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The Golden Bough)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 02화

첫인상

* 트위터(@12_ria_12) 지참금결혼썰을 기반으로 일부 내용과 설정이 수정 및 보완되었습니다. 

* 지참금(신부의 집안에서 신랑의 집안으로 결혼을 위해 보내는 물질적 재산) 제도가 주요 설정으로 나오며, 이로 인한 폭력 및 살인에 대한 언급이 나올 수 있습니다. 불편하신 분들은 사전에 피해 가 주세요.

* 알파오메가 세계관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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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윤 정한입니다.' 

'아이고, 사모님을 그대로 빼닮았네. 이렇게 고운 오메가 아들을 두셔서 아주 뿌듯하시겠어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이 다음에 시집 보내실 때 눈물 좀 흘리시겠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신성 쪽이랑 혼담 오고 간다며요…. 그 얘기 진짜예요?' 

'쉿-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저기 오시네요. 신성물산 사모님.' 

소문이라는 건 발 없이 달리는 가장 빠른 말이다. 정한의 아버지인 은하 그룹 윤 회장이 신성물산의 최 회장과 함께 라운딩을 나갔다 온 바로 그날 밤에 증권가 찌라시에는 은하 그룹과 신성물산에 관한 내용이 올라왔다. 

은하-신성 '빅 딜' 초읽기. 

'빅 딜'은 증권가에서 사용하는 은어다. 기업 간에 이루어지는 지참금 결혼을 뜻하는.  

아버지가 신성물산 회장과 라운딩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정한은 몰랐다. 제 혼담에 관하여 또한, '형, 신성물산 아들이랑 결혼해???'라는, 밤 사이 도착한 승관의 메세지를 다음날 아침에서야 확인하며 알게 됐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정한은 어머니를 에스코트 해 참석한 송화 갤러리 10주년 개관 행사 자리에서 제 시어머니가 될 사람과 처음 인사를 나눴다. 

'이쪽이 그럼 윤 정한 군?'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인상이 참 선하고 좋네요. 얼마 전 석사 과정을 마쳤다죠? 고생이 많았겠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조금 놀랐다. 살다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이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난다고들 하던데, 신성물산의 사모는 인자하고 푸근한 미소가 돋보이는 중년의 오메가였다. 천박한 장사꾼 기질을 지녔다는, 괴담 속 악독한 마녀 이미지를 상상했던 정한이 스스로 부끄러웠을 정도로 고아하며 이지적인 여성이었다. 

발 없이 빠르게 달리는 말은 사실 형체가 없다. 그래서 보는 사람 마음대로 그 형체를 묘사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금빛 찬란한 황금 갈기를 가진 말이라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석탄을 뒤집어쓴 듯 새까만 흑마라고 말할 것이다. 초승달을 닮고 하얗게 빛나는 뿔이 머리에 달려 있다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게 원래보다 더 매혹적이니까. 정한이 소문을 믿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오늘 정한은 한 가지를 또 새로이 깨닫는다. 

"계속 거기 서 있을 겁니까?" 

진실과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소문도 때론 존재할 수도 있겠다, 라는 것을. 처음 만난 최승철 대표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살기를 지닌 맹수에 가까운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문 그 이상으로 '싸가지가 없'었다.   

정중했던 제 인사에 돌아온 것은 맞은편 비어 있는 의자를 향한 손짓 뿐. 심지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조차도 안 한다. 장차 결혼을 하고 가족이 될 사람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이토록 무례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정한 딴에는 이해가 안 됐다. 

"예식 비용은 저희 측에서 전부 부담하기를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견 없으니 그리 진행하시죠. 대신 준비는 차질없이 알아서 잘 부탁합니다. 비서 분을 통해 담당자 연결해 드릴테니 비용 청구는 그쪽으로 하시면 되고. 상견례 날짜는, 정하신 뒤에 알려주기 바랍니다." 

"저기-" 

첫 만남에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만나서 반갑다- 아니, 그래. 딱히 반가울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피차 인정한다면 그밖에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형식적인 인삿말 하나쯤은 건네야지. 오는 데 별일은 없었냐, 라거나. 

여기까지 생각하던 정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정한도 그에게. 그 역시도 아마 그랬나 보다.

"…말씀하신 내용들 다 이해 했고, 가족 상견례 날짜는 곧 정해서 전달 드릴게요. 그리고 저는 개인 비서를 따로 두지 않아서요, 연락은 저한테 직접 주셔야 해요." 

"그렇군요. 확인했습니다." 

"네." 

"추가적으로 궁금한 사항 있습니까?" 

이름 최승철. 나이는 저와 동갑인 스물 아홉. 영국 바스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LSE 경제학 석사 학위 수여 후 3년 전 건설부문 전략기획팀으로 배치. 3개월 전 대표이사로 취임. 그에 대한 신상 정보는 이미 알고 있다. 7년 전, 유학 도중 귀국해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런던으로 떠났던 아내가 한 달도 안 돼 돌연사 했고, 그것이 지참금 살인일 것이란 소문이 있다는 부분까지. 

하지만 가령 이런 것들은 아직 모른다. 휴일에는 주로 무슨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한식과 양식, 중식, 일식 중 어떤 것인지, 혹은 좀 더 이국적인 음식을 좋아하는지. 커피를 좋아하는지, 혹은 차를 좋아하는지. 집이 따뜻한 편을 선호하는지, 시원한 편을 선호하는지, 그리고, 

어떤 향을 가지고 있는지. 

제 향은 마음에 들어할 지에 대해서 말이다.

"말씀하세요." 

하지만 정한을 향한 시선은 그런 것들에 대해 조금도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는 듯 무미건조하다. 저 역시도 상대에 대해 크게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무관심의 눈동자였다. 결국은 간단하게 말하는 수밖에. 

"아니요, 없습니다."

그러자 짧고 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좋습니다." 

뭐가 좋다는 거지. 마주한 눈을 바라보며 생각하는데, 난데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승철로 인해 정한의 시선도 덩달아 올라갔다. 이제야 뒤늦게 일어나 인사라도 하려고? 그게 아니면 대체, 왜…  

"오늘 식사는 제가 내겠습니다. 그럼 상견례 때 뵙죠." 

간다고? 정말로 이렇게? 앉은 지 3분도 안 지난 것 같다. 손목을 들어 피아제를 들여다 보는데 정말로 이제 겨우 2분이 지난 시점이다. 정한의 눈이 커진 채 룸을 나서는 승철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물론 밖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던지는 말은 더욱 압권. 

"머리색은 바꾸는 편이 좋겠습니다. 집안 어른들께서 조금 보수적이신 편이라서요. 그럼." 

짧게 목례를 하고 승철은 자리를 떴다. 보수적인 편? 이 사회에 과연 진보가 존재하기는 했었나 싶은데.  

"애피타이저 준비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사전에 미리 이야기가 되었던 모양인지, 좀 전의 정한을 룸으로 안내했던 매니저가 한 사람 몫의 디시를 가지고 룸으로 들어왔다. 승철이 떠난 덕에 커다란 창 너머 청명한 여름 하늘이 아무 장애물 없이 시원하게 내다보였다. 그거라도 고마워 해야 하는 건지. 얕은 숨을 입밖으로 내쉰 정한이 테이블 위 곱게 접혀 있던 냅킨을 펼쳐 무릎 위에 얹었다. 황금빛 모던한 디자인의 커트러리 사이로 샬롯과 청사과 소스가 얹어진 관자 요리를 내려놓는 매니저에게 정한은 미소 띤 얼굴로 작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물 한 모금으로 입안을 가신 정한이 양손에 커트러리를 들었다. 그래, 맛있는 음식이니 맛있게 먹자. 정한에게 있어 입맛의 유무를 따져 가며 식사를 하는 시기는 애저녁에 지났고, 무엇보다 정한이 식사를 다 하고 갔는지 양쪽 집안에 분명 이야기가 들어갈 텐데 첫날부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일지라도 일곱 코스의 만찬을 모두 즐기다 가는 수밖에 없다. 

물론 첫 만남에 2분을 고작 넘기고 자리를 떠 버린 최 대표의 이야기도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최 대표의 실책이지 정한의 과오가 아니다. 여기서 저 또한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 1층 라운지에서 마주친 사교 모임 지인만 벌써 다섯에, 룸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며 슬쩍 눈인사를 나눈 나이 지긋한 여성은 정한의 외할머니와 절친한 사이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눈이 어디에든 언제든 있다. 그러니 이 결혼이 어차피 저와 최 대표 두 사람의 팀 플레이가 아니라면, 그리고 양가 또한 그것을 크게 기대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정한은 적어도 제 점수를 스스로 깎아먹는 일은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나저나 신혼 집에는 승관을 자주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 정한이다. 결혼 후에도 오늘처럼 혼자 식탁에 앉는 일이 많을 것으로 예상이 되므로. 


황금가지(𝐓𝐡𝐞 𝐆𝐨𝐥𝐝𝐞𝐧 𝐁𝐨𝐮𝐠𝐡)

2화. 첫인상

by. illyria


"소노루스(Sonorus)!"

문이 열리기 무섭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승관이 외쳤다. 

자, 나의 똘끼를 보아라. 그리고 집에 가서 이상한 놈이 왔다면서 이 결혼 안 하겠다고 하라- 

고 생각하던 차, 마주친 눈이 너무 예쁘다. 무슨 인형 눈 같아. 

지팡이를 잡고 힘껏 팔을 뻗은 동작 그대로 승관은 얼어붙었다. 뭐야, 속눈썹은 뭐 저리 길고 눈은 또 뭐 저렇게 반짝반짝. 남자 맞지? 남동생이라고 들었는데 분명. 지금의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다른 게 아닌 승관 본인에게 있었다. 만남에 앞서 상대의 정보를 1도 안 보고 온 제 잘못이랄까.  

무안해지니 귓바퀴가 화끈거리고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민망함에 슬그머니 팔을 내릴 때쯤,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반가워요! 부, 승관 씨! 저 최, 한솔이에요!!" 

아이씨, 놀래라! 왜, 왜, 왜,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초면부터! 룸 안을 가득 채운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몸을 움찔한 승관이었지만 지기가 싫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똑같이 외쳐줬지. 

"근데 왜! 그렇게! 크게 말해요!" 

"그야 승관 씨가! 방금 저한테! 확성!! 주문을!! 걸었으니까요!!" 

"뭐…! 뭐…! 뭔데, 그게!" 

이제 오히려 당황하게 된 승관이 말을 더듬자 한솔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 

잘못이 돼도 한참 잘못 됐다. 지금 이 상황의 A부터 Z까지 모두!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한솔의 얼굴을 보고 승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주 잘 생긴, 그 누구였더라… 해리 포터 실사 영화 시리즈에서 최고 미남으로 손꼽히는 그 남자 배우 있잖아, 왜. 그래, 로버트 팬티슨인가 패티슨인가 어쩌고, 걔! 그보다 잘 생긴 남자가 지금 승관의 눈앞에 서 있단 말이다. 어쩜 입고 온 옷도 쏙 마음에 들었다. 허벅지를 살짝 덮는 네이비 투 버튼 재킷에 화이트 팬츠. 안에다가는 깔끔하게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만 받쳐 입은 것이, 얼마 전에 본 랄프 로렌 S/S 카달로그에서 미남 알파 모델이 그대로 종이를 뚫고 나온 것만 같다. 이게 진짜야? 완전하게 자신의 취향인, 할리우드 금발 미남에 버금가는 남자가, 쟤가 최한솔이야? 

24년 평생을 확신의 얼빠로 살아온 나, 부승관. 그렇게 싫다, 싫다, 나 죽는다, 단식 투쟁까지 해 가며 버티고, 오늘은 또 이 사단을 내겠다고 작정에 작정을 하고 왔는데. 이렇게 내 완벽한 이상형을 만난다고, 하필 오늘 여기서? Holy shit… 나 지금 뭔 짓을 한 거야?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일단 갈아입고 오자. 죽었다 깨나도 이 꼴로 같이 있을 순 없어. 결단을 내린 승관이 돌아선다. 등을 돌린 채 최대한 얌전한 투로 한솔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승관 씨." 

끼기긱. 끼기긱. 천천히 목이 돌아가는데 왜일까? 뒷골이 서늘한 이 느낌.  

"Portkey는 안 챙겨 왔어요?"  

저런, 우아하게 굴린 영어 발음도 완벽하네. 

쿵! 문을 세게 닫고 나간 승관은 그대로 스카이 라운지를 빠져나가 'STAFF ONLY' 문을 향해 달려갔다. 이모처럼 여기는 송 지배인을 찾아가 맡겨둔 가방을 건네 받아 급히 재정비를 시작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특송으로 받은 호그와트 망토는 부리나케 벗어버리고, 가방 속 고이 접어 넣어둔 구찌 트위드 재킷을 재빨리 꺼내들어 두 팔에 끼웠다. 

미쳤어, 미쳤어. 쪽팔려서 어떡해. 혼자 발을 동동거리며 머리도 다시 한번 만지고, 눈꼽, 코딱지, 어디 엉뚱하게 붙어 있는 게 없는지 마지막 확인을 마친 승관이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스카이라운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한솔이 기다리고 있을 룸의 문 앞. 승관은 다른 의미로 긴장한 채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시 봐도 과연 승관은 한솔을 틀리게 보지 않았다. 로코코 시대의 대리석 조각상처럼 윤택하고 오점 없는 완벽한 외모였다. 그리고, 

"옷 갈아 입었네요? 잘 어울렸는데." 

생글생글 웃는 미소가 아주 일품. 구웃- 

"뭐, 원래 내가 아무 거나 입어도 다 잘 어울리는 편이긴 해서." 

"그런데 아까 그거 그리핀도르 망토던데, 기숙사 테스트 해 봤던 거예요?"

"어차피 진짜 입학할 것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 해야 돼요?" 

"아, 그게- 공식 사이트에서 하는 게 있는데, 전 래번클로 나왔거든요. 근데 승관 씨는 왠지 후플푸프 나올 것 같아서요. 물론 그리핀도르가 안 어울린다는 얘긴 아니예요. 아, 그리고 저 지팡이 테스트도 해봤는데-" 

근데 내가 아까 말했나? 쟤 좀 이상하다고. 아, 버터리한 영어 발음에 홀려 생각을 하다 말았는데, 정정한다. 좀이 아니다. 아주 많이, 많이 이상하다. 이 선 자리를 지옥의 멸망으로 이끌기 위해 잔뜩 별렀던 승관이, 야심차게 준비한 자신의 모든 계획을 제대로 시도조차 못할 정도로. 

'나중에 우리 집 와서 같이 해리포터 정주행 할래요?' 

'됐어요, 내가 한솔 씨 집에 왜 가요.' 

'그야 우리 결혼할 사이니까요.' 

'참나, 뭘 만나자마자 '너랑 결혼까지 생각했어'야. 오버 마세요. 저 오늘 여기 억지로 끌려온 거예요. 일단 한번 만나나 보라고. 맘에 안 들면 결혼 안 해도 된다 그랬어요, 우리 엄마가.' 

물론 승관의 엄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1~2년 천천히 만나보면서 식 준비하자 그랬지. 선택권이 있었다면 승관도 그렇게 필사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을 거다. 근데 혹시 아냐고, 쟤는 그걸 모르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 무시무시한 소문의 집안이면 가족 간에 별로 화목하지도 않을 텐데. 뭐, 얘기나 제대로 하고 이 자리에 나왔겠냐고. 승관 딴에 생각하기엔 그랬단 말이다, 분명.   

'네, 좋아요. 그럼 언제 또 만날래요, 우리?' 

근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 식사가 끝나고 함께 1층까지 내려오는 엘리베터에서 한솔이 물었다. 만나긴 뭘 만나. 이번 한 번이 끝이야. 다신 얼굴 마주칠 일 없어! 하고 선 긋는 게 원래 승관의 목표였다면, 그것 또한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내 전화번호도 모르면서.'

'번호 가르쳐줄래요, 그럼?' 

하여간 요 주둥이가 웬수지. 주둥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승관은 자책 아닌 자책을 했다. 쭉 내민 입술을 스스로 꼬집으며 승관은 저에게 유언비어를 퍼트린 친구를 응징하는 중이었다. 

"아니 그니까 니가 그랬잖아, 그 때. 그 집 둘째 머리 완전 비상하다며. 특히 사업적으로다가! 비상은 무슨 중간에 한 글자 빠졌더만, 비'정'상! 완전 그냥 오타쿠또라이더만!" 

「그래도 잘 생겼잖아~ 그 얼굴에 그 성격에, 솔직히 집안 소문이 좀 나쁘긴 한데, 그래도 주변 사람들 말 들어보면 다들 생각보다 괜찮다 그러고.」

"하… 됐다, 끊자. 넌 만나면 멱살 짤짤이 당할 준비하시구."

뚝,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승관이 부드러운 가죽 시트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길게 뱉는다. 

아무리 그래도 가오가 있지, 사람이. 온가족 앞에서 그 지랄을 떨었는데 내가 어떻게… 못 해, 결혼. 죽어도 안 해, 절대 안 해… 안, 

드르륵-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한다. 방금 통화한 친구 녀석인가 싶어 반려견 코니가 헤벌쭉 웃고 있는 배경화면을 보는데 저장돼 있지 않은 번호였다. 그러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부재중 통화만 달랑 남겨놓고 아직까지 저장해 놓지 않았던 최한솔, 일 거다. 오늘 만난 사람이 걔 밖에 없으니.   

「오늘 즐거웠어요. 오랜만에 대화 잘 통하는 사람 만나서 너무 좋았어요.」

참나, 아주 귀신이야. 귀신. 핸드폰을 두 손으로 잡고 적당히 쓸 말을 고심하던 차에 말풍선 하나가 더 떠오른다. 

「우리 좋은 부부가 될 것 같아요.」

으악! 

부부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승관은 경기를 하며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핸드폰이 앞좌석 뒷부분에 부딪치는 바람에 운전 중이던 오 기사님이 룸미러를 통해 승관을 슬쩍 쳐다봤다. 

"죄송해요, 못 볼 걸 봐서."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다시 한번 사과를 한 뒤에, 승관은 안전벨트를 늘여 바닥에 나뒹구는 제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엄지와 검지로 정말 살짝. 일주일 동안 빨지 않은 아주 고약한 양말을 집어드는 듯이. 카메라가 세 개나 달린 묵직한 기계가 겨우 들릴 정도로 정말 아주 살짝 말이다. 아직 화면이 꺼지지 않아 메시지 내용 일부가 여전히 그대로 보였다. 

「주말에 선약 있어요?」

절대… 안 되는데. 

세 개의 말풍선만이 달랑 띄워져 있는 흰 메시지 창에 그놈의 잘생긴 얼굴이 하트 모양을 하고 뭉실뭉실 떠 다닌다. 그 위로는 반짝이는 별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식사 코스의 가장 마지막 순서였던 몽블랑 위에 솔솔솔 뿌려진 금 파우더처럼.  

"아냐, 승관아. 세상에 할리우드 배우 뺨치도록 잘 생긴 알파는 많아. 이제 정신 차리자, 그만." 

스스로 되뇌었을 때 마음 속 또다른 자아가 튀어나와 이렇게 반문한다. 

'하지만 그 알파들이 다 너랑 결혼할 생각을 갖지는 않을 걸?' 

'뭔 소리야. 내가 어디가 어떻게 부족해서. 집안 좋지, 머리 좋지, 성격 좋지, 외모도 굿-인데 왜 마다하겠냐고, 나를. 나 정도면 완전 성은이 망극한 정도지.' 

'아, 예. 그건 뭐 본인 편할 대로 생각하시고요.' 

'아이씨, 진짜! 내가 어디가 어때서어!' 

승관의 두 자아가 열렬하게 싸우는 동안에 한솔로부터는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한다. 아직은 끄떡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거의 다 넘어가다시피한 부승관의 기둥을 내리칠 단 한번의 대일격이었다. 

「배구 좋아한다면서요. 같이 직관 갈래요?」

얘는 배구 말고 또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과연 알고 있을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는? 절대로 안 먹는 건? 또 뭐에 대해 알고 있을까, 나에 대해서? 

「어느 팀 경기.」

여기서 뻔하게 집안 소유의 은하 실버스타스를 댄다면 불합격. 

「당연히 전력기술공사 홈 경기 가야죠.」

「고천까지 가자고요? 차로 네 시간 거린데?」

「그래도 홈 경기잖아요.」

흠. 고심하던 승관이 답장했다. 

「그러든가요.」

일단 한 번은 더 만나보지 뭐. 물론 아직 합격은 아니다. 보류인 거야, 보류. 

다음날인 수요일에 승관은 외근을 나가느라 시내 중심지에 나갔다가 너그러운 팀장님의 은혜로 바로 퇴근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냥 바로 집에 들어가기는 싫고, 또 어제 다른 쪽의 만남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승관은 정한에게 전화했다. 

"형!" 

「그래, 승관아.」

언제나 같은 음성이다. 고저 없지만 다정하고 차분하지만 따듯하다. 늘상 저런 말투와 음색을 가지고 싶어 따라해 본 적도 있지만 결국은 원래 자기 성격 드러나게 돌아온다. 어려서부터 정한을 따라하길 좋아했지만 그런 건 따라해도 내 게 되어지지가 않더라. 진작에 포기했던 승관이다. 

"어제 그, 최한솔 형은 잘 만났어?"

「최한솔…? 어어, 너는?」

"나 완전 할 말 많음이야. 나 퇴근했는데 당장 만나. 이건 말로 풀어야 돼. 어디야, 형?"

「나, 지금-」

이른 아침부터 건강검진을 받고 온 정한은 신혼집이 될 한서동 펜트하우스를 보러 갔다가, 반지를 고르기 위해 막 청민동으로 이동한 참이었다. 결혼 후 당연히 최 회장이 사는 본가로 들어가게 되리라 생각한 정한으로서는 따로 나와 살게 될 것이라는 말에 다소 놀랐다. 이것도 나름 인생 최초의 독립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설렌다고 해야 하나. 물론 그 신혼집이 윤 씨 집안 소유의 부동산 중 하나이고, 지참금 격으로 함께 넘어가는 것이라 딱히 반길 일은 아니다. 집이나 저나, 외력에 의해 여기서 저기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절대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러니까, 평소 큰 감정 기복이 없는 정한이지만 이날만은 괜히 신경이 뾰족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쇼핑할 거면 저한테 바로 얘길 했어야지 왜 혼자 가냐는, 승관의 투정 어린 말에도 미간이 살짝 구겨질 만큼. 

"근데 형, 뭘 벌써부터 그렇게 준비해? 바로 어제 만났으면서." 

"만난 건 어제지만, 식은 3개월 밖에 안 남았으니까. 부지런하게 움직여야지." 

"근데 그럼 왜 형만 혼자 움직이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람? 글쎄, 일이 많이 바쁜가 봐. 나더러 그냥 차질없게만 진행해 달라 그래서 나도 알았다 했지." 

참나, 최한솔네 형 진짜 웃기네. 왜 정한이 형더러 다 혼자 하래? 결혼식도 혼자 들어가라 그러지. 아니, 그럴 거면 하지를 말지, 아예. 웰컴 드링크와 간단한 디저트가 준비돼 있는 게스트용 소파로 돌아온 승관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정한은 매니저가 내놓는 반지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들여다 볼 뿐이었다. 첫인상은 소문과 다르지 않게 아주 재수가 없었으나, 날렵하고 진한 이목구비에다, 흑백의 극명한 조화가 인상적인 승철에게 최대한 잘 어울릴 만한 디자인을 찾기 위해. 

어제의 만남에서도 그렇고, 따로 찾아본 언론 노출 사진에서도 그렇고, 그는 화려한 외모를 가진 것과 달리 늘상 차분한 톤의 의상을 선호하는 듯 했다. 짙은 한색 계열의 정장 차림이 자주 보였고, 넥타이 또한 주로 그레이 톤에서 색이 있어봐야 블루를 벗어나지 않았다. 형식에 가까운 결혼인데 반지를 안 끼고 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건 아닐 거다. 최 회장의 손에는 언제나 오래된 결혼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므로. 보통 그런 가풍은 그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크게 튀지 않는 화이트 골드로 맞추는 편이 더 적당하겠다 싶었다. 하나 눈에 들어오는 디자인이 없어 벌써 아홉 번째 퇴짜를 놓고 있을 때, 분명 소파 쪽으로 갔던 승관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이거 로즈골드로는 혹시 없어요?" 

"잠시만요." 

"이것두 이쁘다, 이 디자인도 한번 보여주세요."

분명 어제와는 확연하게 다른 온도 차이. 어제 승관은 스카이라운지에서 두 시간 만에 내려왔다고 했다. 옆에는 최 대표의 동생인 한솔 군도 함께라고 정한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까진 승관만 알고 있는 터. 솔직히 말해서 정한은 궁금했다. 첫 만남에 어떤 이야기를 해서 그렇게나 오래 있었는지 말이다. 매니저가 꺼내서 보여주는 반지를 제 손에 끼워보고, 조명 아래 이리저리 비춰보면서 확인하는 눈이 더없이 초롱초롱한 이유는 단순히 반지가 예뻐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승관의 모습을 보니 괜시리 정한의 마음이 작아진다. 

"승관아." 

"음?" 

"결혼 안 한다더니, 맘이 바뀔 정도로 좋았어?"

"무쓰은- 그런 거 아니거든. 이씨, 이거 왜 안 빠져…. 죄송한데 저 이것 좀- 형, 진짜 아니다, 그거."

얼굴까지 붉혀가며 펄쩍 뛴 승관이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낑낑거리며 반지를 빼내려 애쓴다. 여기서는 원하는 스타일을 찾지 못하겠다고 판단한 정한이 이만 가보겠다며 매장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설 준비를 하니 행여 두고 갈까 싶어 또 황급히 쪼르르. 그런 승관을 정한은 매장 밖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차에 함께 오른다. 바로 다음 블록에 있는 이탈리아 하이 주얼리 매장에 가 볼 참이었다.

"형은… 어땠는데? 많이 별로였어?"  

차 안에서 승관이 정한에게 물었다. 집에서 사랑만 듬뿍 받으며 자란 막내라고는 해도, 안하 무인으로 행동하는 막 돼 먹은 아이는 아니다. 가지고 태어난 성품 자체도 워낙 순하고 유해서 애당초 질시를 당할 일이 거의 없다. 게다가 눈치는 또 얼마나 빠른지. 평소보다 더 기분이 다운돼 있는 정한을 곧바로 알아채고 고개를 갸웃, 예쁜 각도로 기울이며 묻는 것이다. 그러니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있나. 뭘 해도 책망이 아니라 예쁨을 받는 막내의 운명이 때로는 부럽다.      

"그냥." 

"왜, 사람이 말을 해보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거 같잖아."

"잘 모르겠는데. 기준을 세울 만큼 오래 대화하지 않았거든."

"왜, 얼마나 있었는데."  

"……."

말없이 창문 밖 명품 매장이 스쳐 지나가는 광경만 보는 정한에 승관도 마침내 입을 다물기로 마음 먹었는지 차 안이 조용해진다. 그리고 차가 목적지에 다시 멈추기까지 고요는 정확히 2분 간 유지됐다. 블록에서 블록으로 이동한 차량이 멈춰 서기까지의 시간이 딱 2분. 아무리 길게 여기려 해도 결코 길지 않은 시간. 

승관은 모르고 있다. 가족들이 막내에게 그 얘길 꺼냈을 리 없고, 정한 역시 사실을 모르는 동생에게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의 자존심은 정한에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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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The Golden Bough)⟫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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