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시간과 공간 사이 / 외전
오랜만에 남매끼리 마시는 술자리였다.
물론 국가 공인 성인이 못된 나는 홀로 포도와 비슷한 맛이 나는 과일로 만든 주스만 홀짝였다. 아직 음주를 못하는 건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먹으면 불법인데. 내가 참아야지.
르이션도 원래는 자야 할 시간이었지만 웬일로 하도 고집을 부려서 나와 함께 주스를 마시는 걸로 타협했다. 평소에는 말 잘 듣는 착한 애인데 밤에 누구와 대화라도 한다면 꼭 끼어들려고 했다. 이때 고집은 아무리 나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휄은 마법으로 재우면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그것도 학대라는 넌체의 말에 금방 입을 다물었지만. 그리고 거기서 더 했으면 풀 스윙으로 등짝 스매쉬를 날렸을 것이다. 어딜 애한테, 떽.
동생들의 배우자들한테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낯을 가리나 싶었지만 마도사협회장 아내와 국서, 재상의 남편이 그런 일로 거절하진 않을 것 같은데…. 나를 경계하는 게 가장 큰 이유 같기도 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자기 가족(특히나 나라의 중추 세력)과 남매라고 하지 않나. 그것도 제일 어려보이는 나에게 누나, 언니라고 부르니 더 수상해보일 수 밖에. 역시 한달 가지고 친해지기는 힘들 것 같다. 높은 지위이니 그런 반응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큰일을 하는 사람이 단순해서는 안될 테니까. 그래도 친해졌으면 좋겠다. 이제 내 가족은 여기뿐이니까.
그렇게 갓 시작한 자리에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만 하다가,
“‘밴드’가 뭐야?”
나에겐 이미 과거가 되어버려 잊고 있던 단어 중 하나가 위대하신 황제 폐하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왔다. 네가 이걸 어떻게 알아? 놀라서 [예나, 선정이 딸이에요] 될 뻔했잖아.
“언니가 어제 잠결에 말하더라고.”
…어젯밤 방에 불법침입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구나. 성장통이 올까봐 하는 걱정과 정말 옛날의 나인지 하는 의심에서 나오는 행동이라 이해는 하겠지만, 좀 섬세하게 대해줄래. 언니 상처받는다.
놀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바로 이유를 설명하자 다른 동생들도 듣고 싶은지 컵을 내려두고 날 쳐다봤다. 동생들이 의심하고 있단 사실에 뿌듯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심란하지만 그들 또한 이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덤덤하게 받아드리기로 했다.
잘 자랐네. 그렇게 작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뭐라고 해야하지…몇 명이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임?”
“므쉬렝 같은 건가?”
오페라 같은 걸 말하는 건가?
“므쉬렝은 뭔데?”
“악단 중에서 제일 수가 적은 무대인데, 최소 10명에서 최대 50명까지 해.”
오케스트라에 가까운 것일 수도.
“그것보다 훨 적지. 4, 5명 정도 해.”
다들 그걸로 되겠냐는 표정을 짓고 있다.
된다, 이 부르주아들아. 유명한 그룹은 10만명도 들어가는 홀에서 콘서트도 한단다.
오랜만에 밴드곡도 듣고 싶네. 제일 많이 들었던 게 중학교 때였는데. 커서는 점점 듣기 힘들어져서 최근에는 아이돌 노래만 들었었는데. 이제는 들어도 힘들지 않을 것 같은 근본 없는 자신감이 생기고 있으니.
음질 좋은 물건 놓으면 괜찮다는 말에 납득하는 것 같았다. 스피커나 그런 건 있는 모양인데, 한 번 봐야지.
“…주제가 튄 같은데.”
아. 음악 관련에 관심이 많아서 그만….
막내의 조용한 일침에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말은 꺼내는 데 필요한 마음은 시간도 어찌 할 수 없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힘드니 말이다. 시간이 아닌 그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고칠지 더 헤집어놓을지는 알 수 없지만.
“…중학교 때 실종됐다는 친구 기억해? 꽤 예전에 말했었는데.”
“처음 실종됐다고 들었을 때는 놀랐었지. 그 전엔 헤어질 때조차 친구들 얘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친구가 왜라며 물어보는 두 명, 납득한 표정이 두 명, 멀뚱히 보는 사람 한 명. 사람심리에 예민한 사람과 신경도 안 쓰는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딱 나뉘었다. 아무래도 처음 둘은 귀족사회에 있으니 민감해질 수 밖에 없긴 하지. 마탑은 속세와 좀 동떨어져있긴 하고, 기사단도 비슷한데 기사단장은 그러면 안되지 않나?
르이션한테는 어깨를 토닥이며 다음에 설명해주겠다고 하려는 순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떻게 알아듣는 거야? 신기하네.
“그 친구가 밴드 곡을 좋아했어서, 친구들끼리 밴드 만들자는 얘기를 했었거든. 그게 다야.”
그러자 나머지 두 사람도 이해한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이는지 자세한 이야기로 들어가진 않았다. 어찌저찌해도 다들 친절하니까. 이래서 일이 끝난 후에도 같이 있는게 좋다고 조언해줬을지도 모른다. 아님 친구와 닮은 그의 말이라서 마음에 새긴 것일 수도. 툭 하면 귀찮아하고 한없이 가벼워보였지만 부모님을 닮아 심지가 굳고 정의로웠던 내 친구를.
“누나는 다룰 수 있는 악기 있어?”
“난 드럼이었지. 타악기의 일종인데 박자를 주로 다뤄.”
“어떻게 생긴 건데?”
그렇게 실컷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무슨 악기가 있는지, 명칭만 다르고 똑같은 악기가 있는지, 누가 더 노래를 잘 부르는지 등등. 뒤에 가서는 술이 들어가서 취객들의 재롱잔치처럼 됐지만 즐거웠다.
물론 난 진짜 안 마셨다. 불덩이가 권했을 때는 조금 끌렸지만, 잘 참았다. 우리 중에서는 킷이 제일 잘 마셨다. 솔직히 한 마디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위치이니 알코올분해마법 같은 걸 걸어놓지 않았을까. 제일 최약체는 우리 불덩이였다. 별명같이 얼굴이 시뻘개져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노래(라고 쓰고 소리라고 읽는다)를 질렀는데, 마법을 안 쓰는 게 어딘가 싶었다. 사용했다면 우리를 포함해서 이 성 전체가 숯이 됐을 테니까. 울보가 두번째로 술에 강한 건 예상외였지만 재상이라서 금방 납득했다. 취하긴 해서 계속 실실 웃었다. 막내는 얼굴에 하나도 티가 안 났지만 슬그머니 내 품에 파고 드는 걸 보면 취한 게 확실했다. 크기 차이가 거의 2배라서 내가 안긴 꼴이 됐지만. 르이션이 떼어놓으려다가 힘으로는 안돼서 포기하려던 찰나에 살짝의 틈을 보고 쿠션과 바꿔치기했다. 넌 절대 소매치기하지 말아라. 전설이 되면 안돼.
주정뱅이들의 혼란이 계속 되다가 마중을 나온 가족에게 혼났다. 킷이랑 넌체는 무난하게 넘어갔지만 휄을 등짝을 맞는 등의 재미난 장면을 구경시켜줘서 고마웠다. 거의 술 취한 아들 패는 어머니같은 모습. 정겨운 모습에 그저 웃음이 났다. 짝을 잘 만났네.
술이 들어가는 자리라서 사이가 더 돈독해진 것 같다. 기분탓이 아니라 헤어질 때 보인 시선은 믿음에서 비롯되는 눈이었다. 다음에 보자는 목소리는 들뜸이 섞여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무언가가 된 후로 보통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걸 느끼게 됐다. 그렇다고 전부 아는 건 아니고, 겪었던 것들을 눈치채는 게 빨라졌다.
“이제 들어가죠.”
그래서 르이션의 생각을 모르겠다. 처음 보는 감정. 호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임은 확실하다. 언젠가 날 덮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슈그라니씨?”
“…들어가자.”
함부로 물어보지도 못한다. 섬세할 시기인데 잘못 물어봤다가 사춘기가 오면 어떡해. 심지어 첫만남 때의 모습으로? 난 그 짐승을 다신 감당 못한다. 그렇다고 다 큰 다음에 물어보면 이미 늦을 것 같고. 어떡하지….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르이션에게 그 친구에 대해 말해주었다. 한 번 입으로 꺼내니 그나마 말하기 수월했지만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이야기하는 동안 좋은 추억들도 같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수다 떨던 일, 셋이서 같이 하교하던 일, 주말에 집에 놀러갔던 일.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내용이었지만 그는 조용히 내 말에 집중해줬다. 중간에 힘들어지면 질문도 해주면서 조금이나마 환기를 시켰다.
“그럼 그 친구분들은 그 후로 못 만난 건가요?”
“처음 한 명은 그렇지. 다른 애는 가끔 연락해줬어.”
몇 개월에 한 번씩 SNS로 ‘난 잘 지내. 너도 잘 지내지?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이라는 말 뿐이지만 해주는 게 어디야. 그리고 정말 가끔 뉴스에서도 얼굴을 보기도 하고. 워낙 유명인사라서 모를 수가 없다. 비록 제일 최근 연락이 애인 생겼다는 소식이라서 얼마나 놀랐던지. 질문 폭탄을 던지고 답장을 기다리다가 여기로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게 한이 되버렸다. 잘 살고 있단 소식이 기쁘지만 연애 한 번 안해본 친구의 연애설은 궁금하긴 마찬가지니까. …걔도 엄청 궁금해할텐데.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르이션이 갑작스레 멈춰서 쳐다봤더니 직설적인 질문이 들어왔다. 약간의 집착과 슬픔이 가미된, 불안이 가득한 얼굴. 내가 원한다면 자신은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얼굴을 하며 눈을 맞추고 있었다.
“이미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무슨.”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싫은지 미간 사이를 좁혔지만 피하지 않는다. 그래도 곧 피할 것 같아 먼저 손을 거두고 다시 갈 길을 걸었다.
과거에 얽매인다고 바뀌는 건 하나 없고 시간은 흐르며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었기에 멈춰있을 수 없다. 보이는 그 길이 짧아도 되돌아갈 수 없다. 지금까지 온 길에 미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뭐라도 하고 싶다면 앞을 바꿔야지.
시간이 고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정작 고치는 건 내 자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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