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시간과 공간 사이 / 외전
“누나! 저기 무지개!”
“…누나가 아니라 이모.”
지금까지 한 7번 정도 고쳐줬는데, 앞으로도 몇 번을 정정해야 호칭이 정해지는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외관이 이모라고 부르기엔 너무 젊은 모습이지만 이래보여도 네 어머니의 언니란다. 네 어머니와는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여있어서 닮은 곳이라고는 하프라는 점뿐이지만, 이 의형제의 끈은 서로가 도를 지나친다고 해도 낡고 해진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됐을까.
“무지개는 왜 생기는 거예요?”
“정말 신께서 성인을 선택할 때 나타나는 거예요?”
“아냐! 새로운 신자가 태어날 때 나타나는 거랬어!”
애들을 돌보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귀여운 조카들이니 마다할 소냐. 그저… 나 혼자 보기에 7명은 조금 많지 않니, 우리 머리 좋고 질투심 많고 까다로운 깜찍이 불덩이 둘째 남동생분? 이 누나는 돌보기 시작한지 30분도 안됐지만 도망치고 싶어졌다. 살려줘, 제발.
“슈그라니씨를 당기지마! 억지로 당기면 불편해하시잖아!”
그래, 날 생각해주는 건 르이션뿐이구나. 하지만 이름으로 불러주지만 않으면 완벽할 것 같은데, 이 아줌마가 너무 많은 걸 바라니? …미안해.
그렇게 남매에게 고통받던 두 팔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조금 떨어져있던 여자애가 급하게 다가와서 오른쪽 소매를 살짝 잡아왔다. 큰 언성에 놀랐지만 기댈 수 있는 어른이 그 중심에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런 겁 많은 부분은 자기 아빠와 똑 닮았네. 물론 그 넷째 동생은 장성해서, 명칭 정정에도 큰 타격이 없는 아들의 어머니이자 큰인물이 된 셋째와 저쪽 탑에서 근무중일 테니 날 버린 건 막내를 빼고 다 똑같았다. 물론 그 막내는 언제 결혼할 건지가 조금 걱정이긴 했지만 자기 인생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안하면 또 어떠한가, 어떻게 하든 자신의 자유니까.
그 순간, 울 것 같은 칭얼거림에 바로 몸을 돌려 이 곳 최연소에게 다가가서 한 팔로 그를 안아주었다.
“죄송해요, 저로는 역부족이었나봐요….”
“괜찮아. 너도 아직 어리니까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날 도와주겠다면서 작은 몸으로 더 작은 아기를 달래고 있었으니 고생했다고 남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조금은 안심했는지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그래야지. 아이가 아이를 돌보는 상황이 당연해서는 안됐다. 그건 어른의 몫이니까.
자신이 대신 안겠다는 르이션을 뒤로 한 채 근처 벤치에 앉자 다른 아이들도 쪼르르 따라왔다. 그러더니 잠깐 멈칫하며 서로 눈을 맞추고는 자리가 정해진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방금 기선을 제합해서 자리싸움 한 거야? 요즘 애들 무섭다. 특히나 제일 먼저 만족하는 미소로 내 옆에 앉는 르이션이 제일 섬뜩했다. …살려주시라요.
“내가 알기로 무지개는 빛의 구ㄹ…아니, 되게 어렵게 배웠는데, 그게 원인이 아니더라고.”
“그럼 무지개는 왜 생기는 건가요? 역시 신 때문인 건가요?”
자신들이 하던 이야기가 이어지자 눈싸움으로 신경전을 벼르고 있던 남매가 눈에 빛을 한가득 담고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둘의 싸움 때문에 의견을 못 내고 있던 아이들도 꽤나 궁금해하고 있었는지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한 정령이 태어날 때 생기는 거란다.”
“무슨 정령인데요?”
“꿈의 정령.”
내 한 마디에 모두가 눈을 크게 키웠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많은 몇 명이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봤고, 아직 조금 어린 애들은 신기해하는 게 얼굴에 다 들어났다. 어린이들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협조하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둘을 보며 친근감을 느꼈다. 나도 걔들에게 들었을 때 저런 얼굴이었겠지….
“꿈의 정령이 생기면 무지개가 생기고, 그 정령이 사라지면 원형 무지개, 즉 해무리가 생기지.”
“무지개와 무슨 연관이 있나요?”
관심 고맙다, 황자님. 잘못 부른 건 용서해줄게.
“여러 색을 가진 무지개가 한 꺼번에 생기는 건 누군가에게 정말 이루고 싶은 꿈에서 정령이 태어날 때 생겨. 그 꿈이 점점 이루어질 때마다 끝이 길어져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게 되면 해무리가 돼서 사라지는 거야.”
이 한 마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이 곳에 없다는 것은 확실히 느껴졌다. 끙끙대며 열심히 고민하는 모습이 성장의 일부분같아서 기특해보였다. 슬슬 설명을 해주려 입을 떼자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게드리히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서 편히 말하라고 지목해줬다.
“시작과 끝이 동일해진다는 건 결국 제자리걸음이니 실패만 사라지는 게 맞지 않나요?”
자신의 생각을 잘 전했으니 전과 동일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르이션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으로 쳐다봐서 묻자 고개를 저었다. 싱겁긴.
“처음에 바랬던 꿈에 도착하는 거니까 성공도 존재하는 거지. 무지개의 길이가 꿈을 향했다는 증거인 셈인 거야.”
“…그럼 성공과 실패도 자신이 정하는 거겠군요. 정령의 생명 또한 마찬가지겠고요.”
여기서 연장자 중 한 명인 르이션도 금방 도달하는 것 같다. 역시 둘 다 사고력도, 이해력도 남들보다 뛰어나다니깐. 기쁜 마음에 2번째로 머리 쓰다듬으려니까 제재당했다. 전에도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는 게 싫은 건가? 어린애 취급이 싫은 걸 수도….
“그렇지. 꿈이 이루어졌는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으니까. 이루어져서 사라지든, 이루지 못해서 사라지든, 꿈이 끝나면 정령도 사라지는 건 똑같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이 몇몇 보여서 부가 설명을 했더니 울상으로 변하거나 고개를 살짝 떨구게 되었다. 정령이 사라진다는 소리에 슬퍼진 모양이었다.
“사라진다고 해서 죽는 게 아냐. 꿈의 기간이 끝나면 정령계로 돌아가거나 꿈이 생긴 다른 사람을 찾아가지.”
“그럼 꿈만 있다면 누구나 정령을 만날 수 있나요?”
“어떤 꿈인지는 상관 없나요?”
“꿈의 정령은 어떻게 생겼어요?”
내 말에 다시 밝아진 표정으로 질문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정신 없어서 일단 진정시키고 대답하고 있자니 내 동생들이자 아이들의 부모들이 찾아왔다. 벌써 그런 시간이었나 했더니 오늘은 첼의 밤이란다. 2년 주기로 오는 낮이 짧고 밤이 긴 날. 내가 여기에 온지 4년 정도 됐나? 시간은 빠른데 내 성장속도는 느려서 서럽다. 소문으로만 듣는 성장기가 빨리 왔으면 좋겠지만 죽을 수도 있으니 무섭기도 하다. 걱정이네….
다른 사람들을 배웅하고 르이션과 함께 서쪽탑으로 향하고 있자니 아이가 입을 열었다.
“…오늘 말씀하신 무지개와 꿈의 정령 얘기는 사실인가요?”
내가 했던 동심 가득한 이야기에 관심이 생긴건가 했지만 눈을 보니 순수한 호기심에 묻는 것 같았다. 하긴, 네가 정령술사도 아니고 이런 내용에 흥미를 느낄 리 없지. 3년간 같이 다닌 르이션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 확인까진 못했지만 확실해. 아이들의 동심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야.”
“…그렇군요.”
“그리고 거짓말을 그렇게 쓰면 안 좋지. 나중에 내가 거짓말쟁이로 몰릴 수도 있고, 그 애들이 다른 사람들한테 거짓말쟁이라고 들을 수 있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애들한테는 비밀을 만들지언정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대로 믿기 쉬우니까.
“그럼 언제 거짓말을 하나요?”
“그 사람을 위한 거짓말.”
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벌써부터 그러면 다 커서 인상 나빠진다.
…타인을 위한 거짓말을 해도 된다면서 동심을 위한 거짓말이 안되는 게 이해되지 않는 거겠지. 산다는 게 전부 명확할 수 없으니까. 나 또한 다신 없을 내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진 이유도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게 되더라도 알지 못하겠지만. 이 일이 끝나면 알 수 있다. 그런 대가였으니까.
그러니 강해져라, 르이션. 인생이란 게 어찌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법이니까.
“그건 그때 가서 알 거야.”
대화하고 있으니 금방 방에 도착했다. 옆방인 그 아이에게 인사하려고 봤더니 어느새 평소의 미소로 돌아와있었다.
“그럼, 내일 보자.”
“네.”
그렇게 방으로 들어갔지만 할일이 없었어서 금방 잠들었다.
그가 정령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그 시기에 꿈의 정령을 데리고 있다는 점도, 나를 향한 감정을 본격적으로 숨기기 시작했다는 점도 알지 못한 채.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몇 년 후, 전쟁에서 돌아와서 참석한 승전파티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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