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The Golden Bough)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 04화

꼭 필요한 사람

* 트위터(@12_ria_12) 지참금결혼썰을 기반으로 일부 내용과 설정이 수정 및 보완되었습니다. 

* 지참금(신부의 집안에서 신랑의 집안으로 결혼을 위해 보내는 물질적 재산) 제도가 주요 설정으로 나오며, 이로 인한 폭력 및 살인에 대한 언급이 나올 수 있습니다. 불편하신 분들은 사전에 피해 가 주세요.

* 알파오메가 세계관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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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이었다. 승관은 만원버스에서 운 좋게 자리를 차지해 앉아 인스타 릴스 무한궤도에 빠져 있었다. 환승커플들의 눈물나는 삽질과 환장하는 똥꼬쇼가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가볍게 쓰루해 버렸다. 빨간 버튼을 거침없이 누르자 진동이 멎었는데, 어딘가 느낌이 쎄했다. 이 번호 혹시…

( 아직 퇴근 ㄴ? ) 

빠르게 통화 목록을 뒤적거리고 나서야 승관은 며칠 전 완전하게 자신의 취향을 저격한 알파를 떠올렸다. 속눈썹이 인형의 것처럼 예쁘고, 마리아나 해구만큼 깊은 아이홀을 가진, 해리포터 오타쿠 걔. 

맞네, 맞아. 배구 보러 가자고 했지, 참. 이후로 별 얘기가 없어서 잊고 살았다. 

는 건 거짓말. 

언제 다시 연락이 오나 잔뜩 벼르고 있었다. 실은. 과장을 살짝 보태어 시간 단위로 확인을 했다. 오죽하면 저 열한 자리 번호를 외워버렸을까. 저장을 안 한 게 아니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다. 거절 버튼을 누른 건 실수였달까. 광고 전화, 여론 조사, 카드사, 보험사 전화들을 피하려던 무의식의 결과다. 환승커플들의 마라맛 엇갈린 사랑의 짝대기도 한몫했고. 

메시지 풍선을 한참 쏘아보다 승관은 답장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대신 똑같이 대해줘야지. '노'도 아니고 'ㄴ(니은)' 하나 달랑 보내는 싸가지를 그대로 돌려주마. 그 전에 일단 좀 내리고. 

( ㅈ ㄱㄴ ㅈ )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승관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타자를 쳤다. 푸슝- 가벼운 효과음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전송되고, 곧장 하얀 말풍선이 떠올랐다. 뭐야, 얘. 계속 폰만 보고 있던 건 아니겠지, 설마? 

( ㅇㄷ? )                                             

                         ( ㅇㅈ ㅂㅅ ㄴㄹ )

( ㅇㅎ )  

(ㅈㅎ ㄷ? )              

뭐지, 전화 되냐고? 긴가민가 하면서도 승관은 'ㄷ(디귿)'자를 보냈다.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왜." 

「내일 우리 몇 시에 만날지 안 정했어.」 

그러게, 여태 안 하고 뭐했대. 작게 툴툴거렸더니 한층 밝아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아- 혹시 연락 기다렸어?」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구." 

승관이 중얼거렸다. 근데 생각해 보니 웃기네, 이거. 

"아니, 나도 바쁜 사람이거든? 주말에 만나자고 연락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거 내가 혹시 몰라서 다 보류해 뒀다고. 알기나 해?" 

「아…, 늦게 연락해서 미안. 나도 좀 바빴어, 어디 좀 다녀오느라.」 

그래. 집에서 놀고 먹는 것보다야 바쁜 게 낫지. 승관은 뭘 하느라 바빴느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분명 회사 일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뭐. 몇 시에 보게." 

「1시 어때?」

"그러든가."  

「오케이. 시간 맞춰서 데릴러 갈게, 그럼.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참나, 우리 집엘 니가 왜, 왜 오는데, 왜." 

「그야, 결혼할 사이니까?」 

"…누가 해준댔나." 

「미안, 안 들렸어. 뭐라고?」 

"못 들었음 말고." 

웅얼거리는 승관에 핸드폰 건너편에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위아래 치열이 훤히 드러나게 입을 벌리고 웃는 잘생긴 얼굴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와, 지금 혼자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화끈거리는 얼굴을 그대로 들키고 말았을 텐데.   

「집 도착했어?」 

"얼레, 귀신이네. 너 혹시 어디서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지?" 

때마침 집 앞에 다다랐던 승관이 놀라 주변을 급히 돌아봤다. 경비원이 상주하는 초소는 이미 한참을 지나왔고, CCTV가 가로등보다 많이 설치되어 있는 주변엔 개미 하나도 눈치를 보며 돌아다닌다. 더군다나 사람 그림자라고는 보이지도 않는데, 희한하지. 어떻게 알았는데. 

「그럼 잘 들어가고. 내일 봐, 승관.」

"나 약속 시간 안 지키는 싫어해. 그니까 괜히 늦고 그러지 마, 알았지? 끊는다." 

할 말만 우다다 해버린 승관이 냅다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면서도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나 문자가 올까 봐. 

답장은 없었다. 

( 오늘 경기 잘 보고 와, 승관아. )

( 형도 지금 집에서 출발했어. ) 

정한의 문자가 도착한 시각은 여섯 시를 조금 넘어서였지만 승관은 답장할 새가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조깅을 하러 나갔다 오고, 필라테스 방문 레슨을 받은 다음, 견과류 들어간 요거트 볼 한 그릇을 후딱 먹고 씻었더니 아홉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티소믈리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이 승관의 주말 일과 중 하나였으므로, 열 시에는 차 연구소가 있는 부한동에 가 '6대 다류'에 대해 배웠다. 

평소라면 할머니와 근처에서 점심 식사를 했을 테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으니 곧장 집으로 왔다. 현관문 들어설 때 벽시계가 가리킨 시간은 열두 시. 아니, 뭘 했다고 벌써 열두 시? 큰일났다. 나 뭐 입어? 옷장을 죄다 뒤집어 이걸 입을까, 저걸 입을까, 전신거울 앞 제 몸에다 하나씩 대 보는데 마음에 드는 옷이 하나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쇼핑이라도 좀 해둘 걸. 한숨을 폭 쉬던 승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지.  

가만 생각해 보니 문득 이상한 거다. 걔한테 잘 보여서 뭐를 어째? 어차피 난 그 결혼 안 할 건데. 물론 또 한편으로는, 

"아니지, 아니지. 잠깐만," 

이건 누구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사회적 체면과 명성, 나라는 아이덴티티, 부승관이라는 브랜드에 맞추기 위한 거라고. 그치. 좋아. 내추럴하게 가자. 

결정을 내린 승관이 옷장에서 들꽃 자수가 있는 오버사이즈 후드를 꺼냈다. 며칠 전 정한을 따라 청민동 단골 편집숍에 갔다가 새로 산 것이었다. 멋 부린 티를 내는 건 또 싫어서 무릎보다 살짝 올라간 밴딩 데님 쇼츠를 매치했는데, 다리가 너무 훤한가 아닌가 또 혼자만의 검열이 시작된다. 결국 종아리를 반이나 덮는 니삭스도 추가. 후드티와 비슷한 톤의 크림색 겐조 스니커즈까지 챙겨신고 나니 이게 꾸민 건가, 꾸안꾸인가, 아니면 그냥 안 꾸민 건가 모르겠다. 드레스룸 거울 앞에 서서 주황색 샛노랗게 물을 들인 머리를 또 한참 왼쪽으로 빗었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하고 있으니 어느샌가 핸드폰이 울렸다. 덜컹 심장이 내려앉은 승관이 벽시계를 쳐다 봤다. 약속 시간까지는 그래도 아직 15분이 남아 있었다. 

"내가 약속 시간 늦는 거 싫다 그랬지."

「어- 승관. 준비 다 했어?」 

"그래서, 얼마나 늦는데." 

「나 도착했는데? 지금 너네 집 앞이야.」 

"뭐, 벌써??" 

「혹시 아직 시간 더 필요해?」 

아니 일단 지금 약속 시간까지 15분이나 남았다고. 더 필요한 게 아니라, 딱 거기에 맞게 준비하고 있는 건데. 이거 어쩐지 말려들어가는 것 같다 싶어 승관이 제 뺨을 두어 번 가볍게 내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부승관. 이 놈 생각보다 미인계를 잘 쓰니까 괜히 홀라당 넘어가서 끌려가지 말구. 알았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 승관이 몰래 목을 가다듬었다.  

"기다려. 정시에 맞춰 나갈 거야." 

「그럼 나 안에서 기다리면 안 돼?」 

"되겠니?" 승관이 쏘아붙였다. 그러자 전화기 건너편에서 에엣취- 거센 재채기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알겠어… 오늘 생각보다 추워ㅅ…ㅔ엣취!」 

"차에서 히터 틀고 있어 그럼." 

미련한 거야 생각이 없는 거야? 작게 중얼거리는 승관에 "엄…"하고 길게 말을 끄는 폼이 뭔가 이상하다. 

「내가 차를 안 가져왔거든?」  

"왜?" 

「면허가 없어.」 

아니. 네가 면허가 있는 없든 알 바 아니고.  

"그럼 기사님도 없이 여기까지 혼자 왔단 거야?" 

「응.」 

왜냐, 그러면. 그러니까 왜냐고 묻는다면… 

기껏 신경 써서 만진 머리를 승관이 헝클어트렸다. 애초에 바란 게 있었냐고 하면 그래, 솔직히 조금 기대했다. 고속도로를 유려하게 달리는 쨍한 파란색의 스포츠 카(걔한테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디퓨저 향과 가죽 시트 냄새의 조화(기왕이면 뽀송뽀송 코튼 향이었으면), 드라이빙에 최적인 청량 가득 플레이리스트가 흘러 나오는 뱅앤올룹슨 스피커(혹시 몰라서 유튜브에서 플리도 미리 따놨는데), 노래를 작게 따라 흥얼대 보는 목소리들, 몇 번이고 실수처럼 스쳐지나는 손을 마주잡는 뭐 그런 것들을, 첫 데이트에서 해 보는 상상을 하긴 해 봤다. 말 그대로, 상상이잖아. 해 볼 순 있는 거잖아. 그것도 안 돼? 

「그럼 나 초인종 누른다?」 

"아아- 잠깐!!! 5분, 아니 3분만-" 

띵동--  

그렇게 승관이 잠시 얼 빠져 있는 사이 한솔이 벨을 눌렀다. 이거 봐. 방심하면 안 된다니까, 얘.

「아이쿠, 미안. 눌러버렸네, 이미.」 

"으이, 일부러 그랬지, 너!" 

「하핫, 아냐 실수야 정말로.」 

빽 하고 내지른 고함에 되돌아온 것은 낮지만 간지러운 웃음소리. 그 음성이 좋다 싫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승관은 후다닥 가방을 낚아챘다. 

누나네가 낮에 약속이 있다고 했나 아니었나. 엄마는 사찰음식 배우러 절에 가셨고 아빠는 새벽부터 라운딩을 가셨다. 한솔이 제 집에 발을 들인들 인사 나눌 가족은 없다는 소리다. 

그래도 저녁되면 고스란히 가족들 귀에 오늘 일이 흘러들어가 귀찮아질 게 뻔한데. 절대 싫어!! 

2층 계단을 우다다다 뛰어 내려오며 승관은 생각했다. 와씨, 나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는 느낌 드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 보송한 등에 진땀이 다 났다. 괜히 후드를 입었나?   

"어머, 그랬군요. 승관이 녀석 집에는 그런 소리 한 마디도 없더니." 

"아, 근데 저는 좋았습니다. 오히려."

"오호호, 둘이 잘 맞는다니 다행이네요."  

"아니 엄마, 왜 집에 있어?" 

오호호라니, 우리 엄마 저렇게 웃는 건 모임 나갈 때 말곤 없는데. 그나저나 사찰음식 배운다고 절에 가는 날 아니었어? 왜 여태 집이고 왜 최한솔이랑 말을 섞고 계신 것인지, 설명 좀? 두 눈에 물음표를 가득 담은 승관이 빤히 제 엄마를 쳐다봤다. 흡족한 미소를 한껏 지은 얼굴이 승관을 맞았다. 그리고 두 눈이 승관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엄만 한솔 군 마음에 들어. 하고. 

"야, 빨리 나와. 다녀올게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장모님. 안녕히 계세요."

"그래요. 조만간 봐요, 한솔 군."  

아우 진짜, 언제 만났다고 벌써 장모님 타령이야. 한솔의 후드티 모자 부분을 질질 잡아끌어 집 밖으로 끌어낸 승관이 찌릿 눈을 흘겼다.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오."

"뭐가 오야." 

"우리 커플옷 같다." 

"하." 

왜 허락도 없이 집에 막 들어오고 그러냐고. 따져 물어야 하는데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허, 허. 애 앞에서 뭔 말을 못 해. 무서운 세상이야. 중얼중얼 혼잣말 파티를 하며 앞장선 승관을 한솔이 말없이 따랐다. 

그러다 우뚝 걸음을 멈춘다. 또 뭐냐 싶어 돌아보자 태양을 마주한 하얗고 진한 얼굴이 예쁘게 구겨져 있다. 참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어떻게 찡그린 얼굴까지 잘 생겼을 수 있지. 

"왜. 뭐." 

열 번 찍어도 끄떡없을 제 고집을,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어."

"승관이 너 귀여워서." 

"…어우, 왜 이렇게 더워. 춥다더니 거짓말 쳤네, 너." 

시도때도 없이 흔들어댄다. 정신이 쏙 빠지도록. 

"…완전 딱 좋은 날씬데 지금. 어? 나 거짓말하는 사람 완전 싫어하거든?"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춥다며. 애초에 집에 들어와 있겠다 우긴 것도 그거 때문 아니었냐고. 그러자 하는 소리가 원래 추위를 잘 탄다나, 뭐라나.  

"내가 원래 추위를 많이 타. 근데 승관인 안 그러나보네." 

뭔 소리냐 싶은데 시선이 반바지 아래 드러난 다리에 가 있다. 허. 코웃음을 친 승관이 괜히 다리를 교차해 본다. 제 움직이는 모양새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눈빛이 순수하지 못 하다. 귓바퀴가 다 화끈거렸다. 

"근데 혹시 내가 옷 갈아입어달라고 하면 갈아입어줄 거야?" 

"어휴, 어디서 그딴 구시대적 소릴. 뭘 입든 내 맘이야. 신경 끄시죠." 

"알겠어. 잘 어울려, 근데. 이뻐." 

흥. 나도 안다 뭐. 저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입술을 비죽거리는 승관이다. 

"근데 면허 왜 없어? 난 성인 되자마자 땄는데." 

언덕 아래 큰 길가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자연스럽게 향하며 승관이 물었다. 하늘을 비스듬하게 올려다 보며 뭔가를 생각하던 한솔이 어깨를 으쓱이며 승관을 향해 웃어 보였다. 

"딱히 필요가 없어서?" 

오만한 거야, 겸손한 거야.  

"그리고 운전하면 이런 걸 할 수가 없잖아." 

무슨 소리냐며 얼굴을 마주하는데 제 손을 잡아 끈다. 제법 강한 끌림에 기우뚱하는 승관의 반대편 어깨를 한솔이 둘러 안았다. 

"그래서 난 운전하기 싫어. 방해 되니까." 

"…참나, 다른 사람들이 보는 건 신경 안 쓰이나 보네." 

"그 사람들 눈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잖아. 딱히 감출 일도 아니고." 

서양 오타쿠 놈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고수의 향기가 느껴지는데. 오메가 꽤나 만나봤을 것 같다. 이런 게 바로 얼굴값 한다는 걸까? 그래도 너무 프로페셔널한 건 싫은데.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해. 오바 금지라고 했다?" 

제 어깨 위 올라간 한솔의 손을 승관은 선심 쓰듯 제 손에다 쥐여줬다. 깍지 껴도 되냐는 물음에 단호히 'Nope'하고 끊어내자, 어김없이 새하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쥔 손을 타고 전해지는 조급한 맥박이 저의 것인지 저 애 것인지 모르겠다. 

한번 내어준 손을 한솔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놓지 않았다. 경기장에 도착해서는 우왕좌왕하지 않고 곧장 모바일 티켓을 내보이고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모습이 퍽이나 자연스러워 내심 놀랐다. 그러다 코트가 한눈에 들어오는 2층 관중석이 우리 자리라고 했을 땐, 

"와……." 

"혹시 자리 마음에 안 들어? 지금이라도 VIP 박스로 가고 싶으면…" 

"너…," 

직관 데이트를 하자 그랬을 때만도 그냥 잘 보이려고 한 소린 줄 알았다. 그런 알파놈들 쌔고 쌔서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니까 니 알아서 해 봐라 하는 심정으로 따라나섰다. 저더러 앉아 있으라고 하더니 핫도그와 감튀, 제로콜라, 거기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양팔 한 가득 안고 돌아오는 한솔을 봤을 땐  마음 속 빗장 하나가 '달칵' 풀렸다(전날 저녁부터 공복이라 눈에 뵈는 게 없어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같이 살 거면 취미 하나쯤 공유해도 좋으니까.  

그렇다 해서 모든 걸 다 허락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자, 지금부터 전광판에 잡히시는 분들은 키스를 보여주시면…"

와아아아아-  

3세트 종료 후 타임아웃에 찾아온 키스타임 이벤트에서 두 사람은 떡하니 전광판 화면에 잡혔다. 선수 못지 않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렬한 파이팅을 외치는 승관과, 그런 승관이 벌떡 일어설 때마다 손에 깍지를 낀 채 그물에 걸린 꽃게처럼 딸려 올라오는 한솔은 중계 카메라의 좋은 사냥감이었다. 

음, 음, 음. 아냐. 놉. 싫어요. 안 합니다. 넘어가세요. 

양손을 교차해 엑스 표시를 해 보이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승관이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카메라는 미련을 못 버린 채 오히려 줌을 당겼다. 바로 옆, 밤바다 윤슬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사랑스런 제 오메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잘생긴 알파 때문이었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함성 소리는 더욱 커지고 카메라는 요지부동에, 동그란 승관의 얼굴은 잘 익은 자몽 속처럼 빨개지고 있었다. 전광판을 흘끗 올려다 본 한솔은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따끈한 두 볼을 잡고 저를 보게 하자 마주본 두 눈이 동그래진다.  

"야, 너-" 

붉은 물이 든 뺨 위로 가볍게 입술이 내려앉았다. 각도를 트는 바람에 화면에는 꼭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것으로 보였고, 관중석 열기는 더더욱 뜨러워졌다. 한솔은 고의적으로 제 알파 페로몬을 풀었다. 오직 승관만 느낄 수 있는 미약한 수준이었지만,  

딸꾹. 

알싸한 박하 향기에 놀란 승관이 주황빛 향을 팡- 하고 터트렸다. 작게 딸꾹질을 하는 귀여운 얼굴의 오똑한 콧잔등에다 한번 더 입술을 갖다 붙이며 한솔은 다짐했다. 어떻게든 이 오메가를 가지고 말리라. 

그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황금가지(𝐓𝐡𝐞 𝐆𝐨𝐥𝐝𝐞𝐧 𝐁𝐨𝐮𝐠𝐡)

4화. 꼭 필요한 사람

by. illyria


일식을 좋아하는 송 장관 입맛에 맞춰 전 비서는 미리 근처 일식당을 예약해 뒀다. 컨트리클럽에서 차로 30분이 걸린 목적지는 한적한 호수를 앞에 두고 뒤로는 산을 등진 작은 식당이었다. 신성물산이 소유한 근처 5성급 리조트의 일식 업장 셰프가 미슐랭 스타 출신이었지만 이곳을 택한 이유는 명확했다. 오늘의 만남이 결코 비즈니스 목적이 아니라는 것. 아내로 맞이할 정한이 평소 자주 언급하는 은사님을 결혼 전에 만나 인사하는 자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 

정한 앞에 놓인 음식이 줄어드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렸다. 전채부터 메인까지 접시 위 음식들이 그대로 놓여져 있는 것을 승철은 진작에 알아차렸으면서도 묻지 못했다. 애주가라고 소문난 송 장관과의 대작은 쉼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잔이 비워졌다 채워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던 탓이었다. 잠깐의 기회가 생겼을 때 겨우 승철은 정한을 살필 수 있었다. 

"아뇨. 맛있네요." 

맛을 느낄 수 있는 정도로 먹기는 한 건지. 의문이 앞섰지만 승철은 다른 질문을 해야했다. 슬쩍 목소리를 낮춘 승철이 나지막히 물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아- 네. 저 괜찮," 

괜찮으니 신경 안 써도 된다 말하려던 정한은 맞은편 송 장관과 눈이 마주쳤다. 서글서글하고 인자한 인상을 가진 그의 은사이지만 간혹가다 날카롭게 두 눈이 빛날 때가 있었다. 학생들이 펼치는 논리의 앞뒤가 맞지 않을 때. 정한도 발제 때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눈빛을 송 장관이 지금 하고 있었다. 

"정한아, 그러고 보니 너 회를 먹는구나?" 

송 장관의 물음에 정한이 찰나 당황한 낯빛을 보였으나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자 승철 역시 미묘하게 놀라는 기색을 드러냈다.

"정한 씨 회를 안 먹습니까, 원래?" 

"아…"

단둘이 식사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모를 수밖에. 

정한은 승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요동하는 것을 보았다. 이 거짓 연기가 하루만에 탄로가 날까 걱정되는 눈치였다. 순간 어젯밤의 꿈이 떠올랐고, 입안이 말랐다. 

이제 정한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오늘의 만남을 성사하려고 이 사람이 당신의 제자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들켜버릴 것인지. 혹은 마저 완벽한 연기를 선보여, 최 대표에게 제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똑똑히 느끼도록 만들어 줄 것인지. 어떤 선택이 저를 위한 것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걸 생각할 처지도 못 됐다. 

"학부생 때 크게 탈이 난 적이 있어서요."  

"연경도 답사 때였지, 아마? 배가 없어서 병원도 한참 지나서야 갈 수 있었지."

"그래도 선배들이 잘 챙겨줘서 그나마 나았죠. 이젠 잘 먹어요." 

걱정 마요, 승철 씨. 정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한번도 부르지 않았던 이름을 부른 것은 일부러였다. 나도 당신만큼이나 연기를 제법 잘 할 줄 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첫 만남에서 3분도 함께하지 않았던 약혼 상대에게 다정한 알파 흉내를 낼 정도로 내가 쓸모 있는 존재라면. 그리고  당신과 당신 집안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나라면. 

"이럴까봐 말 안 했어요. 미안해 할까봐요." 

기꺼이 손바닥을 소리가 나도록 마주쳐줘야 했다. 전의 사람처럼 치워지지 않으려면. 

"교수님 민망하시겠다. 얼른 드세요, 두 분." 

방긋 웃으며 말한 정한이 자기 앞 접시에서 회 한 점을 가져다 입에 넣고 씹었다. 한동안 정말 날생선은 입에도 대기 싫어했는데, 바깥에 편식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말라며 어머니가 한번 주의를 준 뒤로 다시 먹기 시작했다. 뭐든 하다보면 다 됐다. 즐기지 않아도, 싫어도. 살다 보면 그렇게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게 한두 가지는 아니기에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정한은 이 결혼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또 봬요, 교수님. 건강하시구요." 

"그래, 정한아. 너도 결혼 준비 잘 하고."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장관님."

정한의 옆에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승철에게 송 장관은 말없이 두 번 어깨를 두드린 뒤 차에 탔다.  

"조만간 차나 한 잔 하지. 집으로 두 사람 초대할 테니."  

"영광입니다." 

송 장관은 주말 하루를 최 대표와 함께 보내며 조금이나마 마음을 연 듯 보였다. 승철에게 허락한 그 두 번의 두드림은 그런 의미였을 테다. 그것만으로도 최 대표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에 마신 술 한 잔은 분명 꽃향기가 물씬 났는데 정한의 입안은 썼다. 

"후…." 

송 장관이 탄 차가 저 멀리로 사라지고 나서야 승철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동시에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부는 밤바람엔 짙은 술내음과 함께 달콤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승철의 차 안에서 맡았던 것임을 정한은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실은 의식보단 감지에 가까웠다. 목덜미 언저리가 따끈하게 달아오르고 심장께가 간지러운 생체반응에 따른 지각. 이미 승철의 페로몬을 정한의 몸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북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의 저를 위해선 다행이고 지금의 저에겐 불행이다. 순전히 오메가라는 이유로 이 알파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을 정한은 원치 않았다. 

"오늘 고생 많았습," 

휘청, 

"괜찮으세요?" 

석상처럼 미동 없이 서 있던 승철의 자세가 흐트러진 것은 순식간이었고, 재빨리 팔을 붙잡아 부축한 정한의 행동은 무의식이 선택한 것이다. 누구라도 제 앞에서 균형감각을 잃고 휘청거렸더라면 똑같이 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도리니까. 그 이상의 다른 목적은 없었다. 

지나치게 가까이 마주한 얼굴은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숨을 훅 들이마신 채 호흡을 멈출 정도로. 동그랗게 치켜뜬 두 눈만이 정한의 놀란 심정을 대신 내보였다.  

"……." 

"……." 

금세 뒤로 물러설 줄 알았던 최 대표는 요지부동이었다. 입술은 굳게 다물고 토끼 눈이 된 정한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었다. 살짝 풀린 채 저를 응시하는 두 눈을 보며 정한은 생각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자 영혼의 거울이라던데.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은 새까맣고 어둡고 탁했다. 그의 속내만큼이나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높디높은 성벽의 경계가 허술해지고 생겨난 틈새를 언제 또 발견할 수 있을까? 심연같은 그의 속을 들여다 보고 싶은 호기심이 마구 일기 시작했다. 식사자리에서 받아마신 술이 허락한 용기 때문일 수도, 간만에 교수님과 학구적인 열변을 주고 받은 덕분일 수도 있다. 지금이 아니라면. 잔뜩 긴장한 정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떼어내 목소리를 꺼냈다. 

"오늘 어땠어요?" 

"무슨 말입니까?" 

"하루종일 같이 있었잖아요."

"…" 

"좋았다, 별로다, 지루했다. 답답하다. 승철 씨 생각을 물어보는 거예요." 

심장이 무진장 요동치고 있었다. 어떤 대답을 해줄지, 답을 해주기는 할지. 굳게 다문 두터운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정한 씬요." 

어땠느냐고? 나한테 묻는 게 맞는 걸까? 

예상못한 역질문에 이번엔 정한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니 오히려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한듯 싶었다. 애초에 저 사람이 제게 뭔가를 궁금해 할 거라는 생각을 못 하기도 했고. 

"난," 

좋았나, 싫었나. 즐거웠나, 긴장했나. 

"어땠습니까, 정한 씨는 오늘 하루가." 

점차 선명해지는 저 사람의 알파 페로몬에, 

설레고 있나, 겁이 나는가.

"……." 

결국 아무 답도 하지 못 하고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새벽에 정한이 타고 온 차량이 옆에 멈춰 섰다. 차분히 숨을 삼키며 뒷좌석 문을 연 승철이 입을 열었다. 

"피곤할텐데 어서 타요." 

정한은 망설였다. 여기서 그가 열어준 문 안으로 순순히 들어가 버리면 우리 사이는 진전 없이 원점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많지 않은 연애 경험들을 떠올려 봐도 도움이 안 됐다. 결정적으로 우린 연애를 하려는 게 아니니까. 

"할 말 있습니까?" 

"연락, 주고받아요." 

"…" 

"바쁘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답장," 

"대표님!" 

해줬으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정한 님. 대표님께서 급히 받으셔야 할 전화가…" 

"네, 손 회장님. 전화 바꿨습니다, 최승철입니다." 

내가 당신의 1순위가 될 수는 없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었으면 싶은데. 그것이 당신과 나의 관계에서 그렇게나 어려운 부탁인 것이냐고 물을 절호의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때 하필 전화기를 들고 달려와 끼어든 전 비서로 인해. 얄미웠다. 

"정한 님, 타시죠. 제가 대신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정한이 이제는 아예 저만치로 떨어져 통화를 이어가는 승철을 허무하게 바라보고 서 있자,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대체한 전 비서가 어서 탑승하기를 종용했다. 

"혹시 같이 살 건 아니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누구랑 결혼을 하는 건지." 

"…예?" 

앞으로도 항상 그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당신이 있는 건지 물으려다가,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까 두려워 정한은 입을 다물었다. 얌전히 차에 타서 안전벨트를 맬 때까지도 최 대표는 계속 등만 지고 통화 중이었다. 저를 돌아볼 생각이 아예 없다는 것을 눈치챈 정한이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문 좀 닫아줄래요?"

"아, 네."  

쾅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닫았다면 그 핑계를 삼아서라도 전 비서를 한 번 노려봐 줬을 텐데. 황당함과 허무함이 엇갈리는 순간에도 정한은 창문 너머 최 대표에게서 쉽사리 눈을 못 뗐다. 우연스럽게라도 몸을 돌려 제가 탄 차를 봐주기를 기다렸지만 헛된 바람인 듯 했다. 더 있다가는 전 비서 앞에서 체면만 구길 것 같아 마지못해 고개를 돌린 정한이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꾸벅 허리를 숙여가며 건네는 전 비서의 인사 또한 무시해 버렸다. 오늘 하루가 어땠냐고 되물었던 승철에게 이제는 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별로였다고. 좀처럼 긁히지 않는 제 자존심에 한 줄 흔적이 나 버린 당신으로 인해 좋지 못한 하루였다고.  

(대답 기다리고 있을게요. 빚지는 거 싫어 하잖아요.) 

답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정한은 제 말풍선만 가득한 메시지창에 기어코 하나를 더 추가했다. 꼬박 하루를 다정한 약혼자처럼 굴 정도로 제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겠다는 결심이 크게 섰다. 조금의 취기도 없이 정신은 더없이 맑았다. 

.

.

.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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