다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하다,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문 밖엔 먼 동이 트고 있었고, 우지는 의자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돌아가고픈 마음은 확고했지만, 돌아가기 위해 오늘부터는 또 무엇을 해야 할까. 온 귀족가 영애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기라도 해야 하나. 정작 여주인공의 이름도 가문도 얼굴도 모르는데. 설사 찾는다 해도 이미 윤정한과도 나와도 이어질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면 혹시 다른 남주인공과 이어지게 되는 걸까. 문득 든 생각에 '다른 남주인공'인 멤버들을 속으로 죽 읊어내리다, 조슈아는 한 이름을 멍하니 중얼거렸다.

"명호......."

소설 속의 디에잇은 마탑주였다. 마탑이 어디에 있는지, 또 무얼 하는 집단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마탑주 쯤 된다면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이지 않을까. 그리고 조슈아가 소설 속 세계에 빙의된 현 상황은 암만 생각해도 마법의 영역이었다. 어쩌면 명호가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결말을 보지 않고서도 원래 세계로 곧장 돌아갈 수 있게 포탈 같은 걸 열어준다던가.

조슈아는 우지가 부스스 눈을 뜨자마자 득달같이 물었다.

"지훈아, 너 마탑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나 오늘 마탑주를 보러 가려고 하는데."

"마탑주요?"

우지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알긴 하는데... 아무리 공작가여도 만나 뵙기 쉽진 않을 텐데요."

"그래? 많이 바빠서?"

"바쁘시기도 하겠지만... 일단 마법을 사사로운 일에 동원하지 못하도록 황실에서 관리하고 있으니까요. 알현 허가 받는 데에만 서류를 엄청나게 제출해야 합니다."

알현 허가라니. 생각지 못한 절차에 조슈아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많이 까다롭겠지. 진짜 알현 목적을 밝힐 수는 없을 텐데, 본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말을 누가 믿어주겠어, 조슈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우선은 그냥 몇 가지 물어보려고만 하는데, 그래도 어려울까? 덜 복잡한 방법은 없어?"

우지는 잠시 주저하더니, 내키지 않는다는 어투로 대답했다.

"조슈아 님이시라면 방법이 없진 않은데요......."

"정말? 뭔데?"

"그... 마탑 관련 사안은 전부 최종 결재권자가 황태자님이셔서요."

희망으로 반짝이던 조슈아의 얼굴이 순간 굳는다. 우지는 그걸 보고서도 모른 척 쐐기를 박는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정말 없습니다."

침묵이 흐른다. 아마 조슈아는 속으로 제 발로 황태자를 찾아가 아쉬운 소리를 해 대면서까지 마탑주를 만나야 할까 열나게 고민 중이리라. 하지만 이미 저울은 기울어져 있었다. 우지가 물었다.

"...날이 밝았으니 저는 이제 황궁으로 복귀해야 하는데, 가는 김에 같이 가시겠습니까?"

조슈아는 대답 대신 메마른 웃음을 한 번 내뱉고는, 말없이 채비를 위해 사용인을 부르는 종을 울렸다.

조슈아는 황태자가 업무를 보는 개인 서재 문 앞에 서서도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자진해서 윤정한과 독대를 하느니, 지금이라도 그냥 얌전히 서류 준비해서 정식 절차를 밟을까? 스스로도 지나치게 윤정한을 껄끄러워 하고 있음을 자각하곤 있으나, 어쩔 도리 없이 복잡한 심경이었다. 갑자기 마탑주를 만나겠다고 요청하는 게 수상해 보일까 봐, 아니면 대가로 윤정한이 무얼 요구할지 모른다는 게 불안해서, 혹은, 그저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결혼을 조르는 윤정한을 보고 있기가 조금 거북해서.

그래도 쓸 수 있는 수단은 다 써야지. 사실 여기까지 도달한 것도 어찌 보면 윤정한 덕택이었다. 본래 황태자 알현도 구구절절 사유서를 제출하여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니까. 그러나 기계적으로 서류를 내밀며 방문 사유를 묻던 담당 관리는 조슈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밀었던 서류를 말없이 물리더니 즉시 조슈아를 황태자가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이제 명실공히 약혼자다 이 말이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큰맘 먹고 문을 두드리려던 때, 부승관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어? 전하께 볼일이라도 있어요?"

옆을 바라보니 승관이 서류를 산처럼 쌓아 든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영 위태로워 보여 일부라도 받아 들까 싶었으나, 손을 내밀고 다가가자 승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녜요, 이 상태에서 건드리는 게 더 불안해요!"

극구 그렇게 말하니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신 물었다.

"너도 정한이 보러 왔어?"

"네, 맞아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뭐가 이렇게 많아?"

"다 오늘 처리하셔야 할 서류죠. 안 그래도 일이 산더미인데, 갑자기 결혼식까지 준비하려니까 정말이지......."

그러다 눈앞의 조슈아가 그 결혼의 당사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승관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조슈아는 신경 쓰지 말라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급하게 준비 안 해도 될 텐데."

"사실 그렇죠, 약혼도 날치기 통과 시켰으면서. 근데 전하께서 하도 빨리 진행하라고 성화신데 저희가 별 수 있나요. 아무튼! 혹시 급한 일 아니시면, 제가 먼저 들어갔다 와도 될까요?"

승관이 간절한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본다. 솔직히, 저만큼 쌓인 서류를 다 처리하려면 기껏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한 보람도 없게 한참을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여태 이 세계에서 조우한 멤버들 중 부승관의 처지가 단연코 제일 안쓰러워 보이는지라, 조슈아는 측은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얼마나 일이 밀렸으면......."

"사실 밀리진 않았거든요? 근데 그게 더 얄밉다니까요? 아무리 급하다고 미리부터 닦달을 해도, 태연하게 농땡이 피면서 사람 피를 말리다가, 칼같이 마감 직전에 다 처리하긴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뭐라 하지도 못하고, 어휴 진짜 퇴사해야지......."

부승관은 맺힌 울분을 우다다 토해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영혼 없는 미소를 지으며 조슈아에게 물었다.

"제가 지금 손이 없어서, 노크만 대신 해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똑똑, 문을 두 번 두드리자 안에서 윤정한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들어와."

조슈아는 묵묵히 알아서 승관 대신 거대한 문을 당겨 열었다. 그가 눈짓으로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서재 안으로 들어서며 고했다.

"접니다, 부승관."

"아, 승관이였어? 없는 척 할 걸."

천연덕스럽게 그렇게 말하는 꼴에, 부승관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이걸 보시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얼른 하고 끝냅시다, 네?"

"어, 해야지. 근데 내가 지금은 바쁘네~"

"제가 더 바빠요! 세상 한가해 보이는구만."

"아냐, 나 지금 진~짜 바빠. 네가 황태자의 고달픈 삶을 어찌 이해하겠니."

"하....... 윤정한 진짜,"

"뭐라고, 승관아?"

"전하요. 윤 전하."

부승관이 죽은 눈으로 억지웃음을 짓는다. 윤정한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또, 하극상인 줄 알았지."

"하하 제가 어찌 감히."

정말로 바쁜 건지, 아니면 뻔한 핑계인 건지. 궁금해져 조슈아는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즉시 후회했다. 대번 윤정한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어? 슈아?"

이미 눈에 띄어버린 이상, 되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윤정한이 반갑게 물었다.

"몸은 이제 좀 괜찮아?"

"어... 의사 보내줘서 고마워, 정한아. 얼마나 열심인지, 밤새 옆에 붙어있더라."

뼈 있는 말에도 윤정한은 가증스러운 웃음만 지었다.

"다행이네. 근데 어쩐 일로 네가 날 먼저 보러 왔어?"

용건이 없었더라면 절대 먼저 걸음하진 않았으리라는 걸 안다는 투의 말이었다. 문득 조슈아는 이 세계의 두 사람이 본디 어떤 관계였을지가 궁금해졌다. 소설 속에서는 여주인공과의 관계가 중점으로 서술되어, 다른 등장인물과의 교류는 거의 비추어지지 않았으니 알 길은 없었지만. 이곳의 너랑 나는 현실처럼 가까운 '친구' 사이였을까, 아니면 적당히 안면만 있는, 정말로 용건이 없다면 만날 일 없는 그저 그런 사이였을까.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이제야 편히 이름을 불러주는 거냐고 물었으니까, 아마 '우리' 사이는 후자에 가까웠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너는 정말로, 나에게 그나마의 우정이나 동료애조차 없는 채 그저 신탁 하나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거겠지. 희한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눈앞의 윤정한이 현실의 윤정한에 비하면 얼마나 얄팍한지 깨달은 덕택이었다. 조슈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부탁할 게 있었는데, 바쁜 줄 몰랐어. 그냥 다음에 다시 찾아올게."

그러나 윤정한은 고개를 저으며 조슈아에게 손짓했다.

"아냐, 슈아야, 나 시간 있어. 와서 같이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 해 봐."

옆에서 부승관이 대번 항변했다.

"아니, 바쁘시다면서요!"

"어, 슈아가 용건이 있대서 바빠졌네? 일은 나중에 해야겠다, 그치?"

그러고는 다시 조슈아를 바라보며 옆에 놓인 의자를 톡톡 두드린다. 조슈아는 승관에게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곁에 가 앉았다. 부승관의 처지는 여전히 안타까웠으나, 발코니 앞 테이블에 앉아 노닥거리던 윤정한은 정말 하나도 바쁘지 않아 보였고, 그렇다면 그냥 지금 서류를 보기가 싫을 뿐일 테니 제 용건을 먼저 처리하든 말든 승관에게는 크게 다를 바가 없으리라. 부승관도 그걸 깨달았는지,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서류를 책상 위에 탕 소리와 함께 내려두었다.

"그럼 일단은 여기 두고 갈 테니까, 시간 날 때 보셔야 합니다? 꼭!"

"알겠어~ 아, 승관아, 가는 길에 여기 티 세트 좀 갖다 달라고 해주라."

승관은 나지막이 무어라 중얼거리며 밖으로 사라졌다. 분명 윤정한 욕이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용인들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제법 거창한 티 세트를 차려주었다. 차를 홀짝이며 비로소 윤정한이 물었다.

"그래서? 무슨 부탁인데?"

"마탑주를 만나고 싶어. 가능한 빨리."

"마탑주를?"

윤정한이 조슈아를 응시하며 물었다.

"왜?"

그래, 당연히 이 질문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조슈아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다. 혹시 세계를 넘어가는 마법을 쓸 수 있는지 묻기 위함이라고는 말 할 수 없었으니까. 조슈아는 침착을 가장하며 차 한 모금을 삼킨 후 대답했다.

"가문의 일이야."

"그렇게 뭉뚱그려도 원래는 안 되는 거 알지?"

'원래는 안 되는 거.' 그렇다면 이번만큼은 허가를 해 주겠다는 의미일까. 희망 섞인 시선을 마주하자 윤정한이 다 안다는 양 웃었다.

"하나만 솔직하게 말해줘. 도망가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아니야."

지금 자신이 꾀하는 게 도망이지 않나, 라는 상념이 찰나 간 스쳐 지나갔음에도 조슈아는 부정하였다. 결혼을 피하려는 심산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니까.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둘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윤정한은 조슈아를 물끄러미 살피더니 말했다.

"알겠어."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아까 부승관이 올려두고 간 아슬아슬한 서류의 산을 용케 쓰러뜨리지 않으며, 그 틈바구니에서 종이와 깃펜을 발굴해내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최대한 빨리? 지금 바로도 괜찮아?"

예상보다 훨씬 수월한 진행에 조슈아가 살짝 놀라 되물었다.

"허락해주려고?"

최종적으로는 허가를 내려주리란 사실은 의심한 적 없었으나, 그래도 왜 마탑주를 만나려고 하는지 조금은 더 캐물을 줄 알았다. 윤정한이 슥슥 서류를 작성해내리며 대답했다.

"어. 원래는 마법의 힘을 가지고 대형 사고라도 칠까 봐 좀 더 꼬치꼬치 물어봐야 하는 건데, 차기 황후가 나라 망할 일에 마법 쓰지는 않을 거 아냐."

조슈아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너 폐위시키는데 쓰면 어쩌게?"

윤정한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여상히 대답한다.

"재밌어지겠지? 폐태자가 즉위하는 건 아마 역사상 최초가 될 텐데."

실소가 새어 나왔다. 직전까지 계속 조슈아가 도망칠 까봐 염려하였으면서, 어찌 되었건 그들의 결혼은 기정사실이라는 듯 태연하게 구는 폼이 모순적이었다. 윤정한은 작성을 마친 서류를 곱게 돌돌 말았다. 조슈아는 그것을 건네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윤정한은 서류를 넘겨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기껏 나 보려고 왔으면서 벌써 가는 건 좀 매정하잖아."

올 것이 왔다. 역시 아무 대가도 없이 곱게 넘겨줄 리가 없지.

"내가 뭘 해주면 되는데?"

윤정한이 빙긋 미소 지었다.

"오늘 대신, 다른 날 시간 내줘. 결혼반지는 같이 맞추러 가야지."

"...알겠어, 정한아."

그제서야 윤정한은 서류를 건네주었다. 어차피 마탑주에게서도 별다른 방도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뒤에는 정말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반지를 맞추든, 예복을 맞추든 크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찻잔을 정리하고 일어서는 조슈아에게, 윤정한이 덧붙여 말했다.

"가문 얘기가 나왔던 김에 말인데, 널 대신할 공작가의 후계는 내가 얼추 추려뒀어. 방계 쪽에서 똘똘한 애들로. 공작에게 조만간 명단 보내려고."

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에만 급급하여, 결혼 이후를 대비할 생각은 전연 하지 못했다. 실상 조슈아의 입장에선 그런 걸 진지하게 대비하는 게 말도 안 되는 꼴이지만, 최소한 정한은 진지하게 그들의 결혼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구나 싶어 어딘가 멋쩍은 기분이 되었다.

"...고마워. 내가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럼 그 빚도 다음에 갚아."

"그럴게."

순순히 대답하자 정한의 두 눈이 동그래지더니, 곧이어 흐드러지게 웃는다. 그리고 윤정한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늘 그랬듯, 조슈아의 눈매도 어쩔 도리 없이 둥글게 휘어진다. 그걸 위장하려 부러 타박을 뱉는다.

"얼른 일 해. 승관이 고생시키지 말고."

"그거 반은 엄살이야~ 지금도 연무장 가서 민규랑 도겸이랑 족구하고 있을걸?"

조슈아는 일하기 싫다는 투정을 뒤로 하며 서재를 나왔다. 만약 마탑으로의 방문을 통해 내가 목적을 달성한다면, 이 세계의 너는 다시 볼 일이 없겠지. 다행히도 아쉬움은 들지 않았다. 근방에 대기 중이던 시종이 쪼르르 다가와 마차를 부를까 묻는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탑으로 간다고 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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