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4)

로판AU

솔직히 말하자면, 마탑으로 향하는 길은 소설 속에 빙의된 이래로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현실로 돌아갈 방책을 구할 마지막 희망이어서이기도 했지만, 마탑이라는 존재 자체가 본질적인 영향이었다. 호그와트 같은 장엄한 성채, 혹은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묘한 분위기를 두른 드높은 벽돌 탑을 상상했다. 물론 지금까지 목격했던 공작저와 황궁도 충분히 화려하며 웅장했으나, 신기함보다는 근사하다는 감상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마법을 배우고 가르치며 탐구하는 공간이란 얼마나 신비로울까? 처음 디즈니랜드를 방문하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마차에서 내린 조슈아가 맞닥뜨린 것은, 지극히 평범한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이었다. 이것에 비하면 차라리 잠실 롯데월드타워가 한층 마탑에 어울릴 듯한 외형이었다.

그럼에도 조슈아는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을 빛내며 건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원래 호그와트로 가는 열차도 남들 눈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 속 기차역에서 탑승하지 않는가. 조슈아는 이 평범하다 못해 단조로운 외형이 마법적 위장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소한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출입구가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되어 있지는 않은 점이 다행이라고, 조슈아는 눈앞에 보이는 문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한 사람만 겨우 드나들 수 있을 폭의 높고 좁은 문은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얼굴 높이에 위치한 작은 창이 드르륵 열리더니 낯선 이의 두 눈이 드러났다. 그가 조슈아의 얼굴을 훑어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 사람도 마법사겠지? 가까스로 평온한 목소리를 가장했으나, 설렘으로 스멀스멀 치솟는 입꼬리는 영 억누르기 힘들었다.

"마탑주 님을 뵈러 왔는데요. 황태자 전하의 허가는 받았습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살짝 들어 보이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네, 불러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러고는 다시 창이 닫혔다. 내부가 원체 고요한 것인지 철문이 두꺼운 덕택인지는 몰라도, 안쪽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조슈아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혹여 정한의 허가와는 별개로, 마탑주 본인이 바쁘다든가 단순히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 따위로 만남을 거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잠시 하다가, 이곳의 마탑주는 디에잇임을 상기해냈다. 명호라면 복잡한 절차(물론 조슈아는 편법을 쓴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를 거쳐 이곳까지 찾아온 손님을 마음대로 내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암만 이곳의 조슈아와는 본래 일면식도 없던 완전한 타인의 관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해도 말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작은 창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 빼꼼 드러난 눈매는 익숙하고도 반가운 형태였다.

"호시?!"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부르자 자기가 더 화들짝 놀라 되묻는다.

"절 아세요?"

아, 초면일 텐데 너무 반갑게 불러버렸나. 조슈아는 곤란한 해프닝을 미소로 대충 뭉뚱그리며 대뜸 서류부터 내밀었다. 호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면서도 두 번 묻지 않고 주는 대로 서류를 받았고, '헉...!'하는 감탄사와 함께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마탑은 처음이시죠?"

조슈아는 기꺼이 내부로 발을 디뎠다. 문지기 역할로 짐작되는, 처음에 보았던 남자가 바로 옆에 앉아있었고, 정면에는 층계가, 양옆으로는 창문 하나 없이 어둑한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어 바깥과 마찬가지로 마법적인 요소라고는 하나 없는 공간이었다. 칙칙한 실내에서 호시의 두 눈만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조슈아 님이시면, 그 분 맞으시죠? 이번에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신...!"

어쩐지 서류를 보자마자 희한한 반응을 보이더라니, 마탑까지도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나보다. 조슈아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어쩌다 보니......."

"와, 근데 저희 스승님은 어쩐 일로, 아니, 이런 거 여쭤보면 안 되는데!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마탑주 님은 맨 위층에 계시거든요, 이쪽으로 오세요!"

조슈아는 호시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2층, 3층, 4층까지도 내부의 구조는 동일했다. 긴 복도와, 양옆으로 늘어선 철문들. 문마다 방 번호로 추정되는 숫자가 붙어있는 게 그나마 장식이라고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신비로운 생물체나 기괴한 식물, 하다못해 고서적 하나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조슈아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마법적인 것들은 다 방 안에 있는 건가요? 아니면 위장이라 제 눈엔 보이지 않는 거예요?"

"다 연구실 안에 있어요. 함부로 갖고 나왔다가 뭔 일이라도 나면 징계감이라... 근데, 위장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호시에게 조슈아가 설명했다.

"아, 혹시 외부인이 알아보지 못하게 마법으로 음, 환각? 그런 효과를 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오, 호시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멋있는데요? 와, 어떻게 그런 발상을!"

반응을 보니, 실망스럽게도 이 마탑답지 않은 구조는 위장도 뭣도 아닌, 보이는 그대로의 생김새인 게 분명했다. 조슈아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상상한 마탑과는 좀... 달랐어서."

호시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많이 오해하죠. '마법' 하면 다들 재밌고 신기한 것만 떠오르니까, 사실 저도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연구, 연구, 연구의 무한반복이라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7층까지 오르고서야 호시는 멈추어 섰다. 여기가 마탑주가 머무르는 꼭대기 층인 모양이었다. 아래층들과는 다르게, 방의 개수도 훨씬 적었다. 가장 가까운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는 호시를 뒤따라, 조슈아도 마법사의 연구실에 발을 디뎠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때까지도 조슈아는 덤블도어의 집무실 같은 풍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인 단조로운 책상들과, 그 위에 쌓인 각종 서류와 뭔지 모를 약품의 나열, 이쪽을 흘깃 바라보고는 이렇다 할 관심 한 톨 없이 다시 각자 하던 작업에나 열중하는 퀭한 얼굴의 사람들. 지금 보니 이곳은 호그와트가 아니라 대학원 랩실이었다. 실험 가운 대신 긴 로브를 걸치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오......."

연민 어린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마탑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호시는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어딘가 허망한 표정의 조슈아를 덩그러니 세워둔 채 연구실 안쪽으로 향했다. 자세히 보니 반대편 벽에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아마 저곳이 마탑주의 개인실이리라.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계면쩍어 문 앞에 그대로 어정쩡하게 서 있으려니, 난데없이 '앗!' 소리와 함께 등으로 가벼운 충격이 와닿았다.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서던 연구원 하나가 조슈아에게 부딪힌 것이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앞을 안 보고 무작정 뛰어 들어온 건 그쪽이래도, 문간을 막고 있던 건 조슈아의 불찰이었다. 넘어진 남자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을 구르는 책들을 주워 모으는 데 여념이 없기에, 조슈아도 서둘러 그를 도와 책 몇 권을 주워 넘겼다. 수습이 끝나고 나서야 남자는 고개를 들어 찌푸린 눈초리로 조슈아를 살폈다.

"근데, 외부인이시네요?"

금방이라도 축객령을 내릴 듯 짜증과 경계가 섞인 시선이었다.

"네, 마탑주 님을 뵈러 왔습니다."

"난 들은 거 없는데. 그런 일정이 잡혀있었다고?"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방 안의 연구원들은 여전한 무반응으로 일관하거나, 저도 모르는 일이라는 양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조슈아는 어떻게든 스스로의 정당성을 설득하려 애썼다.

"오늘 신청해서 허가를 받자마자 급하게 왔습니다."

"그게 될 리가. 당일 신청으로 알현이 되겠냐고요."

"황태자 님께 허가를 받았는데요......."

황태자 소리를 듣자마자 남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찬다.

"황태자? 하여간 그 양반도 은근히 자주 들락날락 한다니까. 그럼 안에 있어요?"

윤정한과 함께 왔다고 오해를 하는 게 분명하여, 조슈아는 고개를 저으며 재차 설명했다.

"아뇨, 저 혼자 왔어요. 마탑에 도착하고서는 호시가 여기까지 안내를 해 줬고요."

"호시?"

제멋대로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니라 엄연히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왔다는 어필이었는데, 남자는 여전히 찡그린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설마 호시와 모르는 사이의 사람인가 싶어 다급해졌다. 이러다 정말 수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쫓겨나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네, 호시요. 권호시. 권순영이요. 어, 저기 나왔네요!"

다행히도 마침 호시는 막 방에서 나와 조슈아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가 호시를 돌아보며 물었다.

"서류 제대로 된 거 확실해?"

"네, 스승님도 지금 바로 들어오시래요."

드디어! 조슈아는 반짝이는 눈으로 호시를 바라보았다.

"그냥 들어가면 돼?"

그런데 호시의 낯이 어딘가 찜찜했다. 정작 남자는 더는 군말 없이 책을 든 채 자리로 멀어져갔는데, 그의 의심이 호시에게 그대로 옮겨간 양 조슈아를 샅샅이 살피는 낌새가. 호시는 무언가 묻고 싶은 듯 두 어 번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더니, 제가 먼저 문고리를 비틀어 열며 대답했다.

"잠시만요."

연구실에 비하면 아늑한 크기의 방은, 학술적이라기보단 편안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디에잇은 연구원들과 별다를 바 없는 어두운 색의 로브를 입고 있다는 것만 빼면, 바로 어제 본 것이나 다름 없는 익숙한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호시가 명호의 곁으로 다가가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연신 이쪽을 흘끔거리는 시선을 보니 조슈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분명했으나, 무슨 말을 전하는지는 짐작할 길이 없었다. 서명호는 동요 없는 평온한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몇 초 간 침묵 속에서 시선이 교차하고, 마탑주 디에잇이 말했다.

"알겠어. 일단 나가 봐."

호시가 문을 닫고 나가자, 디에잇은 자기 맞은편의 의자를 손짓하며 말했다.

"일단 앉으시죠."

조슈아는 순순히 권유에 따르며, 무엇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대놓고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말할까? 아니면 혹시 이 세계가 허구라면 어떨 것 같냐며 떠보아야 할까? 여전히 자신을 찬찬히 살피는 명호의 기색을 애써 무시하며, 조슈아는 의례적인 감사 인사부터 건넸다.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만나 주셔서 감사해요, 마탑주 님."

"아, 말 편히 하셔도 돼요."

"음... 그럴까, 명호야."

익숙해야만 하는 게 당연한데도, 어쩐지 이 장소, 이 상황에서는 친숙하기 그지없는 호칭이 이상하게 어색하고 무례하게만 느껴졌다. 순간 명호의 눈빛이 일변했다. 그가 물었다.

"...혹시, 다른 세상에서 오셨나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지 않으려 했던 질문이었다. 괜한 기대는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그 단순한 물음에 애써 눌러두었던 희망의 불씨가 화르륵 타올랐다. 조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되물었다.

"너는 알아? 날 기억해? 너도 똑같이 빙의된 거야?"

서명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이 살던 세상이 어떤 곳인지도요. 하지만, 조금은 아는 정보가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조슈아는 미약한 실망을 느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 기이한 상황에 떨어진 게 자기만은 아닐 수 있다는 반가움이 너무 앞서버렸다. 사실 제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인데. 그렇게 되뇌이며 낙담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속내가 다 보인 듯 명호는 어딘가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짧은 얘기는 아니라, 차라도 마실까요."

서명호는 언제나처럼 능숙한 손길로 다도에 착수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조슈아 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죠?"

그리하여 조슈아는 설명했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을 등장인물로 하여 쓴 소설을 우연히 접하여 읽었는데, 잠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그 소설 속이었다고.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으나 방도를 모르겠으며, 줄거리도 자신이 읽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없이 듣고 있던 명호는 우려낸 찻물 한 잔을 조슈아에게 내밀며 말했다.

"사실 마탑의 기록에는, 조슈아 님과 같은 케이스가 몇 있었어요.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데, 마탑에서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어떻게 해야 알아볼 수 있는데?"

다른 빙의자가 존재한다는 건 엄청난 위안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그런 이를 마주친다면, 조슈아는 자신 또한 그를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서명호가 답했다.

"보통 사람은 알 수 없을 사실들을 알고 있을 때요."

그러니까, 진짜 판타지 소설처럼 영혼의 색이 다르다는 둥 희한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둥의 특징이 있는 건 아니라, 그냥 단순히 행동에서 티가 난다는 거구나. 조슈아가 실소를 흘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나는 어디서 티가 났는데?"

"이름을 알고 계셔서요."

"이름?"

"순영과 명호요. 마법사들은 마탑에 들어올 때, 이름을 포함해 바깥에서 가졌던 모든 걸 버리거든요. 아무한테도 휘둘리지 못하게요. 마법으로 지워 버리는 거라, 본인과 마탑주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요. 저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멤버들의 호칭에 대해서는 전연 신경 쓰지 않았기에 다분히 허를 찌르는 대답이었다. 팬픽이니까, 일정 부분 이상 현실을 반영하기로 이미 작가와 독자 사이에 암묵적 합의가 되어 있는 장르이니까 이 세상에선 존재할 리 없는 예명을 부르건 별명을 부르건 그게 이상하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마탑에 이런 특수한 설정이 있었을 줄이야.

"몰랐어... 미안해, 명호야. 아니, 디에잇이라고 부르면 될까?"

"저희끼리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한테만 말하지 말아주세요."

서명호가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이어 말했다.

"아무튼....... 조슈아 님은 '빙의'라고 부르신 그 현상. 하룻밤 사이에 원래 살던 세상과 전혀 다른 곳에서 깨어났다는 공통의 주장을 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데?"

조슈아는 긴장감을 삼키며 물었다. 다행히도 명호는 씩 웃었다.

"살던 곳으로 돌아갔어요."

"정말?"

"아마도요. '빙의'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데, 나중에는 그런 사람을 아예 찾을 수가 없었어요. 마법으로 지워진 것처럼."

서명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어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실수인 줄 알았는데, 몇십 년 간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생각한 거죠. 어쩌면 전부 자기 세상으로 돌아가서, 이 세상에서는 자연스럽게 존재가 사라진 걸지도 모른다고요. 그때부터 마탑에선 조금 더 자세하게 '빙의'한 사람들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지요."

마음의 짐을 크게 던 기분이 들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돌아갔다면, 언제쯤일지는 몰라도 결국 조슈아 역시 돌아갈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알아?"

"기록이 많은 건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아요. 꾸준히 기록이 남아 있는 건 넷 밖에 없거든요. 그들은 전부 무언가 이루었을 때 돌아갔어요."

"이루었을 때?"

"둘은 사랑을, 둘은 꿈을 이루었을 때요. 물론, 그 후에는 존재가 지워졌으니 틀린 추측일 수도 있지만요. 그래도 저는, 소원을 이루었을 때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가 책 속이라고 하셨죠? 여기는, 주인공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있는 세상일지도요."

소원. 짐작 가는 바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 더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사라진 원작 속 여주인공의 자리를 꿰차고 일사천리로 황태자와의 결혼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게, 전부 내 소원이라는 건가? 조슈아는 줄곧 정한과의 사이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해왔었다. 그 이상을 욕심내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소원에서 비롯된 세계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결국 나는 나 자신마저 속이고 있었던 걸까.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최소한, 혼자 이러쿵저러쿵 애쓸 필요 없이 가만있기만 해도 윤정한이 알아서 결혼까지 성사시킬 테니 큰 품 들이지 않고도 돌아갈 수 있으리란 점이 퍽 희망차기는 했다만.

궁금했던 점은 모두 해결되었다. 기대 이상의 수확이었다. 조슈아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의 명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그런데, 너는 아무렇지 않아? 내가 이 세상을 소설일 뿐이라고 말했는데도."

서명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저한테는 현실이니까 상관 없어요. 반대로, 조슈아 님이 원래 살던 세상이 실은 어딘가의 소설이 아니라고도 확신할 수 없잖아요?"

"그건 그렇네."

서명호다운 명쾌한 대답이었다. 비로소 미소 짓는 조슈아에게 명호가 말했다.

"한 가지 주의하실 점은 있어요. '빙의'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건 '빙의'한 사람들이 적어서만은 아니에요.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나, 자기가 아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면 이 세상이 불안정해졌다고 해요. 재해가 일어나거나, 시간선이 망가지기도 하고."

조슈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물론, 본능적인 경각심으로 동네방네 이곳이 소설이라 떠들고 다닌 건 아니었지만, 그러한 제약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럼 우리 방금 얘기한 건 어떡해? 나 때문에 어딘가 잘못 되는 거야?"

서명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반쯤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그게 좀 신기해요. 기록대로라면 바로 무슨 느낌이 왔어야 할 텐데, 아무 일도 없네요. 조슈아 님이 특별히 강하고 안정적인 사람일지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른 사람에게 더 말하지는 마세요."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무한테도 안 말해."

서명호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더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나중 사람들을 위해, 저도 조슈아 님의 사정을 기록해두어야 하니까요."

"응, 그럴게."

사실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조슈아는 여전히 무거운 마음과, 어딘가 가벼워진 발걸음을 동시에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하나만 물어볼게. 지금 나 말고도 또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은 없어? ...황태자라던가."

"네, 없어요."

"정말로? 그냥 티가 안 나서 확인을 못 한 걸 수도 있잖아."

서명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해요. '빙의'한 사람이 동시에 두 명이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아... 진짜로?"

"네. 여기가 정말 책 속이라면, 주인공은 한 명 뿐이니까 그런 걸지도요."

조슈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의심할 이유가 있기에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고로 대답에 실망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안심을 했다면 했지. 황태자 윤정한이 현실의 윤정한과 결코 이어질 리 없는 별개의 존재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원체 속정이 깊은 만큼 내게도 다정할 뿐이었던 네가, 내 마음에 발목 잡혀 곤란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이 이곳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든 실제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확언이 기꺼웠다. 적어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란 명목으로 나 좋을 대로 군다는 죄책감은 덜 들 테니까.

"고마워, 명호야. 상담도, 차도."

명호는 구김 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저도 반가웠어요. 또 뵈어요."

밖으로 나오자 근방에서 맴돌던 호시가 쪼르르 다가왔다.

"얘기는 잘 나누셨어요?"

"응, 이제 돌아가려고. 고마워, 호시야."

호시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나오자, 내릴 때와 같은 자리에 그대로 기다리고 있던 황실의 마차가 보였다. 다음에 또 놀러 오시라는 호시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조슈아는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댁으로 돌아가시겠느냐 물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황궁으로 갈게."

정한이 보러.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루빨리 결혼을 성사시키는 것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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