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남빙의

서브남주에 빙의한 제가 메인남주와 약혼하고 말았습니다?! (11)

로판AU

마음이 편치 않으니 하루가 참 길었다. 차라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라도 하면 괜한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으나, 이럴 때만 꼭 희한하게 한가로이 붕 뜨는 시간이 생겼다. 산책 삼아 별궁 주변을 세 바퀴나 빙빙 돌다 결국엔 황태자궁까지 찾아가 뭐라도 일거리가 없냐는 닦달까지 하였으나, 윗선의 결정이 필요한 사안은 남아있지 않았으며 나머지 준비는 고용인들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조슈아가 지독히도 심란해 보이긴 하였는지 부승관이 "...이거라도 같이 보실래요?" 하며 적선하듯 던져준 일감은 결혼식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준 귀빈들을 위한 소소한 답례품을 고르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여전히 조슈아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윤정한의 그 복잡한 시선을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복잡하고 흥미로운 작업은 아니었다. 끝내 그날은 부승관 옆에서 정신이 반쯤은 딴 곳에 가 있는 채로 멀거니 앉아있다가, 뒤늦게 몰려온 수면 부족의 여파에 이르게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이도 저도 할 수 없이 애매하게 얼굴 보기 껄끄러운 상태일 때는, 한동안 만나지 않고 시간이 약이 되도록 방치하는 게 최선은 아닐지라도 당장 가장 마음이 편한 방안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하늘은 조슈아의 편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다음날 상쾌하게 눈을 뜨자마자 오늘의 일정은 황태자 전하와 함께하는 도심 데이트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맞닥뜨렸다. 정식 발표 이후에 백성들에게 직접 얼굴을 내비치는 일정이 있을 거라고 얼핏 들었던 기억은 나는데, 하필 그 스케줄이 이런 날 이런 상황에 잡혀야만 했는지. 자신조차 이렇게 떨떠름한 기분인데 윤정한은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을 터, 여차하면 정한이가 먼저 적당한 핑계를 대어 일정을 취소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고 최대한 늑장을 부려보긴 하였다. 어림도 없었지만. 괜히 이 옷은 맘에 안 든다, 저 옷은 날씨에 걸맞지가 않다, 하면서 고집을 부리고 있으려니, 전하께서 복도에 당도하여 기다리고 계시니 서두르시라는 시종의 간언이 칼같이 날아왔다.

정한이가 여전히 서운한 기색이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걱정한 게 무색하게도, 방을 나오자마자 맞닥뜨린 윤정한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굴이 조금 해쓱해 보이긴 했지만, 부러 어제 일을 언급하고 의식하지는 않으려 애쓰는 듯했다. 조슈아는 그런 식의 회피를 썩 바람직하게 여기는 성정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동조하여 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세계의 안위를 위해 진실을 감추어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렇기에 윤정한에게 어떠한 해명도 하지 못하기에. 은근히 서로의 눈치를 살피어가며 아무렇지 않은 척 이어가는 대화에 드문드문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도 했으나, 그럭저럭 평범하게 굴 수 있었다.

"점심은 여기서 먹고 나갈 건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네가 먹고 싶은 거로 고르자. 근데 점심도 나가서 먹을 줄 알았는데."

"웬만하면 밖에서는 뭐 못 먹게 해. 독살 위험 때문에."

"독살? ...그런 시도가 흔해?"

오가는 복도마다 빠짐없이 경비병이 지키고 있고, 외출을 할 때마다 호위가 따르는 것은 아이돌로 살다 온 조슈아에겐 크게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살까지 일상적으로 경계해야 할 줄은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그러고 보니 윤정한과 식사를 할 때마다 곁에서 시종들이 한 입씩 음식을 먼저 맛보는 걸 목격하기야 했는데, 으레 따르는 절차에 불과하려니 했을 뿐 정말로 매번 의식하고 조심해야 할 정도로 독살의 위협이 피부에 와닿는 환경이었을 줄 몰랐다. 정작 윤정한은 남 일처럼 태연한 태도로 대꾸했다.

"어릴 때만 조금 그랬을걸? 요즘엔 그런 일 없지. 그냥 낯선 곳에서는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 지 누구도 모르니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몸 사리게 하는 편이라 그래."

그 덤덤한 태도가 오히려 더 걱정을 끼치는 걸 알긴 하는지. 자신을 향한 독살의 위협을 별일 아닌 것 취급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곤경을 헤쳐 왔을지. 자세히 털어놓지를 않으니 도리어 온갖 나쁜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소설을 읽을 때에는 윤정한이 황태자라니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완전히 틀려먹은 생각이었다.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황태자 따위 때려치우고 어떻게든 데뷔해서 하던 대로 아이돌이나 하라고 호통을 치고 싶었다. 윤정한은 저가 먼저 정적을 만들고 다닐 사람은 결코 아니며, 그가 황가의 유일한 적자가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황태자 자리를 크게 욕심내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니 그가 딱히 미움을 사거나 처신을 잘못 한 게 아닌데도 그저 그가 놓인 이 상황이 부당하게 그를 괴롭히는 듯 보였다.

"너랑 쿱스, 사이 좋잖아."

얼핏 맥락 따위 없는 것처럼 뜬금없게 느껴지는 말이었으나 윤정한은 조슈아가 뜻하는 바를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쿱스는 나한테서 황위 뺏을 생각 없어. 반대로 나는, 쿱스가 진심으로 황위를 원했으면 진작에 넘겨줬을 테지만."

"...왜? 역시 많이 힘들어? 너무 바빠서?"

"아니, 그것보단, 한 나라를 통으로 책임지고 굴려야 하는 건 뭔가 쿱스가 더 잘 어울리지 않아?"

"누가 황태자를 잘 어울리고 말고로 골라. 선출직도 아닌데."

그렇게 대꾸하자, 윤정한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직계는 나뿐이라고 해도, 어쨌든 같은 항렬에선 쿱스가 나보다 먼저 태어났잖아. 나보다 더 맏형 같은 이미지라고 해야 하나. 네가 보기엔 안 그래?"

시도 때도 없이 암살을 경계해야 하는 황태자라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게 불과 몇 분 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면전에다 대고 곧이곧대로 안 어울린다고 쏘아붙이면 자칫하단 반란 혐의나 쓸 것 같은 데다가, '황태자'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온갖 반짝거리고 화려한 이미지만 놓고 보자면 그 이상 윤정한에게 어울리는 감투가 또 없어서, 조슈아는 괜스레 초점을 약간 빗나간 대답을 돌려주었다. 

"정한이 너한테는 좀 더 한가한 게 어울리긴 해. 애들 일하는데 괜히 와서 장난 걸다가, 내키면 족구도 하고, 그러다 다시 또 누워있고 그런 거."

"역시 계승 순위가 한참 밑인 방계 황족으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윤정한이 웃음기 어린 말투로 동의했다. 

둘은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이런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다가, 함께 마차를 타고 황궁 밖으로 나왔다. 오늘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소탈하고 정다운 면모를 각인시키는 동시에, 대다수가 이 결혼이 열렬한 연애를 거쳐 성사되었다고 믿고 있는 만큼 그 믿음에 부응하는 알콩달콩한 행보를 전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신탁 때문에 권력에 눈이 멀어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한다'가 아닌, '둘의 사랑이 지극하여 신조차도 신탁으로 이들을 응원했다'라는 여론 조작이 먹히도록 눈을 흐리는 작업이었다. 어딜 가나 정치인들의 이미지 메이킹 수법은 비슷하구나 싶었다. 필요 이상으로 거창하게 눈에 띄었다가는 대놓고 언플 하러 나왔다고 반감만 더 살 테니, 호위로는 도겸과 디노만이 따라붙었다. 물론 일반인처럼 위장하여 섞여 있는 근위대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겠지만, 가까이에서 수행하는 인원은 둘 뿐이니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당부가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까지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이어졌다.

소박한 규모의 행차였고 현대처럼 아침저녁으로 뉴스만 틀면 쉽사리 국가 원수의 생김새를 익힐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보니, 한눈에 황태자를 알아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안일한 마음가짐이었다. 장이 열린 거리에 멈추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대번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온 사방에서 들려왔다. "헉, 황태자 전하시다." "어머, 그럼 옆에 계신 분이 그 분이신가 봐." "그러네, 데이트 중이신 건가? 귀여워라." 게다가 실시간으로 말이 퍼져나가고 있는지, 그들을 구경하러 달려오는 사람들이 시시각각 늘어났다. 예상을 빗나간 상황에 조슈아가 윤정한에게 속닥거렸다.

"어떻게 다들 널 이렇게 쉽게 알아보는 거야? 너 혹시 크리스탈 방송 그거, 매일 해?"

윤정한이 픽 웃으며 반문했다.

"슈아야, 일 년에 딱 한 번만 본대도 설마 내 얼굴을 못 알아볼까?"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발언인데도 하필 발화자가 윤정한이라 무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 어쩐지 몰려든 사람들 시선이 정치인을 구경하는 눈빛이 아니라 연예인 바라보는 눈빛이더라. 순식간에 불어난 인파에 도겸과 디노는 살짝 신경을 곤두세운 기색이었지만, 직접 말을 붙이거나 적정선 이상으로 가까이 접근하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게 몹시 저어되기라도 하는 양, 윤정한과 조슈아가 나아가는 방향대로 슬금슬금 빈 공간이 생겨났다. 

"그래도 황족이라 어렵게 느껴지나 봐. 다들 막 물러나시는데?"

"그런가. 악수 하자는 사람 한 명쯤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러자 윤정한의 옆에서 도겸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건 아닐걸요. 제가 보기엔, 저건 괜히 커플 사이에 끼기 싫어서 자리를 피하는 겁니다."

디노도 잽싸게 덧붙였다.

"제가 보기에도 그럽니다. 누가 감히 이런 커플을 방해하겠어요."

조금은 어안이 벙벙했다. 애초 이 외출의 목적이 다정한 데이트 연출이긴 하나, 아직 이렇다 할 애정 행각을 연출하기도 전이었다. 속닥거리며 주고받은 얘기라고는 별 영양가도 없는 단순 잡담이었는데, 남들 눈엔 그마저도 다정해 보였던 걸까. 다시 보니 다들 이웃집 신혼부부를 구경하는 듯 퍽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윤정한이 자연스레 조슈아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한층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래? 그럼 더 못 끼어들게 이렇게 하자."

어디선가 '꺄아악!' 하는 열띤 반응이 들려온 것도 같았다. 계면쩍은 기분에 순간 표정이 굳을 뻔하였지만, 익숙한 일이라는 양 침착하게 환한 미소를 자아낼 수 있었던 건 탁월한 직업 정신의 산물이었다. 

"슈아야, 뭐부터 할까?"

윤정한은 그리 묻더니 조슈아의 귓가로 고개를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너무 의식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 널 구경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봐."

윤정한은 모르겠지만, 이 역시 조슈아에겐 하등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그럼, 소소한 선물을 고르고 싶은데. 요즘 여기저기 신세를 많이 져서. 승관이랑, 별궁의 사용인들도 그렇고, 급하게 이사 하느라 공작가의 사용인들한테도 제대로 인사를 못한 것 같고."

"뭘 줘도 다들 감동받겠다. 그런 거 하나하나 다 챙겨주는 상전은 많이 없잖아. 좋아, 이쪽으로 가면 뭔가 있을 거 같은데?"

바쁘고 귀한 몸이신 황태자가 공개 시찰을 오래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둘이 한가로이 장 구경을 한 건 고작 두 시간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조슈아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하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자잘한 잡동사니를 선물 명목으로 잔뜩 구입하고, 길가의 주전부리를 사 먹을 수 없는 처지를 애통해하다가, 포장해가서 황실 주방장에게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하면 되지 않겠냐는 말에 반색하고, 도겸과 디노가 간간이 끼어들기도 하는 시답잖은 수다를 소리 내 웃어가며 주고받다가,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엔 진심으로 아쉬웠다. 생경한 거리의 풍경 때문인지, 해외 스케줄 사이 받은 짧은 자유시간이 끝나고 복귀해야만 할 때와 흡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차 싶었다.

"나 너무 의식을 안 해 버린 거 같은데, 괜찮을까?"

갑작스런 질문에 윤정한은 물론이고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도겸 역시 고개를 돌렸다.

"뭐가?"

"연인 같은 면모를 보이는 게 목적이었는데, 중간부턴 아예 까먹고 그냥 놀러 나온 사람처럼 행동했던 거 같아. 실수했다."

설핏 얼굴을 찡그리며 하는 자책에, 도겸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슨 소리세요. 두 분 완전 데이트 같으셨는데요."

"그렇다는데?"

윤정한도 하등 걱정 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 빈말하지 말고, 나는 완전 평소 태도랑 똑같이 굴어 버렸는데."

"어... 제 눈에는 안 그래 보이셨어요. 밖이라서 그러셨는지 몰라도, 평소보단 훨씬 편해 보이셨는데요. 전하 대하실 때는 물론이고, 다른 부분도 여러모로."

도겸이 그렇게 대꾸하고서야 그는 조슈아가 뜻하는 '평소'가 무엇인지 모르리라는 자각이 뒤늦게 들었다. 조슈아가 말한 '평소'란, 원래의 세계에서 원래의 윤정한과 어울릴 때의 태도.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내심 좋아하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의 모습. 이곳에서는 빙의자인 처지인지라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경계심과 거리감이 늘 기저에 깔려있었는데, 외출에 들뜬 나머지 마음의 벽이 순간 허물어졌던 모양이다. 근데 그게 데이트처럼 보였다고?

"도겸아, 너 너무 사람을 보고 싶은 대로만 바라보는 거 같아."

진지하게 한 조언이었는데, 도겸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요? 아니, 훌륭하게 목적 달성 하신 건데 그냥 그렇구나, 하고 기쁘게 믿으실 수는 없으세요? 남들한테 물어봐도 백이면 백 다 연인 같았다고 할 텐데!"

여전히 의구심이 가시지 않은 시선을 이번엔 윤정한에게 돌렸지만, 그는 건성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만큼 가까워 보였나 보지. 다들 커플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게 커플 같은 모습으로 보인 거고. 그래서 내가 그냥 의식하지 말라고 했잖아. 잘 먹혔네."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었으나, 둘 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 걸 수도 있으리라. 어쨌거나 사람들에게 괜한 의심이나 반감을 사지 않았다면 족하였다. 이 세계에 머무르는 게 단 며칠 뿐일지언정, 나중에 윤정한에게 나쁜 결과로 돌아올 영향은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남은 시간은, 아마도 나흘. 조슈아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렇게 또 놀러 나올 수 없는 건 아쉽네." 

혼잣말에 불과했지만 그래봤자 좁은 마차 안, 새어 나온 속마음을 들은 도겸은 "어우, 황태자 전하께선 맨날 월담해서 놀러 나오셨어요. 못 할 게 뭐가 있어요!"라고 외쳤고, 윤정한은 아무 말 없이 뜻 모를 미소만 지었다. 그 또한 이 시간이 즐거웠는지, 미묘하게 아쉬움을 띈 시선으로.

어쩐지 그게 마음에 걸려 황궁으로 돌아간 후에도 조슈아는 황태자궁에 눌러앉아 노닥거렸다. 어김없이 윤정한은 할 일이 많았지만, 그래서 곁에 앉아 한가로이 책장 구경이나 하는 조슈아를 보며 무척 억울해했지만, 황태자궁의 주방장이 바깥 간식을 흉내 내 만들어 온 닭꼬치를 오물거리며 "그래도 이런 건 밖에서 돌아다니며 먹어야 제맛인데."라는 소리를 하자, 주저 없이 일어나서 그럼 함께 산책이라도 가자고 손을 내밀어 주었다. "너도 먹어볼래?" 하며 꼬치를 내밀었을 때엔, 자연스럽게 목을 쭉 빼어 입으로 받아먹었다. 원래의 윤정한과도 심심치 않게 하는 행동들이었다. 하도 익숙해진 지 오래라, 낯선 이들의 눈에는 이것이 애정 표현으로 비춰질 수도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정한아, 너는 내 뭘 보고 결혼을 결심한 거야?"

시험처럼 제기된 질문에 윤정한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슈아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기자들한테 했던 대답은 진심이 아닌 거 피차 잘 알잖아." 

"내가 말해주면, 너도 말해줄 거야?"

조슈아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해 주어야 공평했다. 승낙의 표시를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윤정한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너는 가짜 같지 않아서."

그 어떤 누구보다도 '가짜'일 수밖에 없는 빙의자로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대답이었다. 조슈아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슈아 너는, 정말 중요한 거로는 절대 나한테 거짓말 치지 않을 테니까."

이미 굉장히 중요한 사안을 숨긴 채 그를 기만하고 있다 보니, 다시 한번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서 조슈아는 또 다른 질문으로 말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너한테 거짓말을 많이 했어?"

윤정한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 대답했다.

"음, 대놓고 하는 건 아니지만... 뻔히 아닌 걸 아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부자연스럽게 날 좋아하는 행세를 한다던가."

두루뭉술한 말이었지만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혹자는 아직 완벽하게 굳건한 자리는 아니라 할지언정 어쨌거나 윤정한은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의 환심을 사려 꿀 바른 말로 접근한 사람이 넘치도록 많았으리라. 그래서 윤정한이 덧붙인 뒷말이, 의외로 섭섭하거나 허탈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너는 다짜고짜 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믿을 만하지."

오히려 안심이라면 안심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조슈아를 배우자로 받아들인 것이라면. 자신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고, 곧 떠날 사람이고, 고로 진심으로 이 윤정한에게 사랑을 고백할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이곳의 세력 다툼이나 정치적 알력에 좌지우지되지 않을 것이 가장 확실하게 보장된 사람이기도 했다. 실리를 따지지 않는, 온전하게 순수한 마음으로 윤정한의 앞날을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윤정한에게 필요한 게 그런 황태자비라면, 조슈아보다 나은 적임자는 없었다. 비록 그와 찰나만을 함께하다 사라질 사람이라 해도.

"너는? 나랑 왜 결혼하는데?"

그에 비해 제 몫의 답변은 반전 없이 싱겁기만 했다. 조슈아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알잖아. 나한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

암만 반쯤은 장난이었대도 에스쿱스를 붙들어 놓고 반역죄를 운운했으며, 저 몰래 공작을 찾아가 모종의 거래까지 했던 장본인이 천연덕스럽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어이없었다. 윤정한이 작게 웃었다.

"그렇긴 한데, 넌 진짜 싫으면 어떻게든 더 고집 부렸을 사람이잖아."

그거야 본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는 본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지만, 하기사 그걸 차치하고 생각해보더라도, 상대가 윤정한이 아니라 정말 치가 떨릴 만큼 싫은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다른 탈출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얼마간 더 뻗대기는 했을 터이다. 그래서 조슈아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싫은 결혼은 아니었던 거지."

이미 뱉은 후에야 간질거리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말을 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묘한 침묵이 흐르는 게 견디기 버거워 조슈아가 황급히 물었다.

"그... 이제 들어갈까?"

멍하니 눈만 깜박이던 윤정한이 그 말에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내일은 예복 피팅이 있어서, 일찍 쉬는 게 좋을 거야. 나도 얼른 서류 마무리 하러 가야겠다."

조슈아도 조슈아지만, 윤정한은 진짜 결혼식 당일까지 끝도 없이 할 일이 있을 예정인가 보다. 그래도 무료하게 시간만 죽이는 것보다야 낫다 싶었다.

결혼식 삼 일 전. 본식에서 입을 결혼 예복과, 피로연에서 입을 옷의 피팅이 있었다. 일전에 정확하게 치수를 재어 제작하였으니 조슈아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아 보였는데, 그럼에도 재봉사는 단 1mm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며 한동안 옷매무새를 이리저리 매만지느라 법석을 떨었다. 곧이어 그 복장 그대로 나란히 앉아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야 했다. 역대 황실 일원들의 초상화가 한 명도 빠짐 없이 걸려있는 갤러리에 정식으로 추가될 초상화이니 상당히 중요한 그림이었는데, 윤정한이 손을 가만 두지를 않아 곤란했다. 처음에는 앉아 있는 조슈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서 있는 정석적인 자세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가 아프다고 뒤에서 거의 조슈아를 껴안다시피 하며 흐느적 무너져내리더니, 급기야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조슈아의 허리를 감싸고 허벅지에 고개를 기댔다. 정면에서 시종일관 근엄한 표정으로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는 화공을 보기 머쓱해 가만히 좀 있으라고 가볍게 손등을 찰싹 쳤지만, 윤정한이 어디 거기에 굴할 사람이던가. 그런데도 완성된 스케치는 이변 없이 처음의 자세 그대로 뽑혔으니, 황실 화공의 눈썰미와 집중력에 절로 찬사가 나왔다.

결혼식 이틀 전. 식장 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승관과 함께 둘러보았다.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가뜩이나 준비할 시간도 넉넉지 않았을 텐데 다들 고생을 많이 했겠거니 싶었다. 암만 황실 결혼식 치고는 소박한 규모라지만, 일반적인 야외 웨딩의 규모는 훨씬 상회한 데다가, 귀하신 손님들 때문에 햇빛 한 점, 풀물 하나 들 일 없게 차양과 바닥 포장에도 온 정성을 다한 게 보였다. 더군다나 싱그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은 생략되어 있는 생화 장식이 당일엔 새벽같이 추가될 예정이라 하니, 이 모든 게 자신에겐 신기루나 다름없는 결혼식에 낭비된다는 게 아까워서 한숨이 다 나왔다. 하루만 쓰기엔 아까운데 혹시 넌 결혼 예정 없느냐고 농담삼아 부승관에게 물었다가,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환멸 섞인 시선을 돌려받았다. 이왕 나온 김에 오케스트라의 리허설도 구경했는데, 이 세계를 만든 작가도 완전히 새 음악을 창조할 계제는 없었는지 익숙한 결혼 행진곡이 그대로 흘러나와 조금은 반가웠다. 볼을 간지럽히는 산들바람, 상쾌한 초목의 내음, 귀에 익은 악기의 선율에 문득 윤정한도 이 자리에 함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감상이 들었다. 막바지 준비로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마침내 하루 전. 당연히 지금까지 중 가장 바쁜 하루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조슈아에게 주어진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식순이나 외우라고 주어진 종이 한 장 정도였으나, 그마저도 주례를 맡을 전원우나 달달 외워야 할 노릇이지, 손잡고 걸어가서 윤정한이 하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조슈아에겐 필요가 없었다. 어제 부승관에게도 정말 아무 일정 없는 게 맞는지 두 번 세 번 물었지만, 원래 식 바로 전날은 푹 쉬면서 컨디션 관리를 하고, 개인적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얼굴이라도 보라고 하루를 자유롭게 비워두는 게 도리라고 했다. 물론 조슈아로서는 보고픈 가족도 친구도 이곳에 없으니 저와 마찬가지로 꿀 같은 자유시간을 얻었을 윤정한이나 보러 가 볼까 했는데, 신랑 신부가 식 전에 미리 얼굴을 마주하면 부정을 탄다며 부승관이 갖은 만류를 해댔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본 건 윤정한이 아니라 딴 사람 얼굴이기라도 했냐고 항변하자, 형식적으로라도 신부 입장 24시간 전부터는 서로 얼굴을 못 보게 하는 게 관습이라나.

그리하여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한참을 고민하던 조슈아는, 반쯤은 충동적으로 마탑에 찾아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윤정한에게 미리 보고라도 해야 할지 갈등하다가, 어차피 처음 가 보는 것도 아니고 만일 마탑주가 몹시 바빠 만나기 어렵다 해도 딱히 손해 볼 건 없으니 그냥 알아서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그저 결혼과 동시에 조슈아가 떠나갈 것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디에잇에게 작별과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픈 마음일 뿐이었으니까.

마탑에 당도하였을 때, 반갑게도 1층까지 마중을 나온 건 오늘도 호시였다. 호시도 이쪽을 알아보고는 계단을 내려올 때부터 신나게 손을 붕붕 흔들었다. 

"또 오셨네요! 사실 또 오실 줄 알았어요. 저번에 다녀가시고 나서, 마탑주님께서 만약 조슈아 님께서 또 오신다면 무조건 바로 알려달라고 하셨거든요."

"그랬어?"

어쩐지 황태자 이름 빨 없이도 순순히 들여보내 주더라니, 디에잇이 미리 손을 써 둔 덕택이었구나. 이것도 고맙다고 꼭 말해야겠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호시는 내일 있을 조슈아의 결혼식에 대해 조잘거렸다. 적정 기온 유지와 이런저런 특수효과를 위해 마탑에서도 마법사 몇이 차출되었는데, 자기는 껴있지 않아서 아쉬웠다고.

"그럼 너도 올래? 청첩장 줄게."

넌지시 그렇게 묻자 호시의 입이 헤벌어졌다.

"저요? 진짜로요? 저 주셔도 돼요?"

"응. 나 어차피 줄 사람도 없어."

황실에서 정식으로 초청하는 인사들 외에도 개인적으로 초대할 사람이 있다면 뿌리라고 청첩장 한 다발을 받았지만, 줄 만한 사람이 없어 한 장도 빠짐없이 가방에만 넣고 다니며 짐짝 취급 하던 실정이었다. 그러나 호시는 순도 100프로의 진실이었던 그 말을 선한 거짓말 정도로 오해하였는지, 감동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초롱초롱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께서는 외동이시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제 생애 언제 또 로열 웨딩이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귀중한 초대를! 꼭 갈게요!"

그러다보니 어느새 마탑주의 개인실 앞이라, 호시는 신나서 펄쩍거리며 노크를 하고 조슈아의 당도를 알렸다. 디에잇은 어김없이 차분한 태도로 그를 맞이하였다.

"어서 오세요. 그간 별일 없으셨나요?"

별 일이야 꼽자면 많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안은 따로 있었다. 호시가 나간 걸 확인하고는 조슈아가 물었다.

"명호야, 내일 결혼식이 끝나면 난 정말로 돌아가게 되는 거야?"

디에잇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세계의 이치와 순리에 관한 일에는 100퍼센트 확신이랄 게 없어요. 하지만, 네, 조슈아 님의 소망이 황태자 전하와 맺어지는 거라면, 결혼 서약과 동시에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겠죠."

물론 윤정한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애초에 이런 소설을 읽게 된 거긴 하지만, 그리고 이곳은 '그룹이 더욱 잘 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한 것' 따위는 애초에 소원으로 성립되지 못하는 골자의 세상이니까, 조슈아의 소원이라 부를 만한 게 있다면 그건 '윤정한을 향한 짝사랑에 결실을 맺는 것'이긴 할 터이다. 하지만 그게 결혼이라는 형태만 취한다고 완수 판정이 내려질까? 여전히 이 결혼은, 달콤하고 간질간질한 감정보다는 둘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져 일사천리로 진행된 합의 사기극에 가까운데도? 

"정말로 도장만 찍는다고 돌려보내 줄까? 진정한 사랑의 키스, 뭐 그런 건 없어도 돼?"

"그것도 확신은 못하죠. 이전에 관측된 두 케이스가 모두 결혼식 직후 존재가 소멸한 것으로 보이니 그렇게 추정할 뿐이니까요. 만약 식 끝나고도 남아 계시면, 다시 찾아오세요. 재미있는 연구 과제가 되겠네요." 

뻔뻔하리만치 여상하게 답하는 태도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래, 일단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 외에도 궁금한 점은 또 있었다. 

"존재가 소멸된다면, 너도 날 기억 못하는 거지?"

"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고, 이름과 생김새도 지워지죠. 남은 사람들은 그저, 초상화에 남아있는 부자연스러운 빈칸, 신문 기사 중간중간의 희한한 공백, 분명 바로 전날까지 정상적으로 공연을 진행한 게 분명한데도 여태 프리마돈나가 공석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의 위화감, 그런 것으로만 어떤 외부인이 우리와 함께하다 사라졌음을 깨달을 따름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그 정도로 사회에 영향력과 흔적을 남긴 사람이 아니고서는 얼마나 많은 외부인이 어떻게 살다 갔는지 흔적을 되짚어보는 것조차 불가하단 뜻이지만, 아마 조슈아 님의 공백은 꽤 뚜렷하겠지요."

이거야말로 정말 마법 같은 현상이었다. 어떻게 한 세계에서 사람을 통으로 들어낼 수가 있는지.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만감이 교차했으나, 가장 크게 와닿는 감정은 안도였다.

"기억이 전부 지워지는 건 다행이다. 남은 사람이 괜히 힘들지는 않을 거 아냐."

디에잇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모르는 사람을 그리워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오늘의 저는 내일 떠나갈 조슈아 님을 알고 있으니, 작별이 아쉬운 마음은 느껴지네요."

"명호야......."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어 그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돌발 행동이었지만 당황한 티 하나 없이, 디에잇은 가만히 조슈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부디 무사히 돌아가시길 바라요."

"고마워, 명호야. 네 덕분에 많이 안심할 수 있었어."

짧은 포옹이 끝나고, 조슈아는 디에잇에게도 청첩장 한 장을 건넸다. 마탑주는 바깥세상에 사사로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지만, 식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청첩장 정도는 기념으로 간직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러고는 이만 황궁으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뗀 참이었다. 디에잇이 갑작스레 물었다.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는, 조슈아 님이 이방인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의아한 질문이었다. 조슈아가 미약한 당황으로 눈을 연신 깜박이며 디에잇을 돌아보았다.

"설마, 아닐걸? 명호 너 아닌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얘기를 털어놓을까 고민만 해도 바로 세상이 흔들려서 실수로라도 말한 적이 없거든."

"...그럼 단순 우연이겠네요. 알 리가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래도 타이밍이 묘했어서......."

사뭇 심각한 어조의 혼잣말에 조슈아가 되물었다.

"왜, 혹시 정한이가 뭐라고 했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얼마 전에, 한동안 전하께서 마탑의 서고를 들락날락하신 적이 있거든요. 그분께서는 어떠한 기밀 자료도 자유롭게 열람하실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계시니, 무엇에 대한 답을 구하러 마탑을 찾으신 건지 부러 캐묻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조슈아 님의 방문 이후, 이전 '빙의자'들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죠. '빙의자'들에 대한 자료들에 전부, 불과 며칠 전 황태자 전하께서 열람하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었습니다."

혼란스러웠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조슈아가 마탑을 방문한 날로부터 겨우 며칠 전이라면, 조슈아가 막 이 세계에 뚝 떨어졌을 즈음, 혹은 그보다도 이전이다. 그 시점에서 윤정한이 '빙의'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방도가 있었을까? 혹시, 신탁이라도 내렸던 걸까.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가설이 없는데. 정말로 그냥 우연이라고? 삽시간에 미소를 잃은 조슈아를 달래듯 디에잇이 말했다. 

"그냥 제 기우였을 뿐입니다. 우연이겠죠. 원래도 가끔, 뜬금없는 것에 꽂혀서 마탑을 종종 찾아오시던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만에 하나 눈치채신 거라도, 어차피 내일이면 다 잊어버리실 텐데요."

그래, 그의 말이 맞았다. 만약 윤정한이 무언가 짐작하고 있다 해도, 어차피 이제 와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을 밝히려 하면 세계가 흔들릴 것이며, 밝히거나 말거나 어차피 조슈아의 존재는 깡그리 소거될 예정이었으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 윤정한이 울며불며 조슈아를 붙잡는다 해도, 본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조슈아의 확고한 의지는 흔들리지 않을 터이다. 결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심란함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아서,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고서도 조슈아는 한참을 뒤척거렸다. 본래 자기 결혼식 전날에는 잠 못 이루는 게 흔한 일이라곤 하지만, 설마 이런 고민으로 밤잠을 설칠 줄은 몰랐다는 생각을 띄엄띄엄 하면서. 

잠든 것 같지도 않았는데, 노크 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먼동이 트는, 아침보다는 새벽에 더 가까운 시간이었으나 화려한 결혼식의 주인공을 채비시키기엔 결코 이른 시간이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인원이 달라붙어서 야단법석을 피우니, 졸음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미 다 한 번씩 피팅을 마쳐보았기에 단장을 마친 제 모습이 낯설지는 않으리라 여겼는데, 막상 기나긴 시간 끝에 마주한 거울 속 자신은 이미 온갖 스타일링을 산전수전 다 겪어본 조슈아가 보기에도 손에 꼽게 빛나는 얼굴이었다. 저 혼자만의 자아도취는 아닌 모양인지, 둘러싼 사용인들 입에서도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사에 길이 남을 미모라는 둥, 그 어떤 화공을 불러온대도 감히 이 아름다움을 온전히 화폭에 담지는 못할 거라는 둥, 낯부끄러운 찬사가 한참을 이어졌다. 다행히도 곧 디노가 문을 두드리며 조슈아를 해방시켜주었다.

"식장으로 이동하실 시간이십니다."

아마도 영영 돌아오지 못할 별궁의 복도를 마지막으로 걸으며, 조슈아는 디노가 해주는 이야기를 귀에 담았다. 원래 근위병은 단순 호위 차원에서 뒤를 따를 뿐, 신성한 제단 앞까지의 인도는 아버지가 맡는 법인데, 오늘은 이례적으로 두 분께서 동시 입장을 하신다고 하니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별궁의 정문까지만 부득이하게 자신이 모시게 되었다는 양해의 말. 디노는 그것이 크나큰 결례이기라도 하는 양 난처하게 해명했으나, 조슈아에겐 아무렴 좋은 일이었다. 떠나기 전에 이곳의 멤버들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을 수 있다면 환영이었다. 그보다는 아버지와 입장한다는 관례를 깬다는 선언 때문에 전하께서는 관리들의 수많은 반대 의견으로 고생해야 했다던 디노의 사족이 더 신경 쓰였다. 무리할 필요 없었는데, 정작 자신에게는 생색도 안 내고. 바보처럼.

이윽고 평상시엔 열려 있던,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닫혀 있는 거대한 문 앞에 도달하자, 디노가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서며 물었다.

"준비 되셨을까요?"

조슈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떨리지는 않았다. 이 결혼식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괜한 감상을 품어봤자 곤란했다. 중요한 건 그 결과로서 올, 원래 세계로의 귀환이기에. 곁에서 대기하던 사용인 하나가 대신 들고 있던 부케를 넘겨주었다. 흠 잡을 곳 없이 찬란한 모습이 완성되었다. 디노가 신호하자, 앞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 둘이 힘 주어 문을 열었다. 환한 햇빛이 눈을 찌르고, 웅성거리던 인파의 소음이 환호성으로 돌변하고,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윤정한.

마찬가지로 그간 봐왔던 것 중 손꼽히게 예쁜 얼굴을 하고, 들뜬 미소를 지은 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오는 윤정한. 양손으로 부케를 꼭 쥐고 있는 것에 개의치 않고, 첫 춤을 추었던 무도회 날처럼 다짜고짜 한쪽 손목을 그러쥐는 윤정한. 그걸 자연스레 손깍지로 고쳐 잡으며 말하는 윤정한.

"가자, 슈아야."

감히 꾼 적도 없던 꿈이 이루어지는 듯 어지럽고 울렁이는 순간이었다. 대신관이 기다리고 있는 신성한 제단까지의 짧지 않은 길이 환상처럼 몽롱하게 느껴졌다. 걸음마다 구름을 디디는 기분이었다. 도겸을 필두로 버진 로드 양옆에 우뚝 서 있는 근위병들의 나열 너머, 경사스러운 날을 맞아 오늘만큼은 일 대신 자유롭게 구경을 나온 황궁의 사용인들이 보였다. 그 안에 얼핏 우지가 보였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버논에게 무어라 열띠게 말하고 있는 부승관이 있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자 정식으로 초청받은 하객들이 자리했다. 누구보다 크게 연신 박수를 치고 있는 호시가 가장 먼저 보였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한 손을 높이 치켜들더니 놀랍게도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흩날리며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민규와, 그보다 더 앞, 맨 첫 줄에 앉아있는 에스쿱스가 보였다. 조슈아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객석을 지나 세 단의 계단을 오르니 흰 제단과 전원우가 있었다. 전원우가 길고 지루한 축복의 말을 하는 사이, 조슈아는 얼떨떨해 하는 자신과는 달리 이미 한 번 결혼을 해 보기라도 한 사람마냥 내내 침착한 윤정한이 뜻밖이라 그를 흘끔거렸다. 이런 자리에서도 특유의 장난기를 숨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황족의 위엄을 보여야 하는 자리라서인지, 아니면 겉보기와 다르게 속으로는 조금이나마 긴장을 하고 있는 연유인지, 윤정한은 저와 눈을 마주치면서 잔잔한 미소만 지었다. 잡담을 하고 있다는 티가 너무 나지 않게 주의하며, 조슈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정한아, 긴장했어?"

그가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보여? 열심히 웃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눈에 걱정이 잔뜩인 걸 내가 모르겠어?"

"...아니, 너는 알겠지."

윤정한이 두 눈을 꾸욱 감더니, 뜬금없이 사과의 말을 속삭였다.

"미안해, 슈아야."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던 참에 전원우가 말했다.

"이제 두 분께서는 결혼반지를 교환하며 신성한 서약을 하겠습니다."

윤정한이 제단 위에 올려져 있던 반지 케이스를 열고 조슈아 몫의 결혼반지를 꺼냈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리야?"

"슈아야, 손."

그는 당황으로 흔들리는 추궁의 시선을 못 본 척 하며, 조슈아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나 윤정한은 조슈아를 인생의 동반자로 맞이하며, 남은 평생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할 것을 맹세합니다."

대답을 들어야 하는데, 대놓고 식을 망치지 말라고 압박을 가하는 전원우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마주 반지를 끼워주며 앵무새처럼 읊었다.

"나 조슈아는 윤정한을 인생의 동반자로 맞이하며, 남은 평생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할 것을 맹세합니다."

얼마 시간이 남지 않은 게 본능으로 느껴졌다. 전원우가 둘의 맞잡은 손 위에 제 손도 함께 올리고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런 그에겐 불경한 짓거리로 비추어지겠으나, 급속도로 몰려오는 찜찜한 기분에 조슈아는 끈질기게 물었다. 매번 가볍게 보아넘겼지만, 생각해보면 윤정한에겐 미심쩍은 순간이 참으로 많았었다. 

"대답해. 나한테 왜 미안해?"

"마지막으로, 맹세의 입맞춤이 있겠습니다."

조슈아의 간절한 질문에는 무시로 일관하더니, 전원우의 선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윤정한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상태로 잠시, 허공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여느 커플이라면 다정하게 사랑을 속살거릴 타이밍일 텐데, 조슈아는 허망하게 그의 이름만을 읊조릴 뿐.

"정한아."

희한하게도 그 단순명료한 세 음절에 윤정한이 스르르 웃었다. 만족의 미소라 하기엔 어딘가 허탈하고, 체념의 미소라 하기엔 어딘가 벅차 보이는. 긴 속눈썹이 감기고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부드러운 입술이 몇 초간 조슈아와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신성한 의식에 걸맞은 담백하고 잔잔한 키스. 애욕이 아니라, 연원 모를 서글픈 아쉬움이 몰려오는 키스.

전원우가 이 둘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소리와, 하객들의 열띤 환호성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시야가 희게 물든다. 멀어지는 감각이 두려워 아직도 윤정한과 맞잡고 있을 손에 꽉 힘을 주었지만, 허공을 움켜쥐는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에서 존재를 분리해내려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한순간도 빠짐없이 내내 염원하던 귀환이었는데, 이대로 떠나면 안될듯한 불안감에 조슈아는 발버둥 쳤다.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신경을 곤두세운 덕택일까. 너무나도 희미하여 환청처럼 느껴지며 흩어지는 목소리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잘 있어, 슈아야."

그리고, 암전. 동시에 조슈아는 깨달았다. 왜 너는 남겨지는 사람이 아닌, 떠나가는 사람의 인사를 건넸는지. 이제껏 눈치채지 못한 게 바보 같았다. 이 소설의 하나뿐인 진짜 주인공은, 처음부터 너였는데.

눈을 뜨자 익숙한 방의 익숙한 침대 위였다. 낯선 세계에 휘말리기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냈는데도 본래 세계에선 끽해야 몇십 분 남짓 쪽잠을 잔 거나 다름없는 시간만이 흘러 있어, 여전히 캄캄한 밤이었다. 그러나 꿈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걸,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조슈아는 알았다. 조금도 정리되지 않는 온갖 생각들에 머릿속이 복잡함에도 그는 무작정 핸드폰 하나만 낚아채며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당장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지레 놀라 네가 도망칠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무작정 달렸다. 윤정한을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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