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The Golden Bough)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 01화

소문

* 트위터(@12_ria_12) 지참금결혼썰을 기반으로 일부 내용과 설정이 수정 및 보완되었습니다. 

* 지참금(신부의 집안에서 신랑의 집안으로 결혼을 위해 보내는 물질적 재산) 제도가 주요 설정으로 나오며, 이로 인한 폭력 및 살인에 대한 언급이 나올 수 있습니다. 불편하신 분들은 사전에 피해 가 주세요.

* 알파오메가 세계관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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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부 산악지역에 네미Nemi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고, 그 아래 거룩한 숲과 성소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숲의 디아나'라 불렀다. 

   숲에는 황금처럼 빛나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칼을 든 남자가 밤낮으로 그 주위를 서성거리며 나무를 지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해가 시작되고 또 한 해가 질 때까지
홀로 사방을 경계하는 그는 사제이자, 살인자였다. 

   이 성소에는 하나의 규칙이 있다.
기존의 사제를 살해하고 나무의 황금가지를 꺾는 자는
누구든 사제가 될 수 있다. 심지어 도망쳐 온 노예일지라도.

   만일 그 노예가 황금가지를 꺾는 데 성공해 사제가 되고 나면,
그는 또 다른 사제 후보자에게 살해 당하기 전까지 사제직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황금빛 반짝이는 나무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도 못한 채,
언제 그의 사제직을 탈취하러 올 지 모르는 누군가로 인해
늘 불안에 떨며 죽음에 대한 무서운 악몽으로부터 고통받는다.
   그것이 이 성소의 사제, 즉 왕이 된 자에게 내려진 저주다.

이 기묘한 신화 속 황금가지는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다. 겨울이 되면 황록색 줄기에 열리는 작디작은 열매가 연한 노란색이라, 겨울의 차디찬 바람에 흔들리는 열매가 햇빛에 반짝여 황금 이파리처럼 보이기 때문에 황금 가지라는 은유를 쓴 것이다. 그러니 황금으로 된 나무도 아닌, 그냥 평범한 나무에 불과한 것을 사시사철 지키고 있던 사제 역시 실존하지 않는다. 

황금가지와 칼을 든 왕. 그리고 왕을 죽이러 오는 미래의 왕. 

모든 것은 그저 '상징'이다. 공동체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것이 설령 야만적이고, 후진적일지라도. 어떤 구성원 집단에게는 족쇄가 되고 위협이 될 지라도 말이다. 오랫동안 관행처럼 이어진 알파-오메가 집안 사이의 결혼 지참금 주고받기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금가지(𝐓𝐡𝐞 𝐆𝐨𝐥𝐝𝐞𝐧 𝐁𝐨𝐮𝐠𝐡)

1화. 소문

by. illyria


「형 나 진짜 거의 다 왔는데 요앞에서 완전 10분 째 꽉 막혀 있어 ㅠㅠ」

승관의 메시지를 확인한 정한은 아이패드 화면을 껐다. 10분 째 페이지 한 장 넘기지 못하고 있던 이북을 더 열어놓고 있어봐야 무슨 소용일까? 저녁에 열리는 독서 클럽에 참석하려면 써머리는 못 해도 최소한 끝까지는 읽어야 하는데, 요 며칠 마음이 심란하고 머릿속이 복잡해 반의 반도 못 읽은 상태였다. 물론, 지참금 제도의 필요성과 오메가의 사회 진출이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강조하는 500페이지짜리 책은 더없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읽어도 완독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클럽의 다른 회원들은 어떨지 몰라도 정한은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5성급 호텔의 1층 라운지에서,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주장으로만 가득한 책을 꾸역꾸역 읽어가며 승관을 기다렸던 까닭은, 그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진실이라 믿는 사회에서 정한 역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상류 사회라는 견고한 성벽 안의 구성원이었고, 성문 밖으로 내쫓기지 않으려면 알파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 신랑의 집에다 막대한 지참금까지 줘 가면서 말이다. 

사실 정한은 쫓겨나는 게 두렵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두꺼운 문을 기꺼이 제 손으로 열어젖혔을 것이다. 하지만 정한이 알파와 결혼하지 않으면 고조부 때부터 윤씨 일가가 키워온 은하 그룹은 더 이상 윤 씨 일가의 소유로 남을 수 없게 된다. 오메가는 오너의 위치에 설 수 없고, 외아들인 정한은 오메가이므로. 알파와의 결혼은 윤 씨 일가가 은하 그룹의 오너 자리를 이어갈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게 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변하지 않는 규칙이다.

그로 인하여 오늘 정한은 신성물산 최성준 회장의 장남, 건설부문의 최승철 대표이사와 만난다. 수 개월 동안 오고 간 수많은 계약 합의서에 양가 변호인단이 최종적으로 서명을 마치자, 본격적인 결혼 준비에 앞서 미리 인사를 나눈다는 차원에서 성사된 만남이었다. 같은 장소에서 외사촌 동생인 승관 역시 결혼할 알파와 만날 예정이었다. 최 회장의 차남이자, 정한이 남편으로 맞이할 알파의 남동생이 그의 상대였다.  

「아무래도 사고 났나봐 ㅠㅠ 차가 꿈쩍을 안 하네;;」

「그냥 형 먼저 올라갈래?」

물론, 막내는 어떻게 해서든 이 만남을 거부하려 노력하고 있는 듯 하지만. 

'안 한다 했잖아! 그냥 하고 싶은 일 하다가 노년에 실버타운에서 만난 친구들이랑 미니 골프나 치고 놀다가 떠나는 게 내 평생 꿈이라고!'

'누가 지금 당장 하래? 일단 만나서 서로 좀 알아간 다음에 내년이나 내후년쯤 천천히-' 

'아악, 엄마도 누나도 하지 말라며, 결혼!! 해봐야 좋은 거 없다고! 왜 이제 와서 딴 소리?? 나 진짜 노 어이!' 

'어머 얘는, 엄마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외삼촌이랑 외숙모도 진짜 그러는 거 아니예요-! 어떻게 조카를 아들 결혼에 끼워팔 생각을 해?? 핸드폰이고 자동차고 뭐고, 이거저거 다 파니까 하다하다 자식까지 그래도 되는 줄 아나본데, 원쁠원 행사는 마트에서나 하는 거예요, 가족들아! 결혼이 무슨 장사야??'

막내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외할머니 다음으로 집에서 가장 큰 어른인 정한의 아버지, 그러니까 승관에게는 외삼촌인 윤 회장조차도 겨우 한 마디 끼어들 수 있었다.   

'승관이 너, 할머니랑 어른들 다 계신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아무리 오냐오냐 해줬어도 지금 네 태도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심하긴 뭐가 심해- 지금 엄마랑 삼촌이 우리한테 하는 짓에 비하면 암 것도 아니지! 안 그래, 정한이 형?'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부씨 집안 막내인 너는 이미 알파인 맏형도 있고, 사업을 하는 알파 누나도 있으니 걱정할 일이 없겠지. 우린 걸음마를 시작하고 바닥을 기어다닐 적부터 친형제처럼 함께 자랐지만 결국 나와 너는 상황이 다르다고, 정한은 차마 모든 집안 어른들이 계시는 그 자리에서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상석에서 죄인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계시는 제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승관의 편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게 더 승관을 화나게 만들었을 지라도.  

'형도 이 사태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거 아냐. 지금 그 살인마 집안에 형을 팔아넘기겠다는데, 그렇게 가만히만 있을 거야? 혹시 집안에만 틀어박혀 살아서 삶의 의지가 없어졌어? 학교 다닐 땐 1등만 하더니 왜 이렇게 바보가 됐어??'

'관아! 형한테 바보가 뭐야!' 

'내 말이 틀려?? 그 집안, 지참금 때문에 아내 구박하다 결국 죽여버린 집안이야! 어떻게 그런 쓰레기들이랑 결혼시킬 생각을 하는데! 다들 제정신이냐고!' 

'얘가 어디서 근거도 없는 소문을 주워 듣고 와서-'

한 번 올라간 언성은 높고 높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정한은 오가는 고성 속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상상했다. 우수아이아(Ushuaia)의 바다 한 가운데 배를 띄워놓고 갑판 위에 홀로 누워, 무한한 검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오로라의 대향연을 마음껏 올려다 보는 자신의 모습을. 언젠가 꼭 한 번 가고 싶은 곳이지만, 언제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정한의 꿈이다. 가족들 누구에게도, 심지어 가장 가까운 승관에게도 단 한 번 말한 적 없는 그만의 비밀스러운 꿈. 그 상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갑갑하게 옥죄어진 가슴이 살살 풀어지기 시작한다. 후- 아주 작게 벌린 입술 틈으로 응어리 진 숨을 토해내는 정한이었다.       

'다들 그만 해라.'  

그리고 들려온 음성에 정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게 다 내가 못나고 부족한 탓이야. 그러니 책망을 하려거든 모두 나에게 해라.' 

참담한 표정을 하시고 상석에 앉아 계신 외할머니가 마침내 운을 떼신 것이다. 거기에 승관도 금방 깨갱, 바짝 수그러든 태도로 말했다. 

'할머니도 참, 왜 또 그렇게 말씀을 하구 그르실까. 나느은- 아, 그찮아- 팔아치우듯이 결혼시키는 게, 시대가 어느 시댄데. 어? 나도 속상해서 그르지. 할무니 잘못 아니야, 승관이가 잘못했어요.' 

할머니의 말 한 마디에 꼼짝도 못 할 거면서 집안 어른들이며 형제들, 그리고 정한의 속을 박박 긁었던 철없는 막내는 끝끝내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좋아, 형이 그렇게 그 결혼이 하고 싶으면 내가 그 자리 한 번은 나가줄게.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제발 이 결혼 없던 일로 하자고, 미안하다고 그쪽에서 먼저 싹싹 빌게 만들 거야! 형, 누나들 나 개또라인 거 알지! 알지?!'

받아들인 게 맞아? 아무래도 그렇지 않았다. 

정한 역시 완전하게 이 현실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오메가로 발현한 열아홉 살 겨울 이래 10년이 흐르도록 늘상 마음의 준비를 해 왔다고는 하지만, 알파와 결혼하는 것이 윤 씨 집안의 일원으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자 운명이라는 것 또한 부정해 본 적이 없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실감이 안 났다. 

다만 토지, 부동산, 은하그룹 계열사의 지분, 소장 미술품과 같은 물질적 재산, 현금, 채권, 주식… 기타 정한이 미처 생각지도 못 하는 부분에서까지 치밀하게 저울질을 한 끝에 정해진 그의 남편감이 최승철 대표라는 것은, 정한의 입장에서는 조금 놀라웠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도 좋은 상대를 골라주시겠거니 싶었던, 집안 어른들에 대한 믿음에 의구심이 생기게 된 지점이기도 했다. 

'상류 사회에 발을 들이자마자 가차없이 오메가를 처분해 버린 사이코패스 집안.'

신성물산 최 씨 일가를 두고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유가족들은 부검을 요청했는지 안 했는지, 사인이 대체 무엇인지, 무엇 하나 명확한 것 없는, 갑작스러우며 의문 투성인 죽음이었다. 모두가 쉬쉬했으나 그 모두의 입에서 입을 통해 퍼진 소문에 의하면 그것은 지참금 살인이었다. 

평소 사람들 입을 통해 바람처럼 전해지는 말을 그닥 신뢰하지는 않는 정한이다. 그런데 막상 자기 문제가 되니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더라. 사진으로나마 겨우 접한 결혼 상대의 얼굴을 처음 알게 된 날 밤, 정한은 모처럼만에 악몽을 꿨다. 그 뒤로 며칠 간은 통 잠을 이루지 못 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우수아이아의 오로라만을 상상했다.       

물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사를 진행한 경찰 역시 공식적으로 최 씨 일가의 무혐의를 발표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진실로 믿고 싶어하기 마련이니. 가장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상의 삶을 누리는 상류 사회 집단 또한 예외는 아니고. 

팩트이든 루머이든, 국내 기업 100위 권에도 들지 않던 신생 기업 신성물산은 견고한 성벽 안에 들어선 이래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20위 권의 대기업으로 자리매김 했다. 이것은 혼처에 대한 선택을 최 씨 일가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고, 추문과 별개로 최 대표는 고학력에 외모도 상당히 잘 생긴 편이었다. 게다가 동생인 최한솔 역시 형과 같은 우성 알파. 한 집에서 한 명의 우성 알파가 태어나는 것도 극히 드문데,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다. 지참금 살인이 너댓 번은 더 일어난대도 최 씨 집안과 가족의 연을 맺고 싶어하는 집안이 줄을 서 있었다. 그것이 곧 이 나라의 '숲의 디아라' 안에서 자신의 왕관을 지키고자 하는 방법이니까. 세상 참 뭐 같지 않은가? 

그래서 사실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으려는 승관보다 정한이 더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라면, 누구 하나 믿을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혼전 계약이 오가는 그 몇 개월 동안, 결국에는 성 문 밖으로 도망치지 못한 정한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더욱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혼을 할 수밖에 없다. 

슬슬 올라가 볼까? 팔목에 찬 피아제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막 일어서던 정한을 누군가 큰 소리로 불렀다. 

"정한이 형!!!"

승관이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아우, 심장 쪼그라드는 줄 알았네."

"승관아, 너-" 

"얼른 올라가자, 늦겠다."

로비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달려온 승관이 정한을 그대로 낚아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서둘러 갔다. 도망갈 줄 알았던 승관이 제 시간에 맞춰 도착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랄 것이 있었다.

"아싸, 나이쓰 타이밍-" 

정한이 말을 붙일 틈도 주지 않고 승관은 정한을 잡아끌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몇 십 층을 올라가야 하는 고속 엘리베이터 안에는 정한과 승관 두 사람뿐이었고, 둘은 각자 다른 의미로 긴장해 있었다. 

"형 근데 처음 만나는 자리에 머리를 그렇게 하고 간다고? 숙모가 허락했어?"

긴장을 풀어본답시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승관이었다. 전날 미용실에 다녀온다던 정한이 금발 탈색을 하고 나타난 것이 의아해 묻자 정한은 층 수 표시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화사해서 훨씬 낫다던데. 요새 얼굴 너무 칙칙하다구."

"숙모는 진짜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여."

별 내용 아니지만서도 승관과 나누는 대화는 정한에게 역시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호텔 로비에서 승관을 마주친 후 내내 궁금했던 것을 정한은 이때다 싶어 물었다.   

"그러는 넌. 고모가 뭐라 안 하셔?"

"아, 하겠지-"

"근데도 이러고 와?

"아, 이거? 호텔 도착하자마자 갈아입은 거지, 당근!"

승관이 입고 있는 것은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주인공들이 학교를 다닐 때 입고 다니는 마법망토와 교복이었다. 손에는 기다란 나무 지팡이까지 들고 있었다. 진짜 어쩔 생각인 거니, 승관아?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정한이 쳐다보자 승관은 말했다.  

"형, 내가 그새 좀 알아봤잖어. 그 둘째 말이야. 사업적 머리가 최 대표보다 좋대. 형 앞에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최 대푠 아무래도… 그 '소문'도 있었구. 집안에서는 알게 모르게 둘째를 더 미나보더라구."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엘리베이터는 왜 아직도 도착을 안 하고 있는지. 괜히 입안이 씁쓸해져 정한이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렇구나'라니, 형. 지금 내 끝내주는 계획을 형이 아직 몰라서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건데, 알고 나면 형도 무릎을 탁 칠 걸?" 

그래, 어디 나도 한 번 그래 보자. 속으로 말한 정한이 말없이 승관을 쳐다봤다.   

"둘째가 승계 가능성이 높다면 어쩌겠어. 완전 개노답 인생 보여줘서 걔 짝으로는 매우매우매우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게 해야지."

그걸 정말 생각이라고 한 건가? 

"나 주문도 외워왔잖아. 영화에 안 나온 걸루. 어제 그래서 책 읽느라 밤 꼴딱 샜지 뭐야."

딩동- 

가벼운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호텔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문앞에서 기다리던 두 명의 매니저가 정한과 승관을 맞이했다. 

"형, 그럼 이따 봐. 밥 맛있게 먹고!"

승관의 에스코트를 담당한 매니저가 승관을 왼쪽 복도로 안내했고, 정한에게 지팡이를 흔들어 보인 승관이 복도의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정한을 기다리던 매니저 역시 반대편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벽에는 꽤나 값이 나가는 그림이 걸려 있는 고급스러운 복도가 정한은 회색빛 수용소의 것처럼 느껴져 몇 번이고 머리를 흔들었다. 내내 그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소문과 함께 날아가버릴 수 있도록. 

똑똑- 

"네." 

짧게 들린 응답에 매니저가 문을 연다. 정한은 찰나에 숨을 고르며 완전하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 호텔의 최상층, VVIP만 방문이 가능한 스카이라운지를 정한은 여섯 살때부터 드나들었고, 따라서 이곳은 정한에게 있어 너무나도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다. 룸의 문이 열리면 맞은편 커다란 창을 통해 드넓은 하늘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것을 정한은 안다. 주기적으로 바꾸는 생화가 담긴 화병은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의 파브릴 글라스 작품이라는 것도, 룸 안 우측 구석에 과거 승관과 함께 어른들 몰래 한 낙서가 여태 남아 있다는 것도, 몇 해 전 벽에 걸려 있던 마크 로스코가 크게 훼손돼, 위작이 걸려 있다는 것도 모두 안다. 

한 가지 유일하게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 앞에 앉아 있을 최승철 대표다. 세 달 후 저와 함께 식장에서 반지를 주고받고, 평생을 함께하게 될 제 결혼 상대임에도 정한은 그에 대해 아직 모른다.  

'정한아, 평소 하던 대로만 하고 오렴. 예의 바르고 몸가짐 정갈하게. 알겠니?' 

오늘 아침, 정한이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었다. 지금껏 쭉 그렇게 교육 받고 자라온 그에게 어렵지 않은 미션이었다. 특히나 오메가로 발현이 된 이후로는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그저 배운 대로, 시키는 대로, 제 남편이 될 우성 알파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윤 정한입니다." 

소리없이 문이 닫혔다. 불과 테이블 하나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승철과 눈이 마주친 정한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마침내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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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The Golden Bough)⟫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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