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오렌지실종사건上
권순영 김민규
밴드는 원래 해체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다. 농담과도 같은 이 말은 사실 락덕들이 눈물로 새긴 문장이다. 힙합하는 사람들이 SNS로 저격하고 디스곡 써낼 때 밴드맨들은 면전에서 손가락 날리고 주먹질하고 팀 나갔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말을 그보다 더 착실하게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 누구도 남아있고 싶지 않게 되면 팀은 끝난다. 그리고 지금 여기, 끝나기 직전의 밴드가 하나 있다.
“관둬. 네 맘대로 해라 독재자 새끼야.”
악의 가득 찬 말에도 권순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더욱 열이 받았는지 상대는 가운뎃 손가락을 힘껏 치켜들었으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 순간 본인의 찌질함과 초라함이 극대화 되었으므로 김민규는 작게 혀를 찼다. 등신. 그냥 조용히 가지. 지난 주에 드럼이 그랬듯이. 그러나 그런 것을 바라기에는 베이스라는 포지션 치고 온갖 겉멋이 다 든 이였다. 웬만하면 나서서 변호를 했을 김민규도 두 손 다 들게 만드는 상황에 대한 나쁜 판단력은 둘째 치더라도. 아무도 저를 붙잡거나, 말리거나, 심지어는 질타하지도 않는 상황이 꽤 민망했던 베이시스트는 결국 도망치듯이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쿵쿵대는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연습실에는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도 남은 것은 김민규 하나였다.
밴드 실종된오렌지는 보컬 권순영을 프론트맨으로 삼은 팀이었다. 이름 역시 권순영이 장을 보러 갔다가 사온 오렌지가 사라진 사건에서부터 유래되었다. 내 오렌지 어디갔지? 무슨 오렌지를 잃어버리냐. 아 이상하네. 이거 완전 오렌지 실종 사건이야. 권순영은 그 오렌지를 다음 날 연습실 바로 앞에서 찾았는데 사실 그건 오렌지가 아니라 석류였다. 그리고 당시 밴드 멤버(현재는 탈퇴했다)의 메모장 귀퉁이에 적혔던 이 사건은 이후 드럼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실종된석류는 어감이 이상하다는 주장 하에 실종된오렌지로.
김민규는 엄밀히 따지면 실.오.의 원년 멤버는 아니었다. 그는 밴드가 결성되고 반년 후 공석이 된 기타리스트 자리에 들어왔다. 그리고 2년 동안 권순영 다음으로 오래 버틴 멤버가 되었다. 권순영은 실종된 오렌지 그 자체이니 실질적으로는 유일한 원년 멤버 취급이었다. 그럼 여기서 첫 번째 의문, 왜 다들 버티지 못 했는가? 여기에는 명쾌한 해답이 존재한다. 권순영 때문이다. 이 세계가 권순영이 아이돌 연습생이 되고 독기 가득 찬 채 악바리로 연습을 하다가 멤버들을 만나 점점 성장하여 과거를 농담처럼 여길 수 있게 되는 세븐틴 세계관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의 권순영은 그런 길을 걷지는 못 했다. 권순영의 예민함을 가라앉혀줄, 구체적으로 윤 모 형이나 이 모 친구, 전 모 친구를 만나지 못 한 세계관이라는 뜻이다. 그 중에서도 운이 안 좋은 버전인. 독기는 가득 차 있는데 눈에 차는 사람은 없자 권순영과 멤버들 사이의 불화가 커졌다. 그리고 나가는 것은 언제나 상대였다. 권순영은 그가 곧 밴드였으므로.
다음 날까지도 연습실은 고요했다.당연한 일이다. 드럼과 베이스가 일주일 간격으로 팀을 떠나갔다. 권순영은 대부분의 악기를 다룰 줄 모른다. 김민규는 제가 꼭 벌 받으러 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따지자면 본인은 권순영이 내리는 벌 가운데 살아남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문고리를 돌리면 권순영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김민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짓으로 인사를 했지만 그뿐이었다. 김민규는 한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형.”
“…….”
“권순영.”
“…….”
“야.”
결국 김민규는 권순영의 어깨를 툭툭 친다. 손에 실린 건 무게가 아니라 짜증이다. 권순영은 이어폰을 한쪽만 빼고 눈썹을 치켜떴다. 왜.
“왜? 그게 지금 할 말이야?”
“갑자기 왜 시비야.”
“이게 갑자기야? 밴드에 우리 둘만 남은 게 더 갑작스럽지 않아? 대체 언제까지 사람들 다 쫓아낼 거야 형은.”
밴드가 하고 싶긴 해? 그렇게 말했다가는 권순영이 진짜 한 대 칠 것 같으므로 참았다. 거기까지 하지 않아도 권순영은 이미 충분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얼굴이었다. 탈퇴한 베이시스트가 했던 말 중 단 하나 맞는 말이 있다면 권순영이 독재자라는 것이므로 김민규는 냅다 전략 바꿔 애원했다. 아니이, 형. 우리 공연 얼마 안 남은 거 알잖아. 걔네 때문에 성질 난 거 다 알겠는데 좀 참으면 안 돼? 이젠 진짜 사람 구하기 힘들단 말이야. 잉잉징징 대는 김민규 얼굴에 권순영은 콧방귀나 뀌었다.
“제대로 하지도 않는 애들을 왜 남겨놔야 되는데.”
김민규는 그 말이 정말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여기서 두 번째 의문. 김민규는 어떻게 2년을 버텼는가? 김민규가 실력이 좋아서? 권순영의 마음에 들어서? 꿈 깨시지. 밴드에서 탈퇴 안 한 것, 그것이 김민규의 악과 깡이었다.
사실 김민규가 남 겉멋 들었다고 비난할 처지는 아니었다. 김민규는 전형적이게도 여자 꼬시려고 기타를 배웠다. 그리고 초보 수준에서 간신히 벗어났을 때쯤 친한 형의 급한 연락을 받고 대타를 뛰었다. 그것이 권순영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김민규는 무대 위를 날아다닌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주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그는 아주 전통적인 스타일의 프론트맨이었다. 무대를 휘젓는 강렬한 쇼맨십과 파워. 무대를 부숴버리겠다는 멘트에 맞춰 정말로 바닥을 부순 권순영은 아드레날린의 화신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게 어떻게 느껴졌냐면, 좀, 재밌었던 것 같다. 권순영이 초면인 제 앞에서 무릎꿇고 기타 핸드싱크를 했을 때 김민규는 머리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 이건 단순한 흥분감이 아니라 쾌감이다. 귀를 펑, 터뜨리는 것이 도파민인지 락 사운드인지 김민규는 알 방법이 없었다.
“민규라고 했나? 오늘 수고했다.”
“넵. 형도 수고하셨어요.”
김민규가 고개를 숙이자 권순영이 어깨를 툭툭 쳤다. 오늘 와줘서 고맙다. 처음이라면서 떨지도 않더라 너. 별 것도 아닌 말에 김민규는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그러나 고개만 들어 마주한 순영의 얼굴은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고맙다면서 저 표정 뭐지? 힘들어서 그런가? 김민규가 고민하는 사이 권순영은 지체하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멤버들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제게 보인 태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만약 김민규가 속 배배 꼬인 인간이었다면 어 저 인간 뭐지? 열 받네?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김민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심지어 남들보다 긍정적이라 그냥 저 형은 낯 많이 가리는 성격이구나 하고 말았다. 사실 권순영이 고마운 것과는 별개로 김민규가 호감 아니어서 그랬다는 것은 나중에 밴드에 정식으로 영입 되고 나서 알았다.
권순영은 김민규 꾸준히 안 좋아했다. 삑사리 나면 눈에 불을 켜고 째려봤고 허세라도 부리면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저에게 호의적인 사람에게 둘러쌓여 온 김민규는 저를 싫어하는 사람에 연연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실종된오렌지의 멤버로 들어온 이상 권순영을 무시할 수는 없어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좀 받았다. 그런 와중에 권순영은 솔직해서 김민규가 저를 싫어하냐 묻자 쉽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참 보통은 아닌 사람이었다. 사실 그 대답에 입술 삐죽이며 이유를 묻는 김민규도 보통은 아니었다.
“잘하지도 않으면서 허세는 다 부리고 뺀질대서.”
그러나 이건 좀 상처였다. 김민규는 나름 괜찮았고 나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권순영 기준에 한참 못 미쳤기 때문이다. 김민규는 배운 시간 치고 잘 치는 거지 훌륭한 기타리스트급은 아니었고 꾸준히 연습하기는 해도 제 하루를 모두 갈아넣지는 않았다. 근데 권순영은 나름이 아니라 정말 잘하고 정말 열심히 하니까. 그것이 권순영의 독기였다.
그러니 권순영이 김민규가 밴드 들어온 바로 그 순간부터 그가 나가기를 염원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권순영이 예상 못한 것이 있다면 김민규는 독기는 권순영의 것과는 작동방식이 완전 다른 것이라는 점이었다. 김민규는 주눅들지 않는 천성을 타고 태어났고 산뜻한 행실과 달리 인내심이 있는 편이라 권순영 보란 듯이 밴드에 다리 펴고 누웠다. 그렇게 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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