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웆홋]Fish in Apocalypse

종말에서 감히 그런 희망을.

Fish in Apocalypse

 

 

 

 

 

돌아가는 필터 소리가 조용하다.

 

권순영은 어항 속에서 얌전히 멈춰있는 손톱만한 물고기를 보고있다. 숨을 쉬기는 하는건지 그걸 빤히 쳐다보고만 있느라 뒤에서 제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자외선이 켜진 창백한 조명과 조악한 자갈, 플라스틱 해조류, 멈춰있는 물고기. 잃어버린줄 알았던 모르는 음계가 하나, 둘.

 

사실 멈춰있는건 아니다. 공기 필터가 밀어내는 물결에 맞춰 지느러미를 움직여 한 자리에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는거겠지. 실상은 거스르고 있는거였다. 끊임없는 잔물결을 보는 눈은 물고기를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하다. 곧 증발해서 사라지기라도 하는걸 보는 것 처럼.

 

우이천 쪽에서 찾았다. 부품을 뺄만한 자전거가 있는지 살펴보던 중이었다. 여기저기 버려지거나 자물쇠도 없이 널브러져있는 자전거들을 보고 있었더니 언제 온건지도 모르겠는 권순영이 어깨를 잡았다. 야 지훈아, 저쪽에. 거의 얼굴 전체를 덮는 호흡기 안에서 동공이 다 확대되어있길래 뭔가 놀랄만한걸 찾았구나 싶기는 했지만, 이건 예상 못하기는 했다. 물고기라니.

 

여기 근처의 동물 같은 것들은 전부 죽은 줄 알았다. 특히 물고기는. 상류의 공장에서 뭐가 들었을지도 모르는 화학물질들이 죄다 쏟아졌었을텐데. 아마존 밀림도 아니고 서울 한복판에 살아있는 물고기라니. 물론 권순영이 정화 캡슐을 꾸준히 뿌리고있기는 했지만― 효과가 있을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나는. 혹시 몰라 하천 물을 함께 떠서 넣어놨지만, 쉘터에서 검사 같은거 안돌려도 여전히 너무 더러운건 알만했다. 그런 더러운 물에서 이렇게 조그만 물고기를 찾아낸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본건지. 캡슐 뿌리다가 본거라고는 하지만.

 

깨끗하고 흐르는 물이었다면 잡을 엄두도 못냈을텐데, 우이천의 유속은 속도라는게 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라 건져내는건 어렵지 않았다. 깨끗한 물에 넣으면 오히려 죽는건 아닐지 걱정했지만 3시간 정도가 지났는데 아직 살아있는걸 보면 괜찮은 모양이었다. 물고기는 정말 작아서 손톱만했고, 한 마리만 건졌지만 권순영은 더 있을거라고 했다. 혼자 갑자기 태어났을리는 없잖아. 맞는말이기는 했지만.

 

식량이 되기에는 너무 조그맣다. 자원으로 쓸 수는 없겠지만 인간에게 쓸모가 있어야만 존재할 필요성이 생기는건 아니었다. 어쩌면 다른 강들에도 물고기가 살아 있다던지. 아니면 적어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개체가 생겨나는건지도. 어느쪽이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희소식이다. 가지고 돌아가자는 말에 이견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우이천에서 건졌다는걸 안믿어줄지도 모르겠지만.

 

“곧 출발 해야돼. 폭풍 거의 멎었어.”

 

권순영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말일텐데, 별 놀라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 애는 다만 고개를 들어 누런 창 밖을 봤다가, 알겠다는듯 일어났다. 어항을 구한다고 대형마트까지 차를 모느라 시간을 좀 써서, 결국 황사를 피하지 못했다. 각종 짐과 사람 두 명을 실은 캠핑카를 날려버릴 정도의 폭풍은 아니었지만,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서 전부 지나갈 때까지 3시간은 멈춰있어야 했다. 나는 뭔가 좀 주워먹고, 짧게 잤는데. 혹시 권순영은 그 동안 내내 물고기만 본 건 아닌지. 그랬다면 어떡해야할지를 생각한다. 그냥 물고기를 본 것 뿐이지 무슨 의미 같은게 있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작은 물고기를 힐끔대봐도 조용하다.

 

어항에서 물이 넘치지않도록 천을 덮는다. 밀폐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넘치는걸 막아주기나 할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작은 물고기에 비해 큰 어항을 두고 권순영이 호흡기를 쓴다. 와이퍼와 고압 호스를 든 모습은 차라리 익숙했다. 닦고 올테니까 통신 좀 부탁한다는 소리가 여상했다. 대답 같은거 안해도 내가 할 것 정도는 아니까, 캠핑카의 문이 열렸다가 닫힌다.

 

쉘터로 돌아가기까지 3일 정도가 남았다.

 

게이트는 웬만한 비상상황이 아니라면 일주일에 한 번만 열리는게 이상적이다. 공기정화 장치가 언제 뻑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꾸 오염된 공기를 들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특히 17번 쉘터에는 병원이 있다. 유독한 화학물질에 폐나 기관지가 상한 사람들이 즐비한데, 게이트를 자주 열어 좋을 것이 없다. 그래서 ‘자원탐사팀’은 한 번 밖으로 나오면 일주일은 돌아갈 수 없다. 보통은 일기예보를 바탕으로 황사와 비를 피해 돌고는 하는데. 강북쪽은 이미 탐사가 여러번 진행돼서 식량이나 기름보다는 2차적으로 남겨진 녹슨 기계부품이나 대기 혹은 생태를 보기 위한 샘플들을 수집하러 들르고는 한다. 우리도 정확히 같은 목적으로 왔던거고.

 

그렇다고는 해도 후자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 많지는 않았는데. 보통은 연구자들이 부탁하는 샘플들을 이걸 왜 가져오라는건지 알 수가 없는 상태로 챙기는게 다고, 이번에 부탁 받은 것들은 우이천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챙겼기 때문이다. 그 강가는 진짜로 정화캡슐 때문에 갔던게 다였다. 한 번 잊어버릴법도 한 일인데, 권순영은 나올 때마다 강가를 찾는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는 캡슐을 뿌리는건 혼자로도 충분했으니 나는 자전거나 보고 있었던건데. 고압호스가 앞유리에 가득 쌓인 먼지들을 몰아내는 동안 나는 아까의 권순영처럼 어항을 본다.

 

지구에 유성이 떨어지던 최후의 밤 이후 5년. 땅 아래에서 지렁이나 벌레가 꿈틀거리듯 인간들이 살금살금 기어나온다. 마치 강 건너와 이곳을 구분하듯이.

 

지구 곳곳의 많은 곳이 무너졌다.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기고, 지형이 바뀌고, 그에 따라 환경도 바뀌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만 우주 돌덩어리가 떨어져도 문제일 판에 돌덩어리들은 절대로 떨어져서는 안되는 곳들까지 골고루 떨어졌다. 인간이 많은 곳이건 위험 표지판이 수십 개 세워진 곳이건 유성은 별 신경쓰지 않았다. 눈도 없고 지구 말도 모를텐데 어떻게 그걸 구분한단 말인가? 같은 행성에서 같은 언어를 써도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기가 어려운판에 외계물질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좋지 않다. 그래서. 지구는 거의 멸망하고 말았다. 정확히는 인간이.

 

유성이 직접 부순 것들도 있지만 그저 여파로 망가진 곳도 수도 없이 있었다.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아메리카 대륙이고, 한국은 쓰나미와 모래폭풍 등이 번갈아가면서 땅을 휩쓸고 지나가자 정말 운이 좋은 몇몇만이 고개를 디밀고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재앙이 닥친 땅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라디오를 켜거나 그보다 더 원시적인 신호들을 주고 받으면서 어떻게든 이곳저곳으로 모였다. 참 대단하기도 그런 족속들이었다. 그와중에 모여서 뭔가를 짓고 찾을 생각을 하다니.

 

나의 경우에는. 그냥 진짜 운이 좋았다는게 다였다. 그다지 뭔가를 찾거나 개고생까지 해가며 다른 인간들을 보기 위해 애쓴 적은 없다. 어쩌다 휩쓸려서 들어온 대피소가 재앙에서 살아남았고, 안에 있는 것들을 필사적으로 지키다보니 그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규모가 늘어나자 내가 있던 대피소가 어느새 쉘터로 지칭되고 있었다. 간신히 세워진 한국 대책본부에서 명명하기를, 이곳이 열일곱번째라고 했다. 기준이 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

 

권순영을 다시 만난건 대피소가 17번 쉘터가 되고나서도 반 년 가량이 지나서다. 그 애는 박살이 난 호흡기를 달고 천으로만 코와 입을 가린채로 구조 당했다. 석민이가 게이트에서 10m도 떨어져있지 않은 곳에 쓰러져있는걸 감시탑에서 봐서, 비상버튼으로 열어 데리고왔다고 했다. 시체일 수도 있었는데 무슨 감으로 그걸 데리고 오겠다고 게이트를 열었는지, 걔도 참 멸망한 세상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애였다. 병동으로 바로 실려와서, 비어있던 산소캡슐에 일단 집어넣고, 15시간만에 깨어나 나왔을 때. 걔가 나랑 마주친건 딱 그 때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내가 앞에서 걔가 나오는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한 6시간쯤을 앞에서 그냥.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멸망한 세상에서 무슨 군번줄 같은걸 새겨서 가지고 다닐 수 있을리가 없었으니까, 그건 최소한의 인식표 같은거였다. 캡슐에 넣기 전에 소지품을 봤는데 그게 있었고, 당연히 이름도 있고. 그런 경우가 사실 흔치는 않았기 때문에 석민이가 신기하다는듯 말해줬었다. 이름이 뭐였는데? 그건 그냥 맥락에서 나온 평범한 질문이었다. 권순영이라고 써있던데. 그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잘 상상이 안되지만, 석민이는 나보다도 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아는 이름이냐는 말을 했다. 아. 어.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입술을 한 번 축이고. 어. 아마도. 그런 대충 뱉는 말 따위를 해서. 아마도라니. 권순영이라는 이름을 아냐고 들어서, 아마도라고 말한다고? 멸망이 많은 것들을 뒤바꿔놓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충격적인 변화였다고 느낄 만큼이라.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게 본인의 것이라고 확정짓기는 힘들다. 하지만 사진도 훼손되지 않았었고, 석민이가 보기에는 본인 것 같다고 했었다. 당연히 동명이인일 수도 있었지만, 석민이가 나랑 동갑이었다고 했다. 96년생. 그래도 그런 우연이 있나? 이런 멸망에서 살아남아서, 호흡기도 박살난 애가 하필이면 내가 있는 17번 쉘터의 앞에서 쓰러진 다음 구조당할 확률. 

 

뭐, 2020년대에 갑자기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져서 인류가 멸망할 확률도 그리 높지는 않았겠지.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이후로는 확률 같은 수학적인 것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좀 구름에 뜬 기분이어서. 그 애가 들어갔다던 산소 캡슐까지 걸음을 옮겼다. 반만 투명한 캡슐에 호흡기를 차고 누워있는 그 애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게 됐고. 그냥, 믿기지 않기도 했지만. 눈 떼면 없어질 것 같기도 해서였다. 그 애가 내 앞에 있는게 말도 안되는 일은 맞으니까.

 

고등학교 동창이다. 대충 뭉그러뜨리자면 그런게 다였다. 졸업하면서 내가 연락을 끊었다. 대학도 갈라졌으니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권순영은 좀 서운했을지언정 많이 바쁜가보다 했을거다. 일부러 끊었다는걸 눈치챌만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반 년 정도나 지나서 멸망이 떨어졌으니까. 그 다음부터 연락이 안되는 것 따위는 당연한 일에 가까워서. 그렇지만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당사자마저 그걸 모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권순영을 내 인생에서 끊어내고자 했다. 떨어지는 유성 따위를 목도하고 나서는 그런 것도 사실 잊었었지만― 아니, 그랬었나? 어쩌면 내려온 재앙에 대해 떠드는 사이비 종교인들의 말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잘 때에마저. 한 번도 잊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캡슐에서 나온 권순영은 나를 한 번에 알아봤다. 그러지 않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3년 내내 붙어다녔던 단짝의 얼굴을 그런 곳에서 갑자기 봤는데, 못알아볼 수도 없는거지. 권순영은 나에 비해 날 잊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당연했다. 지훈이야?? 삽관을 했던터라 그렇게 소리를 함부로 내서는 안됐는데, 네 글자를 말하고는 당연히 죽을 듯이 기침을 토했다. 나는 그게 진정 될 때까지 그 애의 등을 두드리며 기다렸다가, 앞에 앉아있던 6시간 내내 고민하고 결심했던 첫마디를 냈다. 오랜만이라고.

 

기본 지급되는 물이랑 건빵 따위를 주워먹고, 일어났다는 소식에 온 석민이하고도 얘기를 하고, 권순영은 쉘터에 머무는 결정을 했다. 갈 곳이 있었던거라면 다시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런 곳은 없다고 했다. 원래는 종로쪽에 있던 쉘터에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원래도 여기로 오려고 했다고 했다. 이송부대에 끼어있었는데 갱 따위에게 습격을 당해서, 그걸 유인하느라 혼자 떨어졌었다고. 나중에 알았는데, 같이 살아남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거주지를 옮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같은 곳에 있다보면 계속 생각나서라고 했었나.

 

이송부대에게서 깡패들의 시선을 돌려주려고 혼자 나서다니. 죽고 싶었는데 잘됐다는 심정으로 했을법한 행동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그냥, 이송부대라고는 해도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얼마 없어서 그랬다고. 여기에는 병원시설이 있으니까 이송해 오던 사람들도 거의 아픈 사람이었고, 멀쩡한 사람들도 아픈 사람들의 보호자거나 했으니까. 자기는 이송하기로 한 환자중에 한 명이 이르게 죽어서 운 좋게 낀 상황이었으니 제가 나서는게 맞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발은 빠르니까 대충 눈 돌려놓고 걸어오면 되겠지 했단다. 거의 성공 했었는데, 도망치다 석궁에 호흡기가 박살나는 바람에. 그래도 진짜 운 좋지 않냐. 어떻게 석민이한테 딱 보여서 잘 실려오고. 너까지 만나고.

 

체류증을 얻는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쉘터가 쉘터로 명명되기 전부터 있었고, 사지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연줄이 있었다. 내 동창이라고 하니까 심사는 형식적으로만 하고 바로 도장이 찍혔다. 어차피 인구도 얼마 없고 그중 반절은 환자인 곳이라 노동력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의 체류가 어려울 일은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맙다고 날 안아줬다. 만난 것도 진짜 운명 같은데, 너무 고맙다고. 나는 그냥… 뭘 이런걸 가지고 그러냐고 어색하게 토닥였을 뿐이지만.

 

"대충 닦았어! 지붕에 쌓인건 쉘터 돌아가서 닦아야 할 것 같아."

 

호흡기를 벗고 머리를 털어댄 권순영이 올라온다. 나는 어느정도 닦인 앞유리를 보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미아쪽으로 내려가면 주유소가 있으니까 거기서 기름 채우고, 남아있는 양을 체크해서 보고서에 써넣어야한다. 기준치 이하로 내려가면 다른 곳에서 보충이 올 터였다. 17번 쉘터는 병원 시설이 있다는 이유로 환자를 보내오는 대신 여기저기서 없는 자원들을 긁어모아 가져다준다. 대신이라고 해야하나. 그게 조건이니까. 환자 몇 명 당, 혹은 위중상황을 기준으로 해서 기름이나 식량, 기계 부품등을 거래한다. 이런 멸망한 세상에서도 가족이나 친지를 죽게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많았다. 17번 쉘터는 수술대와 멸균시설을 인질로 그런것들을 갈취해 쌓아놓는다. 실제로는 뭘 어떻게 하기엔 너무 늦은 사람들이 8할이라, 편하게 죽을 수 있게 침대를 내어주는게 다인데도. 그래도 그런거라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여기서 일하다보면 굶어죽을 걱정은 없다. 엄청난 행운.

 

시동을 켜는 소리도 이제는 익숙하다. 대충 침대에 걸터앉자 좀 흔들릴거라는 말이 들렸다. 닦으면서 앞도 봤는데 저번에 전봇대 넘어진 곳이 아직 복구가 안된 것 같다고. 울퉁불퉁한 길을 가는건 상관 없었지만, 어항이 걱정이기는 했다. 찌푸린 얼굴로 어항을 보고 있는걸 봤는지 권순영이 걱정말라는 말을 한다. 내가 완전 스무스하게 운전해줄게. 올해의 베스트 드라이버 호칭과는 억광년은 떨어져있는 주제에, 큰소리치는게 웃겨서 웃어버린다. 기어 잘못 넣어서 후진이나 하지마라.

 

베스트 드라이버는 아니더라도 운전을 못하는건 아니다. 멸망이 왔는데도 운전면허가 없는 나보다야 훨씬 나은게 당연하지. 운전실력과는 상관없이 덜컹대며 출발하는 캠핑카 안에서, 나는 여전히 멈춰있는 물고기를 봤다. 정말 작은 물고기.

 

아까는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겠다고 했었지만. 권순영이 물고기를 발견한건 사실 당연한 일 같기도 하다. 그 애가 아니면 누가 찾았겠어? 나? 어림도 없지.

 

권순영은 바깥에 나올 때마다 물줄기를 찾는다. 한강이든 우이천이든 중랑천이든 이름은 상관 없었다. 가까운곳에 있으면 들러서 캡슐을 뿌리고는 더러운 물을 한참 본다. 꼭 무언가를 찾는 것마냥.

 

17번 쉘터에는 '자원탐사팀'이 급하지 않다. 말했듯이, 내가 있는 쉘터는 환자를 인질로 다른 곳에서 자원을 끌어온다. 근처의 대형마트나 강가 같은 곳에서 자원을 찾는건 우선순위가 그리 높은 일은 아니었다. 물론 필요는 하지. 잉여분이라는건 있는게 무조건 좋은거니까. 특히 멸망의 다음에는.

 

그러니 나올 수는 있지만. 그리 인기있는 일이 아닌건 당연했다. 쉘터를 짓고 게이트를 봉쇄한 이유는 바깥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호흡기 없이 숨을 열 번이라도 들였다 내쉬고 나면 목에서 모래가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게이트는 일주일에 한 번만 열린다. 일주일 동안 차 하나에 의지해서 더러운 바깥을 전전하다가, 협정 따위는 신경 안쓰는 갱이라도 잘못 만나면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보통은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하는 일이었다. 나도 몇 번인가 순번이 돌아와서 나가 본 적이 있었지만― 권순영이 오고나서는 좀 달라졌다. 이제 나는 정확히 격주마다 번갈아가며 바깥에 나온다. 탐사 지원을 받을 때마다 매 번 손을 들던 권순영이랑 같이.

 

바깥에는 어떻게 나가? 나는 정확히 그런 물음을 받았을 때를 기억한다. 의미없이 날짜를 세던 새벽.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권순영이었다. 그렇게 드문일은 아니었는데. 어차피 같은 빌라 맞은편에 살고있으니까 찾아오는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몇 년 동안 비어있던 곳에 내 동창 자격으로 체류권을 얻은 애가 들어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그리고 권순영은 아직 쉘터에 적응중이라 있던 사람에게 물어볼게 많았다. 나는 딱히 거절할 명분도 찾지 못한채 매번 질문에 답해주거나 함께 밥을 먹고는 했는데, 그 날은 밥도 안먹을 새벽에 문을 두드려서 좀 놀라기는 했었다. 사과는 했었다. 미안, 새벽에. 근데 저녁에 안물어봤다는게 생각나서.

 

바깥에 어떻게 나가냐니. 들어온지 3일이 채 안됐으면서. 엄청나게 복잡한 표정을 했더니, 걔가 그랬다. 무슨 쉘터를 탈출하겠다는게 아니라, 바깥에 뭐 찾으러가는 크루 같은게 있냐고. 발전기 돌릴 기름이나 식량 같은거. 생태탐사팀이나. 나갔다가 돌아오는거 있잖아. 있냐고 묻길래, 자원탐사팀 말하는거냐고 했더니 얼굴이 밝아졌다. 있어? 지원 어디서 하면 돼?

 

들어오고 싶어서 아우성인 사람들만 봐서 그런지. 어떻게 나가냐고 묻는 사람은 난생 처음이라 대답에 시간이 좀 걸렸다. 지원 같은걸 하는게 아니라 여기서는 보통 돌아가면서 하는데, 말하면 낄 수는 있을거라고. 보통 한 달에 한 번이고 바깥에 날씨가 안좋으면 더 미뤄지기도 한다고 했더니 엄청 진지하게 들었다. 지혜 누나한테 일단 물어보면 될텐데. 제가 듣기에도 마지막 말은 두려움에 잠겨있었다. ―나가게?

 

걔는 떨림 같은건 전혀 읽지 못했다는듯, 그게 무슨 이상한 질문이었던 것처럼 웃었다. 계속 안에 있어봤자 뭐해.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안에 있어봤자 뭐하냐고? 다음에 나는 생각은 이랬다. 그럼 바깥으로 나가서 뭘 할건데?

 

안에 있을 이유는 있다.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환자는 많지만 비례해서 일할 사람은 부족해서, 맡길 일은 두 손이 모자라게 있다. 나도 기본은 데이터 기록 업무를 했다. 전산은 믿을게 못된지 오래돼서 거의 수기로 하지만, 그런것들을 관리할 사무업무도 필요한 일이기는 했다. 오늘은 몇 명이 어떻게 들어왔고 몇 명이 죽었고, 식량이나 다른 자원들의 총량이 어떻게 되는지, 뭐 그런 기록 업무들. 잘해서는 아니고 여기 들어와서부터 계속 했던 일이라 맡고 있었다. 음대생이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할만한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였다. 그 외에도 권순영처럼 사지 멀쩡한 청년이 받아서 할 일은 무한할텐데. 통신탑도 사람이 필요하고, 온실도 그렇고. 그런데 안에 있어봤자 뭘 하냐니.

 

자원 탐사팀은 전혀 급하지 않다. 다른 곳에서는 하루에도 몇 팀 씩 바깥으로 보낸다는데, 우리는 그런 것보다는 우리의 인질들이 더 중요했다. 그게 있으면 밖에 안나가도 되니까 그랬다. 그런데 굳이 바깥으로 나가겠다니. 권순영은 알려줘서 고맙다면서 돌아갔다. 그러더니 다음날에는 정말 지혜 누나랑 얘기를 해서 나가기로 했단다. 다음주에 갈거라고. 나는― 뭐라고 했더라? 잘됐네라고?

 

그 다음주에, 나는 다른 사람들 몇 명이랑 함께 봉고차 따위에 앉아서 더러운 창문을 넘겨다보고 있게 됐다. 옆에는 권순영이 앉아서 앞좌석에 있던 영은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종로쪽에 있을 때는 아버지 몸이 편찮아서 자주 나가지 못했다던가, 그런 이야기. 옮기는 김에 하고 싶었는데 잘 됐다고. 근데 돌아가면서 하는거라니 지훈이 아니었으면 차례까지 그냥 기다려야했을거라던가.

 

그렇게 바깥 지리를 대충 설명받은 다음부터 권순영은 꼬박꼬박 손을 들었고, 그 애가 나가면 나도 나가고, 그러다가 우리는 아예 전문가 따위가 되었다. 크게 식량이나 옷등을 실어오는 탐사팀은 여전히 한 달에 한 번씩 꾸리고, 우리는 스켓처럼 연구에 필요한 자잘한 것들이나 바깥의 상황을 보는 팀이 됐다. 우리가 바깥 상황을 수시로 보면 탐사팀도 더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게된다. 지도도 만들 수 있고, 대처법도 다양해지고, 기타등등.

 

강가만 보이면 정화캡슐을 뿌리게 된 것도 별동대가 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시제품인데 대책본부에서 쉘터마다 트럭을 한 대씩 보내는 물건이었다. 자원탐사나 바깥에 나가는김에 뿌려달라고 하는거니까 우리가 가져가는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싣고 다니는 것과 별개로 나는 이런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건지 회의적이었는데. 권순영은 자진해서 몇 박스 씩 캠핑카에 실어놓고는 다 쓰면 창고에서 부지런하게 가져다 놓았다. 외에도 소독제 따위를 살포하는 헬기가 뜨면 고개를 빼고 구경한다던지. 짐승들의 흔적이 있는지 풀밭을 빤히 본다던지. 그런 일을 했다. 나는― 음. 옆에서 보고 있고. 일주일마다 번갈아서 그렇게.

 

“아이씨.”

 

시동이 멈춘다. 가다가 멈추니 어항의 물이 넘칠듯 아슬아슬하게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놀라서 유리를 붙잡았다가 뭐냐고 물었더니 권순영은 이미 호흡기를 집어들고 있었다. 깡패새끼들이 막고있네. 옆 좌석에 놓여있던 가스총을 챙기는 손에 신경질이 가득해서는.

 

“여긴 완충지대도 아닌데 뭐하는거래.”

“몰라. 뭔 바리케이트 같은거 쳐놨어. 학산놈들 같은데.”

 

그나마 말이 통하는 부류였는데. 이렇게 뜬금없는 곳에 바리케이트를 쳐놓다니 이상했다. 미간을 구기자 별거 아닐거라는듯 권순영이 손을 내젓는다. 얘기 좀 해보지 뭐. 쉘터랑 전쟁내려고 막아놓은건 아닐테니까 괜찮을거라고. 쉘터랑은 너무 멀기도 한 곳이니 아마 저희들하고는 상관없는 일일터였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나오는 정기 탐사팀이랑 다르게 우리는 일주일 간격으로 나오니, 저희들을 고려 못하고 도로를 점거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보통은 탐사에 맞춰 열어두다가 닫아놓은걸 수도 있다. 우리도 어항이랑 황사 때문에 일정이 밀리기도 했고.

 

같이 내리려고 했는데, 권순영이 턱짓으로 운전대를 가리켰다. 별거 아닐 것 같긴 했지만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수신호가 있으면 달려서 탈 수 있을 타이밍에 맞춰 시동을 걸고 차를 꺾어야했다. 운전면허도 없고 운전도 못하지만 권순영이랑 나오게 되고 나서는 배울 시간이 있었다. 여분의 가스총만 들고 운전대로 가는 동안 권순영은 총을 안주머니에 넣고 호흡기와 탱크를 맸다. 물고기 좀 잘 보고 있으라느니. 내리는 동작에는 겁이라고는 없어서. 이럴 때는 좀 무서워하라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입 밖으로 낸적은 없어도.

 

바깥에도 사람들이 있다. 보통은 쉘터에 들어갈 자격이 안되거나 들어가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당연히 생존에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쉘터가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는건 아니었다. 범죄행위로 쫓겨난 사람들도 있고, 자원이 부족한 쉘터에서 대부분 시행하는 공동배분을 마음에 안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 이유로 박해받다가 탈출해서 작은 유사 공동체를 만든 사람들도 있다. 

 

탐사를 하면서 마주치는 것은 대부분 갱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벌 따위가 여러개로 나뉘어져서는 '영역'을 주장하고는 하는 사람들이다. 권순영은 그냥 깡패새끼들이라고 부르고는 하지만. 솔직히 반박하기는 힘든 호칭이긴 했다. 쉘터를 공격하지 않거나 다른 갱들의 공격에서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식량 따위를 뜯어가거나, 쉘터끼리 자원을 교환하는 이송부대를 노리거나 하니까.

 

보통 근처의 갱들하고는 쉘터단위로 협정을 맺으니 탐사중에 공격받는 일은 없는데. 친한 세력은 오히려 보호따위를 자처하기도 하고. '학산'은 좀 중도적인 입장이지만, 17번 쉘터하고는 그리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다. 약품도 자주 교환하니까. 수유에서 미아로 내려가는 길목은 정해진 루트라 원래는 이렇게 막아놓으면 안되는건데.

 

닦긴 했지만 좀 희뿌연 앞유리 너머로 권순영이 양손을 앞으로 들고 걸어간다. 상징색을 칠해놓은 바리케이트에서 똑같이 호흡기를 쓴 두 명이 나왔는데, 권순영은 엄지로 캠핑카를 가리키면서 태연하게 입을 움직였다. 분위기상 갑자기 쇠파이프를 후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약간 초조해지는 바람에 입안이 씹힌다. 역시 같이 나갈걸 그랬나. 운전 잘하는건 권순영인데 아예 걔를 남겨두고 내가 나가는게 낫지 않았을까. 별 생각이 구름처럼.

 

뒤를 힐끔 쳐다보니 어항이 그대로 있다. 뭔 물고기를 보고 있으라는 말을 하는지. 황당한 요구였지만― 그 애한테는 의미가 클 것을 아니까. 저 손톱만한 물고기는 권순영이 찾아 헤매던 것이다. 쉘터 안에 있어봤자 찾을 수 없는. 그 애가 바깥에 나오고 싶어했던 이유.

 

나와 그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마치 사이에 강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강의 이쪽과 저쪽.

 

멸망한 세상에 남은 인류를 딱 두 종류로 나누자면, 내가 세울 기준은 이랬다. 한 쪽은 있는 것에 집착하는 부류. 다른 한쪽은 없는 것을 찾는 부류.

 

그리 큰 차이는 아닐지도 모른다. 둘 모두 적어도 살아가는걸 목표로 하고 있긴 하니까.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비율이 훨씬 높을 것이다. 어긋난 톱니바퀴가 방법도 모르는채 대충 굴러가고 있다. 온갖 인간군상이 섞여서, 모두가 두 손이 모자라도록 그래서는 안되는 선택들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끝이 가까운 것처럼.

 

나는 지원 물품들 때문에 이미 죽은 환자가 살아있다거나 상태가 호전 되었다고 거짓말하는 병동의 상황을 알지만, 그저 묵인한다. 권순영은 호흡기에 금이 간 누군가가 밖에서 급박하게 차의 창문을 두드려도 잠금쇠를 열지 않는다. 길에서 쓰러진 사람을 봐도,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서 구조된걸 앎에도 그저 엑셀을 밟았다. 그리고는 그런 일에 어쩔 수 없다는 문장을 붙여 합리화를 한다. 거짓말 하지 않아도 자원은 이미 충분하고, 우리에게 잉여분이 생기는 만큼 다른 곳은 더 힘들어진다는걸 알아도. 지금 차를 세워 안으로 데리고 오면 사람 하나를 살릴 수 있다는걸 알아도. 멸망해버린 세상 따위를 면죄부로 삼았다. 지금은 충분하지만 언제 모자라질지 모르니까. 연기하는 갱이라면 들였다가 다 죽을지도 모르니까. 재앙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곰팡이처럼 불안과 불신이 자란다. 이토록 작아진 세계에서도 더 빨리, 더 많이.

 

공통점은 있지만. 그렇다고 차이점이 두드러지지 않는건 아니다. 권순영은 없는 것을 찾고, 나는 있는 것에 집착한다. 나는 안전한 안을 지키는데에 시간을 썼고 권순영은 안에는 없는 것을 찾아 바깥으로 돈다. 그건― 거의 관성이었다. 사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도 똑같았던것만 같다. 그저 좀 더… 드라마틱해졌을 뿐.

 

고등학생 때는 그 관성이 힘들었다. 그래서 권순영을 인생에서 내쫓기로 했었던 것이다. 그냥… 있는 것을 지키는데에 전전긍긍하는게 이렇게나 힘들다면. 없애버리는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영영 잃어버린줄 알았던게 돌아와버리고 난 후로는. 그러니까.

 

얘기가 길어져서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린다. 의미도 없는 시계를 힐끔대니 무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보고라도 하는게 나을까? 권순영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해도 충분하다는걸 알지만. 예민해지는 신경을 누르려 숨을 깊게 쉰다. 권순영이 지금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고기도 찾았잖아. 그래. 찾았으니까.

 

대화가 끝났는지 권순영이 돌아온다. 운전대에서 벌떡 일어나 뒷문을 돌아보니 평범하게 문이 열렸다. 그새 먼지가 쌓인 머리를 털고 호흡기를 뺀 탐사대원이 문을 잠근다. 에휴. 과장된 한숨 한 번.

 

“동배 쪽 놈들이 기습하려고 한댄다. 위험해서 못지나가니까 어디 빠져있으래. 내일 아침까지는 자기들이 정리하겠다고.”

 

기름도 모자란데 어딜 빠져있으라는건지. 얼굴을 구겼더니 권순영이 손을 내저었다. 그냥 아까 나온 롯데마트로 돌아가서 주차장에나 대고 있자. 아침에 돌아왔는데도 이상태면 그냥 쉘터로 돌아가야지 뭐.

 

게릴라전이 터질거라면 내일 아래쪽에 있는 주유소에 기름이 남아있을지도 불분명했다. 어항 같은거 안찾았으면 바리케이트 치기 전에 통과 했었을 것 같은데. 미안하다고 하길래 됐다는듯 고개를 젓는다. 괜히 시비털리기 전에 말대로 주차장에나 가있는게 낫겠지. 비켜주자 마른 몸이 익숙하게 운전석으로 들어간다. 어항 좀 잡아주라. 불똥 튀기 전에 빨리 가야할 것 같아서.

 

짧게 후진했다가 방향을 꺾자 천 너머까지 왈칵 쏟아진 물이 손을 덮친다. 짧은 사과에 대답 대신 손을 털고는 비뚤어진 조명을 고치자 물고기가 앞 뒤를 이리저리 바꿨다.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생각하면 좀 미안한 마음도 있다. 다시 풀어주는게 도리라고 생각하기에는 원 거주지도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거기나 여기나 이 물고기한테는 별 상관없는게 아닐까? 물이 맑던 더럽던 그저 갇혀있는거니까. 희망이라기에는 너무 작고 연약해서, 폭풍이 잦기 전의 3시간 동안 권순영이 이것을 보고만 있었던 것을 납득한다. 쓸려가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있으려 필사적인 물고기.

 

“주차장 캠핑이라니. 옛날이었으면 인스타 라이브감인데.”

 

도로의 차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세상에서 네가 농담을 한다. 인스타는 커녕 장비 없이는 인터넷도 연결 안되는 시대여도. 겨우 5년 전이 '옛날'인 것도. 그런 것들이 멸망의 단면인걸 알아도 웃을거리를 찾는다. 나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네 작디작은 희망이 쏟아지지 않도록 안고. 그런걸 농담이라고 하냐는 말을 하는 대신 위에 올려둔 램프를 쳐다봤다. 조명 가져왔으면 끝내줬을텐데. 돌려준 농담에 네가 웃고, 다시 손에 물이 튄다.


***

볼에 차가운게 닿아서 잠에서 깬다.

 

반사적으로 나올 법한 욕도 없었다. 그냥 덜 깬 머리를 부여잡고 부스스하게 일어나서,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아는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환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과 커튼. 콜라 캔을 든 웃고있는 권순영.

 

“다음 체육.”

 

칠판 위에 걸려있는 시계의 분침이 정각 5분 전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욕을 좀 하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다. 기지개 쭉 켜고, 엎드려있느라 눌렸던 머리도 털고. 권순영은 벌써 체육복 차림이었다. 아마 나 빼고는 다 그 상태겠지. 나도 이미 바지는 체육복이라 5분 전에나 깨운 것 같았다. 하품이나 하고 일어나서 사물함을 뒤지러 간다. 귀찮아 죽겠다는 심정이 걸음마다 뚝뚝.

 

“뭐한대.”

“농구 한다던데.”

 

눈을 가늘게 했더니 깔깔대는게 꽤나 열받기는 했다. 하기 싫으면 내 간호나 좀 해주라. 애들은 이미 팀 갈랐다고 하는 말이 농담치고도 뻔뻔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농구 할거거든? 간호는 뭔 간호야. 다리에 화려하게 깁스나 감고있던 권순영은 되도않게 달라붙어 너 없으면 앉아서 뭐하냐고 징징대는 소리를 냈다. 휴대폰 해라. 말은 대충 해놓고 반팔 위에 체육복을 껴입는다. 어차피 자리 지켜줄거 알고 있을거면서 뭐하러 부탁까지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수준으로 눈치채지 못하는건 거의 행운에 가까운 일이지만.

 

“내가 뇌물도 사왔는데 그러기야?”

 

체육복 지퍼나 잠그고 눈썹을 휘니까 아까 볼에 댔던 콜라캔을 보란듯이 든다. 참내. 웃긴 뇌물이긴 했지만 다리 사정을 생각하면 이거 사겠다고 매점까지 내려갔다 온 정성을 봐주긴 해야했다. 어차피 자기 먹을거 사러 가면서 산거겠지만. 선심 쓴다는듯 캔을 받았더니 신나서 목발을 든다. 내려가 있자. 종치고 내려가면 늦었다고 뭐라하잖아.

 

종이 친 뒤에 내려가면 늦는건 권순영이 목발을 짚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 심한 부상은 아니었고, 나으면 재활도 거의 필요 없을만큼이라지만 더 악화되지 않게 감아둔거라고 했다. 춤 멀쩡히 출거래. 건드리면 웃기게 엄살을 피우는 정도라 걱정할건 없었지만, 목발 짚고 생활하는게 꼭 편하지는 않아서 내가 거의 전담처럼 맡게됐다. 가방 들어주고 계단 내려오는거 기다려주고. 웬 유난인지 싶을 정도로 해주고는 같이 깔깔대는게 일상이었던 때.

 

“너 한다던 작업은 끝났어?”

 

체육관까지 내려가려면 3층을 내려가야한다. 콜라캔을 주머니에 숨기고 속도맞춰 내려가는 계단이 길게 느껴졌다. 다른 애들이 청테이프 위에 낙서해놓은 것들을 읽으며 대충 끝냈다는 말을 낸다. 어제 새벽에. 그랬더니 진짜냐는 목소리가 높아져서.

“들려주라.”

“그래봤자 까여서 수정해야 할걸.”

“내가 들어보고 진짜 그럴지 알려줄게.”

 

네가 쌤이냐고 면박을 주니 제 센스를 못믿는거냐는 말이나 한다. 그럴리가 있겠냐는 답은 속으로만 하고, 말 대신 주머니에서 이어폰이나 좀 만졌다. 어떤 면에서는 선생보다 더 까다로운 애니까. 권순영을 통과하면 평가도 통과한다. 들려줄 생각이야 처음부터 있었지만, 선생이고 권순영이고 통과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곡이긴 했다. 요즘은 과제도 아닌 곡에 정신 팔려서 뭐든지 좀 조악해지니까. 아무래도 불합격이겠지. 원인에 대해 생각하며 하얀색일 선의 꼬인 부분을 만지다가, 괜히 목소리가 툭, 걸려나온다. 있다 수업 끝나고 들려줄게. 권순영은 그걸로 함박웃음을 지어서. 나는 또 그게 뭐가 귀엽다고 같이 웃기나 하고.

 

일주일만 있으면 방학이다. 기말도 끝났고, 수행평가 할 것도 안남아서 체육시간은 그냥 방임이었다. 축구 피구 발야구. 공만 주면 야생동물 마냥 뛰어다니는 애들이니 체육선생도 참 편할 시기였다. 양아치들이 몰래 빠져나가지 않는지만 감시하고, 다치지는 않는지 봐주는 것만 해도 훌륭한 선생이라고 말할만 했다. 요즘의 체육쌤은 대충 의자 가져다놓고 휴대폰이나 보는걸 봐서 그런 꾸밈말은 필요 없는듯 했지만.

 

뭐 배울 때 다쳤으면 교실에 남겨두고 왔어야했을텐데. 어차피 노는 시기라서 다리 한 쪽을 못써도 상관없이 체육관이니 운동장이니 내려온다. 그리고 난 배울 수업이 없으므로 걔가 불쌍한 눈으로 팔을 잡으면 변명거리도 찾지 못하고 옆자리에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다리 멀쩡해도 공놀이는 더럽게 못하는 누구랑은 다른데도. 그래서 그게 불만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는게 상식적인지. 요즘은 그런 것을 생각하는데에 많은 시간을 쓴다. 그럼 좋겠냐고 하는게 맞는거겠지? 실제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아도…….

 

"오늘 석식 뭐지?"

"김치볶음밥 계란국 장조림 오이김치."

"네가 있으면 급식표가 필요 없어서 좋다."

 

급식표 안외우는 남고생도 있나? 아마 나한테 맨날 물어보는 권순영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체육관에 들어서자 벌써 몸풀기랍시고 공을 튕기던 녀석들이 대충 인사를 건넨다. 권순영 먼 길 왔네. 교실에서 쉬지 그랬냐는 말에 권순영이 멋대로 팔짱을 낀다. 지훈이 따라와야지 뭔 교실이야. 혼자 두려고 해도 악착같이 따라오지 내가. 저 이지훈 거머리 언제 떼어내냐느니. 아마 내년에 반 갈라지기 전까지는 불가능 할거라는 얘기들을 넘겨 들으며 앉을만한 곳을 찾는다. 무게가 실린 몸을 거부하는듯 한 번 털면 되도않는 애교를 부리며 붙고는 한다. 그러면 나는 그걸 내버려두고. 어차피 떨어뜨릴 생각 같은건 해본 적 없는 것 같다. 처음에야 서울 애들은 다 이런지 징그러워했지만, 정확히― 이런 접촉이 전혀. 징그럽게 느껴지지 않았을 때부터는. 어쩌면 이 총체적인 상황이 그게 무슨 신호인지도 모르고 속 편하게 내버려둔 업보일지도.

 

멋대로 붙어서 떨어지기 싫은 것 처럼 굴지만, 벽을 등지고 대충 앉으면 언제 달라붙었냐는듯 떨어진다. 그냥 장난인거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웃기려고 한건데, 계속 붙어 있으면 웃기지 않아지니까. 너는 아무렇지 않게 기지개나 켜다가 기대놓은 목발이나 쳐서 넘어뜨리고, 나는 그럴줄 알았다는듯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 전에 목발을 잡아주고. 그러면 너는 되도않게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방금 완전 멋있었다. 예전에는 그럼 몰랐었냐고 농담이나 했었는데. 요즘에는 대꾸도 안하고 목발이나 도로 세워놓는다. 어쨌든 티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어쩌면― 사실은 티내고 싶은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직은.

 

놀다가, 졸린 표정의 체육선생이 휘슬을 불면 어기적대며 대충 줄 맞춰 선다. 농구 하라는 말도 없었는데 알아서 농구공을 가져온 야생 동물들을 앞에 두고 조례만 간단하게 한 선생이 알아서 하라는듯 손이나 대충 저었다. 아까 권순영이 했던 말은 농담인줄 알았는데, 진짜 미리 팀을 짠건지 일사분란하게 형광조끼 껴입는 모습이 좀 웃기긴 했다. 너 끼냐? 언제 빨았을지 짐작도 안되는 주황색 조끼에 머리를 밀어넣은 애한테 대충 고개를 젓는다. 졸려. 그리고 권순영 간호해야 하니까. 선생한테 보고도 안하고 그냥 아까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목발을 가리키니 애가 힘내라는듯 어깨를 친다. 니도 진짜 권순영 좋아한다. 웃어야 하는거 아는데. 못웃고 어깨로 주먹이나 쳤다. 티났을리 없다는거 알면서도 입이 좀 말랐다. 나도 진짜.

 

“진짜 안뛰어도 돼?”

 

나 구경하면 되니까 갔다와. 진심인지 말이나 대충 뱉고. 혼자 두려고 해도 악착같이 따라온다며? 쏘아붙이고 싶은건 삼키고 됐다는듯 공을 모아놓은 철망을 끌어온다. 졸리다는 말에는 납득한 표정이나 하고 있다. 졸렸어도 권순영 아니었으면 벌써 형광조끼 입었을텐데. 그런 핀잔조차 낼 용기가 없어서.

 

좀 잘테니까 공 날아오면 쳐내라던지. 나한테 그런 운동신경을 기대하는거냐고 하길래 믿으니까 부탁한다는 농담이나 한지― 몇 분이더라? 어쨌든 곡을 새벽에 완성했다는건 거짓말도 아니었고. 수업 그럭저럭 듣다가 점심 먹고나서는 숙면을 했는데도 졸렸던건 사실이다. 그래도 함부로 기대서 자지 않도록 공 모아넣은 철망을 지지대로 삼은 참이었다. 실수할까봐 걔한테서 90도 몸을 돌린채로 눈을 감았더니, 습관처럼 음계가 튄다. 고쳐야하는건 과제곡이었는데 생각은 다른 곡에나 몰리고 있었다. 역시 그 가사는 꼴사나우니까 빼버리는게 낫겠다던지.

 

사실 잔다는건 거의 변명이고. 눈 감고 얼마간은 애가 휴대폰 하다가 작게 웃는 소리나, 왔다갔다 하는 애들이랑 짧게 말하는걸―이지훈 자냐? 어어. 쬠 피곤한가봐―듣고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잘모르겠다. 안들키고 너에게 신경을 쏟을 수 있어서였는지. 책상끼리의 간격도 없이 붙어앉아 얘기하는게 싫어서였는지. 싫다기 보다는… 무서웠던 것이 더 맞겠지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좀 비겁하긴 해도.

 

별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앉아서 얘기를 해봤자 뭘 하겠어. 시덥잖은 얘기나 하다가 각자 휴대폰이나 하다가, 야식 얘기 그런거나 했겠지. 그런게 무서울 이유 같은건 어디에도 없지만― 꼭. 요즘에는 피하게 되는게 이상했다. 뭐든지 예민해지고 생각이 튄다. 권순영은 그냥 작업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거라고 생각하는지 틈만나면 노래에 대해 물을 뿐이다. 사실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기는 했다. 작업 때문에 계속 잠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니까. 걔가 생각하는 것처럼 학원에서 내주는 과제 때문은 아니지만…….

 

몸이 흔들려서 눈이 떠진다. 분명 자는척만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30명쯤 되는 애들의 신발 밑창이 끽끽대며 시장통마냥 시끄러웠는데도 어떻게 잠이 들었던건지. 졸려서 좀 저항하다가도 소리를 들어보니 여전히 끽끽대는게 수업이 끝난 것 같지도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는건지 싶어 잠이 깨버린 눈꺼풀을 드니 시야 가득 네가 있다. 아.

 

“진짜 대박이다.”

 

소리를 크게 낼 수가 없어서 낮게 호흡이 새는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뒤늦게 제 팔을 잡은 손과 지나치게 가까운 얼굴을 인식한다. 반짝거리는 눈. 그러면 안됐는데. 넋을 놓아버린 동안 네가 물러나며 다른게 보였다. 이어폰.

 

“만들었던 것 중에 제일 좋은 것 같은데? 이거 얼마나 걸렸다고 했었지??”

 

들고 있는건 내 휴대폰이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진짜 졸다가 깬거라 상황파악이 느렸다. ―좋은 것 같다고? 여전히 끼고 있는건 내 이어폰이고. 들고 있는 것도 내. 만들었던 것 중에 제일―

 

“뭔― 진심이냐?”

 

막 깬 목소리로 뱉어놓고 머리를 턴다. 어제 만들었던게 진짜 대박이니 만들었던 것 중에 제일 좋니. 백퍼 까여서 인신공격이나 듣고 발라드가 아니라 힙합으로 장르 변경 할 토대로 삼으려고 했던 곡을. 모르는 새에 맛이 갔거나 귀가 망가진건 아닌지 싶어 휴대폰을 받았는데. 화면에 써진 문자를 읽자마자 여전히 철망에 기대있던 상체가 벌떡 일으켜진다. 미친.

 

"아까 완전 거짓말 했던거지! 까이긴 뭘 까여. 대학이든 데뷔든 한큐에 가겠구만."

 

그렇게 안되면 대한민국이 잘못된거라느니. 신나서 떠드는 목소리는 안중에도 없는채로 정신없이 재생목록을 본다. 다시 확인해도 똑같이 떠있는 제목 때문에 손 끝이 끓어올랐다. 아직 꽂혀있는 이어폰 잭을 당장 빼버리자 눈이 동그래져서는. 그런 것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재생바는 이미 끝자락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는 소리였다. 이걸.

 

“이걸―”

“아씨 깜짝아. 갑자기 왜 끊고 그래? 나 한 번 더 들으려고―”

“뭘 멋대로 만진거야!!”

 

터진 목소리에 팔을 잡았던 손이 멈칫 굳는다. 근처에 있던 애들이 놀라서 돌아보는 것까지 봐서야 아차 싶어서. 눈이 동그랗게 변한 권순영을 앞에 두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괜히 아직 귀에 꽂혀있는 내 이어폰을 팍 뺏어버린다. 젠장. 제기랄. 알고 있는 모든 욕을 반복하면서 재생목록을 지워버린다. 그렇다고 파일이 없어지는건 아니어서, 뒤로가기를 누르니 다시 제목이 있었다. 아예 앱을 꺼버리고는 체육관 바닥에 화면을 엎어버리고 나서야 입을 뻐끔대던 권순영이 팔을 잡고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야, 미안. 너 자니까 할거 없어서.

 

“할거 없다고 남의 핸드폰을 만져?”

“아니, 네가 아까 수업 끝나고 완성한거 들려주겠다고 했으니까…….”

 

말이 흐려진다.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닐텐데. 핸드폰 멋대로 만지는게 한 두번 있는 일도 아니고. 데이터 없을 때 빌려쓰거나 하니까 잠금패턴이야 당연히 알고있다. 알려준 것도 나고 바꾸지 않은 것도 나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파일까지 들어가서 노래를 찾을줄은 몰랐으니까. 마른세수를 했더니 눈치가 보이는지 어깨가 붙는다. ―수업 끝나고 완성한걸. 대충 알겠어서 더 짜증이 났다. 자는척만 하고 있었으면 못듣게 막을 수 있었을텐데.

 

눈치를 보던 애가 다시 사과를 낸다. 좀 땡겨듣는거니까 괜찮을줄 알았다고. 싫어할거 알았으면 안했을텐데. 주눅든 목소리에 머리가 다 아파서 한숨이 나왔다. ―아냐, 그냥… 들려주려고 했던거 아니라서.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욕이 혀 끝에 고인다.

 

“아니야?? 최신순으로 본건데.”

 

어제 새벽에 끝냈다고 했으니까. 권순영 입장에서야 들려주기 싫은 것들은 안들으려고 맨 위에 것을 고른거겠지. 곡 길이도 완성한 것마냥 3분쯤 됐으니까 생각없이 들었던 것일터였다. 과제곡은 대충 해놓고 이거 수정에나 매달리다 잤던 새벽이 선명하다. 당연히 최신순으로하면 이게 제일 먼저 떴겠지. 첫번째 목록에서 내려가질 않은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억지로 호흡을 가라앉히고 엎은 휴대폰을 가져와 이어폰을 꽂고는 파일을 뒤져 다른 음원을 튼다. ―이거야. 어제 완성한건.

 가져가서 귀에 꽂더니 한 2분쯤을 가만히 듣던 애가 이어폰을 뺀다. 괜찮긴한데……. 가늘어지는 눈은 예상한 반응에 가까웠다. 그러니 전혀 놀랄 것도 없는데도. 휴대폰 화면 대신 절 보다가, 아랫입술을 부리마냥 내민 권순영이 이어폰을 돌려주며 말한다. 아까 들은게 진짜 좋았는데. 조심스럽지만 직설적으로.

 

입 안이 잘근대며 씹힌다. 안들키게 숨을 들이고, 내쉬는건 너무 커서 조절이 안됐다. 어렵게 감긴 눈 때문에 앞이 캄캄하다. 나도 알아. 단조로운 시인.

 

“하긴, 과제곡 같은걸로 내기에는 너무 마스터 피스더라.”

“그래서 안내는게 아니라―”

 

말이 막힌다. 그럼? 이라고 묻는듯한 얼굴에 돌려줄 말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안내는게 아니라. 마른침이 넘어간다. 그냥… 다른 사람 주려고 만든거라. 그래서 안내는거라고. 권순영의 눈은 아까보다도 커지고.

 

“그걸? 누구한테??”

 

목소리가 크게 나올만도 했다. 제발 조용히 하라는듯 입을 손으로 막았더니 그걸 억지로 떼어낸 권순영이 토끼눈으로 휴대폰과 내 얼굴을 번갈아봤다. 할 수만 있다면 권순영이 아니라 내 입을 때리고 싶었다. 무슨 그딴 말을. 심지어 권순영이 멋대로 휴대폰을 또 가져가려고 해서 바로 가로채버린다. 죽는다 진짜. 어금니 사이로 말해도 아랑곳하지 않아서는. 그리고 내 손에 있는 휴대폰만 빤히 쳐다보다, 한마디를 뱉었는데.

 

“고백할거야?”

 

덜컹. 몸 어딘가가 요동친다. 벌어진 입을 닫지도 못하고 있으려니 심각하게 휴대폰을 보던 시선이 올라왔다. **. 너무 당황해서 숨기지도 못한 열이.

 

그리고는 웃음이었다. 올라왔던 열도 한번에 내려가서, 멍하게 만드는. ―짓궂은.

 

“누군데?”

 

손이 말아쥐어진다. 비밀 얘기라도 하는듯이 들떠서, 말해도 괜찮다는듯 가까이 기울어지는 몸이 가벼웠다. 학원에 있는 애지. 나도 아는 애냐고. 나는 혀가 얼어붙고.

 

이야, 진짜 미쳤다 이지훈. 요즘 예민한 것 같더니 그래서였구만. 사랑이라니! 천재인건 알았는데 이정도일줄은. 듣자마자 막 눈물나고 그랬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가사도 진짜~ 음원으로 내면 멜론 탑100 바로 진출일 것 같았는데 좀 아쉽긴 하다. 줄 사람 있어도 나중에 내도 되는거 아닌가? 네가 지은거니까 네 결정이겠지??

 

열심히 떠드느라 표정을 못봐서 다행이라던가. 멍한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든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사과가 이번에는 훨씬 가볍게 나왔다. 아니, 아까 들으면서도 직접 겪은거라도 아니면 이렇게 못쓰겠지 싶었거든. 걔한테 처음 들려주고 싶었을텐데 미안하다. 화낼만 했네. 다시는 휴대폰 마음대로 안만질게. 진짜 맹세. 선서하듯이 한손이나 들고, 유쾌하고, 기쁜 얼굴을 해서. ―처음 알아서 뿌듯한거겠지. 이지훈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놀릴 생각도 좀 있을거고.

 

쩍, 하고. 뭔가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계곡이 넓어지는 것처럼.

 

어떻게 수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뿌듯한 얼굴을 멍하니 보면서. 사실은 누구에게도 들려줄 생각조차 없었던 그 노래를. 너무 날 것이어서 제발 더 포장시킬 수는 없을지 매달리며 밤을 세우게한 가사들을 듣고. 누구에게 줄거라는 말 하나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걸 바로 알아맞출 만큼의 그. 노래를 듣고. 네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바닥으로 눈을 내렸었나?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렸던 것도 같다. 남의 폰 안만지는거야 당연한건데 뭔 생색을 내냐던가.

 

“근데 고백할 때 주기에는 너무 슬픈 노래 같긴 해.”

 

헛웃음. 휘슬 소리가 울리자 운동화 소리들이 멈춘다. 안보고 있었는데, 팀을 어떻게 짠건지 점수차가 너무할 정도였다. 도망칠 곳이라도 찾은듯이 급하게 일어났더니 그제서야 그리 좋은 분위기가 아니라는걸 안 권순영이 눈을 굴리고. 다음에는… 뭐, 돌아갔겠지? 체육선생이 하는 말 듣고 해산해서. 교실로 올라가는 내내 권순영은 내 눈치를 보고. 나는 알면서도 머릿속이 꽉 차서, 도저히 너를 보지 못한채로.

 

“야 지훈아.”

 

리와인드처럼 훅, 정신이 차려진다. 뒤를 돌아봤더니 아직 체육관이었다. 과거의 권순영이 막 일어난 참이었던 나를 올려다본다. 뭐냐는듯 내려다보는 앵글이 낯설었다. 엎어놓았던 것 같은데, 왜인지 뒤집어진채 재생목록을 띄워놓은 화면과 비참하게 널브러진 줄 이어폰. 이상하게 또렷한 눈. 그냥 궁금한건데.

 

“제목이 왜 물고기야?”

 

눈을 깜박. 아.

 

“―알려준적 없었나.”

 

체육복은 간데 없고, 낡은 블루종을 입고 호흡기를 쓴 네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야 알려준적 없지. 묻지 않았으니까. 누군지도 모를 아이에게 줄 노래. 제목의 이유 따위를 궁금했을리 있겠어. 그래도 알았다면. ―안다면. 물을만한 질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답변에 대해 생각했던 수많은 밤이 있었으니까. 이 날 이후로 때려치웠었지만.

 

대답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시야가 흔들린다. 뒤를 돌아보자 체육관의 창문으로 유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희미한 비명들이 배경음처럼 흘러들어오기 시작해서. 다시 돌아본 앞에는 네가 그저 앉아있고. 

 

“강이… 있는 것 같아서.”

 

너는 대답하지 않는다. 너랑 나 사이에는. 그 때는 그게 그냥, 감정의 차이라던지 그런거였는데. 단지 이렇게― 그 강이 깊었을줄은 상상도 못했어서. 그래서 그렇게 지었다고. 물고기가 필요해서.

 

올려다보는 얼굴은 낯설기도 하고 낯익기도 하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꿈속에서는 꽤나 봤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네 표정이 상상되지 않을 때 내 무의식이 뱉어내고는 하는 표정. 숨을 내뱉었더니 서리처럼 입김이 낀다. 나는 그 얼굴을 한참이나 보다가. 유성을 내버려둔채 네 앞에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흉터와 생채기가 가득한 손을 쥐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인다. 호흡기 특유의 숨소리가 무엇보다 가까운 멸망이다. 눈을 감으면 툭 닿는 이마가 꼭, 정말로 꿈 다워서.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마음이 거부 당했던 적은 없다. 꿈은 여기서 끝나고, 이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야 고백한적 없으니까. 하지만 들려줄 준비가 되지 않았던 그 노래를 네가 멋대로 들었던 그 날에. 어쨌든 나는 모든게 끝나버린듯한 심정을 느꼈다. 그냥… 사실은.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아무 타격도 없었던 그 반응이라던지, 그런게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였던건― 네가 그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좋다고 난리를 피웠다가. 그게 사실은 누군가에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어서 만들던 노래라는걸 알았으면서도. 전부 알았는데도 그 노래가. 네 노래라는걸 몰랐다는게. 그게 가장.

 

완성은 한참 전에 했는데도 계속해서 수정을 거듭했던건 너무 티가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노래는 내가 생각했던 너와 나의 총체 같은거였다. 그러니까 듣는 순간 그게 네 노래라는걸 네가 알아버릴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어떻게든 더 포장할 수 없을지 머리를 싸맸던 것이다. 그렇게 대놓고 표현하는건 꼴사나우니까. 그래서 제목을 보자마자 하얗게 질렸던건데. 너는… 알거라고 생각 했었는데. 그 가정조차 부정 당한건 마치. 

 

그런 강을 건널 수 있는 물고기 같은건 없다. 그리고― 그리고. 없는걸 찾는건 너무 무서운 일이라서.

 

희망이라던가. 너한테 받고 싶은 감정이라던가. 왜냐하면 그런건 존재하지 않잖아 순영아. 세상은 멸망했고.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얼마나 원하던간에 그런건 전혀 신경쓰지 않으니까. 유성도 너도. 그러니까 있는 것만이라도 잃고 싶지 않은 것 뿐인데.

 

발밑부터 물이 차오른다. 비린 민물은 유성이고. 또한 이 날의 너다. 가지고 있던 것들이 구멍으로 새어나가 강이 된다. 나는 물고기 따위는 되지 못한채로 또 숨을 참고. 부표 같은 너를 잡아 간신히 버티기만 할 뿐인데. 너는 내가 있는 안이 아니라 바깥에 사로잡혀서.

 

가혹하다니 속 편한 소리지. 인류의 대부분이 죽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아놓고는.

 

유성이 떨어지기 전에 목 끝까지 물이 찬다.

 

일어날 시간이었다. 아가미도 무엇도 없는 그대로, 세상이 멸망했어도 변함없이.

***



총소리다.

 

가스총이 아니라 실탄이었다. 희미했지만 못들을 정도도 아니다. 하기사, 바깥은 끔찍할정도로 조용하니, 멀리서 벌어진 일이라도 다 들릴 수 밖에.

 

건조한 눈꺼풀을 들었더니 맞은편의 네가 검지를 입에 대고 있다. 나는 꿈의 잔상을 지우려고 느리게 눈을 깜박였는데. 졸려서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네가 웃었다. 좀 더 자. 입모양으로 만들어내는 글자를 천천히 받아들인다. 너무 오래 보고 있어서는 안되는데. 허락이라도 받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결국에는 너무 늦기전에 뒤척이듯 자세를 바꿔야했지만.

 

“화려하게도 하네.”

 

다 잠긴 목소리에 네가 또 웃는다. 공감의 말을 싣는 목소리도 낮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도 아니고 서울에서 무슨 총까지 써서 게릴라전을 하는지. 어디서 난건지도 모르겠고. 누가 얼마나 어떻게 죽을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죽음이 무뎌진 세상이었다. 그저 잠을 방해 받았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는. 더 가까이서 들렸으면 그야 당장 일어나 튀어야 했겠지만.

 

해가 밝으면 밑의 주유소가 어떻게 됐든 그냥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죽음에는 무뎌졌지만 굳이 시체 밭 위를 밟고 지나갈 필요는 없었다. 상황을 무전으로 쳐놓으면 좀 일찍 돌아가도 게이트는 열어주겠지. 그러면 일주일 동안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 ―가둬놓을 수 있다는게 맞나?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나가려고 하겠지만… 적어도 날 달고 갈테니까. 모르는 새에 없어져버리진 않겠지. 그게 이 웃기지도 않는 캠핑카의 포인트여서.

 

“안잤냐?”

 

잠은 달아났다. 어차피 총소리가 아니어도 깼을 것이다. 매트리스에 누워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잤다는 얘기가 될 수는 없다. 아까 한참 쳐다본 얼굴에 졸음이 없기도 했고. 너는 그렇다 아니다 말하는 대신 콧소리나 내고는 이불을 좀 부스럭댔다. 너는 꿈 꾸는 것 같던데. 등을 보이고 돌아누운채로 녹슬어 들뜬 캠핑카의 벽지를 본다. 악몽이야 매일 꾸는거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책임인마냥.

 

총소리가 잦아들면 일어나야 하니까. 대화를 잇는 대신 눈을 감았더니 다른 소리가 들렸다. 위잉대는 얕은 진동 소리가 불청객마냥 느껴진다. 원래 이렇게 시끄러운지. 세상이 멀쩡할 때는 어항 같은걸 집에 둬본적이 없으니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눈꺼풀을 열어 위쪽을 본다. 창백한 조명. 멈춰있는 물고기.

 

“예전에.”

 

충동적으로 낸 잠긴 목소리가 잠깐 막힌다. 목이 갈라져도 식용수는 아껴야하니까 목을 축일 수도 없었다. 너는 총소리에 신경을 기울이다가도 잘 못들었다는듯 반문하고. 나는 덕분에 말을 더 고를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 체육관에서 노래 들었던거 기억하냐고.

 

너무 두루뭉술하다.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텐데. 안들킬 정도로만 벽에 이마를 박았다가, 네가 내는 침음을 듣고 마음을 다 잡는다. 2학년 겨울 때 말이야. 니 다리 다쳤을 때.

 

고등학교 때의 얘기는 간간히 한다. 네가 하는걸 좋아하니까. '옛날 얘기'는 밖이 아무리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온기를 만들었다. 담임쌤 얘기라던지, 입시 때 얘기라던지. 가끔 가다 졸업하고나서 뜸해졌던 연락에 대해 네가 서운해했던 얘기를 하거나 한다. 나는 대부분 바빠서 그랬다는 말을 이리저리 늘려서 답하고는 했다. 틀린 말도 아니긴 했으니까. 실제로는 없는걸 찾는 대신 있는 친분이라도 지키려고 애썼던 1년이 너무 지쳐서. 그래서 끊었던거지만.

 

“2학년 겨울 때 들었던 노래가 한 두개인가?”

 

안봐도 눈썹이 올라가 있을게 훤하다. 그건 또 그래서,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랬었지. 네가 계속 들려달라고 했었으니까. 

 

“네가 제일 좋아했던거.”

 

그렇게 말했더니 너는 좀 생각하다가, 제가 멋대로 들었던 그 노래냐고 말했다. 어느정도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 키워드로 알아듣는다니. 네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

 

궁금해 했었다. 그야 그랬겠지. 그런 노래를 지으면서 생각했던 사람에 대해서. 학원에 있는 애라고 생각했던건 남고였으니까 그랬던거라, 그냥 착각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조금의 힌트조차 무서웠던 것도 있었고. 자기가 멋대로 들어버렸던거라 죄책감이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상대에 대해 물어본 적은 별로 없었지만― 항상 그 노래에 대해서 아쉬워하고는 했었다. 진짜 메이저 작곡가 되면 샘플링으로라도 쓰라던가. 얘기 듣는게 지겨워서 어느날은 그럴 일은 없을거라고 말했다. 왜? 진짜 말도 안된다는듯이 말하길래 다시는 언급 못하게 만들었다. 차여서. 그 한마디로.

 

"그 노래는 갑자기 왜?"

 

기억이라도 하는지. 그런걸 묻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체육관의 이후로는 한 번도 들어본적 없는 노래니까 아마 기억 안날 것이다. 하고 있대도 떠올리는데에 시간이 꽤 걸리겠지. 그러니까 굳이 묻는 대신 어항을 올려다본다. 제목이 물고기였거든.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가제에 불과하긴 했다. 좀 더 잘 맞는 제목이야 다른게 있었을 것이다. 권순영이 그걸 들었을 적에 그 노래는 실질적으로 완성 된 것도 아니었고, 내가 나 혼자 알아볼 수 있도록 붙인 타이틀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그 애 말처럼 진짜로 어디 내거나 써먹으려고 했다면 달라졌겠지. 그렇지만 그 곡은 그 상태로 더 수정도 되지 못했고, 어디에 내는 일도 없었으니까. 여전히 제목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아마 그래서 꿈을 꿨던거겠지. 네가 하필이면 그 썩어버린 강에서 물고기를 찾은 날이라.

 

매트리스끼리의 거리는 그래봤자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등을 돌리고 있어도 뒤에서 뭘 하고 있을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채로 내 뒤통수를 보고 있겠지.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내가 권순영이었대도 그랬을거다. 먼 옛날에, 짝사랑 했던 이름모를 누군가를 위해 지었던 노래를 떠올리는 새벽. 밖에서는 총소리가 나고, 인스타 라이브는 커녕 무슨 괜찮은 조명조차 없는채로 담요나 덮고 이른 추위를 견뎌야하는 종말.

 

움직이느라 부스럭대는 소리는 들었는데. 손에 무언가 닿았을 때는 숨을 멈춰야했다. 아무렇지 않게 내야만 했지만. 뒤를 돌았더니 손을 얽은 네가 웃지도 않고 누워있고. 눈에 어항의 조명이 비춰져서.

 

“있지. 이제 노래는 안만들어?”

 

뭔가 읽어내려고 정말 한참을 침묵했지만. 창백한 조명에 비춰진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고, 네 목소리는 너무 평온해서.

 

손에 심장이 있는 것처럼 박동이 커 마른침이 넘어간다. 그래도 들은게 질문이므로 대답은 해야했다. 눈을 피하는 기분으로 힘겹게 눈꺼풀을 닫고, 긍정을 낸다. 만들어봤자 담아둘 곳도 없잖아. 너는 대답이 없었는데, 눈을 감아버려서 왜그런건지 알 수가 없어지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종이 한 장, 바이트 하나하나가 이젠 귀해졌으니까. 그러니 멸망의 이후로는 노래를 만든적이 없다. 도구도 없었고, 담아둘 곳도 없고― 그리고. 솔직히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정말 가끔 멀쩡한 악기가 있을 때면 아는 노래나 조금 쳐보는 정도로 그치게 되었다. 어딘가에 소용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음악을 만들었던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도. 그만두는게 자연스러운 것 마냥.

 

어쩌면 그것마저 '있는 것'에 포함되지 않게 된거겠지. 음악이나 노래 같은 것들. 이미 잃어버린 것들에는 미련을 끊는 것이 중요하다. 살아남으려면 효율을 찾아야했다. 그렇게 따지면 이런 캠핑카 같은건 그런 것에서 영 벗어난 일이었지만― 글쎄. 그런 것들을 생각할 여유라도 있었나. 그 산소캡슐에서 네 얼굴을 봤을 때부터.

 

"그 파일도 이제 없어졌겠지."

 

그 물고기 노래 파일. 심정과는 모순적으로 웃음이 흐른다. 진작 없어졌지. 다시는 들여다보지도 않았으면서, 미련처럼 남겨두다가도 졸업식이 있던 날 밤에 지웠다. 유성 따위와는 관련 없는 상실이었지만, 그냥 휴대폰도 컴퓨터도 박살났다는 얘기를 해줬다. 멸망 초기에 집에 돌아가본적이 있었는데, 강도가 들었는지 전부 엉망이었다고. 랩탑 같은건 누가 훔쳐갔고. 우리집은 누가 침대를 반으로 갈라놨더라고. 농담처럼 나오는 말에 다시 웃는다. 힘도 세네. 그러면 너도 웃고.

 

"그래도 머리로는 계속 만들었을 것 같아."

 

얽힌 손에서 체온이 전해진다. 총소리는 이상하게 끊긴지 오래인 것만 같았다. 얼마 남지 않은 용기까지 모두 끌어모아서, 눈을 뜨니 네가 웃고 있어서는. 무너질 것 같은 것들을 힘겹게 붙들어 세워둔다. 머리로는 계속 만들었을 것 같다니. 노래를?

 

"너는 그런 애잖아."

 

입이 벌어졌다가 닫힌다. 너는.

 

“제목이 왜 물고기였는데?”

 

꿈에서의 목소리가 겹치는 말이었다. 방금 한 말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나온 질문에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정말 예전에는. 네가 물어보는 것을 기다렸던 것도 같은. 그런 질문.

 

"강이… 있는 것 같아서."

 

쉰 목소리가 강물처럼 흘러나온다. 그 애와 나 사이에 라던지, '너'라고 지칭하지 않는, 그런 비겁한 덧붙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다. 그렇지만 새벽이었고, 바깥에는 상실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공기필터의 소리가 조용하게 침묵을 채우는 사이로 그저 들은 것을 반복하는 말이 뜬다. 다시 눈을 감고 싶기도 했고, 그대로 뜨고있고 싶기도 했다. 가사를 기억할까? 네가 마스터 피스니 뭐니 호들갑을 떨며 추켜세웠던 그. 네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의 후렴이라던지, 그런 것들이 조금이라도.

 

"달랐으니까."

 

너랑 나는. 그래서 강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이 만드는 신화의 대부분에는 저승과 이승을 가르는 강이 있고는 한다. 레테의 강이나 삼도천처럼. 맞닿을 수 없는 저쪽과 이쪽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건너편을 볼 수는 있지만, 그리고 건널 수도 있지만. 건너려면 많은 것들을 각오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래도― 건너고 싶었으니까. 그냥, 네가 있는 쪽이 저승이지는 않을거잖아. 닿아서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사실은 비슷했으면 해서. 그래서 물고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속 따위를 거스를 지느러미가 필요했다. 그저… 그 노래가 그런게 되어줬으면 했던 것 같았다. 강을 건너기 위한.

 

너는 진짜 아티스트가 되었어야 했는데. 과장처럼 하는 말에 긴장이 풀린다. 세상이 멸망하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됐을텐데. 어쨌든 이미 불가능해진 것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노래를 만드는 대신 쉘터에서 환자의 수를 속인 보고를 기록하고― 어쩌면 멸망하지 않았어도 아티스트 따위는 되지 못했을 수도. 인생이라는게 그런거 아니겠어. 다시 눈이 감긴다.

 

"들려주면 안돼?"

 

그저 잠에서 깬 새벽의 스몰토크 같은거니까. 마무리가 됐다면 그렇게 넘기고 싶었는데. 이런 청승을 떠는 대화 따위는 멸망을 겪고나면 자주 나오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입꼬리가 경련해서, 괜히 입 안을 한 번 잘근댄다. 들려주면 안되냐고?

 

“다 까먹었거든.”

“거짓말.”

 

제목도 기억하면서. 핀잔이라도 주는듯 책하는 말투에 입이 마른다. 거짓말 아니라는 말을 내면서도 목소리가 희미하다는건 느끼는 바였다. 감히 내가 그 노래를 아직까지도 기억할거라고 생각한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렇지만 권순영은 그 노래가 어쩌다 쓰여졌는지도 여전히 모르는채였으니까. 탓하면 안되는 일이었는데, 그래도 울컥 올라오는 것들을 참기가 힘들어서.

 

안잊어버린거 다 안다느니. 말투가 뻔뻔해서 기가 막힌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독심술사라도 되냐던가, 괜히 날 선 말투로 물었더니 너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너는 그런 애니까. 한 번 반복된 문장에 눈꺼풀이 올라간다. 마주친 천장이 또렷해서.

 

“너는 잃어버린 것들은 절대 잊지 않잖아.”

 

눈이 깜박.

 

고개를 돌렸더니 여전히 얽힌 손이 있다. 내 말이 맞지 않냐는듯 뻔뻔하게 웃고 있는 얼굴 위로 어항의 조명이 비춰지고 있고. 너는 손을 여전히 얽은채라.

 

“그래서 이러고 있는거 아니야?”

 

안전한 쉘터 따위를 내버려두고 나랑 이렇게.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는 밖으로 나오는게 아니냐고. 너는 잃어버린 것들은 잊지 않으니까. 유성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이 정말 많기도 해서 좀 힘들겠지만.

 

그 노래는 네가 잃어버린 노래니까. 전해지지 못하고 그냥 파일더미에 덩그라니 버려져서, 무례한 단짝한테나 한 번 의도치않게 들려졌을 뿐인 가사들이라. 그러니까 이지훈은 절대로 그 노래에 대해서 잊지 않았을거라고. 과제곡 같은 것들이야 잊어버릴 수 있어도 그건 예외잖아. 그러니까 세상이 한 번 뒤집힌 후에도 겨우 작은 물고기 하나로 도로 생각나는게 아니겠어. 이런 조용한 새벽에.

 

그러니 까먹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던가. 전부 안다는듯한 의기양양한 눈이 웃음에 반쯤 접혀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완전히 틀렸으면서도 뻔뻔하게. 아니. 글쎄. ―틀린게 맞나? 그래서 이러고 있는거 아니냐고?

 

“나도 똑같으니까.”

 

속삭이는 목소리가 강에 스며든다. 이미 오래전에 썩어서 깊이가 어떤지도 알 수 없는 강에. 유성이 떨어진 종말에, 한 방울.

 

잃어버린 것들. 있었다가도 없어져 버린 것들. 물고기가 살만한 강과 들이쉴 수 있는 공기. 악기와 음향장비. 실패할걸 알아도 진행해보는 코드와 썼다 지우는 가사. 지나버린 고등학교 시절. 영영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멸망 전의 흔적. 너.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어? 있는 것을 세어볼 때마다 그 공백은 갈수록 크게 다가와서. 원래 가지고 있을 때보다 훨씬, 훨씬 커져서. 모든게 망해버리고 나서는 무게를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있는 것을 지키려고 발버둥칠 때마다 서러움은 커져간다. 그리고는 결국 가만히 있기 힘들게 되는거라고.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발버둥치게 되어서. 그래서 너도 나와 있는게 아니냐고. 저와 마찬가지로.

 

“너랑…….”

“석민이가 신기하다고 하더라.”

 

기어코 둘이 따로 탐사를 나가게 되었을 때. 너랑 같이 나가게 됐다고 했더니, 석민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랐다고. 지훈이 형이랑? 빗자루를 넣어놓으며 왜 놀라냐고 했더니 말을 좀 흐리다가, 결국에는 답을 내놨었다. 아니, 지훈이 형은 밖에 나가는거 별로 안좋아해서. 기록하는거 지겨우면 감시탑에도 인력 남는다는 말을 한적이 있는데, 바깥 보는거 별로 안좋아해서 싫다는 말을 들었었다고. 저번에 탐사팀에 낀다는 것도 좀 놀랐는데 아예 계속 나가려고 한다니 신기해서.

 

별로 놀라운 뉴스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도 어디 놀러나가는거 별로 안좋아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지금 바깥에 나가기를 싫어하는건 그런것과는 좀 다른 이유긴 하겠지만― 하지만. 그래도 네가 나랑 이 캠핑카에 타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그야 그렇지 않나? 바깥이 아니라 나 때문인거겠지. 바깥을 싫어하는 이지훈이 기어코 안을 포기하고 나오는건.

 

무슨 말을 해야할지. 긍정? 아니면 부정? 조명 때문에 티가 나진 않겠지만, 핏기가 빠지는 기분이 든다. 아직 초가을인데도 갑자기 기온이 내려간 것만 같았다. 나 때문인거겠지, 라니.

 

"나 캡슐에 들어가 있었을 때도 계속 보고 있었잖아."

 

맥박이 반대로 올라간다. 창백한 조명이 제 귀에 몰린 피까지 전부 비출까 두려운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그 앞에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다리고 있었던 것 정도는 알만도 했다. 좀 안믿기기도 했겠지. 만약 상황이 반대여서, 캡슐에 들어있는게 제가 아니라 지훈이었어도 저도 똑같이 했을터다. 유령이나 꿈 같은건 아닌지 생각했을테니까. 직접 일어나서 말을 걸기 전까지는 믿기 힘들었을 것을 안다. 고등학교 동창이라니.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있었던 일을 다 말할만 하지는 않지만, 그 종로에 있었던 쉘터에도 진짜 힘겹게 들어갔던거였는데. 아버지도 없어지고 나니까 정말 원래 알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어져서, 그래서 그 쉘터를 떠나기로 했다. 주위에 싫은 기억을 같이 겪은 사람들 밖에 없다는게 괴로웠다. 나눌만한 '좋은 기억' 따위가 하나도 없다니, 진짜 종말 같았다. 떨어지는 유성이나 황사 폭풍보다도 더.

 

그랬는데, 한 번 더 죽을 뻔 했다가 겨우 들어간 곳에 이지훈이 있었다. 반대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권순영에게 이지훈과 있었던 때라는건 정말,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때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어서. 입시야 물론 개같았지만.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고등학교 입학식을 선택할 정도였다. 그 이후 3년 동안을 거의 아무것도 안바꾸고 지낼거라고. 너는 징그럽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네가 나를 따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라. 캡슐 앞에서 기다렸었던 것 처럼 반대여도 그렇게 했을테니까. 만약 내가 나가겠다고 하는데 네가 따라나오지 않았다면, 나도 두 세 번인가 나갔다가 도로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겠지. ―보고 싶어질테니까. 자리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터져 없어질까 두렵기도 했을거고.

 

“겨우 되찾은거잖아.”

 

졸업 이후로는 연락도 뜸해져서, 바쁘니까 그런거라는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도 항상 아쉬웠었는데. 그걸 이런식으로 되찾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니 더 신경 쓰이는건 당연하다. 무슨 생각으로 함께 싫어하는 바깥에 나오는지 모를 수도 없었고. 그저― 비슷해서.

 

그러니 불러달라고. 오랜만에. 잃는 것과 잊는 것은 다르다는걸 아니까. 한 번만.

 

“…반주도 없이.”

 

권순영이 웃는다. 좀 쪽팔린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농담을 듣는 머리가 멍했다. 고등학생 때와는 너무 달라진 얼굴이었는데. 어항 조명 아래에 있는 얼굴이 꼭…….

 

"아무것도 안바꾸고 지낼거라고?"

 

충동적으로 나온 질문에는 눈썹이 휘어진다. 그럼 바꿀게 있다는건지. 그렇게 묻는듯한 얼굴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아직도 얽혀있는 손을 보았다. 매트리스의 사이에 다시 강이 있다. 나는 비슷하다는 말을 발음하는 입술을 생각했다. 나도 똑같다고 말했던 그 얼굴도. 있는 것에 집착하는 것과 없는 것을 찾는 것. 결국― 그저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는거라고. 어쩌면.

 

그런가? 한 번도. 비슷할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 체육관의 이후로부터 지금까지였다. 그야 눈 두 개 코 하나 달린 인간이고. 같은 나라에서 같은 나이로 자랐으니 비슷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나는 완전히… 선을 그어놓고. 그야 그렇게 생각하는게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물고기를 풀어놔봤자 네가 눈치채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는 이야기니까. 그 이유를 절단에서 찾고는 했다. 너와 나는 다르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잃어버린 것들에는 미련을 갖지 않으려 했었지만.

 

네 말이 맞다. 있는 것들에 집착할 수록 잃어버린 것의 공백은 절절해지니까. 사실 있는 것을 보는 것과 잃어버린 것을 세는 것은 동일한 일에 가까울지도. 그래서, 그게 너무 힘들어서 너를 끊어내려고 했었지만― 결국에는 계속 너를 생각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아마 그랬으니까. 그 산소 캡슐에서 너를 본 이후로…….

 

눈을 돌린 위쪽에 아직 멈춰있는 물고기가 있다. 공기필터의 소리가 들어본지 까마득한 물소리와 닮은듯도 했다. 그렇지만… 만약. 생각보다 깊지 않다면. 그 옛날의 체육관에서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깊거나 썩었거나. 유속 따위가 빠르지 않다면. 상실에 쓸려내려가지 않을 방법이 있는거라면. 만약.

 

“―다 까먹었다니까.”

 

눈이 반쯤 감긴다. 나는 본체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누워서는 천장을 향해 누웠다. 말이 나오지 않는게 어떤 말을 또 우다다 쏘아내야 내가 제 소원을 들어줄지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눈을 감자 어항 조명의 잔상이 느리게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시야에 물고기가 있을 것을 잊지 않은채고. 강의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손 만큼은 놓지 않아서. 네가 성급하게 입을 열기 전에 먼저 혀를 움직인다. 다 까먹은 대신.

 

“새로 지어줄테니까.”

 

예전에 지었던, 파일더미에 묻혔던 노래를 들려주는 대신. 새로운 것을 지어주겠다고. 음향 장비고 악기고 아무것도 안남았고, 담아놨다가 나중에 수정할 외장하드도 컴퓨터도 없지만. 그래도 만약― 네가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사실 네가 했던 말이 맞으니까. 머릿속으로는 언제나, 언제나 잃어버린 것들을 세었으니, 언젠가 완성한다면 반드시.

 

손이 너무 꽉 쥐어지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악소리가 나온다. 뭐하는 짓인지 싶어 확 돌아봤더니 시야 가득 웃는 얼굴이 있었다. 기대에 물든 반짝대는 눈에, 커다랗게 올라간 입꼬리하며. 정말― 웃어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얼굴이라. 그리고 그 표정이 정말, 정말 오랜만이었으니. 덕분에 멸망한 세상을 밖에 두고도 눈이 접혀서. 아.

 

네 말이 맞다. 강이 하나 있을만큼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었지만, 관성대로 생각한걸지도 몰랐다. 사실은 같은걸 수도 있겠다고. 이야기를 들어서야 그 체육관의 이후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 돌아온 기분이 들어서. 멸망과 네 웃음으로 생긴 구덩이에 물이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마치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강이 생기는듯한, 그런.

 

그래서 생각한 것이다. 있는 것에 집착하고. 없는 것을 찾으러 가고.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는게 벅차다면.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계속 생각하는 대신, 새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공백을 채울 만한 것들을 직접. 만들 수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서러운 멸망을 거슬러갈 지느러미가 될 수도 있겠다고. 정말 어쩌면.

 

“슬슬 일어나자.”

 

총소리가 멎은지는 오래 됐으니까. 잠은 쉘터에 복귀한 뒤에 자도 상관 없을 것이다.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걸지도 모르지만. 너는 불평 한마디 없이 잡았던 손에 다시 힘을 한 번 주고는 언젠가의 체육관에서처럼 연결을 풀어버린다. 해가 밝으려면 멀었지만, 무전을 받을 사람은 있을 것이고. 게이트를 열어줄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돌아가서― 글쎄. 악보로 쓸 종이라도 구해볼까. 낭비일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어쩌면 저 밖에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는 그 때보다 훨씬, 알아듣기 쉽게. 솔직한 말과 함께 들려줄 수 있다면. 그러면 좋겠다고. 종말에서 감히 그런 희망을.

 

벌떡 일어난 네가 담요를 정리하고 눌린 머리를 턴다. 지나치는 위쪽에는 당연하다는듯 어항이 있었다. 목덜미에 같은 아가미를 그리는 상상을 한다. 손톱만하지만, 멸망한 세상에서도 분명 숨을 쉴 수 있을 작은 틈을. 악보의 모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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