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6)

로판AU

다음 날 늦은 오전 황궁에서 마차가 당도한 것은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었다. 오늘 반지를 함께 고르자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확정된 사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건부 약속이었지 않은가. 윤정한이 일을 다 끝마친다면 어울려 주겠다는. 그러나 어제 결국 윤정한은 서류를 미처 다 보기도 전에 다른 일로 인해 가버렸으니까, 무효가 된 줄로만 알았다.

공작저에 돌아와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에는 아직 TV나 라디오가 보급되지는 않았으나, 마법의 힘으로 황실에서 보내는 영상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송출할 수 있는 큼직한 크리스털이 설치된 광장이 큰 도시마다 하나씩 존재했다. 당연히 이 수도 내에도 있었으며, 어제 세상이 흔들린 이후 황태자가 긴급 방송을 하였다고 들었다. 급히 부승관을 불러 본궁으로 간 게 방송을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큰 이변 없이 단순히 흔들리기만 한 게 전부지만, 보다 큰 재난의 전조 증상일 수도 있으니 대신전에서 정밀 조사 후 정식 보고를 올릴 예정인 바 안심하고 기다려주시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고, 방송을 들으러 광장에 나갔다 왔던 사용인 몇몇이 고했다. 그러고 보니 날이 밝으면 대신전을 호출하겠다는 소리를 정한이가 했던 것도 같았다. 그러면 정말로 내일은 바빠서 반지 볼 시간 같은 건 없겠네. 다른 날을 새로 잡아야겠다. 조슈아는 알아서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공작저의 넓은 정원을 몇 바퀴 빙빙 돌며 산책을 즐기다 느긋하게 목욕까지 끝마치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는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마치고 텅 빈 하루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궁리하던 참에, 문준휘가 나타나 황실에서 보낸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한 것이다. 조슈아가 동그랗게 놀란 눈을 하자 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돌려보낼까요?"

"아, 그건 아냐. 그런데 채비가 덜 끝났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는 전해줄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정말로 오늘 일정을 강행할 줄 예상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조슈아는 빠르게 외출 채비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황태자궁에 프리패스 입장을 한 뒤, 이번에도 서재로 안내하려나 싶었는데 오늘은 시종이 다른 방으로 조슈아를 이끌었다.

"여기는 무슨 방이야?"

"응접실입니다. 지금 대신관 님께서 방문 중이셔서요."

시종이 공손히 문을 두드리며 고했다.

"황태자 전하, 조슈아 님께서 오셨습니다."

"어 들어와~"

시종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조슈아 대신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방 중앙의 푹신한 의자에 윤정한과 전원우가 마주 보며 앉아있었다. 윤정한이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슈아 왔어? 여기 앉아."

전원우도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조슈아도 마주 묵례를 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신의 계시니 뭐니 하는 거짓말로 약혼을 피하려 꼼수를 부리다 대놓고 실패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지만, 다행히도 전원우는 그날의 해프닝을 잊은 건지 잊은 척을 하는 건지 몰라도 그저 덤덤하기만 했다.

"그래서, 하던 얘기는─"

"그냥 마저 해도 돼. 슈아는 들어도 괜찮아."

전원우는 조슈아를 일별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따로 내려온 신탁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지난 황궁 무도회의 밤에 내려왔던 신탁이 마지막인 거죠. 그래서, 저희 신전 측의 해석은."

전원우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어 말했다.

"결혼을 최대한 서두르라는 재촉성 의미의 경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윤정한이었다.

"...음, 신이 성격이 급하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자신이 발설해선 안 되는 내용을 발설할 뻔해서 세계가 흔들린 거라고 이실직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또 '발설해선 안 되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되기에' 세상에 뒤틀릴 것만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어, 조슈아는 얌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혼을 서두르는 건 조슈아의 현 목표이기도 했으니까.

"사실 저희도 그 외에는 짐작 가는 게 없어서요. 뭐,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빨리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하셔야만 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요?"

"황제의 서거라던가?"

"저는 그런 불경한 소리는 안 했습니다."

전원우가 엄중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윤정한이 웃음을 흘렸다.

"완전 그렇게 들렸는데, 내가 오해한 거야? 아무튼 알겠어. 오늘 반지만 맞추고 끝내선 안 되겠네~"

윤정한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슈아 점심 아직이지? 원우랑 같이 먹어도 괜찮아?"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전원우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돌아가서 먹어도 됩니다."

"왜, 여기 잘 차려주던데 같이 먹고 가지."

그리고 그 참에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조슈아의 말에 전원우가 티 나게 난감해하는 사이, 윤정한은 응접실을 나서며 말했다.

"나는 본궁 가서 정식 조사 결과 발표 하고 올 테니까, 그 사이에 먹고 갈지 그냥 갈지 정해 놔 그럼."

"어 다녀와~"

조슈아는 대강 손을 휘휘 흔들어주고는 슬쩍 전원우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마주 보고 하는 진지한 대담보다는, 사소하고 친근한 잡담의 분위기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원우야, 세상이 불안정해지는 현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설명한다 생각하고."

조슈아가 경솔한 언행을 취했을 때 정확히 어떤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지, 최대한 상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물론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현상이라면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아도 대략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겠으나, 이런 당연하고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것 자체를 의아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전원우라면 아무리 상식적이고 당연한 소리를 맥락 없이 물어본다 해도, 의아하게 여기기야 하겠다만 그걸 수상쩍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나.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으나, 딱히 추궁하지는 않고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음... 세상의 섭리가 뒤틀리면, 그러니까 무언가 신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으면 이를 바로잡기 위해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역사의 흐름을 억지로 신의 뜻에 맞추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속한 저희들은 이변을 느끼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해를 보기도 하죠. 물론 흔한 현상은 아니며, 신이 실존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꼽히기도 합니다."

"피해라면, 어떤 종류의?"

"예상치 못한 재해의 형태가 대부분이죠. 갑작스러운 지진이나 낙뢰, 화산 폭발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진작 명을 다했어야 하는 사람이 무언가 잘못되어 멀쩡히 살아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내리는 죽음이라는 게 유력한 가설입니다."

"그냥 평범한 지진이라 볼 수는 없는 거야?"

"다릅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신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재해의 경우, 어제 느끼신 것과 같은 불안정함을 함께 느낄 수 있으니까요."

"아, 이해 했어."

"마지막으로 기록된 케이스의 경우, 247년 전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쓰나미가 한 마을을 덮쳐 주민 전원이 익사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는 인접국의 침략으로 격렬한 해전이 자주 발생하던 시기였는데, 그 마을 출신의 한 관리가 친지와 이웃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몰래 해병 차출 대상지에서 자신의 고향을 제하고 대신 다른 마을을 기재해 넣었다는 사안이 뒤늦게 발각되었죠."

"그럼 원래 그 마을에 전쟁에 나갔다가 죽는 운명의 사람이 있었다는 거야? 근데 그게 꼬여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쓰나미를 보냈다고?"

뭐 그딴 신이 다 있어. 대신관을 상대로 상당히 불경하게 들렸을 말이지만, 황당하다는 어조를 감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전원우는 쓰게 웃기만 했다.

"저도 한 개인으로서는 대단히 억울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인류의 역사 전체로 보면 장기적으로 필요한 일이었기에 그리 행사하셨으리라 믿는 거죠."

전원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그 정도로 대형 참사는 정말 드문 일이라서요. 불행 중 다행입니다."

문득 서명호가 했던 설명 중 일부가 떠올랐다.

"재해 말고도, 시간선이 꼬인다던가, 그런 일도 있다던데."

"맞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시간이 되돌아가는 거죠. 무언가 꼬여버리기 전으로. 그렇지만 그 경우, 일반 사람들은 시간이 되돌아간 줄도 모르니까, 물증은 없고, 개인의 주장만이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신기하네....... 원우 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뭘 할 거야?"

문득 궁금해져 조슈아가 물었다. 전원우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더니 말했다.

"음...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요. 그냥 그대로 살지 않을까요? 조슈아 님은요?"

시간을 되돌린다 해 봤자, 어차피 이 세상에서만 적용되는 현상일 터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조슈아가 알고 경험한 시간은 며칠 되지도 않는데 큰 의미가 있을까. 조슈아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변을 내뱉었다.

"황실 무도회에 가지 않았을 거야."

전원우가 난감한 화제에 봉착했다는 양 어색한 미소를 애써 지으며 물었다,

"황태자 전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 것보다는... 그 자리가 내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

오히려 윤정한 자체는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문제지. 조슈아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자조했다. 전원우가 또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신탁이 있었는데요. 신의 뜻대로 조슈아 님에게 안배된 자리인데, 불안해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실까요?"

그러니까 그 '신의 뜻대로 안배' 부분이 문제인 건데. 세계 밖에서 온 조슈아의 은밀한 소원에 맞추어 제 편의대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소리를 어떻게 할까. 조슈아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럴듯한 핑계로 둘러대는 쪽을 택했다.

"너도 대충은 알잖아. 정한이랑 내가 원래 그럴만한 사이는 아니었던 거."

"음,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결정은 내렸어, 원우야?"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조슈아와 전원우 둘 다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윤정한이 열린 문에 기대어 선 채 방긋 웃고 있었다.

"점심, 먹고 갈 거냐고."

언제 왔지? 이렇게 소리도 없이. 생각해 보니 애초에 문이 닫히는 소리 자체를 못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 들었나? 딱히 들으면 곤란한 소리를 한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아, 아뇨. 역시 돌아가서 따로 먹겠습니다. 다음에 또 권유해 주세요."

"알겠어. 혹시 뭐 또 알게 되는 거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아, 나가는 길에 식사 2인분 차려달라고 대신 말 좀 해줄래?"

"알겠습니다. 조슈아 님도, 다음에 뵙겠습니다."

전원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조슈아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윤정한과 전원우 사이에 오간 대화에는 아무런 어색함도 없었다. 역시 방금 온 거라,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못 들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전원우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윤정한이 잽싸게 조슈아의 옆자리를 차지하고는 물었다.

"'그럴만한 사이'가 뭔데?"

...역시 들었잖아. 어쩐지 두통이 밀려오는 느낌에 조슈아는 가볍게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모르는 거 아니잖아."

"그럼 다시 물어볼게. '그럴만한 사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왜 그런 걸 물어?"

윤정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네가 좀 더 나를 내켜 할까 싶어서."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조슈아는 그 질문에 답을 낼 수 없었으니까.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가 되지 못한 이유는, 네가 나를 '그런 식'으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그러니까 해답은 너만이 낼 수 있을 텐데 왜 나한테 물어? 나는 그냥, 언젠가부터, 네가 좋았어. 원래부터 좋아했던 부분도, 종종 나를 짜증 나게 했던 부분도, 그걸 전부 합한 너라는 사람을, 그냥 좋아하게 되었어.

"정한아, 뭔가 잘못 생각하는 거 같은데. 나 마음 바꿨어. 결혼하기 싫다고 도망칠 생각 전혀 없고, 오히려 얼른 했으면 좋겠다니까?"

"근데 기왕 하는 결혼, 금슬도 좋으면 얼마나 좋아."

"일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 결혼과 동시에 별거야."

"와, 미래의 황후께선 협상의 달인이셨네."

윤정한이 소리 내 웃는다.

"알면 잘해."

"능력 있는 예비 황후라 승관이가 좋아하겠다. 약혼까지 했으면 공식적으로 황태자비라 해도 되지 않냐고, 벌써부터 일 시켜 먹으려고 안달이던데."

"그래?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가능한 건 도와준다고 전해줘."

"안 돼. 결혼 전부터 별거를 입에 올리는 사람을 뭘 믿고 벌써부터 황실 일에 손을 대게 해?"

그렇게 말하며 윤정한이 조슈아의 어깨 위로 툭 고개를 떨구었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무게감에 저절로 손길이 그의 머리로 향했다. 잠시 망설이다 가볍게 쓰다듬자, 윤정한이 살며시 눈을 감으며 투정 부리듯 속삭였다.

"어차피 이런 건 지금 뿐인데, 결혼 전에 나랑 많이 놀아줘야지."

노린듯한 애교처럼 달콤한 소리였지만, 찔리는 구석이 있는 조슈아로서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언뜻 결혼이 성사된 후 조슈아는 이 세상에서 깨끗이 사라지고 만다는 걸 다 알고 하는 말처럼 들려서.

"...왜 지금 뿐인데?"

윤정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슈아를 올려다봤다.

"너라도 한가하니까 이렇게 시간 맞출 수 있는 거잖아. 공식적으로 황실 들어온 후에는 너 진짜 승관이 못지않게 일해야 할 걸? 황실에 안주인 있었던 게 벌써 몇십 년 전이라 인수인계 해 줄 사람도 없어. 우리 향후 최소 1년 동안은 신혼여행 갈 시간도 안 나는 거 알아?"

그런 소리였구나. 난 또. 어차피 결혼 이후 벌어질 일과는 하등 상관 없는 처지의 조슈아에게는 별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괜히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농담삼아 말했다.

"그 정도야? 이거 사기 결혼 수준인데? 지금이라도 약혼 파기 돼?"

"슈아야, 어차피 네 운명은 황후라며. 나랑 파기해도 네 미래는 똑같아."

"진짜 싫다 그거."

도란도란하지만은 않은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니 시종들이 들어와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식사보다는 만찬이라는 단어와 어울렸던 지난 저녁과는 다르게, 토스트와 샐러드, 스프로 이루어진 비교적 가벼운 차림이었다. 물론 맛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스프를 떠먹던 와중 갑자기 떠오른 궁금증에 조슈아가 물었다.

"근데 너 어제 일 진짜 다 끝내서 부른 거야?"

"당연하지."

그래도 영 미심쩍다는 눈빛을 미처 숨기지 못했는지, 윤정한이 억울하다는 말투로 투정을 부렸다.

"와, 조슈지 실망할까 봐 기껏 늦게까지 붙들고 있었건만. 승관이한테 물어보든가!"

"정한아, 내가 왜 실망을 해. 굳이 오늘 반지 맞추자고 한 건 내가 아니라 넌데."

"넌 진짜 어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모르고."

"그래봤자 대충 도장만 찍던 거 내가 다 봤는데."

"너 지금 되게 승관이 같아."

조슈아는 샐러드를 아삭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렇게 바쁘면 역시 내가 도와주는 게 낫지 않아?"

윤정한이 영 내키지 않는 듯 딴청을 부리다 대답했다.

"...황실 내사는 무리여도, 결혼식 관련은 해주면 좋지. 지금은 승관이가 거의 다 하고 있는 상황이라."

"나빴네. 네 결혼식이면서."

"이건 진짜 고의가 아니라, 나도 즉위식 준비 때문에 틈이 안 나서 그렇다니까?"

즉위식? 뜬금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를 뻔했다. 아직 황제는 살아있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은근한 고백이야? 조슈아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이걸 물어봐야 하나 모르는 척 해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 윤정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먹고 있어. 슬슬 세공사 도착할 시간이라, 확인만 하고 올게."

"어, 알겠어."

조슈아는 느릿하게 토스트 조각을 오물거리며, 머릿속으로는 누구에게 물어봐야 안전하게 즉위식 화제를 캐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김민규가 등장하기 전까지.

"어? 전하는? 응접실에 있댔는데?"

"방금 나갔어. 엇갈렸나보다. 다시 이리로 온댔는데, 여기서 기다릴래?"

"그래야겠다."

김민규가 성큼성큼 걸어와 조슈아의 맞은편에 풀썩 앉았다.

"형 점심 먹고 있었구나."

며칠 만에 처음으로 들어보는 호칭이 반갑다 못해 감동적이었다. 소설 속 민규도 귀족가의 자제였으니, 형 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던 모양이다. 조슈아는 반가움에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응, 너도 좀 먹어."

그러면서 생각했다. 귀족이니까, 즉위식 관련해서 아는 게 조금이라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민규라면, 아마도 그게 정말 반역처럼 흉흉한 사안 관련이라 해도, 그 일을 알고 있다니 입막음을 해야겠군, 하며 다짜고짜 달려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민규야, 정한이가 즉위식 얘기를 했는데, 혹시 아는 거 있어?"

김민규가 토스트를 크게 베어 물다 말고 놀라 웅얼거렸다.

"진짜? 이제 한대? 대박이다."

"뭘 이제 한다는 거야? 너 뭐 알아?"

"황태자 즉위식 말하는 거 아냐? 형이야말로 무슨 소리야?"

조슈아는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차분하고 믿음직스러운 발성으로 말했다.

"민규야, 내가 외국에서 온 손님이라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그런 사람이 만약 왜 결혼식을 한다면서 즉위식을 같이 하나요, 라고 물어보면 어떻게 설명할 거 같아?"

김민규가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조슈아를 한참 바라보다가, 불현듯 감탄사와 함께 외쳤다.

"아, 형 설마 사절단 접대 맡은 거야? 외국인들 안내해야 해?"

조슈아가 미소를 유지하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응, 그럴지도 몰라."

"잘 어울린다. 형 외국 오래 살았잖아."

"음, 그래도 설명은 민규가 잘 하잖아. 너라면 어떻게 말할래?"

치켜올려주는 말을 하니 김민규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이 좀 복잡하니까, 아예 처음부터 설명해줘야지. 윤정한 전하가 태어나던 날, 당시 대신관이 황태자는 황제가 되지 못하리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을 했는데요. 그 대신관이 황비의 사촌이었고, 신탁이 내려오는 순간을 목격한 다른 신관이 하나도 없어서 황비가 황후를 음해하려고 신탁을 날조한 거라는 얘기가 돌았죠. 근데 검증할 방법이 없으니까, 반대로 신탁은 진짜고 윤정한 전하가 황제 자격이 없는 거라는 말도 나오고. 하여간 이래저래 시끄러우니까, 아예 제대로 된 후계 임명 자체를 안 한 겁니다."

아무리 팬픽이라지만, 이런 콩가루 설정이 있었다니. 조슈아는 경악을 삼키며 물었다.

"아직까지도?"

"네,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그냥 황자시죠. 근데 그 뒤로 황비도 황후도 일찍 죽고, 다른 후사가 없으니까 다들 식만 안 올렸다 뿐이지 암묵적으로 다 황태자 대접 하고 있긴 한데요. 아직도 전하를 맘에 안 들어 하는 사람은 그 옛날 사기 신탁 들먹이면서 방계에서 새 후계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죠. 몰래 제왕학 가르쳤다는 소문도 있고.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시고 난 뒤에는 더 심해서, 그냥 황태자 즉위식 해서 자리를 굳건히 하자는 주장도 많은데, 그거는 또 신전 측에서 영 찜찜해 해서 아직도 못했답니다. 신탁이 사기라는 증거가 명확하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이번에 즉위식을 한다고?"

"왜냐하면 이번엔 제대로 된! 의심의 여지 없는 신탁이 내려왔거든요. 조슈아 님이 황후가 되신다는. 고로 그 반려인 윤정한 전하께서는 황제가 된다는 뜻이니 이제 안심하고 공식적으로도 황태자 해도 되는 거죠."

드디어 이해가 갔다. 윤정한이 왜 그렇게 결혼에 적극적으로 굴었는지. 어차피 유일무이한 후사인데다가 황제도 앓아누운 채라니 불안해할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왜 그리 신탁에 반응하나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던 줄은 몰랐다. 그 정도면 빨리 정통성을 확보하고 싶을 만도 하지. 조슈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계적으로 김민규를 치하했다.

"민규 너 진짜 설명 잘한다."

김민규가 밝게 웃으며 무어라 더 말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되었다. 머릿속은 이미 복잡했으므로. 윤정한도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결혼으로 득 될 게 있다는 생각에 맘에 얹힌 죄책감은 크게 덜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에서조차 순수하게 연심으로 맺어질 수는 없다는 게 허탈했다. 하기야, 자신조차 순수하게 윤정한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바라는 게 아니니 퍽 이기적인 바람이다 싶긴 하지만.

때마침 윤정한이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어? 민규 와 있었네. 무슨 일이야, 우리 지금 반지 고르러 가야 하는데."

"어, 전하. 잠깐이면 됩니다. 저희 아버지가 말인데요─"

백작가의 이야기가 오가는 둘의 대화를 멍하니 지켜보며, 조슈아는 비로소 모든 상념을 털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사라진 이후의 널 생각하면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내 존재가 네 자리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미리 빚을 갚는 것이라 여겨도 되겠지. 이제 켕길 건 아무것도 없어.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어차피 허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즐길 수 있는 건 즐기다 돌아가자. 그렇게 다짐하며 조슈아는 진심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제 입꼬리에 미약한 서글픔이 어려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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