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7)

로판AU

조슈아가 식사를 마치고 김민규가 황태자를 찾아온 용건을 해결한 뒤 떠나자, 윤정한이 물었다.

"이제 세공사 불러와도 돼?"

"응, 난 좋아."

이때까지만 해도 조슈아는 고작 반지 하나 고르는 게 얼마나 큰일이 될 지 짐작도 못했었다. 그냥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다 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고, 손가락 치수만 재면 끝이라고 생각했지. 진짜 본인의 현실 속 웨딩 링을 고르는 것이라면 설레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고민하겠지만, 어차피 이 반지는 제겐 식에서 한 번 끼고 말 일회용품이나 다름없으니 고르는 데 심사숙고가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이 지긋한 세공사가 제 몸집만 한 삼 단 짜리 카트를 힘겹게 밀고 들어왔을 때 조슈아는 당황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저게 다 뭐야?"

"황실 보물고의 최상등품을 몇 개 추려온 건데, 일단 보고 맘에 안 들면 더 가져오라 할게."

"저게 몇 개 추려온 정도라고?"

세공사가 신중하게 보석함을 하나하나 열며 테이블에 펼쳐 둘 때마다, 그 광채에 시시각각 시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한 열 개까지는 찬란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만, 그것도 정도가 지나치자 슬슬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예쁘고 신기하다!'에서 '예쁘긴 한데 아까 본 거랑 비슷하지 않나?'로, 거기서 또다시 '이렇게까지 많이 있을 필요가 있나?'를 지나쳐 '역시 보석은 예쁜 것 외에는 큰 쓸모도 없는데...'라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을 즈음에서야 보석의 릴레이가 끝이 났다. 세공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보석이 있으셨을까요?"

조슈아는 윤정한을 흘깃 바라보았으나, 그는 팔짱을 낀 채 별 생각 없다는 눈길로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원래도 둘 중 악세서리에 보다 일가견이 있는 쪽을 굳이 꼽자면 조슈아일 테지만, 방대하다 못해 현실성이 없는 보석의 산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조슈아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웨딩 링이면... 역시 다이아몬드지?"

"역시 탁월한 안목이시군요!"

세공사가 재빠른 손길로 다이아몬드를 제외한 보석들을 척척 정리했다. 이만하면 정말 많이 추려낸 것이었으나, 여전히 스무 개 가량이나 남아있었다. 조슈아는 윤정한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정한아, 넌 어떤 게 좋아?"

윤정한은 저녁 메뉴를 고를 때보다도 감흥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음, 역시 클수록 좋은 거 아냐?"

세공사가 눈을 빛내며 외쳤다.

"그렇다면 이 207캐럿의 다이아가 제격이실 듯합니다! 24대 황제 폐하의 즉위를 기념하여 진상된 것으로, 본래 왕관에 장식되어 있었으나 반지로 세공하여도─"

"그랬다간 손목 나갈 거 같아."

조슈아는 큼지막한 보석 덩어리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며 세공사를 만류했다. 국보급 보석들의 휘황찬란함에 압도되어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애초에 반지용 보석이라면 최소한 손가락에 달고 다닐 수 있을 크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슈아는 엄중한 표정으로 다이아몬드 열다섯 개를 크기 순으로 나열한 뒤 한 쪽에다 밀어 두었다.

"이것들은 아웃. 너무 커."

세공사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번복할 수는 없었다. 업계 종사자로서 어딜 가도 보지 못할 대단한 컬렉션에 들뜬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만, 본인이 낄 거 아니라고 택도 없는 사이즈를 신나서 고르고 있으니. 조슈아는 남은 다이아몬드 다섯 개를 내려다보았다. 전부 아담하고 부담 없는 크기였다.

"이 중에서 아무거나 고르면 될 것 같은데."

"아무거나라뇨!"

세공사가 펄쩍 뛰면서 줄줄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 다이아는 컷팅이 어쩌고, 저 다이아는 색채가 어쩌고. 솔직히 반도 알아듣지 못했기에, 조슈아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참을성 있게 앉아 있다가 되는대로 두 알을 골랐다.

"그럼 이거랑 저거가 좋겠어. 원래 귀걸이 한 쌍에 붙어있던 거랬지? 덕분에 생긴 것도 똑같고. 커플링다워서 좋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전반적인 디자인을 고르셔야 하는데요."

아, 맞다. 보석을 고른다고 끝이 아니었지. 조슈아는 방긋 웃으면서 윤정한에게 고뇌를 떠넘겼다.

"정한아, 디자인은 네가 골라 봐."

"그러시겠습니까, 전하? 마침 제가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으로 견본품을 몇 개 가져왔습니다."

세공사는 반지 케이스를 우수수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정한은 그 중 단 하나도 열어보지 않고 지시했다.

"세 번째로."

"네?"

"세 번째로 꺼낸 거. 그게 좋겠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못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결혼반지가 복불복이면 재밌지 않아?"

세공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정한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나 짓고 있었지만.

"정한아."

"알겠어~ 농담이야. 견본품 디자인이야 이미 진작 보고 받아서 다 기억하고 있지~ 알고 고른 거야~"

"역시...! 현명하신 황태자 전하다우십니다."

세공사가 감격에 젖어 대답했다. 물론 공사가 다망한 황태자가 반지 디자인을 예습씩이나 했을 리 만무했고, 설사 정말로 미리 알고 있었다 한들 세공사가 어떤 반지를 몇 번째로 꺼낼지는 초능력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알 길이 없으니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어차피 반지라 해 봤자 생긴 게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으로, 고르기 귀찮아 대충 찍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세공사는 지금 이대로 황태자의 현명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편이 더 행복해 보였으니 조슈아는 아무 말 않기로 했다.

"그럼 이제 손가락 치수를 재겠습니다. 잠시, 왼손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세공사가 차례로 조슈아와 윤정한의 손가락 둘레를 측정했다. 약지 둘레만 재고 끝날 줄 알았는데, 대대로 황태자비가 물려받는 장신구들을 전부 조슈아에게 맞추어야 하니 이참에 열 손가락은 물론이고 손목이며 목 둘레까지 다 재겠다고 하길래 체념한 채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어차피 복잡한 작업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공사가 견본 반지들과 남은 보석들을 정리하기 시작하길래 조슈아는 밝게 물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세공사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네, 웨딩 링은요!"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 프러포즈 링을 고르실 차례입니다!"

"...네?"

세공사는 치워뒀던 보석들을 다 다시 꺼내와 늘어놓으며 말했다.

"자, 결혼반지는 심플함과 우아함을 추구하셨으니 프러포즈 링은 화려하게 가 보셔야죠!"

그리하여 또다시 반복이었다. 이미 결혼하기로 진작 확정 난 사이인데 뒤늦게 프러포즈 링을 왜 만들어야 하냐고 물었더니, 이런 건 국보로 등재되어 대대손손 기록에 남고 사람들 앞에 전시도 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며, 무조건 거창하게 과시용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세 번이나 강조를 해 댔다. 덕분에 과장 좀 보태 주먹만 한 크기의 핑크 다이아몬드를 얹고 자잘한 루비로 장식한 반지로 확정이 되었다. 이거야말로 실제 조슈아가 끼고 나다닐 일은 없을 터이며, 말마따나 황실 중대사의 기념품으로서 누가 봐도 부귀영화의 아이콘처럼 보여야 한다기에 세공사의 폭주를 만류하지 않았더니, 완성품은 값어치로 따지자면 결혼반지 둘을 합친 것보다도 비싸다고 했다. 

"만약 정말 이걸로 청혼 받았으면, 부담스러워서 거절하고 싶어졌을지도."

조슈아가 반쯤 혼잣말로 읊조렸다. 윤정한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근데 너 진짜 이걸로 청혼 받아야 하는데."

조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파혼하고 싶다는 소리를 돌려 하는 거야?"

"아니, 진짜로. 아무리 다 전시용이고 쇼라지만, 프러포즈 링만 있고 프러포즈는 안 했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잖아. 암만 보여주기식이라도 청혼은 해야 한다더라."

"와... 나 식부터 잡아 놓고 숙제처럼 해치우는 프러포즈가 세상에서 제일 unromantic 하다고 생각했는데."

윤정한이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본인도 썩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하여 조슈아가 냉큼 말했다.

"그냥 둘 뿐인 장소에서 알아서 잘 했다고 적당히 말 맞춰서 얘기할래?"

"그럼 그럴듯한 청혼 시나리오 작성해서 승관이한테 넘겨."

"오케이."

합의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프러포즈 일화를 지어낼 일도 생기다니. 너네 황실 진짜 비효율적이야."

일거수일투족이 공개되는 정도가 어찌 보면 연예인보다도 심한 것 같은데. 윤정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그걸 바라면, 보여줘야지. 이제 너도 익숙해져야 할 텐데."

조슈아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미 자신을 내보이는 일에는 제법 익숙하다는 사실도, 어차피 결혼 후엔 여기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말할 수 없었기에.

애석하게도 프러포즈 링조차 마지막은 아니었다. 세공사는 이번엔 약혼반지를 골라야 한다고 선언했다.

"저희 이미 약혼은 끝났는데요? 식도 생략한 채로."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윤정한의 업적이었지. 조슈아는 그를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겨 보이고는, 다시 세공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더욱 서두르셔야 합니다. 아직까지는 조슈아 님께서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일이 없으니 괜찮았지만, 약혼까지 했으면서 두 분 다 손이 텅 비어 있으면 금방 온갖 불화설이 떠돌고 말 것입니다."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인지라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약혼반지는 최대한 빨리 완성하여 늘상 끼고 다니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에 최대한 단순하고 무난한 디자인으로 만들 예정이라 하였다. 비교적 두꺼운 폭의 백금에 다이아 한 알이 박혀 있는 모양. 지금까지 보았던 화려한 반지들에 비하면 어딘가 투박하기까지 한 모양새가, 언제나 손에 끼고 다니던 어떤 그리운 반지가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런 아련한 심경을 알 길이 없을 눈앞의 황태자 윤정한이 말했다.

"슈아는 먼저 서재 가 있을래? 아마 승관이 와 있을 거야. 가서 같이 프러포즈 시나리오 궁리해보고, 결혼식 준비 어떤 거 도와줄 수 있을지 말해 봐. 나는 남은 일만 마무리 짓고 갈게."

"알았어."

이윽고 윤정한과 세공사는 둘이서 완성 예정일이 언제니, 황실 소유의 보석 출납 절차가 어쩌니 하면서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딱히 흥미로운 대화는 아닌지라, 조슈아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앞장서 길을 안내했지만, 이쯤 되니 혼자였더라도 충분히 찾아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만큼 며칠 사이에 줄기차게 들락날락거린 황태자궁이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다. 어쩌면 공작저보다도 더.

서재 안에는 예상한 대로 부승관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예상치 못하게 버논도 함께였다. 제 기억이 맞다면 버논은 국립 아카데미의 학장이었고, 황실의 후원을 받고는 있었으나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교류가 이루어질 만한 사건은 없었기에 이렇게 만나게 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네가 어쩐 일로 여기에 있어?"

"승관이가 도와달라길래."

부승관이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뭐래! 세미나 있는 줄 알았으면 안 불렀지."

"황궁에서 부르는 걸 우선해야 하니까."

버논은 침착하게 찻물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대충 보아하니 세미나를 빼먹기 위한 핑계 삼아 부승관을 도와주러 온 듯했다. 조슈아가 물었다.

"그래? 버논이로 충분해? 가능하면 나도 도와주려고 했는데."

부승관의 얼굴에 완연한 화색이 돌았다.

"완전 필요하죠! 제발요! 진짜, 저희 마음 헤아려주시는 건 조슈아 님 밖에 없으세요. 국민들은 정말! 복 받은 줄 알아야 해요. 사실 이미 다들 알 걸요?"

"아부는."

피식 웃자, 부승관이 정말이라는 양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근데 진짜, 진짜 누구라도 도와줘야 해요. 아니, 전하께서 의논도 없이 정확히 열흘 후에 식 올리겠다고 통보했다니까요? 국빈들 추려서 초청장 보내는 데에만 닷새는 걸릴 거라고 했더니, 꼴랑 황자 하나 결혼하는 데 국빈이 왜 필요하냬요. 아니, 말이야 맞는 말인데, 이럴 때만 황태자 아니라 그냥 황자 취급 받으려 한다니까?"

맺힌 게 많았는지 우다다 쏟아내는 말 틈에서 열흘이라는 단어가 꽂혀 들어왔다. 이 세계에 한 달 쯤은 머물다 돌아갈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도 빨랐다. 저야 흡족했지만, 부승관에게는 날벼락이 따로 없었겠지. 측은한 마음에 조슈아가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서, 남은 준비는 뭐가 있는데?"

부승관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읊었다.

"반지는 맞추고 오신 거죠? 다른 예물은, 뭐 솔직히 식부터 올리고 합의해도 되니까 나중으로 미뤄버리고. 예복이랑 부케 맞추셔야 하네요. 식장 꾸미는 거랑, 식순은 뭐 맨날 똑같긴 한데 그래도 컨펌은 하셔야 하고, 만찬은 총주방장이 알아서 잘 할 테지만 이것도 컨펌은 필요하고, 와인 고르셔야 하세요. 하객 명단만 넘겨주시면 청첩장은 제가 알아서 보낼 거고, 악단 리허설이랑, 또 뭐 있지?"

가만히 듣고 있던 버논이 툭 던졌다.

"프러포즈."

"아, 맞아!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도 정식 청혼 절차 필요하시고요, 그 장면 그대로 그림으로도 남길 예정이에요. 반지랑 같이 전시해야 해서."

정말 별걸 다 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조슈아가 대답했다.

"안 그래도 정한이가 너랑 의논해보라고 하더라고. 프러포즈 어떻게 꾸밀지."

"저랑요? 조슈아 님은요? 받고 싶던 프러포즈 없었어요? 이참에 거하게 뜯어내야죠."

"글쎄......."

그런 건 원래도 없었다. 청혼이라 함은, 사실 어떤 형태로 받느냐보다도 누구에게 받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조슈아는 대강 떠오르는 보편적인 이미지를 나열했다.

"음... 낮보다는 밤이 분위기가 좋을 거 같고, 은은한 조명에, 주변에 꽃이 있으면 좋겠고, 단 둘 뿐인 장소랑... 어, 그리고 뭔가 거창하게 준비해 둔 것보단,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그러다가, 결혼하자고 얘기해 주면 좋겠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구체적이게 되었다. 윤정한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왜일까. 상대가 윤정한이라 생각하면 호텔에서 풍선이며 선물을 그득히 쌓아놓고 결연하게 반지 상자를 열며 무릎 꿇는 장면이 썩 어울리지가 않았다. 만약 윤정한이 제게 청혼을 할 일이 생긴다면, 그냥 평소처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평생을 약조하게 되는 쪽이 훨씬 더 그들다웠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서도.

"좋네."

"어, 좋다. 딱 그림 그려지네. 밤에 후원에서 산책하다가 호수 앞에서."

버논과 부승관이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급기야 부승관은 어디선가 수첩을 꺼내 와 방금 말한 내용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음, 이러면 따로 준비할 것도 없고, 반지 나오는 대로 바로 진행하면 되겠다. 딱이네요!"

부승관으로서는 그저 거창한 준비가 필요 없다는 점에 제일 만족한 게 뻔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조슈아도 마주 웃었다.

"아, 그리고 조슈아 님은 따로 황태자비 업무 인수인계도 받으셔야 하는데요, 아직 조슈아 님 대체할 공작가 후계자 임명도 아직이라길래 일단은 전부 식 이후로 미루기로 했어요."

조슈아는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도 절차가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어차피 떠날 입장에서 인수인계를 받아 무엇하나. 저로서는 어려운 일 하나를 덜었으니 이득이었다. 부승관은 입을 삐쭉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그러게 이렇게까지 서두르진 말자니까! 하여간 말을 안 들어요. 아니면 혹시 조슈아 님이 그런 거예요? 당장 결혼 하자고? 차라리 그랬으면 그런 사람으론 안 보였는데 은근 신분 상승 욕심이 있으셨구나, 하고 이해라도 하지......."

"빨리 정식 황태자 자리를 확실히 하고 싶었나 보지."

조슈아는 김민규에게 들었던 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부승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년을 그렇게 살아 놓고선 이제 와서요? 지한테 유리할 때만 그냥 보통 황자 신분 내세우는 게 취미인 사람인데? 하다못해 딱 한 달만 더 줬어도 할 만했을 텐데!"

그런가? 조슈아야 결혼을 서두를수록 이득이었으니 큰 의문을 갖지 않았지만, 듣고 보니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부승관이 물었다.

"조슈아 님은 안 버거우세요? 싫으면 조금만 천천히 진행하자고 하세요."

아무리 보아도 본인의 희망 사항이 담뿍 담겨 있는 종용이었다. 조슈아는 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난 좋아. 빨리 정한이랑 결혼하고 싶어."

대답과 동시에 서재 문이 열리면서 윤정한이 들어왔다. 오자마자 대담한 선언을 들은 처지가 되었지만, 윤정한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연스레 한 팔로 조슈아의 허리를 감싸며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그래? 그냥 바로 내일 해 버릴까?"

"결혼식 전에 상 치르는 꼴 보고 싶으세요?"

부승관이 도끼눈을 뜨며 응수했다. 윤정한이 연극적인 어조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지금 승관이가 황족 시해 의사를 밝힌 거야? 버논아, 너도 들었지? 네가 증인 서 줘야 한다?"

"아니, 아니! 무슨 소리세요! 제가 과로사하게 생겼다고요! 그쪽 상 말고 이쪽 상!"

"이젠 전하 소리도 떼고 이쪽 그쪽 이러네....... 그냥 상이 아니라 하극상이구나."

"사죄의 의미로 모든 책임을 지고 사표 내겠습니다."

부승관이 결연하게 선언했으나 윤정한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그거 종신직이라 안 돼."

"대체 언제부터요?"

"계약서는 잘 읽어 봤어야지~"

"...진짜로요?"

허언에 불과한 소리인지, 아니면 정말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유사 노예 계약에 지장을 찍고 말았던 것인지 부승관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열심히 기억을 되짚는 동안, 윤정한은 조슈아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프러포즈 링이랑 약혼반지는 4일 안에 만들어서 들고 오겠대."

"엄청 빠르네."

"그거 완성하고는 바로 결혼반지도 만들어야 하니까."

지옥 같은 일정을 소화해야 할 세공사에게 저절로 연민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윤정한이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프러포즈 시나리오 완성됐으면, 5일 뒤에 하는 걸로 하고. 공식 발표랑, 공개 데이트 겸해서 같이 시찰 한 번 도는 건 그 이후. 옷이랑 식장 준비랑 하객 리스트 뽑는 건 반지 나오기 전에 할 수 있으니까, 일단 내일 재봉사부터 불렀어. 괜찮지?"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 없이 몰아치는 일정에 휩쓸리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달리 반기를 들고픈 마음은 없었다. 윤정한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제는... 아, 마침 조금만 있으면 공작이 찾아오기로 했는데, 너부터 잠깐 만나 뵐래? 공작가 측 하객 어떻게 부를 건지 논의 좀 하라고."

공작이라 함은, 설정 상으로는 조슈아의 아버지였으나 소설 속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었다. 아들이 하루아침에 차기 황후 신세가 되건 말건 별 말이 없는 걸 보니, 딱히 원래부터 단란한 사이도 아니었던 듯한데. 제 아들의 알맹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조슈아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필요 없을 것 같아. 하객은 그냥 아버지 하고 싶으신 대로 하면 돼."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알 리 없는 윤정한은 조슈아의 어깨를 격려하듯 토닥였다.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확실하게 합의 보고 와. 공작이 정하는 대로 한다고. 기왕이면 즉석에서 리스트 뽑아달라 해. 빠를수록 좋아."

"그걸 아시는 분이, 본인 리스트는 아직도 안 뽑으셨어요?"

승관이 부루퉁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나도 오늘 줄게. 진짜로."

"그래봤자 하도 날짜가 촉박해서, 일정 못 맞출 사람이 태반인 건 아시죠?"

"알지. 그래서 즉위식을 며칠만 미루려고. 일단 나한테 우선은 결혼식부터 올리는 거라─"

윤정한이 잠시 말문을 멈추더니 아직 곁에 있던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아, 공작은 회의실로 오기로 했어. 나가서 안내해달라고 하면 돼."

돌려서 넌지시 축객령을 내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공작을 독대하는 건 내키지 않았으나, 저렇게 대놓고 눈치를 주면 어쩔 수 없었다.

"알겠어."

윤정한이 팔을 뻗어 괜히 조슈아의 손을 한 번 꾹 쥐었다 놓으며 말했다.

"얘기 끝나면 집에 가도 돼. 내일 아침에 또 마차 보낼게."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버논과 부승관에게도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여전히 윤정한의 속내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고작 열흘. 충분히 버틸 만 한 기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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